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816일 워싱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피곤한 효진이는 아침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침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겠는지 따라나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려서는 이런 상황에 칭얼거리고 울다가 아내나 나에게 안겨서 숙소를 나왔을 것인데, 이제 컸다고 군말이 없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큰다. 횡단을 하는 동안에도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이 언뜻언뜻 보인다. 유진이는 이제 아내와 키를 재지 않는다. 유진이가 더 크기 때문이다. 크면서 부지런히 아내와 키를 견주더니 이제 슬쩍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아내는 최근까지 자신이 더 크다고 우기더니 요즘은 저항을 포기한 모양이다. 효진이도 제법 많이 컸지만 아직은 기둥에서 키를 잰다. 아버지 댁에 가면 기둥에 붙어 있는 기린 그림 위에 아버지가 키를 재고 표시해주시는데, 이곳에 와서도 효진이는 그렇게 재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댁에는 오남매의 아이들 키와 그것을 잰 날짜가 기린 그림 위에 가득한데, 그 중 유진이와 효진이 것이 가장 많고 촘촘하다.

맑은 날 아침의 워싱턴은 어제보다 선명했다. 숙소에서 워싱턴으로 오면서 본 주택가는 조용했지만 오고가는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보아야할 곳은 워싱턴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닐까? 출근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으로 향하는 자동차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워싱턴은 어제와는 다른 도시였다. 분주하게 오고가는 사람들과 수많은 자동차들이 어디서 일시에 쏟아져 나온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포드극장 쪽으로 갈수록 차들은 한산한 편이었다. 걱정했던 주차도 인근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편리했다.

포드극장 전경

포드극장(Ford's Theater)1865년 링컨대통령이 저격당했던 장소다. 포드극장은 9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먼저 극장 안에서 입장 가능한 시간의 입장권을 받아야 했다. 입장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어서 입구에 기념품점을 먼저 둘러보았다. 작은 규모의 기념품점에는 링컨과 남북전쟁 관련 상품들이 팔리고 있었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줄을 서서 15분쯤 기다리니 입장 시켜주었다.

포드극장은 저격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입장이 시작되면 지하의 링컨박물관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링컨과 남북전쟁의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링컨박물관 곳곳에는 링컨의 모습을 브론즈나 석상으로 세워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링컨의 암살범인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와 그의 일당들의 사진과 모의했던 장소, 저격 무기 등은 물론 링컨의 피 묻은 베개까지 전시되어 당시 참혹했던 그의 죽음을 흐트러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남북전쟁에 참가한 흑인병사들

박물관에서 극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저격 당일 링컨의 행적과 범인들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구성하여 서로 마주보게 전시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었다. 링컨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전시 중간 중간에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내력과 사건의 맥락을 짚어주고, 강조할 부분을 극적으로 재구함으로써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미국의 대부분의 박물관들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나 다큐멘터리로 대체하고 있었다. 링컨의 연설문이나 발언 중 감동적인 부분을 타이포그래피화해서 전시하고 있었고, 당시 흑인들의 비참했던 생활과 전쟁 중 활약상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전시물과 상호관련 되면서 매우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남북전쟁에 흑인병사들이 참전했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남북전쟁 이전에도 북군에는 흑인병사들이 있었다.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목숨 걸고 싸워야했던 흑인병사들의 처지는 월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인 병사의 월급이 14달러인데 반해 흑인병사의 월급은 7달러였다고 하니 북군 내에서조차 자유와 평등은 멀기만 했었나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링컨 암살범의 현상금이 50,000달러에 달했는데, 이 금액은 흑인 병사의 595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링컨을 저격한 권총

링컨에게 소지를 권했었다는 무기

링컨의 후두부를 쏘았다는 권총은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오히려 볼티모어에서의 암살계획이 드러난 이후 보좌진이 안전을 위해 권했다는 칼과 고글과 너클 등이 더 치명적으로 보였다. 암살범 일당들의 사진 등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설명이 없다면 당시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사진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인생의 질곡을 모두 잘 넘어와서 618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남북전쟁을 승리로 잘 이끌어온 링컨이 워싱턴 한 복판 극장에서 그것도 후두부에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면에서 저격을 당했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암살계획이 포착된 상황에서 2VIP석에 앉은 대통령의 후방이 그렇게 허술하게 열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2층에서 뛰어내려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것이나 숨어 있는 곳에 불을 질러 암살범을 죽게 했다는 것[각주:1]까지 링컨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링컨의 죽음에 대해서는 평행이론이나 테쿰세의 저주’(Curse of Tippecanoe)[각주:2] 등과 같은 말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링컨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는 무관하게 그에 대한 신화화는 더욱 강해져서 가는 곳마다 링컨을 추모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그가 죽음을 당했던 포드 극장을 2,500만 달러를 들여서 2009년 재개관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링컨을 기리며 그의 죽음을 상기하지만 그 진실은 아직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얼마나 섬뜩하고 냉정한 선언인가

