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와 천년여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늘 그렇듯 의욕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의욕의 의도가 의심받기 시작하면 이미 의욕은 야욕이나 욕심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서울시내버스 개편의 의욕과 의도 사이에 끼어서 막막한 울분을 삭이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의도처럼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과도한 의욕에 우리가 흥분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익숙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아직까지도 복마전 같은 버스 노선도 앞에서 황망하기만한 것은 오만한 관료의 말처럼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청계천 주변 상권의 붕괴와 노점상들의 막막한 생계 앞에서도 우리에겐 아직 기대가 있었습니다. 21세기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서울시가 변하고 있구나 하는 낙관적인 기대는 기공식 현장의 연막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시장에게 시민인 우리가 최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비관적인 생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버스는 시민의 발입니다. 그것도 넉넉하지 못한 시민들의 발입니다. 7억원이 넘는다는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어떤 이의 발이라면 그것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지독한 여지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을, 아니 꼭 알고 있어야만할 시장에게 말해야 합니다. 청계천은 복개했다 복원할 수 있지만 이번 버스 개편으로 입은 시민들의 가슴에 상처는 좀처럼 치유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슴에 상처를 않고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것이 생태도시(문화를 드러낸 청계천이 서울을 얼마나 생태도시로 만들지는 의문이지만)가 가져올 안락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얼마 전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작품을 보는 내내 저는 묘한 흥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끼는 ‘부러움’이나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 하나를 남기고 떠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남자의 흔적을 평생 쫓아가는 여자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차라리 상투적이었습니다. 현실과 허구, 실제와 영화가 구분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독특한 연출도 신선하긴 했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격동의 세월과 함께 진행되는 주인공의 삶은 <포레스트 검프>나 <효자동 이발사>에서 보았던 것이니 그것도 저를 압도할만한 것은 아니었겠죠. 제가 압도된 것은 엉뚱하게도 주인공 치요코의 단호한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것은 그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그 유명한 이 작품의 대사가 회한이나 자조의 울림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방식,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체에 대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배워가는 치요코의 모습에서 엉뚱하게도 그렇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면 억지일까요?
중국 장가계에 가면 토가족이란 소수 종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무척이나 즐기고 친절한 이 작은 체구의 소수 종족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결혼 풍습 때문입니다. 토가족의 여인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발등을 은근하게 밟아 자신의 의사를 표시한다고 합니다. 발등을 밟힌 남자는 여자의 집에 찾아가 하루를 자야하는데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새 노래를 불러 예를 차리고 아침에 나와야 한다는 그들의 풍습을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도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여자의 선택과 남자의 선택을 모두 존중해주는 그들의 지혜는 그들이 즐기는 노래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선택은 주임됨을 전제로 합니다. 시간은 참 단호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부와 상관없이 잘도 흘러갑니다. 물론 그 시간의 격랑 속에는 늘 어처구니없이 떠밀려가는 우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예산과 불편함을 강요당하면서도 서울시내버스 개편을 개선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했기 때문이겠죠. 시행 전에 다양한 방식과 여러 시행 시기 중에서 최상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겐 없었던 탓입니다. 그래서인지 <천년여우>의 치요코에게서 볼 수 있었던 자기 삶에 대한 단호한 선택과 토가족이 보여주었던 배려를 전제로 한 선택이 우리에게 더욱 아쉬운 것이겠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보셨습니까?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불행히도 이 작품의 경고는 아직 유효하기만 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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