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다

86일 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감기약 기운 때문인지 몸이 침대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어젯밤 약을 먹고 잠이 들면서 춥기도 했지만 땀을 흠뻑 빼고 나면 개운해지리라는 생각에 긴팔 후드티를 입고 잠이 들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진이가 아파서 새벽에 잠이 깼다. 약을 챙겨주었지만 유진이도 좀처럼 몸살을 떨치지 못했다. 빡빡한 여행 일정에 먹는 것은 부실한데, 날씨는 더워서 에어컨을 계속 틀고 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약을 먹고 땀을 흘린 덕에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나도 순간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는데 내가 아프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아파도 일정은 진행해야만 했다. 더구나 아침에는 형식이 부부와 아침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더욱 기운을 내야만 했다.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그쳤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형식이 부부가 숙소 로비로 왔다. 근처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식은 우리 아이들을 어렸을 때 보고 처음 보는 것이다. 그가 뉴욕지사 근무를 하느라 미국에 있는 동안 세월은 부지런히 갔고, 돌아왔을 때에는 아이들이 커서 제 각각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가족끼리 만나는 모임을 별로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식은 훌쩍 자란 유진이와 효진이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이 무모한 횡단여행을 감행하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는 대학교 졸업 이후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늘 분주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바쁘게 뛰느라 늘 피곤한 모습으로 만나곤 했었다. 그런데 시카고 지사로 나온 불과 몇 달 사이에 형식은 건강과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형식의 눈에 나도 아마 그렇게 비춰졌으리라. 남의 나라에 와서 비로소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보면 한국에서 우리 생활이 가파르긴 가파른가보다. 치열하고 분주하기만한 우리네 일상의 정체를 남의 나라에 와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형식이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형식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과외를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다. 형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착하고 순해서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3, 어렵게 부모님을 설득해서 평생 처음 과외를 막 시작했는데 바로 과외금지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더 보지 못하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친해졌던 친구다. 늘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면 형식이네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자주 놀았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딱히 무엇을 하고 노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형식의 집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주 다닌 만큼 그곳에서의 추억은 언제나 화수분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형식은 내게 출발 전에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핀잔을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우리로 인해 번거로워지는 것은 아내나 나나 딱 질색이었다. 형식의 아내는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먹은 것으로 하자고 사양했다. 내일 일정이 바쁘기도 했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의 얼굴 보았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시카고는 보아야할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 뉴욕이나 워싱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빼고 시카고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아이들이 과학 산업 박물관(Museum of Science and Industry)을 보고 싶어 해서 먼저 그곳으로 갔다.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 전경()과 뒤쪽 공원에서 주말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과 임시로 설치한 놀이기구()

과학 산업 박물관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메인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크고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이 돋보였다. 건물도 건물이었지만 그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서 건물 뒤쪽으로 가보니 숲과 잔디밭이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한가하게 즐기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 놓고 가볍게 춤을 추는 사람들, 아이들을 위해 공기를 불어넣어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있는 사람들, 바비큐를 만드는 사람들, 앉거나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운동을 하는 사람들……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 풍경이었다. 제 각기 자신의 취향대로 즐기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이렇게 주말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적극적으로 쉰다는 점이다. 한나절 쉬겠다고 차일부터 테이블, 의자, 간이침대, 앰프, 음악 믹싱기, 이동식 놀이기구, 엄청난 양의 음료와 음식을 트럭에 싣고 와서 일일이 그것을 설치하고 즐기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 많은 짐을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만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테고, 그것을 일일이 설치하는 일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거기에 바비큐 그릴을 설치하고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우면서 마시고 노는 그들의 모습은 유쾌하고 건강해보였다. 아내와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쉬고 노는 것에 참 결사적이다.

산업과학박물관 내부(), 비상구에 새겨진 닐 암스트롱의 경구(), 로봇 팔을 체험하는 아이들()

미국 중서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이라더니 정말 산업과학박물관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1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우주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나올 때 찾아가란다. 물론 선택사항이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20-30달러를 요구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크루즈를 타기 전에 사진을 찍었는데, 크루즈를 마치고 나오니 금문교와 합성해서 멋진 사진을 만들어 두었었다. 크고 작은 사진과 작은 액자까지 포함해서 30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사진이 낯선 곳에 걸려 있다가 폐기되는 것이 꺼림칙해서 구입한 이후로는 이런 식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에서 완성된 사진은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박물관을 돌다보니 항목별로 몇 군데 사진촬영 장소가 더 있었다. 입장료 외에 수익을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돌아보니 모든 전시물이 체험중심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지고, 타보고, 조정하는 것이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초등학생들이 메인 타깃으로 보였다. 그러니 효진이가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진이까지 좋아하니 다행이었다. 전시된 콘텐츠도 콘텐츠지만 그것을 즐기게 하는 방식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방학 숙제하느라 서울국립과학관을 찾았던 나이가 유진이보다 한 살 어릴 때였으니 1980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책으로만 보고 외우고 평가하던 것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었던지그때의 감동이 생각났다. 방학숙제 하느라 친구와 세운상가에 가서 라디오 조립 키트를 구입한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는데, 서울국립과학관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배고픈 것도 모르고 문 닫을 때까지 있다가 집에 늦게 돌아와 꾸중을 들었던 기억까지 나면서 그때 같이 갔던 친구 우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낯선 시카고에서 느닷없이 1980년 서울을 만났다.

미국식 유머인 샌드위치(), 동작센서에 의해 인터랙션하는 체험(), 공기분사 체험()

산업과학박물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진진했다. 박물관 초입에 놓여있던 몇 개의 전시물은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추측해보는 것이었는데, 모래(sand) 위에 마녀(witch)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샌드위치(sandwich)를 연상하는 식이었다. 몇 개는 답을 찾고 아이들과 웃었는데, 몇 개는 도통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양한 종류의 과학실험도 실험이었지만 일상 속에서 궁금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체험코스가 구성되어 있었다. 가령 대형 트랙터와 영상을 결합하여 옥수수를 어떻게 수확하는지를 보여주는 체험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옥수수대를 자르고 낱알을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물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고, 트랙터를 실제로 조정해볼 수 있게 하였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군함과 상선을 5,000척 이상 격침시켰다는 독일 잠수함 U보트(U-boat)의 실물을 전시하고 내부도 둘러볼 수 있게 하였다. U보트는 역사적 맥락을 누락한 채 전설의 잠수함으로 전시도리 뿐이었다. U보트 전시관 끝에는 예상대로 U보트 관련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체험할 것이 많다보니 관람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냉방이 너무도 잘되고 있어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는 몹시 추웠다. 몸이 으슬으슬 거리고 이곳저곳이 쑤셔왔다. 무리했다가는 나머지 일정과 내일 이동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관람을 멈출 수는 없고, 아내에게 잠깐만 차에 가서 쉬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 직사광선으로 차 안은 무척 더웠다. 창을 조금 내리고 직사광선은 조금 가리고 한 시간쯤 그곳에서 몸을 데웠다. 마치 샌프란시스코나 몬트레이에서 만났던 바다사자가 햇볕에 몸을 데웠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찜통처럼 느껴졌을 차 안이 오히려 고마웠다. 한 시간쯤 차 안에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산업과학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산업과학박물관은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유니크한 아이템을 전시했다거나 굉장한 과학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궁금해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직접 만지고, 타보고, 체험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관람자 수가 연간 400만 명에 달한다니 그 체험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과학과 산업을 절묘하게 통합하고 있다는 점과 박물관과 외부의 공원이 유기적으로 잘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박물관도 보고 가벼운 피크닉도 즐길 수 있다면 주말 프로그램으로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것은 시설이나 전시물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힘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을 보다가 또 점심때를 놓쳤다. 이미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나 시카고 미술관을 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고, 몸도 좋지 않으니 시카고의 명물이라는 우노 피자를 먹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종의 여행 중 조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일 일정을 장담하기 어려운 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시건 호를 따라서 달리는 도로()와 미시건호 주변에서 세그웨이를 즐기는 사람들()

차로 달리면서 보니 미시건호 주변에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는 모습이 여유로워보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에서 체험했던 세그웨이를 타고 호수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잔디밭에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멀리 요트를 타고 나간 사람들까지 한가로운 주말의 풍경이었다.

시카고에서 보아야할 것이 어디 한가롭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일까 마는 내게는 그 모습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분주하기만한 한국에서의 내 생활 때문이었을까? 평소에도 보면 미국인들은 평일 저녁에도 운동장에 불을 켜고 운동을 즐긴다. 어디 그뿐인가, 야구,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을 시즌별로 나누어 일 년 내내 직접 즐기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업무를 마치고도 업무의 연장인 약속이 계속되고, ‘월화수목금금금이 반복되는 생활인데, 여기서는 그런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지 마음가짐의 차이만은 아니리라. 사회적 합의와 분위기가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였을 것이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일 텐데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아 자꾸 그들의 모습과 견주어 보게 되었다.

시카고 시내(), 보도 위에 새겨진 이정표(), 주차 표지판()

시카고에 가면 피자를 꼭 먹어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우노 피자나 지오다노 피자가 그것인데, 이왕이면 우노 피자를 먹어보라고 했다. 시간이 된다면 둘 다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우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피제리아 우노’(Pizzeria Uno) 레스토랑과 지오다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지오다노’(Giordano's)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피제리아 우노에서 피자를 먹고, 이어서 지오다노로 가서 피자를 먹겠다는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피제리아 우노로 갔다.

