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사내의 커다란 빈 자리


 박기수(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 사내가 죽었다. 아주 작은 키에 작게 웃을 줄 알았던 그가 폐암으로 죽었다. 그의 미소처럼 늘 향기롭게 타오르던 그의 담배연기가 그를 삼켜버렸다. 담배를 재대로 배워보지 못한 나도 그의 출판사에 들르는 날이면 늘 내 몫보다 많은 담배를 축내고 나왔다. 북한산이 환하게 보이던 그의 사무실은 아주 작았지만 창만은 덩치에 비해 큰 편이었다. 마치 연극 전문 출판만을 고집하던 그 출판사의 매출이 보잘 것 없었고, 때문에 그의 생활은 참 궁핍한 것이었지만, 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이나 의지가 더할 수 없는 풍요였던 것처럼.

그가 죽었다. 잡지 일로 그와 내가 낯선 고장을 다니러 가던 열차 안, 점심 대신 세 병의 맥주를 나누어 마시며 나누던 삶의 이야기들. 생활고로 아내와 3년쯤 헤어져야했던 이야기, 그 헤어졌던 시간의 아쉬움 때문에 밤마다 아내와 담배 한 대를 나누어 피우고, 침대에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다며 행복해했던 그가 금요일 오전 10시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의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하던 작년 연말, 그의 아내가 만들어온 김치 만두의 포만감, 그 시린 새벽의 든든한 사랑을 두고 그가 갔다. 기름 값을 아낀다며 LPG차로 바꾼다며 좋아하던 그가, 올 여름 세검정 보신탕 집에서 참이슬을 나누어 마시자던 그가, 따뜻한 커피를 타주고 담배를 권하고 교정을 보는 옆에 슬며시 캔맥주 하나쯤 놓아주던 그를 태운 것은 담배 연기만이 아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그는 혼자였다. 초여름의 햇빛을 사무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끌어다놓고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그의 출판사에는 사장이자 유일한 사원인 그만 남아 있었다. 그는 작게 웃으며 이 일 저 일을 상의했고, 그의 아내와 밤새 울고 웃으며 읽었다던 나의 살아가는 이야기원고를 그가 출판하고 싶어했지만 그에게는 작은 책 하나 만들만큼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야구모자를 즐겨 쓰던 그가 만들어낸 책이 모두 몇 권이었는지, 그 책들의 수준은 어떠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판매되었는지 연극에 문외한인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어했는지, 그 책을 향한 그의 의지가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 겨우 조금 가늠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모든 것이 위기라는 시대에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일을 오로지 순수한 열정만 가지고 견뎌내는 일이란 결국엔 자신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일이라고 우울하게 깨닫는다. 그와 처음 만나 비워낸 참이슬과 흑맥주의 아리한 맛이 아직 입에서 쓰다. 그를 보내고, 나의 우울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다. 이제 그가 마지막까지 가슴에 안고 갔던 견고한 의지처럼 나도 다시 한번 마음을 갈무리해야겠다. 오늘은 문득, 창 넓은 그의 사무실에서 그가 녹여준 커피를 마시며 그의 향기로운 담배를 피우고 싶다.<행화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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