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야 하는데 놀 줄은 모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놀고 싶다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놀 시간과 놀 수 있는 경제적 여건 그리고 마음의 여유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어도 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위해 논다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대부분 놀기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시기를 이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일과 놀이는 아무래도 하나가 되기는 무척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놀고 싶어 합니다.

오월이 아름다운 것은 대학의 축제가 있기 때문이라던가요. 하지만 정작 축제가 끝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재미없었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한 학생이 정치적 이슈가 있었던 1980년대 축제는 멋지지 않았냐고 제게 묻습니다. 축제를 마친 다음 날이면 소방호스로 캠퍼스 곳곳에 하얀 버짐처럼 떨어져 있는 최루탄 가루를 치우던 관리 아저씨의 모습이 문득 떠올리며,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그 시절에 그 경직된 축제문화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축제를 폐지하고 대동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 무렵), 1970년대 축제에는 낭만이 있었느니, 퇴폐적이었느니 운운했을 것입니다. 설사 지나간 시절의 축제가 재미있었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내가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난 요즘 오빠의 노트북이 되고 싶어!”

아내의 이 한마디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휴일도 없이 몇 개월째 계속되는 제 강행군은 아이들은 물론 아내에게서도 멀리 나와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주년 되는 결혼기념일에도 춘천에서 학회 발표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급한 일들만 마무리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평창에 다녀왔습니다. 새로 지어진 팬션은 세련되고 깔끔했습니다. 허브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아버님과 소주를 마시고 아내와는 맥주를 마시는 동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 다녔습니다. 다음날에는 봉평장 구경을 하고 속초 대포 항까지 다녀왔습니다. 23일 동안 분주하게 차를 몰아댄 것은 사실 갑자기 주어진 그 시간 동안 함께할 프로그램이 딱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70이 넘으신 부모님과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두 딸 아이, 그리고 아내와 제가 함께 공유할만한 놀이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냥 푹 쉬면 될 거 아니냐고 물으시겠지만, 문제는 무엇을 하며 쉬느냐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고민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이웃 팬션의 사람들도 무척 분주해보였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차릴 수 없이 분주하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을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대로 노는 일의 중심에는 물론 우리 자신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노는 것도 평소에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은 좀처럼 가볍게 즐길 수 없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취향과 시간적경제적 여유에 적합한 놀이를 찾아보고,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굳이 전문가들에게서 배우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죠. 자전거를 배우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탈 수가 없습니다. 자전거 타는 즐거움은 자전거를 배우는 즐거움과 배운 이후에 그것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다 포함하는 말이겠죠.

