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 주를 달리다.
8월 1일 산타페→오클라호마시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늘은 산타페에서 오클라호마시티로 이동을 했다. 뉴멕시코 주 산타페를 출발해서 텍사스 주를 건너 오클라호마 주 오클라호마시티에 도착하는 531마일(849㎞)의 여정이었다. 구글 지도는 9시간 30분정도를 예상했지만, 휴식시간과 식사시간 등을 합하니 10시간 이상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세도나에서 욕심을 부리다가 앨버커키에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던 경험 덕분에 여행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욕심을 부리면 다른 곳을 놓친다는 것, 미국에서의 여행은 해가 있을 때까지만 가능하다는 것, 1장시간 운전은 운전하는 나보다 아이들을 먼저 지치게 한다는 점, 아이들이 지치는 순간 여행은 멈춘다는 것 등의 깨달음이었다.
오늘은 온 가족이 아침부터 서둘렀다. 지난 여행의 경험으로 숙소로 가지고 올라갈 짐도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차 트렁크에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서 짐을 쌀 때, 여정에 맞추어 짐을 분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몇 번의 여행 덕분인지 아내의 노하우가 발휘되었다. 옷 트렁크 하나, 물을 차갑게 보관할 아이스백, 2간식과 약 등을 담은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 노트북과 카메라 가방이 숙소로 가지고 올라간 짐의 전부였다. 그러면 다음 날에도 아내와 내가 후다닥 짐을 싸면 각자 맡은 짐을 가지고 체크아웃 하면 되는 일이었다.
산타페 비지터 센터. 직원과 자원봉사자가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담아가지고 차로 돌아오니 유진이가 어제 들렀던 비지터 센터를 다시 들러야 한단다. 이번 횡단여행을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각자 어떤 형태로든지 여행의 기록을 남겨보라고 했더니, 효진이는 여행일기를 쓰고 유진이는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 어제 그곳에서 가져오지 못한 자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가장 손쉽게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은 비지터 센터다. 내 경우에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AAA사무실에 가서 무료지도와 안내 책자를 먼저 받고, 그것을 참고하여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서 숙소 예약을 한다. 그리고 여행지에 가서는 제일 먼저 비지터 센터를 찾아간다. 그곳에 가면 정확한 지역 안내 지도와 함께 효과적인 동선까지 체크해주고, 거기에 내가 더 필요로 하는 것을 물으면 아주 친절하고 꼼꼼하게 대답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현지 여행안내 자료들과 할인 쿠폰 등을 풍부하게 제공받을 수도 있으니 더욱 유용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옐로우스톤에 갔을 때에는 비지터 센터에서 친절하고 상세한 안내를 받은 후, 어느 식당이 싸고 가장 맛이 좋으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랬더니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직원이 “옐로우스톤의 식당들은 싸지는 않지만 맛은 모두 있다”라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비지터 센터를 나오면서 나는 캐니언 로드에 잠시만 들렸다가 출발하자고 제안을 했다. 어제 캐니언 로드를 올라가면서 사진을 찍느라 내가 자꾸 뒤처지자, 아내는 편하게 사진을 찍으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갤러리를 따로 돌았다. 거리와 풍경을 찍느라 내가 놓친 갤러리에서 아주 재미있는 작품을 보았다는 아내의 말에 출발 전에 꼭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Fleet wood Gallery 전경돠 입구에 전시된 바이슨 그리고 붉은 말
그곳은 Fleet wood Gallery라는 곳이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문을 열었을까 걱정을 했는데, 마침 정원 문을 열고 있었다. 정원 문을 열고 있는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전시장을 구경할 수 있는지, 구경을 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Please!”란다.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어서 다소 얼떨떨해 있는 내게 유진이가 알려준다. 흔쾌히 허락하는 표현이란다. 상대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때, 흔쾌히 승낙하며 하는 표현이란다.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하는 유진이에게서 오늘도 하나 또 배웠다.
종이학을 소재로 각기 다른 세 가지 표현이 이채롭다. 철판으로 종이학을 접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주변 소재나 조명이라는 맥락에 따라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이채로운 작품이었다.
