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8월 16일 워싱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피곤한 효진이는 아침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침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겠는지 따라나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려서는 이런 상황에 칭얼거리고 울다가 아내나 나에게 안겨서 숙소를 나왔을 것인데, 이제 컸다고 군말이 없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큰다. 횡단을 하는 동안에도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이 언뜻언뜻 보인다. 유진이는 이제 아내와 키를 재지 않는다. 유진이가 더 크기 때문이다. 크면서 부지런히 아내와 키를 견주더니 이제 슬쩍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아내는 최근까지 자신이 더 크다고 우기더니 요즘은 저항을 포기한 모양이다. 효진이도 제법 많이 컸지만 아직은 기둥에서 키를 잰다. 아버지 댁에 가면 기둥에 붙어 있는 기린 그림 위에 아버지가 키를 재고 표시해주시는데, 이곳에 와서도 효진이는 그렇게 재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댁에는 오남매의 아이들 키와 그것을 잰 날짜가 기린 그림 위에 가득한데, 그 중 유진이와 효진이 것이 가장 많고 촘촘하다.
맑은 날 아침의 워싱턴은 어제보다 선명했다. 숙소에서 워싱턴으로 오면서 본 주택가는 조용했지만 오고가는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보아야할 곳은 워싱턴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닐까? 출근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으로 향하는 자동차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워싱턴은 어제와는 다른 도시였다. 분주하게 오고가는 사람들과 수많은 자동차들이 어디서 일시에 쏟아져 나온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포드극장 쪽으로 갈수록 차들은 한산한 편이었다. 걱정했던 주차도 인근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편리했다.
포드극장 전경
포드극장(Ford's Theater)은 1865년 링컨대통령이 저격당했던 장소다. 포드극장은 9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먼저 극장 안에서 입장 가능한 시간의 입장권을 받아야 했다. 입장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어서 입구에 기념품점을 먼저 둘러보았다. 작은 규모의 기념품점에는 링컨과 남북전쟁 관련 상품들이 팔리고 있었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줄을 서서 15분쯤 기다리니 입장 시켜주었다.
포드극장은 저격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입장이 시작되면 지하의 링컨박물관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링컨과 남북전쟁의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링컨박물관 곳곳에는 링컨의 모습을 브론즈나 석상으로 세워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링컨의 암살범인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와 그의 일당들의 사진과 모의했던 장소, 저격 무기 등은 물론 링컨의 피 묻은 베개까지 전시되어 당시 참혹했던 그의 죽음을 흐트러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남북전쟁에 참가한 흑인병사들
박물관에서 극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저격 당일 링컨의 행적과 범인들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구성하여 서로 마주보게 전시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었다. 링컨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전시 중간 중간에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내력과 사건의 맥락을 짚어주고, 강조할 부분을 극적으로 재구함으로써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미국의 대부분의 박물관들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나 다큐멘터리로 대체하고 있었다. 링컨의 연설문이나 발언 중 감동적인 부분을 타이포그래피화해서 전시하고 있었고, 당시 흑인들의 비참했던 생활과 전쟁 중 활약상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전시물과 상호관련 되면서 매우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남북전쟁에 흑인병사들이 참전했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남북전쟁 이전에도 북군에는 흑인병사들이 있었다.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목숨 걸고 싸워야했던 흑인병사들의 처지는 월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인 병사의 월급이 14달러인데 반해 흑인병사의 월급은 7달러였다고 하니 북군 내에서조차 자유와 평등은 멀기만 했었나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링컨 암살범의 현상금이 50,000달러에 달했는데, 이 금액은 흑인 병사의 595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링컨을 저격한 권총
링컨에게 소지를 권했었다는 무기