링컨박물관에서 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선언적 예견은 분명 역사의 책무나 소명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나는 거기서 터무니없이 역사의 진실을 생각했다. 진실이 보장되지 않는 역사 앞에서의 책무와 소명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공소한 일일 텐가? 1980년대 대학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고민을 맥락 없이 링컨 기념관에서 다시 만난다. 크고 강한 이야기는 대부분 당위를 강조하지만, 삶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서 그렇게 클 수도, 강할 수도, 당위를 요구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링컨박물관에서 나오면 당시 저격이 벌어졌던 극장이다. 객석에 앉아서 안내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링컨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는 2층 오른쪽 VIP석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링컨이 저격당했던 1865414일은 로버트 리 장군이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종식된 지 닷새 후였다. 더구나 이날은 각료회의를 통하여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를 해제한 날이었다. 케네스 데이비스의 주장에 의하면, 링컨은 모든 이들에게 중용과 화해를 권유했고 온전한 재건계획을 세워 최소한의 보복과 처벌로 반역 주들을 다시 연방의 품으로 끌어들이려 했[각주:3]고 그것의 가시적인 노력이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 해제였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군이 4168백 명 전사했는데, 남북전쟁에서는 618천 명이 전사한 것만 보아도 그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인한 상흔의 깊이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링컨의 암살도 그러한 상흔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링컨은 관용과 화해로 상처를 보듬으려했는데 암살범은 보복과 암살로 그것을 파괴하려했던 것이다. 이것은 남북전쟁의 승자와 패자라는 확연한 입장 차이와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극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링컨이 암살당함으로써 남북의 각성을 이끌어 화해가 이루어져야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흑인에 대한 차별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곪다가[각주:4] 1950년대부터 흑인들의 저항과 개선의 노력[각주:5]이 본격화된다. 뚱뚱한 여자 안내인의 설명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극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포드극장 길 건너 맞은편에는 저격 다음날 아침 링컨이 죽음을 맞은 페터슨 하우스(Peterson's House)가 있다. 총격을 당한 링컨의 상태가 위중해서 병원으로 옮기지 못하고 임시로 옮긴 곳인데 그는 거기서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페터슨 하우스였다. 원래는 안을 둘러볼 수 있는데 현재 공사 중이라서 관람을 할 수는 없었다. 집 앞에 두른 무성의한 합판 담장의 색깔이 어울리지 않았고, 공사 중이어서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판 역시 무척 차갑게 보였다.

포드극장 앞 기념품 상점에서 만난 미국적인 기념품들

페터슨 하우스에서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대형 기념품점이 있었다. 포드극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일 테지만, 기념품의 콘셉트는 링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워싱턴과 미국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만큼 상품의 종류가 다양했는데 우리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매장이었다. 미국을 상징할 수 있는 것들, 미국 역사의 주요 장면들, 그와 관련된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것들, 미국의 애국자들과 영웅들 등등 보여주고 싶은 것보고 싶어 하는 것들사이에 절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내가 피규어를 모으고 있는 것을 잘 아는 아내는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하라고 했지만, 그것들의 미국중심적인 색채가 내게는 거슬렸다. 아이들만 기념엽서를 구입해서 나왔다.

다음으로 우리는 내셔널 몰에 있는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을 보러 갔다. 어제 주차를 했던 국회의사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면 되겠다 싶어서 차를 대고 보니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우리가 용감하게 주차했던 국회의사당 앞 주차장이 사실은 허가 받은 사람만 주차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용감하게 주차를 하고 다녔으니 혹시라도 어제 주차 위반 스티커라도 발부된 것 아닌가 슬쩍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를 다시 뽑아서 국립미술관을 비롯해서 내셔널 몰 주변을 다 돌았는데도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하나 발견한 곳은 주차기에 장애인 표시가 붙어 있었고, 동전만 받는 것이라서 포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인도 주차가 가능한 곳이었다. 다시 주변을 몇 바퀴를 돌다가 국립미술관에서 상당히 떨어진 교통국(Department of Transportation) 주변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최대 2시간밖에 주차가 안 되는 지역이었다. 관람하다가 중간에 나와서 시간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미술관은 내셔널 몰의 박물관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관은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고, 동관은 현대 작품 중심인데 규모는 서관이 몇 배 컸다. 규모면에서도 그동안 보아온 미술관과는 달랐다. 내셔널 몰 주변의 수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경은 차분한 압도였다. 규모로 보면 웅장했지만, 웅장하다고만 하기에는 친숙했고, 친숙하다고만 하기에는 웅장한 모습으로 차분히 압도해왔다. 사실 미술관은 어디를 가나 실망이 없다. 작품이 적으면 적은대로 느긋하게 볼 수 있어서 좋고, 많으면 말 그대로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 돌아본 미술관들은 대부분 미술관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미술관 주변부터 미술관 건물 그리고 동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구조까지 늘 제한된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런 마음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데, 다만 아이들이 미술관에서 유독 빨리 지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국립미술관 전경