피제리아 우노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비교적 저렴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주차장이 없어서 근처에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 주차를 했다. ‘피제리아 우노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미 많았다. 생각보다 레스토랑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테라스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예약을 해주는 아가씨가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서 갔더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조금 기다리는 사이 먼저 주문을 하란다. 그러면 자리와 동시에 피자가 나온단다. 주문을 하고 있으려니 바로 자리가 났다. 1943년에 처음 영업을 시작한 장소라서 그런지 낡은 건물과 소박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정겨웠다. 실내는 조금 어두운 편이었고, 테이블 사이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비교적 넓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피제리아 우노(), Numero Uno 피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 아가씨 혼자서 피자를 먹고 있었는데 그 두께와 양을 보고 놀랐다. 메뉴에는 딥 디쉬(Deep Dish) 피자라고 적혀있었는데 옆 테이블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자 팬의 깊이가 무척 깊었기 때문이다. 양이 넉넉해 보였지만 먹성 좋은 우리 가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믿고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로 시켰다. 피자가 나온 것을 보니 양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효진이는 미트볼 스파게티, 유진이는 샐러드를 시켰으니 양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오늘은 제대로 먹는 날이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아니면 어제 아내의 말을 기억한 것인지 모두 시키고 싶은 것들을 시켰다. 음식은 예상대로 모두 양이 넉넉했다. 특히 피자 반죽이 아니라 파이 반죽으로 만든다는 두툼한 도우(dough)의 양이 많다보니 결국 피자는 1/2밖에 먹지 못하고 가져와야 했다. 미트볼 스파게티는 미트볼은 맛이 있었으나 스파게티는 싱거워 기대만 못했지만 샐러드는 야채와 소스가 신선했다. 물론 피자의 맛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조금 많다싶을 정도로 넉넉한 토핑의 신선한 풍미와 치즈의 식감 그리고 두툼한 도우의 바삭함이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사람들은 피자를 먹으며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 삭스 간의 야구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곳이 시카고니 당연히 이만수 감독이 한국인 최초의 유급코치로 활동하던 시카고 화이트 삭스 경기를 볼 줄 알았는데, 뉴욕과 보스턴의 경기를 보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미국인들에게는 영원한 라이벌인 뉴욕 양키즈와 보스톤 레드삭스가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고 들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각자 피자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응원하는 팀의 안타나 호수비에 조금씩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나는 시카고 맥주를 한 잔 시켜서 피자와 같이 먹었다. 시카고 맥주는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향이 깊은 묘한 맛이었다. 물맛이 중요한 맥주는 반드시 현지 맥주를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시킨 것은 한 잔이었지만 500cc 정도 되는 양이 나왔다. 피자도 그렇고 맥주도 그렇고 양이 참 넉넉했다. 이탈리안 식당 특유의 넉넉함이었을까?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누어서 천천히 마셨다.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 가격이 27.29달러니 한국 피자 가격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피자를 먹고 나자 우리 중 누구도 지오다노 피자를 먹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두 곳의 피자를 다 먹겠다고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다 먹지 못하고 싸온 우노 피자가 알려주고 있었다.

주차비를 정산하고 보니 25달러였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피자 값보다 주차비가 더 클 뻔했다. 토요일인데도 시카고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곳곳에 공사 중이어서 사만다의 데이터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카고 외곽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사만다가 우회로를 택했는데, 거기서 헤매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정을 빨리 마쳤음에도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 길과 올 때 길이 달랐으니 좀 더 많은 것을 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발견하는 길들은 대체로 나름의 운치와 체험을 주는 것들이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면서 버릴 경험이 없듯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세상 모든 길을 다녀보았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아직 다녀보지 않은 더 많은 길들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언제나 새로 생기고 없어짐으로써 새로운 길이 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자신이다. 어느 길이든 볼 것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위를 걷는 자의 체험이다. 항상 체험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하여 단지 두 지점을 연결할 뿐인 속도의 길은 길이 아니라 도로일 뿐이다. 도로는 속도를 이야기할 뿐 그 안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새롭거나 내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횡단을 통해 만나는 그 모든 길들은 아직 우리에게 길로 기억되고 있다. 체험으로 구성되는 우리의 길들이 어떠한 새로움과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나의 낙관적 기대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가고 있는 이 길과 관계되리라는 것은 안다. 아직은 그것으로 족하다.

몸이 아프니 상념만 깊어진다. 사위는 온통 어둠인데 의식은 또렷해질 뿐이다. 조바심은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길 위에 오르고 나니 그 몹쓸 습벽이 살아나나보다. 하지만 굳이 따라온 녀석을 내칠 일도 아니리라. 그게 우리의 길이고 여행의 스타일이라면 우리 스타일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당위적인 답안을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 아니지 않는가? 길이 데려다 주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속도가 횡단여행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니 이제 조바심도 따라온다면 데리고 다녀야겠다.

내일은 밀레니엄 파크와 시카고 미술관을 들렸다가 클리블랜드까지 달려야 한다. 오늘 몸 상태로 봐서는 내일 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 며칠째 먹고 있는 감기약은 독할 뿐 좀처럼 감기를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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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87일 시카고클리블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남겨온 피자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설 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비가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몸살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보니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비는 밀레니엄 파크로 이동하는 중에 그쳤다.

오늘은 클리블랜드까지 371마일(594)을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딱히 볼 것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와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보고 시카고에서 느지막이 떠나기로 했다.

여행계획을 짤 때도 클리블랜드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외에는 클리블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보니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까지 10시간 정도 거리니까 무리하면 못 달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약 지체되면 클리블랜드를 생략하고 나이아가라로 가서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설정해 둔 것이 클리블랜드였다. 다행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시카고에서 늦게 출발하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나이아가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우리는 시카고 미술관을 꼭 들러보기로 했다. 또 시간이 된다면 밀레니엄파크도 보려고 했는데, 마침 두 곳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두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사실 시카고에 도착하면서부터 사만다가 거의 패닉상태였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유난히 많은 고가도로 밑에서는 수신이 원활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고는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카고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사만다는 다급해지거나 침묵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만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들이었다.

길을 잃고 다시 만난 길(), 그 와중에 만난 시카고 극장()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시카고에서 사만다는 자주 길을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만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길을 잃으면 새 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문득 시카고 극장 앞이었다. 1921년에 개관한 시카고 극장은 미국 최초의 대형 극장이라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을 축소한 모양인데 특히 건물 앞에 걸린 초대형 붉은 간판이 선명했다. 그 앞에서 롭 마샬 감독의 영화 <시카고>(Chicago, 2002)[각주:1]가 떠오른 것도 그 붉은 간판의 선명함 때문이리라. 영화 <시카고>에서 보여준 뜨거운 욕망을 지금 이곳시카고에서 보기에는 머물 시간이 너무 짧았다. 주중에 그토록 분주하고 혼잡스러웠던 시카고의 일요일 오전은 서울의 그것처럼 한가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처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처연한 기분은 밀레니엄 파크에 도착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밀레니엄 파크 건너편 시카고 미술관 옆에서 음악공연이 있어서 공연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성스러운 분위기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지도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은 2004년에 했다고 한다. 음악공연 관계로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밀려드는 차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밀레니엄 파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야외 음악당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루리가든(Lurie garden),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왼쪽으로 루리가든(Lurie garden)이었다. 피에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했다는 루리가든은 부단히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일 년 내내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는 주차장에서 바로 북쪽으로 걸어가서 찾았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는 일상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시카고 미술관에 빼앗기고 있어서 입구를 찾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루리가든 앞쪽으로 걸어가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이 등장했다. 웅장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객석과 대규모 잔디밭(Great Lawn)을 두고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잔디밭 위까지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전경과 지붕

잔디밭을 덮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에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근처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와 있었다. 공연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은 지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봉과 봉이 만들어내는 프레임 사이로 주변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오고, 그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밀레니엄 파크가 시카고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련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공연장 지붕을 덮고 있는 조형물만큼이나 이 봉 구조물의 다채로운 프레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는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공연장만큼 스산한 풍경은 없다. 일요일 오전, 비가 내린 후의 야외 공연장은 그저 푸른 잔디밭일 뿐이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은 공연장으로 설계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새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공연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연장의 조형물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공연장과 잔디밭을 오간다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설치미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을 보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애니쉬 카푸(Anish Kapoor)가 만든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나타났다. 크라우드 게이트를 보는 순간 일단 그 크기(높이 10m, 너비 13m, 길이 20m)에 압도된다. 밀레니엄 파크의 방문 인증샷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10톤이 넘는다는 무게와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다 스테인리스를 이음매 없이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람과 안개 그리고 추위로 유명한 시카고의 일기를 생각할 때, 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되는 표면에 두 번 놀라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 세 번 놀라게 된다.

크라우드 게이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신을 비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면 구름을 형상화한 것인데, 영감은 액체수은에서 얻었다고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콩(Bean)이라고 부르니 재미있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혹은 다양성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밖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굴절되어 반사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크라우드 게이트는 되비춤을 통해서 세계를 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밀레니엄 파크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의 모습과 다양한 상호작용의 사례

크라우드 게이트는 중앙에 3.7m의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거울 앞에 서 보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낯선 모습의 나와 너라면 그것은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가족들 사진도 찍고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강하게 밀었다. 어디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이었다. 무례하고 세련되지 못한 중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횡단 여행 중 곳곳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례를 넘어 난폭하기까지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바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야 뭐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을 휩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만났던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LA 인근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에서는 중국인 전담 종업원을 두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소공녀소공자라고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의 무례함[각주:2]은 그 끝을 모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원을 만들어 웃고 떠들며 주변은 무시한 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더 불쾌해질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폭력이 폭력을 부르듯 무례는 무례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들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크라우드 게이트 옆으로 조금 이동하니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가 있었다.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설계를 했다는 이 작품은 제작을 위해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레스터 크라운(Laster Crown)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24m 높이의 두 개 기둥에는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13분마다 얼굴이 비디오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카고 시민들이라고 하니 공공미술(public art)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과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완성과 해체를 거듭하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과 크라우드 게이트 그리고 크라운 분수까지, 밀레니엄 파크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곳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 새 천년을 기념으로 공원을 조성하며 시카고가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블어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것이 새천년의 시카고에서 이루어지길 기원한 내용이었으리라.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는 개개의 독립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 간의 소통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상호소통을 통해서 밀레니엄 파크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직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미술관 안에 벌써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들의 이름이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점이었다. 이름까지 좀 더 멋스러운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름을 내주고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름까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시카고 미술관 전경과 입구 그리고 실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이라는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밀레니엄 파크와 니콜라스 다리(The Nicholas Bridgeway)로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규모 면에서도 미국 내 2위에 해당한다는 시카고 미술관은 26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간 18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1866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 아트 아카데미를 거쳐 1882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과 미술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3콜럼버스 세계 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 이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축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가 증축한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다리를 통하여 2009년에 증축했다는 현대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무료고 어른은 18달러의 입장료를 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무료였고, 시카고미술관은 어린이들은 무료인데, 둘 다 신선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화공간의 무료관람을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1층은 18-19세기 미국 미술, 2층은 미국 모더니즘을 테마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호, 세잔, 르노아르,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등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들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 밖에서 만난 강렬한 느낌의 그림들은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미국작가들의 작품임을 알았다. 특히 시카고 미술관에서 꼭 봐야한다고 소개된 그림들은 그 소개가 아니더라도 미국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인해 그림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

