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서 나를 보다
8월 9일 나이아가라→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더위는 식지만 운전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오늘처럼 이렇게 폭우 수준으로 쏟아질 때면 더욱 그렇다.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폭우를 뚫고 운전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한다고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심조심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보스턴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최소 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재입국할 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인보우 브리지를 통과했다. 멀리서 보기는 더없이 낭만적인 모양으로 캐나다와 미국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막상 달려보니 국경은 국경이었다. 수수료로 3달러를 요구했지만 친절했던 캐나다 쪽과는 다르게 미국 쪽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했다. 서류를 챙겨서 주었더니 대충 훑어보면서, 창문을 내리라고 하고, 불법적인 물품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여행객이라고 말하니 다시 서류를 훑어보고는 통과를 시켜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테러가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려서 꼼꼼하게 확인을 하든가, 불법적인 물품이 그렇게 염려스러우면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지, 고압적인 자세로 묻고 넘어갈 것을 그렇게 불쾌한 어투와 표정을 지을 것을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불법적인 물품을 가져오면서 가져온다고 말하겠는가?
몇 년 전부터 미국인들은 살인적인 의료서비스 비용과 약값을 이기지 못해서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서 의료서비스를 받거나 약품을 사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40,000달러가 넘는다는 나라에서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른 나라로 나라에 약을 사러 다니는 ‘의약난민’(drug refugee)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제약사와 보험회사의 이익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태만이 맞물려 기형적인 약값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한 의약난민들 때문인지 국경에서 미국 입국심사관들은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는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나이아가라에서 보스톤으로 가는 I-90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I-90위를 달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인지 운전을 하는 내내 답답했고, 같은 차선의 도로임에도 좁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달려온 서부 쪽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길가에 나무들이 울창해서 그 밖을 쳐다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무성한 나무들은 길 밖의 풍경을 잠그고 있었고, 내리는 비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차를 가둘 기세였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서부 쪽의 고속도로들에 비해 도로 상태가 양호했다는 것이다. LA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로를 비롯해서 서부 쪽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노면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 도로인데 보수할 각 주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 모양이라고 했다. 1 동부는 서부에 비해서 재정 상태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료도로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로 상태가 무척 양호했다. 보스턴까지 몇 개의 톨 플라자를 통과했는데, 나중에 합산해 보니 18달러 정도의 톨게이트 비를 물었다. 유료도로기 때문에 내려서고 올라서는 일이 번거로운지라 서부에서는 볼 수 없는 휴게소가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휴게소에는 백인과 동양계가 유독 많았다. 백인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고, 동양계는 어린 학생들과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방학을 맞아서 동부 명문대학교를 보러가는 가족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턴을 방문하는 우리의 목적 중에 하나도 하버드와 MIT를 보는 것이었다. 그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여행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성이는 나를 꺼내어 되돌아오는 과정이 아니던가? 휴게소에서 만나는 동양계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방학이라는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미국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안에 보고 배워야 할 대상으로서 미국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학만은 보스턴의 그 유명 대학의 서열을 인정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해주길 바라는 속물근성이 스멀거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런 우려는 그저 소심한 아빠의 기우였다.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가졌던 미국은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우리와 다른 나라로 객관화 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일 뿐이고, 그 다른 점 중에서 우리보다 나은 것과 우리보다 못한 것을 아이들은 제 기준으로 나누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로 돌아와서 보스턴으로 달리면서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도 한국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적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유진이는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하니 힘들단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높은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것에 대한 이해가 이곳 아이들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단다. 미국에서도 미국 아이들보다 높은 클래스에서 최고의 영어 성적을 받고 있다며 늘 자부심을 갖는 유진이였지만,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다만, 한국에 비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은 좋단다. 강압적이고 불필요한 규제와 간섭으로 신경을 써야 하는 한국의 학교보다는 자유롭고 즐겁다고 했다. 유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 편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른 문제였다. 편하지는 않으나 즐겁기는 한 공부와 생활,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구현하고 싶어 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즐거운 학교생활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이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같은 시기, 삶의 계산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운 때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늘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으로 신열을 앓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게 빛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 있겠는가? 환한 웃음보다는 늘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가고 지친 몸으로 학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 실정을 생각할 때, 아이가 이야기 하는 즐거운 학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리적인 교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기면 타협 없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자유와 자율이 보장한다거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험이 한 학기 내내 진행됨으로써 평소에 꾸준히 공부할 뿐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이 적다거나, 특별활동의 비중이 높고 대학 진학에 그것이 반영된다거나, 심지어 한국의 수학능력평가시험에 해당하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도 본인이 시기를 정해서 보고 싶을 때 보면 된다니 한국에서 학교생활을 한 아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즐겁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곳 고등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주 빼어난 학생이 아니면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싼 칼리지(college)에 입학해서 2년을 마치고, 종합대학교로 편입하는 방법을 택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단다. 2 유진이 학교의 일부 백인 아이들은 꿈이 동네 빵집에 취직하는 것이라며,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자란 곳이고, 집에서 가까우니 최고의 직장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했단다. 빵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고등학생들이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본적이 없는 아이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동네 빵집에 취업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닐까? 혹은 그 이후에 자신이 원하며 다른 직업을 얻어서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의 유연성이 높다는 의미는 아닐까?
