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서 나를 보다

89일 나이아가라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더위는 식지만 운전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오늘처럼 이렇게 폭우 수준으로 쏟아질 때면 더욱 그렇다.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폭우를 뚫고 운전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한다고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심조심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보스턴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최소 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재입국할 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인보우 브리지를 통과했다. 멀리서 보기는 더없이 낭만적인 모양으로 캐나다와 미국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막상 달려보니 국경은 국경이었다. 수수료로 3달러를 요구했지만 친절했던 캐나다 쪽과는 다르게 미국 쪽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했다. 서류를 챙겨서 주었더니 대충 훑어보면서, 창문을 내리라고 하고, 불법적인 물품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여행객이라고 말하니 다시 서류를 훑어보고는 통과를 시켜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테러가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려서 꼼꼼하게 확인을 하든가, 불법적인 물품이 그렇게 염려스러우면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지, 고압적인 자세로 묻고 넘어갈 것을 그렇게 불쾌한 어투와 표정을 지을 것을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불법적인 물품을 가져오면서 가져온다고 말하겠는가?

몇 년 전부터 미국인들은 살인적인 의료서비스 비용과 약값을 이기지 못해서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서 의료서비스를 받거나 약품을 사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40,000달러가 넘는다는 나라에서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른 나라로 나라에 약을 사러 다니는 의약난민’(drug refugee)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제약사와 보험회사의 이익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태만이 맞물려 기형적인 약값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한 의약난민들 때문인지 국경에서 미국 입국심사관들은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는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나이아가라에서 보스톤으로 가는 I-90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I-90위를 달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인지 운전을 하는 내내 답답했고, 같은 차선의 도로임에도 좁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달려온 서부 쪽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길가에 나무들이 울창해서 그 밖을 쳐다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무성한 나무들은 길 밖의 풍경을 잠그고 있었고, 내리는 비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차를 가둘 기세였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서부 쪽의 고속도로들에 비해 도로 상태가 양호했다는 것이다. LA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로를 비롯해서 서부 쪽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노면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 도로인데 보수할 각 주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 모양이라고 했다.[각주:1] 동부는 서부에 비해서 재정 상태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료도로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로 상태가 무척 양호했다. 보스턴까지 몇 개의 톨 플라자를 통과했는데, 나중에 합산해 보니 18달러 정도의 톨게이트 비를 물었다. 유료도로기 때문에 내려서고 올라서는 일이 번거로운지라 서부에서는 볼 수 없는 휴게소가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휴게소에는 백인과 동양계가 유독 많았다. 백인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고, 동양계는 어린 학생들과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방학을 맞아서 동부 명문대학교를 보러가는 가족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턴을 방문하는 우리의 목적 중에 하나도 하버드와 MIT를 보는 것이었다. 그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여행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성이는 나를 꺼내어 되돌아오는 과정이 아니던가? 휴게소에서 만나는 동양계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방학이라는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미국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안에 보고 배워야 할 대상으로서 미국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학만은 보스턴의 그 유명 대학의 서열을 인정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해주길 바라는 속물근성이 스멀거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런 우려는 그저 소심한 아빠의 기우였다.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가졌던 미국은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우리와 다른 나라로 객관화 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일 뿐이고, 그 다른 점 중에서 우리보다 나은 것과 우리보다 못한 것을 아이들은 제 기준으로 나누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로 돌아와서 보스턴으로 달리면서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도 한국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적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유진이는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하니 힘들단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높은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것에 대한 이해가 이곳 아이들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단다. 미국에서도 미국 아이들보다 높은 클래스에서 최고의 영어 성적을 받고 있다며 늘 자부심을 갖는 유진이였지만,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다만, 한국에 비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은 좋단다. 강압적이고 불필요한 규제와 간섭으로 신경을 써야 하는 한국의 학교보다는 자유롭고 즐겁다고 했다. 유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 편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른 문제였다. 편하지는 않으나 즐겁기는 한 공부와 생활,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구현하고 싶어 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즐거운 학교생활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이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같은 시기, 삶의 계산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운 때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늘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으로 신열을 앓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게 빛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 있겠는가? 환한 웃음보다는 늘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가고 지친 몸으로 학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 실정을 생각할 때, 아이가 이야기 하는 즐거운 학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리적인 교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기면 타협 없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자유와 자율이 보장한다거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험이 한 학기 내내 진행됨으로써 평소에 꾸준히 공부할 뿐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이 적다거나, 특별활동의 비중이 높고 대학 진학에 그것이 반영된다거나, 심지어 한국의 수학능력평가시험에 해당하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도 본인이 시기를 정해서 보고 싶을 때 보면 된다니 한국에서 학교생활을 한 아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즐겁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곳 고등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주 빼어난 학생이 아니면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싼 칼리지(college)에 입학해서 2년을 마치고, 종합대학교로 편입하는 방법을 택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단다.[각주:2] 유진이 학교의 일부 백인 아이들은 꿈이 동네 빵집에 취직하는 것이라며,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자란 곳이고, 집에서 가까우니 최고의 직장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했단다. 빵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고등학생들이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본적이 없는 아이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동네 빵집에 취업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닐까? 혹은 그 이후에 자신이 원하며 다른 직업을 얻어서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의 유연성이 높다는 의미는 아닐까?

유진이의 발 와이퍼 놀이

비는 보스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졌다. 앞좌석에 탄 유진이는 다리가 아팠는지 대쉬보드 위에 다리를 얹고, 발로 음악에 맞추어 와이퍼처럼 흔들며 논다. 뒷좌석에 효진이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비가 거세어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와이퍼는 분주했다. 그렇지만 차 안은 마치 독립된 우주처럼 아늑하기만 했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서부와는 사뭇 달랐다. 도로나 주변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서부사람들이 유쾌하게 잘 웃는 것에 비하면 동부사람들은 비장한 얼굴로 좀처럼 잘 웃지 않았다. 톨 플라자 직원, 휴게소 직원, 휴게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잘 웃지도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동부와 서부의 거리, 주요 구성 인종, 문화적 토양 등을 생각해보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카고에서 만났던 친구 형식이의 말로는 이곳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해보면,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그 뿌리조차 알기어렵지만, 미국의 시작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을 찾았던 청교도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갔다. 동부를 둘러보는 동안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었다.

10시간 30분쯤 걸려서 드디어 보스턴 숙소에 도착했다. 오면서 식사를 하고, 폭우 때문에 잠시 휴게소에서 쉰 한 시간을 빼면 8시간 20분쯤 소요된 것이니 어떤 날보다도 오래 운전해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하루였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고속도로 주변에 큰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처음에는 상큼한 느낌이 좋았는데, 오랫동안 달리려니 주변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답답했다. 비도 비였지만 길가의 나무들 때문에 도로 폭이 더 좁고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길 위를 달리는 사람에게는 길 밖이 보여야 한다고 차 안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나니 딱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청준의 <줄광대>를 이야기 해주었다. 줄 위에 올라서서 줄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으면 예술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잃게 되고, 줄 위에 올라서 줄 밖에 눈을 빼앗기면 세상과 타협할 수는 있지만 예술을 이룰 수는 없는 줄광대의 숙명을 아버지 줄광대와 아들 줄광대를 통해서 그려낸 작품이 <줄광대>. 작가는 아들 줄광대의 삶에 보다 애정 어린 시선을 두고 있다. 비록 줄밖의 세상에 눈을 빼앗겨 줄 아래로 떨어졌지만 모두들 승천했다고 믿게 된 줄광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시절에 가슴 아파했었다. 그것은 아내를 죽이고 계속 줄을 탔던 아버지 줄광대나 줄보다 사람을 우선에 두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 줄광대의 모습이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와의 지속적인 불화를 통해서 세계를 회의하고 긴장시키는 예술가의 천형(天刑)이 안쓰러웠다.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줄광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나보다.

지금껏 무료도로만 달리다가 유료도로를 달리려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톨 플라자가 보여서 돈을 준비하면 티켓만 뽑는 데고, 티켓을 뽑으려 하면 돈 내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하이패스를 사용한지 몇 년이 되었으니 티켓 뽑고 돈을 내고 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톨 플라자와 톨 플라자 사이가 너무 멀어서 자꾸 순서를 헷갈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그 때마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는 보스턴 외곽에 있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형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해있었다. 체크인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버스 앞에 붙은 표지를 보니 중국 학생 관광단이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동부 쪽 아이비리그를 둘러보는 투어 코스가 있다더니 그들인 모양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만났던 중국집 주인이 생각났다.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면서도 종업원을 쓰지 않고 부부끼리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튜터를 붙여 공부시키던 모습이나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이들의 모습이나 10시간 30분을 달려 보스턴에 도착한 우리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밀려드는 손님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한 표정이 역력했다. 직원이 정신없어 할수록 체크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전화 받으면서 밀려드는 손님을 빠르게 처리했던 캐나다 숙소의 직원이 떠올랐다. 방 키를 받아서 방에 올라가보니 조금 낡았지만 정갈한 느낌의 방이었다. 숙소의 침대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여행 중에 보니 지역에 따라서 이불 색깔이 다양했다. 딴에는 보기 좋으라고 했겠지만 어떤 색깔이나 무늬도 흰색의 정갈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침대의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보스턴은 효진이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도시다. 지난 학기에 미국 역사를 배우면서 보스턴에 대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니 여행 계획을 짜는 내게 보스턴은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버드와 MIT를 보여줄 겸 들르려고 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을 보여주면 늘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이 본다.

숙소로 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보스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역사를 배우기 전에 미국 역사를 먼저 배워버린 아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우리 역사를 정규 교과로 배우지 못한 효진이에게 한국 역사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일 뿐 아직 역사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와서 정규교과로 미국 역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의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니 혹시라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염려 되었다. 역사도 언어처럼 자기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로 다른 나라의 것들을 배워야지 제대로 된 정보의 선택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으니 지금 효진이 나이였을 것이다. 방학 때 작은집에 놀러가서 15권짜리 이야기 한국사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또래의 사촌들과 경쟁하듯 읽어버린 그 책은 15권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야기 한국사로 만난 한국사는 역사책 보다 설득력 있었고, 강렬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려웠던 그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집에 있던 계몽사판 한국위인전기전집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 느닷없고 맥락 없는 나의 독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 독서 습관을 효진이가 많이 닮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를 다녀오면, 할머니는 가급적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보거나 공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지만, 그런 나와는 조금 다르게 효진이는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보문고, 학교 도서관, 동네 도서관, 이동도서관을 모두 훑고 다녔다. 아내, 유진 그리고 제 몫의 독서 카드를 모두 활용해서 빌릴 수 있을 만큼 책을 빌려와 책상 위에 쌓아놓고 탐식에 가까운 독서를 하곤 했다. 효진이가 읽는 책들은 제 나이에 맞는 것부터 그 이상의 것에 이르기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읽는 방법도 빠르게 읽기도 하고 한 권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기도 하는 아주 자유로웠다. 그러던 녀석이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한국책을 구하지 못해서 아내와 내 책을 탐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과 지역 공립 도서관에서 영어 책들을 빌려다 읽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는 주로 판타지 소설들을 빌려다 읽는 눈치였고, 덕분에 매주 도서관에 책을 빌리고 반납하러 부지런히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런 아이에게 이야기처럼 들려진 미국 역사는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는가? 그런 녀석이 보스턴을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아내는 빨래를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내에 에어컨이 돌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뽀송뽀송은 몰라도 바짝 마를 것은 분명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다소 가라 앉아있지만, 내일은 힘내서 보스턴 시내를 돌아볼 것이다. 효진이의 미국 역사와 유진이의 미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미국 역사에 밝지 않은 아내와 내게만 보스턴은 낯선 도시 같다.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동선을 확인하면서 독한 술 한 잔이 그리웠다. 우리 방이 2층에 있어서 그런지 빗소리가 더 선명했다. 물을 가지러 차에 내려갔더니 비가 뿌려놓은 물비린내가 여린 풀냄새처럼 차 주변에 가득했다. 이렇게 빗소리가 선명한 밤은 도통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속수무책이다. 독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1. 궁색한 재정은 서부 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 주에서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자갈과 같은 자재로 도로를 다시 깔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앨라배마, 오하이오 등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미시건주 83개 카운티 중에 38개 카운티가 자갈을 깔았다고 한다. (김광기,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동아시아, 2011, pp.16-17참고) [본문으로]
  2. 한국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 학비에 대한 부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보다 2배 가까운 학비를 부담해야하는 한국 유학생들 중 극히 일부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과 결혼하여 그 부담을 덜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사례라고 믿고 싶지만 학비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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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810일 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밤새도록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비는 문득, 간단하게 그쳐버렸다. 밤새도록 사위는 온통 빗소리뿐이더니 비가 그친 아침은 온통 초록이다. 비가 내리고 어두워서 어제 밤에는 몰랐는데 숙소는 유난히 나무가 많은 숲에 포옥 안겨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숲에 안겨서 그렇게 숲과 더불어 나이를 먹고 있었다. 시간이 데려간 것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니 초록의 숲길은 오히려 적막했다.

우리도 서두른다고 서둘러 숙소 식당으로 갔는데 벌써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제 본 중국 학생 관광단인 줄 알았는데, 그들 사이에서 얼핏얼핏 우리말이 들렸다. 중국 학생 관광단 말고도 개인적으로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중고생 자녀들과 함께인 가족들이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듯한 음식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숙소 주변에는 숲만 있을 뿐 딱히 식당을 찾을 수도 없었다. 캠브리지까지 나오는 길은 1차선이 한참 이어졌고, 도로가 2차선으로 넓어진 곳에서 차들은 그 이상 늘어나서 정체가 심했다. 예상치 못한 정체덕분에 길가에 오래된 주택들과 낡은 건물들을 천천히 지켜볼 수 있었지만, 시간은 예상보다 40분 이상 지체되고 있었다.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가니 도서관이 보였다. 마침 그곳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우리도 그를 따라서 도서관부터 본관 앞 잔디마당까지 차분히 설명을 들으며 따라 다녔다. 그런데 본관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던 가이드가 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차에 올라서 점심을 먹은 후에 하버드로 간단다. 우리는 MIT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하고 투어 중이던 가이드였던 것이다. 순간, 우리 가족은 머쓱해서 뒤로 빠지면서 우리끼리 한참을 웃었다.

MIT에서 발견한 김우중 회장의 사진과 거북선 모형

도서관을 돌다보니 눈에 익은 사진이 보였다. MIT 기계공학과에 많은 기부금을 낸 8명의 사진이었는데, 그 중에서 전 대우그룹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 부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가이드가 정보 하나를 더 준다. 그 사진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거액 기부 이후에 모두 망한 기업가들이란다. 김 회장이 MIT에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몰라도, 차입경영으로 무너진 대우를 기억하는 내게는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돈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우사태로 인하여 부실해진 은행을 세금으로 매워주었으니 그것은 국민의 고혈(膏血)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대우의 몰락 이후 대우는 물론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들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으며 가슴 뛰는 경험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열패감도 지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우리나라 샐러리맨의 신화가 아니었던가? 자신만 똑똑하면 언제든 불끈 일어서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자기 근면과 성실에 대한 낙관을 대표하던 그가 무너진 것은 대우라는 그룹이 무너진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낯선 나라 대학 도서관 벽에 걸린 그의 자랑스러워야할 사진이 안쓰럽고 부끄러웠다. 더구나 거액을 기부 했던 사람으로 칭송되다가 실패한 사업가로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아이러니했다.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 선박 전시관에서 거북선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인들이라면 거북선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환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찍고 싶은 것이 거북선인지 MIT 안에 거북선이 있다는 사실인지 모호했다. 거북선을 우리 스스로 자부하며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MIT가 인정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닐지내 생각은 또 삐딱해졌다.

전시장의 거북선을 보면서 김훈의 칼의 노래가 떠오른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이 작품을 수사(修辭)만 앞선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제압 없이 나올 수 있는 수사가 어디 있겠는가? 수사가 빼어나다는 말은 그만큼 대상에 대한 파악이 진지하고 절절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아파하고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그려낸 김훈의 이 빼어난 작품을 읽으면서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의 상황이었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대신들을 생각하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적의 칼과 배고픔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상황, 더구나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견뎌낼 뿐 표현할 수 없었던 고뇌는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그의 시대에서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현재이고 보면, 낯선 나라의 전시장에서 만난 조그마한 거북선 앞에서 결코 밝게만 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MIT 본관과 도서관

입학식과 졸업식을 진행하다는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MIT 본관과 찰스 강이 마주보고 있었다. MIT를 알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으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MIT 졸업생들의 기행(奇行) 기사는 서울 변두리 중학생이었던 내게 너무도 신나는 충격이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기숙사 방안에 차를 옮겨놓는다거나 돔 위에 경찰차를 올린다는 기사는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이라는 외화시리즈가 인기였는데, 밤샘 공부를 하고 가서 킹스필드 교수의 질문공세에 쩔쩔매면서도 자신의 의견으로 대답하는 하트의 모습만큼이나 그것은 대견한 일탈이고, 짜릿한 특권이었다. 그러한 기행의 현장이 본관 돔이란다.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경찰 순찰차, 황소 등 특이한 것들을 돔에 올렸다는 사실이다. 경찰 순찰차를 헬기로 내렸다고 하니 올린 기발한 방법이 자못 궁금하다. 돔 위에 이러한 것들을 올리는 비법은 4학년들에게만 전수가 된다고 하니 재미있는 전통임에 틀림이 없다.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졸업을 앞두고 그 정도의 이벤트는 귀엽기까지 했다. 다만, 올리기는 학생들이 올리는데 내리는 것은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어려움이 많단다. 천재들이 올린 것을 보통사람인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그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졸업식에서 본관 앞에 올라가 있는 경찰 순찰차를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물론 그것이 황소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과 손(Mens et Manus) 조형물 앞에서 어색한 아이들. 아이들에게 MIT방문이 얼마나 맥락 없고 어색한 아빠의 욕심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마음과 손’(Mens et Manus)[각주:1] 조형물 앞에 아이들을 세우고 보니 영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MIT를 돌면서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효진이야 어려서 그렇다 해도 유진이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이유는 아이들이 MIT를 전혀 몰랐고, 별다른 관심 없는 분야의 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에서 감흥이 생길 리 만무했다. 숙소에서 만났던 중국 학생 관광단이 생각났다. 아마 그들도 이곳을 다녀갔거나 다녀가리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부모 된 사람으로서 탓할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기대는 부모만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이곳에 왜 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박하게 세계적인 대학이니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는데, 마음 저 밑에는 더 큰 욕심이 있었나보다. 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안쪽으로 더 보아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핑계로 그만 보기로 했다. 바로 보스턴 시내로 들어가서 시내를 볼까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기 캠브리지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것도 어색한 동선이었다.

