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87일 시카고클리블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남겨온 피자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설 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비가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몸살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보니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비는 밀레니엄 파크로 이동하는 중에 그쳤다.

오늘은 클리블랜드까지 371마일(594)을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딱히 볼 것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와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보고 시카고에서 느지막이 떠나기로 했다.

여행계획을 짤 때도 클리블랜드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외에는 클리블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보니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까지 10시간 정도 거리니까 무리하면 못 달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약 지체되면 클리블랜드를 생략하고 나이아가라로 가서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설정해 둔 것이 클리블랜드였다. 다행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시카고에서 늦게 출발하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나이아가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우리는 시카고 미술관을 꼭 들러보기로 했다. 또 시간이 된다면 밀레니엄파크도 보려고 했는데, 마침 두 곳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두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사실 시카고에 도착하면서부터 사만다가 거의 패닉상태였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유난히 많은 고가도로 밑에서는 수신이 원활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고는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카고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사만다는 다급해지거나 침묵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만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들이었다.

길을 잃고 다시 만난 길(), 그 와중에 만난 시카고 극장()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시카고에서 사만다는 자주 길을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만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길을 잃으면 새 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문득 시카고 극장 앞이었다. 1921년에 개관한 시카고 극장은 미국 최초의 대형 극장이라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을 축소한 모양인데 특히 건물 앞에 걸린 초대형 붉은 간판이 선명했다. 그 앞에서 롭 마샬 감독의 영화 <시카고>(Chicago, 2002)[각주:1]가 떠오른 것도 그 붉은 간판의 선명함 때문이리라. 영화 <시카고>에서 보여준 뜨거운 욕망을 지금 이곳시카고에서 보기에는 머물 시간이 너무 짧았다. 주중에 그토록 분주하고 혼잡스러웠던 시카고의 일요일 오전은 서울의 그것처럼 한가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처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처연한 기분은 밀레니엄 파크에 도착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밀레니엄 파크 건너편 시카고 미술관 옆에서 음악공연이 있어서 공연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성스러운 분위기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지도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은 2004년에 했다고 한다. 음악공연 관계로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밀려드는 차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밀레니엄 파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야외 음악당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루리가든(Lurie garden),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왼쪽으로 루리가든(Lurie garden)이었다. 피에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했다는 루리가든은 부단히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일 년 내내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는 주차장에서 바로 북쪽으로 걸어가서 찾았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는 일상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시카고 미술관에 빼앗기고 있어서 입구를 찾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루리가든 앞쪽으로 걸어가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이 등장했다. 웅장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객석과 대규모 잔디밭(Great Lawn)을 두고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잔디밭 위까지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전경과 지붕

잔디밭을 덮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에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근처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와 있었다. 공연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은 지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봉과 봉이 만들어내는 프레임 사이로 주변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오고, 그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밀레니엄 파크가 시카고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련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공연장 지붕을 덮고 있는 조형물만큼이나 이 봉 구조물의 다채로운 프레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는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공연장만큼 스산한 풍경은 없다. 일요일 오전, 비가 내린 후의 야외 공연장은 그저 푸른 잔디밭일 뿐이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은 공연장으로 설계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새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공연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연장의 조형물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공연장과 잔디밭을 오간다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설치미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을 보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애니쉬 카푸(Anish Kapoor)가 만든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나타났다. 크라우드 게이트를 보는 순간 일단 그 크기(높이 10m, 너비 13m, 길이 20m)에 압도된다. 밀레니엄 파크의 방문 인증샷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10톤이 넘는다는 무게와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다 스테인리스를 이음매 없이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람과 안개 그리고 추위로 유명한 시카고의 일기를 생각할 때, 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되는 표면에 두 번 놀라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 세 번 놀라게 된다.

크라우드 게이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신을 비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면 구름을 형상화한 것인데, 영감은 액체수은에서 얻었다고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콩(Bean)이라고 부르니 재미있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혹은 다양성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밖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굴절되어 반사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크라우드 게이트는 되비춤을 통해서 세계를 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밀레니엄 파크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의 모습과 다양한 상호작용의 사례

크라우드 게이트는 중앙에 3.7m의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거울 앞에 서 보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낯선 모습의 나와 너라면 그것은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가족들 사진도 찍고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강하게 밀었다. 어디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이었다. 무례하고 세련되지 못한 중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횡단 여행 중 곳곳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례를 넘어 난폭하기까지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바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야 뭐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을 휩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만났던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LA 인근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에서는 중국인 전담 종업원을 두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소공녀소공자라고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의 무례함[각주:2]은 그 끝을 모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원을 만들어 웃고 떠들며 주변은 무시한 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더 불쾌해질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폭력이 폭력을 부르듯 무례는 무례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들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크라우드 게이트 옆으로 조금 이동하니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가 있었다.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설계를 했다는 이 작품은 제작을 위해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레스터 크라운(Laster Crown)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24m 높이의 두 개 기둥에는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13분마다 얼굴이 비디오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카고 시민들이라고 하니 공공미술(public art)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과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완성과 해체를 거듭하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과 크라우드 게이트 그리고 크라운 분수까지, 밀레니엄 파크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곳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 새 천년을 기념으로 공원을 조성하며 시카고가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블어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것이 새천년의 시카고에서 이루어지길 기원한 내용이었으리라.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는 개개의 독립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 간의 소통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상호소통을 통해서 밀레니엄 파크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직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미술관 안에 벌써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들의 이름이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점이었다. 이름까지 좀 더 멋스러운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름을 내주고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름까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시카고 미술관 전경과 입구 그리고 실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이라는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밀레니엄 파크와 니콜라스 다리(The Nicholas Bridgeway)로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규모 면에서도 미국 내 2위에 해당한다는 시카고 미술관은 26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간 18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1866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 아트 아카데미를 거쳐 1882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과 미술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3콜럼버스 세계 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 이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축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가 증축한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다리를 통하여 2009년에 증축했다는 현대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무료고 어른은 18달러의 입장료를 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무료였고, 시카고미술관은 어린이들은 무료인데, 둘 다 신선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화공간의 무료관람을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1층은 18-19세기 미국 미술, 2층은 미국 모더니즘을 테마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호, 세잔, 르노아르,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등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들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 밖에서 만난 강렬한 느낌의 그림들은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미국작가들의 작품임을 알았다. 특히 시카고 미술관에서 꼭 봐야한다고 소개된 그림들은 그 소개가 아니더라도 미국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인해 그림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

