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서 강성한 것들
- 라스베이거스→솔트레이크시티→옐로우스톤→코디→솔트레이크시티→라스베이거스(6월 19일~26일)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세 번째 여행은 아이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다녀온 옐로우스톤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무척 인상 깊었고 그만큼 아쉬웠던 가족들은 옐로우스톤을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귀국을 얼마 앞두지 않는 솔이네가 옐로우스톤을 꼭 다녀와야 한다고 잔뜩 부추겼다. 솔이네는 한 달 전에 예약을 해둔 비행기를 타고 솔트레이크시티로 가서 차를 렌트해서 옐로우스톤을 돌아볼 것이라고 했다. 구글 지도로 측정해보니 자동차로 가능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솔트레이크시티→옐로우스톤→코디→솔트레이크시티→라스베이거스의 7박 8일 간의 일정을 계획했다. 솔트레이크시티까지 하루에 달리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으나 운전이 상당히 부담이 되는 거리임에는 분명했고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어서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하기로 했다.
라스베이거스 가는 프리웨이에서 쉼터(상)와 황량하기만한 도로(하). 한국식 휴게소가 아닌 화장실만 갖추고 있는 미국 프리웨이의 쉼터는 설렁하기 이를 데 없다.
라스베이거스는 첫 여행에서 다녀온 터라 새로울 것도 없었고, 다른 곳으로 가는 길에 하루 묶어가는 곳으로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묶을 곳으로 라스베이거스를 택한 것은 가격 대비 숙소의 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잠만 자고 떠날 곳이라는 생각에 저렴한 곳으로 고르고 골라서 엑스칼리버 호텔을 정했는데, 가격이 왜 저렴한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호텔 입구에서 방까지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객실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금연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냄새까지 났으니 다른 기대는 갖기 어려운 곳이었다.
구글 지도 위에서 세워둔 계획과는 다르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7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밤 운전을 피하고 싶어서 조금 일찍 출발을 한 덕분에 7시 조금 넘어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해가 남아 있어서 급한 마음에 시내를 먼저 둘러보았다. 마침 모르몬교 사원과 유타(Utah)주 주의사당 주변으로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의사당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우리도 노을에 젖었다.
유타주 주의사당 주변 주택들은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화려하거나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은근한 매혹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 서쪽으로 둘러선 오키르 산맥에는 6월 중하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눈이 남아 있었고, 붉은빛으로 선명하게 타오르는 노을과 어우러져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동계 올림픽이 열릴만한 곳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 시내와 노을이 내리고 있는 유타주 의사당, 유타주 의사당 앞에 있는 재미있는 표지판과 솔트레이크시티를 감싸고 있는 오키르 산맥. 6월말임에도 눈이 남아 있는 오키르 산맥 위로 아름답게 번져가는 노을.
솔트레이크시티에는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아이오와 시티로부터 1,350마일(2,160km)을 이동해왔다는 모르몬교도의 경건한 의지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모르몬교도의 성도(聖都)답게 템플스퀘어(Temple Square)에서 뿜어내는 아우라(Aura)가 낯선 여행자를 압도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숙소였던 햄프턴 인과 크리스털 인은 가격 대비 만족도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나름의 격조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숙소에서 챙겨주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우리는 아침 일찍 옐로우스톤으로 떠났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입구에 있는 숙박업소들의 폭리를 모두 불식시킬 만큼 경이로웠다. 1872년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수많은 관광객과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곧 문을 닫고, 자연에 복원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옐로우스톤과 함께 미국의 3대 국립공원이라는 요세미티국립공원이나 그랜드캐니언의 경우에는 이곳처럼 화산활동이 활발하지 않아서 그나마 훼손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했다.
길을 가로 막고 걸어가는 바이슨을 뒤따르는 자동차들과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전경, 올드 페이스풀의 용출 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간헐천(geyser)이 곳곳에서 각기 다른 크기와 높이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 용출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간헐천이 살아있는 것들이어서 주변 지반이 약할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이어지 나무다리를 통해서 접근하고 그 위에서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간헐천 주변에는 땅에 내려서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간헐천이 용출되는 덕분에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고사(枯死)하고, 주변은 온통 잿빛이지만 정작 간헐천은 사파이어 빛으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주변의 생명을 거두어 제 빛으로 풀어내는 잔혹한 매혹이었다.
