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을 넘어선 스토리텔링의 매혹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시대다.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story)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고(tell) 즐기게 할 것이냐(ing)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를 훼손시켜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내용만큼이나 어떻게 이야기 하고 어떻게 즐기게 할 것이냐도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북극의 눈물>, <한반도의 공룡>, <누들로드>, <차마고도>, <아마존의 눈물> 등등 특별 기획 다큐멘터리는 물론 <다큐멘터리 3일>, <인간극장>과 같은 정기적인 다큐멘터리까지 가히 다큐멘터리의 폭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지상파뿐만 아니라 케이블에 위성까지 다수 채널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채널별로 차별화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저렴한 비용을 투자해서 보다 광범위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로 경사되고 있는 실정에서 솔직담백한 다큐멘터리의 진지한 행보에 매혹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세계적인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체험함으로써 리터러시 능력은 물론 기대수준까지 한껏 높아져 있고,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무엇보다 지배적인 채널에서 고만고만한 컨셉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출연자 그리고 공허하기만한 말장난과 불쾌할 정도의 막말이 난무하는 오락 프로그램과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막장 드라마 그리고 10대들의 전유물이 된 가요 프로그램 등으로의 편향이 최근 다큐멘터리 붐으로 이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다큐멘터리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알고 싶으나 알려주지 않던 진실이나 차가운 이성 중심의 지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금 이곳의 진실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다루고 있는 <지식e>와 <다큐프라임>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들은 책으로 다시 출간되어 방송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콘텐츠 업계에서 소위 말하는 One Source Multi Use의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구현 가능한 만화나 소설 등의 도서류가 원천콘텐츠로 먼저 출시되어 시장성 검증을 받으면, 그 결과를 보고 매스 미디어와 결합한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같은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 One Source Multi Use 중 장르전환의 예인데, 이들의 경우는 프로그램이 계속 방송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노출이 가능하고, 이미 방송을 통해 관심을 끈 아이템에 대하여 문자를 통한 말하기로 보완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개가 가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전문가들은 스토리가 내러티브를 낳고, 내러티브가 스토리텔링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스토리는 구술 언어를 중심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컨텍스트를 확보한 상황에서 전달되는 내용중심의 이야기를 말한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밑도 끝도 없이 ‘옛날 옛날에’라는 관용구로 시작할 수 있고, 이야기를 듣던 여러분이 잠들면 언제든 끝낼 수 있었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인 스토리의 유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스토리가 문자언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익명의 다수 대중들을 향하는 도서의 형태로 바뀌면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컨텍스트를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고 효율적인 이야기 방식이 필요했고,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내러티브다. 정해진 분량 안에서 익명의 다수 대중을 향해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의 고안과 활용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문자라는 매우 제한된 표현방식으로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는 더욱 정교하고 전략화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디지털 문화환경과 결합함으로써 보다 창조적인 형태의 이야기로 전개된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쌍방향성, 네트워크성, 통합성이라는 디지털의 특성을 창조적으로 수납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이야기를 구현할 수 있게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단선적인 발전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기대하는 효과에 따라서 이 세 형태는 전략적으로 선택되어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식e>가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도서로서도 전폭적인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현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은 정해진 시간에 다양한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멀티미디어적 구현이 가장 효과적인 말하기 방식이라고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말하려는 내용과 목적 그리고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송 시간의 제한은 정보 제공 시간의 제한을 가져온다는 치명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한다면 그 한계는 더욱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e>의 경우에는 멀티미디어적 요소를 지극히 제한적으로 활용하면서 지배소의 선택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짧은 시간에 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정보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이를 완과 급을 조절함으로써 향유자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이 과정에서 상술되어야했거나 더 생각해볼 거리를 보완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생각해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어 취사선택하고, 방송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와 책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방송만 보았거나 책만 보았다는 것이 온전한 체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독립적인 스토리텔링을 즐긴 것이 된다. 물론 둘 다 보았다면 그 가슴울림은 두 배가 되었겠지만.
<지식e>의 스토리텔링은 매혹적이다. 그 압도적 매혹의 가장 중심에는 그것이<지식e>의 컨셉처럼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지식에 대한 목마름, 박제가 되어버린 다른 세계의 지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아픔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 <지식e>에는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지혜라고 해도 좋을 내용을 <지식e>가 굳이 지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죽어버린 지식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며 무거운 진혼에 다름 아니다. 지금 이곳의 우리가 그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고 있지만 나서서 드러내기 어려운 우리의 부끄러움을 그것이 가슴으로 되묻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들의 천국》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던 故 이청준 선생의 선지적 서문이 기억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일게다.
2009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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