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장과 토우슈즈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80년대에는 디스코텍을 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놓고 즐기기 힘들었던 1980년대의 대학가에서 나이트클럽에 간다는 사실이 떳떳할 수는 없는 일이다보니, 그러한 겸연쩍음을 닭장이라는 비어로서 상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닭장이라는 말에는 다소의 경멸내지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비극은 이렇게 스스로 닭장이라고 비하하며 그 곳에 가고 싶어 했고, 더 큰 비극은 춤추는 그곳에서 춤추는 일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입니다. 닭장이 아주 친숙한 친구들, 속칭 죽돌이들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화려한 조명과 음악소리에 압도되어 춤을 제대로 출 수 없었고, 사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춤을 제대로 출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닭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십여 명이 원을 만들고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표면적으로야 그 집단의 소속감과 우의를 다지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속내를 들춰보면 잘 추지 못하는 춤을 집단의 힘으로 커버하려는 시도했습니다. 옆에서 밀어 넣으면 못이기는 척하고 원의 중앙에 나가서 춤을 추면, 평소 마음에 있던 남학생이 파트너를 자청하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자신들의 춤이랄 것도 없는 몸짓을 보여주면, 원을 이룬 친구들은 세상에 그보다 나은 춤은 없다는 듯이 환호성을 질러줌으로 해서 서로 어설픔과 무안함을 넘어서곤 했죠.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압제로 인하여 하고 싶던 것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시절, 애마부인이 이유 없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달리던 그 시절, 기본만 내고 들어가면 물 쇼, 불 쇼, 어우동 쇼까지 감상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원을 이루고 군무(群舞)를 추던 20대의 모습들은 매우 아이러니하고 중의적인 슬픈 풍경이었습니다.
요즘 춤이 열풍이랍니다. 학교에서도 축제 전후가 되면 등장하는 댄스 동아리의 역동적인 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태권도와 권투를 에어로빅과 결합시킨 태보(Tae-Bo)에서부터 매력적인 자극인 살사댄스 그리고 사교댄스에 이르기까지 댄스의 열풍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열풍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계층이나 특정 연령을 뛰어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고 예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춤은 음지의 문화였죠. 가무악(歌舞樂)이 하나였던 원시종합예술형태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본시 춤은 광장의 문화였습니다. 그것은 좁은 공간에서 혼자서 추는 춤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더불어 함께했던 이것인 음지로 들어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먼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기에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의 춤문화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양공주 문화와 기지촌 문화와 결합하면서 밀실의 문화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60-70년대에 효율성만을 중심으로 한 성과주의로 인해 일과 여가의 기형적인 불균형 구조를 낳았고, 그 결과 술집여자와 나누는 춤, 바람난 여자의 징후 등으로 집중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신문에 심심하면 등장하던 카바레에서 잡혀온 아줌마들 사진과 접대문화 운운하며 등장하던 술집여자와 춤추는 중년들의 하반신 사진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저는 문예극장 대극장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억압된 현실 속에서 춤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변형(deformation)을 꾀하는 젊은이들의 숨소리에서서 해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꼭 <Shall we dance>가 아니더라도 중년부부가 음악에 맞추어 완급을 조절하며 스텝을 맞추는 모습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그것은 단지 일이 곧 삶이 아니라 일은 삶을 더불어 누리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여유로운 사고, 부부가 함께 하고픈 것을 만들고 실천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 제게 몹시 절실하기 때문만은 아니겠죠. 그런 눈으로 보면 몇 년째 브라운관을 압도하는 댄스그룹의 격렬한 춤사위도 생명의 몸짓으로 넉넉하게 볼 수 있습니다. 때론 몸은 따르지 않아도 따라하는(유승준의 가위춤까지는 각이 나왔는데) 제 모습을 보며 웃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도 춤이 주는 또 다른 혜택이라면 지나칠까요?
둘째가 식탁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종아리를 모아 세웠다 풀었다 합니다. 이웃집 아이가 입었다는 발레복이 탐이 나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넉넉하게 보아주어도 통통한 녀석의 허벅지며 종아리를 보며 녀석의 과욕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춤이 자발적인 생명의 파동이었듯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생명의 움직임이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여 녀석이 발레복이 입고 싶다면 사주겠지만(제 언니 것이 있죠) 토유슈즈를 신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할 때 격렬하고 때론 우아한 자신만의 춤을 보일 수 있는 40대를 저는 꿈꿉니다.
2004년 《오픈아이》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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