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니와 한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둘째의 이가 엉망입니다. 아내나 제가 닦이느라 닦였는데, 아이가 자다가 우유를 먹는 습관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며칠 전 아이 이를 닦이던 아내가 놀라서 가보니 아이 어금니부터 성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치과를 데려가야 한다고 아내와 저 모두 생각을 했지만, 특히 생각하면 즉시 해야 하는 아내의 성격에 미적대는 것을 보면, 아내는 제 논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문제는 제 논문이 몇 개가 연속되는 바람에 아내는 혼자서 아이를 치과에 데려가는 벅찬 일을 감당하기로 했던 모양입니다.
몇 해 전에 첫째의 이 때문에 친구 치과에 데려갔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치료를 잘 참던 첫째가 어금니를 덮어씌울 이를 고르라고 하자 핑크색은 없냐고 해서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는 첫째와 전혀 다릅니다. 첫째의 참을성이 둘째에게 있을 턱이 없으니 아내는 어제 치과 예약을 하고 와서부터 걱정을 했습니다. 아이가 참지 못하면 수면상태에서 치료 받는 것이 있는데, 인근 치과에서 그거 하다가 아이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둥, 아내는 밤새 걱정을 했습니다. 아침에 강의가 있어서 학교에 가서도 저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전화를 했더니 예상했던 대로 울었답니다. 세 명이 달려들어 아이를 잡았으니 잡은 사람이나 잡힌 아이나 모두가 고역이었을 일입니다. 어쨌든 아이는 오늘 두 개의 이를 치료했습니다.
사실 어제 예약을 하러 가서 아이가 입을 잘 벌렸다고 치과에서 장난감 반지를 준 모양입니다. 아니는 그것을 받아 제 언니를 가져다주겠다고 모처럼 가상한 생각을 했다가 오늘 큰 고생을 한 것입니다. 전화에 대고 자기가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지 아기 소리로 울먹대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어제는 둘째의 첫 선생님이 집에 다녀가셨습니다. 둘째는 35개월인데 나이는 다섯 살입니다. 11월생이라서 억울하게 나이를 먹은 것이죠. 제 언니가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엄마와 매일 저녁 공부를 하는 모습이 부러웠는지 읽지도 못하는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달라고 조르다가 요즘은 제가 지어서 읽고는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도 글을 가르쳐야겠다고 아내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첫째의 일학년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분주하고, 둘째가 첫째만큼 차분하지 못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내가 첫째의 학습지 하나와 미술학원을 정리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명목상으로야 첫째의 영어 학원을 옮기면서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둘째가 내심 걸렸던 모양입니다. 드디어 어제 싱크빅 선생님이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저는 서재에 있었지만 무척 좋은 선생님 같았습니다. 둘째는 매일 첫째의 선생님을 제 선생님이라고 우기더니 정작 제 선생님이 오시니까 부끄러워서 인사도 제대로 못합니다.
이제 둘째도 글을 배우려나 봅니다. 열 칸짜리 노트에 할아버님께 제가 글을 배우던 나이가 둘째보다 어렸을 때였을 텐데,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나는 일은 아마도 글 배우는 일이 우리 성장에 잊기 어려운 기억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저를 그토록 이뻐해주시고 늘 함께 생활했던 할아버님의 음성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글을 배우던 때의 기억은 새로우니 말입니다.
아직 둘째는 치료해야할 이가 남아 있습니다. 한글을 한 자 한 자 익힐 때마다 치료가 진행되고, 혹은 젖니가 빠지고 새 이가 나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녀석이 새벽 3-4시쯤에 일어나 안방으로 건너와 문을 열고 “엄마 나가서 자자”하고 아내를 거실로 데리고 나가는 일은 없겠지요. 혹은 아침에 일어나 안방 문을 열고 “안녕히 주무셨습니다.”라고 어설픈 아침인사를 하는 일도 없어지겠지요. 그렇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고 가르쳐 주어도 녀석의 고집은 아비의 교양을 늘 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어설픈 순간이 저는 늘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이만 보면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고 온갖 포즈를 요구하나 봅니다. (20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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