지도를 받기 위해 찾아간 안내센터에서 알려준 것처럼, 우리는 중심부를 8자로 도는 그랜드 루프 로드(Grand Loop Road)를 따라서 이틀 동안 부지런히 돌아보았다. 남한 면적의 1/11정도 크기인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자동차로 아무리 빨리 돌아보아도 온전히 이틀은 소요되는 규모였다. 옐로우스톤은 6월에 찾았음에도 고지대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넓이의 압도도 압도였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동시에 보여주는 높이의 경이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려는 듯 넉넉한 넓이와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죽어서 삶을 증거 하는 동물들의 시신, 산불로 서서 죽은 나무들, 간헐천의 고사목들까지 죽음은 고스란히 그대로였다.
길이 이끄는 곳은 모두 낯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그것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며 즐기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돋보였다. 주변의 간헐천이 모두 모여드는 옐로우스톤 호수(Yellowstone Lake)의 규모와 빛깔과 바람, 65분마다 규칙적으로 용출하는 올드 패이스플(Old Faithful)에서 용출의 순간을 보기 위해 그 주변에 삥 둘러앉아서 기다리던 300-400명의 사람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산불로 인해 불타버린 나무들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인내 등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옐로우스톤 곳곳을 누비는 바이슨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바이슨 때문에 곳곳에서 도로가 막히는 바이슨 트래픽(Bison traffic)이 발생하여도 사람들은 모두 숨죽여 그들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 즐기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자연을 중심에 놓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자연을 즐기려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이었다. 1872년 국립공원 지정 당시에 수백만 마리였던 바이슨이 30년도 되지 않아서 스물세 마리로 줄어들었다가 지금은 사천 마리 정도의 개체수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에서 가죽을 얻기 위해 바이슨을 대량으로 학살한 백인들의 잔혹함에 치를 떠는 인디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3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수백만 마리를 스물세 마리로 줄여놓은 백인들의 탐욕은 경악을 넘어선 죄악이었다.
동물들을 촬영하기 위해 삼각대를 세우고 기다리는 사람들.
옐로우스톤의 이러한 관리와 관람객들의 태도가 늘 긍정적인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어서, 야생동물에 의한 인명사고가 종종 일어나고는 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보도를 보니 캠핑하던 부부 중 남편이 곰에게 생명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곰보다는 바이슨에 의한 사고가 더 빈발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야생은 야생인가보다. 그래서 옐로우스톤 레인저들은 초식동물은 25야드(23m), 곰이나 늑대는 100야드(91m) 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미국 사람들 이런 규칙은 참 잘 지키는데도 불구하고 곰에게 목숨을 잃는 것은 나름 사연이 있다고 한다. 옐로우스톤에서 곰의 개체수가 늘면서 먹이가 부족해진 곰들이 생겼고, 초기에 인위적으로 먹이를 공급하자 곰들은 야생성을 잃어 버렸고, 그 결과 많이 죽어갔단다. 그 이후 옐로우스톤에서는 곰들에게 음식을 주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지시키고 있고, 곰이 열 수 없도록 튼튼하게 제작된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캠핑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보관하게 하는 철제 보관함도 설치해 두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곰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이 곰들과 마주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트래킹 참가자들은 대부분 곰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닌다. 곰에 희생된 부부의 경우에는 스프레이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옐로우스톤에서 차를 달리다 문득 속도가 줄어드는 곳에는 여지없이 야생동물을 보기 위해 차들이 정차해 있었다. 누구도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차를 멈추고 내려서 카메라 셔터마저 조심스레 누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대부분 삼각대를 세워두고 몇 시간씩 동물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인내와 끈기는 사진에 담길 동물만큼이나 신선했다. 바이슨, 여우, 곰, 무스, 엘크까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동물들은 우리에게 반가운 정차를 요구하곤 했다.