스로우 호머의 <The Herring Net>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Nightlife>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각주:3]<Nighthawks>는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도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보여지는 아이러니의 공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모두 어긋나고 있는 관계의 메타포, 텅 빈 듯한 공간의 구도 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Arcibald J. Motley Jr.)<Nightlife><Nighthawks>와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도 소란스러운 공허가 읽히는 작품이었다. 윈스로우 호머(Winslow Homer)<The Herring Net>는 프레임 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꽉 찬 두 어부와 청어 그물이 거센 파도와 함께 고된 노동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면서 같이 보고 그 느낌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따라갔다.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내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손을 잡고 때론 어깨를 걸고, 옆에 세우기도 하고 앞에 안기도 하면서 좋은 그림을 가족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감상에 젖어서 내가 미술관을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가본 것은 대학교 입학한 이후였을 것이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미술책이 전부였던 내에게 미술관은 차라리 강박에 가까웠다. 꼭 가서보아야 한다고 늘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가서는 낯설고 불편했던 공간이 미술관이었다. 대학원 시절 화집을 사서 모으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그림을 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한 이 체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 품에 안겨서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따듯한 체험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품들을 코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신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갤러리를 돌고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의자가 있으면 자꾸 앉으려 하고 몹시 지쳐있었다. 아내와 나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일러주고 좀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들을 도통 몰랐다. 어린 효진이는 그렇다고 쳐도 유진이는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요즘 미술시간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는단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외울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시회에 가면 작품 옆에 다 적혀있지 않은가? 작품을 보고 좋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엄마랑 아빠가 보는 동안 쉬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법 많은 방을 같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버릴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손잡고 작품을 설명해주던 엄마의 손길, 안고 이야기해주던 엄마의 체취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따듯한 기억이 될 것인가? 세계적인 명화도 명화였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시카고 미술관에는 동양 예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많았고 우리 것은 거의 없어서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들이 모두 합당한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던졌다. 전시된 개인 소장품들은 대부분 고서화나 오래된 도자기들이었는데, 그것이 약탈이나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더라도 유실 가능했던 것들이 잘 보존되었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약탈이나 밀반출의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소유로 볼 수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채우고 그것을 세계 최고 박물관 운운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등.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창작된 그 나라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방적인 약탈이나 불법적인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당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소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대여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나라 미술관에서 자기 나라 유물들이 많고 적음을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문화적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인정투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거나 합법적인 경로로 마련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몇 개의 전시물로 과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작고 소박한 한국관을 보면서 갑자기 맥락 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내와 나는 더 돌아보고 싶은데 유진이가 감기의 여파로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효진이가 피곤하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2시쯤에는 관람을 마칠 계획이었다. 시카고에서 끝나는 것이 Route66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보겠다는 욕심에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다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만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제대로 보려면 2-3일쯤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쩌면 미술관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책 한 권 읽듯이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에 가까운 것이리라. 문화에 모두, 전부, 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개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체험하는 향유 자체가 문화가 아니던가?

태평천하를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태평천정이 된 조악한 기념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서면서 입구의 기념품점에 들렀다. 기억이 될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만한 것이 없었다.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써져 있어야 할 곳에 태평천정(太平天丁)이라고 적힌 기념품을 보면서 저것도 혹시 중국제품이라면 웃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조악한 모조품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특히 엉터리로 한자를 써놓은 기념품들을 보면서 씁쓸했다. 시카고를 떠나면서 시카고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되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그곳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오늘의 감동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욕심나고 더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의 1단계인 Route66 코스는 마쳤다. 이제 클리블랜드부터는 여행의 2단계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동부여행이다. 풍광이나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까지 I-90I-80타고 갔다. 이 도로들은 이전까지의 도로들과는 다르게 유료도로기 때문에 서비스플라자(Service Plaza)가 설치되어 도로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비스플라자는 주유소,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피자집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보아온 주유소나 패스트푸드점과는 브랜드가 바뀌어 있었다. 달리면서 몇 군데 서비스 플라자에 들러보니 대부분 bp주유소,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이곳의 서비스플라자도 제품 대비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시카고 스카이웨이 톨게이트(),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에 만난 철교()

아직 유료도로가 시작되기 전인 시카고를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내려섰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감기약만 구입해서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사만다의 혼란은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어서, 일러준 그대로 달려가다 보면 공사 중이거나 막힌 길이었고, 목적지라고 해서 보면 낯선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사만다를 무시하고 표지판만 보고 음식점을 찾기에는 찾아야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배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료도로를 만나 서비스플라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계획보다 많이 남은 햇반

8시가 지나서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기대보다 괜찮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제공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저녁이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컵라면 2개와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이제 슬슬 김치가 그립기 시작했다. 그나마 느끼한 현지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컵라면이 떨어졌으니 큰일이다. 한인마트를 찾아야 구입할 수 있을 텐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한인마트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보다 컵라면은 많이 먹었고, 햇반과 3분 카레 등은 기대만큼 먹지 않아 많이 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햇반의 어정쩡한 온도와 흐물거리는 3분 카레의 식감에 물리나보다. 나도 그러니 어린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군말 없이 잘 참아주니 고맙고 대견하다.

내일은 일찍 나이아가라로 출발해야 한다. 일찍 출발할수록 좀 더 많이 보거나 천천히 깊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실수로 캐나다 쪽 숙소를 잡은 덕분에 내일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보다 캐나다 쪽이 더 멋있다고 위로하며 출발 전에 학교 인터내셔널 오피스에서 입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왔다.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입출국사무소 관리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던데, 기대가 된다. 실수는 대부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1. 192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연극작품을 1975년 뮤지컬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자 2002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가 출현한 뮤지컬 영화다. 재즈, 갱, 관능, 쇼 비즈니스 등과 같은 시카고의 이미지와 황색언론, 살인 등의 대중적인 요소들을 통합해서 구현한 뮤지컬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All That Jazz'와 'Roxie' 같은 넘버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정 당 한 명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자녀를 공주와 왕자로 키우는 중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 이렇게 여섯 명의 어른이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와 공주로 성장하게 되고, 이들의 모습을 비꼬아 소공자, 소공녀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3.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알랭드 보통은 그의 그림에서 고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공허에 마음이 울렸다. 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국내 최고의 웹툰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페이스 북에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체험을 구현하는 작가의 매혹은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 눈을 빼앗기고 가슴에 새기게 되나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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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일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 폭포(캐나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어이 클리블랜드는 괄호 속에 묶으려는 듯,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는 급하게 서둘러 클리블랜드를 떠났다.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229마일(366)이니 네 시간이면 족할 거리였다. 횡단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 네 시간 정도의 거리는 아주 행복하게 즐길만한 거리였고, 심지어 그 다음 일정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거리였다. 심리적인 거리는 언제든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선다.

사람 사는 동네니 클리블랜드라고 왜 볼 것이 없었을까마는 볼 것 많은 시카고와 나이아가라 폭포 사이의 일정이다 보니 마음은 이미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너무 이르게 떠나고 있었다. 일찍 출발을 서두른 덕분에 우리는 점심도 먹기 전에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고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오후를 온전히 보내고 야경까지 돌아본 후에 내일 아침 일찍 보스턴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서는 오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의 일정을 마쳐야했다. 더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가 오늘 달린 거리의 족히 두 배는 되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클리블랜드를 떠나오는 길에 우연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장인 프로그레시브 필드 (Progressive Field)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에 오면서부터 추신수 선수와는 묘한 인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유진이가 추가 보완검색을 받느라 탑승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추신수 선수 가족이 우리 가족 옆을 지나가서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 많은 탑승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서너 명을 뽑아서 하는 추가 보완검색에 하필 유진이가 지명되어 지체된 것부터, 덕분에 추신수 선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묘한 우연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날 유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추가 보완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신을 벗게 하는 바람에 아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 추가 보완검색을 마치고 나온 유진이에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고 하니, 아이는 태연히 공항에서 이미 보았는데, 그가 박태환 선수인 줄 알았단다. 그 특유의 호쾌한 타격과 빨랫줄 송구를 좋아하는데,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탄 것은 미국행의 좋은 징조가 아니었을까?

LA에인절스 구장에 온 추신수 선수 응원 문구.

4월 중순쯤인가 코스트코에서 LA 에인절스 스타디움 입장 티켓을 세일해서 팔고 있었다. 집에 와서 경기 스케줄을 확인하니 마침 5월초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가 있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LA 에인절스의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더구나 LA 에인절스에는 행크 콩고(한국명 최현)까지 뛰고 있으니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티켓을 구입하고 에너하임의 LA 에인절스 구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당일 입장권으로 교환을 했다. 홈팀인 LA에인절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방문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입장권으로 교환하면서 고민을 했었는데, 유진이가 단호하게 LA 에인절스에서 응원해야 한단다. 그것이 이 지역에 사는 도리란다.