고맙다고 하고 채 열지도 않는 전시장에 들어가서 문제의 작품들을 보았다. 철판을 소재로 오리가미(origami) 콘셉트의 작품을 만든 것도 기발한데, 작품마다 아이디어가 거침없었다. 어제 효진이가 작품을 보자마자 “Rock-Scissors-Paper!”라고 해서 갤러리 주인을 놀라게 했다는 작품은 언어를 즉물화(卽物化)한 단순한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했다.
Rock-Scissors-Paper
비행기 설계도와 종이비행기
구겨진 종이 컨셉의 철제 오리가미
비행기 설계도를 정밀묘사 해놓고 그 아래 다시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그려놓아서 두 이미지를 충돌시킴으로써 인식의 틀을 깨고, 그 그림에서 비행기가 접혀서 나오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림과 실재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발상은 한참 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틀 부수기와 즉물적 변환은 마치 잘 만들어진 극적 전환(adaptation)을 보는 것 같았다. 구겨진 종이를 펴는 과정 혹은 반대로 종이를 구기는 과정을 철판으로 보여준 작품은 존재의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의 양태를 일시 정지시킴으로써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이 작품의 시도는 사진의 문법과 같은 맥락이었다. 시간을 정지시킴으로써 존재를 시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힘, 그것이었다.
작품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유진이와 이야기 하는 동안 주인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고,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었다. 질료의 변화와 맥락의 변화를 통하여, 이미지와 실재의 경계를 허물고, 존재의 시간을 보여준 이 작품들을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주 소박한 견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Fleet wood Gallery를 마지막으로 산타페를 떠났다.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산타페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텍사스주 스텝에서 만난 회오리바람. 작고 큰 회오리바람 서너 개가 벌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차는 거침없이 잘 달렸다. 뉴멕시코 주를 건너서 텍사스 주에 이르자 풍경은 더욱 삭막해지고, 뜨겁고 메마른 바람은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얼바인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 주를 자주 건너게 된다. 스텝과 사막 기후인 네바다 주를 건너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에 이곳의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옆에 달리는 대형트럭의 그늘만으로도 기뻐할 정도였다. 그런데 텍사스를 달려보니 네바다 못지않았다. 메마른 스텝을 가로지르는 I-40위로 마른 바람이 거칠게 불어오더니, 마침내 회오리바람이 되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회오리바람에 비하면 세도나에서 앨버커키로 가는 길에 만났던 회오리바람은 소박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규모는 아니더라도 제법 규모가 있는 것이 동시에 벌판을 가로질러 서너 개씩 달려드니 처음에는 경이롭더니 점점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여행을 하면서 동일한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단조로운 풍경이 지루하게 계속 되었다. 이토록 삭막하고 메마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텍사스 오스틴에 살고 있는 유진이 친구 서연이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서연이는 유진이의 절친인데 우리보다 한 달 전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아빠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태어나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빠가 텍사스로 의대를 진학하게 되어 서연이도 함께 텍사스로 간 것이었다. 매일 유진이와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070전화를 붙잡고 말리지 않으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통화를 하는 사이였다. 핸드폰을 주고 텍사스를 지나고 있으니 서연이에게 통화를 해보라고 했더니 유진이가 아주 신이 났다. 서연이는 학원 쉬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곳에 와서도 한국 아이들은 바쁘다. 사실 우리에게 텍사스는 낯선 동네다. 내 기억 속의 텍사스는 박찬호가 소속되었던 텍사스 레인저스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주지사를 지냈던 동네라거나, 목축지와 유전이 많은 곳이라거나,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기억에는 없지만 나타샤 킨스키(Nastassja Kinski)가 주연을 했던 영화 <파리텍사스>(Paris, Texas, 1984)의 그것이 전부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게 미국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딱히 알 이유도 없지 않은가? 미국에 와서 겨우 그것이 지도 어느 자락쯤에 있다는 것과 전에 텍사스공화국이었다는 것 그리고 멕시코-미국 전쟁의 계기가 되었고,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 발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렇게 막연한 관념일 뿐이었던 텍사스는 그것의 가장 북쪽 도로를 달리면서 비로소 실재로 다가왔다.