유진이의 발 와이퍼 놀이
비는 보스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졌다. 앞좌석에 탄 유진이는 다리가 아팠는지 대쉬보드 위에 다리를 얹고, 발로 음악에 맞추어 와이퍼처럼 흔들며 논다. 뒷좌석에 효진이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비가 거세어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와이퍼는 분주했다. 그렇지만 차 안은 마치 독립된 우주처럼 아늑하기만 했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서부와는 사뭇 달랐다. 도로나 주변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서부사람들이 유쾌하게 잘 웃는 것에 비하면 동부사람들은 비장한 얼굴로 좀처럼 잘 웃지 않았다. 톨 플라자 직원, 휴게소 직원, 휴게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잘 웃지도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동부와 서부의 거리, 주요 구성 인종, 문화적 토양 등을 생각해보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카고에서 만났던 친구 형식이의 말로는 이곳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해보면,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그 뿌리조차 알기어렵지만, 미국의 시작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을 찾았던 청교도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갔다. 동부를 둘러보는 동안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었다.
10시간 30분쯤 걸려서 드디어 보스턴 숙소에 도착했다. 오면서 식사를 하고, 폭우 때문에 잠시 휴게소에서 쉰 한 시간을 빼면 8시간 20분쯤 소요된 것이니 어떤 날보다도 오래 운전해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하루였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고속도로 주변에 큰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처음에는 상큼한 느낌이 좋았는데, 오랫동안 달리려니 주변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답답했다. 비도 비였지만 길가의 나무들 때문에 도로 폭이 더 좁고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길 위를 달리는 사람에게는 길 밖이 보여야 한다고 차 안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나니 딱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청준의 <줄광대>를 이야기 해주었다. 줄 위에 올라서서 줄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으면 예술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잃게 되고, 줄 위에 올라서 줄 밖에 눈을 빼앗기면 세상과 타협할 수는 있지만 예술을 이룰 수는 없는 줄광대의 숙명을 아버지 줄광대와 아들 줄광대를 통해서 그려낸 작품이 <줄광대>다. 작가는 아들 줄광대의 삶에 보다 애정 어린 시선을 두고 있다. 비록 줄밖의 세상에 눈을 빼앗겨 줄 아래로 떨어졌지만 모두들 승천했다고 믿게 된 줄광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시절에 가슴 아파했었다. 그것은 아내를 죽이고 계속 줄을 탔던 아버지 줄광대나 줄보다 사람을 우선에 두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 줄광대의 모습이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와의 지속적인 불화를 통해서 세계를 회의하고 긴장시키는 예술가의 천형(天刑)이 안쓰러웠다.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줄광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나보다.