두 선수를 경기장에서 볼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추신수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아야 해서 그날 경기에 출장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망하고 응원 플래카드도 만들지 않고 있었는데, 경기가 있던 당일 인터넷에서 보니 재판이 연기되어 추신수 선수가 출전한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유진이와 급하게 응원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추신수 선수만 응원하기 아쉬워 뒤편에는 영어로 행크 콩고의 응원 문구를 넣었다. 작은 플래카드였으니 반대편에 있던 추신수 선수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메이저리그 구장에서는 특정 선수의 이름이 적힘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것은 불법이란다. 응원문구를 한글로 적어서 그랬는지 우리는 별문제 없이 응원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리그에서 수많은 차별을 극복하면서 우뚝 선 추신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벅찬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주운전 파문을 잘 알고 있는 LA 에인절스 관중들이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타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날 경기를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매일 승부의 세계를 건너고 있는 추신수 선수의 스트레스나 내면의 갈증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기를 원하는 우리가 알 도리가 없는 부분이겠지만,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가파름만은 느낄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늘 그 실천이 가파를 수밖에 없다. 한 발 제겨디딜 곳 없는 승부의 세계, 모든 것이 낯설고 노골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공간, 최고가 되지 않으면 다음이 없는 상황, 그 가운데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 겪게 될 그 절박함은 막연한 예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뉴욕 여행과 연계하여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는다는데,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두 미국 쪽 보다는 캐나다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나중에 일러주었다. 그렇다고 정보에 둔감한 내가 그것을 알고 캐나다 쪽에 숙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가격대비 좋은 숙소를 찾다보니 환불이 안 되는 조건이지만 맞춤한 것이 있어서 예약했다. 예약을 하고 주소를 정리하다가 보니 숙소는 캐나다에 있었다. 환불이 안 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캐나다를 다녀오려면 UCI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방문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아둔하면 침착하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명민하지도 못하고 덜렁대기까지 하다가 얼떨결에 캐나다 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실수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 되었으니 변방 늙은이의 말(塞翁之馬)을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는 일이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입국할 때 입국심사는 까다롭지 않았다. 여권, 미국 비자, DS2019, I-94서류만 의례적으로 확인하며,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정도를 묻는 수준이었다. 다만 차 한 대당 3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했다. 어떤 명목으로 내는지 알지도 못하고서 수수료를 내려니 금액을 떠나서 조금 억울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입국심사를 하는 붉은 제복의 청년이 친절한 것이 위로가 되었다.

문득 미국에 입국할 때 LA공항에서 가족들과 두 시간을 기다렸던 생각이 났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지 불필요한 것까지 챙기면서도 무성의하고 더디기만 했던 미국 입국심사는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에서 보여주었던 과장된 공포의 단면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순간 반미를 넘어 혐미(嫌美)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어쩔 수도 없었던 체험이었다. 두려움은 미혹을 부르고, 미혹은 다시 더 큰 두려움을 부르는 공포의 환()이 끊임없이 이어져,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는 두려움만 남은 상태였다. 그것에 비하면 캐나다 국경은 입국환영행사장에 가까웠다.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의 맥락 없고 소박한 거리

시카고에서 그토록 정신 차리지 못하던 사만다가 오히려 캐나다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국경을 통과해서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 보니 소박한 거리가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어져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으면서 보니 주변 거리가 참 맥락 없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카지노,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Ripley's Believe It Or Not!), 기네스 세계 기록, 왁스 뮤지엄 등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박하거나 조악하다는 느낌을 넘어서기 어려운 놀이 시설과 식당들이 줄지어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주차를 하려고보니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까울수록 주차비가 비쌌는데, 하루 종일 7달러12달러15달러였고, 6시 이후에는 5달러였다. 시카고에 비하면 그리 비싼 금액이 아니었고, 조금 먼 주차장이라고 해도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먼 곳에 주차하고 거리를 구경하며 폭포까지 걸어 내려갔다.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다양한 패키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안개 아가씨호(Maid of the Mist)를 타고 폭포만 체험(어른 14.60달러, 어린이 8.94달러에 세금 13% 추가)하고, 남는 시간에 폭포 주변과 폭포 외곽을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안개 아가씨호 예약을 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밥은 예외 없이 규칙적이고, 몸과 마음의 상태와 무관하게 진솔했다.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진다는 예외 없는 규칙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반복되고 있었다. 더구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밥은 늘 푸지고 넉넉했다. 더구나 끼니를 거르는 일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가족은 늘 밥과 상관되어 있다. 언제나 저녁 밥 짓는 냄새는 눈물겹다. 그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따듯함이거나 위로에 가까운 것이다. 하루의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기진해서 돌아와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더 먹으라는 사랑스런 성화와 함께 나누는 따듯한 밥과 국의 위로는 밥이지만 늘 밥 그 이상이다.

여행을 하면서 아침은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이동 중에 패스트푸드로, 저녁은 햇반, 카레, 짜장, 컵라면 등을 이용하거나 몇 차례 현지식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밥을 벌어오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힘들어도 밥이 만족스러우면, 그것이 힘이고 위안이 될 텐데, 밥이 부실하니 가장으로서 미안할 뿐이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가족 모두 아침의 간편식에는 적응이 되어갔지만, 패스트푸드와 햇반에 카레는 서서히 물려가고 있었다. 옐로우스톤 여행 때까지만 해도 어쭙잖은 현지식보다 햇반에 카레가 제일 맛있다고들 했었는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입맛은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서니 딱히 마땅한 곳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스테이크를 먹은 적이 없어서 스테이크 전문점에 갔다. 집에 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수영장 옆에서 바비큐를 해주었을 것이다. 한국에 비해 식료품 값이 무척 저렴한 얼바인에서는 특히 소고기는 가격 대비 감동이었다.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이들 데리고 풀장에 나가 바비큐를 해서 먹고,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은 김치 볶음밥을 해주면 하루가 행복했다. 그렇게 먹고 풀장 옆에 누워서 썬텐을 하면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여유였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Kelsey's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중 깔끔하고 가장 식당스러워 보였다. 그곳에서 스테이크, 키즈 메뉴 2, 스테이크 샌드위치, 캐나디안 맥주를 시켰다. 나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스테이크는 어디를 가나 신뢰할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팁을 포함해서 78달러의 호사였다. 호사는 대부분 대가를 치르는 것이어서 덕분에 저녁은 다시 햇반에 3분 카레를 먹어야 했다.


안개 아가씨호 티켓판매소(),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안개 아가씨호(), 레인보우 브리지()

안개 아가씨호를 타기 위해 서서 기다리는 줄이 평소보다는 짧다고 했다. 줄을 서서 선착장까지 내려가는 길이 폭포 쪽으로 트여 있어서 기다리며 바라보는 폭포와 그것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사람 수만큼이나 많이 오가고 있었다. 안개 아가씨호라는 배 이름이 참 매력적이었다. 배의 크기나 용도와 상관없이 크고 강한 이름을 지은 배들을 보면 이름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은데, 안개 아가씨호는 작고 소박하면서 그 배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이름이었다. 뱃머리에 쓰여 있는 Maid of the Mist를 보니, M자가 주는 단단한 느낌까지 더해주고 있었다.

비옷을 입은 아내와 아이들. 효진이는 얼굴 젖는 것을 싫어해서 얼굴도 가렸다.

배를 탄 사람들을 보니 모두 코발트색 비옷을 입고 있었다. 비옷이라고는 하지만 얼핏 보면, 1970년대 많이 쓰던 파란색 비닐우산이 연상되는 비옷이었다. 비옷의 색깔도 색깔이었지만 비닐의 두께가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비닐우산이었다. 우비를 입고 폭포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내와 나는 우비를 그냥 주는 것일까, 구입하는 것일까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아내는 그냥 주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공짜가 어디 있겠느냐, 아이들의 동의를 구해가며 갈린 의견을 다잡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우리도 배에 오를 차례가 되었을 때, 한 청년이 커다란 비닐 통에 비옷을 잔뜩 쌓아놓고 서서 웃으면서 비옷을 나눠 주고 있었다. 비옷을 받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거 봐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내는 늘 옳다.

비옷을 펼치어 입고 보니 모두가 똑같아 보였다. 우비는 덩치 큰 이곳 사람들의 크기에 맞추었는지 효진이에게는 너무 커서 앞쪽을 한번 묶어주었다. 안개 아가씨호는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배에 오르자마자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보겠다고 사람들은 모두 2층 난간으로 몰렸다. 배는 지체 없이 떠났다. 멀리 레인보우 브리지(Rainbow Bridge)가 보였다. 내일은 아마도 저 다리를 건너야 하리라. 몇 마디 안전 수칙에 대한 안내 방송이 끝나갈 무렵, 배는 미국 쪽 폭포 앞에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미국 쪽 폭포는 낙차가 56m, 너비가 320m라는데, 보여주는 모습도 그랬지만 그 엄청난 소리만으로도 넉넉한 압도였다. 폭포 전체를 조망하면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몸이 젖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서 배는 멈추는듯하더니 이내 뱃머리를 돌려서 캐나다 쪽 폭포로 향했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고 오는 다른 배가 옆을 스쳐가자 모두들 유쾌한 함성을 질렀다. 캐나다 쪽 폭포는 낙차 54m, 너비가 675m인데 말발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호스슈(Horse Shoes)라고도 불린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본류라고 볼 수 있는 캐나다 쪽 폭포는 미국 쪽 폭포에 비해 수량이 여섯 배나 많다고 한다. 캐나다 쪽 폭포에 다가서자 사람들의 탄성이 잦아졌는데, 크게 탄성이 터져서 돌아보니 폭포 주변에 낮은 높이의 무지개가 선명했다. 비웃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젖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보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데, 보고 즐기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고 보면, 두 쪽 모두를 온전히 살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만, 나이아가라 폭포에 와서 캐나다 쪽 폭포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캐나다로 건너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폭포만큼이나 낯선 캐나다 사람들의 매력까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스슈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 위 작은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는 물새들이 기진한 날개를 쉬는 듯 서 있었는데, 그 실루엣은 물새들을 더 작게 만들고 있었다. 폭포 소리에 이미 울음소리는 스러져버린 작은 물새들의 바위 옆으로 크고 작은 물결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폭포에서는 떨어지는 높이가 늘 솟구쳐 오르는 높이보다 크다. 떨어지는 높이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차고 오르는 높이도 큰 것이 또한 변함없는 이치다. 가늠할 수 없는 양과 거역하기 힘든 속도로 밀고 와서 문득 떨어져버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산 것들의 냄새, 살아야 한다거나 살고 싶다거나 하는 의지 이전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 그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천지 사방에 가득 찰 때쯤, 배는 출발한 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폭포를 돌아볼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더운 날이었다. 비옷을 벗고 나니 시원했다, 잠시 동안만. 나이아가라 폭포 기념품점에 들러서 아내는 냉장고 자석을, 아이들은 엽서를 구입했다. 나이아가라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꿈틀대는 장면에 압도된 가족들은 야경을 보고 숙소로 가자고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저녁 9시에 조명이 들어오니 꼼짝없이 9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상점에서 발견한 아이디어 상품들