메마른 바람만큼이나 벌레도 집요하게 달려들어 죽어갔다. 차창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서 주유할 때마다 지워야 했다.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내려서서 기름값을 보니 비쌌다. 그렇게 대규모 유전이 많다던 텍사스의 기름값이 얼바인 만큼 비쌌다. 그 주에 유전이 많으니 기름값이 싸야한다는 법은 또 어디 있으랴마는 그래도 유전이 있는 지역이니 싸야하는 것 아닌가? 주유를 하면서 차창에 부딪혀 죽은 벌레들의 흔적을 부지런히 지웠다. <아바타>의 나비족이 되어 햇빛은 피했는데 벌레는 피할 수 없었다. 달리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벌레들의 죽은 흔적이 유리창에 남아서 사진에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인도인이 운영하는 작은 주유소였는데, 식당을 같이하고 있어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보니 음식도 형편없고 지저분해서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더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는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고 십 분쯤 달려야 하는데, 창을 열면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게다가 앞좌석의 나와 유진이는 햇빛이 무릎까지 내려서 따가울 정도였고,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목 뒤쪽이 익어가고 있었다. 무릎과 목이야 수건 등으로 가리면 되는데, 더위가 문제였다.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에어컨을 계속 틀었고, 덕분에 콧물을 훌쩍이는 앞좌석의 나와 유진이는 후드로 앞섶을 가렸는데,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더위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조그마한 차 안에서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체감하는 온도가 이렇게 다른데, 성별, 연령, 지역, 계층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각자의 이해와 취향은 또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것을 단순화하고 일괄적으로 몰아가며 일사분란함을 질서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결국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밤 인터넷으로 확인한 한국의 무상급식 선택투표가 발의 되었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거웠다. 무상급식 문제는 평등의 문제 이전에 어린 아이들의 밥에 대한 문제라는 점, 밥은 양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절박한 문제라는 점, 그래서 밥으로 인한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번 문제의 핵심이다. 예산의 효율적 사용은 시의 책임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 이전에 다른 예산들은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도 필수불가결한 예산이 있다면 먼저 지출해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닌가? 나는 적어도 한강르네상스보다는 아이들의 밥에 먼저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너와 나의 이해를 따지기 이전에, 적어도 밥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3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달리다가 그래도 가끔씩 에어컨을 껐다. 나와 유진이가 훌쩍인 탓도 있지만 효진이가 에어컨에 아주 약했다. 효진이는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면서도 에어컨만 조금 키면 감기에 걸리거나 더 심한 경우도 생겼었기 때문이다. 4 그러니 조금 덥더라도 에어컨을 끄고 가끔씩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더위에도 유진이는 춘옥이를 꼭 껴안고 잔다. 자다 깨서는 춘옥이 일광욕을 시킨다면서 옷을 벗겨 대쉬보드 위에 올려놓는다. 아내와 내가 놀려도 소용없는 일이다. 춘옥이는 유진이의 소중한 곰돌이 인형이다. 그래도 이름이 춘옥이가 무엇인가? 9학년이 무슨 곰돌이 인형이냐고 놀려도 유진이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위안인가보다.
유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06년 이모가 살던 싱가포르에 갔다가 말레이시아까지 가서 1년을 지내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떠나기 전에 외삼촌이 사준 인형이 춘옥이다.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자기 반 아이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하소연하던 유진이는 이모가 싱가포르에 같이 가자는 말에 겁도 없이 그러고 싶다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었다. 우리는 어학연수 하는 셈 쳤고, 어려서부터 이웃에서 같이 생활했던 이모에다가 또래 오빠 준성이가 있었고, 늘 딸 하나를 갖고 싶다던 이모부까지……아내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싱가포르에 가서 아이가 적응할 때까지 한 달 간 같이 있다가 돌아왔고, 그 후에도 아이가 보고 싶다며 밤마다 눈물로 지새기 일쑤였다. 덕분에 1년 동안 아내는 체중이 7㎏나 빠져 버렸다. 어려서 낯선 곳에서 혼자 생활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꿋꿋했다. 아니 여태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유진이의 춘옥이. 이 녀석이 암놈인지 수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진이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 한 살짜리 아닌가? 아무리 이모가 잘해줘도 낯선 나라에서 생활하는 열 한 살짜리에게 무섭고 두려운 것이 왜 없었겠는가? 그 때 자기 방에서 혼자 잘 때 무서워서 춘옥이를 늘 꼭 껴안고 잤단다. 