국립미술관의 규모와 3만점의 소장품을 오늘 다 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라고 생각하고, 서관부터 보기로 했다. 게다가 주차 시간의 제한이 있으니 보다가 내가 나가서 시간을 연장할 수 있으면 하고, 그렇지 못하면 볼 수 있을 만큼만 보기로 했다.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중세부터의 종교화들에게서 보는 눈이 어두운 나는 큰 감동을 얻지 못했다. 모든 예술이 학습을 통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미술사의 앞부분을 좀 더 차분히 읽어두었다면 또 다른 감흥을 얻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국립미술관은 공간을 넉넉하게 활용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다양한 시점과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실 중앙에는 앉아서 볼만한 소파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메모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주제별, 시기별로 모아서 전시를 하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해주는 오디오 기기를 제공 받아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인데, 그것이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니 놀랍고 고마울 뿐이었다.

피카소의 연인

이번 여행 중 둘러본 미술관에서 기뻤던 것은 사진으로만 보던 세계적인 작품들을 직접 보는 것도 보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작가의 또 다른 작품과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식견은 좁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피카소였다. 그동안 피카소의 작품은 입체파 혹은 미술책에 등장한 작품들에 갇혀 있었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화풍의 작품들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감이나 선을 보면 그가 보였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묘사한 연인이나 발가벗고 있는 두 젊은 남자를 그린 작품이나 모두, 피카소 외에는 답이 없는 작품들이다.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

이곳에서 만나는 세잔, 라파엘, 드가, 고호, 고갱, 다빈치, 램브란트의 작품들도 하나 둘 그런 기쁨을 주었다. 특히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에서는 퇴폐적이고 관음증적 시선과 응시가 겹쳐진 끈끈한 분위기에 한참을 넋을 주고 서 있어야만 했다. 크림트의 느낌이 들었는데 가서 자세히 보니 르누아르였다. ‘오달리스크는 매춘부를 그린 것이라는데, 관음증적 판타지를 응축시킨 작품 표정도 재미있지만 소품과 옷의 색깔만으로도 끈적끈적한 욕망의 색깔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했던 기만, 허위, 은폐, 억압 등에서 탈주해 대안적 세계로 추구했던 것인 오리엔탈적 세계였는데, 그러한 경향의 한 작품이란다. 신비와 퇴폐의 노골화가 과연 오리엔탈적인 것이냐는 것은 철저히 당시 유럽인들의 시각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말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유럽세계의 기만과 황폐의 대안을 오리엔탈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육체와 욕망 그리고 시선과 상관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신보다는 인간에, 거대담론보다는 미시담론에, 당위보다는 존재에 주목한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립미술관은 시카고나 뉴욕에 비해 한가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할 수는 있었지만, 직원들의 고압적인 자세가 눈에 거슬렸다. 우리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람객을 대하는 고압적인 말투며 행동거지가 몹시 불쾌했다. 이렇게 좋은 소장품들과 전시공간을 가지고서 그것을 온전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미술관이 안타까웠다. 그것은 그 많은 전시공간마다의 테마가 스토리텔링으로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아쉬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향유 자체를 방해하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작품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에 가까웠다.

워싱턴 맥도날드 가판대 메뉴. 횡단 내내 만났던 맥도날드의 평균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품질은 형편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경을 더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보니 주차시간이 다 되었다. 아내에게 효진이와 더 보고 있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나는 많이 피곤해하는 유진이를 데리고 차를 주차해둔 교통국 부근까지 부지런히 걸어갔다. 날도 덥고 게다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걸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다행히 2분 전에 도착해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추가했는데 30분밖에 더 추가가 안 되었다. 이상해서 주변의 표지판을 살펴보니 오후 4시부터 630분까지는 주차가 금지된 곳이라서 시간이 더 추가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차를 옮기려고 살펴보니 근처가 다 비슷한 형편이었다. 퇴근시간 무렵에 교통 혼잡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논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국립미술관을 그만보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에 어제 어두워져서 제대로 보지 못한 한국전쟁 참전 추모공원과 베트남 참전 용사비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아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는 사이, 우리는 근처에서 발견한 맥도날드 가판대에서 먹을 것을 사기로 했다.