스로우 호머의 <The Herring Net>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Nightlife>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각주:3]<Nighthawks>는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도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보여지는 아이러니의 공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모두 어긋나고 있는 관계의 메타포, 텅 빈 듯한 공간의 구도 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Arcibald J. Motley Jr.)<Nightlife><Nighthawks>와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도 소란스러운 공허가 읽히는 작품이었다. 윈스로우 호머(Winslow Homer)<The Herring Net>는 프레임 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꽉 찬 두 어부와 청어 그물이 거센 파도와 함께 고된 노동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면서 같이 보고 그 느낌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따라갔다.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내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손을 잡고 때론 어깨를 걸고, 옆에 세우기도 하고 앞에 안기도 하면서 좋은 그림을 가족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감상에 젖어서 내가 미술관을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가본 것은 대학교 입학한 이후였을 것이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미술책이 전부였던 내에게 미술관은 차라리 강박에 가까웠다. 꼭 가서보아야 한다고 늘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가서는 낯설고 불편했던 공간이 미술관이었다. 대학원 시절 화집을 사서 모으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그림을 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한 이 체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 품에 안겨서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따듯한 체험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품들을 코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신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갤러리를 돌고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의자가 있으면 자꾸 앉으려 하고 몹시 지쳐있었다. 아내와 나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일러주고 좀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들을 도통 몰랐다. 어린 효진이는 그렇다고 쳐도 유진이는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요즘 미술시간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는단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외울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시회에 가면 작품 옆에 다 적혀있지 않은가? 작품을 보고 좋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엄마랑 아빠가 보는 동안 쉬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법 많은 방을 같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버릴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손잡고 작품을 설명해주던 엄마의 손길, 안고 이야기해주던 엄마의 체취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따듯한 기억이 될 것인가? 세계적인 명화도 명화였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시카고 미술관에는 동양 예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많았고 우리 것은 거의 없어서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들이 모두 합당한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던졌다. 전시된 개인 소장품들은 대부분 고서화나 오래된 도자기들이었는데, 그것이 약탈이나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더라도 유실 가능했던 것들이 잘 보존되었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약탈이나 밀반출의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소유로 볼 수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채우고 그것을 세계 최고 박물관 운운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등.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창작된 그 나라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방적인 약탈이나 불법적인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당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소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대여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나라 미술관에서 자기 나라 유물들이 많고 적음을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문화적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인정투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거나 합법적인 경로로 마련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몇 개의 전시물로 과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작고 소박한 한국관을 보면서 갑자기 맥락 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내와 나는 더 돌아보고 싶은데 유진이가 감기의 여파로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효진이가 피곤하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2시쯤에는 관람을 마칠 계획이었다. 시카고에서 끝나는 것이 Route66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보겠다는 욕심에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다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만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제대로 보려면 2-3일쯤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쩌면 미술관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책 한 권 읽듯이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에 가까운 것이리라. 문화에 모두, 전부, 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개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체험하는 향유 자체가 문화가 아니던가?

태평천하를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태평천정이 된 조악한 기념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서면서 입구의 기념품점에 들렀다. 기억이 될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만한 것이 없었다.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써져 있어야 할 곳에 태평천정(太平天丁)이라고 적힌 기념품을 보면서 저것도 혹시 중국제품이라면 웃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조악한 모조품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특히 엉터리로 한자를 써놓은 기념품들을 보면서 씁쓸했다. 시카고를 떠나면서 시카고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되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그곳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오늘의 감동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욕심나고 더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의 1단계인 Route66 코스는 마쳤다. 이제 클리블랜드부터는 여행의 2단계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동부여행이다. 풍광이나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까지 I-90I-80타고 갔다. 이 도로들은 이전까지의 도로들과는 다르게 유료도로기 때문에 서비스플라자(Service Plaza)가 설치되어 도로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비스플라자는 주유소,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피자집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보아온 주유소나 패스트푸드점과는 브랜드가 바뀌어 있었다. 달리면서 몇 군데 서비스 플라자에 들러보니 대부분 bp주유소,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이곳의 서비스플라자도 제품 대비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시카고 스카이웨이 톨게이트(),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에 만난 철교()

아직 유료도로가 시작되기 전인 시카고를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내려섰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감기약만 구입해서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사만다의 혼란은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어서, 일러준 그대로 달려가다 보면 공사 중이거나 막힌 길이었고, 목적지라고 해서 보면 낯선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사만다를 무시하고 표지판만 보고 음식점을 찾기에는 찾아야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배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료도로를 만나 서비스플라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계획보다 많이 남은 햇반

8시가 지나서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기대보다 괜찮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제공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저녁이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컵라면 2개와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이제 슬슬 김치가 그립기 시작했다. 그나마 느끼한 현지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컵라면이 떨어졌으니 큰일이다. 한인마트를 찾아야 구입할 수 있을 텐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한인마트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보다 컵라면은 많이 먹었고, 햇반과 3분 카레 등은 기대만큼 먹지 않아 많이 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햇반의 어정쩡한 온도와 흐물거리는 3분 카레의 식감에 물리나보다. 나도 그러니 어린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군말 없이 잘 참아주니 고맙고 대견하다.