MIT에서 하버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버드까지 가는 길은 아침에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처럼 오래된 건물들과 주택들이 소박하게 모여 있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 학교 근처를 몇 바퀴 돌면서 보니 미국 중소도시의 주택 밀집지역처럼 학교를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는 주택들이 정겹게 보였다. 겉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 학교 부근의 원룸이나 하숙 밀집 지역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의 대학을 보면서 문득 우리대학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한참을 헤매다가 학교에서 조금 먼 곳에 코인 주차를 했다. 아내는 어떻게 알았는지 안내 센터에서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를 구입했다. 영어 버전을 우리말로 번역했는지 다소 어색한 표현이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무척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들고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하버드 곳곳을 둘러보았다. 방학 중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아 보이는 관광객 투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래드클리프 캠퍼스까지 다 돌아보지는 못했으나 건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아우라는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하버드 야드에서 책을 보는 학생

하버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하버드 야드에 의자 두 개를 붙이고 책을 읽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어제 비가 내려서 볕이 그리웠는지,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도 학생들이 아무 곳에서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책과 노트북을 펴고 공부를 하고, 심지어 노천광장에 놓인 탁자에 앉아서도 공부하는 모습은 내게는 낯선 모습이었다.[각주:2] 여러 개의 도서관에 좌석이 꽉 찬 것도 아닌데 야외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앉아서 책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에는 무척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좌석과 좌석 사이에 칸막이가 세워진 독서실 같은 분위기의 도서관에 앉아야지만 공부가 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어디든 자신이 편안하게 집중할 수만 있다면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론 이 말이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 비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Widener Library, 1914)80에 달하는 서가와 350만권 이상의 장서로 유명하다. 와이드너 도서관은 1912년 타이타닉호에서 사망한 하버드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거금을 기부하여 1914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와이드너 도서관의 내력담은 필라델피아의 거부, 하버드 졸업생, 희귀서적 수집가, 타이타닉호 침몰로 인한 사망, 어머니의 기부 등 극적인 서사의 좋은 구성요소를 지녔다. 더구나 타이타닉호 침몰은 두 차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극적인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와이드너의 어머니가 하버드 졸업생들이 자기 아들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졸업 전에 반드시 수영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기부조건을 걸었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실제로 하버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영 테스트가 있었으니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란다.[각주:3] 수영 테스트는 하버드만 했던 것도 아니고, 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전 국민에게 수영을 보급했던 일과 관계된 것이란다. 결국 와이드너 도서관에 얽힌 극적 서사가 브랜드가 되어, 추가적인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됨으로써 스스로 이야기를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각주:4]

남북전쟁에 희생된 하버드 출신을 기리는 메모리얼 홀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 1878)은 남북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졸업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136명의 이름이 건물의 양쪽 벽에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을 보면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남북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 문제까지 접근했던 이 작품은 강의 시간에도 자주 언급할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계급 차이에 근거한 상반된 두 캐릭터인 아이다 먼로(니콜 키드먼 분)과 루비(르네 젤위거 분)가 정서적 연대를 이루어가는 모습과 전쟁의 폭력과 야만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연상시키는 인만(주 드로 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잊히지 않은 작품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산야에서 인간의 가장 마지막을 보여줌으로써 더 처절하게 다가왔던 이 작품의 후반부에 눈 내린 협곡에서 인만을 부르던 아이다의 그 절절한 음성은 오랫동안 귀울림을 만들기도 했었다. 메모리얼 홀을 보면서 <콜드 마운틴>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오늘도 내 생각은 산만하고 종잡을 수 없다.

MIT보다 하버드에 관광객들이 더 붐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별 상관도 없는 하버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고 이야기 하는 곳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겠지만, 그렇다고 MIT처럼 하버드는 건물이나 도서관 등을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교육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공개한다한들 그것을 그 짧은 시간에 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달리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은 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집작하건데 세계 최고의 대학을 보여줌으로써 동기를 부여하여 하버드에 진학하거나 비록 진학은 못하더라도 건강한 자극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부모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버드를 방문하는 것은 꼭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하버드 유니버시티홀 정면에서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존 하버드 목사의 동상. 그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갈 수 있다는 속신으로 인하여 구두만 닳았다

설립자인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 동상[각주:5]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진학한다는 속신(俗信) 때문에 그것을 만지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대부분 그 옆에 서서 구두에 손을 얹고 멋쩍은 표정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속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재미있는 속신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속신의 대상이 왜 하필 구두였을까? 구두가 동상의 가장 밑에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있는 부분이어서 선택되었겠지만, 구두가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명예, , 굴레, 자기정체성 등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세계 최고라는 압도적인 칭호에 압도되지 말고 정말 하버드에서 보아야할 것은 다양성의 존중과 배려, 역사와 전통의 보전, 학문적 자유와 학교 운영의 자율성 보장, 체계화된 후원 시스템, 다양한 방식의 학생 선발 방식 등이 아니었을까? 멋스럽게 세월을 입고 있는 그레이스 홀(Grays Hall, 1863)과 매티우스 홀(Matthews Hall, 1872)을 굳이 신입생 기숙사로 배정하고, 그 옆으로 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자들이 근무하는 소박한 건물에 눈이 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리라.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언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나 나라별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기준이라는 것이 이미 명문화된 대학의 성공 요소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면 기존의 서열 체계를 은밀하게 확정하거나 재생산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몇 언론사들의 대학 평가는 공정성은 차지하고서라도 대학교육의 지향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대학교육의 파행을 부추기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언론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대학을 평가하는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평가가 어떠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이 교육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 설득하고, 그것에 대하여 객관적인 검증을 수행한 평가인지 우리는 이제 되물어야 한다. 몇몇 언론사는 해외의 기존 평가기관과 공동으로 대학 평가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평가지표가 얼마나 우리 현실에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봐야만 한다. 학교별 특색이나 전공별 차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평가 지표와 평가 자료를 준비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해야하는 비효율성 그리고 학교별 서열 외에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하는 결과 등의 모순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대학평가를 이제는 과감하게 거부해야할 것이다. 최근 국내 언론사들도 앞 다투어 대학평가를 시행하고 있는데, 대학평가 발표 전후로 해당 언론사에 여러 대학의 전면광고가 실리는 것을 보면, 우리가 대학 평가를 거부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게 된다.[각주:6] 영어전용강의 시수 등을 평가항목에 삽입함으로써 전공, 과목 등의 특성은 물론 그 성취 정도와 무관하게 영어전용강의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은 슬픈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사의 평가 기준을 따라가느라 기형적인 파행을 거듭하는 대학의 현실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몇 위, 한국에서 몇 위를 따지기 전에 자기 대학만의 분명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을 모색하는 것이 대학의 본 모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꾸로 자기 대학만의 교육방식과 교육목표를 가지고 세계 대학을 평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버드 앞 연경, 양이 많았던 볶음국수, 결국 남은 것들은 저녁이 되었다

하버드를 보고나니 점심때였다. 학교 바로 앞에 연경(燕京)’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규모가 컸고 손님도 많았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볶음국수가 생각나서 볶음국수 2, 볶음밥, 만두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1인분씩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는데[각주:7] 나온 양을 보니 2인분은 족히 넘는 양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시킬 때 양이 많다고 미리 이야기해주면 좋았으련만, 이 친구들 필요할 때는 입을 닫는다. 음식은 오클라호마시티의 그 집에 비해 좀 더 미국화 된 맛이었지만 우리를 위로해줄만한 맛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거리가 보이고, 왁자한 실내 분위기가 졸업식 날 학교 앞 중국집 분위기가 나서 혼자서 웃었다. 모처럼 배부른 점심을 먹고 났지만 음식이 많이 남아서 싸달라고 했더니 세 개의 상자에 담아다 주었다. 덕분에 그것으로 저녁까지 먹을 수 있었다.

건국 시기 복장을 한 프리덤 트레일 가이드와 도로에 새겨진 문장

점심을 먹고 캠브리지에서 보스턴으로 들어갔다. 효진이가 꼭 해보고 싶다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각주:8]을 하기 위해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으로 갔다. 보스턴 코먼은 1634년에 문을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프리덤 트레일16개의 건국 사적을 돌아보는 4답사인데, 보스턴 코먼을 시작으로 보도에 새겨진 붉은 라인을 따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코스다.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가이드는 정해진 시간에 티켓(어른 13.65달러, 어린이 7달러)을 가져온 사람들을 모아서 투어를 시작한다.

주의사당(상), 킹스채플(), 올드 사우스 집회소()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원로 가이드는 가는 곳마다 열정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마이크 없이 20명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극적인 묘사에 연기까지 해가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했다. 이민자의 나라에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할까 궁금했는데, 투어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우리 일행 중에 영국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독립과정과 영국의 만행 등에 대하여 가이드에게 질문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진지하게 투어 내내 계속되었다. 가이드는 연배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도 이동 중에도 우리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때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무척 열정적으로 보였다. 효진이는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보스턴과 관련된 미국의 역사를 배우고 왔기 때문에 투어 내내 맨 앞자리에서 주의 깊게 듣고는 우리에게 설명해주면서 뿌듯해했다.

프리덤 트레일 코스는 다운타운의 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서 가이드를 따라 걷다보면 현재 보스턴의 거리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적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고, 현재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주의사당처럼 지금은 다른 용도로 변경된 것도 있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존 행콕, 사무엘 아담스, 그리고 보스턴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래너리 묘지는 관리와 정비가 부족해서 황폐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이드를 따라 돌면서 아내와 나는 미국의 역사보다 고풍스러운 도시를 천천히 산책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프리덤 트레일을 걷는 내내 가이드는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애국자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설명하며, 영국의 역사적 과오를 지적하기도 했다. 보스턴 학살과 같은 영국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설명했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립전쟁 이후 미국인들이 보여준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노예제도나 서부개척이라는 명분으로 인디언과 멕시칸들에게 자행했던 폭력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횡단여행 내내 눈으로 확인하며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역사적 과오를 진정한 반성 없이 은폐해 버림으로써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과오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고궁이나 경주를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여유 있게 걸어본 기억이 없다. 경복궁에 몇 차례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어릴 때였고, 크고 나서는 함께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제 아이들도 커서 함께 답사를 해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다만, 귀국하면 고등학교에 가게 될 큰아이와 다시 분주해질 내 일상을 생각하면 함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라도 다녀야할 듯하다. 경복궁을 보러가면서 허균의 고궁산책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경복궁을 다녀오게 하는데, 보는 눈들이 달라져왔다. 이제 아이들도 이 책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연구실에 있는 책을 아이들 책꽂이에 먼저 가져다주어야 할 듯하다.

프리덤 트레일은 퍼네일 홀에서 끝났다. 퍼네일 홀 앞에는 사무엘 아담스의 동상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애국자가 아닌 맥주상표로 알려져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옆으로 노스마켓(North Market), 퀸시마켓(Quincy Market), 사우스 마켓(South Market)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퍼네일 홀 마켓플레이스(Faneuil Hall Marketplace)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멋스러운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축제에 온 것처럼 모두들 즐거운 모습들이었다. 마켓이 다 마켓이지 뭐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세 개의 마켓이 어울려 있어서 그런지 흥겨운 분위기에 같이 흥겨워지는 곳이었다. 아내는 퀸시마켓에서 먹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 와보는 도시인데 아내는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참 잘 안다. 마이크스 패스트리 샵에서 파는 초코릿 칩스 카놀라가 그것이었는데, 가서 보니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것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으며 걷다보니 부두였다.

퍼네일 홀과 사무엘 아담스 동상(), 퀀시 마켓 광장(), 초코릿 칩스 카놀라()

마켓과 부두 사이에 시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Jobs Not Cuts”라는 피켓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잔디밭에서는 시위대의 일원들로 보이는 브라스밴드가 연주를 하며 시선을 끌고 있었다.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예산 문제와 경기 침체로 인한 일자리 창출 실패로 인하여 청년 실업의 문제가 이곳에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은 분명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세계화, 시장경제의 극단화된 양극화, 불공정성의 문제가 사회적 합의와 수긍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것이었다.

Jobs Not Cuts을 들고 시위하는 여성

그런데 이곳의 시위를 보면 참 온건하다. 피켓을 들고 오고가거나 길목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정도였다. UCI에서 시위를 하는 것을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의사 표시만 할뿐 우리식의 시위는 보지 못했다. 시위로 의사 표시하는 것이 자유이듯 침묵하는 것도 자유라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모습이었다. UCI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대중 집회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그 주변에서는 발언을 경청하면서 피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자유롭게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몹시 신선했다. 캠퍼스 폴리스 두어 명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주변에서 지켜볼 뿐, 자유롭게 무척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집회였다.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대중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위도 자신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가 지니는 파괴력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신선한 것만은 분명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 부두는 조용했다. 크루즈 티켓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다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보여주는 듯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부둣가 벤치에 앉아서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찍어주겠단다. 한국에서 가족끼리 동네 산책하다가 아이들 머리핀을 사고 붕어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처럼 여유 있고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퀸시마켓 광장을 통과해서 돌아오는데 분위기가 마치 마을 축제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에 늘어선 보스턴의 시간들은 아주 따듯한 기억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숙소에 다가갈수록 숲이 많아졌고, 숲이 늘어나는 만큼 주변의 소리는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소리가 숨어버린 만큼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1. MIT의 교훈이다. 지식의 실제생활에서의 적용을 중시하는 MIT의 정신을 압축하고 있다. MIT 동문이 세운 회사에서 2조 달러의 이익을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라고 하니 그들의 실용학풍을 가늠하게 한다. [본문으로]
  2. 유진이가 제 선배와 스터디를 한다고 집 앞 빵집에서 방과 후에 공부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무슨 공부가 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픽업하러 가보면 상당수의 학생들이 빵집을 스터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어학원 앞 커피전문점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본문으로]
  3.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우연히 읽게 된 주경철 교수의 칼럼을 통하여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알 수 있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2/2011090202304.html) [본문으로]
  4. 강력한 브랜드의 포지셔닝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해당 브랜드의 후광효과를 노리는 다양한 이야기들과의 관련성이 폭발적으로 증가됨으로써 브랜드는 더욱 강력해지고 추가된 이야기는 더욱 극적인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대부분 고찰이 의상대사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 동상은 ‘3대 거짓말 동상’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동상의 비문에 “설립자 존 하버드, 1638”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1) 존 하버드의 초상화가 없어서 이 동상의 얼굴은 한 학생을 모델로 한 것이고, 2) 하버드는 존 하버드에 의해 설립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뿐이며, 3) 하버드는 1636년에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 총독부의 표결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미국에서도
  7.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중국집에서는 한국처럼 1인분 2인분 개념이 아니라 요리개념으로 여럿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 것이었다. [본문으로]
  8. 보스턴 코먼→주의사당(State House)→파크 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그래너리 묘지(Old Granary Burying Ground)→킹스 채플(King's Chapel)→최초의 공립학교 유적지(Site of First Public School)→올드 코너 서점(Old Corner Book Store)→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옛 주의사당(Old State House)→보스턴 학살 유적(State of the Boston Massacre)→퍼네일 홀(Faneuil Hall)→폴 리비어 하우스(Paul Revere House)→올드 노스 교회(Old North Church)→콥스 힐 묘지(Copp's Hill Burial Ground)→USS 콘스티튜션(USS Constitution)→벙커 힐 기념탑(Bunker Hill Monument) 순으로 진행되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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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811일 보스턴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드디어 뉴욕에 도착했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쌓아가고 있던 보스턴을 떠나면서 아쉬웠던 것은 그 시간의 질서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도시에서 볼 것에 쫓겨 다니다 떠나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만큼 보스턴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뉴욕에서는 숙소보다 라과디아 공항(La Guardia Airport)에 먼저 들러야 했다. 숙소로 정한 민박집에 주차 시설이 없고, 뉴욕의 교통지옥 속에서 운전을 하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렌터카를 반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 다시 새로운 차를 렌트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렌터카 회사에서 알려준 주소를 사만다에게 알려줘도 사만다가 정확하게 위치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라과디아 공항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근처에 가서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다.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는 화이트스톤 브리지(Whitestone Bridge)에 올라서면서부터 사만다가 당황하기 시작해서, 할 수 없이 표지판만 보고 공항 내에 렌터카 회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렌터카 회사를 찾아서 차를 반납했다. 렌터카 회사 직원은 차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기름을 체크했다. 기름을 가득 채워서 반납해야 했는데 공항 주변에 주유소가 없어서 그냥 왔다가 추가요금 42.97달러를 더 냈다. 주유소의 기름 값보다 2배 이상 비싼 금액이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공항 가까이 가서 주유를 하겠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공항주변으로 오니 주유소도 없고, 차를 돌리기도 어려운 길이어서 그냥 반납한 탓이다. 안타깝지만 또 하나 배웠다. 문제는 배움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반납하고 렌터카 회사 직원이 건네준 영수증을 보니 얼바인에서 뉴욕까지 3,948마일(6,353)을 달렸다. 처음에 구글 지도를 보며 워싱턴까지 예상했던 거리를 뉴욕까지 오는데 모두 써버린 것이다. 더 달린 만큼 많이 보았을 것이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렇게 낯설던 자동차가 이제는 내차처럼 익숙해졌는데 막상 반납을 하려고 하니 같이 고생한 정 때문인지 아쉽기만 했다. 차에 싣고 있던 짐을 모두 내리고 보니 난민이 따로 없었다. 볼품없는 트렁크와 여행 동안 어설프게 줄어든 짐 그리고 기념품 등으로 늘어난 가방을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나누어 들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뉴욕 숙소를 예약하는데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부탁을 해두었다. 도착 1 시간 전에 연락을 달라고 해서 연락을 하니 시간을 맞추어 공항으로 온단다. 픽업 하러 오기로 했던 분은 렌트카 회사가 있는 곳을 몰라서 몇 차례 전화를 하더니 30분쯤 늦게 도착을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 분이셨는데, 공항에서 맨해튼 숙소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이민사(移民史)를 들려주셨다. 재미는 있었는데 중간중간 지나치게 욕을 많이 해서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다.

맨해튼의 교통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뉴욕에서 민박은 대부분 다른 사람 건물의 방을 빌려서 하는데, 불법이란다. 그러니 집에 드나들 때 관광객처럼 하지 말고 당당하게 다니란다. 불법인데 어떻게 당당하란 말인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줄 돈 다 주고도 불법이라니 황당했다. 뉴욕의 호텔 가격이 워낙 비싸고, 민박도 한 번 체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선택한 것인데 처음부터 꼬였다. 픽업도 민박집에서 서비스로 해주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민박집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45달러를 내란다.

뉴욕 숙소 침실, 침실과 붙어있는 기계식 주차장휴대용 가스 버너와 휴지

미드타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내 돈을 주고 불법이라는 민박에 머무는 것도 언짢은 일인데 숙소는 낡고 지저분했다. 인터넷에서 가격대비 시설이 양호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이 모양이었다. 사진으로 보니 깨끗하고, 취사가 가능하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밥을 해서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용 후기를 읽어보니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보니 낡고 지저분했다. 가스레인지도 없고 휴대용 가스버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약을 6월 중순에 했으니 두 달 전에 기억이고, 사진과 다소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한 구석을 보니 직전에 머물렀던 손님들의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뉴욕을 마저 둘러보고 떠나느라 추가 요금을 내고 짐을 맡겨 두었단다. 5시쯤 찾으러 올 거란다.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가 짐을 내줄 거라며 양해를 구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낯선 땅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그 정도 편의도 못 봐 줄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뮤지컬 입장권을 구하고 장도 좀 보아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더구나 안내를 해주고 있는 사람은 집주인도 아니었고, 아르바이트 학생처럼 보이니 그에게 항의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뉴욕에서의 처음을 따지고 다투면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타임스퀘어의 모습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사만다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길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작은 지도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찾은 후에 타임 스퀘어(Times Square)를 찾아보고 지도를 따라서 걸었다. 가로축과 세로축을 맞추어 우리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코스를 찾아서 걸어갔다. 뉴욕의 악명을 여기저기서 너무도 많이 듣고 온 탓에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해가 남아 있었고, 비교적 큰 길들인데다가 우리는 모두 네 명이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네 명은 순식간에 한 명의 보호자와 세 명의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바뀌겠지만, 어쨌든 함께가 아니던가?

타임스퀘어는 아이들이 <무한도전>에서 보고, 꼭 가고 싶다던 곳이었다. 꽉 막힌 차들 옆으로 걸어보니, 맨해튼에서는 걷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1904년 뉴욕타임스 본사가 42번가로 오면서 타임스퀘어로 불리기 시작했고, 한때는 성인영화관과 성인용품점 등이 즐비했던 범죄의 소굴이었으나, 1990년대부터 재개발에 들어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현재를 볼 수 있다는 타임스퀘어에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광판들이 어지럽게 점멸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타임 스퀘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와 전광판에 비친 우리 가족. 포에버21 전광판 속 아이돌 스타가 우리 사진을 찍어주지 않으니 아빠가 찍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였다. 포에버21은 이민 온 한국인이 만든 의류회사인데, 미국 내 88위의 부자가 될 정도로 성공한 이민자의 기업이란다. 그것은 대형 전광판 안에 등장하는 아이돌 스타가 전광판을 바라보며 즐기는 행인들 중에서 가장 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는 인터랙션 이벤트였다. 아주 짧은 주기로 남녀 스타가 번갈아 나오면서 행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찍힌 사진이 대형 전광판에 바로 공개가 되기 때문에 행인들이 무척 즐겁게 참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찍히려니 어지간히 튀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래도 어림도 없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과한 몸짓을 해도 다른 사람들만 찍혔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그냥 두면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가서 빨리 뮤지컬 입장권을 구해야했기 때문에, 내 카메라로 전광판에 비친 우리 모습을 찍었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어쨌든 찍은 것은 찍은 것이다.