결국 오늘도 그러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일정에 욕심을 내다가 점심을 4시가 지나서 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지금은 시장기만 지우고, 조금 있다가 저녁은 제대로 된 음식을 사주리라 생각하고 간단한 것을 주문을 하려고 보니 가격이 터무니없었다. 이미 어제부터 워싱턴의 음식이 질과 양에 비해 가격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맥도날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미국 전역 어디서나 같은 가격으로 팔리는 줄 알았던 맥도날드가 워싱턴에선 햄버거가 4, 맥너겟은 2배 이상 비쌌다. 게다가 메뉴의 선택도 여지가 없다. 정식 매장이 아니라 작은 가판대다 보니 직원 둘이 햄버거 기계를 이용해서 기본 버거와 더블버거 그리고 맥너넷만 팔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시장한 것을. 덕분에 꽝꽝 언 냉동 패티가 기계에 들어가서 구워져 자동으로 빵 위에 얹혀 나오는 것을 질리도록 쳐다보아야했다. 그나마도 줄을 서서 불친절한 직원과 말을 섞으며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미주리 주 맥도날드에서 만났던 그 친절한 직원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맥도날드의 표준화도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친절만큼 불친절은 힘이 세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 공원으로 가기 위해 비지터 센터 주차 구역으로 이동하는데 교통경관이 주차구역에 주차한 다른 차에 스티커를 발부하고 있었다. 합법적인 주차구역인데 왜 스티커를 발부하나 의구심이 들어서 몇 번을 망설이다 앞쪽으로 차를 세우고, 직접 가서 문의했다. 내가 차를 주차한 곳이 주차 구역 맞느냐고 두 번이나 묻고서야 안심을 했다. 하루 종일 주차 스트레스에 시달린 우리는 이렇게 넉넉한 무료주차 공간이 고마울 뿐이었다. 게다가 옆으로 우리와 함께 흐르는 포토맥(Potomac) 강은 비스듬히 누워 햇살로 반짝거렸고, 그 앞의 모든 것들은 역광 때문인지 실루엣으로 아늑했다. 강변을 따라 길 안내 하듯 늘어선 나무들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더위는 따라오지 못했다. 숲그늘의 고즈넉한 표정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비로소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국전쟁 참전 추모 공원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은 어제보다 사람들이 조금 많았다. 빛은 투명하고 명징해서 사진 촬영에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빛이 좋아서 조형물들을 꼼꼼하게 훑어볼 수 있었는데, 어제와는 달리19명의 병사들 표정들에서는 전투의 의지보다는 전쟁의 공포가 먼저 읽혔다. 한 명 한 명의 자세와 표정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읽어갔다. 그 옆에 검은 벽에 새겨진 얼굴들도 어제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앞으로 경계석 위에는 한국전쟁의 사망, 실종, 포로, 부상자의 숫자[각주:6]가 적혀 있었는데, 참혹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호크 다운>(Black Hawk Down, 2001)에 등장했던,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던 플라톤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비극적 전망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 지독한 비극의 결과를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원인을 달리하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Vietnam Memorial)1959년에서 1975년까지 연대순으로 6만 명에 달하는 전몰장병의 이름을 검은 대리석에 새겨 놓은 것이다. 검은 대리석 위에 전사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그 앞에 서고 보니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추어졌다. 그 검은 대리석이 직각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곳에 비춰진 모습이 다시 되비춰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관람하는 사람의 현재를 통해 완성되는 구조였다. 베트남 전쟁은 비록 끝났지만 그와 유사한 성격의 전쟁을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미국의 오늘을 되비추고 있었다. 6만 명에 달하는 아까운 목숨들의 죽음이 오늘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다. 대부분 군대 외에는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입대를 했고, 또 정부에서는 그러한 계층들에게 입대를 권했고, 그들은 낯선 땅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져 간 것이다. 미국 사회 양극화가 더 극대화된 현재에 그러한 모습은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징병관들이 저소득층이 머무는 지역을 방문해 입대를 권유하는 모습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은가? 또한 그들에 의해 희생된 그 낯선 지역의 생명들까지이 지독한 참상을 고스란히 조형물은 되비추고 있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에서 본 봉투 위의 편지

베트남참전용사 조형물

베트남참전 용사비에 비친 필자

역사는 낡거나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 갈 뿐이다. 잊혀진 역사는 여지없이 반복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더 가혹해질 뿐이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만 역사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더구나 유사한 반복에 번번이 침묵하고 외면하며 현실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늘 그렇듯 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듯, 오늘에 침묵하는 몫은 오롯이 자신의 것임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조형물을 따라서 걷다가 손글씨가 쓰인 노란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겉에 쓰여 있는 편지였다. 전몰장병의 지휘관이었던 생존자가 써놓은 글이었는데, 울컥하게 만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위에서 산 자로 남게 된 사람의 미안이 절절했다.

