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과 당연하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X맨을 찾아라>가 인기다. 사실 X맨을 찾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재미는 있는 모양이다. X맨은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게임에 고의로 져주면 된다. 출연자나 시청자의 심리 게임을 유도함으로써 재미를 유도한다는 의도지만, 사실 그 즐거움의 실체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이 공인된 속임이다. 속인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감추고 찾아내는 사이의 긴장을 즐기는 것이다.

<X맨을 찾아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당연하지 게임이다. 이 게임의 원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물을 수 없는 치부들을 스스로 시인하게 하거나, 또는 개연성 있는 사실이나 터무니없는 사실에 대한 시인을 유도함으로써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허구와 진실의 모호한 경계를 이용하는 이 게임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까발림, 용인된 무례함, 터무니없음 등으로 표현되는 이 저급한 욕망의 밑바닥에는 연예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이 있다. 그것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X파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X 파일이 존재하는 사회는 투명하지 못한 사회다. X파일이 존재한다는 말은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 드러내기 어려운 혹은 감추어야 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드러낼 것과 감추어야 할 것을 가름하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감추면서도 완전히 폐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감추면서도 폐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은 X파일의 사실과 무관하다는 도덕적 우월성이나 알리바이를 위한 것이라는데 있다. X파일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욕망도 이와 같이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의식을 기반으로 한 음험한 변별 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르네 지라르가 말했던 희생양의 현재 모습이 아닌가? 문제는 도덕적 구분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자기 정당화의 논리는 상대적인 우월의식을 통하여 희생양에 대한 가혹한 윤리적 비난과 처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좀 더 이성이고 자기 성찰적인 시각으로 X파일을 보면 어떨까?

연예인 X파일은 연예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며 동시에 우리가 지닌 음험한 욕망에 다름 아니다. X파일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좋아하는 꿈의 실체이며,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러리라는 우리의 기대와 상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박한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둘 다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이제 겨우 드러나기 시작한 근현대사 X파일들의 존재다.

속속 드러나는 과거사 X파일을 보며 X파일이 존재하지 않는 세대가 행복한 세대라는 당위적인 요구는 하지 말자. 이해관계가 결부된 사실에 대한 당위적 요구는 얼마나 공허한가? 문제는 또 다른 X파일이 존재하지 않도록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있다. X파일의 존치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결정권자의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좀 더 준열하고 엄정할 수 있도록 비판과 견제를 상시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사회적 파장으로 인해 당대에는 드러낼 수 없는 사실이기에 X파일이 불가피하다면 반드시 일정 시간 이후의 공개를 원칙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감출 수 있다는 미련한 의지를 거세시킬 수 있으며, 감출 수 없기에 사회와 역사에 대한 겸허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더 록>에서 X파일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을 보며 환호하는 니콘라스 케이지의 환호보다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감옥행을 택한 손 코넬리의 의지를 좋아한다.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스파이더맨의 공통점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X맨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를 돕는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들이지만 허구이기에 감동이 없다. 하지만 구산동 결핵촌에 매년 익명으로 쌀을 보낸다는 우리 시대의 X맨들은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현실의 이웃이기에 감동적이다. 올해에는 추잡하고 폭력적인, 그러기에 언젠가는 까발려져서 엄혹한 심판대에 서야하는 X파일 말고, 드러내지 않음으로 더욱 즐거워지는 그런 X파일을 우리 모두 실천해보면 좋지 않을까? 당연하지!