이와 같이 놀 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낯부끄러운 향락적인 밤 문화는 많이 사라지겠죠. 그것이 꼭 고급한 놀이 문화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부부가 함께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 전시회에 다니는 일도 좋지만 취향에 따라서 같이 바둑을 둔다거나 요즘 인기 있는 영화를 노부부가 두 손 꼭 쥐고 함께 본다면 어떨까요? 자식들 이야기 하며 친구 부부들과 포커 한판은 어떨까요? 물론 보다 우아하고 의미 있는 놀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저는 이정도로도 만족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 분주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만큼 놀이의 강도와 만족도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겠죠. 그렇다면 쉰다거나 노는 일 자체에 감사해하는 지금과는 달리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만할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만나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놀만한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2003오픈아이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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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즐거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을 축제가 한창입니다. 여름지은 것들을 거두어들이는 가을, 들과 산은 물론 하늘과 바람조차 풍요로운 이 계절에 사람들은 축제를 꿈꿉니다. 넉넉한 먹거리와 온후한 계절의 축복 앞에서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 억눌렀던 본성들을 해방시켜 즐기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축제는 일상의 전복이라고 합니다. 일상은 쾌락원칙을 따르고 싶은 우리의 본성을 철저하게 억압하며 현실원칙에 충실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한 현실원칙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쾌락원칙의 분출을 허용함으로써 일상의 나를 일시적으로 죽이면서 축제는 시작합니다. 축제는 인간적 본성을 극대화하고 유희적 기능을 강화 기능’()종교적 의미를 바탕으로 하는 제의적 기능’()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참여와 참여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공동체 의식이 생성되고 고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희는 다른 사람들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고, 제의적 기능의 핵심은 성스런 존재와의 의사소통이라는 점에서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점 종교적 색채가 탈락되면서 제의적 기능이 축소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축제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며 자유롭게 상호 소통하는 일체의 행위와 과정을 의미하게 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이 축제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가장 격렬했던 민주화 시기였던 1980년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축제를 연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말하실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축제가 본시 해방적 기능을 지녔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그 때의 축제는 좀 더 열정적이고 격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최와 참가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크게 하나가 되는(大同)의 장만은 최소한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축제가 끝나면 학생들에게 축제가 즐거웠냐고 묻습니다.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또 묻습니다. 자네들은 이번 축제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구경꾼을 평가할 뿐 참여하지 못합니다. 참여 없이는 어떤 축제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즐거워지기 위해 너와 내가 무엇인가 준비해야하는 것,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큰 하나를 이루어 가는 것,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재주를 발굴하고 칭송하기 위한 겨룸의 장, 그것이 축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800여개 이상의 축제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축제를 관광 상품화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맥주축제(Oktoberfest)를 통해 뮌헨 시정부는 매해 인구의 5배에 달하는 관광객을 유치함으로써 매해 7000억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고. 군악대페스티벌로 유명한 애딘버리시는 영화, 어린이, , 과학 등 20여종의 축제를 일 년 내내 개최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점 등을 상기할 때, 우리 지자체의 시도가 결코 허황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다, ‘해야만 한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고장의 변별적 특성을 분명하게 파악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축제화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고민은 물론 필수적입니다. 이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어떻게 관객들을 어떻게 축제의 장에 참여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해서 더불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양한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보는 것은 그렇게 희소한 체험이 되지 못합니다. 몸으로 직접 체험하여 스스로 축제의 주체요 주인이 될 때만이 진정한 축제의 체험이 가능하고, 이러한 체험만이 지속적으로 축제의 참여자를 확보하고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뷰놀의 토마토 축제처럼 한 시간 동안 35천명의 참가자가 15만개의 토마토를 터트리며 즐기는 퍼포먼스이거나 859m를 성난 소에 쫓겨 달려야 하는 산 페르민 축제처럼 본능을 극대화시키며 참여를 유도해도 무관합니다. 다만 우리 고유의 정체성과 축제 개최지의 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일수록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축제의 모델로 평가받는 함평 나비축제, 안동 국제 탈춤 페스티벌, 금산 인삼축제 등의 성공 요인의 핵심은 개최지의 지역적 특성을 특화시켰고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람객들의 참가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축제는 잔치가 아닙니다. 잔치가 보여주는 자의 일방적 기획에 따라서 차려진 범위 내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잔치는 보여주는 자와 그것을 보는 자로 나뉘어 보여주는 자가 마련한 잔칫상을 받고 돌아갈 뿐입니다. 여흥이 있다 해도 그것은 베푸는 자가 마련한 범위 내에서의 일이지요. “남의 잔치에 와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한다는 말만 보아도 잔치가 얼마나 보여주는 자의 일방적인 기획인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차려진 술과 음식 그리고 여흥이 푸지고 흥겨울수록 그것은 더욱더 일방적이고 정태적이며 소비적인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운 것입니다. 잔치에는 주인의 목소리 말고 다른 어떤 소리도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축제는 보여주는 자보는 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여 제 각각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소란스럽게 살아있는 공간이 됩니다. 다양한 소리들의 소란과 유쾌한 상대성의 탄력은 창조적인 무질서를 낳습니다. 창조적인 무질서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언어들을 모두 괄호 속에 묶고, 위계나 질서에 대한 일시 정지를 요구하며, 동시에 역동적인 변화와 생성을 유도합니다. 제 각각의 소리로 떠들고 부딪치면서 깨지는 과정에서 변화의 징후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축제의 창조적인 힘을 만날 수 있는 지점입니다.

가을입니다. 곳곳에서 축제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문제는 없는 시간을 내서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즐기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 우리가 참가한 축제가 잔치가 될 수도 있고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 더불어 함께 즐기는 대동의 장이 될 수도 있을 겝니다. 가을이 풍성한 것은 그 중심에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조달> 2004.가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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