아직 해가 조금 남아서 포토맥 강위로 길게 누워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아직 과거가 아니다. 한국전쟁은 휴전중이며 베트남전쟁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번복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 반복될 뿐인 또 다른 전쟁은 반성 없이 가혹해질 뿐이다. 두 기념물을 보면서 가슴은 한참이나 먹먹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주류전문점에서 버드와이저 40온스짜리를 하나 사왔다. 이곳 호텔에는 대체로 냉장고가 없어서 얼음을 채워와 차갑게 한 후 아내와 마셨다. 오늘은 아내가 더 마셨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여정을 달려온 피로 때문이리라. 내일 돌아가면, 그동안 멈춘 시계를 부지런히 돌려야 한다. 8월도 후반부로 달려가고 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 21일간 횡단여행의 대단원이다. 시카고를 기점으로 시간은 순식간에 달려갔다. 시간이 달리는 만큼 피로는 더 했지만 가족들 모두,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왔다. 무엇을 보고 배우려고 온 여행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는데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싶던 여행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가족들 모두 즐겁고 알찼다고들 했다. 가족들은 다양한 주제로 이번 여행의 베스트와 워스트를 선정하기도 했다. 돌아갈 짐을 모두 꾸리고 내일은 아쉬움에 워싱턴에서 놓친 몇 군데를 더 돌고 공항으로 갈 것이다. 대부분 처음 해보는 것들에 가족들 모두 용기를 가졌다. 돌아갈 곳의 소중함도 모두 같은 심정인가 보다. 꼼꼼하게 여행일정과 경비, 관련 자료, 사진, 정리물 등을 챙겼다. 이제 그것이 몸을 만들 차례다. 그것은 집에서 따듯한 밥과 된장찌개를 한 그릇 먹고부터 시작할 일이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멀리 있지만, 내일이면 하나의 그리움을 지울 수 있겠다.

 

  1. 암살범 존 윌키스 부스는 뛰어내리다가 장식 천에 다리가 걸려 정강이뼈가 부러진 상태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말을 타고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버지니아 볼링그린 담뱃잎 건조장에서투항을 거부하고, 불타는 건조장에서 나오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테쿰세의 저주는 미국 정부에 무력으로 항쟁하던 인디언 추장 테쿰세가 죽으면서 20년에 한 번씩 0으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대통령은 임기 중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1840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 1860년 아브라함 링컨, 1880년 제임스 A. 가필드, 1900년 윌리엄 매킨리, 1920년 워런 하딩,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1960년 존 F. 케네디는 예외 없이 임기 중에 모두 죽었다. [본문으로]
  3.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276 [본문으로]
  4.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합법화하는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판결을 내린다. 이에 따라 학교, 식당, 열차, 버스, 식수대 등에서 흑백의 분리를 합법화함으로써 남부에서는 흑백의 갈등이 보다 첨예화된다.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p.323-325 참고) [본문으로]
  5. 백인전용 학교에 입학을 거부당한 부모가 제기했던 1951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을 비롯하여, 버스의 흑백분리 지정석 제도에 저항한 로자 파크스 사건, 1957년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라는 백인 전용 학교에 흑인학생 9명의 등교 시도 사건은 주방위군까지 출동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본문으로]
  6. 사망(미군: 54.246, 유엔군 628,833), 실종(미군: 8,177, 유엔군: 470,267), 포로(미군: 7,140, 유엔군: 92,970), 부상(미군: 103,284, 유엔군:1,064,4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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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817일 워싱턴얼바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여행은 늘 돌아가기 위한 떠남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없다. 떠나지 못해 조바심치고 안타까워하다가 막상 떠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돌아올 날을 꼽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어쩌면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의 설렘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익숙한 곳에 놓아두고 자신의 일상을 문득 정지시켜 놓고 떠나서 낯선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서성이다가 그 안에서 자신을 꺼내어 돌아오는 여행은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여행에서 돌아가는 길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정지시켜 놓았던 일상은 정확히 정지된 만큼 더 분주해질 것이고, 사용된 여행비용만큼 궁핍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빽빽하게 채우고 싶어 했다.

아침식사를 포기하고 모두들 1시간쯤 더 자기로 했다. 1시간 더 잔다고 피곤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편안했다. 오늘은 미국 역사박물관을 3시까지 보고,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를 탈 계획이다. 어제 저녁을 먹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에서 남겨온 머핀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여행을 마치기 전날이라고 어제 저녁은 제대로 먹기로 했는데, 마침 필라델피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페이머스 데이브스가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어서 그곳에 간 것이다. 지난번에 아쉬워했던 콤보를 시켜서 넉넉히 먹으면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고, 서로를 축하했다. 배불리 먹고 났는데도 닭 한 마리 반 정도와 머핀이 많이 남았다. 아내가 너무 많을 것이라고 시키지 말라는 것을 남으면 내가 먹는다고 우겨서 시켰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돌아오는 내내 아내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아침은 머핀으로 해결하지 않았는가?

워싱턴은 매일매일 더 혼잡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주차할 곳이 없었다. 동전주차기가 설치된 곳은 모두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내셔널 몰 주변의 관공서가 몰려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아침 10시까지는 교통 혼잡과 청소 때문에 주차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1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빈 곳이 없었다. 주차할 곳을 찾아서 몇 바퀴를 돌고나서야 차를 빼는 한 곳을 발견하고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앞으로 들어와 주차를 했다. 화가 나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차에서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내렸다. 어쩌겠는가, 힘드셔서 그랬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 역사박물관에서 10분쯤 걸어야 하는 곳에 가까스로 주차를 했다.