아내의 계획에 따르면 오늘밤이 아니면 뮤지컬 공연을 볼 시간이 마땅하질 않단다. 사실 미리 숙소 측에 공연 예약은 가능한지를 문의했었는데, 도착해서 표를 구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냥 온 것인데,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급해진 것이다. 타임스퀘어로 먼저 갔다. 타임스퀘어에 있는 안내센터를 먼저 찾아갔다. 공연 관련 정보와 예매가 가능했는데,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오페라의 유령>은 가장 좋은 위치인 137달러 좌석만 남아 있었다. 유진이는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어 했다. 안내센터 직원에게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공연장은 이미 매진된 상태라고 확인을 해주면서, 혹시 길거리에서 입장권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와 메리어트 호텔 앞에 있던 입장권 판매원에게 물어보니 61달러와 115달러 좌석이 있단다. 그런데 61달러 좌석의 경우에는 입장권이 없을 수 있다는 말에 115달러짜리 오케스트라 뒷좌석을 구입하였다. 안내센터에서 말했던  137달러 좌석을 이곳에서는 115달러에 판매하고 있던 것이다. 공식적인 입장권 판매 장소였던 안내센터보다 메리어트호텔에 소속된 입장권 판매원의 판매가가 어떻게 더 낮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입장권 판매원까지 써가면서 더 저렴하게 파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 이야기로는 메리어트호텔에서 투숙객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극장 측과 연간 계약을 맺어서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입장권을 구매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공연을 조금 저렴한 가격에 가장 좋은 좌석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이 극장에 가서 입장권을 구매해 놓을 터이니 7시에 다시 와서 입장권을 받아가란다. 남는 1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한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 타임스퀘어에서 한인마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조금씩 지쳐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걸어서 그곳에 가보니 얼바인에서 일반적으로 H마트라고 부르는 한아름이었다. 김치, , 삼겹살, 스팸, 계란 등의 식료품을 구입하고 보니 얼바인보다 가격이 거의 두 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구입한 식료품을 들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숙소에 가져다 놓고, 허겁지겁 메리어트 호텔로 달려갔다.

입장권판매원이 손으로 써 준 메모의 따듯함에 감동하다.

호텔에서 입장권을 받아 나오면서 입장권을 확인하는데 봉투 안에 작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이 입장권과 함께 넣어준 직접 손으로 쓴 카드였다.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졌다. 아마 다시 브로드웨이를 찾는다면 가격과 상관없이 나는 분명히 이곳에 와서 다시 입장권을 구입할 것이다. 그건 작은 메모 이상의 신뢰였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호의에 문득 따듯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뉴욕은 내게 내내 불안한 장소였다. 뉴스나 영화를 통해서 이미지화된 뉴욕은 말 그대로 고담시(Gotham City)였다. 탐욕과 부패와 범죄로 타락한 도시를 상징하는 <배트맨>의 고담시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뉴욕은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였다. 그런데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메모가 그 어둡고 불안한 이미지를 씻어낸 것이다.

공연 시작까지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숙소 때문에 기분 나빠지고, 일정보다 늦어지면서 종종대느라 피곤했는데, 메모 덕분에 모두들 유쾌해진 모습이었다. 공연이 10시가 넘어서 끝나니 공연 시작 전에 무엇을 간단하게라도 먹어둬야 했다. 마침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는 매저스틱 극장(Majestic Theatre) 바로 옆에 주니어스(Junior's)가 있었다. 주니어스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치즈 케이크 집이라는데, 뉴욕에서 꼭 먹어볼 것 중에 하나로 아내가 벼르고 있던 것이었으니 더욱 좋았다. 게다가 늘 가장 먼저 배고프고 입이 까다로운 효진이가 정말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가 아닌가.

주니어스 치즈케이크 흡입신공의 아이들

음식점 가서 가장 바보스러운 질문은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던 직원은 웃으면서 플레인 치즈케이크(Plain Cheesecake)가 제일 맛있단다. 그래서 그것 몇 조각을 샀다. 매장에는 자리가 없어서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들고 먹었다. 한 판으로 사면 30달러였는데, 조각으로 사면 6.5달러란다. 다들 좋아하는 것을 한 판 사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들고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조금 난감한 일이어서 몇 조각을 산 것이다. 사주고보니 정말 맛있게들 먹는다. 가족들이 잘 먹는 것도 복이라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는데, 여행을 다니다보니 그 의미를 알겠다. 가끔은 그 복이 지나치게 넘칠 때도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나로 인한 것이었다.

브로드웨이 극장가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화려한 불빛이 어둠보다 먼저 소란을 떨었지만, 브로드웨이에서는 어둠이 먼저 물들어왔다. 매저스틱 극장 앞은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에 나오는 1930년대 뉴욕 뒷골목의 분위기를 재연한 것 같았다. 나는 1930년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지금보다 조금 덜 빠르고 조금 더 인간적이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탓인지, 어린 시절 명화극장을 통해 본 영화들의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무척 매력적인 시대였다.[각주:1]

아직 어둠이 온전히 제압하지 못한 매저스틱 극장 앞에는 차들은 느리게 정지했고, 기마경찰과 삼륜의 경찰차가 정물처럼 서 있었다. 기마경찰은 관광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주거나 사람들에게 미소를 던져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브로드웨이의 기마경찰

극장마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고, 그 앞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이 줄을 섰다. 우리처럼 폴로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에서부터 보타이(bow tie)에 정장을 한 사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 각기 달랐지만 모두들 밝고 환한 표정만은 같았다. 치즈 케이크로 충분히 행복해진 아이들도 공연을 볼 생각에 들뜬 표정이었다. 약간은 들뜨고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이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저스틱 극장 전경

<오페라의 유령> 중간 휴식시간 극장 내부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보러갔을 때에는 오랫동안 서서 기다리면서 많이 답답했었다. 대부분의 공연장이 카지노와 연결되어 있었고, 카지노의 탁한 공기와 소란스러움이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로드웨이에서는 극장마다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면서 나름 즐기는 모습들이 오히려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기다리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공연장 주변 분위기에 따라서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각자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어느새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무며 즐기고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낡은 극장은 오히려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매저스틱 극장은 생각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용관이 주는 다양한 무대 장치는 돋보였다. 아내는 인기 있는 작품인데도 입장권 가격이 한국보다 싸다고 했다. 아마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이리라. 전용관과 상설공연은 관객뿐만 아니라 공연을 하는 측에서도 보다 안정적인 준비와 투자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의 배우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이나 무대장치들은 몇 번 공연을 하나 똑같이 들어가는데,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는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은 감소하지만, 한국처럼 공연장 부족으로 단기간 공연에 그치면 공연장을 옮길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고, 새로운 공연을 위한 배우들의 준비에 또 추가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뮤지컬 공연 관람료가 비싸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구조에서는 우리만의 창작 뮤지컬이 나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원작료를 주고 외국 작품을 사와야 하니 입장권 가격은 또 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최근 몇 년 동안 뮤지컬의 대중적인 지지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못해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이 이곳에 와서 보니 더욱 안타까웠다.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데 여기저기서 우리말이 들렸다. 이곳에서는 조건반사처럼 우리말이 들리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뒷좌석도 한국인 부부였다. 극장은 만원이었다. 전용관답게 공연은 극장 전체를 무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무대 아래와 뒤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의 변형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같은 레퍼토리를 몇 번씩 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공연의 매력이 아닐까? 동일한 작품을 배우나 연출자 그리고 극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해내는 그 변화를 읽는 것이 공연의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공연 중간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다보니 의외로 턱시도를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입기 힘든 드레스를 입고 온 여성들은 물론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에 맞춘 옷차림을 한 남성들도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동부 쪽 무더위가 대단하다는 뉴스에 짧은 옷만 준비해서 떠난 탓에 폴로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나와는 너무 대조되었다. 사실 공연문화라는 것이 단지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공연을 보러가는 과정과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참여 방식까지 포함된 것인데, 우리는 너무 여행의 효율성만 생각했었나보다. 좋은 공연을 보러가면서 조금 멋스럽게 꾸미고 가는 것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입을까를 고민하고, 그러한 복식에 맞는 행동을 하면서 즐기는 것도 공연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마칠 때까지 아이들의 몰입은 참 대단했다. 몰입이 대단했던 만큼 그 여운도 오래가는 듯 공연을 보고 나오자마자 뉴욕을 떠나기 전에 또 한 작품을 보면 안 되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여행 경비가 빠듯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난감해하는데, 눈치 빠른 아내가 안 된단다. 공연을 하나 더 보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쭉 설명하자 아이들도 납득을 한다. 늘 그렇듯 오늘도 아내는 현명하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되도록 밝고 큰 길을 찾았다. 10시 넘어서는 걸어 다니지 말라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이 생각나서 43번가 쪽으로 가서 숙소로 돌아왔다. 43번가 쪽에는 뉴욕 타임즈 본사와 대형 호텔, 슈퍼마켓, 음식점 등이 이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성인용품 판매점 등이 있어서 아이들 데리고 걷기가 민망했다. 도대체 치안이 불안한 도시가 어떻게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불안을 씻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으니 세계 제1의 도시겠지만, 생각해보면 자유와 안전을 상쇄해줄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안전하게 인간다움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던가?

걸어오면서 보니 늦게까지 영업하는 커피전문점들은 아직 불이 환하다. 세련된 옷차림의 뉴요커들이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전문점 앞 보도에는 쓰레기봉투가 어른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악취도 악취였지만 깔끔하고 환한 커피전문점과 투명유리로 분리되어 쓰레기봉투를 잔뜩 쌓아두고 있는 거리는 지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쓰레기 수거를 위해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흉물스럽고 악취가 지나쳤다. 나와 너, 안과 밖을 분명하게 나누는 이 도시의 정서가 차갑고 안쓰러웠다. 뉴욕의 첫 이미지가 이 쓰레기봉투로만 기억되지는 않겠지만 쉽게 잊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내가 저녁을 준비했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김치도 꺼내어 썰었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이들이 노래하던 삼겹살을 구웠다. 거의 1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에 아이들은 참 야무지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하다. 그동안 밥, 김치, 삼겹살이 많이 그리웠었나보다. 어른들이야 어찌 견딘다고 하겠지만 아이들은 힘들었나 보다. 여행을 떠난 지 보름째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여행 경비도 경비였지만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간편식으로 해결해왔는데, 아이들 밥 먹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아내는 오늘 하루 지출한 내역을 정리하며 일기를 적고, 나는 오늘 촬영한 사진을 노트북에 정리했다. 내일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연결하려니 와이파이가 안 된다. 예약할 때 인터넷이 된다고 했는데뭐가 잘못된 것인지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늦어서 전화를 거는 것은 실례인 듯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유진이가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다. 욕실이 깨끗하지 않으니 들어가기가 그랬나보다. 말로는 귀찮아서 그런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침실은 침대 두 개가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좁았다. 침구도 그렇게 정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숙소와 유료주차장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24시간 운영되는 이 주차장을 기계식 주차를 하고 있어서 차를 내리고 올릴 때 소음이 고스란히 침실로 전해졌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그러나 돈은 이미 지불했고, 새로 숙소를 구할 요량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견뎌야한다. 다시 한 번 문이 잘 잠겼나 확인했다. TV 등에 나오는 민박만 보고 내가 너무 경솔하게 결정한 모양이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했기 때문에 이곳 맨해튼 미드타운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 저렴한 호텔이라도 찾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은 오늘 여행의 노획물들을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아내도 마음이 좋지 않은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오늘 조금 만나본 뉴욕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10시 넘어서 숙소까지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내게 아직은 뉴욕은 고담시다. 고담시는 배트맨이 지켜주었는데, 이곳은 누가 지켜줄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시민의 안전과 쾌적이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면, 뉴욕은 기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시 내가 뉴욕을 콘텐츠를 통해서 이미지로만 알고 온 것은 아닐까? 아직 세계 제1의 도시라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게는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 2002)에 나오는 뉴욕의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이 궁금하다. 왜 이곳이 세계 제1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궁금하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다니면서 찾아보아야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유령의 공간이다.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유령이다. 어렴풋하게라도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나 뉴스로만 전해온 뉴욕은 이미지였지 구체의 현실이 아니었다. 뉴욕의 맨얼굴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

 

  1. 내게 1930년대는 영화 이미지 그 자체다. 기름 바른 짧고 단정한 머리에 중절모, 조금 넉넉한 더블양복과 롱코트, 그 사이로 당당하게 들고 선 기관단총…<대부>, <언터쳐블>, <좋은 친구들>, <퍼브릭 에너미>, <딕 트레이시> 등 할리우드가 생산한 이미지는 그 내용과 무관하게 낭만적으로 각인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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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812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핸드폰 알람을 맞추어 두었는데, 알람보다 먼저 깼다. 숙소 옆 주차장의 기계음 때문인지 낯선 숙소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까닭이야 분명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내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피곤한 일정을 강행군하다보니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침을 준비했다. 따듯한 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스팸만으로도 넉넉하고 배부른 아침이었다. 보잘 것 없는 그릇에 없는 반찬이었지만 아이들이 모처럼 맛있게 밥을 먹는 것을 보니까 흐뭇했다. 어려서 오남매 밥을 챙기는 것에 결사적이셨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부모님이 밖에서 생활을 하실 때여서 할머니가 우리들 끼니는 챙겨주셨는데,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오남매의 도시락을 싸시고 아침을 꼭 먹이셨다. 잠이 밥보다는 좋을 나이였으니 우리는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어 했는데, 할머니는 예외가 없으셨다. ‘밥 괄시하는 놈치고 잘 된 놈 없다는 말씀으로 아침을 꼭 먹게 하셨다. 자리를 보전하시고 누워계실 때에도 손자들 밥걱정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역할을 지금은 어머니가 하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이들 밥에 예민한 편인데, 오늘 이렇게 아이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지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고 있나보다.

휴대용 버너에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 한인 마트에서도 가스는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구해야 할지 직원에게 물어보아야겠는데, 어젯밤에 보낸 문자도 답신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치우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욕실 쪽에서 바퀴벌레를 본 모양이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예상했던 일인데 막상 눈으로 보니 화가 났다. 바퀴벌레가 있으면 약을 치든가 미리 약을 준비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숙소를 나오면서 직원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어제 일도 그렇지 않은가? 손님의 짐을 우리 방에 두는데 왜 자기들이 추가요금을 받는가? 어제부터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우리가 양해했으면 되는 일 아닌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버스투어를 하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인터넷은 침대 밑에 선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고, 가스는 H마트에 없어서 대형할인마트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내일 가져다준단다. 그나마 우리가 구입하러 가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화가 치밀었다. 예약할 때만 해도 가스레인지가 있다고 한 숙소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도 주인이 아니었다. 그에게 화를 내보아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

그레이라인 버스 티켓, 길기도 길다

타임스퀘어 부근에는 그레인 라인(Gray Line) 직원들이 붉은 조끼를 입고 티켓을 팔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어른 54달러, 아이 44달러면 이틀 동안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야하는데, 우리가 보고 싶은 곳은 다 그레이 라인의 루프에 속해 있으니 이동과 투어를 같이 할 수 있어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가이드가 함께 타서 설명을 해주고, 나이트 루프도 이용 가능하다고 하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달러를 주고 티켓을 끊었다. 판매원은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휴대용 카드결제기로 결제를 했는데, 결제와 동시에 40Cm 정도 되는 붉은 티켓이 출력되어 나왔다. 4명의 티켓을 출력하는 데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어처구니없이 긴 티켓을 보며 가족들 모두 한참 웃었다. 왜 긴가 보았더니 광고가 여러 개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본 <오페라의 유령> 20달러 할인 쿠폰이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아쉬웠지만 어쩌랴. 몰라서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틀 동안 우리를 여러 곳에 데려다 줄 티켓이니 잘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레이 라인 버스는 모두 4개의 루프 투어를 운행하는데, 다운타운 루프(downtown loop), 업타운 루프(uptown loop), 브룩클린 루프(brooklyn loop), 나이트 루프(night loop)가 그것이었다. 4개의 루프를 따라 돌면 뉴욕의 핵심인 맨해튼은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운타운 루프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였는데 1층 좌석에는 아무도 타지 않고 모두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없는 2층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입담 좋은 가이드가 버스 앞에 앉아서 지나가고 있는 곳을 설명해주는 방식의 투어였다. 가이드는 운행 중에 일어서면 안 된다는 경고했다. 2층 버스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가로등 밑이나 나무 밑을 지나갔기 때문에 만약 일어선다면 완벽한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거나 뉴욕타임즈 1면에 사진이 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곳곳에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내리고, 다 돌아보면 다른 버스를 타고 계속 돌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시로 내리고 탔다.

그레이라인 2층 버스

2층 버스 위에서 바라본 뉴욕 시가

2층 버스는 직사광선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금방 머리가 뜨거워졌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 대부분 차로 움직일 것이니 모자가 필요 없을 듯해서 짐을 줄이자고 가족들 모두 모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가?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머리가 뜨거워지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팸플릿 등으로 머리를 간신히 가리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쪽을 보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1층에서 운전하는 기사와 가이드의 호흡이 참 절묘했는데, 그 혼잡한 교통 상황에서도 가이드의 설명 속도와 버스의 진행 속도가 절묘하게 일치했다.

다운타운 루프[각주:1]는 말 그대로 맨해튼을 상하로 나누었을 때, 아래쪽의 주요지점을 토는 루프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직접 내려서 보고 싶으면 내려서 보고 다음 차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투어였다.

여행 내내 내가 운전을 하다 보니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어서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버스를 타고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니까 한결 여유로웠다. 귀로 설명을 들으면서 보라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것은 좀 더 볼 수 있고,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으니 내 여행은 오늘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달리는 2층 버스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좋은 뷰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천천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뉴욕공립도서관

뉴욕 가로등 위의 비둘기들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라는 뉴욕공립도서관은 어제 H마트에 갈 때도 보았던 곳인데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도서관 앞에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국에 와서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공립 도서관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장서를 갖춘 공립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다는 그들의 도서관 네트워크와 시스템은 한 없이 부러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도서관을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이용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도서관을 독서실로 이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책을 빌리고, 책과 관계된 문화행사를 즐기는 허브로 이용하는 모습은 더없이 부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이 숨 막히게 분주한 도시에서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어진 도서관 계단에 자유롭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향기로운 풍경이었다.

버스는 아주 무심한 듯이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서 스파이더맨과 고블린이 싸웠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나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 자주 등장하던 컵 케이크 전문점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스파이더맨>에 등장했던 플랫아이언 빌딩(Flatiron Building) 등을 스쳐갔다. 영화를 통해 소개됨으로써 실재보다 더 풍요로워진 공간들이 눈앞에 쉬지 않고 이어졌고, 그럴수록 그것을 소개하는 가이드는 분주해졌다.

세 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에 세워진 삼각형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

1902년 세워진 다리미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flat iron Building)은 세계 최초의 20층 이상 건물이었다고 한다. 100년의 세월을 건너왔을 이 빌딩을 보면서 나는 뜬금없이 일본 지성을 대표한다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고양이 빌딩이 생각났다. 아마도 주어진 공간의 제약을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플랫아이언 빌딩보다는 고양이 빌딩에 좀 더 매력을 느끼는 쪽인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발상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보관할 곳이 필요해서 건물을 지으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는데, 그 금액은 80대까지 꾸준히 원고를 써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란다. 그러니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80대까지 살아야 하고, 살아서 원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원고를 쓰기 위해서 빌딩이 필요한 것인지, 빌딩을 세웠기 때문에 원고를 써야하는 것인지 순환논리에 빠져버린 것 같지만,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독한 공부벌레들의 자부에서 기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신감도 자신감이지만 그러한 계획에 선뜻 대출을 해 준 은행의 안목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뉴욕은 어디를 보아도 100년 이상 된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들을 모두 현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정작 미국 본토가 전쟁터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00년쯤 넘어서도 오늘의 이름값을 가지고 제몫을 해내고 있는 건물들은 과거이자 오늘이며 내일이었다. 100년을 건너온 건물들을 보면서 새로 짓는 건물 역시 100년 이상을 건널 수 있도록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곳곳에 옛 양식으로 지은 새 건물들인데, 그 건물이 들어선 공간의 맥락을 외면한 채 지나치게 호사스러웠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화려한 장식과 호사가 아니라 조화를 외면한 생경한 돌출이었다. 이 화려한 마천루의 도시에서 100년 이상을 갈 수 있는 유니크한 건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와 의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들어설 공간이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폭력에 가까워 보였다.

