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는 몸과 볼 수 있는 몸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몸은 안이며 밖입니다.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부분이며 동시에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는 것을 안으로 감쌀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몸은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갑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몸을 중심으로 세계와 얼마나 개방적으로 소통할 수 있느냐의 문제지, 몸을 얼마나 드러내고 얼마나 감추었느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노출은 물론, 그러한 노출이 스스로의 적극적인 표현이라는 말도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스스로 욕망을 다스려가며 가꾼 몸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몸을 가꾸거나 몸을 드러내 것이 속이 텅 비었다거나 음란한 생각을 하는 탓이라는 것도 억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과 몸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억압과 편견은 언어를 내세워 견고해지고, 견고해진 만큼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얼굴 값한다'는 말만 보아도 얼굴이 예쁘면 반드시 그 얼굴로 인해 분란이 생긴다는 의미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정신 등으로 구분하고, 후자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숨은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최근 남자의 몸에 대한 관심이 뜨겁기만 합니다. 섹시한 모드의 남자들이 대중매체의 전면에 나서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몸에 대한 남성들의 관심과 그것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시선이 너무도 진지합니다. 그것은 단지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고 덜 푸는 문제가 아니라 남자의 몸이 '보여지는 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 통신사 광고에 등장하는 에릭의 몸은 주목할 만합니다. 수려한 용모와 자유로운 복장, 어디에도 구애됨 없이 종화 횡으로 누비며 춤과 동작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그의 탄력적인 춤은 매혹적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에릭의 몸은 '지금 이곳'의 거침없는 욕망과 자유로워진 남자의 몸을 보여줍니다. <불새>에서 보여주었던 흔들리는 눈을 지닌 '낭만적인 마초'의 모습까지 덧 씌워져서 에릭이라는 코드는 풍성해질 뿐입니다.

누군들 성적 매력을 꿈꾸던 때가 없었겠습니까? 물론 저도 있었지요. 파르스름하게 깎은 턱수염이 매력적이라고 해서 수염도 별로 나지 않는 제가 혹시라도 자주 깎으면 많이 자랄까 해서 하루에 서너 번씩 면도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슬픈 일은 그 무렵(중학교 시절로 기억되는데) 같은 원리로 눈썹도 밀면 숯검댕이 눈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죠. 보다 남성적으로 보이겠다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꺾는 바람에 손에 비해 마디가 굵은 손을 갖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섹시함이 내 코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의 성적 매력에 대한 꿈이 제 안에서 깨끗이 비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적 매력을 꿈꾸는 동안은 자신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 때문이겠지요.

며칠 전 놀이공원 야외무대에서 전자바이올리니스트를 보았습니다. 50대쯤으로 돼 보이는 그는 몸에 딱 들어맞는 아래 위 검은 색 옷을 입고 매우 열정적인 무대를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본 것은 그의 흥도 연주곡도 아닌 그의 볼록한 배였습니다. 이것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랫배를 좋아한다던 60년대 김승옥식의 소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볼록한 배의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작은 무대를 탕탕 튀어 오르며 연주하던 그 남자의 당당한 몸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날 제가 본 것을 그가 스스로 장악한 자신의 몸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요? 스스로 자기 몸의 주인이 되고 그것이 자기표현으로 구현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닐까요?

보여주고 볼 수 있을 때 몸은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늘 그렇듯 문제는 보여주는 몸이든 볼 수 있는 몸이든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잇살'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살아온 시간만큼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몸의 흔적들, 그게 '나잇살'일 겝니다. 처녀 같은 60대 할머니의 몸매, 막 제대한 군인 같은 70대 할아버지의 피부는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자신이 데려온 나이만큼의 시간의 흔적들이 온몸에 친숙하게 남아있고, 그만큼의 연륜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삶의 체취가 아름답습니다. 저는 희망합니다. 죽은 날까지 성적매력을 발산할 수 있기를. 그리고 저는 꿈꿉니다. 성적 매력을 통해 제 자신은 물론 세계와도 끊임없이 진솔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2004년 《오픈아이》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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