내일은 일찍 나이아가라로 출발해야 한다. 일찍 출발할수록 좀 더 많이 보거나 천천히 깊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실수로 캐나다 쪽 숙소를 잡은 덕분에 내일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보다 캐나다 쪽이 더 멋있다고 위로하며 출발 전에 학교 인터내셔널 오피스에서 입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왔다.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입출국사무소 관리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던데, 기대가 된다. 실수는 대부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1. 192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연극작품을 1975년 뮤지컬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자 2002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가 출현한 뮤지컬 영화다. 재즈, 갱, 관능, 쇼 비즈니스 등과 같은 시카고의 이미지와 황색언론, 살인 등의 대중적인 요소들을 통합해서 구현한 뮤지컬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All That Jazz'와 'Roxie' 같은 넘버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정 당 한 명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자녀를 공주와 왕자로 키우는 중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 이렇게 여섯 명의 어른이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와 공주로 성장하게 되고, 이들의 모습을 비꼬아 소공자, 소공녀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3.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알랭드 보통은 그의 그림에서 고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공허에 마음이 울렸다. 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국내 최고의 웹툰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페이스 북에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체험을 구현하는 작가의 매혹은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 눈을 빼앗기고 가슴에 새기게 되나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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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811일 보스턴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드디어 뉴욕에 도착했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쌓아가고 있던 보스턴을 떠나면서 아쉬웠던 것은 그 시간의 질서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도시에서 볼 것에 쫓겨 다니다 떠나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만큼 보스턴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뉴욕에서는 숙소보다 라과디아 공항(La Guardia Airport)에 먼저 들러야 했다. 숙소로 정한 민박집에 주차 시설이 없고, 뉴욕의 교통지옥 속에서 운전을 하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렌터카를 반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 다시 새로운 차를 렌트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렌터카 회사에서 알려준 주소를 사만다에게 알려줘도 사만다가 정확하게 위치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라과디아 공항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근처에 가서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다.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는 화이트스톤 브리지(Whitestone Bridge)에 올라서면서부터 사만다가 당황하기 시작해서, 할 수 없이 표지판만 보고 공항 내에 렌터카 회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렌터카 회사를 찾아서 차를 반납했다. 렌터카 회사 직원은 차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기름을 체크했다. 기름을 가득 채워서 반납해야 했는데 공항 주변에 주유소가 없어서 그냥 왔다가 추가요금 42.97달러를 더 냈다. 주유소의 기름 값보다 2배 이상 비싼 금액이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공항 가까이 가서 주유를 하겠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공항주변으로 오니 주유소도 없고, 차를 돌리기도 어려운 길이어서 그냥 반납한 탓이다. 안타깝지만 또 하나 배웠다. 문제는 배움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반납하고 렌터카 회사 직원이 건네준 영수증을 보니 얼바인에서 뉴욕까지 3,948마일(6,353)을 달렸다. 처음에 구글 지도를 보며 워싱턴까지 예상했던 거리를 뉴욕까지 오는데 모두 써버린 것이다. 더 달린 만큼 많이 보았을 것이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렇게 낯설던 자동차가 이제는 내차처럼 익숙해졌는데 막상 반납을 하려고 하니 같이 고생한 정 때문인지 아쉽기만 했다. 차에 싣고 있던 짐을 모두 내리고 보니 난민이 따로 없었다. 볼품없는 트렁크와 여행 동안 어설프게 줄어든 짐 그리고 기념품 등으로 늘어난 가방을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나누어 들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뉴욕 숙소를 예약하는데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부탁을 해두었다. 도착 1 시간 전에 연락을 달라고 해서 연락을 하니 시간을 맞추어 공항으로 온단다. 픽업 하러 오기로 했던 분은 렌트카 회사가 있는 곳을 몰라서 몇 차례 전화를 하더니 30분쯤 늦게 도착을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 분이셨는데, 공항에서 맨해튼 숙소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이민사(移民史)를 들려주셨다. 재미는 있었는데 중간중간 지나치게 욕을 많이 해서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다.

맨해튼의 교통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뉴욕에서 민박은 대부분 다른 사람 건물의 방을 빌려서 하는데, 불법이란다. 그러니 집에 드나들 때 관광객처럼 하지 말고 당당하게 다니란다. 불법인데 어떻게 당당하란 말인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줄 돈 다 주고도 불법이라니 황당했다. 뉴욕의 호텔 가격이 워낙 비싸고, 민박도 한 번 체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선택한 것인데 처음부터 꼬였다. 픽업도 민박집에서 서비스로 해주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민박집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45달러를 내란다.

뉴욕 숙소 침실, 침실과 붙어있는 기계식 주차장휴대용 가스 버너와 휴지

미드타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내 돈을 주고 불법이라는 민박에 머무는 것도 언짢은 일인데 숙소는 낡고 지저분했다. 인터넷에서 가격대비 시설이 양호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이 모양이었다. 사진으로 보니 깨끗하고, 취사가 가능하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밥을 해서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용 후기를 읽어보니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보니 낡고 지저분했다. 가스레인지도 없고 휴대용 가스버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약을 6월 중순에 했으니 두 달 전에 기억이고, 사진과 다소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한 구석을 보니 직전에 머물렀던 손님들의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뉴욕을 마저 둘러보고 떠나느라 추가 요금을 내고 짐을 맡겨 두었단다. 5시쯤 찾으러 올 거란다.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가 짐을 내줄 거라며 양해를 구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낯선 땅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그 정도 편의도 못 봐 줄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뮤지컬 입장권을 구하고 장도 좀 보아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더구나 안내를 해주고 있는 사람은 집주인도 아니었고, 아르바이트 학생처럼 보이니 그에게 항의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뉴욕에서의 처음을 따지고 다투면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타임스퀘어의 모습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사만다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길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작은 지도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찾은 후에 타임 스퀘어(Times Square)를 찾아보고 지도를 따라서 걸었다. 가로축과 세로축을 맞추어 우리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코스를 찾아서 걸어갔다. 뉴욕의 악명을 여기저기서 너무도 많이 듣고 온 탓에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해가 남아 있었고, 비교적 큰 길들인데다가 우리는 모두 네 명이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네 명은 순식간에 한 명의 보호자와 세 명의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바뀌겠지만, 어쨌든 함께가 아니던가?

타임스퀘어는 아이들이 <무한도전>에서 보고, 꼭 가고 싶다던 곳이었다. 꽉 막힌 차들 옆으로 걸어보니, 맨해튼에서는 걷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1904년 뉴욕타임스 본사가 42번가로 오면서 타임스퀘어로 불리기 시작했고, 한때는 성인영화관과 성인용품점 등이 즐비했던 범죄의 소굴이었으나, 1990년대부터 재개발에 들어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현재를 볼 수 있다는 타임스퀘어에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광판들이 어지럽게 점멸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타임 스퀘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와 전광판에 비친 우리 가족. 포에버21 전광판 속 아이돌 스타가 우리 사진을 찍어주지 않으니 아빠가 찍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였다. 포에버21은 이민 온 한국인이 만든 의류회사인데, 미국 내 88위의 부자가 될 정도로 성공한 이민자의 기업이란다. 그것은 대형 전광판 안에 등장하는 아이돌 스타가 전광판을 바라보며 즐기는 행인들 중에서 가장 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는 인터랙션 이벤트였다. 아주 짧은 주기로 남녀 스타가 번갈아 나오면서 행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찍힌 사진이 대형 전광판에 바로 공개가 되기 때문에 행인들이 무척 즐겁게 참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찍히려니 어지간히 튀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래도 어림도 없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과한 몸짓을 해도 다른 사람들만 찍혔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그냥 두면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가서 빨리 뮤지컬 입장권을 구해야했기 때문에, 내 카메라로 전광판에 비친 우리 모습을 찍었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어쨌든 찍은 것은 찍은 것이다.