센트럴파크(Central Park)는 풍경보다 냄새로 먼저 왔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차가 많았는데, 그만큼 말도 많았고, 말의 배설물도 많았던 탓이다. 앨런 블링클리(Alan Brinkley)에 의하면[각주:2], 1850년대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상류층이 압력을 넣은 결과라는데, 그 압력의 동기가 재미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상류층들은 명품과 사치로 그들만의 문화를 구별짓기(Distinction) 시작하던 시기였다. 유럽의 명품과 사치품들로 꾸미고 매일 마차를 타고 나들이할 장소가 필요했던 그들이 시에 압력을 넣어 조성된 것이 센트럴파크란다. 부와 명예를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별짓기 시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격식이나 의례를 만든다더니, 결국 센트럴파크의 시작은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과시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해 2,500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으며, 뉴욕시민들로 자유롭게 산책과 피크닉 그리고 조깅 등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밤의 치안이 불안한 것이 문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들어질 때보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건강해진 것은 분명했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Chinatown)은 다소 낡고 남루한 느낌으로 활기찼다. 차이나타운은 근처에서 비슷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를 대부분 밀어내고 그 영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단다. 차이나타운의 남루한 활기는 저렴하게 때로는 멋스럽게 적혀있는 중국 간자(簡字)들에게서 먼저 왔다. 가이드는 차이나타운에는 화장실 없는 건물도 있어서 공동 화장실을 쓰는 곳도 있다고 강조했다. 차이나타운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나름의 코리아타운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날 때도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억척스럽다는 말을 비아냥대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또 그런다.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해도 이렇게 우회적으로 비꼬는 것을 보면 서양인들 눈에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동양인들의 모습이 거슬렸나보다. 자기들의 땅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동양인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이러한 비아냥거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내와 유진이도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쟤네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라고 살짝 이야기 해주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에 원래 주인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굳이 원래 주인을 따지자면 이민자들에 의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거나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아니겠는가? 일찍 도착하고 조금 늦게 도착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주인이란 말은 이미자의 나라에서는 기만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철도나 도로 그리고 주요 교량과 캘리포니아의 농장들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임금으로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가 아니던가? 물론 그 사이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도 아직 온전히 미국과 동화되지 못하고, 기어이 차이나타운이라는 자신들만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국인들의 기질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뭉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보면 미국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그러한 개별 이익집단의 힘이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난 이 사회의 특성에 대한 문제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볼 수 있는 리버티 섬으로 가기 위해 배터리 파크(Battery Park)에서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고 리버티 섬으로 가야하는데, 티켓을 사는데도 한참을 기다리고, 배를 타려면 또 대책 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를 발견했다. 미국에 와서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우연치 않게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물들을 곳곳에서 만났다. 지난번 코디에 갔을 때에도 숙소 바로 앞에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와 그 앞에 선명하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마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정서적 유대와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복잡다단한 감정은 우리와 미국의 관계,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 FTA나 통상마찰, 주한 미군 주둔 문제,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 등의 미국과의 현재적인 문제들, 세계사적 맥락에서 미국의 정체 등이 얽혀있는 복합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전참전용사 추모비

거리의 악사

승선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뒤에 있던 한국 학생들 사진도 찍어주고,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사진도 찍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여전히 지루했다. 그 때 근처에서 경쾌한 타악기 연주가 들려왔는데 한국 노래였다. 그곳을 쳐다보니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흑인 한 명이 작은 북처럼 생긴 스테인리스 원반을 목에 걸고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 옆에 놓여있는 상자에 돈을 넣어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기로 자기 앞에 있는 관광객의 국적을 추측해서 해당 국가의 노래를 연주하고 팁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우리를 보더니 이내 한국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낯선 눈으로 보아도 우리가 확실하게 한국인으로 보였나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팁을 상자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에 똑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지만 두 번의 감동은 없었다.

배에 오르자 사람들은 좀 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배 위에서는 맨해튼 시내를 넓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더위를 데려가고 압도적인 맨해튼의 풍경을 데려왔다. 맨해튼에서 멀어질수록 맨해튼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금 더 멀어지자 브룩클린 다리가 처음과 끝을 온전히 드러냈다. 리버티 섬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내린 배를 타기 위해서 잔뜩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바라본 맨해튼

배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자유의 여신상까지 갔을 때에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티켓 구입과 승선 과정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인지 더위 때문인지 이미 진이 빠져버린 우리는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 말고는 딱히 보거나 즐길 것이 없었다는 것도 실망스러웠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유의 여신상 왕관에 올라가야하는데, 이것은 예약을 하고서도 1시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단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왕관에 올라갈 수 없었다. 이렇게 왕관에 올라가는 것도 201111월로 끝이라는데 아쉬웠다.

뉴욕의 상징처럼 이야기 되는 자유의 여신상인데 그 주변에 함께 즐길 콘텐츠가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게다가 무던히도 잘 기다리는 미국인이 아닌 우리에게 기다림은 아까운 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사오는 사이 나는 선착장에 먼저 가서 줄을 서기로 했다. 그런데 매점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몇 사람이나 앞으로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원래 페리의 코스는 배터리파크를 출발해 리버티 섬과 엘리스 섬을 돌고 배터리 파크로 돌아오는 것인데, 우리는 엘리스섬은 가지 않기로 하고, 엘리스섬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근처에 9/11 테러의 현장인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와 세계 금유의 중심이라는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소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불리는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는 공사 중이라는 가이드의 안내도 있었지만, 그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어떠한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클라호마시티 국립추모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잔혹한 기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슬픔의 흔적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또한 9/11테러로 인하여 벌어진 납득하기 어려운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으로 인하여 숱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직 월드트레이드 센터의 붕괴 원인[각주:3]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혹들이 남아 있지 않던가? 인터넷과 SNS 등을 활용하여 세계는 동시간대를 살고 있고, 정보의 독점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만은 충분한 정보와 납득할만한 근거가 제공되지 않으니 오히려 소문만 무성하다. 소문은 음모론을 낳는데, 음모론은 듣는 사람을 더욱 불신에 빠지게 한다. 책임 있고 신뢰할만한 기관에서 사실 관계를 규명하고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드러내주어야 할 텐데, 무슨 이유인지 이 사건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월스트리트17세기 네덜란드 인들이 인디언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방벽(Wall)에서 유래한 것이다. 1624년 맨해튼에 도착한 피터 미누이트는 이주민 대표가 되어 인디언 대표들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물품을 주고 맨해튼을 양도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뉴욕의 시작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계약 아닌 계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 맨해튼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곳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을 영국이 빼앗고 뉴욕이라고 부른 것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침략, 강탈, 매수 그리고 합법화를 위한 매매계약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개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640년에 뉴욕에서는 이미 18개국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하니 가히 국제적인 출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지금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전쟁의 기원과 그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모두 지쳐있었다.

다시 버스에 오르기 전에 생수 두 병을 구입했다. 뉴욕 시내 전체가 얼린 생수 한 병에 1달러 받기로 합의를 했는지 모든 가판대에서 가격이 동일했다. 그 생수라는 것이 대형할인마트에서 24병 혹은 36병에 병 값 포함해서 7달러 정도면 구입하는 것이고 보면,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생수를 구입하려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두 병을 쥐고 1달러란다. 그래서 두 병을 받고 1달러를 주니까 생수를 팔던 이 친구 얼굴이 확 변하면서 화를 낸다. 손에 두 병을 쥐고 1달러라고 하니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날이 더운 탓이다.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버스는 만원이었다. 아내와 효진이만 같은 자리에 앉고 유진이와 나는 따로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앞쪽 자리에 앉았고, 나는 맨 뒷좌석에 한 자리가 있어서 앉았다. 새로운 가이드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권태로운 음성으로 아주 느릿느릿 설명을 하고 있었다. 유진이가 피곤했는지 꼬박꼬박 졸았고, 나도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잠시 졸았던 모양인지, 졸았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아내는 판옵티콘이다.그러는 사이 버스는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에 도착을 했다. 현대미술관은 금요일 오후 4시부터 무료관람이었다. 원래는 어른 20달러, 아이 12달러인 입장료가 무료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금방 입장할 수 있었다. 눈이 밝은 아이들은 오디오 가이드(Moma Audio Guide)를 받겠다고 줄을 서서 기어코 오디오 기기를 받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추가 비용 없이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인터랙션 기기였다. 한국어 서비스도 지원되는 이 기기는 해당 작품 옆에 적힌 숫자를 누르면 그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와서 관람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무료관람이 가능한 시간이라서 그런지 현대미술관은 여행 중에 들렀던 미술관 중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았다. 6층 건물의 어느 한 층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샤갈의 <나와 마을>,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과 같이 잘 알려진 작품들과 모딜리아니, 몬드리안, 고갱, 마티스, 모네, 쇠라, 모네, 세잔, 프리다 칼로, 칸딘스키 등의 숱한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5층에 전시되어 있었고, 엔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락 등의 작품은 4층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층의 혼잡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혼잡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다 보았다. 언제 또 이런 작품들을 이러한 거리에서 뛰는 가슴으로 체험하겠는가?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작품을 좀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강의 중에 자주 활용하는 고호의 <별의 빛나는 밤>에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더욱 새로웠다. 모처럼 뛰는 가슴에 행복해진 것은 나만은 아닌지 아내도 무척 즐거운 모습이었다.

입장하면서 받은 팸플릿에는 한 시간(하이라이트 관람), 두 시간(탐구 관람), 가족 프로그램으로 나누어 관람을 안내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유형과 관람 시간에 따른 안내가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도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고 열심히 들으며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5층의 회화 작품들을 진지하게 보던 아이들은 4층의 팝아트와 현대 미술을 보면서는 무척 재미있어 했다. 새로운 표현 방식과 대중적인 표현들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현대미술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가는 도중에 러브(LOVE) 조형물을 만났다. 젊은 연인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사진 찍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연인들이 있었고, 우리 차례는 그 다음이었다. 그냥 글자조각 같은데 의미 때문인지, 장소성(placeness) 조형물이 있다는 뉴욕동경필라델피아의 때문인지 무척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사람들의 열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두 커플 모두 글자와 어울려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형물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탁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처음에 출발했던 타임스퀘어로 돌아왔다. 유진이가 메이저리그 야구 모자를 하나 사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머리가 뜨거워 고생을 한 터라 근처 메이저리그 용품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덩치가 크고 등과 팔에 온갖 문신을 한 직원들 셋이 30Cm쯤 되는 모형 야구방방이를 들고 탁구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자기들도 머쓱했는지 웃는다. 모자는 한국보다 조금 저렴한 편이었는데, 아이들과 나는 모자를 하나씩 샀고, 아내는 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신혼 초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자를 선물했으니나는 도통 아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었다.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간신히 준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낮에 더워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밥도 많이 먹지를 않고 피곤해 했다. 오늘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모두들 함께 보았다. 이제 매일 저녁 그날 찍은 사진을 가족과 함께 보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즐거움이 되었다. 한참을 웃으면서 사진을 보다보니 정말 우리가 그곳에 갔었던 것일까 라고 느낄 정도로 새로웠다. 낮에 다녀온 곳이 저녁에 새롭다. 오늘 다녀온 곳도 이런데,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우린 무엇을 얼마나 기억에 남기고 가슴에 담을 것인가? 그것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이 아니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곳을 체험하면서 비록 언어화되지 못하거나 스스로 기억한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체험의 원형질은 가슴에 남아 다양한 형태로 발아하고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도록 2011년의 무모했던 여행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오늘 찍은 사진 속의 우리가 나이를 먹지 않듯 기억 속의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고 매년 오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운전하지 않고 사진기에 의지해 돌아볼 수 있는 하루였다.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말투나 걸어 다니며 만났던 거리의 풍경도 운전을 하면서는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다운타운 루프에서 보았던 100년 이상을 건너왔고, 앞으로 건너갈 최고의 위용을 뽐내는 건물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다만,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 눈에는 화려하고 많은 공력이 투입된 건축물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주변 공간이나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의견이니 그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만난 것들은 아주 가슴 뛰거나 우울한 고민을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문화적 인프라와 시스템은 가슴 뛸 정도로 매력적인 것들이었지만, 도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남루한 어둠은 짙고 우울한 그림자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뉴욕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였다. 지나치게 보고 느낄 것이 많아서 그런지 모른다. 우린 이 도시의 겉모습만 달리는 말에서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곳에 머무는 시간동안 말 위에서라도 좀 더 부지런히 보아야겠다. 오늘 밤에도 기계식 주차는 멈추지를 않는다.

 

 

  1. 다운타운 루프는 타임스퀘어→브로드웨이 극장가→메디슨스퀘어 가든→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플랫아이언 빌딩→유니언 스퀘어 쇼핑가→그리니치 빌리지→소호→차이나타운→시청, 월들 트레이드 센터 자리→배터리 파크, 자유의 여신상→사우스 스트리트 항구→ 로워 이스트 사이드→이스트 빌리지→UN→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록펠러 센터, 라디오 시티 뮤직홀→센트럴 파크→파크 센트럴 호텔→윈터 가든 극장→타임스퀘어로 돌아오는 코스다. [본문으로]
  2. 앨런 블링클리 / 황혜성 역,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05. [본문으로]
  3. 911 테러를 음모론적 시간에서 다룬 딜런 에이버리 감독의 <911 - Loose Change>를 보면 아직 우리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고 있지 못하는 12가지의 의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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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813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을 준비하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바보처럼 뒤늦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집이 우리가 예약한 집과 내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벌써 두 달 전 일이니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해서 예약했던 사이트로 들어가서 주소와 사진을 확인해보았다. 예약한 집과 주소가 달랐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숙소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왔으니 당연히 예약한 집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예약을 하면서 숙박료의 반을 선금으로 보냈고, 도착해서 나머지 반의 잔금을 치렀고, 벌써 이틀 밤을 잤으니 항의해야 무슨 소용일까 마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아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예약했던 집과 다르다고 항의를 했더니, 주소는 다르지만 스펙은 같단다. 화가 났다. 하지만 곁에서 아내와 아이가 보고 있으니 화를 냈다가는 그들이 불안해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정이 있어서 예약과 다른 숙소를 배정했으면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미안하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의 항의란 얼마나 공허한가? 전화기 너머의 직원도 내가 뭐라고 화를 크게 내고 빨리 전화만 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내 잘못이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민박이라서 무조건 믿었고, 인터넷의 이용후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낯선 뉴욕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또 얼마나 실망하고, 불신과 자괴감을 갖게 될 것인가?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속은 것만큼 속상하는 일이 또 있을까? 화도 제대로 낼 수 없고, 화를 내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처럼 불쾌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 일정을 망칠 수는 없었다.

타임스퀘어로 걸어가서 그곳에서 업타운 루프(Uptown Loop)[각주:1]를 도는 버스를 탔다. 어제 돌았던 다운타운 루프의 반대쪽을 도는 코스였다. 다운타운 루프처럼 업타운 루프도 보아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가일 같은 헤어스타일의 흑인 가이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설명을 했는데, 마치 라임(rhyme)이 잘 맞는 랩을 듣는 느낌이었다.

센트럴 파크 주변으로 고급 아파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장식의 외벽과 규모만으로도 압도되는 것들이었다. 레너드 번스타인, 존 레논이 살았다는 다코타 아파트(Dacota Apt)도 겉보기에는 그것들에 비해 오히려 소박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존 레논이 저격당했던 다코타 아파트 정문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마루에 놓여 있던 라디오 뉴스에서 존 레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던 기억이 난다. 팝음악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가 누군지조차 몰랐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 그가 대단한 뮤지션이었다는 것을 알았었다. 지금은 불교방송 기자를 하는 대학후배는 대학시절 비틀즈 팬클럽 회장을 맡았었는데, 거의 일 년 내내 비틀즈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비틀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야만인 취급하고는 했었다.

다코타 아파트에는 아직도 오노 요코가 살고 있다고 하니,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 간 곳을 매일 지나쳐 다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대단한 결기를 지닌 여인인가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며 미국 음악 시장을 장악했던 비틀즈는 뮤지션을 넘어서 1960년대 새로운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 그가 발표했던 <John Lennon / Plastic Ono Band>는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회자된다. 그러고 보면 오노 요코로부터 존 레논이 영감을 얻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술가에게 배우자는 화수분 같은 영감이 되거나 잔혹한 현실의 규율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존 레논은 행운아였던 것이다. 존 레논의 명성이나 부에 비해 전위예술가였던 오노 요코가 보잘 것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음악적인 재능에 화수분 같은 영감의 원천과 사랑을 나누었으니 좋은 음악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뉴욕의 고급 아파트

존 레논이 저격당한 다코타 아파트 정문

그 음반의 곡들은 아니지만 ‘I Want To Hold Your Hand’, ‘Let it be me’, ‘Hey Jude’, ‘Norwegian wood’, ‘Imagine’과 같은 곡들은 지금 들어도 좋은 곡들이다. ‘Norwegian wood’는 노래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로 먼저 읽으면서 가사를 보고 노래를 나중에 들었던 곳이다. 그것이 노르웨이의 숲이냐 노르웨이산 가구냐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듣고, 그것을 토대로 소설을 구상한 것이고 보면,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이 옳을 듯싶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문학사상사판에서는 아예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꾸고 있다. 원곡을 만든 비틀즈나 그것을 소설로 바꾼 무라카미 하루키의 감성도 대단할뿐더러 그 사이의 간극을 본 번역자가 그것을 다시 다른 제목으로 번역해낸 것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코타 아파트를 지나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재미있었는데, 다음이 우리가 내릴 미국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었다. 세계 최대 과학박물관이라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은 우리를 반기지 않는지 입구가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자유롭게 기부(Donation)하고 입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어른 19달러, 아이 10.5달러를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3,500만점의 전시물이 있다는데 얼마를 기부해야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하느니 그냥 입장권을 사는 것이 속이 편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당혹스러웠던 것이 기부 문화였다. 아이들 학교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기부를 권장했는데, 이걸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목은 기부인데 반강제인 경우도 많았고, 기부가 안 되면 학생들 행사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재정이 어려워 교육예산을 삭감했고, 그 덕분에 기부 권유가 더 늘었다고 한다. 처음 와서 효진이네 학교에서 학용품을 기부하라고 목록을 보내왔기에 아내와 고민 끝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을 구입해서 가지고 갔더니 진짜 가져왔어!’하는 눈빛으로 행정 직원이 받았다. 유진이네 학교에서는 학생 행사 관련해서 기부를 받아서 버스를 운행할 계획이었는데, 기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혼선을 빚다가 결국 운행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부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반강제적인 모금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자발적인 기부인지, 어느 정도 규모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매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모를 때, 오늘처럼 다른 방식이 있으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속 편했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공룡 뼈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꼭 들러야 한다고 우긴 것은 유진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족끼리 함께 보았던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 2006)의 배경이 이곳인지 아닌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로비에 있는 공룡 뼈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박물관을 다 보고나서도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워싱턴에 있는 자연사박물관과 이곳에서 나누어 찍었단다.

1층에서 밀스타인 기념 해양 생물관과 보석 전시장이 이채로웠다. 이름으로만 듣던 것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크기 그대로 눈앞에 등장했을 때 느끼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해양 생물관에서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결국 대부분 언어적 인식이거나 영상화된 이미지 이상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비릿한 냄새는 아니더라도 그것들의 크기와 구체적인 생김새만으로도 낯설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사실 이런 전시물 앞에서 더 놀라면서 흥미를 갖는 것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산산이 깨지면서 더 놀라고 놀란 만큼 즐거워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와 나는 그랬다.

보석 전시실에는 예상대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저 보석의 이름과 모양을 일치시켜보는 수준이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관심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내는 보석 같은 것에는 욕심이 없는 줄 알았었는데, 무척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니 새로웠다. 결혼하고 공부하면서 보석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 관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란다. ‘인도의 별처럼 보석을 가공해서 새롭게 붙여놓은 이름들이 보석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그 이름의 유래나 내력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려고 찾으니 벌써 아내와 다른 보석 앞에 가 있었다.

2층과 3층에 있는 애캘리 기념 아프리카 포유류관에는 아주 정밀하게 제작된 동물 박제들이 있었다. 조명과 배경 덕도 있었겠지만 박제 자체가 아주 사실적이었다. 탐험가, 동물학자, 사냥꾼이었던 칼 애캘리(Carl Akeley)는 박제술을 발명한 사람으로 이것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들이다. 그는 단순히 박제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경 등을 설치하여 하나의 디오라마(diorama)를 구성하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 아프리카 포유류를 전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칼 애캘리였고, 그가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을 잡아 박제를 만들었다고 하니 이 홀에 그의 이름이 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고릴라의 표정을 보고 사냥을 그만두고 동물 보호론자가 되었다고 하니 아주 극적이다.