옐로우스톤 호수 전경, 코디로 가는 길에 만난 산불로 타버린 삼림을 그대로 둔 모습
옐로우스톤에서 가장 이색적이었던 것은 물론 표현을 무색하게 하는 압도적인 자연이었지만 슬그머니 눈길을 끄는 것은 캠핑카였다. 서부 쪽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캠핑카를 쉽게 만나게 된다. 승용차를 뒤에 매달고 달리는 버스형 캠핑카, 캠핑트레일러를 짐칸에 얹고 달리는 트럭, 뒤에 배를 매달고 달리는 SUV, 두 개의 작은 가트를 달고 달리는 캠핑카 등등 캠핑카의 다양한 모습은 그 자체가 볼거리였다. 미국사람들은 놀고 즐기는데 참 결사적이라고 가족들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부러운 풍경이었다. 적은 비용을 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최대한 가깝게 가서 자연 속에서 즐기다 오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캠핑을 가기 위해 시간을 내고,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캠핑을 가기 위해 단지 짐을 꾸리고, 돌아와 다시 푸는 일만으로도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지런히 꾸리고 부지런히 달리고 있은 것이다. 이따금 캠핑카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참 별 것을 다 챙겨서 싣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퍼백의 나라’답게 음식들을 거의 대부분 싸가지고 다니고, 아이들 베개에 애완동물까지 빠짐없이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경이로워 보일 정도였다. 정말 놀고 즐기는 것에는 더할 수 없이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옐로우 스톤 강에서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을 연상시키는 송어낚시꾼들을 보았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한 사랑을 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대사가 들려오는 듯, 어두워지는 강 위를 걸으며 낚싯줄을 던지는 그들의 모습이 강한 실루엣으로 남았다. 영화 속 노먼의 내레이션처럼 모든 존재와 자신의 영혼 그리고 기억이 어우러져 강을 이루고 흐르는 듯, 물줄기의 강성함에 비해 그 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역광으로 잡힌 그들의 평화로운 실루엣이 너무 강하게 다가와 소리를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옐로우스톤에서는 가는 곳마다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각을 놓아버려 늘 예상보다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풍경도 풍경이었지만 그것이 자극하는 감각적 체험들도 쉽게 잊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들짐승과 날짐승이 살아서 내는 모든 소리들과 간헐천의 수증기와 함께 다가오는 유황냄새 그리고 곳곳에서 시간의 흔적이 빚어내는 압도적인 이미지들은 좀처럼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떠나는 날에도 옐로우스톤 호수의 규모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가 곳곳에 잠겨있는 듯한 물빛에 넋을 놓고 있다가 느지막이 코디(Cody)로 출발했다.
카우보이의 도시로 유명한 코디는 옐로우스톤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옐로우스톤 동쪽 입구를 벗어나 코디로 향하는 길은 아주 한적했다. 서부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계곡과 강물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속력을 높일 수 없는 길이었다. 천천히 보면서 달리지 않는다면 아주 오랫동안 후회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코디에서 벌어지는 로데오 경기
이 마을은 ‘와일드 웨스트 쇼’(Wild West Show)로 유명한 버펄로 빌 코디(Buffalo Bill Cody)의 공으로 와이오밍에 댐을 세우고 철도를 놓았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코디라고 명명했단다. 도착해서 안내센터를 찾아가 관련 정보를 받고, 이곳에서 1919년부터 해왔다는 로데오 경기를 보았다. 코디에서는 6월부터는 8월까지 3개월 동안 매일 열리는데 이것을 ‘Cody Nite Rodeo’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주로 7월에 며칠 간 열리는 ‘Cody Stampede Rodeo’가 있으며, 미국전역에서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코디를 기억하게 해주는 스테이크
로데오 관람 문의를 하자 숙소에서는 자신들에게서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알려주었지만, 의심 많은 여행자는 결국 안내센터에서 입장권을 구입했다. 로데오를 보러가기 전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스테이크와 바이슨 햄버거를 시켰는데 둘 다 감동적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넉넉한 스테이크의 맛은 내가 먹어본 것 중에서 최고였다. 온 가족이 그 맛에 이끌려 하나를 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저렴했고, 텍스는 캘리포니아의 1/3정도 수준이서 더욱 좋았다. 옐로우스톤에서 보았던 바이슨을 패티로 쓴 바이슨 햄버거도 무척 담백했지만, 최고는 스테이크였다.
TV에서 몇 번 보면서 남성적이고 낭만적인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로데오 경기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로데오 경기장에 도착해보니 화면으로는 절대 맡을 수 없었던 소똥과 말똥 냄새가 진동했다. 낮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만 경기에 참가하는 카우보이들은 물론 중고생쯤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입장권과 식음료를 팔고, 어린 소년들은 팸플릿을 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우보이의 어린 아이들은 로데오 중간 쇼에 관객인 야 등장하거나 어린이 로데오에 참여하였다.