아내의 계획에 따르면 오늘밤이 아니면 뮤지컬 공연을 볼 시간이 마땅하질 않단다. 사실 미리 숙소 측에 공연 예약은 가능한지를 문의했었는데, 도착해서 표를 구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냥 온 것인데,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급해진 것이다. 타임스퀘어로 먼저 갔다. 타임스퀘어에 있는 안내센터를 먼저 찾아갔다. 공연 관련 정보와 예매가 가능했는데,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오페라의 유령>은 가장 좋은 위치인 137달러 좌석만 남아 있었다. 유진이는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어 했다. 안내센터 직원에게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공연장은 이미 매진된 상태라고 확인을 해주면서, 혹시 길거리에서 입장권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와 메리어트 호텔 앞에 있던 입장권 판매원에게 물어보니 61달러와 115달러 좌석이 있단다. 그런데 61달러 좌석의 경우에는 입장권이 없을 수 있다는 말에 115달러짜리 오케스트라 뒷좌석을 구입하였다. 안내센터에서 말했던  137달러 좌석을 이곳에서는 115달러에 판매하고 있던 것이다. 공식적인 입장권 판매 장소였던 안내센터보다 메리어트호텔에 소속된 입장권 판매원의 판매가가 어떻게 더 낮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입장권 판매원까지 써가면서 더 저렴하게 파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 이야기로는 메리어트호텔에서 투숙객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극장 측과 연간 계약을 맺어서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입장권을 구매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공연을 조금 저렴한 가격에 가장 좋은 좌석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이 극장에 가서 입장권을 구매해 놓을 터이니 7시에 다시 와서 입장권을 받아가란다. 남는 1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한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 타임스퀘어에서 한인마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조금씩 지쳐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걸어서 그곳에 가보니 얼바인에서 일반적으로 H마트라고 부르는 한아름이었다. 김치, , 삼겹살, 스팸, 계란 등의 식료품을 구입하고 보니 얼바인보다 가격이 거의 두 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구입한 식료품을 들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숙소에 가져다 놓고, 허겁지겁 메리어트 호텔로 달려갔다.

입장권판매원이 손으로 써 준 메모의 따듯함에 감동하다.

호텔에서 입장권을 받아 나오면서 입장권을 확인하는데 봉투 안에 작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이 입장권과 함께 넣어준 직접 손으로 쓴 카드였다.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졌다. 아마 다시 브로드웨이를 찾는다면 가격과 상관없이 나는 분명히 이곳에 와서 다시 입장권을 구입할 것이다. 그건 작은 메모 이상의 신뢰였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호의에 문득 따듯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뉴욕은 내게 내내 불안한 장소였다. 뉴스나 영화를 통해서 이미지화된 뉴욕은 말 그대로 고담시(Gotham City)였다. 탐욕과 부패와 범죄로 타락한 도시를 상징하는 <배트맨>의 고담시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뉴욕은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였다. 그런데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메모가 그 어둡고 불안한 이미지를 씻어낸 것이다.

공연 시작까지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숙소 때문에 기분 나빠지고, 일정보다 늦어지면서 종종대느라 피곤했는데, 메모 덕분에 모두들 유쾌해진 모습이었다. 공연이 10시가 넘어서 끝나니 공연 시작 전에 무엇을 간단하게라도 먹어둬야 했다. 마침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는 매저스틱 극장(Majestic Theatre) 바로 옆에 주니어스(Junior's)가 있었다. 주니어스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치즈 케이크 집이라는데, 뉴욕에서 꼭 먹어볼 것 중에 하나로 아내가 벼르고 있던 것이었으니 더욱 좋았다. 게다가 늘 가장 먼저 배고프고 입이 까다로운 효진이가 정말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가 아닌가.

주니어스 치즈케이크 흡입신공의 아이들

음식점 가서 가장 바보스러운 질문은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던 직원은 웃으면서 플레인 치즈케이크(Plain Cheesecake)가 제일 맛있단다. 그래서 그것 몇 조각을 샀다. 매장에는 자리가 없어서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들고 먹었다. 한 판으로 사면 30달러였는데, 조각으로 사면 6.5달러란다. 다들 좋아하는 것을 한 판 사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들고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조금 난감한 일이어서 몇 조각을 산 것이다. 사주고보니 정말 맛있게들 먹는다. 가족들이 잘 먹는 것도 복이라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는데, 여행을 다니다보니 그 의미를 알겠다. 가끔은 그 복이 지나치게 넘칠 때도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나로 인한 것이었다.

브로드웨이 극장가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화려한 불빛이 어둠보다 먼저 소란을 떨었지만, 브로드웨이에서는 어둠이 먼저 물들어왔다. 매저스틱 극장 앞은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에 나오는 1930년대 뉴욕 뒷골목의 분위기를 재연한 것 같았다. 나는 1930년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지금보다 조금 덜 빠르고 조금 더 인간적이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탓인지, 어린 시절 명화극장을 통해 본 영화들의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무척 매력적인 시대였다.[각주:1]

아직 어둠이 온전히 제압하지 못한 매저스틱 극장 앞에는 차들은 느리게 정지했고, 기마경찰과 삼륜의 경찰차가 정물처럼 서 있었다. 기마경찰은 관광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주거나 사람들에게 미소를 던져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브로드웨이의 기마경찰

극장마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고, 그 앞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이 줄을 섰다. 우리처럼 폴로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에서부터 보타이(bow tie)에 정장을 한 사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 각기 달랐지만 모두들 밝고 환한 표정만은 같았다. 치즈 케이크로 충분히 행복해진 아이들도 공연을 볼 생각에 들뜬 표정이었다. 약간은 들뜨고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이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저스틱 극장 전경

<오페라의 유령> 중간 휴식시간 극장 내부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보러갔을 때에는 오랫동안 서서 기다리면서 많이 답답했었다. 대부분의 공연장이 카지노와 연결되어 있었고, 카지노의 탁한 공기와 소란스러움이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로드웨이에서는 극장마다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면서 나름 즐기는 모습들이 오히려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기다리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공연장 주변 분위기에 따라서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각자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어느새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무며 즐기고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낡은 극장은 오히려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매저스틱 극장은 생각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용관이 주는 다양한 무대 장치는 돋보였다. 아내는 인기 있는 작품인데도 입장권 가격이 한국보다 싸다고 했다. 아마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이리라. 전용관과 상설공연은 관객뿐만 아니라 공연을 하는 측에서도 보다 안정적인 준비와 투자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의 배우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이나 무대장치들은 몇 번 공연을 하나 똑같이 들어가는데,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는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은 감소하지만, 한국처럼 공연장 부족으로 단기간 공연에 그치면 공연장을 옮길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고, 새로운 공연을 위한 배우들의 준비에 또 추가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뮤지컬 공연 관람료가 비싸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구조에서는 우리만의 창작 뮤지컬이 나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원작료를 주고 외국 작품을 사와야 하니 입장권 가격은 또 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최근 몇 년 동안 뮤지컬의 대중적인 지지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못해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이 이곳에 와서 보니 더욱 안타까웠다.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데 여기저기서 우리말이 들렸다. 이곳에서는 조건반사처럼 우리말이 들리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뒷좌석도 한국인 부부였다. 극장은 만원이었다. 전용관답게 공연은 극장 전체를 무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무대 아래와 뒤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의 변형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같은 레퍼토리를 몇 번씩 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공연의 매력이 아닐까? 동일한 작품을 배우나 연출자 그리고 극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해내는 그 변화를 읽는 것이 공연의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공연 중간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다보니 의외로 턱시도를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입기 힘든 드레스를 입고 온 여성들은 물론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에 맞춘 옷차림을 한 남성들도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동부 쪽 무더위가 대단하다는 뉴스에 짧은 옷만 준비해서 떠난 탓에 폴로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나와는 너무 대조되었다. 사실 공연문화라는 것이 단지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공연을 보러가는 과정과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참여 방식까지 포함된 것인데, 우리는 너무 여행의 효율성만 생각했었나보다. 좋은 공연을 보러가면서 조금 멋스럽게 꾸미고 가는 것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입을까를 고민하고, 그러한 복식에 맞는 행동을 하면서 즐기는 것도 공연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마칠 때까지 아이들의 몰입은 참 대단했다. 몰입이 대단했던 만큼 그 여운도 오래가는 듯 공연을 보고 나오자마자 뉴욕을 떠나기 전에 또 한 작품을 보면 안 되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여행 경비가 빠듯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난감해하는데, 눈치 빠른 아내가 안 된단다. 공연을 하나 더 보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쭉 설명하자 아이들도 납득을 한다. 늘 그렇듯 오늘도 아내는 현명하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되도록 밝고 큰 길을 찾았다. 10시 넘어서는 걸어 다니지 말라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이 생각나서 43번가 쪽으로 가서 숙소로 돌아왔다. 43번가 쪽에는 뉴욕 타임즈 본사와 대형 호텔, 슈퍼마켓, 음식점 등이 이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성인용품 판매점 등이 있어서 아이들 데리고 걷기가 민망했다. 도대체 치안이 불안한 도시가 어떻게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불안을 씻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으니 세계 제1의 도시겠지만, 생각해보면 자유와 안전을 상쇄해줄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안전하게 인간다움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던가?