생각해보면 다른 가족과 함께 있던 부모도 아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는데, 고작 열 한 살의 아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는 그 이야기를 춘옥이에 대한 애착으로 계속 이야기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들었다. 늘 그렇지만 아빠는 바보다.그래서인지 춘옥이에 대한 애착은 아내의 유진이에 대한 그것과 닮았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춘옥이를 욕실까지 데리고 다닌다. 유진이가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을 텐데, 늘 언니가 끼고 다니는 춘옥이가 부러웠는지 언니가 수련회에 간 사이에 효진이가 일을 저질러 버렸다. 춘옥이의 자라지도 않는 털을 깎아주겠다고 가위로 가슴에 상처를 낸 것이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유진이는 화를 낸다. 어쨌든 유진이의 춘옥이는 그동안 몇 번 세탁을 했음에도 때가 탔다. 요세미티를 다녀와서 아내가 손세탁을 했는데, 건조기에서 눈에 상처가 날지도 모른다고 안절부절못하는 유진이의 모습은 차마 웃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때가 탔다고 이야기했더니, 앞으로는 빨지 않고 일광욕을 시키겠단다. 이제는 차에 타서 생각나면 이렇게 대쉬보드 위에 춘옥이를 올려놓고 일광욕을 시킨다. 일광욕하는 춘옥이를 보면서 바보 아빠는 그 녀석이 문득 고맙다. 우리 집에서는 정말 ‘아빠’라고 쓰고 ‘바보’라고 읽어야 하나보다.
I-40은 스텝사이를 끝도 없이 달리는 단조로운 길이었다. 덕분에 크루즈를 설정해두고 차 안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눌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다보니 결국 내가 유진이에게 당부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눈치 빠른 아내가 화제를 돌려서 유진이가 말레이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아내는 당시에 내게 서운했었던 것을 이야기했고, 효진이는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살면서도 서로 가장 잘 안다고 하면서도 속내를 제대로 몰라서 서로 상처 받고, 상처를 주고 있었나보다. 각자 열심히 산다고 뛰어다녔지만 정작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오늘은 이동일, 크게 매력적인 현지식이 없으면 간단히 먹어야 한다. 그래서 버거팅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이 버거킹 치킨텐더를 좋아했는데, 작은 조각 20개가 들어간 한 팩이 4.99달러니 아주 저렴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한참을 달려도 사만다는 조용하기만 했다. 사만다가 조용한 것을 보니 길에 큰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체로키(Cherokee)족과 관련된 관광 상품점이나 식당 광고가 늘어나고 있었다. 오클라호마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클라호마는 촉타오(Choctaw)족의 언어로 ‘빨간색의 사람들’(okla homma)을 말하는데 인디언을 의미하는 말이다.
I-40의 전경(상), 중부지역을 달리다 쉽게 발견하는 대형 십자가(중), 이제는 식당 이름으로 남은 체로키(하)
오클라호마를 ‘인디언과 서부개척의 요람’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운 것이다. 오클라호마를 개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곳에 먼저 강제 이주해 있던 인디언들을 다시 이 땅에서 몰아낸 것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 주에 살던 체로키족 영토에서 금이 발견되자 체로키족을 그곳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1830년 인디언 이주법(The Indian Removal Act) 5을 제정하고, 서부로 강제 이주시키는데 그 길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불렀다. 강제 이주하는 과정에서 15,000명 중 8,000명의 체로키족이 죽임을 당하면서 도착한 곳이 지금의 오클라호마다. 체로키족을 비롯해 소위 다섯 개의 문명화된 부족이라고 불리는 치카소족, 촉타오족, 크리크족, 세미놀족과 그 밖의 다른 인디언 부족들이 비슷한 연유와 경로로 오클라호마에 강제이주 되어 온다. 오클라호마가 1834년 인디언 왕래 법령(The Indian Intercourse Act)에 의해 인디언구역으로 정해졌던 것이 19세기말 이곳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백인들은 다시 이곳을 빼앗기 위하여 1907년 인디언 구역을 병합하여 오클라호마 주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디언 부족들은 모두 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미국 내에는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202개 부족 1,500,000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그들은 한반도 보다 넓은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잊고, 국가 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높은 실업률, 마약 및 알코올 중독, 도박, 자살 등의 문제로 고사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2010년에 미국 정부는 초기 정부가 인디언을 탄압 6하고 강제 이주 시킨 점에 사과했지만, 현재 진행형인 이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는 좀 더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준열한 미국 정부가 왜 자신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에 대해서 애써 외면했는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현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들이 왜 보호구역에 갇히게 되었는지 밝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전 그들의 땅이었던 곳에 대한 소송이 줄을 이을 것이고, 그 결과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7