 한화한화인》200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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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놀로지, 즐겁지 않은 것은 독이다.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학과 커뮤니티에 누군가 게임을 올려놓았다. 테트리스와 유사한 <떼굴떼굴>이라는 게임인데,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게임에 학과 학생들이 푹 빠져버렸다. 학사 관련 공지나 과 행사 등을 알리거나 행사사진 정도만 올리던 커뮤니티가 갑자기 북적거렸다. 인터넷을 굳이 뒤지지 않더라도 이 정도 게임이야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인데 이토록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곳이 학과 커뮤니티였기 때문이다. 클릭만하면 할 수 있도록 게임 아이콘을 학과 커뮤니티 대문에 달아두었는데 그곳에 1등의 이름이 게재되었다. 다른 게임 사이트에서의 랭킹이야 거의 익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이곳은 우리과 학생들끼리의 경쟁이니 손쉽게 순위가 바뀌고 그것이 즉시즉시 공지가 되는 현장성을 확보하고 있는 탓이었다. 더구나 게임이 간단하다보니 접근이 용이하고 조금만 집중하면 상위 랭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매력까지 있으니 어떻게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사카에 있는 유니버설스튜디오 재팬 (Universal Studios Japan)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어트랙션(attraction)<스파이더맨>이다. 대부분의 어트랙션이 50분 이상 기다려야하는데 <스파이더맨> 어트랙션은 90분 이상의 기다림을 요구한다. 10시에 개장을 하면 입구부터 <스파이더맨> 어트랙션까지 뛰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참 볼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관람객들은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다 못해 극도로 화가 날 지경이 되면 신문사처럼 꾸며진 지하창고와 사무실을 거쳐 어트랙션 앞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일단 어트랙션에 타고나면 그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후회되지 않는다. 완성도 높은 4D 영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람하는 동안에 온몸의 감각을 깨워놓는 강력한 음향과 어트랙션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가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퍼놀로지(funology)’는 첨단 기술(technology)을 기반으로 즐거움(fun)을 추구하는 트렌드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최근 더욱 주목받고 있는 것은 퍼놀로지가 이제 주도적인 트렌드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떼굴떼굴>과 같은 소박한 형태의 인터넷 게임에서부터 <스파이더맨> 어트랙션과 같은 첨단의 기술을 요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퍼놀로지의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화면을 가로로 볼 수 있게 한 애니콜 V500, MP3와 연동되어 운동량을 알려주는 나이키 신발, 졸음 방지 센서 이어폰, 둘둘 말아서 휴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낼 수 있는 롤 피아노, LCD 모니터를 장착한 러닝머신 등과 같이 첨단 기술을 통해 즐거움을 강화한 퍼놀로지 상품들뿐만 아니라 이노디자인의 랍스터 버너,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3단계 원형 배낭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즐거움을 배가시킨 상품들이 퍼놀로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유희가 인간의 본성(homo ludens이라고 할 때, 즐거움의 추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위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중세에는 즐거움은 경계하고 금기시할 요소로 억압되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상기해보라. <희극론>을 숨기기 위하여 책에 독을 발라 놓고 이것을 읽는 사람들을 살해하던 사제의 엄숙주의의 근원이 바로 즐거움은 불경의 근원이라는 믿음이다. 이와 같은 즐거움에 대한 경계는 근대 산업사회에서도 계속되는데 유용성과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경향은 후기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변화한다. 향유자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향유 여부가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면서부터 즐거움은 모든 문화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즐거움은 더 이상 금기시해야할 요소가 아니다. 일하기 위해서 즐겁게 쉬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일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인 것만 보아도 이러한 변화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물론 후기산업사회의 도래로 인한 사회의 고도화와 물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황폐화로 인하여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찾지 않을 수 없다는 절박함도 그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세가 트렌드로 급부상한 것이 퍼놀로지다. 단순한 소비를 넘어서서 보다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소비가 경제활동의 일환이라면 즐거움의 추구는 문화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와 문화 사이에 퍼놀로지가 있다. 특히 지식기반경제의 첨병으로 각광받고 있는 문화콘텐츠의 경우, 바로 이와 같은 퍼놀로지의 문화적 양상이라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즐거움을 기반으로 하는 무형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재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콘텐츠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면 우리가 퍼놀로지를 어떻게 보아야할지 판단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미니홈피에는 즐겁지 않은 것은 독이다라고 적혀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즐거운 일만해도 모자라는 인생 마음껏 즐기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원래 의도는 주도적으로 생활하고 스스로 해야할 일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주도하자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것도 독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해두자. 마치 <떼굴떼굴>을 하며 얻은 즐거움이나 <스파이더맨> 어트랙션을 타고나서 느끼는 재미를 쉽게 긍정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종삼은 <북치는 소년>에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떼굴떼굴>이나 <스파이더맨> 어트랙션은 그 열광적인 지지에 화답해줄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내용을 갖지 못한 즐거움은 공허하다. 공허한 즐거움은 쉽게 질리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퍼놀로지의 다양한 미덕이 미덕으로 남기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경계허물기를 통하여 문화적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과 다양한 퍼놀로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절실하다. 다시 한 번 말해두자, “즐겁지 않은 것은 독이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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