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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와 염색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저는 향수를 좋아합니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보니 늘 아침이 분주한 제게 스킨을 바르고 타이 뒤나 손목에 가볍게 향수를 뿌리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차 안에서 아침에 뿌린 향을 느끼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가끔씩 향이 좋다고 아는 척이라도 해주는 동료들이 있으면 내심 반가워합니다.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거리에서 좋은 향을 맡으면 누구든 따라가서 그 향과 향수의 이름을 묻곤 했으니 약간 병적이라고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 버버리 여름용 여자향수의 달큰함과 샤넬 넘버5의 강렬한 유혹 그리고 아라미스의 상큼한 아침도 그 무렵 제가 좋아하던 녀석들이죠. 아내는 간혹 제가 욕실에서 뿌린 향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요즘 강의실에서 이채로운 것은 남학생의 염색과 귀걸이입니다. 남학생의 1/3정도가 귀걸이를 했고, 3/4정도는 염색을 했으니 이제 사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요.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핑콜퍼머 정도가 가장 멋을 부린다고 부리던 것이고 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나마 그거라도 하고 온 녀석들은 교수님께 한 소리 듣거나 동료들의 놀림을 감내해야했습니다. 사실 귀걸이를 멋스럽게 하고 고은 색의 염색은 제가 봐도 멋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도 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언젠가는 하얀색 브릿지와 귀걸이를 해보겠노라고 농담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긴 이제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브릿지에 돈 들릴 일을 없을 것 같고, 사회적 지탄이 없다하더라도 겁이 많은 제가 귀를 어떻게 뚫겠습니까.

1학년 교양 강의에서 강조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자기를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염색이면 염색을 해봐라. 귀걸이라면 귀걸이를 해라. 담배가 된다면 피워봐라. ,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멋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새내기들의 염색은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습니다. 단체할인을 받으며 한꺼번에 했는지 모두 비슷비슷한 색깔에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흡사한 헤어스타일을 멋스럽게 보기는 좀 어렵죠. 3-4년 전에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스트레이트 퍼머를 해서 앞가르마를 타던 HOT머리를 했고, 1-2년 전에는 배용준의 바람머리가 또 강의실에 넘쳐나곤 했습니다. 자기 얼굴과 상관없이 로봇처럼 똑같은 헤어스타일의 학생들을 강의시간마다 보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불을 질렀던 말콤엑스가 아니더라도, 우린 모두 지금의 자신보다 멋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염색일 수도 있고, 귀걸이를 비롯한 피어싱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저처럼 향수가 될 수도 있겠죠. 문제는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이 19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이어져 오고 있지만 우린 아직도 누드 훔쳐보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몸을 매개로 자신을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보다 멋지게 되기 위한 전제가 지금의 나, 자연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 볼거리입니다.

멋지다는 것을 멋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 멋진 것입니다.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멋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는 제 코가 낮다고 시간 날 때마다 코를 세우듯이 들어오리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또 제 끊어진 눈썹은 어머니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시곤 했습니다. 요즘에는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보면 눈두덩이가 부은 모습이 꼭 12라운드 권투 경기를 마친 것 같아 보여 스스로 ‘12라운드라고 부르며 자조하곤 합니다. 그나마 어디 한군데 번듯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상 나쁘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코가 저만 낮지 않고, 눈썹이 저만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침에 눈이 붓는 것도 저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두 아이의 약간 부어오른 모습을 보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 어쩔 수 없음으로 수납하는 그 일이 여유를 낳고, 여유는 자기긍정을 낳고, 자기긍정은 즐거움을 낳는다는 사실을 오늘도 배웁니다.

멋스러운 사람은 끊임없이 멋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것이 남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몸과 마음에 모두 익어서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멋이 몸에 익은 사람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향수를 가지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그 은은함과 염색약으로서는 낼 수 없는 멋스러운 그 색깔을 치과에서 보철을 하면서도 핑크색으로 해달라던 첫째와 요즘 부쩍 치마를 입겠다고 유치원갈 때마다 우기는 둘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겝니다. “멋은 노력이라고.

2004년 《오픈아이》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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