걸어오면서 보니 늦게까지 영업하는 커피전문점들은 아직 불이 환하다. 세련된 옷차림의 뉴요커들이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전문점 앞 보도에는 쓰레기봉투가 어른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악취도 악취였지만 깔끔하고 환한 커피전문점과 투명유리로 분리되어 쓰레기봉투를 잔뜩 쌓아두고 있는 거리는 지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쓰레기 수거를 위해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흉물스럽고 악취가 지나쳤다. 나와 너, 안과 밖을 분명하게 나누는 이 도시의 정서가 차갑고 안쓰러웠다. 뉴욕의 첫 이미지가 이 쓰레기봉투로만 기억되지는 않겠지만 쉽게 잊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내가 저녁을 준비했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김치도 꺼내어 썰었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이들이 노래하던 삼겹살을 구웠다. 거의 1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에 아이들은 참 야무지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하다. 그동안 밥, 김치, 삼겹살이 많이 그리웠었나보다. 어른들이야 어찌 견딘다고 하겠지만 아이들은 힘들었나 보다. 여행을 떠난 지 보름째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여행 경비도 경비였지만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간편식으로 해결해왔는데, 아이들 밥 먹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아내는 오늘 하루 지출한 내역을 정리하며 일기를 적고, 나는 오늘 촬영한 사진을 노트북에 정리했다. 내일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연결하려니 와이파이가 안 된다. 예약할 때 인터넷이 된다고 했는데뭐가 잘못된 것인지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늦어서 전화를 거는 것은 실례인 듯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유진이가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다. 욕실이 깨끗하지 않으니 들어가기가 그랬나보다. 말로는 귀찮아서 그런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침실은 침대 두 개가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좁았다. 침구도 그렇게 정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숙소와 유료주차장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24시간 운영되는 이 주차장을 기계식 주차를 하고 있어서 차를 내리고 올릴 때 소음이 고스란히 침실로 전해졌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그러나 돈은 이미 지불했고, 새로 숙소를 구할 요량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견뎌야한다. 다시 한 번 문이 잘 잠겼나 확인했다. TV 등에 나오는 민박만 보고 내가 너무 경솔하게 결정한 모양이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했기 때문에 이곳 맨해튼 미드타운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 저렴한 호텔이라도 찾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은 오늘 여행의 노획물들을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아내도 마음이 좋지 않은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오늘 조금 만나본 뉴욕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10시 넘어서 숙소까지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내게 아직은 뉴욕은 고담시다. 고담시는 배트맨이 지켜주었는데, 이곳은 누가 지켜줄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시민의 안전과 쾌적이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면, 뉴욕은 기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시 내가 뉴욕을 콘텐츠를 통해서 이미지로만 알고 온 것은 아닐까? 아직 세계 제1의 도시라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게는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 2002)에 나오는 뉴욕의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이 궁금하다. 왜 이곳이 세계 제1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궁금하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다니면서 찾아보아야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유령의 공간이다.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유령이다. 어렴풋하게라도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나 뉴스로만 전해온 뉴욕은 이미지였지 구체의 현실이 아니었다. 뉴욕의 맨얼굴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

 

  1. 내게 1930년대는 영화 이미지 그 자체다. 기름 바른 짧고 단정한 머리에 중절모, 조금 넉넉한 더블양복과 롱코트, 그 사이로 당당하게 들고 선 기관단총…<대부>, <언터쳐블>, <좋은 친구들>, <퍼브릭 에너미>, <딕 트레이시> 등 할리우드가 생산한 이미지는 그 내용과 무관하게 낭만적으로 각인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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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812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핸드폰 알람을 맞추어 두었는데, 알람보다 먼저 깼다. 숙소 옆 주차장의 기계음 때문인지 낯선 숙소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까닭이야 분명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내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피곤한 일정을 강행군하다보니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침을 준비했다. 따듯한 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스팸만으로도 넉넉하고 배부른 아침이었다. 보잘 것 없는 그릇에 없는 반찬이었지만 아이들이 모처럼 맛있게 밥을 먹는 것을 보니까 흐뭇했다. 어려서 오남매 밥을 챙기는 것에 결사적이셨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부모님이 밖에서 생활을 하실 때여서 할머니가 우리들 끼니는 챙겨주셨는데,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오남매의 도시락을 싸시고 아침을 꼭 먹이셨다. 잠이 밥보다는 좋을 나이였으니 우리는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어 했는데, 할머니는 예외가 없으셨다. ‘밥 괄시하는 놈치고 잘 된 놈 없다는 말씀으로 아침을 꼭 먹게 하셨다. 자리를 보전하시고 누워계실 때에도 손자들 밥걱정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역할을 지금은 어머니가 하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이들 밥에 예민한 편인데, 오늘 이렇게 아이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지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고 있나보다.