이곳도 어제처럼 2시간 한정 주차라서 중간에 한번 다시 나와서 차를 옮기거나 주차를 연장해야 했다. 거리에 서 있는 동전주차기는 오래된 것은 동전만 받지만, 신형은 동전과 카드를 모두 받는다. 25센트 동전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카드가 편하다. 2시간 한정 주차의 경우에는 2시간 이상 입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2시간 후에 나와서 다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연장하는데 동일 카드는 연장이 되지를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니 결제가 된다. 동일인의 동일카드를 인식할 줄 아는 주차기가 동일인의 카드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결제가 되는 것을 보면 조삼모사였다. 내셔널 몰에 그 많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주차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설사 주차를 했다고 해도 2시간 안에 박물관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두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말일 텐데, 우리 같이 숙소가 시외에 있는 여행객들은 어쩌란 말인지 궁금했다.

내셔널 몰 주변의 스미스소니언 국립박물관들 지도

미국 역사박물관은 워싱턴 기념탑 쪽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국립미술관의 동관과 서관을 지나서 가야했다. 새로운 길로 가보자고 국립미술관 앞쪽이 아닌 뒤쪽으로 가다보니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날도 많이 더웠다. 걸어가다가 지칠 판이었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 국립미술관 조각정원(National Gallery of Art Sculpture Garden)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록시 페인의 ‘Graft’

알렉산더 칼더의 ‘Red Horse’

루이스 브루주아의 ‘spider’

호안 미로의 ‘Gothic personage, Bird-Flash’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House1’

클래스 올랜버그와 쿠제 반 브루겐의 ‘Typewriter Eraser,

그저 거리를 줄이려고 들어선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은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1991년에 개관했다는 이곳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17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문과 문 사이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저녁에는 음악공연이 펼쳐지고, 겨울에는 이곳을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분수 주변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분수대 옆의 카페테리아에서는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팔고 있었다. 카페테리아 앞쪽으로 록시 페인(Roxy Paine)‘Graft’이 서 있었다. ‘Graft’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나무였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느낌과 앙상한 가지에서 견고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 주변으로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House1’,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Red Horse’, 호안 미로(Joan Miro)‘Gothic personage, Bird-Flash’, 클래스 올랜버그(Claes Oldenburg)와 쿠제 반 브루겐(Coosje van Bruggen)‘Typewriter Eraser, Scale X’, 루이스 브루주아(Louise Bourgeois)‘spider’등이 있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spider’는 롯본기 힐스에서 보았던 ‘maman’과 비슷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이 거미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maman'은 말 그대로 어머니의 이미지와 연관된 것이다. ‘maman'은 유년기의 두려움과 상관된 어머니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었고, 이 작품은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물적인 존재로서의 거미와 상관된 것이었다.

작품의 규모나 대담함에 압도되어 이러저런 시점에서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진은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한 촬영기술 때문이겠지만, 정지된 시간 외에는 현재의 다른 무엇도 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분수에 발을 담그거나 그 주변의 그늘에 담요를 깔고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작품 속으로 일상이 들어간 것인지, 일상 속으로 작품이 들어온 것인지도 몰라도, 부러운 여유와 풍요였다.

미국역사박물관 입구에서 만난 어린 아이들() 이름표를 등 쪽으로 달았다

사진을 찍다보니 조각정원 뒤쪽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멋스러운 건물이 들어왔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는 독립선언서 같은 국가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National Treasure, 2004)에 등장했다고 하니 아이들도 그제야 관심을 갖는다.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을 나와서 미국 역사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앞쪽에 견학을 온 것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귀여웠다. 손에는 흙장난할 때 쓰는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하나같이 이름표는 등 뒤에다 달았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솔하는 선생님이 뒤에서 아이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이름표를 등 쪽에 달고 친구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미국의 다락방(the nation attic)이라고도 불린다는 미국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은 미국 생활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가까운 과거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일상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들이 중심이라서 훨씬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대통령, 전쟁, 오락, 인종문제, 교통수단 등등의 테마별로 설명보다는 즉물적인 제시가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 층의 규모가 대단히 컸지만 테마를 따라 돌다보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었다.