멕시코 중남미관에서 뽀로로를 닮은 조형물

멕시코와 중남미관에서 발견한 조형물들은 섬세한 표현과 다양한 표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조형물 하나가 뽀로로를 닮았다고 보여주니 아이들이 웃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도 이런 디자인과 표정을 좋아했었다니, 뽀로로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곳곳에 소박하지만 정교하고 진솔한 표정의 목각들이 많았는데, 민속예술의 성격 때문인가 보다.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것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보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 없이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재미있는 표정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어쨌든 그들만의 소통이니 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라스트 모히칸>을 연상시켰던 토마호크

3층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관이 있었는데 이미 여러 곳에서 인디언 관련 전시를 보아온 터라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무기 중에서 토마호크(tomahawk)였다. 토마호크는 단지 돌이나 금속 도끼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던지거나 때릴 수 있는 무기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란다. 돌이나 뼈뿐만 아니라 금속을 날카롭게 벼려 나무에 붙여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가장 멋진 토마호크 씬은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 1992)의 끝부분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가 적을 향해 무참하게 그러나 아주 정교하게 휘두르던 장면이다. 그것은 마치 장예모의 영화 <영웅>(Hero, 2002) 에서 의식적으로 구현했던 칼과 활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같이 민첩하고 단호했었다. 앞뒤로 모두 살상이 가능하고, 원심력을 이용하는 토마호크의 특성을 잘 살려서 분노를 표현했지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타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비에 공룡 뼈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은 4층 전시실이었는데 그곳에 공룡과 멸종된 포유류 뼈가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이었음이 분명한 사라져 버린 것들의 견고한 뼈가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직 그 뼈에는 살을 갖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거칠게 포효했을 때의 기력이 남아 있는 듯 역동적인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림들만 오히려 그 단호한 정지 앞에서 지극히 초라한 비교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손을 피하기 위해 유리관에 갇혀 있거나 작은 철선으로 골격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녀석들조차 살아서 가장 강했던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죽어서 살아있는 이것들의 현재는 슬픈 매혹이었다. 주어진 시간에서 조금도 비껴 설 수 없는 살아서 유한한 것들의 운명과 그 안에서 스스로의 격을 유지하려는 몸짓이 잔혹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이 들려 돌아보니 한국인 모자가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제 더 볼 공룡이 없다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들 때문인지 엄마도 그 낯설고 긴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엄마가 저 정도라면 아들은 학위 없는 박사일 게다. 아들도 대단하고 엄마도 대단했다. 도통 공룡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나나 우리 아이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 같았다. 아들이 좋아한다고 같이 관심을 갖고, 분명 외워지지 않았을 그 이름을 외웠을 엄마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박물관은 토요일이라서 매우 혼잡했다. 더구나 워낙 박물관이 넓다보니 관람 동선 안내가 필요했는데, 이게 친절하게 되어 있지를 않았고, 직원들도 다소 고압적이고 불친절해서 아쉬웠다. 관람객이 이러한 불편을 느끼게 된다면 아무리 훌륭한 전시물이 있어도 최고라는 말은 듣기 어려우리라.

길거리에서 구입한 Lamb of rice.

박물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 가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그 냄새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작은 트럭에서 캐밥(kebop)을 팔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8달러를 주고 양 고기밥(Lamb of rice)을 샀다. 어제 현대미술관 앞에서 이것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맛만 볼 요량으로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밥과 양고기 그리고 야채의 조화에 무척 절묘했다. 주문하는 과정에서 주인에게 한 소리 들었다. 내 순서인 줄 알고 주문을 했더니 네가 올라와서 10명의 사람을 한 번 상대해볼래?”라고 이야기한다. 내 순서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주인은 주문받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 앞에서 조금 창피했다. 그래도 그거 하나 먹어보겠다고 꿋꿋하게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주인도 미안했는지 음식은 제일 빨리 준다. 나는 속도 없이 그게 맛있었다. 유진이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며 재미있어 한다. 그래 너희가 재미있으면 됐다.

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은 압도적이었다. 1892년에 짓기 시작해서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 중인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거라는 이 성당은 2050년에 완공이 된단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풋볼 경기장 2개 크기에 17층 높이로 8,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볼 수 있는 규모라니 크긴 큰 모양이다. 특히 장미창(Rose Window)1만개 이상의 유리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공력이 대단하다. 100년 전부터 짓기 시작했으니 완공도 되기 전에 이미 건물에는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건축이 중단되기도 했고, 2001년에는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단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느껴졌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이 건물 곳곳에서 빛났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100년을 넘기는 대역사를 꿋꿋하게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자기 자신이 시작과 끝을 모두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위대한 예술 작품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겸허함과 뒤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의 다양한 모습. 100년 전에 지어진 것부터 현재 짓고 있는 것까지 시간이 공존한다.

100년이 넘게 짓고 있고, 화재까지 나다보니 대성당은 각 부분이 자기 몫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만 봐서는 하나의 건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차이가 드러났지만,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정도 시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앞으로 그 차이를 지울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견디고 지탱하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미국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330만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독특한 건물 디자인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서보고 싶어 한다는 카네기 홀 그리고 뉴욕의 상징적인 공간인 센트럴 파크도 그냥 버스로 돌아보아야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보자는 생각에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서 볼 것을 결정하다보니 나와 아내가 보고 싶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센트럴파크 산책 등이 빠지게 된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제대로 보려면 지금 일정의 두 배 이상이 시간이 필요하고, 더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이기에 이미 예정된 한계였다. 어느새 버스는 다시 타임스퀘어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의뢰를 받아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규명하는 보고서[각주:2]를 제출한 적이 있다. 소설과 영화를 분석해서 <해리포터 시리즈>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덕분에 나도 다시 꼼꼼하게 분석할 기회를 갖게 되었었다. 우리 아이들도 모두 <해리포터 시리즈>의 광팬이었다. 효진이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열광했고, 유진이는 책도 책이지만 영화를 더 탐닉했다. 그러다보니 해리포터 전시회가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는 길에 해리포터 전시회(Harry Poter Exhibition)’가 열리는 곳을 보아둔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꼭 보고 싶다고 했는지 아내는 나이트 루프 전에 그것을 보자고 한다. 전시 공간이나 성격으로 보아서 별 것 없을 것 같다고 나는 몇 번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4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서 들어간 전시회장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람료(어른 27달러, 아이 20.5달러)에 비해 전시 내용이나 전개가 턱없이 부실했고, 무엇보다 즐길 것이 없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의상과 소품을 전시해 둔 수준이었고, CG로 처리해서 실재하지 않는 소품들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좋았지만, 그 수준이 조악했다. 그나마 전시실도 몇 개 되지 않아서 기다린 시간보다 관람시간이 턱 없이 모자랐고, 그 시간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많아서 앞으로 움직이지를 못해서였다. 아이들도 적지 않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브랜드 가디언(brand guardian)으로서 엄격한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이나 워너브라더스가 어떻게 이렇게 부실한 전시회를 허가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전시회는 9월까지 뉴욕에서 전시를 한단다. 빈약한 콘텐츠로 인해서 아이들은 실망하겠지만 업자들은 아마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들었다. 전시회장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볼 것도 없는 것이 사진도 못 찍게 한다고 투덜댔지만, 경험재(experience good)인 이와 같은 전시회는 못 찍게 하는 것이 옳다. 직접 봄으로써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그 구분에 대가를 지불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의 끝은 예상대로 관련 상품 매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해리포터라는 브랜드만 활용하는 팬시상품에서부터,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기숙사별 넥타이, 망토, 목도리와 모자 같은 실용적인 물품은 물론, 다이애건 앨리에서 팔렸던 귀지 맛 캔디, 마법지팡이, 님부스2000같은 빗자루 등과 같은 물품들까지 해리포터로 팔 수 있는 것들은 다 모여 있었다. 전시회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볼 게 많았다. 스토리노믹스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열풍을 일으켰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끝났지만 그것의 브랜드는 살아서 당분간 더 충성도 높은 팬덤을 형성할 것이 분명하다. 매장을 나오면서 아이들은 엽서를, 나는 ‘Hogwarts Express 9¾’이라고 새겨진 자석을 구입했다. 내년 봄부터 내 연구실 앞에는 아마 이 자석이 붙어있게 될 것이다.

나이트 루프를 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캘리포니아에 인앤아웃(In-N-Out) 햄버거[각주:3]가 있다면 뉴욕에는 셰이크 섀크 버거(Shake Shack Burger)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침 근처였다. 이틀 동안 타임스퀘어를 오가면서 꼭 먹어보리라 벼르다가 드디어 먹었다. 20분쯤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았다. 20분밖에 기다리지 않았으니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우리도 이제 기다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지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 넓은 매장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매우 소란스러워서 정신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자리를 잡으라고 하고, 나는 주문한 버거가 나오길 기다렸다. 셰이크 섀크 버거는 4.5달러로 버거의 양과 질에 비해서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다시 20분쯤 기다려서 주문한 버거를 받았다. 햄버거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아삭거리면서도 씹으면 촉촉했던 패티, 그리고 촉촉한 빵과 아삭한 프렌치프라이와 치즈의 맛이 탁월했다. 조금만 덜 소란스럽고 혼잡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가격에 이렇게 맛이 있으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고 사람이 몰리는 만큼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고보면, 감수해야할 부분이었다.

셰이크 섀크 버거

음식점 등급 표시

뉴욕에서는 음식점 앞에 ABC등급이 매겨져서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음식점의 등급표시라는데, 물론 A가 가장 좋고, B, C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식당이 A를 걸고 있었다. 만약 C가 걸려 있으면 식당 문 앞에서 얼른 도망가야 할 수준이란다.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형태라는 게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이렇게 등급을 매겨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이전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나보다. 어쨌든 처음 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친절한 구분이지만, 평가받는 식당 입장에서는 참 모진 구분이 아닐 수 없다. 음식 맛, 청결도, 요리사 등급, 가격, 서비스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라는데, 한국의 유명 음식점들은 어떤 등급을 받게 될까 궁금했다. 허름한데 음식 맛은 최고인 집들은 이 평가 기준으로 하면 A를 받을 수 있을까?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같은 데는 욕도 서비스로 평가해야 할 텐데, 다른 곳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것 같고…….

이것은 미국식 객관화다. 객관화하기 어려운 것을 객관화하기 위해 엄정하고 납득 가능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에 따라 평가하고 공시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부조리한 것들이 이와 같은 예측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대학입시나 입사시험과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각 대학이나 기업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객관적이고 납득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순인 줄 알면서 한계가 분명한 수능으로 평가하거나 외부 평가 기관의 평가나 스펙에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대학별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인재상에 맞추어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해야만 차별화된 교육이 가능할 텐데, 이것을 국가가 틀어쥐고 있으니 기형적인 입시 속에서 너나없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기업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재를 뽑아서 쓰는데, 자신들만의 평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획일적인 영어성적과 스펙만을 강요하는 것도 사회적 묵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객관화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렇게 자율적인 평가 시스템에 맡기었을 때, 모두가 수긍 가능한 공정한 평가를 수행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러다보니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평가에 기대야 하고, 그로 인하여 교육과 평가가 어긋나고, 배움과 능력이 괴리되는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주문한 것을 기다리면서 보니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폐기처분되는 음식들을 볼 수 있었다. 주문한 버거가 나오고 손님을 호출했는데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음식이 식자 여지없이 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주스 전문점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주문이 잘못되어 딴 음료가 나오면 예외 없이 폐기 처분한다. 어디 그뿐이랴. 대형할인매장에서 식료품을 샀다가 반품을 하게 되면 개봉 여부와 상관없이 폐기한단다. 식품에 대한 엄정한 관리라는 점에서는 환영할만하지만 개봉하지 않은 것까지 폐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가 아닐까? 미국에 처음 와서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소시지가 너무 짜서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 반품을 했다. 담당자가 반품한 모든 음식들은 폐기하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몹시 불쾌했는데, 몇 개월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보니 그가 의식 있고 양심적인 직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미국의 모습을 보면, 풍요가 늘 축복은 아닌가보다.

우비를 입고 탄 나이트 루프

저녁을 먹고 나이트 루프(Night loop)를 타러 정류소까지 갔더니 이것은 한번 타면 도착할 때까지 정차하지 않는단다. 1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니 화장실을 들렀다가 타야 할 것 같아서 화장실을 찾는데, 없다. 대부분 업소의 안에 있어서 업소에 들어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처럼 화장실 인심이 고약한 곳이 또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뉴욕처럼 야박한 곳도 없었다. 결국 길 건너에 있는 맥도날드로 갔더니 벌써 십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내 앞에 앞에 차례가 되었는데 한 남자가 아이를 데려와 먼저 이용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앞에 사람은 나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아이는 들어가서 10초도 되지 않고 나온다. 화장실을 보고 부지런히 정류장으로 갔더니 아내와 아이들이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다. 이 지독한 도시에는 화장실도 없고, 있어도 잘 빌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화려하고 압도적인 건물을 세우면 뭐한단 말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를 편안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배려가 없는 도시라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도시가 아니겠는가?

나이트루프는 말 그대로 야경 투어였다. 맨해튼 다리를 건너서 브룩클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기회가 닿으면 브룩클린에 있는 그리말디 피자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줄이 너무 길었고, 투어 중에 내릴 수도 없었다. 버스에 오를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다. 2층 버스에 지붕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했는데 버스 회사에서 모두에게 하얀색 우비를 나누어 준다. 우비를 입고 2층 버스에 앉아서 맨해튼과 브룩클린의 야경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보는 브룩클린과 맨해튼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맨해튼은 불빛으로 도시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불빛 바깥쪽의 어둠은 낮보다 더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대학시절에 본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1989)가 생각나서 꼭 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너무 어두웠다. 창녀 트랄라가 한국전에 참전하는 군인과 며칠을 함께 보내고 떠나보내며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깨닫는 장면은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L'Amant, 1992) 의 마지막 장면처럼 회환과 자기부정의 정서가 표현된 빼어난 장면 중에 하나다. 브룩클린은 그동안 내게 트랄라의 절망과 그 앞에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지켜볼 뿐인 소년 스쿠프 그리고 자신이 성정체성을 깨닫고 방황하는 핸리의 모습이 마구 엉킨 이미지였었는데, 이제 조금 구체적인 도시의 윤곽을 갖게 되었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으로 돌아오며 유쾌해졌다. 내린 비로 밤공기는 맑고 시원해져 있었다. 이제 조금 익숙한 눈으로 복습하듯 거리와 건물들을 확인했고, 그 사이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타임스퀘어에서 밤늦게 만난 중국민주화 시위대

타임스퀘어의 청년

미국스러운 대형 리무진

버스는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그레이라인 버스 투어를 즐기다보니 시작과 끝이 매일 같은 곳이다. 타임스퀘어에는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광고판들은 밤이 깊을수록 더 화려하고 강렬해지는 느낌이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오십 여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중국 민주화와 민주투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외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국에서 할 수 없으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에서 외치는 것이리라.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음직한(아직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동양인들 몇몇이 쳐다볼 뿐, 사람들은 대부분 무관심했다. 근처에서는 한 청년이 “Jesus forgives sin”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길고 호화로운 리무진 두 개가 정차해서 묘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의 다양성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모두들 내일이 뉴욕에서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욕을 부지런히 돌았다. 처음에 올 때 그 정체모를 도시를 조금 아주 조금 보았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머무는 기간에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지 않는 도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아직 뉴욕이 싫다. 숙소는 별도의 문제였다. 그건 속인 사람과 속은 우리의 문제였으니까. 무엇보다 뉴욕이 보여주는 지독한 부조화가 거북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도시 공간에서 세계 제일의 강박에 사로잡힌 화려함은 천박하거나 안쓰러운 과시였다.

나는 왜 뉴욕을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지 아직 의문을 풀지 못했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최고의 도시라면, 뉴욕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문화라는 것에서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사람이 소거된 문화는 더 이상 문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뉴욕을 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두고두고 고민해볼 문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최고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다시 차를 렌트해서 필라델피아로 떠날 것이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창밖으로 빗줄기가 거세다. 아마 운전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동부로 넘어와서는 유난히 비가 많다. 어쨌든 그것도 여행의 일부일 테니 수납해야 하리라. 예측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만큼 긴장되고, 긴장된 만큼 짜릿한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면서.

  1. 업타운 루프는 AOL타임워너 센터→링컨센터→다코타 아파트→미국 자연사 박물관→어퍼 웨스트 사이드→유스호스텔→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리버사이드 교회→아폴로 극장→스미소니언 국립 디자인 박물관→구겐하임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미술관→휘트니 미술관→센트럴파크 등을 도는 코스였다. [본문으로]
  2. 박기수, KOCCA포커스 2010-3 <해리포터, 스토리텔링 성공 전략 분석>, 한국콘텐츠진흥원. [본문으로]
  3. 인앤아웃(In-N-Out)의 햄버거는 패스트푸드이기는 하지만 냉동재료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신선한 재료를 냉장트럭으로 배송해야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되다가 인접한 네바다 주, 애리조나 주, 텍사스 주까지만 지점을 냈단다. 재료의 신선함을 냉장으로 지킬 수 있는 거리까지만 지점을 낸다는 그들의 마인드 때문인지 미국 내 고객만족도 1위 햄버거란다. 매장 내에서 통감자를 기계에 넣고 한 번에 잘라내어서 프렌치프라이를 만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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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필라델피아

814일 뉴욕필라델피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빗소리에 잠을 깨면서 나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냐던 이승환의 노래가 생각났다. 밤새도록 세찬 비가 내리고, 새벽녘에 설핏 잠이 깨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까지 걸어가겠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아침이 되자 비는 더욱 거세졌다.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일단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했다. 여행 올 때 가져온 3분 카레 20개가량과 햇반 7, 뉴욕에서 장을 본 쌀, 김치, 계란 등을 숙소 냉장고에 남겨 놓고 메모를 써 두었다. 남은 일정 동안 이것을 모두 먹을 수 없고, 남은 것을 비행기에 실어 다시 얼바인으로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비가 이렇게 온다면 그것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일단 짐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기로 하고, 이것들을 냉장고에 두고 가기로 했다. 우리보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유용한 물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진하게 메모를 써서 냉장고 앞에 붙여두고 왔다.

숙소는 마지막 정마저 떼려는 듯, 아침에 온수마저 나오지 않았다. 일단 찬물로 씻을 수 있을 만큼 씻으라고 아이들에게 이르고, 숙소를 정리했다. 우리가 머문 자리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을 먹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남의 집을 사용한 최소한의 예의기도 했다. 짐을 일단 다 싼 후에 손에 드는 짐들은 비닐로 잘 덮었다. 그러는 사이, 비는 더욱 거세졌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가서 택시를 잡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택시들이 대부분 예약으로 다니기 때문에 나가서 바로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짐을 끌어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택시에 짐을 싣고 렌터카 회사까지 가는데 곳곳에서 교통통제를 하고 있었다. 1.2마일(2) 되는 거리를 빙빙 돌아서 간신히 도착하고 보니 요금이 12달러가 나왔다. 20달러 지폐를 주니 기사가 잔돈이 없단다. 있는 것만 달라니 6달러를 준다. 그래 그거면 됐다. 비가 이렇게 장하게 내리는데 이 택시가 아니었으면 곤란하지 않았던가?

렌터카 회사 AVIS는 대형 건물 주차장 같은 분위기였다. 예약을 확인하고 차를 배정 받는데, 운전면허를 달란다. 2월에 면허를 획득하고 아직까지도 배달이 되지 않아서 임시 운전면허증(temporary license)을 제시했더니 이건 안 된단다. 얼바인에서는 그것을 제시하고 차를 빌렸다고 하니, 그래도 안 된단다. 사진이 붙어 있는 면허가 있어야 한단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한국 면허를 보여주니 그건 된다고 한다.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그들이 과연 한국 면허증을 무슨 수로 신용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됐으니 된 것이다. 서류를 꾸미고 카드결제를 하려고 데빗 카드(debit card)를 냈더니 데빗 카드는 안 된단다. 잔고가 넉넉한데 왜 안 되냐니까 안 된단다. 신용카드가 없냐고 해서 한국 신용카드를 줬더니 결제가 됐다. 미소를 보이면서 안 된다는 데 화를 낼 수도 없고, 답답했지만 금방 다른 대체 수단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창구 담당자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은 탓에 저항하기 보다는 투항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대체 방법을 이야기 해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는 신형 소나타였다. 차를 배정받아서 짐을 싣고 달리는데 꼭 내차 같다. 처음 타보는 차인데 내 차처럼 편한 것은 소나타의 경쟁력인가 아니면 소나타의 한계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렇게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것은 경쟁력이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최적화된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 한계가 아닐까?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뉴욕을 빠져 나왔다. 렌터카를 뉴욕에서 반납하면서 재웠던 사만다를 며칠 만에 깨웠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초반부터 에러였다. 가뜩이나 난감한 뉴욕에서 사만다가 에러면 헤맬 수밖에 없었다. 사만다는 몇 번의 경로 수정을 하더니 결국 뉴욕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뉴욕을 빠져나오니 날아갈듯 시원한데 폭우는 여전히 지독했다.

