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베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밤늦게 퇴근하여 들어와 보면, 둘째의 책상에는 오늘 본 책들이 잔뜩 쌓여 있고, 제 어미와 함께 공부했을 식탁에는 서너 개쯤 까먹은 귤껍질과 틀린 문제만큼 만들어졌을 지우개 찌꺼기가 수북하다. 녀석은 들어서는 내게 느닷없이 안기지만 이제 자야한다는 아내의 말에 투덜대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내의 베개를 들고 구시렁대며 제 방 침대로 간다.

이 이상한 습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내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둘째에게 아내의 베개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는 알고 있다. 아내의 베개를 두 팔로 꼭 껴안고 그것도 부족해서 다리로 다시 힘껏 조이듯이 끼고는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녀석의 모습만 보아도 그것은 쉽게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둘째의 행동은 Charles M. Schulz의 만화 <피너츠>에서 엄지손가락을 물고 담요를 끌고 다니는 라이너스처럼 부모의 맞벌이로 인한 애정 결핍이 원인은 아니다. 전업주부인 아내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넘치면 넘쳤지 부족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둘째의 또 다른 이상한 잠버릇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녀석은 제 방문을 항상 2/3쯤 열어 놓고 잔다. 푹 자라고 문이라도 닫아줄려고 하면, 언니가 놀려주려고 아내의 베개를 감추었을 때처럼 아주 야단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대답이 그럴 듯하다. 늘 자기 곁에 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둘째에게 엄마는 지독한 중심이다. 흔들리지도 변하지도 않는 중심, 언제나 자기 뒤에서 어떤 경우에도 지켜줄 든든한 중심, 누구도 뭐라 그럴 수 없는 합법적인 부조리, 그 중심이 둘째에게는 엄마인 것이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첫째는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 침대와 자기 침대를 묶어놓고 아내의 손가락을 만지며 잠이 들곤 했었다. 돌아보면 나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할머니의 말라버린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잠이 들지 않았던가? 할머니가 싸주시던 도시락으로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와 힘들어할 때, 아무 것도 모르지만 너는 내가 안다는 표정으로 손자를 끝까지 지켜봐주시던 그 든든한 후견(後見). 둘째에게 아내의 베개는 엄마요 중심인 것이다, 내게 할머니의 젖가슴이 든든한 후견이었던 것처럼.

일본 준아이(じゅんあい)물의 대표작인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서로가 서로의 중심이 되는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는 까닭에 죽은 엄마가 비의 계절에 돌아온다는 황당한 설정을 너무도 가볍게 넘어선 작품이다. 비의 계절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미오가 남아야 할 아픈 남편을 위해 요리법이나 세탁법을 어린 아들에게 가르치고, 어린 아들을 위해서는 성년이 될 때까지의 생일 케익을 미리 주문하는 모습은 자신이 그들의 중심임을 절절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중심이 되고 있는 한 타쿠미의 가족은 아프지만 아프지 않고, 삶과 죽음으로 갈렸으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이번 겨울이 유난히 길 것이라고 한다. 이 겨울을 어떻게 건너가야할지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졸업을 앞 둔 4학년 제자들은 사회에 나가 취업을 해야 한다. 또 그들의 후배들은 해외 인턴과 어학연수를 나가고 있다. 터무니없고 느닷없이 찾아온 위기 앞에서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만을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은 위기를 인정하고 그것에 당당하게 맞서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 지독한 혹한의 계절에 사회로 나가야하는 제자들과 해외로 인턴과 연수를 나가야하는 제자들에게 비록 변변한 경제적 후원이 되어주지는 못하더라고, ‘아내의 베개할머니의 젖가슴처럼 그들의 변하지 않는 든든한 중심이 되어 주고 싶다. 제자들이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고 후견이 될 수 있는 그 자리, 난 그곳에서 아내의 베개이거나 할머니의 젖가슴이 되고 싶다

2009년<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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