어린이 로데오 경기는 보면서 위험하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어린이 카우보이는 경기 중에 떨어져 울었다. 그 옆에서 별 것 아니라는 듯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단호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저 시간이 남아서 하는 공연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로데오였다. 그러니 어른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참여하여 로데오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그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그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 앞으로 로데오 경기를 끌어가야하니 경기 중에 떨어졌다하여 보듬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떨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태우는 모습이 단호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단호함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홀로 밥을 마련해야할 때, 사라지지 않을 밥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데오 경기는 밧줄로 송아지를 잡아서 묶기(Tie Down Roping), 달리는 송아지 넘어트리기(Steer Wrestling), 거친 말 위에서 오래 버티기(Saddle bronc), 말안장 없이 오래 버티기 (Bareback), 세 개의 원통을 빠르게 도는 배럴 경주(Barrel Racing), 황소 위에서 오래 버티기(Bull Riding)등이 있는데, 이것이 차례로 진행된다. 카우보이들은 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목보호대를 하고, 황소의 급소를 줄로 단단히 동여맴으로써 황소를 난폭하게 만든다. 소와 말을 이용한 로데오 경기는 아주 역동적이었다.
로데오 경기는 카우보이의 신화를 강화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에서 영웅을 만들어낸 것이 서부 개척기의 카우보이였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인니언의 공격을 막아내고 남성다움을 성취하는 소몰이꾼, 악당들로부터 가족과 이웃을 지켜주는 정의의 사도라는 영웅상이 수렵된 것이 카우보이였다. 이러한 신화화는 서부를 동경하는 동부에서 확대재생산 되고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향수됨으로써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현실의 그들은 텍사스에서 철도 운송이 가능한 미주리 주의 세딜리아, 와이오밍 주의 샤이안, 캔자스 주의 닷지시티와 아빌레네까지 소떼를 몰아다주는 고단한 임금 노동자들일뿐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일거리도 1890년대 북부초원에서도 황소가 사육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소들을 가둘 수 있는 철조망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로데오 경기는 카우보이의 여기에서 출발해서 그들의 신화를 강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고, 이제는 상실된 남성성, 서부개척시대의 향수 등으로 즐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데오 경기 중간에 카우보이의 아이들을 관객인양 꾸며서 진행하는 퍼포먼스와 경기 후에 간객에게 팬서비스 차원에서 사인과 사진 촬영을 제공한다.
로데오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데 카우보이 광대와 잘생긴 카우보이 청년 둘이 경기장 밖에서 사인해주고, 사진을 찍자고 하면 아주 예의 바르게 일어나 포즈를 취해주는 모습이 코디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했다. 아직 서부 개척기의 전통과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다는 이 도시는 하나같이 입고 있는 풀 먹인 셔츠처럼 단아해보였다.
이날 로데오 경기장에서 우연히 우리 앞자리에 있던 아미시(Amish) 공동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위트니스>(Witness, 1985)에서 처음 보았던 아미시 공동체 사람들을 바로 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일종이라는 아미시는 새로운 문명을 거부하고 19세기 유럽 농촌의 생활을 준거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위트니스>는 탐욕과 폭력으로 무질서한 도시의 삶을 대표하는 존 부크 형사와 관용과 절제 그리고 비폭력을 상징하는 아미시 공동체의 질서를 대비하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미시의 미망인 레이첼을 통하여 지금 이곳의 문제에 대안을 모색했던 스릴러였다. 더구나 이 작품은 시나리오를 강의할 때 플롯과 캐릭터 구조화의 예로 자주 드는 작품이기도 했다.
모두 세 쌍의 젊은 부부였는데, 두 부부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있었다. 공동체에서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옷의 디자인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옷 색깔은 화사했지만 천은 거칠어 보였고, 연결부위 여기저기에 옷핀을 꽂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안고 있는 아이가 울 때면 조용히 엄마가 안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아빠는 그의 수북한 턱수염만큼이나 완고해보였다. 그들은 로데오 경기를 보는 내내 그 흔한 탄성 한 번 지르지 않고 아주 조용히 관람만 할뿐이었다.