필라델피아 시내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바로 이동하려 했다. 4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니까,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면 뉴욕이나 워싱턴에서의 하루를 더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 도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역사를 정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필라델피아가 포함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우애 있는 도시라는 의미란다. 독립전쟁 당시 최대 거점이었고, 19세기에는 미국 내 최대의 도시였다는 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야 할 도시였다.

사실 필라델피아로 달리면서 내심 우리 모두는 유명하다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유진이 학교 앞에 필라델피아 식으로 샌드위치와 프렌치프라이를 파는 필리스’(phillies)라는 가게가 있는데, 여기에서 맛본 바로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는 기대하기에 충분한 음식이었다. 특히 나는 필리스 베스트라는 메뉴가 마음에 들었다. 프렌치프라이와 얇게 저민 소고기를 함께 철판 위에서 구운 후에 그 위에 필라델피아 치즈를 뿌려주는 이 음식은 1인분이면 2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양도 많고, 짜지 않으면서도 치즈 고유의 풍미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아했다. 우리는 모두 캘리포니아에서도 맛이 이 정도인데 필라델피아 현지에서는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 라는 소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뉴욕을 출발해서 필라델피아까지 142마일(227)을 달렸다. 거센 비는 천천히 달리라고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누군가 곡진하고 집요하게 이야기할 때는 듣는 것이 현명하다. 더구나 안전과 상관되는 일은 고집 피울 일이 아니었다. 달리는 내내 사만다의 음성이 다급했는데 지금껏 달렸던 길들과는 달리 시내 주행이 많았기 때문이다. 힘들게 고속도로에 올라선 후에도 자주 길을 바꾸어야 했다. 달린 주요 고속도로들은 I-78, I-95 S, I-276 W였다. 도로명 뒤에 SW가 붙는 것을 보니 우리는 남쪽과 서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만다에 의지해서 달리다보면 내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방향감과 거리감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낯설고 비까지 내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바깥세계와는 단절된 차 안의 작은 세계 안에만 머무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내리는 비 때문인지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내가 졸까봐 뒷좌석에서 룸미러에 비치는 내 눈을 보고 있었다. 힘겹게 빗물을 밀어내는 와이퍼가 지나간 부분을 제외하고는 밖이 잘 보이질 않았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음악도 틀지 않고 있으니 마치 고요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아주 비현실적이고 고립된 것이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점심때였다. 배고픔은 얼마나 규칙적이고 무조건적인가? 다행히 휴게소에는 먹을 만한 새로운 음식들이 많았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이탈리아 음식이었는데 여전히 양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짜지 않아서 좋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출발을 하려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묘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백발의 노인이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소변을 보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진 청바지와 멜빵은 절묘하게 축축한 바닥에 닿지 않았다. 하얀 피부의 엉덩이와 상체에 비해서 턱없이 빈약한 다리가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누구도 그 노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놀라서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소변기 사용 순서도 가르치는 나라이고 보니 내 행동은 무례하거나 불쾌한 것일 수 있어서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매우 강렬한 이미지였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무척 탄탄했을 상체와 여위고 빈약한 하체의 부조화는 처연했다. 젊은 날의 노동을 견실하게 수행했을 그의 상체와 이제는 새로운 삶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도 빈약해진 다리, 그 부조화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쓸쓸했다. 그것은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UP>에서 칼과 앨리가 평생 모험을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앨리가 죽고 나서 칼이 앨범을 통해 추억하는 장면처럼 쓸쓸하고 슬퍼보였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

작은 우비를 입고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으로 가는 아내와 아이들

비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하고 나서도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숙소는 외곽에 잡아두었기 때문에 먼저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로 먼저 갔다. 주소대로 입력을 했는데 사만다가 데려간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차를 세우고 물어보니 한 블록 너머에 있었다. 밖에서 보니 주차가 마땅할 것 같지 않아서 동전으로 주차가 가능한 곳에 일단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비가 너무 거셌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서 우산을 살까 고민하다가 솔이네가 귀국하면서 주고 간 우비를 가져온 것이 생각나서 그것을 우선 쓰기로 했다. 내 것은 정상이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의 것은 모두 많이 작았다. 결국 둘러쓰고 뛰기로 했다. 어린 시절처럼 물첨벙을 하면서 한참을 달려오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아내 우비 뒤에 그려진 미키마우스의 눈이 없었다. 모두 함께 깔깔대며 물첨벙을 하면서 안내도를 받으러 인디펜던스 비지터 센터로 갔다. 폭우 때문에 거리에는 빗물이 도랑처럼 흐르고 있었는데, 물이 맑았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는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 자유의 종이 보관된 리버티 벨 센터(Liberty Bell Center), 미국 최초의 국회의사당(Congress Hall), 올드시티 홀(Old City Hall)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지터 센터가 있는 파크는 무척 고즈넉했다. 파크 자체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파크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과 오고가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전체 지도와 인디펜던스 홀 내부를 둘러보는 투어 티켓을 받았다. 투어를 참가하기 위해 인디펜던스 홀을 찾아가니 아까 주차하고 걸어왔던 그곳이다. 다시 우비를 뒤집어쓰고 아주 궁색한 모습으로 온 길을 되돌아갔다.

미국 최초 의사당 전경

의사당에 딸린 양탄자는 7개 주를 상징

20분쯤 밖에서 기다리니 투어가 시작되었다. 인디펜던스 홀로 들어가 앉아서 해설사의 설명을 20분쯤 들었다. 워낙 빠르게 설명을 하니 들리는 소리보다 놓치는 소리가 많았다. 들리지 않는 부분은 유진이가 대신 들려주었다. 그나마 미국 역사를 미리 조금 파악해두고 간 것이 다행이었다.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회의를 하고, 건국 이후에 상원이 열렸던 최초의 국회의사당에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책상과 의자, 책상마다 놓여 있는 깃털 펜, 촛대, 책자, 서류들을 창으로 들어온 빛이 제한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연출처럼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에 제한적인 조명은 몰입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중간 중간 효진이는 제가 아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학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라며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주었다. 보스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는 책 속의 역사가 현장의 역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식으로서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할 텐데, 아직 효진이의 역사는 지식에 머물러 있다. 아직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역사를 배운 것이 앞으로 우리 역사를 배우는데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했다. 귀국하면 곧바로 한국 역사를 배울 텐데 효진이는 어떻게 두 나라의 역사를 비교하고 이해하게 될지도 기대가 된다. 효진이가 자신이 아는 것을 자꾸 이야기 하니까, 유진이는 그건 미국 역사라고 면박을 준다. 조금 컸다고 우리나라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둘이 그러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현재를 보면서 역사를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몇몇 건물들은 보수중인지 가림막을 설치했는데, 가림막이 아주 멋스러웠다. 보수하는 건물의 원래 모습을 가림막에 흐리게 인쇄해 둔 것이다. 두드러지게 해서 현재 건물의 보이는 부분을 압도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건물 앞으로 워싱턴 동상과 존경 받는 대통령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보도에 박혀 있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수많은 이해가 상충하고, 수많은 가치관이 충돌하는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전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미국과 같이 합중국의 형태를 이룬 나라에서 대통령이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라면 그는 정말 존경받을만한 인물일 것이다. 미국에 와서 보니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대표적인 인물들이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이다. 조지 워싱턴의 탄생일을 기념하며 시작된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s Day)까지 있고, 가는 곳마다 링컨과 관련된 기념관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과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겠다. 조지 워싱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링컨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판 위에 가서 서 있었다. 사진을 찍어주면서 우리나라에도 존경할만한 대통령이 많이 나와서 아이들이 그들을 기리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보수중인 건물의 가림막멋스러운 배려.

필라델피아는 유서 깊은 도시여서 그런지, 돌아보니 곳곳에 동상이 있다. 그 앞에서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제대로 공을 들여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님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동상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바 있다. 동상은 사람들 앞에 우뚝 강건하게 서서 다른 의문이나 반론을 일시에 침묵시키는 힘을 가졌다. 사람들은 동상을 세움으로써 동상 속 인물의 의지와 뜻을 계승하려하고, 그 외의 다른 의견과 문제는 일체 허용하려 들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반성하지 않는 동상의 의지와 뜻은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린 역사와 현실 속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동상의 뒤쪽을 찍으면서 그 어색한 강건함을 생각했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를 둘러보며 다양한 곳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그들의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공사 가림막 뿐만 아니라 화장실 푯말 하나에서도 자신들의 유서 깊은 전통을 드러냄으로써, 장소성을 최대한 살리는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 쪽으로 다시 이동해서 자유의 종(The Liberty Bell)을 보았다. 깨진 부분이 선명한 자유의 종은 묘하게 동상과 대비를 이루었다. 미국독립선언이 공포될 때 쳤다는 이 종은 노예해방론자들에 의해 자유의 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균열이 생겨서 사용하지 않고 전시만 해두었다는데, 가서보니 깨진 금이 선명했다. 자유와 평등을 상징했던 이 종의 균열은 현재 미국의 모습과 상관하여 좋은 유추를 제공했다. 현재적 의미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실체와 그 결과,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보이는 미국의 자유와 평등은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물론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도 분명했다.

자유의 종 엑스레이

멋스러운 여자 화장실 표시

도네이션함

1954년 자유의 종 앞에서 선 어린이 합창단

자유의 종을 보러 간 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954년 인디펜던스 홀에서 공연을 하고 자유의 종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모습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유엔군 위문공연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이 합창단은 휴전이 되자 미국에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무려 4개월 동안 42개 도시를 돌면서 공연을 했는데, 미국 내에서도 화제를 불러 모으면서 4,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족끼리 전쟁을 하면서 다른 나라 군대를 위로하기 위해 어린이를 동원했다는 사실과 전쟁 후에는 남의 나라에 경제 원조를 부탁하러 어린이들을 앞세워야 했던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어린 아이들 옆으로 서 있는 군복을 입은 어른들의 모습에서 그 참혹했던 시기를 건너려했던 눈물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사진이 비록 자랑으로 내세울 것은 아닐지 몰라도 부끄러워하며 숨길 것도 아니었다. 참담한 현실 앞에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려했던 시도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반복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렀는데 눈길 가는 것이 많았다. 독립전쟁, 자유의 종은 물론 미군과 상관된 다양한 상품들도 등장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점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자신들이 가진 원천 소스를 아주 매력적으로 상품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소비해줄 방문객 수에 따라서 기념품의 종류, , 가격이 결정된 것일 테지만, 그 다양성과 품질이 놀라웠다. 기념품점에서 독립전쟁 당시 복식으로 구현한 체스세트를 보았는데, 부피에 대한 부담만 없었다면 구입하고 싶은 것이었다. 뉴욕에서 관람한 해리포터전시회 기념품점에서 본 체스세트는 해리포터-마법사의 돌에 등장했던 체스세트를 그대로 만든 것인데, 무려 500달러나 했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오늘 본 이 체스세트는 가격도 훨씬 싸고 부피도 적어서 몹시 고민을 하다가 내려놓았다. 얼바인까지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다시 귀국할 때 안전하게 가져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양한 기념품들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체스세트

기념품점을 돌아보며 팬시화된 역사를 생각했다. 분명 이곳에서 팔리는 기념품들은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라기보다는 역사를 소비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역사적인 맥락을 소거한 소품으로서 역사를 활용하고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를 통해 관심을 지속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관람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모두들 기대하고 있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로 유명하다는 집을 사만다에 입력하고 출발을 했다. 필라델피아의 멋스러운 시가지를 두루두루 돌아서 찾아갔는데, 그곳에 없다. 주소는 맞는데 샌드위치집이 없다. 허탈해서 주변을 찾다가 포기하고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풀고, 프런트에 물어서 찾아보기로 했다. 숙소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멀었다. 가는 길에 길을 잃어버려 돌다가 어느 주택가로 들어섰다. 똑같이 생긴 작고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집 앞 계단에는 흑인들이 나와 앉아 있었다. 한참을 헤매느라 그 주택가를 돌았는데 백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필라델피아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노예가 아닌 흑인들이 자유를 찾아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흑인들이 많다고 한다.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온전한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머무는 인디언을 생각했다. 자신들의 땅에서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내몰린 인디언들은 미국의 영원한 타자처럼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것은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결콘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더블어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불평등과 부자유가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소외가 분명한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은 소외당한 사람의 몫이라기보다는 소외시킨 사람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소외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흑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고 프런트에 문의했는데, 다시 필라델피아 시내로 들어가야 한단다. 숙소로 오는 길에 바비큐라는 간판을 본 것이 기억나서, 미국 와서 제대로 된 바비큐를 먹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먹어보자고 했다. 이미 모두들 배가 고픈 상태여서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집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각주:1]라는 바비큐 집이었는데, (rib)이 유명하다고 했다.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이 집은 서부에는 없고 동부에만 있단다. 식당 분위기도 밝고 활기찼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데 양도 넉넉하여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Famous Dave's BBQ 음식들

이것저것 맛을 보자고 몇 가지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큰 쟁반에 여러 음식이 함께 나오는 콤보를 먹고 있었다. 쟁반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음식의 양이 대단했다. 저것을 시킬 것을 잘못했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짜서 고생한 버팔로 윙을 제외하고는 음식 맛이 좋은 곳이었다. 특히 립이 왜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직접 구운 옥수수 머핀도 맛이 있었다. 립은 1인분이 12조각이었는데 둘이 먹으면 적당할 양이었다. 프렌치프라이와 머핀도 싸서 숙소로 가져올 정도로 많았다. 음식의 절대량도 많고, 많이 먹고, 즐겨 먹으니 미국인들은 뚱뚱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오늘 아침 뉴욕에서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씻지 못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 후드로 적당히 가리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여행이 아이들을 털털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살다보면 상황에 따라서 늘 따뜻한 물에 정갈한 욕실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스스로 적응하거나 견디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할 때, 견디는 선택지를 하나 더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이들이 이번 여행을 통해서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가족이 함께 낯선 곳을 여행했다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여행의 체험이 아이들에게 무엇이 될지는 그 다음 문제고, 의도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고, 서로 의지하며 낯선 곳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워싱턴으로 갈 것이다. 알 수 없는 기대로 설레는 밤이다.

  1. 나중에 얼바인에 돌아와서 우연한 기회에 롱비치에 있는 이 집을 발견했다. 동부에만 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였지만, 그 덕분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서부에서 발견했을 때에는 그 기쁨이 더 컸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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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is not Free

815일 필라델피아워싱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필라델피아는 우리에게 비로 기억되고 싶은가보다. 숙소를 나서는 동안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많은 양의 비는 아니었지만 워싱턴 근처까지 오락가락하며 우리 뒤를 따라왔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말이 별로 없었다. 어제 비를 맞아서 피곤한 것인지, 워싱턴 일정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서 지난 3주 동안 미뤄놓은 일들을 몰아서 해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몰라도 모두들 조용했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나니 노곤했다. 포만감 때문인지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졸렸다. 할 수 없이 휴게소에서 커피를 사가지고 차에 올랐는데도 졸음은 좀처럼 달아나지 않았다. 결국 휴게소에서 30분쯤 눈을 붙이고 떠나야 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의식과 행동은 낯선 시공간에 기민하게 적응해갔지만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나보다.

워싱턴에서의 숙소는 메릴랜드 쪽에 잡았기 때문에 워싱턴으로 먼저 가서 시내를 둘러보고 나중에 숙소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워싱턴 근처에 왔을 때 비는 그쳤다. 워싱턴에서 맨 처음 찾은 곳은 미국 국회의사당(United State Capitol)이었다.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18대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의 동상 부근 주차장에 여유가 있어서 차를 댔다.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

율리시즈 그랜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 동상 좌우로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을 기리는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청동의 힘도 당당하게 말 위에 앉아 있는 그랜트 장군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남북전쟁 당시 비극의 현장에 있던 병사들의 모습이 보다 생생하게 서 있었다. 그 생생함은 박물관에서 만나는 박제의 복원된 힘줄이 보여주는 가소로움이 아니라 비극의 현장을 소환하는 힘, 바로 그것이었다. 한참을 병사들을 바라보다 그랜트 장군을 본다. 알코올 중독으로 군에서 제대하고 두 번의 사업 실패로 그토록 자신이 버리고 싶어 하던 가업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던 그랜트에게 남북전쟁은 하나의 기회였단다. 그는 군대로 복귀하여 눈부신 전과를 올리고 마침내 로버트 리 남군사령관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남북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사람이다. 알코올중독자로 군에서 쫓겨나고 두 번의 사업 실패를 연속할 때 누가 그를 영웅으로 보았겠는가? 알코올중독자에게서 북군 사령관의 가능성을 찾아낸 링컨의 밝은 눈도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지도자란 흐림 없는 눈[각주:1]으로 그런 인재를 찾아내고 사심 없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동상 앞쪽으로 캐피톨 리플렉팅 풀(Capitol Reflecting Pool)이 있었고, 그 앞으로 멀리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이 보였다. 지도에 따르면 그 너머로 다시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이 있고 그 너머에 링컨기념관이 있고, 그 뒤로 포토맥 강이 흐르고 있다. 소위 내셔널 몰(The National Mall)이라는 거대한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 끝에는 국회의사당, 중간에는 워싱턴 기념탑, 서쪽 끝에는 링컨기념관이 마주 보고 있었다. 국회의사당과 링컨기념관 사이가 직선거리로 3쯤 되는데, 그 중간에 국립미술관, 국립 자연사 박물관, 미국 역사박물관, 라틴아메리카 근대미술관, 베트남 참전 용사비,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공원, 항공우주박물관, 허시혼 미술관, 스미소니언 본부 등이 모여 있는 구조였다.

미국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에서 바라본 내셔널 몰과 워싱턴 기념탑

여행안내 책자에 국회의사당은 캐피틀 힐(Capital Hill)에 세워졌다는데 근처에 언덕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와서 직접 보니 정말 언덕은 없고 국회의사당이 자그마한 언덕 크기로 서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한가한 주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의회가 열리는 기간이 아니면 개방을 하고 무료 투어가 진행된다는데, 거기에 참가하려면 아침 9시부터 나누어주는 티켓을 교부받아야 한단다. 이미 시간이 늦어서 투어는 불가능했고, 국회의사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국회의사당 뒤로 최고재판소, 국회도서관, 셰익스피어 도서관 등이 있다는데, 직접 가보지 못했다. 테러에 대한 공포로 국민들은 떨게 만들어 놓은 나라의 국회의사당 주변의 경계는 의외로 단출했다. 무장한 경관 한 명이 의사당 계단 부근 그늘에 무료한 듯 기대어 있었고, 순찰차들만 한가롭게 오가고 있었다.

미국 국회 의사당은 웅장한 규모나 건물의 미학보다 그 앞에서 자유롭게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으로 더욱 빛났다. 보이는 곳에서는 적어도 삼엄한 경계 따위는 없었다. 사진들을 찍고 무장한 경관에게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면서 아주 천천히 즐기는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도 사진을 찍고 아이들에게 미국의 상하양원제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화장실을 찾았다. 횡단여행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화장실을 찾는 것이다. 가장 쉽게 이용하는 것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거기 있는 편의점 안에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인데, 근처에 주유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침 순찰차 주변에 경관들이 있기에 물었더니 근처 워싱턴 식물원(U. S Botanic Garden)에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단다. 식물원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규모가 컸다. 1840년대 열대식물을 채집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워싱턴 식물원은 약 12,000 여종의 식물이 있다고 한다. 사실 팸플릿에 12,000여종이라고 하니까 아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 눈에는 꽃이나 모양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몇몇 식물을 제외하고는 잘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은 라운지를 지나서 식물원 깊은 곳에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본 화장실 중에 가장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중앙에 라운지를 중심으로 사막식물, 약용식물, 하와이의 식물, 아이들의 정원, 원시 정원, 난초들 등이 테마별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식물원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서 무척 여유롭게 둘러보고 나올 수 있었다.

