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살면 다냐?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비 오는 날에는 자장면이 먹고 싶다던 시인이 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며 야간학교 국어교사를 했던 그분이 끼니를 놓치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허겁지겁 비워내던 한 그릇의 자장면에는 고단한 일상이 자장이 되고 면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한 주 용돈이 5000원이던 대학시절,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했죠. 토요일에 강의가 없는 것은 순전히 제 용돈이 그 하루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기던 시절이었지요. 학교 앞 시장에서 500원짜리 국수를 사 먹고 나머지 돈으로 사서 읽던 시집들. 그것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읽다보면 어느새 암송할 수 있게 되면 술자리에서 약간의 취기를 가장해서 암송하던 치기어린 시절이었지요. 자취하던 녀석에게 집에 김치 한 포기 가져다주고 그것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던 그 시절을 전 가끔 풍요의 시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을 요즘 웰빙(well-being)이라고 부르지요. 그것이 꼭 유기농 채소를 먹거나 휘트니스 클럽에서 달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한 삶이 품목들을 채워가며 자신의 사람값을 높이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사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사람값을 제대로 못 받고 살고 있다는 뜻이겠죠. 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사람값의 맨 마지막 항목이라는 것이죠.
하루는 선배 교수님이 아침에 욕실에 들어 간 초등학교 3학년 딸이 나오지를 않아 욕실을 열어보니 딸아이가 울고 있더랍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아이를 달래고 보니 아이가 세면대를 잡고 그러더랍니다. “아빠 사는 게 힘들어!”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웃다가 모두들 말없이 쓴 소주만 거칠게 비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겝니다. 강의를 마치고 출판사에 들려서 회의하고 자정이 다돼서 집으로 들어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창고의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결국 차를 갓길에 세웠던 것이……. 만만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만만하면 삶은 또 뭐 그리 살만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잘 사는 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자고 우린 필사적입니다. 요리 프로그램도 전에는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전부 맛집이나 맛난 요리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입니다. 입고 먹고 사는 곳에 힘을 모으다보니 정작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지 따위에는 좀처럼 생각을 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한없이 비대해지고, 비대해진 욕망만큼 결핍을 낳게 되고, 결핍은 다시 욕망을 낳는 악순환에 치여서 생각하고 의미를 만들어갈 우리 삶의 몫들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영양실조고, 17%는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협박조의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 먹고 잘 사는 일은 항상 주변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유기농 농산물을 먹고 비만해진 몸을 팻다운을 먹고 운동을 하며 줄여가는 것은 마치 로마인들이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먹고 토했다던 그 야만을 ‘지금 이곳’에서 되풀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인들이 그런 도락을 즐기는 동안에 뙤약볕에서 땀흘려야했던 노예들이 있었고 굶어죽어 가던 식민지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함께하지 않고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던 로마인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일 수밖에 없었고, 서로가 서로의 천국을 파괴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은 제가 여기서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되겠죠.
웰빙은 단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돌아보고 살피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허겁지겁 때늦은 자장면을 먹던 시인이 먹었던 것이 어디 면과 자장만이 아니었듯이, 점심과 바꾼 것이 시집만은 아니듯이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것이 유기농 채소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염된 채소라도 웃으며 함께 나눌 사람들, 그들과 함께 채워 가야할 우리 삶의 시간들, 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갈 의지와 소양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따듯한 사랑이 우리가 우리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웰빙의 조건들이 아닐까요?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아이에게 손톱이 퍼렇게 알로에 껍질을 까서 강판에 갈아서 밤새 문질러줬다는 선배나 가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밤새 자신의 침을 발라주었다는 친척형님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배워가는 요즘입니다. 봄이 익어갈수록 꽃이 흐드러집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색깔이나 향 때문이 아니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 봄 안에 있어 행복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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