링컨의 후두부를 쏘았다는 권총은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오히려 볼티모어에서의 암살계획이 드러난 이후 보좌진이 안전을 위해 권했다는 칼과 고글과 너클 등이 더 치명적으로 보였다. 암살범 일당들의 사진 등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설명이 없다면 당시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사진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인생의 질곡을 모두 잘 넘어와서 61만 8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남북전쟁을 승리로 잘 이끌어온 링컨이 워싱턴 한 복판 극장에서 그것도 후두부에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면에서 저격을 당했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암살계획이 포착된 상황에서 2층 VIP석에 앉은 대통령의 후방이 그렇게 허술하게 열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2층에서 뛰어내려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것이나 숨어 있는 곳에 불을 질러 암살범을 죽게 했다는 것 1까지 링컨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링컨의 죽음에 대해서는 ‘평행이론’이나 ‘테쿰세의 저주’(Curse of Tippecanoe) 2등과 같은 말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링컨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는 무관하게 그에 대한 신화화는 더욱 강해져서 가는 곳마다 링컨을 추모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그가 죽음을 당했던 포드 극장을 2,500만 달러를 들여서 2009년 재개관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링컨을 기리며 그의 죽음을 상기하지만 그 진실은 아직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얼마나 섬뜩하고 냉정한 선언인가
링컨박물관에서 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선언적 예견은 분명 역사의 책무나 소명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나는 거기서 터무니없이 역사의 진실을 생각했다. 진실이 보장되지 않는 역사 앞에서의 책무와 소명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공소한 일일 텐가? 1980년대 대학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고민을 맥락 없이 링컨 기념관에서 다시 만난다. 크고 강한 이야기는 대부분 당위를 강조하지만, 삶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서 그렇게 클 수도, 강할 수도, 당위를 요구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링컨박물관에서 나오면 당시 저격이 벌어졌던 극장이다. 객석에 앉아서 안내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링컨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는 2층 오른쪽 VIP석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링컨이 저격당했던 1865년 4월 14일은 로버트 리 장군이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종식된 지 닷새 후였다. 더구나 이날은 각료회의를 통하여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를 해제한 날이었다. 케네스 데이비스의 주장에 의하면, 링컨은 “모든 이들에게 중용과 화해를 권유했고 온전한 재건계획을 세워 최소한의 보복과 처벌로 반역 주들을 다시 연방의 품으로 끌어들이려 했” 3고 그것의 가시적인 노력이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 해제였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군이 41만 6천 8백 명 전사했는데, 남북전쟁에서는 61만 8천 명이 전사한 것만 보아도 그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인한 상흔의 깊이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링컨의 암살도 그러한 상흔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링컨은 관용과 화해로 상처를 보듬으려했는데 암살범은 보복과 암살로 그것을 파괴하려했던 것이다. 이것은 남북전쟁의 승자와 패자라는 확연한 입장 차이와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극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링컨이 암살당함으로써 남북의 각성을 이끌어 화해가 이루어져야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흑인에 대한 차별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곪다가 4 1950년대부터 흑인들의 저항과 개선의 노력 5이 본격화된다. 뚱뚱한 여자 안내인의 설명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극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포드극장 길 건너 맞은편에는 저격 다음날 아침 링컨이 죽음을 맞은 페터슨 하우스(Peterson's House)가 있다. 총격을 당한 링컨의 상태가 위중해서 병원으로 옮기지 못하고 임시로 옮긴 곳인데 그는 거기서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페터슨 하우스였다. 원래는 안을 둘러볼 수 있는데 현재 공사 중이라서 관람을 할 수는 없었다. 집 앞에 두른 무성의한 합판 담장의 색깔이 어울리지 않았고, 공사 중이어서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판 역시 무척 차갑게 보였다.
포드극장 앞 기념품 상점에서 만난 미국적인 기념품들
페터슨 하우스에서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대형 기념품점이 있었다. 포드극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일 테지만, 기념품의 콘셉트는 링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워싱턴과 미국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만큼 상품의 종류가 다양했는데 우리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매장이었다. 미국을 상징할 수 있는 것들, 미국 역사의 주요 장면들, 그와 관련된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것들, 미국의 애국자들과 영웅들 등등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고 싶어 하는 것들’ 사이에 절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내가 피규어를 모으고 있는 것을 잘 아는 아내는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하라고 했지만, 그것들의 미국중심적인 색채가 내게는 거슬렸다. 아이들만 기념엽서를 구입해서 나왔다.