오클라호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 일가가 살길을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유전이 발견되었지만 몇몇 자본가들의 몫이고, 가난한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척박한 땅과 모진 기후에 언제나 힘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 오클라호마다. 삶의 기반을 모조리 처분해서 얻은 돈으로 낡은 트럭에 온 가족을 싣고 떠나는 조드 일가의 모습은 1974년 서울로 올라오던 우리식구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8 하지만 그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척박한 땅이나 모진 기후보다 더 지독한 농장주들의 횡포와 자본의 부조리한 논리가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들이 캘리포니아의 축복어린 풍요 앞에서도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그들의 무지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재도 그러한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 소외의 대상이 이민자들이나 제3세계의 값싼 인력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토록 엄혹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길들여진 미국의 농작물과 경쟁해야하는 FTA 이후의 우리 농촌이 걱정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체로키족의 슬픈 사연이나 살기 위해 떠났던 1930년대 빈농의 모습이 이제는 그저 옛이야기처럼 팬시화 되어 거리 곳곳에 관광객을 호객하는 간판으로만 걸려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비극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체로키족이 그랬듯이 신도시 개발, 서울시 뉴타운 정책 등으로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지 않는가?
여러 시간을 달려왔기 때문에 유진의 아이팟도 밧데리가 다 되었다. 덕분에 지루해하는 가족들에게 영화 <노트북>(The Notebook, 2004)과 <콜드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미국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사랑 이야기로 넘어간 것이다. <콜드마운틴>은 강의 시간에 이야기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활용하는 작품인데 이야기를 하면서 더 감동을 느끼는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콜드마운틴>의 감독이었던 안소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의<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와 그가 제작을 맡았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2008)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어려서 주말과 일요일 밤이면 볼 수 있었던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이 떠올랐다. 어려서 우리 집에서는 저녁 7시면 어린이 방송이 끝나고 모두 공부방으로 돌아가 공부를 했었는데, 아버지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만은 챙겨서 보여주셨다. 여쭈어 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는 어린나이에 보기 어려운 영화도 있었고, 보다가 잠들던 영화도 있었다. 이따금 영화를 보다가 아버지 고등학교 때 본 영화라고 이야기를 해주시거나, 출연한 배우의 다른 작품을 이야기 해주시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영화 이야기를 하다말고 문득 그 시절, 아버지와 <명화극장>을 같이 보던 그 때의 아버지 나이를 내가 지금 지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 아이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서 제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나를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따듯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오클라호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8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조금 남아 있었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가볍게 차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마치 2006년 12월 24일 싱가포르 창이공항(Changi Airport)에 내렸을 때 느꼈던 그 숨 막힘의 압도 같았다. 서울에서는 겨울에 출발했고, 비행기에서는 내내 시원했기 때문에 공항에 내리는 순간, 기대와 어긋나며 문득 느껴지던 숨 막힘! 차에서 내내 에어컨을 틀고 왔으니 밖의 기온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크라호마시티는 절절 끓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까지 짐을 옮기는데 지열이 엄청났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오클라호마의 숙소는 매우 저렴한 곳(다른 지역 평균의 1/2 가격)을 골랐는데, 가격 대비 시설은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방으로 올라와 보니 에어컨은 이미 켜져 있었다. 시원은 했지만 우리가 언제 올 줄 알고 이렇게 에어컨을 켜둔단 말인가? 덕분에 시원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풍요가 과한 나라인 것은 분명했다.
오클라호마시티의 숙소
숙소에서 아내가 손으로 빤 빨래들
오늘은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빨래를 해야만 한다. 예약을 할 때, 숙소 정보를 보니 세탁실(Laundry room)이 있다고 해서 빨래를 싸들고 내려갔는데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세제도 없었지만 시설이 워낙 낡고 더러웠다. 결국 다시 빨래를 싸들고 방으로 올라와 아내가 손빨래를 했다. 비누로 빨고 몇 번을 헹구어 주면 내가 손으로 짜서 널었다. 아내의 말처럼 살기 위해서 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일들은 티도 나지 않는, 매일매일 반복해야 하는 고단한 것들이다.