버펄로 빌 역사박물관 내에 전시된 총잡이들과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포스터 그리고 총기들
이튿날 찾아간 버펄로 빌 역사박물관(Buffalo Bill Historical Center)에는 서부의 옛 모습, 버펄로 빌에 대한 기록과 ‘와일드 웨스트 쇼’ 관련 유물, 인디언들의 생활상과 서부 개척기에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만행, 전설적인 총잡이들의 기록 등이 사실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일상과 분리된 박물관이 아니라 마을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유지시켜줌으로써 양자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박물관의 사례로서 주목할 만 곳이었다. 특히 인디언들에 대한 만행을 아주 상세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구성해 놓은 부분이 돋보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옆에서는 그들을 침략하고 박해하는 과정에서 활용되었음직한 총 전시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 두 모순된 구성이 인디언에 대한 오늘 미국의 인식이 아닐까? 과거 인디언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지만 그들에게 총을 앞세운 서부의 시대는 건강하고 남성적인 쟁취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유명한 빙험 캐니언 구리광산(Bingham Canyon Cooper Mine)을 어렵게 찾아갔다. 광산 인근에서 사만다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다. 그곳은 제임슨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Avatar, 2009)에 나오는 판도라 행성의 광산 기지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1회에 320톤을 실을 수 있다는 초대형 트럭과 포토 스팟에 제공된 그 바퀴를 보면서 <아바타>가 떠오른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산은 1863년부터 채굴이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세계 최대의 노천 구리광산이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 중에 만리장성과 함께 인공위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이 광산이라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이 광산이 지름 4,000m, 깊이 1,200m라고 하니 수긍하지 못할 주장도 아니다. 미국에 와서 느끼는 ‘규모의 압도’는 여기서도 여지없었다. 홍보영상을 상영하며 간단한 전시물을 갖추고 있는 홍보관과 소박하게 꾸려진 기념품점 그리고 그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리 광산이 전부였다. 미국의 자부심과 맹목에 가까운 애국심에 대한 강요 등이 홍보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빙험 캐니언 구리 광산의 모습과 320톤을 싣는다는 초대형 트럭. 1863년부터 채굴이 시작된 이 광산은 광석을 파내기 위해 계단식으로 길을 내놓은 모습이 그 규모만큼이나 이채롭다.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이 보아야 한다는 욕심이 과했는지 중간에 다시 먹통이 된 사만다 탓인지, 돌아오는 길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햇반과 맥도날드 햄버거 등으로 식사를 해결해온 터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돌아오는 길에 라스베이거스 최고급 호텔인 윈(Wynn) 호텔에서 뷔페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문제는 출발이 늦어지면서 뷔페 마감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뷔페시간에 맞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차는 슬슬 과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75마일(120km)이 제한 속도인 I-15를 90마일(144km) 이상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만다가 보여주는 도착시간이 점점 단축되는 것을 즐기면서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경광등을 울리면서 뒤에 붙었다. 우리는 아니겠지 하고 속도를 줄여서 계속 달리고 있는데, 순찰차가 계속 따라와서 길가에 차를 붙였다. 과속에 정지 명령까지 어겼단다. 관광객이라고 우기고 국제운전면허증을 보여주면 훈방이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고, 교통 범칙금 금액의 살인적인 액수를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사정을 설명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일은 다른 방향으로 급하게 결론이 났다. 이곳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경관의 말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첫째가 6개월쯤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임시 운전면허증을 내주어야만 했다. 과속도 과속이지만 정지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첫째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교통경찰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자신의 동료가 우리처럼 정지 명령에도 서지 않는 차에서 쏜 총탄에 일주일 전에 이곳에서 총상을 입었다며 우리가 만약 더 달렸다면 자신이 발포했을 거라고 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교통경찰은 우리가 미국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참작해 준 것인지, 아니면 예쁜 첫째의 상냥함에 반한 것인지 몰라도 벌금을 깎아주겠다며, 가장 싼 270달러짜리 스티커를 끊어주었다. 모처럼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과속한 덕분에 여행 내내 아끼며 지내왔던 것들이 일시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심조심 달려서 간신히 뷔페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했으나, 이미 맛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그나마 교통경관이 훈남에다 친절하기까지 했으니 그것만도 다행이고, 빨리 잊고 맛있게 먹자고 모두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쓰린 속은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가 머물게 된 뉴욕뉴욕 호텔로 돌아왔다. 솔트레이크시티부터 옐로우스톤과 코디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시간이 아쉬웠다. 가슴 뛰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특히 옐로우스톤에서 느꼈던 살아있는 것들의 그 강성함은 감동 그 이상의 것이었다. 삶과 죽음이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순환하고, 동식물은 물론 간헐천의 역동적인 용출까지 서로 맞물려 현재를 살아내는 치열한 삶의 순간순간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생명을 놓은 것들뿐, 모든 것이 꿈틀대며 변화해가는 그곳의 기운이 온몸에 가득 차올라왔다. 귀국 전에 그럴 기회는 없겠지만, 겨울에 꼭 다시 찾아가고 싶어지는 것도 그 지독한 계절을 건너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몇 안 되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