세사미 스트리트 초기 인형들

마이클 잭슨 모자

도로시의 구두, 세사미 스트리트, 피너츠의 초기 버전, 마이클 잭슨 모자, 알리의 권투 장갑, 루게릭의 야구공 등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전시는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국 역사박물관 안에 전시된 대중문화 전시가 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유독 미국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흑인대학생들이 백인전용 좌석에 앉음으로써 분리주의에 항의했던 그린스보로의 가게 의자

흑인노예 등에 채찍 상처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에 설치된 네 개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흑인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식당 의자를 전시한 것이다. 1960년 그린스보로의 한 식당에서 백인들만 앉게 되어 있는 의자에 흑인 대학생 네 명이 앉자 주인은 나갈 것을 요구하며 음식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은 27, 그 다음날은 300, 그 다음날은 백인을 포함한 1,000명이 함께 찾아와 백인전용 의자의 부당함에 항의함으로써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연좌운동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미 1955몽고메리 승차거부 운동으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각주:1]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저항이 시작된 상태에서, 그린스보로의 이 사건을 통하여 흑백분리의 부당성과 심각성을 전국적으로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1960년도까지 미국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미국이 아니던가? 이러한 뿌리 깊은 흑백차별 문제는 단지 미국 사회의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득권층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미국 내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이며, 더 나아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굴복해야하는 약소국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이기도 하다.

야만은 과거의 수사가 아니다. 다만 노골적인 것들이 은밀하고 합법적인 형태로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합법과 합리로 정당화되는 미국의 질서 이면에는 기득권층의 일방주의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미국의 기득권층이 백인 기독교도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가 가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캠프에서 쓰던 식기 키트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던 추첨통

이곳에서는 자유를 위한 대가로 불리는 미국의 전쟁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상당한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독립전쟁부터 최근 이라크전까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미국중심의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당시에 화려한 군복과 투박하지만 잘 벼려진 무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며 워싱턴 캠프에서 사용했었다는 식사용 키트는 캠핑세트처럼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부상당한 병사의 팔을 절단하는 모습은 처절했다.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는 추첨에 사용했다는 추첨통이나 매일 지급되었던 반 컵의 럼주[각주:2] 등은 참전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부터는 자유와 평화라는 명분의 정당화와 전시동원 체제 내에서 여성의 참여 독려[각주:3] 그리고 평화수호자로서 미국의 위치와 전력의 우위 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Route66과 관련하여 이동수단, 이주 과정 및 고난, 도로망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아이들은 자기들이 달려본 길이라고 무척 재미있어했다. Route66은 서부로의 확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자연재해로 농토를 잃고 농장노동자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고난의 여정이었고, 세계 대전과 한국전 등에 참전하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길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Route66은 미국의 근현대사의 영욕을 증거하는 길이다.

미국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초기 캘리포니아 농장의 값싼 노동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어려웠던 시기를 막연하게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서부유럽인들의 이민으로 탄생한 미국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등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제한을 합법화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1929년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1880년대 인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출신국별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였다. 기득권을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이민법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중국인 이민자들이었다.

값싼 중국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의 청원이라는 명분 아래 서부유럽계 백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미국 전체 국민총생산의 30%를 담당하고, 전 세계 제조업의 20%를 담당한다는 캘리포니아의 저력은 그러한 이민자들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문화라는 말에 자유와 평등이 함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거나 낭만적인 믿음임에 틀림없다.

미국 역사박물관은 넓고 크긴 했지만 미술관이나 다른 박물관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짐을 부치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에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금 빨리 공항으로 출발했다.

유료 가트

기내에 가지고 탔던 누추한 여행의 흔적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국제공항(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에 기름을 넣을까 하다가 아침에 주유를 한 터라 괜찮을 듯싶어서 그대로 가져다주었다. 뉴욕에서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48달러나 더 내야했었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이 정도면 됐단다. 그동안 차에 싣고 있던 짐들을 꺼내 놓으니 의외로 많았다. 어제 저녁에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많았다. 우리가 예약한 저가항공의 경우에는 트렁크 하나당 20달러의 요금을 받아서 40달러의 추가요금을 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내 캐리어는 그냥 가지고 타도 될 뻔 했는데 저가항공은 처음이라서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예상했던 금액보다는 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작은 짐들은 가족들이 나누어 들기로 했지만 그래도 적은 양은 아니었다. 그래서 탑승 전까지는 가트에 모두 싣기로 했는데 가트가 3달러를 내야 이용을 할 수 있었다. 3달러를 지불하면 가트를 뺄 수 있었는데, 나중에 반납하면 25센트만 돌려주는 아주 야박한 인심이었다. 왜 인천공항이 세계 1위 공항으로 매년 선정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는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저녁을 주지 않는단다. 그래서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것을 시켰는데, 착한 가격에 제법 그럴 듯한 음식이 나왔다. 오늘 제대로 된 식사는 처음이었다. 모두들 돌아간다는 설렘에 배고픈 줄도 몰랐나보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사실 고민을 했었다. 저가항공이 가격은 저렴한데 한 번도 타보지 않아서 어떨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 국내선 저가항공의 수준이나 서비스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기내식이나 기타 없어도 될 서비스만 빠진 것이라기에 예약을 했다. 이왕 저가항공을 탔으니 조금 더 불편을 감수하고 예산을 줄이자는 생각에 덴버에서 한 번 갈아타는 조건으로 가장 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여행 관련 예매는 수시로 제공되는 핫딜(hot deal)을 제외하고는 미리 할수록 저렴하다. 운 좋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핫딜이 제공되면 가장 좋지만 원하는 날에 좌석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예약을 한 것이다. 더구나 숙소일 경우에는 핫딜이 뜨면 환불하고 그것을 예약하면 되는데, 항공권의 경우에는 환불 수수료가 붙기 때문에 그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상당히 저렴하게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덴버에서 갈아타는 것을 포함해서 4시간 30분 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동부와 서부가 3시간의 시차가 있으니까 7시간 30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산타 아나 공항에 10시쯤 도착해서 짐 찾으면서도 택시가 없을까봐서 아내는 계속 걱정을 했다. 아내가 들은 정보로는 이곳에서는 밤늦게는 공항택시가 없단다. 그래서 노심초사했는데 마침 우리가 탄 것이 마지막 비행기 전이라 택시가 있었다. 사실 택시가 끊기면 아는 분들께 픽업을 부탁해야 하는데 서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알려주고, 우리끼리 우리말로 택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도 한국 사람이란다. 우리는 기사분이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우리말이 그리웠는지 기사분은 이것저것 물었다. 3주간의 횡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비용이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걱정해준다. 이번 횡단 여행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우려가 있었지만 비용을 걱정해준 사람은 기사분이 처음이었다. 사실 여행은 아주 철저한 현실이 아니던가? 먹고 자고 보는 모든 것들이 아주 규칙적으로 비용을 요구하고, 일단 시작하면 돌아올 때까지 그 요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여행이 아니던가? 아마도 기사분의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묻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이민사를 들려준다. 이민 와서 부지런히 생활하고 돈을 모았던 이야기며,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까지그래도 지금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집이었다.