국회의사당 북쪽 주차장

국회의사당 북쪽 주차장옆 길거리의 동전주차기

차를 다시 빼서 국립 자연사 박물관(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쪽으로 가보니 길가에 주차를 할 수 있었는데 빈 자리가 없었다. 주변에서 주차할 장소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다시 국회의사당 쪽으로 와서 캐피톨 리플렉팅 풀 북쪽에 주차를 했다. 국회의사당 앞 캐피톨 리플렉팅 풀의 남쪽과 북쪽으로 주차 공간들이 있었는데, 처음에 주차한 곳은 남쪽이었고, 이번에 주차한 곳은 북쪽 주차장이었다. 길 건너편 박물관들이 모여 있는 곳은 주차할 장소가 없는데, 그나마 이쪽은 주차공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주차하고 국립 자연사 박물관을 보러 갔다.[각주:2]

국립자연사박물관 전경

뉴욕에서 미국 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을 보면서 다소 실망했었다. 워싱턴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규모 면에서는 뉴욕에 비해서 떨어지지만 전시 방식이나 동선 전략 등은 오히려 돋보이는 곳이었다. 많이 보여주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 사례였다. 특히 유사 테마의 연계가 돋보였는데, 가령 포유류, 조류, 어류, 공룡, 인류까지 모두 뼈(bone)로 연결하는 것은 같음다름의 연속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곳곳에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감으로써 관람의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자연 속의 동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도 무척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이 동물들에게서 표현되는 장면을 극적으로 포착한 사진들이었다. 저 순간을 찍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하고 기다렸을지 생각해보면, 사진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지독한 인내임에 틀림이 없다.

이곳에는 도자기 등 200여점이 전시된 한국관이 있었는데 전시된 물품이나 전략 면에서 많이 아쉬운 전시였다. 이번 여행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보면 항상 중국과 일본 전시물은 규모 면에서나 전시된 작품 면에서도 일정 규모와 수준 이상이었다. 반면 한국관은 그렇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던 터에 이곳은 그나마 제대로 된 한국관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왔었는데, 규모만 조금 커졌을 뿐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도통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처럼 콘셉트가 없었다. 30평 정도의 크기에 200여점의 전시물 규모라면 보다 미시적으로 전략화된 콘셉트가 필요했다. 한국 문화를 맨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곳에 지금 전시된 것 같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모호하고 난해하다. 한글과 세종대왕 사진만을 걸어놓고, ‘한글은 한국문화의 자랑이라는 설명이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관람객의 입장과 수준에 맞는 전시물의 구성과 설명이 많이 아쉬운 전시였다.

박물관에서 그림 그리던 청년

관람을 마치고 나오다가 2층 난간에 기대에 노트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청년을 보았다. 목에는 카메라를 걸고 노트에 그림 그리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이 신선해서 옆에서 보다가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으니 흔연히 그러란다. 박물관을 즐기는 나름의 여유가 부러웠다. 박물관 밖에서 박물관을 그리고 있는 두어 명의 사람들을 더 보았는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박물관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신선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2>(Night At The Museum 2: Battle Of The Smithsonian, 2009)의 배경으로 요즘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배경이 가장 구체적인 물건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박물관이라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확실히 뉴욕의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비하여 몰입도가 좋은 것은 분명했다. 전시 콘셉트나 동선 통제 등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탓이겠지만,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 걸으며 느껴지는 주변의 분위기도 상당히 작용했으리라. 내셔널 몰 주변을 따라 늘어선 미술관, 박물관과 끝없이 이어진 잔디밭 안에서 눕거나 앉아서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관람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눈앞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건너왔을 시간이 좀처럼 가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몸 안에 그 시간들을 오롯이 기록하고 있을 전시물들은 깊고 서늘해 보일 뿐이었다. 적막한 시간을 홀로 견디다 누군가 눈 밝은 이의 섬세한 손길로 살아나 이곳에 모여 있는 그것들 앞에 우리가 건너고 있는 일상의 시간은 고작 한 줌일 뿐이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 관람을 마치자 6시가 다 되어 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6시면 예외 없이 문을 닫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내셔널 몰에는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근처에 있다는 백악관(White House)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전에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박물관 앞 잔디밭 쪽으로 작은 가판대에서 핫도그와 샌드위치를 팔았다. 그것으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는데, 그곳도 문 닫을 시간인지 직원들이 마감 분위기였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고 음식의 질도 엉망이었다.

사만다가 몇 번을 헤매는 바람에 우리는 프리덤 플라자(Freedom Plaza) 주변에 주차를 하고 걸어갔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 여유만 있다면 걷는 것이 가장 좋은 여행이다. 차로 갈 때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둘러보고 싶은 것을 모두 둘러보면서 걸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워싱턴은 계획된 도시답게 번잡스럽지 않고 가지런했다.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았고, 화려했지만 격조가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건물들을 원형으로 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당당하고 굳건해보였다. 강건한 석재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건물은 지나온 시간의 변화를 조금도 느낄 수 없어서 오히려 차가워 보였다.

백악관은 200년 간 미국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어 왔다는데, 겉보기에는 생각보다 규모도 작고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지붕 위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사방을 살피는 저격수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주변 경계가 허술해 보이니 아내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백악관을 돌아보는 투어가 있다는데 알아보니 6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단다. 백악관 정면에 철책 앞까지는 접근이 가능했는데 그 앞에는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조금 있었고, 그 앞으로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시위 텐트가 보였다. 그 텐트는 작고 남루했는데 주변에 구호만 적혀 있을 뿐이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년째 그러고 있고 당국에서도 내버려두는 모양이었다. 백악관 앞에서 저렇게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그대로 두고 있는 당국이나 둘 다 참 대단하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며, 길 건너 라파예트 스퀘어 쪽으로 건너갔다. 백악관 앞쪽에서 차량을 통제했기 때문에 도로 위에는 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삼각대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백악관 지붕위의 스나이퍼

라파예트 동상

미국 역대 대통령 피규어. 워싱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소품

라파예트 스퀘어(Lafayette Square)는 백악관 정면 길 건너에 있는 광장이다. 이곳에는 미국 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각주:3]의 동상과 독립전쟁 당시 활약한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fayette)[각주:4]과 장군들의 동상이 서 있다. 앤드류 잭슨이나 라파예트 후작이나 모두 전쟁영웅이었고 당시로서는 다소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는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21세기 백악관의 정책을 보면서 이 두 인물은 어떤 대화를 나눌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라파에트 스퀘어에는 한가롭게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서 독서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권위나 특별함 대신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드려야지 가능할 풍경이었다.

백악관 주변에 있는 선물가게에서는 역대 대통령과 백악관이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대통령 관련 상품은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일부는 역대 대통령의 허위나 위선을 풍자하는 재임 시절의 돌발영상이었다. 아기가 클린턴 양복에 토하는 장면, 아버지 부시가 사랑스럽게 아기를 안았다가 사진 촬영이 끝나자 매몰차게 아이를 밀어내는 모습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대통령과 백악관 관련 상품으로만 기념품 가게 하나를 만들 정도로 상품 종류가 많았다. 미국인들은 대중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의 이미지를 상품화하고 소비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권위의 옹벽 안에서 지나치게 신비화된 이미지보다는 실수 가능한 인간적인 이미지가 대통령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저녁 8시가 다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서둘러서 링컨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워싱턴 시내 어디서나 보인다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은 돌아다니면서 보니 정말 어디서나 보였다. 워싱턴 기념탑은 말 그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기 위해 37년 만에 완성한 169m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조구조물이다. 워싱턴에서는 이 탑보다 높게 짓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정말 고층빌딩이 보이질 않았다. 워싱턴 기념탑 앞에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이 있어서 조명을 밝힌 모습으로 물 위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리플렉팅 풀이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은 해질 무렵이 아름답다는 말에 느지막이 찾아간 것이다. 택시기사에게 물어서 다행히 주차를 하고, 걸어서 링컨기념관으로 갔다. 세그웨이를 타고 링컨기념관 주변을 돌아보는 투어팀들이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거기에 참가하고 싶어서 물어보니 가격도 비싸고, 효진이는 어려서 안 된단다. 아쉬워하며 링컨기념관 위로 올라갔다. 날이 흐려서 그 유명한 석양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하늘은 코발트빛으로 가득했다. 오늘 돌아본 여러 군데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아마 그들도 우리처럼 해질 무렵에 이곳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나보다. 링컨 좌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옆에 있던 한국 학생들이 사진을 찍어 달랜다. 사진을 찍어주며 물어보니 방학을 이용해서 어학연수 온 학생들이었다. 어학연수를 나가 있을 우리과 학생들이 문득 보고 싶었다.

링컨기념관 전경

링컨기념관에서 본 공사 중인 리플렉팅 풀

링컨기념관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원형으로 한 건물로 링컨 암살 당시 연방 36개 주를 상징하는 도리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링컨 기념관 중앙에 링컨의 거대한 좌상이 있고 그 뒤로 는 아브라함 링컨의 명성은 그에 의해 구원된 미국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각주:5]라고 새겨져 있다. 좌상 양쪽으로 게티즈버그 연설과 취임연설이 조각되어 있었다. 링컨 기념관은 규모에 비해 콘텐츠가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내뿜은 아우라만은 대단했다. 특히 내셔널 몰의 큰 구조 안에서 국회의사당-워싱턴기념탑-링컨기념관으로 이어지는 상징성은 뚜렷했다. 현재의 국회의사당을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과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이 지켜보고 있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링컨 기념관 남쪽으로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 공원이 있고, 북쪽으로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물 그리고 워싱턴 기념탑 쪽으로 제2차 세계대전 국립기념물(National World War II Memorial)이 있는데, 이것은 미국이 나라 밖에서 치른 대표적인 전쟁들이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공간의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구석이다.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도 바로 이 링컨기념관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곳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했던 장소라고서 알려주고 있었다. 아브라함 링컨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10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에 대한 단단한 결의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워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관 사이에 있어야 할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이 공사 중이었다는 것이다. 리풀렉팅 풀의 인공수조가 새서 물을 비워내고 다시 수조를 만들고 있단다.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에서 제니가 검프를 부르며 건너오던 그 리플렉팅 풀의 아름다운 영상을 기대했던 우리로서는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워싱턴기념탑과 링컨기념관의 야경이 비춰져야 할 곳에는 흙바닥을 드러낸 황량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공사 중인 리플렉팅 풀은 지금 밖에 볼 수 없는 모습이니 우리가 행운 아닌가? 리플렉팅 풀 주변으로 가보니 물이 새서 다시 풀을 만들고 있고 곧 개관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8시가 넘어서고 주변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서 한국전쟁 추모 공원(Korean War Veterans)으로 갔다. 여행을 떠나면서 유진이가 워싱턴에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첫 번째로 꼽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유진이는 미국에 와서 특히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히 느끼는 듯했다.

한국 전쟁 추모 공원에 있는 19인의 병사들 조형물

어둠은 모든 색과 형태를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소리만은 더욱 또렷하게 돌려주었다. 소리가 고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수색대처럼 보이는 19명의 병사들이 판초우의를 입고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 앞에 모여 있었다. 19명의 표정과 동작은 모두 제 각각이었지만 공포와 분노와 결의가 느껴지는 조형물이었다. 어둠과 함께 조형물에 모이는 부분조명은 그 절실한 순간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옆의 검은 벽에는 한국전쟁과 상관된 얼굴들을 검은 돌 위에 새겨 놓고 있었는데 오래된 영상을 보는 듯한 아련함이 느껴졌다. 조형물 앞쪽으로는 한국전쟁의 피해 및 희생 규모를 새겨둔 또 다른 조형물이 아프게 서 있었다. 전쟁 중인 병사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을 보고, 얼굴만 새겨 둔 벽을 지나서 객관적인 수치로 전쟁을 보고하고 있는 조형물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 참혹함은 ‘Freedom is not Free’라는 단호한 문구 앞에서도 결의로 바뀌지 못하고 여전히 참혹할 뿐이었다. 그 참혹함은 19명의 병사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던 생명의 긴장과 공포와 연관된 것이면서 동시에 아직도 그러한 긴장과 공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현실과도 관계된 것이었다. 연구년을 떠나오기 얼마 전 벌어졌던 연평도 포격 사건이 생각났다. 일방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과 공포가 쏟아졌을 그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곳이라는 사실이 상기됐기 때문이다.

Freedom is not Free.

최근 몇 년간을 상기해볼 때, ‘Freedom is not Free’는 두려운 단언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벌여온 전쟁은 자유라는 이름의 복수였고, 자유라는 명분의 침략에 가까웠다.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하겠다고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의 무력한 죽음을 보아야 했다.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장의 이면에는 아직이라는 의미가 강력하게 내재해 있다. 아직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명백한 현실을 나는 어처구니없이 한국전쟁 추모공원에서 읽고 있었다.한국전쟁 추모공원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너무 어두웠다. 워낙에 사진을 잘 찍지 못하는 내게 빛까지 부족하니 촬영이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내일 다시 와서 추가로 촬영하기로 하고 나오면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흐리고 어두운 상태가 전몰의 비극성과 참혹한 분위기를 극대화시켜주고 있었다. 지우려던 사진을 그대로 두었다. 사진의 선명함 보다 그 비극성과 참혹함을 살리기로 했다.

수도로서 워싱턴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 무척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뉴욕과는 품격이 다르고,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내셔널 몰 양쪽으로 모여 있는 각종 박물관과 미술관의 풍요로움과 그것을 무료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더없이 부러웠지만 그 안쪽 잔디에서 즐기거나 주변을 조깅하는 사람들의 평화와 여유가 더 부러웠다. 오늘 돌아본 것만 가지고 이 도시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자부와 자긍의 면모는 볼 수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깨끗하고 격조 있는 도시에서 미국의 난폭함이나 일방주의가 기획된다는 점이었다.

내셔널 몰 주변

주차가 어려운 워싱턴에서 정답은 자전거

내셔널 몰 잔디밭에서의 휴식

여행이 막바지로 향할수록 더 보겠다는 욕심 때문인지 워싱턴에서의 일정은 늦게 끝났다. 메릴랜드에 잡아둔 숙소까지는 조금 멀었다. 이제 누구도 사만다가 한 번에 숙소까지 데려다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사만다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숙소 주변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결국 표지판을 보고 찾고 있으려니 슬며시 사만다가 숙소 앞에 데려다 주었다. 사만다는 심심한가본데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는 지친다. 숙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깨끗하고 편했다. 유명한 곳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같은 가격에 청결하고 안락한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법칙은 오늘도 예외가 없었다. 버려야 얻는다는 변함없는 이치는 이곳에서도 옳았다.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대사의 한 구절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초속 5Cm>에 나오는 ‘올곧은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다. [본문으로]
  2.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주차한 이곳은 허가받은 차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음날 주차 표지판에 적힌 것을 보았는데, 주차할 때만 해도 이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그웨이를 타고 다니며 불법주차 단속을 하던 경관들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용감하게 두 번이나 불법주차를 한 것이다. 정말 모르면 용감하거나 무모해진다. [본문으로]
  3.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최초의 서부출신에 평민 출신 대통령으로 2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실린 인물이다.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대파하고, 세미놀 전쟁에서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플로리다를 침공하여 승리하는 등 전쟁 영웅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서부개척정신을 강조하고, 재산유무에 따라 주어지던 참정권을 확대했으며, 일부 특권층의 전횡을 막기 노력했다. ‘눈물의 길’과 1․2차 세미놀 전쟁을 통하여 무자비하게 인디언을 탄압하고 학살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4. 라파예트 후작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조지 워싱턴 장군을 도와 요크 전투 등의 승리를 이끌었고, 귀국해서는 루이 16세 정부를 설득하여 프랑스군 파병에 기여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로 돌아가 종교의 자유와 노예무역폐지를 주장했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을 작성하는 등 프랑스혁명 초기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와 똑같은 급으로 조의를 표하고 국장으로 치르게 할 정도로 미국인들의 그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본문으로]
  5. In this temple as in the hearts of the people for whom he saved the union the memory of Abraham Lincoln is enshrined forever.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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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816일 워싱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피곤한 효진이는 아침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침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겠는지 따라나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려서는 이런 상황에 칭얼거리고 울다가 아내나 나에게 안겨서 숙소를 나왔을 것인데, 이제 컸다고 군말이 없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큰다. 횡단을 하는 동안에도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이 언뜻언뜻 보인다. 유진이는 이제 아내와 키를 재지 않는다. 유진이가 더 크기 때문이다. 크면서 부지런히 아내와 키를 견주더니 이제 슬쩍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아내는 최근까지 자신이 더 크다고 우기더니 요즘은 저항을 포기한 모양이다. 효진이도 제법 많이 컸지만 아직은 기둥에서 키를 잰다. 아버지 댁에 가면 기둥에 붙어 있는 기린 그림 위에 아버지가 키를 재고 표시해주시는데, 이곳에 와서도 효진이는 그렇게 재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댁에는 오남매의 아이들 키와 그것을 잰 날짜가 기린 그림 위에 가득한데, 그 중 유진이와 효진이 것이 가장 많고 촘촘하다.

맑은 날 아침의 워싱턴은 어제보다 선명했다. 숙소에서 워싱턴으로 오면서 본 주택가는 조용했지만 오고가는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보아야할 곳은 워싱턴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닐까? 출근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으로 향하는 자동차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워싱턴은 어제와는 다른 도시였다. 분주하게 오고가는 사람들과 수많은 자동차들이 어디서 일시에 쏟아져 나온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포드극장 쪽으로 갈수록 차들은 한산한 편이었다. 걱정했던 주차도 인근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편리했다.

포드극장 전경

포드극장(Ford's Theater)1865년 링컨대통령이 저격당했던 장소다. 포드극장은 9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먼저 극장 안에서 입장 가능한 시간의 입장권을 받아야 했다. 입장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어서 입구에 기념품점을 먼저 둘러보았다. 작은 규모의 기념품점에는 링컨과 남북전쟁 관련 상품들이 팔리고 있었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줄을 서서 15분쯤 기다리니 입장 시켜주었다.

