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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나 내가 아니거나 혹은 둘 다 이거나

 - 클로에 크뤼쇼데, 여장남자와 살인자》, 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고 싶은 절실함이 살아 내야할 척박함을 견딜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다. 살아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살아 내야만할 사랑을 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이 지우는 것이다. 클로에 크뤼쇼데는 여장남자와 살인자에서 이 둘을 다 보여준다. 삶 그 자체로 아름다운 화양연화(花樣年華)에 죽어도 좋을 사랑을 만나 결혼하고, 결혼과 함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루이즈와 폴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여장남자와 살인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에세이를 클로에 크뤼쇼데(Chloe Cruchaudet)가 고혹적인 그림으로 전환(adaptation)한 수작이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압도도 대단하지만 그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프레렐(Frehel)의 샹송에 맞추어 춤을 추는 루이즈와 폴의 모습은 그림으로 표현한 음악이고 춤이다. “우리만의 춤을 추면되죠.”라는 폴의 대사와 프레렐의 노래 <그는 진짜 남자>는 마치 대구를 이루며 그림과 조화를 이루어낸다. 루이즈와 폴은 물론 악사들까지 매순간 다른 표정으로 몰입해 있고, 각기 다른 크기와 자세의 춤 그리고 동선은 그 안에서 완급을 읽을 수 있고, 섬세하게 묘사된 땀방울만으로도 둘의 뜨겁고 행복한 순간을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림1>은 각각의 그림이 칸의 역할을 하며 동시에 두 페이지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구조이다. 각 칸의 역할을 하는 그림과 전체 그림의 조화, 그들이 빚어내는 유려한 역동성 그 마디를 찍어주는 루이즈의 붉은 치마는 매혹적이다.

클로에 크뤼쇼데, 여장남자와 살인자》, 미메시스 중에서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참전하게 되고,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동료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며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탈영하는 폴의 모습은 절박하고 단호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 무의미한 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 탈영을 감행하는 폴의 모습은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 <콜드마운틴>에서 인만의 그것과 닮았다. 탈영한 폴은 파리에서 숨어 지내다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스스로 여장을 선택함으로써 손가락을 끊었듯, 총을 버렸듯 남성성을 은폐하거나 포기한다. 남성성기 상징인 손가락이나 총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생계를 아내에게 의탁함으로써 사회적 남성성을 포기하고, 오히려 여장을 하고 여성들의 일터에서 일하고 그들과 어울리며 남성과도 관계를 갖게 된다. 전쟁이라는 남성적 질서로부터의 도피(폴의 선택이라지만)로 인하여 생물학적인 성을 은폐하고 복장이나 생계와 같은 사회적 성역할과 남성적 성정체성 등의 혼란 속에서 볼로뉴 숲의 극단적인 섹스와 변태적 섹스 사이를 오가는 그래서 아내와의 불화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쉬잔()의 일탈은 진정한 해방에 이르지 못하고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폴은 10년만에 사면으로 더 이상 자신의 성적정체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지만 쉬잔이라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혼란스러운 관성과 전쟁으로 인한 극도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루이즈와 자신을 괴롭힌다. 술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성적인 혼란과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한 환영에 시달리는 모습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내재화된 충돌의 양상이다. 작가는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폴이 숨은 곳은 자기 안에 있던 여성성의 퍼스나 뒤였지만, 폴에게는 목숨과 같은 사랑 루이즈가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여성성을 전면화할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의 예정된 충돌을 어둡지만 관능적으로 매료시키고 있다.

거시적인 담론의 부담스러운 명분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고,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의 젊은이들을 가장 참혹한 현장으로 내모는 폭력적인 상황을 거부할 수 없었던 평범한 젊은이의 비극적인 응전의 기록을 작가는 연민과 도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지독한 이야기를 클로에 크뤼쇼데 특유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애무하듯 글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아름다운 고집은 텍스트 곳곳에서 관능적인 모습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수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그림의 미학적인 압도를 반드시 눈여겨 보아야할 이유다. 그 미학적인 압도 사이에서 볼로뉴 숲의 성적 일탈이나 폴의 또다른 퍼스나 쉬잔으로서의 자유가 빛나고 있음도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지극히 남성적인 전쟁이라는 맥락위에서 개인의 저항 가능성의 메파포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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