다음으로 우리는 내셔널 몰에 있는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을 보러 갔다. 어제 주차를 했던 국회의사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면 되겠다 싶어서 차를 대고 보니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우리가 용감하게 주차했던 국회의사당 앞 주차장이 사실은 허가 받은 사람만 주차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용감하게 주차를 하고 다녔으니 혹시라도 어제 주차 위반 스티커라도 발부된 것 아닌가 슬쩍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를 다시 뽑아서 국립미술관을 비롯해서 내셔널 몰 주변을 다 돌았는데도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하나 발견한 곳은 주차기에 장애인 표시가 붙어 있었고, 동전만 받는 것이라서 포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인도 주차가 가능한 곳이었다. 다시 주변을 몇 바퀴를 돌다가 국립미술관에서 상당히 떨어진 교통국(Department of Transportation) 주변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최대 2시간밖에 주차가 안 되는 지역이었다. 관람하다가 중간에 나와서 시간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미술관은 내셔널 몰의 박물관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관은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고, 동관은 현대 작품 중심인데 규모는 서관이 몇 배 컸다. 규모면에서도 그동안 보아온 미술관과는 달랐다. 내셔널 몰 주변의 수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경은 차분한 압도였다. 규모로 보면 웅장했지만, 웅장하다고만 하기에는 친숙했고, 친숙하다고만 하기에는 웅장한 모습으로 차분히 압도해왔다. 사실 미술관은 어디를 가나 실망이 없다. 작품이 적으면 적은대로 느긋하게 볼 수 있어서 좋고, 많으면 말 그대로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 돌아본 미술관들은 대부분 미술관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미술관 주변부터 미술관 건물 그리고 동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구조까지 늘 제한된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런 마음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데, 다만 아이들이 미술관에서 유독 빨리 지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국립미술관 전경
국립미술관의 규모와 3만점의 소장품을 오늘 다 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라고 생각하고, 서관부터 보기로 했다. 게다가 주차 시간의 제한이 있으니 보다가 내가 나가서 시간을 연장할 수 있으면 하고, 그렇지 못하면 볼 수 있을 만큼만 보기로 했다.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중세부터의 종교화들에게서 보는 눈이 어두운 나는 큰 감동을 얻지 못했다. 모든 예술이 학습을 통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미술사의 앞부분을 좀 더 차분히 읽어두었다면 또 다른 감흥을 얻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국립미술관은 공간을 넉넉하게 활용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다양한 시점과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실 중앙에는 앉아서 볼만한 소파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메모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주제별, 시기별로 모아서 전시를 하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해주는 오디오 기기를 제공 받아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인데, 그것이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니 놀랍고 고마울 뿐이었다.
피카소의 ‘연인’
이번 여행 중 둘러본 미술관에서 기뻤던 것은 사진으로만 보던 세계적인 작품들을 직접 보는 것도 보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작가의 또 다른 작품과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식견은 좁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피카소였다. 그동안 피카소의 작품은 입체파 혹은 미술책에 등장한 작품들에 갇혀 있었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화풍의 작품들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감이나 선을 보면 그가 보였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묘사한 ‘연인’이나 발가벗고 있는 두 젊은 남자를 그린 작품이나 모두, 피카소 외에는 답이 없는 작품들이다.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
이곳에서 만나는 세잔, 라파엘, 드가, 고호, 고갱, 다빈치, 램브란트의 작품들도 하나 둘 그런 기쁨을 주었다. 특히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에서는 퇴폐적이고 관음증적 시선과 응시가 겹쳐진 끈끈한 분위기에 한참을 넋을 주고 서 있어야만 했다. 크림트의 느낌이 들었는데 가서 자세히 보니 르누아르였다. ‘오달리스크’는 매춘부를 그린 것이라는데, 관음증적 판타지를 응축시킨 작품 표정도 재미있지만 소품과 옷의 색깔만으로도 끈적끈적한 욕망의 색깔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했던 기만, 허위, 은폐, 억압 등에서 탈주해 대안적 세계로 추구했던 것인 오리엔탈적 세계였는데, 그러한 경향의 한 작품이란다. 신비와 퇴폐의 노골화가 과연 오리엔탈적인 것이냐는 것은 철저히 당시 유럽인들의 시각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말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유럽세계의 기만과 황폐의 대안을 오리엔탈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육체와 욕망 그리고 시선과 상관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신보다는 인간에, 거대담론보다는 미시담론에, 당위보다는 존재에 주목한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립미술관은 시카고나 뉴욕에 비해 한가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할 수는 있었지만, 직원들의 고압적인 자세가 눈에 거슬렸다. 우리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람객을 대하는 고압적인 말투며 행동거지가 몹시 불쾌했다. 이렇게 좋은 소장품들과 전시공간을 가지고서 그것을 온전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미술관이 안타까웠다. 그것은 그 많은 전시공간마다의 테마가 스토리텔링으로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아쉬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향유 자체를 방해하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작품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에 가까웠다.