근처에는 선물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미국과는 다른 독특한 제품들이 보였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스 와인이나 메이플 시럽은 워낙 유명한 것들이고, 매장을 둘러보다 아이스하키 피큐어를 하나 구입했다. 아이스하키 복장과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복장을 결합하여 만든 캐릭터가 재미있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소방관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가게는 아이디어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생활 속의 작은 아이디어들을 상품화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엇보다 그런 상품이 개발되고 판매되는 문화가 부러웠다. 세상을 뒤집을만한 즐거움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잊고 있다가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장난스러운 소품들, 보면서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이 시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것들, 생활 속의 작은 불편을 해소시켜주는 소품들이 끊임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그 매장의 대표상품은 왁스로 자신의 손 모양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조악한 색깔의 투박한 모형보다 아이디어 상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모래를 이용해 투명한 호리병 안에 그림을 그리는 노인은 쉬지 않고 떠들면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골 장터에서 만났던 혁필 화가를 보는 듯 쉬지 않고 떠들면서 손님과 이야기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판매하기도 했다. 투명한 호리병 안의 그림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만드는 과정만은 넋을 빼앗길 만큼 신기했다. 깔때기로 필요한 색깔의 모래를 원하는 위치에 넣고 얇은 봉을 가지고 모양을 만드는 것만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일 텐데 끊임없이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거나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해서 숙련된 것이 분명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그렇게 신기했던 것이 막상 완성되고 나면 소박하기만 했다. 과정을 즐기라더니, 이 작업이 그랬다.

모래 그림을 그리는 노인

근처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허쉬 초콜릿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기사에 경악하면서 마구 성토하면서도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은 꼭 봐야한단다. 초콜릿의 달콤한 유혹이 벌레를 넘어선 모양이다. 미국에 와서 본 전문 매장(코카콜라, M&M's, 기라델리 초콜릿, 버드와이저 등)이 보여주는 매력과 소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문매장은 관련 상품 개발, 브랜드 이미지 및 고객 충성도 제고, 미래 고객 확보 등의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지만, 사지 않고 매장만 둘러보더라도 허쉬 초콜릿에 대한 충성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티켓센터의 모습

이곳 오락실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고득점을 성취하면 기계가 표를 발행하는데, 그 표를 티켓 기계에 넣으면 선물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티켓이 발매되는 방식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티켓의 양이 득점수와 비례하기 때문에, 고득점을 획득했을 경우에 한 아름 티켓을 안고 가야했다. 당연히 티켓이 출력되어 나오는 시간도 상당해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왜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아마 고득점을 얻고 나서 그 성취감을 티켓이 출력되어 나올 때까지 즐기라는 모양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수레 가득 지폐를 싣고 가서 감자 한 자루와 바꾸었다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우리와 달라서 즐거운 장면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매장마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격이 모두 다르고, 미국 달러를 내면 수수료 10%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직불카드로 계산을 해도 캐나다 달러 환율로 계산하여 추가요금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율 시세를 따져보니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비쌌고, 아무리 이웃 국가지만 환전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거스름돈은 캐나다 달러로 주면서, 그 때에는 거의 1:1로 계산을 해주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아홉 시를 기다렸다. 아홉 시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폭포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서히 폭포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기대만큼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사람들 이야기로는 근처의 타워에 올라가서 찍으면 정말 좋다는데, 짐 때문에 삼각대로 챙겨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곳에서 야간촬영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이곳에서 보고 찍을 수 있을 정도만 찍기로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나이아가라 폭포는 빛도 빛이었지만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낮 동안 숨죽여 있었던 듯, 자기가 낼 수 있는 속울음의 끝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어둠을 타고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점점 커져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인지, 아름다워서 살아남은 것들인지는 몰라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겁게 차고 오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것들과 관계된 것이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의 밤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야경()과 주변의 야경()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로 한숨에 달려와서, 캐나다 국경을 넘고 부지런히 돌아본 하루였다. 캐나다는 캐나다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폭포를 제외하고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싸구려 유원지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몰라도, 조금 실망스러운 풍경이었다. 폭포만 볼 수 있었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폭포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차를 몰아 숙소로 갔다. 마실 물이 떨어져서 근처 마트에서 물 한 박스를 또 샀다. 캐나다의 밤도 어둡기는 매 한 가지였다. 사만다에 의지해 달려와 보니 숙소였다. 이미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원 한 명이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체크인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친절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 직원들의 느리고 부정확한 일처리에 늘 답답했는데, 캐나다 직원의 일처리 속도는 가히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처리 속도가 빠르다보니 말도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진이가 옆에서 알아듣고 무사히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숙소의 직원뿐만 아니라 낮에 만난 캐나다의 매장 직원들은 미국 직원들에 비하여 젊고 예쁘고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미국 서부의 대형할인매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어서, 도대체 미국 젊은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아내와 농담을 했었는데, 캐나다에서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노동 인구의 연령으로 사회의 젊음을 측정하는 지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캐나다의 노동 인구가 미국 서부의 그들보다 젊은 것은 분명했다.

숙소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었고 깨끗했다. 아침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복도에는 열 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을 입고 1층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곳 사람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즐기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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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서 나를 보다

89일 나이아가라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더위는 식지만 운전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오늘처럼 이렇게 폭우 수준으로 쏟아질 때면 더욱 그렇다.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폭우를 뚫고 운전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한다고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심조심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보스턴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최소 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재입국할 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인보우 브리지를 통과했다. 멀리서 보기는 더없이 낭만적인 모양으로 캐나다와 미국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막상 달려보니 국경은 국경이었다. 수수료로 3달러를 요구했지만 친절했던 캐나다 쪽과는 다르게 미국 쪽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했다. 서류를 챙겨서 주었더니 대충 훑어보면서, 창문을 내리라고 하고, 불법적인 물품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여행객이라고 말하니 다시 서류를 훑어보고는 통과를 시켜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테러가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려서 꼼꼼하게 확인을 하든가, 불법적인 물품이 그렇게 염려스러우면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지, 고압적인 자세로 묻고 넘어갈 것을 그렇게 불쾌한 어투와 표정을 지을 것을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불법적인 물품을 가져오면서 가져온다고 말하겠는가?

몇 년 전부터 미국인들은 살인적인 의료서비스 비용과 약값을 이기지 못해서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서 의료서비스를 받거나 약품을 사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40,000달러가 넘는다는 나라에서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른 나라로 나라에 약을 사러 다니는 의약난민’(drug refugee)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제약사와 보험회사의 이익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태만이 맞물려 기형적인 약값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한 의약난민들 때문인지 국경에서 미국 입국심사관들은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는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나이아가라에서 보스톤으로 가는 I-90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I-90위를 달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인지 운전을 하는 내내 답답했고, 같은 차선의 도로임에도 좁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달려온 서부 쪽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길가에 나무들이 울창해서 그 밖을 쳐다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무성한 나무들은 길 밖의 풍경을 잠그고 있었고, 내리는 비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차를 가둘 기세였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서부 쪽의 고속도로들에 비해 도로 상태가 양호했다는 것이다. LA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로를 비롯해서 서부 쪽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노면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 도로인데 보수할 각 주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 모양이라고 했다.[각주:1] 동부는 서부에 비해서 재정 상태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료도로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로 상태가 무척 양호했다. 보스턴까지 몇 개의 톨 플라자를 통과했는데, 나중에 합산해 보니 18달러 정도의 톨게이트 비를 물었다. 유료도로기 때문에 내려서고 올라서는 일이 번거로운지라 서부에서는 볼 수 없는 휴게소가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휴게소에는 백인과 동양계가 유독 많았다. 백인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고, 동양계는 어린 학생들과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방학을 맞아서 동부 명문대학교를 보러가는 가족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턴을 방문하는 우리의 목적 중에 하나도 하버드와 MIT를 보는 것이었다. 그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여행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성이는 나를 꺼내어 되돌아오는 과정이 아니던가? 휴게소에서 만나는 동양계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방학이라는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미국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안에 보고 배워야 할 대상으로서 미국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학만은 보스턴의 그 유명 대학의 서열을 인정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해주길 바라는 속물근성이 스멀거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런 우려는 그저 소심한 아빠의 기우였다.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가졌던 미국은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우리와 다른 나라로 객관화 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일 뿐이고, 그 다른 점 중에서 우리보다 나은 것과 우리보다 못한 것을 아이들은 제 기준으로 나누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로 돌아와서 보스턴으로 달리면서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도 한국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적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유진이는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하니 힘들단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높은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것에 대한 이해가 이곳 아이들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단다. 미국에서도 미국 아이들보다 높은 클래스에서 최고의 영어 성적을 받고 있다며 늘 자부심을 갖는 유진이였지만,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다만, 한국에 비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은 좋단다. 강압적이고 불필요한 규제와 간섭으로 신경을 써야 하는 한국의 학교보다는 자유롭고 즐겁다고 했다. 유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 편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른 문제였다. 편하지는 않으나 즐겁기는 한 공부와 생활,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구현하고 싶어 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즐거운 학교생활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이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같은 시기, 삶의 계산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운 때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늘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으로 신열을 앓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게 빛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 있겠는가? 환한 웃음보다는 늘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가고 지친 몸으로 학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 실정을 생각할 때, 아이가 이야기 하는 즐거운 학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리적인 교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기면 타협 없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자유와 자율이 보장한다거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험이 한 학기 내내 진행됨으로써 평소에 꾸준히 공부할 뿐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이 적다거나, 특별활동의 비중이 높고 대학 진학에 그것이 반영된다거나, 심지어 한국의 수학능력평가시험에 해당하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도 본인이 시기를 정해서 보고 싶을 때 보면 된다니 한국에서 학교생활을 한 아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즐겁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곳 고등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주 빼어난 학생이 아니면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싼 칼리지(college)에 입학해서 2년을 마치고, 종합대학교로 편입하는 방법을 택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단다.[각주:2] 유진이 학교의 일부 백인 아이들은 꿈이 동네 빵집에 취직하는 것이라며,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자란 곳이고, 집에서 가까우니 최고의 직장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했단다. 빵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고등학생들이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본적이 없는 아이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동네 빵집에 취업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닐까? 혹은 그 이후에 자신이 원하며 다른 직업을 얻어서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의 유연성이 높다는 의미는 아닐까?