휴대용 버너에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 한인 마트에서도 가스는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구해야 할지 직원에게 물어보아야겠는데, 어젯밤에 보낸 문자도 답신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치우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욕실 쪽에서 바퀴벌레를 본 모양이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예상했던 일인데 막상 눈으로 보니 화가 났다. 바퀴벌레가 있으면 약을 치든가 미리 약을 준비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숙소를 나오면서 직원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어제 일도 그렇지 않은가? 손님의 짐을 우리 방에 두는데 왜 자기들이 추가요금을 받는가? 어제부터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우리가 양해했으면 되는 일 아닌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버스투어를 하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인터넷은 침대 밑에 선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고, 가스는 H마트에 없어서 대형할인마트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내일 가져다준단다. 그나마 우리가 구입하러 가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화가 치밀었다. 예약할 때만 해도 가스레인지가 있다고 한 숙소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도 주인이 아니었다. 그에게 화를 내보아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

그레이라인 버스 티켓, 길기도 길다

타임스퀘어 부근에는 그레인 라인(Gray Line) 직원들이 붉은 조끼를 입고 티켓을 팔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어른 54달러, 아이 44달러면 이틀 동안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야하는데, 우리가 보고 싶은 곳은 다 그레이 라인의 루프에 속해 있으니 이동과 투어를 같이 할 수 있어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가이드가 함께 타서 설명을 해주고, 나이트 루프도 이용 가능하다고 하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달러를 주고 티켓을 끊었다. 판매원은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휴대용 카드결제기로 결제를 했는데, 결제와 동시에 40Cm 정도 되는 붉은 티켓이 출력되어 나왔다. 4명의 티켓을 출력하는 데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어처구니없이 긴 티켓을 보며 가족들 모두 한참 웃었다. 왜 긴가 보았더니 광고가 여러 개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본 <오페라의 유령> 20달러 할인 쿠폰이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아쉬웠지만 어쩌랴. 몰라서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틀 동안 우리를 여러 곳에 데려다 줄 티켓이니 잘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레이 라인 버스는 모두 4개의 루프 투어를 운행하는데, 다운타운 루프(downtown loop), 업타운 루프(uptown loop), 브룩클린 루프(brooklyn loop), 나이트 루프(night loop)가 그것이었다. 4개의 루프를 따라 돌면 뉴욕의 핵심인 맨해튼은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운타운 루프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였는데 1층 좌석에는 아무도 타지 않고 모두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없는 2층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입담 좋은 가이드가 버스 앞에 앉아서 지나가고 있는 곳을 설명해주는 방식의 투어였다. 가이드는 운행 중에 일어서면 안 된다는 경고했다. 2층 버스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가로등 밑이나 나무 밑을 지나갔기 때문에 만약 일어선다면 완벽한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거나 뉴욕타임즈 1면에 사진이 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곳곳에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내리고, 다 돌아보면 다른 버스를 타고 계속 돌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시로 내리고 탔다.

그레이라인 2층 버스

2층 버스 위에서 바라본 뉴욕 시가

2층 버스는 직사광선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금방 머리가 뜨거워졌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 대부분 차로 움직일 것이니 모자가 필요 없을 듯해서 짐을 줄이자고 가족들 모두 모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가?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머리가 뜨거워지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팸플릿 등으로 머리를 간신히 가리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쪽을 보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1층에서 운전하는 기사와 가이드의 호흡이 참 절묘했는데, 그 혼잡한 교통 상황에서도 가이드의 설명 속도와 버스의 진행 속도가 절묘하게 일치했다.

다운타운 루프[각주:1]는 말 그대로 맨해튼을 상하로 나누었을 때, 아래쪽의 주요지점을 토는 루프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직접 내려서 보고 싶으면 내려서 보고 다음 차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투어였다.

여행 내내 내가 운전을 하다 보니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어서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버스를 타고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니까 한결 여유로웠다. 귀로 설명을 들으면서 보라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것은 좀 더 볼 수 있고,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으니 내 여행은 오늘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달리는 2층 버스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좋은 뷰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천천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뉴욕공립도서관

뉴욕 가로등 위의 비둘기들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라는 뉴욕공립도서관은 어제 H마트에 갈 때도 보았던 곳인데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도서관 앞에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국에 와서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공립 도서관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장서를 갖춘 공립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다는 그들의 도서관 네트워크와 시스템은 한 없이 부러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도서관을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이용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도서관을 독서실로 이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책을 빌리고, 책과 관계된 문화행사를 즐기는 허브로 이용하는 모습은 더없이 부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이 숨 막히게 분주한 도시에서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어진 도서관 계단에 자유롭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향기로운 풍경이었다.

버스는 아주 무심한 듯이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서 스파이더맨과 고블린이 싸웠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나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 자주 등장하던 컵 케이크 전문점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스파이더맨>에 등장했던 플랫아이언 빌딩(Flatiron Building) 등을 스쳐갔다. 영화를 통해 소개됨으로써 실재보다 더 풍요로워진 공간들이 눈앞에 쉬지 않고 이어졌고, 그럴수록 그것을 소개하는 가이드는 분주해졌다.

세 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에 세워진 삼각형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

1902년 세워진 다리미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flat iron Building)은 세계 최초의 20층 이상 건물이었다고 한다. 100년의 세월을 건너왔을 이 빌딩을 보면서 나는 뜬금없이 일본 지성을 대표한다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고양이 빌딩이 생각났다. 아마도 주어진 공간의 제약을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플랫아이언 빌딩보다는 고양이 빌딩에 좀 더 매력을 느끼는 쪽인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발상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보관할 곳이 필요해서 건물을 지으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는데, 그 금액은 80대까지 꾸준히 원고를 써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란다. 그러니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80대까지 살아야 하고, 살아서 원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원고를 쓰기 위해서 빌딩이 필요한 것인지, 빌딩을 세웠기 때문에 원고를 써야하는 것인지 순환논리에 빠져버린 것 같지만,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독한 공부벌레들의 자부에서 기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신감도 자신감이지만 그러한 계획에 선뜻 대출을 해 준 은행의 안목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뉴욕은 어디를 보아도 100년 이상 된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들을 모두 현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정작 미국 본토가 전쟁터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00년쯤 넘어서도 오늘의 이름값을 가지고 제몫을 해내고 있는 건물들은 과거이자 오늘이며 내일이었다. 100년을 건너온 건물들을 보면서 새로 짓는 건물 역시 100년 이상을 건널 수 있도록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곳곳에 옛 양식으로 지은 새 건물들인데, 그 건물이 들어선 공간의 맥락을 외면한 채 지나치게 호사스러웠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화려한 장식과 호사가 아니라 조화를 외면한 생경한 돌출이었다. 이 화려한 마천루의 도시에서 100년 이상을 갈 수 있는 유니크한 건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와 의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들어설 공간이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폭력에 가까워 보였다.