워싱턴 맥도날드 가판대 메뉴. 횡단 내내 만났던 맥도날드의 평균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품질은 형편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경을 더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보니 주차시간이 다 되었다. 아내에게 효진이와 더 보고 있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나는 많이 피곤해하는 유진이를 데리고 차를 주차해둔 교통국 부근까지 부지런히 걸어갔다. 날도 덥고 게다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걸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다행히 2분 전에 도착해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추가했는데 30분밖에 더 추가가 안 되었다. 이상해서 주변의 표지판을 살펴보니 오후 4시부터 6시 30분까지는 주차가 금지된 곳이라서 시간이 더 추가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차를 옮기려고 살펴보니 근처가 다 비슷한 형편이었다. 퇴근시간 무렵에 교통 혼잡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논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국립미술관을 그만보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에 어제 어두워져서 제대로 보지 못한 한국전쟁 참전 추모공원과 베트남 참전 용사비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아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는 사이, 우리는 근처에서 발견한 맥도날드 가판대에서 먹을 것을 사기로 했다.
결국 오늘도 그러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일정에 욕심을 내다가 점심을 4시가 지나서 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지금은 시장기만 지우고, 조금 있다가 저녁은 제대로 된 음식을 사주리라 생각하고 간단한 것을 주문을 하려고 보니 가격이 터무니없었다. 이미 어제부터 워싱턴의 음식이 질과 양에 비해 가격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맥도날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미국 전역 어디서나 같은 가격으로 팔리는 줄 알았던 맥도날드가 워싱턴에선 햄버거가 4배, 맥너겟은 2배 이상 비쌌다. 게다가 메뉴의 선택도 여지가 없다. 정식 매장이 아니라 작은 가판대다 보니 직원 둘이 햄버거 기계를 이용해서 기본 버거와 더블버거 그리고 맥너넷만 팔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시장한 것을. 덕분에 꽝꽝 언 냉동 패티가 기계에 들어가서 구워져 자동으로 빵 위에 얹혀 나오는 것을 질리도록 쳐다보아야했다. 그나마도 줄을 서서 불친절한 직원과 말을 섞으며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미주리 주 맥도날드에서 만났던 그 친절한 직원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맥도날드의 표준화도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친절만큼 불친절은 힘이 세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 공원으로 가기 위해 비지터 센터 주차 구역으로 이동하는데 교통경관이 주차구역에 주차한 다른 차에 스티커를 발부하고 있었다. 합법적인 주차구역인데 왜 스티커를 발부하나 의구심이 들어서 몇 번을 망설이다 앞쪽으로 차를 세우고, 직접 가서 문의했다. 내가 차를 주차한 곳이 주차 구역 맞느냐고 두 번이나 묻고서야 안심을 했다. 하루 종일 주차 스트레스에 시달린 우리는 이렇게 넉넉한 무료주차 공간이 고마울 뿐이었다. 게다가 옆으로 우리와 함께 흐르는 포토맥(Potomac) 강은 비스듬히 누워 햇살로 반짝거렸고, 그 앞의 모든 것들은 역광 때문인지 실루엣으로 아늑했다. 강변을 따라 길 안내 하듯 늘어선 나무들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더위는 따라오지 못했다. 숲그늘의 고즈넉한 표정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비로소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국전쟁 참전 추모 공원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은 어제보다 사람들이 조금 많았다. 빛은 투명하고 명징해서 사진 촬영에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빛이 좋아서 조형물들을 꼼꼼하게 훑어볼 수 있었는데, 어제와는 달리19명의 병사들 표정들에서는 전투의 의지보다는 전쟁의 공포가 먼저 읽혔다. 한 명 한 명의 자세와 표정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읽어갔다. 그 옆에 검은 벽에 새겨진 얼굴들도 어제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앞으로 경계석 위에는 한국전쟁의 사망, 실종, 포로, 부상자의 숫자 6가 적혀 있었는데, 참혹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호크 다운>(Black Hawk Down, 2001)에 등장했던,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던 플라톤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비극적 전망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 지독한 비극의 결과를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원인을 달리하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Vietnam Memorial)는 1959년에서 1975년까지 연대순으로 6만 명에 달하는 전몰장병의 이름을 검은 대리석에 새겨 놓은 것이다. 검은 대리석 위에 전사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그 앞에 서고 보니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추어졌다. 그 검은 대리석이 직각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곳에 비춰진 모습이 다시 되비춰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관람하는 사람의 현재를 통해 완성되는 구조였다. 베트남 전쟁은 비록 끝났지만 그와 유사한 성격의 전쟁을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미국의 오늘을 되비추고 있었다. 6만 명에 달하는 아까운 목숨들의 죽음이 오늘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다. 대부분 군대 외에는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입대를 했고, 또 정부에서는 그러한 계층들에게 입대를 권했고, 그들은 낯선 땅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져 간 것이다. 미국 사회 양극화가 더 극대화된 현재에 그러한 모습은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징병관들이 저소득층이 머무는 지역을 방문해 입대를 권유하는 모습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은가? 또한 그들에 의해 희생된 그 낯선 지역의 생명들까지…이 지독한 참상을 고스란히 조형물은 되비추고 있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에서 본 봉투 위의 편지
베트남참전용사 조형물
베트남참전 용사비에 비친 필자
역사는 낡거나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 갈 뿐이다. 잊혀진 역사는 여지없이 반복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더 가혹해질 뿐이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만 역사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더구나 유사한 반복에 번번이 침묵하고 외면하며 현실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늘 그렇듯 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듯, 오늘에 침묵하는 몫은 오롯이 자신의 것임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조형물을 따라서 걷다가 손글씨가 쓰인 노란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겉에 쓰여 있는 편지였다. 전몰장병의 지휘관이었던 생존자가 써놓은 글이었는데, 울컥하게 만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위에서 산 자로 남게 된 사람의 미안이 절절했다.