한국 기사 아저씨 덕분에 편안하게 집에 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집이 너무 낯설지만 편안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족들 모두 약간은 흥분상태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 아내와 나는 큰 짐을 정리했다. 엄청난 빨래와 여행 중 구입한 기념품 등을 정리했다. 여행을 떠나면서 걱정하실까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떠났었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를 드리고 씻었다. 씻고 나니 그제야 집이라고 피로가 몰려왔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이곳을 한 번도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편안하고 푸근한 것을 보면, 이곳이 이제 내게 집이 되어가고 있나보다. 떠나보아야지만 자기가 있는 곳을 안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3주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달려온 4,359마일(7,015)[각주:4]의 거리나 7,758달러의 비용이 만만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경유하는 도시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남루해지고 피곤해졌지만 그것을 이유로 내려서거나 돌아올 수는 없었다. 오로지 앞으로 가야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다. 3주 동안 1만장 넘는 사진을 찍고, 대형 바인더 두 개 분량의 자료를 모으고, A4 50장 분량의 빽빽한 메모를 적었지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련하다.

3주간 신고 다닌 크록스

크록스 구멍 부위가 탄 발등

미국 횡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부터 일상 속에서 반추하며 지속적으로 구성해나갈 부분인지도 모른다. 이제 휘발성 강한 기억을 노트 위에 기록해야 할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겸허하게 되비추어야 할 것이다. 여행 내내 길을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길이 날 데려왔음을 깨닫는다. 결국 여행에서 만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같이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늘 집으로 돌아오나 보다.

2011년 여름은 뜨거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는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길이 데려다 놓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모든 것을 놓고 떠날 길을 생각한다. 다가올 날들에는 떠나고 돌아오는 길이 더 멀고 길어져서 나를 좀 더 깊고 온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풀어놓은 남루한 짐들을 빨고 기워서 언제든 다시 꾸리고 떠날 수 있도록 내 안에 설렘이 더욱 강성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움은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그리움을 만든다.

 

  1. 짐 크로 법(1876-1965)은 학교, 버스, 공원, 병원, 식당, 감옥, 식수대 등의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이다. 이 법은 모든 공공기관에서 흑백의 분리를 의무화했으며, 1896년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즉 ‘분리되어 있으되 평등하다’는 기만적인 흑백분리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 법으로 인하여 흑인들은 공공기관에서 모멸스러운 불평등을 감내해야했다. 짐 크로(Jim Crow)라는 말은 “니그로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으며 가난과 어리석음의 대명사”(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325)였다. [본문으로]
  2.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적인 술이었던 럼주는 17세기 근대화된 군대가 등장하면서부터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하루에 지급되는 양은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취기를 느낄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전시에 공장 등으로 불려나왔던 여성들은 종전과 함께 귀환한 남성들과 일자리 경쟁이 불가피했다. 남성들의 일자리 보장을 위해서 종전 후에는 여성들을 일터라는 공적공간에서 불러내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다양한 여성상과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다. [본문으로]
  4. 인천공항에서 LA공항까지가 9,637㎞니 횡단여행 동안 달린 거리가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음을 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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