지금껏 무료도로만 달리다가 유료도로를 달리려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톨 플라자가 보여서 돈을 준비하면 티켓만 뽑는 데고, 티켓을 뽑으려 하면 돈 내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하이패스를 사용한지 몇 년이 되었으니 티켓 뽑고 돈을 내고 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톨 플라자와 톨 플라자 사이가 너무 멀어서 자꾸 순서를 헷갈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그 때마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는 보스턴 외곽에 있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형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해있었다. 체크인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버스 앞에 붙은 표지를 보니 중국 학생 관광단이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동부 쪽 아이비리그를 둘러보는 투어 코스가 있다더니 그들인 모양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만났던 중국집 주인이 생각났다.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면서도 종업원을 쓰지 않고 부부끼리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튜터를 붙여 공부시키던 모습이나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이들의 모습이나 10시간 30분을 달려 보스턴에 도착한 우리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밀려드는 손님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한 표정이 역력했다. 직원이 정신없어 할수록 체크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전화 받으면서 밀려드는 손님을 빠르게 처리했던 캐나다 숙소의 직원이 떠올랐다. 방 키를 받아서 방에 올라가보니 조금 낡았지만 정갈한 느낌의 방이었다. 숙소의 침대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여행 중에 보니 지역에 따라서 이불 색깔이 다양했다. 딴에는 보기 좋으라고 했겠지만 어떤 색깔이나 무늬도 흰색의 정갈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침대의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보스턴은 효진이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도시다. 지난 학기에 미국 역사를 배우면서 보스턴에 대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니 여행 계획을 짜는 내게 보스턴은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버드와 MIT를 보여줄 겸 들르려고 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을 보여주면 늘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이 본다.
숙소로 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보스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역사를 배우기 전에 미국 역사를 먼저 배워버린 아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우리 역사를 정규 교과로 배우지 못한 효진이에게 한국 역사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일 뿐 아직 역사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와서 정규교과로 미국 역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의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니 혹시라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염려 되었다. 역사도 언어처럼 자기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로 다른 나라의 것들을 배워야지 제대로 된 정보의 선택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으니 지금 효진이 나이였을 것이다. 방학 때 작은집에 놀러가서 15권짜리 《이야기 한국사》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또래의 사촌들과 경쟁하듯 읽어버린 그 책은 15권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야기 한국사》로 만난 한국사는 역사책 보다 설득력 있었고, 강렬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려웠던 그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집에 있던 계몽사판 《한국위인전기전집》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 느닷없고 맥락 없는 나의 독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 독서 습관을 효진이가 많이 닮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를 다녀오면, 할머니는 가급적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보거나 공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지만, 그런 나와는 조금 다르게 효진이는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보문고, 학교 도서관, 동네 도서관, 이동도서관을 모두 훑고 다녔다. 아내, 유진 그리고 제 몫의 독서 카드를 모두 활용해서 빌릴 수 있을 만큼 책을 빌려와 책상 위에 쌓아놓고 탐식에 가까운 독서를 하곤 했다. 효진이가 읽는 책들은 제 나이에 맞는 것부터 그 이상의 것에 이르기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읽는 방법도 빠르게 읽기도 하고 한 권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기도 하는 아주 자유로웠다. 그러던 녀석이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한국책을 구하지 못해서 아내와 내 책을 탐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과 지역 공립 도서관에서 영어 책들을 빌려다 읽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는 주로 판타지 소설들을 빌려다 읽는 눈치였고, 덕분에 매주 도서관에 책을 빌리고 반납하러 부지런히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런 아이에게 이야기처럼 들려진 미국 역사는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는가? 그런 녀석이 보스턴을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아내는 빨래를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내에 에어컨이 돌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뽀송뽀송은 몰라도 바짝 마를 것은 분명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다소 가라 앉아있지만, 내일은 힘내서 보스턴 시내를 돌아볼 것이다. 효진이의 미국 역사와 유진이의 미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미국 역사에 밝지 않은 아내와 내게만 보스턴은 낯선 도시 같다.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동선을 확인하면서 독한 술 한 잔이 그리웠다. 우리 방이 2층에 있어서 그런지 빗소리가 더 선명했다. 물을 가지러 차에 내려갔더니 비가 뿌려놓은 물비린내가 여린 풀냄새처럼 차 주변에 가득했다. 이렇게 빗소리가 선명한 밤은 도통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속수무책이다. 독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 궁색한 재정은 서부 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 주에서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자갈과 같은 자재로 도로를 다시 깔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앨라배마, 오하이오 등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미시건주 83개 카운티 중에 38개 카운티가 자갈을 깔았다고 한다. (김광기,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동아시아, 2011, pp.16-17참고) [본문으로]
- 한국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 학비에 대한 부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보다 2배 가까운 학비를 부담해야하는 한국 유학생들 중 극히 일부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과 결혼하여 그 부담을 덜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사례라고 믿고 싶지만 학비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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