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떠한 이유도 죽음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최근 낯선 죽음 경험해야 해야 했습니다. 먼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삶과 죽음의 가파른 경계에 서 있던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던 그의 조국에서는 외교부의 공과를 따지며 준열한 희생양 만들기에 몰두해 있습니다. 저는 자꾸 비관적인 전망을 갖게 됩니다. 나약하고 원칙 없는 정부의 무지하고 무모한 외교 정책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젊은이들은 명분 없는 그 전쟁의 잔혹사에 피를 뿌리게 될 것이고, 만두파동이 고인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되었듯 또 다른 사건 속에서 고인의 이름은 잊혀지게 될 것이라는 이 근거 없는 확신은 저만의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이 참혹한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회의하지 않는 사회, 성찰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그의 죽음은 단지 그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 지켜낼 힘이 사라지면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지독한 현실, 그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따지고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월드컵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백성의 목숨 하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명분 없는 이 추악한 전쟁에 젊은이를 보내려하는, 다른 나라의 초토 위에서 떡고물을 기대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은 개가 물어 가버린 이 처참한 대한민국에서 우린 무엇입니까? 살려달라는 그의 절규를 보고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조치가 도움을 원치 않는 나라에 도움을 주겠다는 그 기만적인 신념을 단호하게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없었는지, 그 발표로 인하여 만에 하나 그가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할 수 없었는지 우린 이제 엄정하게 되물어야할 때입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씨랜드 화재 참사로 숱한 어린 생명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도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지키며 살아가라고! 그렇다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백성은 죽으라는 말인지…. 스스로 지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아닙니다.
요즘은 학교 급식의 식재료도 믿지 못해서 학부모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영양사가 있고, 선생님들이 관리하고, 식재료 업체의 관리도 있고, 교육부나 식약청 등의 관리도 있는데 왜 부모가 나서야 하는 걸까요? 이러다가는 아이들의 캠프장이나 학교 강의실에까지 부모가 따라다녀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뢰 없이 공동체를 꾸려갈 수 없고, 공동체 의식 없는 국가는 모래 위의 집일 뿐입니다. 공동체 의식의 저 밑바닥에는 서로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그의 생명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 어떤 명분도, 그 어떤 현실적 이익도 생명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이 단지 스크린 위의 스펙터클이나 브라운관 안의 뉴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뼈저리게 배웁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스크린이나 브라운 관 안에 설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브라운 관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칙이 필요하고, 그 원칙은 생명을 가장 우선 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랜섬>에서 멜 깁슨은 아들의 몸값으로 지불할 돈을 유괴범들의 현상금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압박했고, 결국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도 그 짜릿한 결단에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해서는 어떠한 용기나 결단도 도박 그 이상일 수 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생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칙이며 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신뢰를 말하고,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삶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 바로 생명의 정신입니다. 이라크의 재건과 이라크 국민의 생명을 위해서 파병한다는 정부의 단호한 명분이 기만적으로 들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기만적인 명분으로 우리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라크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기만과 허위가 또 다른 죽음을 부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이 이라크가 부른 마지막 죽음이기를, 하지만 생명을 부른 의미 있는 죽음으로 기록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4년 《오픈아이》> 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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