센트럴파크(Central Park)는 풍경보다 냄새로 먼저 왔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차가 많았는데, 그만큼 말도 많았고, 말의 배설물도 많았던 탓이다. 앨런 블링클리(Alan Brinkley)에 의하면[각주:2], 1850년대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상류층이 압력을 넣은 결과라는데, 그 압력의 동기가 재미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상류층들은 명품과 사치로 그들만의 문화를 구별짓기(Distinction) 시작하던 시기였다. 유럽의 명품과 사치품들로 꾸미고 매일 마차를 타고 나들이할 장소가 필요했던 그들이 시에 압력을 넣어 조성된 것이 센트럴파크란다. 부와 명예를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별짓기 시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격식이나 의례를 만든다더니, 결국 센트럴파크의 시작은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과시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해 2,500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으며, 뉴욕시민들로 자유롭게 산책과 피크닉 그리고 조깅 등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밤의 치안이 불안한 것이 문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들어질 때보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건강해진 것은 분명했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Chinatown)은 다소 낡고 남루한 느낌으로 활기찼다. 차이나타운은 근처에서 비슷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를 대부분 밀어내고 그 영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단다. 차이나타운의 남루한 활기는 저렴하게 때로는 멋스럽게 적혀있는 중국 간자(簡字)들에게서 먼저 왔다. 가이드는 차이나타운에는 화장실 없는 건물도 있어서 공동 화장실을 쓰는 곳도 있다고 강조했다. 차이나타운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나름의 코리아타운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날 때도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억척스럽다는 말을 비아냥대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또 그런다.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해도 이렇게 우회적으로 비꼬는 것을 보면 서양인들 눈에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동양인들의 모습이 거슬렸나보다. 자기들의 땅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동양인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이러한 비아냥거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내와 유진이도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쟤네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라고 살짝 이야기 해주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에 원래 주인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굳이 원래 주인을 따지자면 이민자들에 의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거나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아니겠는가? 일찍 도착하고 조금 늦게 도착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주인이란 말은 이미자의 나라에서는 기만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철도나 도로 그리고 주요 교량과 캘리포니아의 농장들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임금으로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가 아니던가? 물론 그 사이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도 아직 온전히 미국과 동화되지 못하고, 기어이 차이나타운이라는 자신들만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국인들의 기질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뭉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보면 미국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그러한 개별 이익집단의 힘이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난 이 사회의 특성에 대한 문제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볼 수 있는 리버티 섬으로 가기 위해 배터리 파크(Battery Park)에서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고 리버티 섬으로 가야하는데, 티켓을 사는데도 한참을 기다리고, 배를 타려면 또 대책 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를 발견했다. 미국에 와서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우연치 않게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물들을 곳곳에서 만났다. 지난번 코디에 갔을 때에도 숙소 바로 앞에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와 그 앞에 선명하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마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정서적 유대와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복잡다단한 감정은 우리와 미국의 관계,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 FTA나 통상마찰, 주한 미군 주둔 문제,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 등의 미국과의 현재적인 문제들, 세계사적 맥락에서 미국의 정체 등이 얽혀있는 복합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전참전용사 추모비

거리의 악사

승선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뒤에 있던 한국 학생들 사진도 찍어주고,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사진도 찍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여전히 지루했다. 그 때 근처에서 경쾌한 타악기 연주가 들려왔는데 한국 노래였다. 그곳을 쳐다보니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흑인 한 명이 작은 북처럼 생긴 스테인리스 원반을 목에 걸고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 옆에 놓여있는 상자에 돈을 넣어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기로 자기 앞에 있는 관광객의 국적을 추측해서 해당 국가의 노래를 연주하고 팁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우리를 보더니 이내 한국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낯선 눈으로 보아도 우리가 확실하게 한국인으로 보였나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팁을 상자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에 똑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지만 두 번의 감동은 없었다.

배에 오르자 사람들은 좀 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배 위에서는 맨해튼 시내를 넓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더위를 데려가고 압도적인 맨해튼의 풍경을 데려왔다. 맨해튼에서 멀어질수록 맨해튼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금 더 멀어지자 브룩클린 다리가 처음과 끝을 온전히 드러냈다. 리버티 섬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내린 배를 타기 위해서 잔뜩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바라본 맨해튼

배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자유의 여신상까지 갔을 때에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티켓 구입과 승선 과정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인지 더위 때문인지 이미 진이 빠져버린 우리는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 말고는 딱히 보거나 즐길 것이 없었다는 것도 실망스러웠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유의 여신상 왕관에 올라가야하는데, 이것은 예약을 하고서도 1시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단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왕관에 올라갈 수 없었다. 이렇게 왕관에 올라가는 것도 201111월로 끝이라는데 아쉬웠다.

뉴욕의 상징처럼 이야기 되는 자유의 여신상인데 그 주변에 함께 즐길 콘텐츠가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게다가 무던히도 잘 기다리는 미국인이 아닌 우리에게 기다림은 아까운 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사오는 사이 나는 선착장에 먼저 가서 줄을 서기로 했다. 그런데 매점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몇 사람이나 앞으로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원래 페리의 코스는 배터리파크를 출발해 리버티 섬과 엘리스 섬을 돌고 배터리 파크로 돌아오는 것인데, 우리는 엘리스섬은 가지 않기로 하고, 엘리스섬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근처에 9/11 테러의 현장인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와 세계 금유의 중심이라는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소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불리는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는 공사 중이라는 가이드의 안내도 있었지만, 그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어떠한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클라호마시티 국립추모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잔혹한 기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슬픔의 흔적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또한 9/11테러로 인하여 벌어진 납득하기 어려운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으로 인하여 숱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직 월드트레이드 센터의 붕괴 원인[각주:3]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혹들이 남아 있지 않던가? 인터넷과 SNS 등을 활용하여 세계는 동시간대를 살고 있고, 정보의 독점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만은 충분한 정보와 납득할만한 근거가 제공되지 않으니 오히려 소문만 무성하다. 소문은 음모론을 낳는데, 음모론은 듣는 사람을 더욱 불신에 빠지게 한다. 책임 있고 신뢰할만한 기관에서 사실 관계를 규명하고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드러내주어야 할 텐데, 무슨 이유인지 이 사건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월스트리트17세기 네덜란드 인들이 인디언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방벽(Wall)에서 유래한 것이다. 1624년 맨해튼에 도착한 피터 미누이트는 이주민 대표가 되어 인디언 대표들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물품을 주고 맨해튼을 양도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뉴욕의 시작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계약 아닌 계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 맨해튼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곳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을 영국이 빼앗고 뉴욕이라고 부른 것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침략, 강탈, 매수 그리고 합법화를 위한 매매계약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개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640년에 뉴욕에서는 이미 18개국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하니 가히 국제적인 출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지금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전쟁의 기원과 그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모두 지쳐있었다.