아직 해가 조금 남아서 포토맥 강위로 길게 누워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아직 과거가 아니다. 한국전쟁은 휴전중이며 베트남전쟁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번복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 반복될 뿐인 또 다른 전쟁은 반성 없이 가혹해질 뿐이다. 두 기념물을 보면서 가슴은 한참이나 먹먹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주류전문점에서 버드와이저 40온스짜리를 하나 사왔다. 이곳 호텔에는 대체로 냉장고가 없어서 얼음을 채워와 차갑게 한 후 아내와 마셨다. 오늘은 아내가 더 마셨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여정을 달려온 피로 때문이리라. 내일 돌아가면, 그동안 멈춘 시계를 부지런히 돌려야 한다. 8월도 후반부로 달려가고 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 21일간 횡단여행의 대단원이다. 시카고를 기점으로 시간은 순식간에 달려갔다. 시간이 달리는 만큼 피로는 더 했지만 가족들 모두,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왔다. 무엇을 보고 배우려고 온 여행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는데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싶던 여행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가족들 모두 즐겁고 알찼다고들 했다. 가족들은 다양한 주제로 이번 여행의 베스트와 워스트를 선정하기도 했다. 돌아갈 짐을 모두 꾸리고 내일은 아쉬움에 워싱턴에서 놓친 몇 군데를 더 돌고 공항으로 갈 것이다. 대부분 처음 해보는 것들에 가족들 모두 용기를 가졌다. 돌아갈 곳의 소중함도 모두 같은 심정인가 보다. 꼼꼼하게 여행일정과 경비, 관련 자료, 사진, 정리물 등을 챙겼다. 이제 그것이 몸을 만들 차례다. 그것은 집에서 따듯한 밥과 된장찌개를 한 그릇 먹고부터 시작할 일이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멀리 있지만, 내일이면 하나의 그리움을 지울 수 있겠다.
- 암살범 존 윌키스 부스는 뛰어내리다가 장식 천에 다리가 걸려 정강이뼈가 부러진 상태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말을 타고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버지니아 볼링그린 담뱃잎 건조장에서투항을 거부하고, 불타는 건조장에서 나오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 테쿰세의 저주는 미국 정부에 무력으로 항쟁하던 인디언 추장 테쿰세가 죽으면서 20년에 한 번씩 0으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대통령은 임기 중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1840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 1860년 아브라함 링컨, 1880년 제임스 A. 가필드, 1900년 윌리엄 매킨리, 1920년 워런 하딩,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1960년 존 F. 케네디는 예외 없이 임기 중에 모두 죽었다. [본문으로]
-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276 [본문으로]
-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합법화하는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판결을 내린다. 이에 따라 학교, 식당, 열차, 버스, 식수대 등에서 흑백의 분리를 합법화함으로써 남부에서는 흑백의 갈등이 보다 첨예화된다.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p.323-325 참고) [본문으로]
- 백인전용 학교에 입학을 거부당한 부모가 제기했던 1951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을 비롯하여, 버스의 흑백분리 지정석 제도에 저항한 로자 파크스 사건, 1957년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라는 백인 전용 학교에 흑인학생 9명의 등교 시도 사건은 주방위군까지 출동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본문으로]
- 사망(미군: 54.246, 유엔군 628,833), 실종(미군: 8,177, 유엔군: 470,267), 포로(미군: 7,140, 유엔군: 92,970), 부상(미군: 103,284, 유엔군:1,064,4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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