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관절인형은 피노키오가 아닙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와 소통하지만 관절인형은 자신을 입양한 주인과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사랑할 대상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지만 피노키오는 소통을 통해 성장하여 사람이 되지만, 관절인형은 섬뜩한 변하지 않음으로 결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관절인형에 열광하는 마니아의 숫자가 늘고, 구입을 입양이라 부르고, 의상은 물론 머리와 메이크업까지 바꿀 수 있다지만 관절인형은 그저 인형일 뿐입니다. 혹자는 이것은 핵가족 시대 외동들의 형제에 대한 욕망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관절인형에 대한 열광은 소통하고 싶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은 욕망의 드러냄이며, 동시에 현실원칙에 억눌린 자기표현 욕구의 극단화라고 할 때, 그것은 외동들의 자기 사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면 외롭지 않겠지만 그 부대낌이 주는 번잡스러움이 싫다는 것이지요.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할 때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한 존재를 익명의 웹 공간에서 자랑함으로써 외로움을 보상 받으려는 자폐적 자위가 관절인형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죠.
어디 관절 인형뿐이겠습니까? 그것은 <겨울연가>를 위시한 최근 드라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코드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지독한 집착을 사랑이라고 하는 드라마가 차고 넘칩니다. 준상, 유진, 상혁, 채린이 보여주는 일방적인 사랑은 자기집착에 가깝습니다. 사랑이 타자와의 대화적 소통이라고 할 때,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일방적일 뿐 소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년여우>의 치오코가 우아하게 표현했던 ‘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이 자기집착의 다른 표현이라면 억지가 되나요? 그것은 왕가위의 <동사사독>이 소통되었지만 지속될 수 없었던 운명적 사랑의 어긋남과는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자기표현입니다. 요즘 가장 손쉬운 자기표현으로 선택하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 열품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보기만 해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젊은 시간들을 기록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야겠죠. 더구나 보이는 모든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좋겠죠. 턱을 약간 당기고 얼굴을 약간 틀어서 찍으면 자신의 얼굴이 더욱 예쁘게 나온다던 얼짱의 인터뷰가 당당하게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그 솔직함과 당당함이 별로 믿지 않습니다.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해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테고, 남기고 싶은 것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멋진 자신의 모습을 많이 발견한 것일 테니 허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그것을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싸이 미니 홈피에 올려서 보여주고 있으니 그 무모한 자신감의 기저에는 자기에 대한 거침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으로 주로 드러나는 자기에 대한 사랑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그러한 의지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 하고,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가꾸게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기사랑의 온전한 모습이냐에 달린 것이겠죠. 나는 너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타자에 대한 인식 없이 나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너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은 곧 타자에 대한 사랑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누락된 자기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욕심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안타가운 것은 요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욕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로 인해 자기에 대한 사랑이 데려올 수 있는 자기 삶에 대한 멋진 연출이나 진지한 성찰 따위의 열매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금 이곳’에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더욱 멋지게 자신을 사랑하자고. 하지만 타자와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는 자기에 대한 사랑은 자기집착일 뿐이라고. 그것을 넘어서야만 관절인형에 대한 나의 사랑이 자폐적 자위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저는 요즘 운동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004년 《오픈아이》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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