빨래를 하고 내일 돌아볼 오클라호마시티의 중요 지점과 이동 거리 그리고 동선을 구글 지도에서 확인하고, 아이들을 재우려고 보니 모두 콧물을 훌쩍거린다. 아마도 하루 종일 차 에어컨 바람 앞에 있었고, 숙소의 에어컨 바람이 과했나보다. 약을 찾아서 먹였다. 밤이 깊어도 더위는 좀처럼 식지 않고, 숙소 전체에서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만 요란했다.
- 미국인들의 퇴근본능은 거의 신앙 수준이었다. 일과 중에 아이들을 픽업하러 나오는 그들의 모습에 놀라고, 칼같이 지켜지는 그들의 퇴근본능에 질리고, 저녁식사는 가족과 함께라는 그들의 문화가 부러웠다. 이러한 모습에서 무엇을 위해 왜 일하는지 아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지?”하는 의구심이 일었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워커홀릭의 한계일까? [본문으로]
- 아이스백은 얼바인 요거랜드의 경품으로 얻은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아이스박스를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장거리 운전 시에 물을 차갑게 보관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크아웃 하기 전에 숙소에서 아이스백 가득 얼음을 채워 와야 했기 때문에 아이스백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본문으로]
- 일본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유치원비 지원 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소득층의 교육비는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만약 유치원에서 교육비를 받으면, 누가 돈을 내고 누구는 무상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유치원에서 알 게 될 테고, 그러면 혹시라도 차별이 발생하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것을 우려한 정부는 유치원 비용을 교육청에서 수납하게 한단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배려가 복지의 시작임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본문으로]
- 2005년 여름휴가를 대구를 거쳐 경주로 갔었는데, 내려가는 차 안에서 에어컨을 계속 켜고 갔었다. 아이는 대구에서 잘 놀고 경주에 도착해서도 풀장에서 잘 놀았다. 다음날 석굴암에 올라가는데 효진이가 자꾸 아프다고 했다. 당시 다섯 살이었으니 그 더위에 조금 많이 걸으니 꾀가 나서 업어달라는 줄 알고, 아내와 번갈아서 아이를 업고 다녔다. 그런데 밤에 숙소에서 아이들을 재웠는데, 아무래도 효진이 숨소리가 이상했다. 덜컥 겁이 나서 아이를 태우고 경주에서 병원을 갔는데, 자신들은 잘 모르겠으니 더 큰 병원에 가라고 해서, 경주동국대병원에 찾아갔더니 폐렴 같단다. 응급조치를 해줄 테니 빨리 서울에 더 큰 병원으로 가란다. 그길로 짐을 꾸려 밤샘 운전을 하며 분당으로 돌아와 집 뒤에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시켰고, 며칠을 그렇게 입원해 있어야만 했다. 무모한 부모 덕분에 아이가 고생했던 사건이다. [본문으로]
- 인디언 이주법은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 부족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시킨다는 법으로1930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법은 인디언 거주 지역의 땅과 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산업혁명이후 영국에서 면화수요가 급증하자 호황을 누리던 조지아 주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서는 농장 확장을 위해 인디언의 땅이 필요했고, 1928년 조지아 주 인디언 거주지에서 금이 발견되자 인디언을 이주시키고 합법적으로 그 땅을 차지하려는 백인들의 탐욕으로 탄생한 법이다. 이 법으로 약 10만명의 인디언들이 지금의 오클라호마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동의였지만 거부하면 연방 조약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부족이 아닌 개인 단위로 취급되거나 부족의 존망을 위협받는 무력시위에 시달려야했다. [본문으로]
- 1890년 미군 제7기병대에 의해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수족 200여명이 항복한 상태에서 무참히 학살당한 운디드니 학살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본문으로]
- 이러한 결론의 근거로는 체로키족의 소송을 들 수 있다. 미시시피 강 동쪽의 체로키 영토를 5,000,000달러에 미국정부에 양도한다는 내용으로 1835년 체결된 뉴이코타 조약이 불법이라고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거부로 집행이 무산된 적도 있었다. [본문으로]
-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야 달랐지만 낯설고 모진 공간으로 떠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서울로 이사해온 이후 끈 떨어진 연처럼 늘 떠돌고 있다는 쓸쓸한 느낌은 당시 서울로 떠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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