다시 버스에 오르기 전에 생수 두 병을 구입했다. 뉴욕 시내 전체가 얼린 생수 한 병에 1달러 받기로 합의를 했는지 모든 가판대에서 가격이 동일했다. 그 생수라는 것이 대형할인마트에서 24병 혹은 36병에 병 값 포함해서 7달러 정도면 구입하는 것이고 보면,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생수를 구입하려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두 병을 쥐고 1달러란다. 그래서 두 병을 받고 1달러를 주니까 생수를 팔던 이 친구 얼굴이 확 변하면서 화를 낸다. 손에 두 병을 쥐고 1달러라고 하니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날이 더운 탓이다.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버스는 만원이었다. 아내와 효진이만 같은 자리에 앉고 유진이와 나는 따로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앞쪽 자리에 앉았고, 나는 맨 뒷좌석에 한 자리가 있어서 앉았다. 새로운 가이드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권태로운 음성으로 아주 느릿느릿 설명을 하고 있었다. 유진이가 피곤했는지 꼬박꼬박 졸았고, 나도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잠시 졸았던 모양인지, 졸았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아내는 판옵티콘이다.그러는 사이 버스는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에 도착을 했다. 현대미술관은 금요일 오후 4시부터 무료관람이었다. 원래는 어른 20달러, 아이 12달러인 입장료가 무료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금방 입장할 수 있었다. 눈이 밝은 아이들은 오디오 가이드(Moma Audio Guide)를 받겠다고 줄을 서서 기어코 오디오 기기를 받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추가 비용 없이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인터랙션 기기였다. 한국어 서비스도 지원되는 이 기기는 해당 작품 옆에 적힌 숫자를 누르면 그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와서 관람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무료관람이 가능한 시간이라서 그런지 현대미술관은 여행 중에 들렀던 미술관 중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았다. 6층 건물의 어느 한 층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샤갈의 <나와 마을>,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과 같이 잘 알려진 작품들과 모딜리아니, 몬드리안, 고갱, 마티스, 모네, 쇠라, 모네, 세잔, 프리다 칼로, 칸딘스키 등의 숱한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5층에 전시되어 있었고, 엔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락 등의 작품은 4층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층의 혼잡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혼잡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다 보았다. 언제 또 이런 작품들을 이러한 거리에서 뛰는 가슴으로 체험하겠는가?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작품을 좀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강의 중에 자주 활용하는 고호의 <별의 빛나는 밤>에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더욱 새로웠다. 모처럼 뛰는 가슴에 행복해진 것은 나만은 아닌지 아내도 무척 즐거운 모습이었다.

입장하면서 받은 팸플릿에는 한 시간(하이라이트 관람), 두 시간(탐구 관람), 가족 프로그램으로 나누어 관람을 안내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유형과 관람 시간에 따른 안내가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도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고 열심히 들으며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5층의 회화 작품들을 진지하게 보던 아이들은 4층의 팝아트와 현대 미술을 보면서는 무척 재미있어 했다. 새로운 표현 방식과 대중적인 표현들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현대미술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가는 도중에 러브(LOVE) 조형물을 만났다. 젊은 연인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사진 찍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연인들이 있었고, 우리 차례는 그 다음이었다. 그냥 글자조각 같은데 의미 때문인지, 장소성(placeness) 조형물이 있다는 뉴욕동경필라델피아의 때문인지 무척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사람들의 열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두 커플 모두 글자와 어울려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형물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탁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처음에 출발했던 타임스퀘어로 돌아왔다. 유진이가 메이저리그 야구 모자를 하나 사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머리가 뜨거워 고생을 한 터라 근처 메이저리그 용품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덩치가 크고 등과 팔에 온갖 문신을 한 직원들 셋이 30Cm쯤 되는 모형 야구방방이를 들고 탁구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자기들도 머쓱했는지 웃는다. 모자는 한국보다 조금 저렴한 편이었는데, 아이들과 나는 모자를 하나씩 샀고, 아내는 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신혼 초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자를 선물했으니나는 도통 아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었다.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간신히 준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낮에 더워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밥도 많이 먹지를 않고 피곤해 했다. 오늘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모두들 함께 보았다. 이제 매일 저녁 그날 찍은 사진을 가족과 함께 보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즐거움이 되었다. 한참을 웃으면서 사진을 보다보니 정말 우리가 그곳에 갔었던 것일까 라고 느낄 정도로 새로웠다. 낮에 다녀온 곳이 저녁에 새롭다. 오늘 다녀온 곳도 이런데,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우린 무엇을 얼마나 기억에 남기고 가슴에 담을 것인가? 그것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이 아니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곳을 체험하면서 비록 언어화되지 못하거나 스스로 기억한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체험의 원형질은 가슴에 남아 다양한 형태로 발아하고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도록 2011년의 무모했던 여행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오늘 찍은 사진 속의 우리가 나이를 먹지 않듯 기억 속의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고 매년 오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운전하지 않고 사진기에 의지해 돌아볼 수 있는 하루였다.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말투나 걸어 다니며 만났던 거리의 풍경도 운전을 하면서는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다운타운 루프에서 보았던 100년 이상을 건너왔고, 앞으로 건너갈 최고의 위용을 뽐내는 건물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다만,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 눈에는 화려하고 많은 공력이 투입된 건축물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주변 공간이나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의견이니 그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만난 것들은 아주 가슴 뛰거나 우울한 고민을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문화적 인프라와 시스템은 가슴 뛸 정도로 매력적인 것들이었지만, 도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남루한 어둠은 짙고 우울한 그림자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뉴욕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였다. 지나치게 보고 느낄 것이 많아서 그런지 모른다. 우린 이 도시의 겉모습만 달리는 말에서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곳에 머무는 시간동안 말 위에서라도 좀 더 부지런히 보아야겠다. 오늘 밤에도 기계식 주차는 멈추지를 않는다.

 

 

  1. 다운타운 루프는 타임스퀘어→브로드웨이 극장가→메디슨스퀘어 가든→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플랫아이언 빌딩→유니언 스퀘어 쇼핑가→그리니치 빌리지→소호→차이나타운→시청, 월들 트레이드 센터 자리→배터리 파크, 자유의 여신상→사우스 스트리트 항구→ 로워 이스트 사이드→이스트 빌리지→UN→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록펠러 센터, 라디오 시티 뮤직홀→센트럴 파크→파크 센트럴 호텔→윈터 가든 극장→타임스퀘어로 돌아오는 코스다. [본문으로]
  2. 앨런 블링클리 / 황혜성 역,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05. [본문으로]
  3. 911 테러를 음모론적 시간에서 다룬 딜런 에이버리 감독의 <911 - Loose Change>를 보면 아직 우리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고 있지 못하는 12가지의 의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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