유진이의 발 와이퍼 놀이

비는 보스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졌다. 앞좌석에 탄 유진이는 다리가 아팠는지 대쉬보드 위에 다리를 얹고, 발로 음악에 맞추어 와이퍼처럼 흔들며 논다. 뒷좌석에 효진이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비가 거세어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와이퍼는 분주했다. 그렇지만 차 안은 마치 독립된 우주처럼 아늑하기만 했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서부와는 사뭇 달랐다. 도로나 주변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서부사람들이 유쾌하게 잘 웃는 것에 비하면 동부사람들은 비장한 얼굴로 좀처럼 잘 웃지 않았다. 톨 플라자 직원, 휴게소 직원, 휴게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잘 웃지도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동부와 서부의 거리, 주요 구성 인종, 문화적 토양 등을 생각해보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카고에서 만났던 친구 형식이의 말로는 이곳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해보면,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그 뿌리조차 알기어렵지만, 미국의 시작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을 찾았던 청교도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갔다. 동부를 둘러보는 동안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었다.

10시간 30분쯤 걸려서 드디어 보스턴 숙소에 도착했다. 오면서 식사를 하고, 폭우 때문에 잠시 휴게소에서 쉰 한 시간을 빼면 8시간 20분쯤 소요된 것이니 어떤 날보다도 오래 운전해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하루였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고속도로 주변에 큰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처음에는 상큼한 느낌이 좋았는데, 오랫동안 달리려니 주변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답답했다. 비도 비였지만 길가의 나무들 때문에 도로 폭이 더 좁고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길 위를 달리는 사람에게는 길 밖이 보여야 한다고 차 안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나니 딱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청준의 <줄광대>를 이야기 해주었다. 줄 위에 올라서서 줄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으면 예술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잃게 되고, 줄 위에 올라서 줄 밖에 눈을 빼앗기면 세상과 타협할 수는 있지만 예술을 이룰 수는 없는 줄광대의 숙명을 아버지 줄광대와 아들 줄광대를 통해서 그려낸 작품이 <줄광대>. 작가는 아들 줄광대의 삶에 보다 애정 어린 시선을 두고 있다. 비록 줄밖의 세상에 눈을 빼앗겨 줄 아래로 떨어졌지만 모두들 승천했다고 믿게 된 줄광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시절에 가슴 아파했었다. 그것은 아내를 죽이고 계속 줄을 탔던 아버지 줄광대나 줄보다 사람을 우선에 두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 줄광대의 모습이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와의 지속적인 불화를 통해서 세계를 회의하고 긴장시키는 예술가의 천형(天刑)이 안쓰러웠다.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줄광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나보다.

지금껏 무료도로만 달리다가 유료도로를 달리려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톨 플라자가 보여서 돈을 준비하면 티켓만 뽑는 데고, 티켓을 뽑으려 하면 돈 내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하이패스를 사용한지 몇 년이 되었으니 티켓 뽑고 돈을 내고 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톨 플라자와 톨 플라자 사이가 너무 멀어서 자꾸 순서를 헷갈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그 때마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는 보스턴 외곽에 있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형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해있었다. 체크인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버스 앞에 붙은 표지를 보니 중국 학생 관광단이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동부 쪽 아이비리그를 둘러보는 투어 코스가 있다더니 그들인 모양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만났던 중국집 주인이 생각났다.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면서도 종업원을 쓰지 않고 부부끼리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튜터를 붙여 공부시키던 모습이나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이들의 모습이나 10시간 30분을 달려 보스턴에 도착한 우리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밀려드는 손님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한 표정이 역력했다. 직원이 정신없어 할수록 체크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전화 받으면서 밀려드는 손님을 빠르게 처리했던 캐나다 숙소의 직원이 떠올랐다. 방 키를 받아서 방에 올라가보니 조금 낡았지만 정갈한 느낌의 방이었다. 숙소의 침대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여행 중에 보니 지역에 따라서 이불 색깔이 다양했다. 딴에는 보기 좋으라고 했겠지만 어떤 색깔이나 무늬도 흰색의 정갈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침대의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보스턴은 효진이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도시다. 지난 학기에 미국 역사를 배우면서 보스턴에 대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니 여행 계획을 짜는 내게 보스턴은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버드와 MIT를 보여줄 겸 들르려고 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을 보여주면 늘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이 본다.

숙소로 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보스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역사를 배우기 전에 미국 역사를 먼저 배워버린 아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우리 역사를 정규 교과로 배우지 못한 효진이에게 한국 역사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일 뿐 아직 역사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와서 정규교과로 미국 역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의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니 혹시라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염려 되었다. 역사도 언어처럼 자기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로 다른 나라의 것들을 배워야지 제대로 된 정보의 선택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으니 지금 효진이 나이였을 것이다. 방학 때 작은집에 놀러가서 15권짜리 이야기 한국사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또래의 사촌들과 경쟁하듯 읽어버린 그 책은 15권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야기 한국사로 만난 한국사는 역사책 보다 설득력 있었고, 강렬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려웠던 그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집에 있던 계몽사판 한국위인전기전집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 느닷없고 맥락 없는 나의 독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 독서 습관을 효진이가 많이 닮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를 다녀오면, 할머니는 가급적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보거나 공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지만, 그런 나와는 조금 다르게 효진이는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보문고, 학교 도서관, 동네 도서관, 이동도서관을 모두 훑고 다녔다. 아내, 유진 그리고 제 몫의 독서 카드를 모두 활용해서 빌릴 수 있을 만큼 책을 빌려와 책상 위에 쌓아놓고 탐식에 가까운 독서를 하곤 했다. 효진이가 읽는 책들은 제 나이에 맞는 것부터 그 이상의 것에 이르기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읽는 방법도 빠르게 읽기도 하고 한 권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기도 하는 아주 자유로웠다. 그러던 녀석이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한국책을 구하지 못해서 아내와 내 책을 탐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과 지역 공립 도서관에서 영어 책들을 빌려다 읽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는 주로 판타지 소설들을 빌려다 읽는 눈치였고, 덕분에 매주 도서관에 책을 빌리고 반납하러 부지런히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런 아이에게 이야기처럼 들려진 미국 역사는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는가? 그런 녀석이 보스턴을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아내는 빨래를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내에 에어컨이 돌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뽀송뽀송은 몰라도 바짝 마를 것은 분명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다소 가라 앉아있지만, 내일은 힘내서 보스턴 시내를 돌아볼 것이다. 효진이의 미국 역사와 유진이의 미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미국 역사에 밝지 않은 아내와 내게만 보스턴은 낯선 도시 같다.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동선을 확인하면서 독한 술 한 잔이 그리웠다. 우리 방이 2층에 있어서 그런지 빗소리가 더 선명했다. 물을 가지러 차에 내려갔더니 비가 뿌려놓은 물비린내가 여린 풀냄새처럼 차 주변에 가득했다. 이렇게 빗소리가 선명한 밤은 도통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속수무책이다. 독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1. 궁색한 재정은 서부 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 주에서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자갈과 같은 자재로 도로를 다시 깔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앨라배마, 오하이오 등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미시건주 83개 카운티 중에 38개 카운티가 자갈을 깔았다고 한다. (김광기,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동아시아, 2011, pp.16-17참고) [본문으로]
  2. 한국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 학비에 대한 부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보다 2배 가까운 학비를 부담해야하는 한국 유학생들 중 극히 일부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과 결혼하여 그 부담을 덜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사례라고 믿고 싶지만 학비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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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810일 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밤새도록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비는 문득, 간단하게 그쳐버렸다. 밤새도록 사위는 온통 빗소리뿐이더니 비가 그친 아침은 온통 초록이다. 비가 내리고 어두워서 어제 밤에는 몰랐는데 숙소는 유난히 나무가 많은 숲에 포옥 안겨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숲에 안겨서 그렇게 숲과 더불어 나이를 먹고 있었다. 시간이 데려간 것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니 초록의 숲길은 오히려 적막했다.

우리도 서두른다고 서둘러 숙소 식당으로 갔는데 벌써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제 본 중국 학생 관광단인 줄 알았는데, 그들 사이에서 얼핏얼핏 우리말이 들렸다. 중국 학생 관광단 말고도 개인적으로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중고생 자녀들과 함께인 가족들이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듯한 음식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숙소 주변에는 숲만 있을 뿐 딱히 식당을 찾을 수도 없었다. 캠브리지까지 나오는 길은 1차선이 한참 이어졌고, 도로가 2차선으로 넓어진 곳에서 차들은 그 이상 늘어나서 정체가 심했다. 예상치 못한 정체덕분에 길가에 오래된 주택들과 낡은 건물들을 천천히 지켜볼 수 있었지만, 시간은 예상보다 40분 이상 지체되고 있었다.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가니 도서관이 보였다. 마침 그곳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우리도 그를 따라서 도서관부터 본관 앞 잔디마당까지 차분히 설명을 들으며 따라 다녔다. 그런데 본관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던 가이드가 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차에 올라서 점심을 먹은 후에 하버드로 간단다. 우리는 MIT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하고 투어 중이던 가이드였던 것이다. 순간, 우리 가족은 머쓱해서 뒤로 빠지면서 우리끼리 한참을 웃었다.

