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옳았고 그래서 상처 받았던 그해 여름
- 마르코 타마키 글, 질리안 타마키 그림, 《그해 여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누구나 가지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은, 하지만 돌아보면 그 개개의 누군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절절했던 시절이 있다. 《그해 여름》은 그 절절함을 열다섯 소녀 로즈의 시점으로 따라가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찾아가는 이와고 비치 오두막에서 여름휴가를 보내왔건만 유독 ‘그해 여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즈의 엄마와 아빠가 둘째 문제로 해묵은 갈등을 드러내고, 이와고의 유일한 상점 브르스터를 중심으로 마을 젊은이들의 미숙하고 어설픈 하지만 절박했던 사건을 로즈의 시점에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해 여름’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어린 소녀의 눈에 낯선 어른의 세계를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때가 ‘그해 여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읽어야할 것은 갑자기 나타난 사건들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로즈의 시선이다.
내년 여름에는 틀림없이 멋진 가슴이 생길 것이라는 로즈의 마지막 대사는 성장한 시선의 다른 표현이다. 성장은 불안과 맞서는 일이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즐겁게 지내던 로즈에게 문득 다가오는 세상의 다른 얼굴, 비로소 보게 되는 갈등과 고통스러운 순간들. 넘어져봐야 걷는 법을 배운다는 마을 노인의 충고처럼 로즈의 ‘그해 여름’은 불안이고 성장이다. 부쩍 성장한 몸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지고, 달라진 눈높이는 시선이 머무는 곳곳을 낯설게 한다. 낯선 세계는 불안하고, 불안한 만큼 고민하고 부딪혀야할 시간은 고통스럽다. 로즈와 윈디가 습관적으로 빌려오는 공포영화DVD를 바라보는 두 소녀의 시선(pp63-64)은 불안과 성장 사이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본문 중, 공포영화 DVD를 보는 로즈와 윈디(pp. 63-64.)
텍스트 전체에 걸쳐 이런 메타포는 반복적으로 드러나는데, 밤길과 손전등이 비추는 곳만 정체를 드러내는 세계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탐험하듯 걸어가는 로즈와 윈디(pp.88-91), 호수 속에서 눈을 뜬 채로 떠있는 로즈, 사유지를 탐험하듯 들어가고 그곳에서 마을 젊은이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던크의 아기를 가졌지만 그의 무관심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는 제니와 둘째 문제로 아빠와 불화를 겪던 엄마가 물에 빠져 죽으려는 제니를 구하면서 둘 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마치 세례를 받듯, 어머니의 양수 안에서 태어나듯 의사(疑似)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마치 축제의 과정과 같다. 일상의 타락으로 신성함을 잃게 되면 의사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로즈에게 ‘그해 여름’은 기억할만한 성장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본문 중, 밤길을 걸어가는 로즈와 윈디(pp. 88-91.)
《그해 여름》이 미덕은 당위로서의 성장, 성장을 위한 작위적 갈등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는 소위 메인 플롯을 추동하는 중심 갈등의 비중이 높지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중심 갈등의 해소과정을 쫓아간다기보다는 그해 여름 휴가동안에 로즈의 시점에서 바라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현명한 독자는 갈등의 해소과정이 아니라 그 갈등에 반응하는 로즈의 변화과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시기, 삶의 봄날에서 여름을 맞는 시기에 휴가라는 탈일상의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해 스스로의 시선을 맞추어가는 로즈의 변화가 이 작품의 중심이다. 윈디가 파놓은 모래구덩이에 로즈가 들어가면서 나누는 대화는 가슴으로 상징되는 그녀의 성장의 징후이며, 로즈가 모아둔 조약돌을 침대에 두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그러한 징후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즈의 성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작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성장이 그녀의 성장만이 아니고, ‘그해 여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느 한 때의 그것이듯, 그 무렵 우리가 겪었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그해 여름’당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하였는가? ‘그해 여름’은 당신의 삶 속에서 어떤 여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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