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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길을 묻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집 앞으로 신작로가 있었다. 맑은 날이면 길가의 먼지가 신작로 아스팔트 위로 달려들었다. 저녁 무렵 이남박에 쌀을 팔아 오시던 서른여섯 어머니, 그 뒤를 따라오던 신작로는 늘 마른 바람이 불었다. 팔아온 쌀로 이남박에 물을 받아 부지런히 씻으시던 어머니는 건강했고 따듯했다. 그 따듯함은 넉넉한 국이 되거나 따듯한 밥이 되어 다섯 아이들의 숟가락을 채웠다.

 

차들이 많던 시절은 아니었어도 차들은 부지런히 속리산 방향으로 달렸다. 이따금 어느 집 아이가 차에 치였다는 말이 들렸고,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아이의 사연은 늘 극적인 안타까움이었다. 그 안타까움이 절절할수록 할머니는 신작로에 나가지 못하게 하셨다. 외아들인 아버지가 위로 누이 둘을 낳고 얻은 아들이 나였으니 신작로로 나서지 말라는 할머니의 염려와 경계는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기억 속의 나는 집 앞에 앉아 신작로를 질주하는 트럭이며 승용차들에 넋을 빼앗길 뿐이었다. 서울로 이사 와서는 곳곳이 신작로였지만 누구도 그 길을 신작로라고 부르지 않았다. 서울 골목들은 똑같이 생겨서 마치 도시 전체가 나를 가두거나 놀려주려는 것만 같았다. 유난히 길을 잘 잃어버렸던 나는 청주 살 때나 서울에 올라와서도 이사하는 곳마다 번번이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을 때마다 할머니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신작로가 두려울 나이도 아니고 길을 잃을 나이도 아니지만 떠나지 못했다. 마음은 늘 낯선 이름의 고장을 자전거로 달리거나 걷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는 나보다 더 겁쟁이였다. 여행다운 여행을 제대로 떠날 수 없는 조건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질 뿐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린 떠난 것이다. 신작로보다 더 크고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아내와 함께 어린 아이들 둘을 데리고 남루한 짐을 꾸리어 떠난 것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꼭 이루겠다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부지런히 자라고, 그들이 자랄수록 함께할 시간이 더욱 없어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한국에 돌아오고 나면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분주할 것인데, 언제 이렇게 온 가족이 3주간 여행을 해볼 수 있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소박한 것은 생각뿐, 계획을 짜고 경비를 마련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다 돌아보지 못했는데 낯선 남의 땅을 굳이 횡단까지 해야 될 이유는 무엇이냐? 횡단계획이 구체화될수록 그만두어야할 이유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러다가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 꼭 해보자고 서로 다독이며 무모하게 출발했던 횡단이었다. 가는 곳마다 온통 낯설었고, 낯선 만큼 어려웠지만, 정확히 그만큼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낯선 길 위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우리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미국은 언제나 막연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미국은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과 어긋나 있었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할 뿐이었다. 더구나 이 터무니없이 큰 나라는 좀처럼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미국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갈수록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만 매순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횡단여행을 통해서 미국의 가장 아픈 역사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아주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책으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의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중부를 지날 때 만났던 집 앞의 거대한 십자가와 집집마다 걸렸던 성조기의 의미를 이제 겨우 짐작하게 되었다. 더할 수 없이 부러웠던 것들과 또 그보다 더 많이 걱정스러웠던 것들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 책에서 조금 무모하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이 책은 미국 횡단 여행의 기록이다. 그토록 바라보기만 하던 어린 시절의 신작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길을 참 오랫동안 멀리 달려온 기록이다. 시간적 여유나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달린 만큼 보고, 본 만큼 생각하고, 생각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출발했던 무모한 도전의 기록이다. 무모한만큼 거칠고 성길 수도 있겠지만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다녔다. 이 책은 지독히 낯설거나 너무도 낯익거나 한 것들이 내게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혼잣말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지 기록하는 내내 두려웠다. 독자들의 눈을 밝혀줄 깊이 있는 식견이나 감성을 울릴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라 출간이 더욱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기억의 휘발을 막기 위해서 그날의 기록을 꼼꼼하게 남기는 아내의 일기와 가는 곳마다 챙겨온 아이들의 풍성한 자료 그리고 매일 소심하게 기록해두었던 나의 A4 50장 분량 메모의 진솔함을 믿기로 했다. 1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지만 그 수준은 1만 번의 부끄러움이 되었을 뿐이다. 그중에 겨우 분간할 수 있는 것들만 책에 실었다.


이 책은 떠나기 전에 기획된 것이 아니다. 횡단 여행을 시작한지 이삼일 될 무렵 페이스 북에 올린 거친 글을 좋게 봐주신 분들이 여행기를 꾸려보자고 제안을 했고, 얼떨결에 그러자고 하다가 일이 커졌다. 이 책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충실한 여행을 하게 되었고 불확실한 기억이 아니라 소박하게라도 기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기록된 언어는 내 것이 없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것에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기웃대서 가져오지 않는 곳이 없다. 그들의 사랑이 고여서 언어가 되고, 난 단지 거칠게 기록했을 뿐이다. 부족한 것은 내 기록이고 넘치는 것은 그들의 언어다.

 

201112

Irvine에서 汎山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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