MIT에서 발견한 김우중 회장의 사진과 거북선 모형

도서관을 돌다보니 눈에 익은 사진이 보였다. MIT 기계공학과에 많은 기부금을 낸 8명의 사진이었는데, 그 중에서 전 대우그룹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 부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가이드가 정보 하나를 더 준다. 그 사진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거액 기부 이후에 모두 망한 기업가들이란다. 김 회장이 MIT에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몰라도, 차입경영으로 무너진 대우를 기억하는 내게는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돈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우사태로 인하여 부실해진 은행을 세금으로 매워주었으니 그것은 국민의 고혈(膏血)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대우의 몰락 이후 대우는 물론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들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으며 가슴 뛰는 경험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열패감도 지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우리나라 샐러리맨의 신화가 아니었던가? 자신만 똑똑하면 언제든 불끈 일어서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자기 근면과 성실에 대한 낙관을 대표하던 그가 무너진 것은 대우라는 그룹이 무너진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낯선 나라 대학 도서관 벽에 걸린 그의 자랑스러워야할 사진이 안쓰럽고 부끄러웠다. 더구나 거액을 기부 했던 사람으로 칭송되다가 실패한 사업가로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아이러니했다.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 선박 전시관에서 거북선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인들이라면 거북선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환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찍고 싶은 것이 거북선인지 MIT 안에 거북선이 있다는 사실인지 모호했다. 거북선을 우리 스스로 자부하며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MIT가 인정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닐지내 생각은 또 삐딱해졌다.

전시장의 거북선을 보면서 김훈의 칼의 노래가 떠오른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이 작품을 수사(修辭)만 앞선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제압 없이 나올 수 있는 수사가 어디 있겠는가? 수사가 빼어나다는 말은 그만큼 대상에 대한 파악이 진지하고 절절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아파하고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그려낸 김훈의 이 빼어난 작품을 읽으면서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의 상황이었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대신들을 생각하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적의 칼과 배고픔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상황, 더구나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견뎌낼 뿐 표현할 수 없었던 고뇌는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그의 시대에서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현재이고 보면, 낯선 나라의 전시장에서 만난 조그마한 거북선 앞에서 결코 밝게만 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MIT 본관과 도서관

입학식과 졸업식을 진행하다는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MIT 본관과 찰스 강이 마주보고 있었다. MIT를 알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으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MIT 졸업생들의 기행(奇行) 기사는 서울 변두리 중학생이었던 내게 너무도 신나는 충격이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기숙사 방안에 차를 옮겨놓는다거나 돔 위에 경찰차를 올린다는 기사는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이라는 외화시리즈가 인기였는데, 밤샘 공부를 하고 가서 킹스필드 교수의 질문공세에 쩔쩔매면서도 자신의 의견으로 대답하는 하트의 모습만큼이나 그것은 대견한 일탈이고, 짜릿한 특권이었다. 그러한 기행의 현장이 본관 돔이란다.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경찰 순찰차, 황소 등 특이한 것들을 돔에 올렸다는 사실이다. 경찰 순찰차를 헬기로 내렸다고 하니 올린 기발한 방법이 자못 궁금하다. 돔 위에 이러한 것들을 올리는 비법은 4학년들에게만 전수가 된다고 하니 재미있는 전통임에 틀림이 없다.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졸업을 앞두고 그 정도의 이벤트는 귀엽기까지 했다. 다만, 올리기는 학생들이 올리는데 내리는 것은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어려움이 많단다. 천재들이 올린 것을 보통사람인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그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졸업식에서 본관 앞에 올라가 있는 경찰 순찰차를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물론 그것이 황소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과 손(Mens et Manus) 조형물 앞에서 어색한 아이들. 아이들에게 MIT방문이 얼마나 맥락 없고 어색한 아빠의 욕심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마음과 손’(Mens et Manus)[각주:1] 조형물 앞에 아이들을 세우고 보니 영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MIT를 돌면서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효진이야 어려서 그렇다 해도 유진이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이유는 아이들이 MIT를 전혀 몰랐고, 별다른 관심 없는 분야의 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에서 감흥이 생길 리 만무했다. 숙소에서 만났던 중국 학생 관광단이 생각났다. 아마 그들도 이곳을 다녀갔거나 다녀가리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부모 된 사람으로서 탓할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기대는 부모만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이곳에 왜 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박하게 세계적인 대학이니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는데, 마음 저 밑에는 더 큰 욕심이 있었나보다. 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안쪽으로 더 보아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핑계로 그만 보기로 했다. 바로 보스턴 시내로 들어가서 시내를 볼까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기 캠브리지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것도 어색한 동선이었다.

MIT에서 하버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버드까지 가는 길은 아침에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처럼 오래된 건물들과 주택들이 소박하게 모여 있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 학교 근처를 몇 바퀴 돌면서 보니 미국 중소도시의 주택 밀집지역처럼 학교를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는 주택들이 정겹게 보였다. 겉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 학교 부근의 원룸이나 하숙 밀집 지역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의 대학을 보면서 문득 우리대학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한참을 헤매다가 학교에서 조금 먼 곳에 코인 주차를 했다. 아내는 어떻게 알았는지 안내 센터에서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를 구입했다. 영어 버전을 우리말로 번역했는지 다소 어색한 표현이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무척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들고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하버드 곳곳을 둘러보았다. 방학 중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아 보이는 관광객 투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래드클리프 캠퍼스까지 다 돌아보지는 못했으나 건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아우라는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하버드 야드에서 책을 보는 학생

하버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하버드 야드에 의자 두 개를 붙이고 책을 읽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어제 비가 내려서 볕이 그리웠는지,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도 학생들이 아무 곳에서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책과 노트북을 펴고 공부를 하고, 심지어 노천광장에 놓인 탁자에 앉아서도 공부하는 모습은 내게는 낯선 모습이었다.[각주:2] 여러 개의 도서관에 좌석이 꽉 찬 것도 아닌데 야외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앉아서 책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에는 무척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좌석과 좌석 사이에 칸막이가 세워진 독서실 같은 분위기의 도서관에 앉아야지만 공부가 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어디든 자신이 편안하게 집중할 수만 있다면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론 이 말이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 비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Widener Library, 1914)80에 달하는 서가와 350만권 이상의 장서로 유명하다. 와이드너 도서관은 1912년 타이타닉호에서 사망한 하버드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거금을 기부하여 1914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와이드너 도서관의 내력담은 필라델피아의 거부, 하버드 졸업생, 희귀서적 수집가, 타이타닉호 침몰로 인한 사망, 어머니의 기부 등 극적인 서사의 좋은 구성요소를 지녔다. 더구나 타이타닉호 침몰은 두 차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극적인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와이드너의 어머니가 하버드 졸업생들이 자기 아들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졸업 전에 반드시 수영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기부조건을 걸었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실제로 하버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영 테스트가 있었으니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란다.[각주:3] 수영 테스트는 하버드만 했던 것도 아니고, 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전 국민에게 수영을 보급했던 일과 관계된 것이란다. 결국 와이드너 도서관에 얽힌 극적 서사가 브랜드가 되어, 추가적인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됨으로써 스스로 이야기를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각주:4]

남북전쟁에 희생된 하버드 출신을 기리는 메모리얼 홀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 1878)은 남북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졸업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136명의 이름이 건물의 양쪽 벽에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을 보면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남북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 문제까지 접근했던 이 작품은 강의 시간에도 자주 언급할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계급 차이에 근거한 상반된 두 캐릭터인 아이다 먼로(니콜 키드먼 분)과 루비(르네 젤위거 분)가 정서적 연대를 이루어가는 모습과 전쟁의 폭력과 야만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연상시키는 인만(주 드로 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잊히지 않은 작품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산야에서 인간의 가장 마지막을 보여줌으로써 더 처절하게 다가왔던 이 작품의 후반부에 눈 내린 협곡에서 인만을 부르던 아이다의 그 절절한 음성은 오랫동안 귀울림을 만들기도 했었다. 메모리얼 홀을 보면서 <콜드 마운틴>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오늘도 내 생각은 산만하고 종잡을 수 없다.

MIT보다 하버드에 관광객들이 더 붐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별 상관도 없는 하버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고 이야기 하는 곳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겠지만, 그렇다고 MIT처럼 하버드는 건물이나 도서관 등을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교육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공개한다한들 그것을 그 짧은 시간에 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달리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은 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집작하건데 세계 최고의 대학을 보여줌으로써 동기를 부여하여 하버드에 진학하거나 비록 진학은 못하더라도 건강한 자극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부모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버드를 방문하는 것은 꼭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하버드 유니버시티홀 정면에서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존 하버드 목사의 동상. 그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갈 수 있다는 속신으로 인하여 구두만 닳았다

설립자인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 동상[각주:5]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진학한다는 속신(俗信) 때문에 그것을 만지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대부분 그 옆에 서서 구두에 손을 얹고 멋쩍은 표정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속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재미있는 속신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속신의 대상이 왜 하필 구두였을까? 구두가 동상의 가장 밑에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있는 부분이어서 선택되었겠지만, 구두가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명예, , 굴레, 자기정체성 등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세계 최고라는 압도적인 칭호에 압도되지 말고 정말 하버드에서 보아야할 것은 다양성의 존중과 배려, 역사와 전통의 보전, 학문적 자유와 학교 운영의 자율성 보장, 체계화된 후원 시스템, 다양한 방식의 학생 선발 방식 등이 아니었을까? 멋스럽게 세월을 입고 있는 그레이스 홀(Grays Hall, 1863)과 매티우스 홀(Matthews Hall, 1872)을 굳이 신입생 기숙사로 배정하고, 그 옆으로 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자들이 근무하는 소박한 건물에 눈이 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리라.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언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나 나라별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기준이라는 것이 이미 명문화된 대학의 성공 요소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면 기존의 서열 체계를 은밀하게 확정하거나 재생산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몇 언론사들의 대학 평가는 공정성은 차지하고서라도 대학교육의 지향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대학교육의 파행을 부추기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언론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대학을 평가하는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평가가 어떠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이 교육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 설득하고, 그것에 대하여 객관적인 검증을 수행한 평가인지 우리는 이제 되물어야 한다. 몇몇 언론사는 해외의 기존 평가기관과 공동으로 대학 평가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평가지표가 얼마나 우리 현실에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봐야만 한다. 학교별 특색이나 전공별 차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평가 지표와 평가 자료를 준비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해야하는 비효율성 그리고 학교별 서열 외에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하는 결과 등의 모순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대학평가를 이제는 과감하게 거부해야할 것이다. 최근 국내 언론사들도 앞 다투어 대학평가를 시행하고 있는데, 대학평가 발표 전후로 해당 언론사에 여러 대학의 전면광고가 실리는 것을 보면, 우리가 대학 평가를 거부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게 된다.[각주:6] 영어전용강의 시수 등을 평가항목에 삽입함으로써 전공, 과목 등의 특성은 물론 그 성취 정도와 무관하게 영어전용강의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은 슬픈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사의 평가 기준을 따라가느라 기형적인 파행을 거듭하는 대학의 현실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몇 위, 한국에서 몇 위를 따지기 전에 자기 대학만의 분명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을 모색하는 것이 대학의 본 모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꾸로 자기 대학만의 교육방식과 교육목표를 가지고 세계 대학을 평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버드 앞 연경, 양이 많았던 볶음국수, 결국 남은 것들은 저녁이 되었다

하버드를 보고나니 점심때였다. 학교 바로 앞에 연경(燕京)’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규모가 컸고 손님도 많았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볶음국수가 생각나서 볶음국수 2, 볶음밥, 만두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1인분씩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는데[각주:7] 나온 양을 보니 2인분은 족히 넘는 양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시킬 때 양이 많다고 미리 이야기해주면 좋았으련만, 이 친구들 필요할 때는 입을 닫는다. 음식은 오클라호마시티의 그 집에 비해 좀 더 미국화 된 맛이었지만 우리를 위로해줄만한 맛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거리가 보이고, 왁자한 실내 분위기가 졸업식 날 학교 앞 중국집 분위기가 나서 혼자서 웃었다. 모처럼 배부른 점심을 먹고 났지만 음식이 많이 남아서 싸달라고 했더니 세 개의 상자에 담아다 주었다. 덕분에 그것으로 저녁까지 먹을 수 있었다.

건국 시기 복장을 한 프리덤 트레일 가이드와 도로에 새겨진 문장

점심을 먹고 캠브리지에서 보스턴으로 들어갔다. 효진이가 꼭 해보고 싶다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각주:8]을 하기 위해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으로 갔다. 보스턴 코먼은 1634년에 문을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프리덤 트레일16개의 건국 사적을 돌아보는 4답사인데, 보스턴 코먼을 시작으로 보도에 새겨진 붉은 라인을 따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코스다.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가이드는 정해진 시간에 티켓(어른 13.65달러, 어린이 7달러)을 가져온 사람들을 모아서 투어를 시작한다.

주의사당(상), 킹스채플(), 올드 사우스 집회소()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원로 가이드는 가는 곳마다 열정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마이크 없이 20명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극적인 묘사에 연기까지 해가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했다. 이민자의 나라에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할까 궁금했는데, 투어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우리 일행 중에 영국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독립과정과 영국의 만행 등에 대하여 가이드에게 질문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진지하게 투어 내내 계속되었다. 가이드는 연배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도 이동 중에도 우리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때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무척 열정적으로 보였다. 효진이는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보스턴과 관련된 미국의 역사를 배우고 왔기 때문에 투어 내내 맨 앞자리에서 주의 깊게 듣고는 우리에게 설명해주면서 뿌듯해했다.

프리덤 트레일 코스는 다운타운의 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서 가이드를 따라 걷다보면 현재 보스턴의 거리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적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고, 현재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주의사당처럼 지금은 다른 용도로 변경된 것도 있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존 행콕, 사무엘 아담스, 그리고 보스턴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래너리 묘지는 관리와 정비가 부족해서 황폐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이드를 따라 돌면서 아내와 나는 미국의 역사보다 고풍스러운 도시를 천천히 산책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프리덤 트레일을 걷는 내내 가이드는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애국자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설명하며, 영국의 역사적 과오를 지적하기도 했다. 보스턴 학살과 같은 영국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설명했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립전쟁 이후 미국인들이 보여준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노예제도나 서부개척이라는 명분으로 인디언과 멕시칸들에게 자행했던 폭력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횡단여행 내내 눈으로 확인하며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역사적 과오를 진정한 반성 없이 은폐해 버림으로써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과오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고궁이나 경주를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여유 있게 걸어본 기억이 없다. 경복궁에 몇 차례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어릴 때였고, 크고 나서는 함께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제 아이들도 커서 함께 답사를 해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다만, 귀국하면 고등학교에 가게 될 큰아이와 다시 분주해질 내 일상을 생각하면 함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라도 다녀야할 듯하다. 경복궁을 보러가면서 허균의 고궁산책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경복궁을 다녀오게 하는데, 보는 눈들이 달라져왔다. 이제 아이들도 이 책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연구실에 있는 책을 아이들 책꽂이에 먼저 가져다주어야 할 듯하다.

프리덤 트레일은 퍼네일 홀에서 끝났다. 퍼네일 홀 앞에는 사무엘 아담스의 동상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애국자가 아닌 맥주상표로 알려져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옆으로 노스마켓(North Market), 퀸시마켓(Quincy Market), 사우스 마켓(South Market)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퍼네일 홀 마켓플레이스(Faneuil Hall Marketplace)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멋스러운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축제에 온 것처럼 모두들 즐거운 모습들이었다. 마켓이 다 마켓이지 뭐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세 개의 마켓이 어울려 있어서 그런지 흥겨운 분위기에 같이 흥겨워지는 곳이었다. 아내는 퀸시마켓에서 먹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 와보는 도시인데 아내는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참 잘 안다. 마이크스 패스트리 샵에서 파는 초코릿 칩스 카놀라가 그것이었는데, 가서 보니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것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으며 걷다보니 부두였다.

퍼네일 홀과 사무엘 아담스 동상(), 퀀시 마켓 광장(), 초코릿 칩스 카놀라()

마켓과 부두 사이에 시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Jobs Not Cuts”라는 피켓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잔디밭에서는 시위대의 일원들로 보이는 브라스밴드가 연주를 하며 시선을 끌고 있었다.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예산 문제와 경기 침체로 인한 일자리 창출 실패로 인하여 청년 실업의 문제가 이곳에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은 분명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세계화, 시장경제의 극단화된 양극화, 불공정성의 문제가 사회적 합의와 수긍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것이었다.

Jobs Not Cuts을 들고 시위하는 여성

그런데 이곳의 시위를 보면 참 온건하다. 피켓을 들고 오고가거나 길목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정도였다. UCI에서 시위를 하는 것을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의사 표시만 할뿐 우리식의 시위는 보지 못했다. 시위로 의사 표시하는 것이 자유이듯 침묵하는 것도 자유라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모습이었다. UCI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대중 집회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그 주변에서는 발언을 경청하면서 피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자유롭게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몹시 신선했다. 캠퍼스 폴리스 두어 명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주변에서 지켜볼 뿐, 자유롭게 무척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집회였다.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대중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위도 자신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가 지니는 파괴력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신선한 것만은 분명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 부두는 조용했다. 크루즈 티켓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다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보여주는 듯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부둣가 벤치에 앉아서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찍어주겠단다. 한국에서 가족끼리 동네 산책하다가 아이들 머리핀을 사고 붕어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처럼 여유 있고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퀸시마켓 광장을 통과해서 돌아오는데 분위기가 마치 마을 축제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에 늘어선 보스턴의 시간들은 아주 따듯한 기억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숙소에 다가갈수록 숲이 많아졌고, 숲이 늘어나는 만큼 주변의 소리는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소리가 숨어버린 만큼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1. MIT의 교훈이다. 지식의 실제생활에서의 적용을 중시하는 MIT의 정신을 압축하고 있다. MIT 동문이 세운 회사에서 2조 달러의 이익을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라고 하니 그들의 실용학풍을 가늠하게 한다. [본문으로]
  2. 유진이가 제 선배와 스터디를 한다고 집 앞 빵집에서 방과 후에 공부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무슨 공부가 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픽업하러 가보면 상당수의 학생들이 빵집을 스터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어학원 앞 커피전문점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본문으로]
  3.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우연히 읽게 된 주경철 교수의 칼럼을 통하여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알 수 있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2/2011090202304.html) [본문으로]
  4. 강력한 브랜드의 포지셔닝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해당 브랜드의 후광효과를 노리는 다양한 이야기들과의 관련성이 폭발적으로 증가됨으로써 브랜드는 더욱 강력해지고 추가된 이야기는 더욱 극적인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대부분 고찰이 의상대사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 동상은 ‘3대 거짓말 동상’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동상의 비문에 “설립자 존 하버드, 1638”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1) 존 하버드의 초상화가 없어서 이 동상의 얼굴은 한 학생을 모델로 한 것이고, 2) 하버드는 존 하버드에 의해 설립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뿐이며, 3) 하버드는 1636년에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 총독부의 표결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미국에서도
  7.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중국집에서는 한국처럼 1인분 2인분 개념이 아니라 요리개념으로 여럿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 것이었다. [본문으로]
  8. 보스턴 코먼→주의사당(State House)→파크 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그래너리 묘지(Old Granary Burying Ground)→킹스 채플(King's Chapel)→최초의 공립학교 유적지(Site of First Public School)→올드 코너 서점(Old Corner Book Store)→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옛 주의사당(Old State House)→보스턴 학살 유적(State of the Boston Massacre)→퍼네일 홀(Faneuil Hall)→폴 리비어 하우스(Paul Revere House)→올드 노스 교회(Old North Church)→콥스 힐 묘지(Copp's Hill Burial Ground)→USS 콘스티튜션(USS Constitution)→벙커 힐 기념탑(Bunker Hill Monument) 순으로 진행되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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