포드극장은 저격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입장이 시작되면 지하의 링컨박물관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링컨과 남북전쟁의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링컨박물관 곳곳에는 링컨의 모습을 브론즈나 석상으로 세워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링컨의 암살범인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와 그의 일당들의 사진과 모의했던 장소, 저격 무기 등은 물론 링컨의 피 묻은 베개까지 전시되어 당시 참혹했던 그의 죽음을 흐트러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남북전쟁에 참가한 흑인병사들

박물관에서 극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저격 당일 링컨의 행적과 범인들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구성하여 서로 마주보게 전시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었다. 링컨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전시 중간 중간에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내력과 사건의 맥락을 짚어주고, 강조할 부분을 극적으로 재구함으로써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미국의 대부분의 박물관들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나 다큐멘터리로 대체하고 있었다. 링컨의 연설문이나 발언 중 감동적인 부분을 타이포그래피화해서 전시하고 있었고, 당시 흑인들의 비참했던 생활과 전쟁 중 활약상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전시물과 상호관련 되면서 매우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남북전쟁에 흑인병사들이 참전했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남북전쟁 이전에도 북군에는 흑인병사들이 있었다.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목숨 걸고 싸워야했던 흑인병사들의 처지는 월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인 병사의 월급이 14달러인데 반해 흑인병사의 월급은 7달러였다고 하니 북군 내에서조차 자유와 평등은 멀기만 했었나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링컨 암살범의 현상금이 50,000달러에 달했는데, 이 금액은 흑인 병사의 595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링컨을 저격한 권총

링컨에게 소지를 권했었다는 무기

링컨의 후두부를 쏘았다는 권총은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오히려 볼티모어에서의 암살계획이 드러난 이후 보좌진이 안전을 위해 권했다는 칼과 고글과 너클 등이 더 치명적으로 보였다. 암살범 일당들의 사진 등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설명이 없다면 당시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사진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인생의 질곡을 모두 잘 넘어와서 618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남북전쟁을 승리로 잘 이끌어온 링컨이 워싱턴 한 복판 극장에서 그것도 후두부에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면에서 저격을 당했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암살계획이 포착된 상황에서 2VIP석에 앉은 대통령의 후방이 그렇게 허술하게 열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2층에서 뛰어내려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것이나 숨어 있는 곳에 불을 질러 암살범을 죽게 했다는 것[각주:1]까지 링컨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링컨의 죽음에 대해서는 평행이론이나 테쿰세의 저주’(Curse of Tippecanoe)[각주:2] 등과 같은 말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링컨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는 무관하게 그에 대한 신화화는 더욱 강해져서 가는 곳마다 링컨을 추모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그가 죽음을 당했던 포드 극장을 2,500만 달러를 들여서 2009년 재개관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링컨을 기리며 그의 죽음을 상기하지만 그 진실은 아직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얼마나 섬뜩하고 냉정한 선언인가

링컨박물관에서 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선언적 예견은 분명 역사의 책무나 소명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나는 거기서 터무니없이 역사의 진실을 생각했다. 진실이 보장되지 않는 역사 앞에서의 책무와 소명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공소한 일일 텐가? 1980년대 대학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고민을 맥락 없이 링컨 기념관에서 다시 만난다. 크고 강한 이야기는 대부분 당위를 강조하지만, 삶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서 그렇게 클 수도, 강할 수도, 당위를 요구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링컨박물관에서 나오면 당시 저격이 벌어졌던 극장이다. 객석에 앉아서 안내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링컨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는 2층 오른쪽 VIP석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링컨이 저격당했던 1865414일은 로버트 리 장군이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종식된 지 닷새 후였다. 더구나 이날은 각료회의를 통하여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를 해제한 날이었다. 케네스 데이비스의 주장에 의하면, 링컨은 모든 이들에게 중용과 화해를 권유했고 온전한 재건계획을 세워 최소한의 보복과 처벌로 반역 주들을 다시 연방의 품으로 끌어들이려 했[각주:3]고 그것의 가시적인 노력이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 해제였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군이 4168백 명 전사했는데, 남북전쟁에서는 618천 명이 전사한 것만 보아도 그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인한 상흔의 깊이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링컨의 암살도 그러한 상흔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링컨은 관용과 화해로 상처를 보듬으려했는데 암살범은 보복과 암살로 그것을 파괴하려했던 것이다. 이것은 남북전쟁의 승자와 패자라는 확연한 입장 차이와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극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링컨이 암살당함으로써 남북의 각성을 이끌어 화해가 이루어져야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흑인에 대한 차별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곪다가[각주:4] 1950년대부터 흑인들의 저항과 개선의 노력[각주:5]이 본격화된다. 뚱뚱한 여자 안내인의 설명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극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포드극장 길 건너 맞은편에는 저격 다음날 아침 링컨이 죽음을 맞은 페터슨 하우스(Peterson's House)가 있다. 총격을 당한 링컨의 상태가 위중해서 병원으로 옮기지 못하고 임시로 옮긴 곳인데 그는 거기서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페터슨 하우스였다. 원래는 안을 둘러볼 수 있는데 현재 공사 중이라서 관람을 할 수는 없었다. 집 앞에 두른 무성의한 합판 담장의 색깔이 어울리지 않았고, 공사 중이어서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판 역시 무척 차갑게 보였다.

포드극장 앞 기념품 상점에서 만난 미국적인 기념품들

페터슨 하우스에서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대형 기념품점이 있었다. 포드극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일 테지만, 기념품의 콘셉트는 링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워싱턴과 미국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만큼 상품의 종류가 다양했는데 우리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매장이었다. 미국을 상징할 수 있는 것들, 미국 역사의 주요 장면들, 그와 관련된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것들, 미국의 애국자들과 영웅들 등등 보여주고 싶은 것보고 싶어 하는 것들사이에 절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내가 피규어를 모으고 있는 것을 잘 아는 아내는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하라고 했지만, 그것들의 미국중심적인 색채가 내게는 거슬렸다. 아이들만 기념엽서를 구입해서 나왔다.

다음으로 우리는 내셔널 몰에 있는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을 보러 갔다. 어제 주차를 했던 국회의사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면 되겠다 싶어서 차를 대고 보니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우리가 용감하게 주차했던 국회의사당 앞 주차장이 사실은 허가 받은 사람만 주차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용감하게 주차를 하고 다녔으니 혹시라도 어제 주차 위반 스티커라도 발부된 것 아닌가 슬쩍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를 다시 뽑아서 국립미술관을 비롯해서 내셔널 몰 주변을 다 돌았는데도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하나 발견한 곳은 주차기에 장애인 표시가 붙어 있었고, 동전만 받는 것이라서 포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인도 주차가 가능한 곳이었다. 다시 주변을 몇 바퀴를 돌다가 국립미술관에서 상당히 떨어진 교통국(Department of Transportation) 주변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최대 2시간밖에 주차가 안 되는 지역이었다. 관람하다가 중간에 나와서 시간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미술관은 내셔널 몰의 박물관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관은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고, 동관은 현대 작품 중심인데 규모는 서관이 몇 배 컸다. 규모면에서도 그동안 보아온 미술관과는 달랐다. 내셔널 몰 주변의 수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경은 차분한 압도였다. 규모로 보면 웅장했지만, 웅장하다고만 하기에는 친숙했고, 친숙하다고만 하기에는 웅장한 모습으로 차분히 압도해왔다. 사실 미술관은 어디를 가나 실망이 없다. 작품이 적으면 적은대로 느긋하게 볼 수 있어서 좋고, 많으면 말 그대로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 돌아본 미술관들은 대부분 미술관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미술관 주변부터 미술관 건물 그리고 동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구조까지 늘 제한된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런 마음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데, 다만 아이들이 미술관에서 유독 빨리 지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국립미술관 전경

국립미술관의 규모와 3만점의 소장품을 오늘 다 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라고 생각하고, 서관부터 보기로 했다. 게다가 주차 시간의 제한이 있으니 보다가 내가 나가서 시간을 연장할 수 있으면 하고, 그렇지 못하면 볼 수 있을 만큼만 보기로 했다.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중세부터의 종교화들에게서 보는 눈이 어두운 나는 큰 감동을 얻지 못했다. 모든 예술이 학습을 통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미술사의 앞부분을 좀 더 차분히 읽어두었다면 또 다른 감흥을 얻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국립미술관은 공간을 넉넉하게 활용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다양한 시점과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실 중앙에는 앉아서 볼만한 소파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메모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주제별, 시기별로 모아서 전시를 하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해주는 오디오 기기를 제공 받아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인데, 그것이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니 놀랍고 고마울 뿐이었다.

피카소의 연인

이번 여행 중 둘러본 미술관에서 기뻤던 것은 사진으로만 보던 세계적인 작품들을 직접 보는 것도 보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작가의 또 다른 작품과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식견은 좁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피카소였다. 그동안 피카소의 작품은 입체파 혹은 미술책에 등장한 작품들에 갇혀 있었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화풍의 작품들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감이나 선을 보면 그가 보였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묘사한 연인이나 발가벗고 있는 두 젊은 남자를 그린 작품이나 모두, 피카소 외에는 답이 없는 작품들이다.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

이곳에서 만나는 세잔, 라파엘, 드가, 고호, 고갱, 다빈치, 램브란트의 작품들도 하나 둘 그런 기쁨을 주었다. 특히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에서는 퇴폐적이고 관음증적 시선과 응시가 겹쳐진 끈끈한 분위기에 한참을 넋을 주고 서 있어야만 했다. 크림트의 느낌이 들었는데 가서 자세히 보니 르누아르였다. ‘오달리스크는 매춘부를 그린 것이라는데, 관음증적 판타지를 응축시킨 작품 표정도 재미있지만 소품과 옷의 색깔만으로도 끈적끈적한 욕망의 색깔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했던 기만, 허위, 은폐, 억압 등에서 탈주해 대안적 세계로 추구했던 것인 오리엔탈적 세계였는데, 그러한 경향의 한 작품이란다. 신비와 퇴폐의 노골화가 과연 오리엔탈적인 것이냐는 것은 철저히 당시 유럽인들의 시각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말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유럽세계의 기만과 황폐의 대안을 오리엔탈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육체와 욕망 그리고 시선과 상관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신보다는 인간에, 거대담론보다는 미시담론에, 당위보다는 존재에 주목한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립미술관은 시카고나 뉴욕에 비해 한가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할 수는 있었지만, 직원들의 고압적인 자세가 눈에 거슬렸다. 우리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람객을 대하는 고압적인 말투며 행동거지가 몹시 불쾌했다. 이렇게 좋은 소장품들과 전시공간을 가지고서 그것을 온전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미술관이 안타까웠다. 그것은 그 많은 전시공간마다의 테마가 스토리텔링으로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아쉬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향유 자체를 방해하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작품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에 가까웠다.

워싱턴 맥도날드 가판대 메뉴. 횡단 내내 만났던 맥도날드의 평균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품질은 형편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경을 더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보니 주차시간이 다 되었다. 아내에게 효진이와 더 보고 있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나는 많이 피곤해하는 유진이를 데리고 차를 주차해둔 교통국 부근까지 부지런히 걸어갔다. 날도 덥고 게다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걸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다행히 2분 전에 도착해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추가했는데 30분밖에 더 추가가 안 되었다. 이상해서 주변의 표지판을 살펴보니 오후 4시부터 630분까지는 주차가 금지된 곳이라서 시간이 더 추가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차를 옮기려고 살펴보니 근처가 다 비슷한 형편이었다. 퇴근시간 무렵에 교통 혼잡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논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국립미술관을 그만보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에 어제 어두워져서 제대로 보지 못한 한국전쟁 참전 추모공원과 베트남 참전 용사비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아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는 사이, 우리는 근처에서 발견한 맥도날드 가판대에서 먹을 것을 사기로 했다.

결국 오늘도 그러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일정에 욕심을 내다가 점심을 4시가 지나서 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지금은 시장기만 지우고, 조금 있다가 저녁은 제대로 된 음식을 사주리라 생각하고 간단한 것을 주문을 하려고 보니 가격이 터무니없었다. 이미 어제부터 워싱턴의 음식이 질과 양에 비해 가격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맥도날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미국 전역 어디서나 같은 가격으로 팔리는 줄 알았던 맥도날드가 워싱턴에선 햄버거가 4, 맥너겟은 2배 이상 비쌌다. 게다가 메뉴의 선택도 여지가 없다. 정식 매장이 아니라 작은 가판대다 보니 직원 둘이 햄버거 기계를 이용해서 기본 버거와 더블버거 그리고 맥너넷만 팔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시장한 것을. 덕분에 꽝꽝 언 냉동 패티가 기계에 들어가서 구워져 자동으로 빵 위에 얹혀 나오는 것을 질리도록 쳐다보아야했다. 그나마도 줄을 서서 불친절한 직원과 말을 섞으며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미주리 주 맥도날드에서 만났던 그 친절한 직원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맥도날드의 표준화도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친절만큼 불친절은 힘이 세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 공원으로 가기 위해 비지터 센터 주차 구역으로 이동하는데 교통경관이 주차구역에 주차한 다른 차에 스티커를 발부하고 있었다. 합법적인 주차구역인데 왜 스티커를 발부하나 의구심이 들어서 몇 번을 망설이다 앞쪽으로 차를 세우고, 직접 가서 문의했다. 내가 차를 주차한 곳이 주차 구역 맞느냐고 두 번이나 묻고서야 안심을 했다. 하루 종일 주차 스트레스에 시달린 우리는 이렇게 넉넉한 무료주차 공간이 고마울 뿐이었다. 게다가 옆으로 우리와 함께 흐르는 포토맥(Potomac) 강은 비스듬히 누워 햇살로 반짝거렸고, 그 앞의 모든 것들은 역광 때문인지 실루엣으로 아늑했다. 강변을 따라 길 안내 하듯 늘어선 나무들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더위는 따라오지 못했다. 숲그늘의 고즈넉한 표정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비로소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국전쟁 참전 추모 공원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은 어제보다 사람들이 조금 많았다. 빛은 투명하고 명징해서 사진 촬영에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빛이 좋아서 조형물들을 꼼꼼하게 훑어볼 수 있었는데, 어제와는 달리19명의 병사들 표정들에서는 전투의 의지보다는 전쟁의 공포가 먼저 읽혔다. 한 명 한 명의 자세와 표정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읽어갔다. 그 옆에 검은 벽에 새겨진 얼굴들도 어제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앞으로 경계석 위에는 한국전쟁의 사망, 실종, 포로, 부상자의 숫자[각주:6]가 적혀 있었는데, 참혹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호크 다운>(Black Hawk Down, 2001)에 등장했던,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던 플라톤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비극적 전망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 지독한 비극의 결과를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원인을 달리하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Vietnam Memorial)1959년에서 1975년까지 연대순으로 6만 명에 달하는 전몰장병의 이름을 검은 대리석에 새겨 놓은 것이다. 검은 대리석 위에 전사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그 앞에 서고 보니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추어졌다. 그 검은 대리석이 직각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곳에 비춰진 모습이 다시 되비춰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관람하는 사람의 현재를 통해 완성되는 구조였다. 베트남 전쟁은 비록 끝났지만 그와 유사한 성격의 전쟁을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미국의 오늘을 되비추고 있었다. 6만 명에 달하는 아까운 목숨들의 죽음이 오늘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다. 대부분 군대 외에는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입대를 했고, 또 정부에서는 그러한 계층들에게 입대를 권했고, 그들은 낯선 땅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져 간 것이다. 미국 사회 양극화가 더 극대화된 현재에 그러한 모습은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징병관들이 저소득층이 머무는 지역을 방문해 입대를 권유하는 모습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은가? 또한 그들에 의해 희생된 그 낯선 지역의 생명들까지이 지독한 참상을 고스란히 조형물은 되비추고 있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에서 본 봉투 위의 편지

베트남참전용사 조형물

베트남참전 용사비에 비친 필자

역사는 낡거나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 갈 뿐이다. 잊혀진 역사는 여지없이 반복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더 가혹해질 뿐이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만 역사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더구나 유사한 반복에 번번이 침묵하고 외면하며 현실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늘 그렇듯 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듯, 오늘에 침묵하는 몫은 오롯이 자신의 것임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조형물을 따라서 걷다가 손글씨가 쓰인 노란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겉에 쓰여 있는 편지였다. 전몰장병의 지휘관이었던 생존자가 써놓은 글이었는데, 울컥하게 만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위에서 산 자로 남게 된 사람의 미안이 절절했다.

아직 해가 조금 남아서 포토맥 강위로 길게 누워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아직 과거가 아니다. 한국전쟁은 휴전중이며 베트남전쟁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번복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 반복될 뿐인 또 다른 전쟁은 반성 없이 가혹해질 뿐이다. 두 기념물을 보면서 가슴은 한참이나 먹먹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주류전문점에서 버드와이저 40온스짜리를 하나 사왔다. 이곳 호텔에는 대체로 냉장고가 없어서 얼음을 채워와 차갑게 한 후 아내와 마셨다. 오늘은 아내가 더 마셨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여정을 달려온 피로 때문이리라. 내일 돌아가면, 그동안 멈춘 시계를 부지런히 돌려야 한다. 8월도 후반부로 달려가고 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 21일간 횡단여행의 대단원이다. 시카고를 기점으로 시간은 순식간에 달려갔다. 시간이 달리는 만큼 피로는 더 했지만 가족들 모두,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왔다. 무엇을 보고 배우려고 온 여행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는데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싶던 여행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가족들 모두 즐겁고 알찼다고들 했다. 가족들은 다양한 주제로 이번 여행의 베스트와 워스트를 선정하기도 했다. 돌아갈 짐을 모두 꾸리고 내일은 아쉬움에 워싱턴에서 놓친 몇 군데를 더 돌고 공항으로 갈 것이다. 대부분 처음 해보는 것들에 가족들 모두 용기를 가졌다. 돌아갈 곳의 소중함도 모두 같은 심정인가 보다. 꼼꼼하게 여행일정과 경비, 관련 자료, 사진, 정리물 등을 챙겼다. 이제 그것이 몸을 만들 차례다. 그것은 집에서 따듯한 밥과 된장찌개를 한 그릇 먹고부터 시작할 일이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멀리 있지만, 내일이면 하나의 그리움을 지울 수 있겠다.

 

  1. 암살범 존 윌키스 부스는 뛰어내리다가 장식 천에 다리가 걸려 정강이뼈가 부러진 상태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말을 타고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버지니아 볼링그린 담뱃잎 건조장에서투항을 거부하고, 불타는 건조장에서 나오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테쿰세의 저주는 미국 정부에 무력으로 항쟁하던 인디언 추장 테쿰세가 죽으면서 20년에 한 번씩 0으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대통령은 임기 중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1840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 1860년 아브라함 링컨, 1880년 제임스 A. 가필드, 1900년 윌리엄 매킨리, 1920년 워런 하딩,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1960년 존 F. 케네디는 예외 없이 임기 중에 모두 죽었다. [본문으로]
  3.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276 [본문으로]
  4.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합법화하는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판결을 내린다. 이에 따라 학교, 식당, 열차, 버스, 식수대 등에서 흑백의 분리를 합법화함으로써 남부에서는 흑백의 갈등이 보다 첨예화된다.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p.323-325 참고) [본문으로]
  5. 백인전용 학교에 입학을 거부당한 부모가 제기했던 1951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을 비롯하여, 버스의 흑백분리 지정석 제도에 저항한 로자 파크스 사건, 1957년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라는 백인 전용 학교에 흑인학생 9명의 등교 시도 사건은 주방위군까지 출동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본문으로]
  6. 사망(미군: 54.246, 유엔군 628,833), 실종(미군: 8,177, 유엔군: 470,267), 포로(미군: 7,140, 유엔군: 92,970), 부상(미군: 103,284, 유엔군:1,064,4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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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817일 워싱턴얼바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여행은 늘 돌아가기 위한 떠남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없다. 떠나지 못해 조바심치고 안타까워하다가 막상 떠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돌아올 날을 꼽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어쩌면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의 설렘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익숙한 곳에 놓아두고 자신의 일상을 문득 정지시켜 놓고 떠나서 낯선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서성이다가 그 안에서 자신을 꺼내어 돌아오는 여행은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여행에서 돌아가는 길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정지시켜 놓았던 일상은 정확히 정지된 만큼 더 분주해질 것이고, 사용된 여행비용만큼 궁핍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빽빽하게 채우고 싶어 했다.

아침식사를 포기하고 모두들 1시간쯤 더 자기로 했다. 1시간 더 잔다고 피곤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편안했다. 오늘은 미국 역사박물관을 3시까지 보고,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를 탈 계획이다. 어제 저녁을 먹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에서 남겨온 머핀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여행을 마치기 전날이라고 어제 저녁은 제대로 먹기로 했는데, 마침 필라델피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페이머스 데이브스가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어서 그곳에 간 것이다. 지난번에 아쉬워했던 콤보를 시켜서 넉넉히 먹으면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고, 서로를 축하했다. 배불리 먹고 났는데도 닭 한 마리 반 정도와 머핀이 많이 남았다. 아내가 너무 많을 것이라고 시키지 말라는 것을 남으면 내가 먹는다고 우겨서 시켰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돌아오는 내내 아내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아침은 머핀으로 해결하지 않았는가?

워싱턴은 매일매일 더 혼잡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주차할 곳이 없었다. 동전주차기가 설치된 곳은 모두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내셔널 몰 주변의 관공서가 몰려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아침 10시까지는 교통 혼잡과 청소 때문에 주차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1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빈 곳이 없었다. 주차할 곳을 찾아서 몇 바퀴를 돌고나서야 차를 빼는 한 곳을 발견하고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앞으로 들어와 주차를 했다. 화가 나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차에서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내렸다. 어쩌겠는가, 힘드셔서 그랬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 역사박물관에서 10분쯤 걸어야 하는 곳에 가까스로 주차를 했다.

이곳도 어제처럼 2시간 한정 주차라서 중간에 한번 다시 나와서 차를 옮기거나 주차를 연장해야 했다. 거리에 서 있는 동전주차기는 오래된 것은 동전만 받지만, 신형은 동전과 카드를 모두 받는다. 25센트 동전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카드가 편하다. 2시간 한정 주차의 경우에는 2시간 이상 입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2시간 후에 나와서 다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연장하는데 동일 카드는 연장이 되지를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니 결제가 된다. 동일인의 동일카드를 인식할 줄 아는 주차기가 동일인의 카드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결제가 되는 것을 보면 조삼모사였다. 내셔널 몰에 그 많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주차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설사 주차를 했다고 해도 2시간 안에 박물관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두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말일 텐데, 우리 같이 숙소가 시외에 있는 여행객들은 어쩌란 말인지 궁금했다.

내셔널 몰 주변의 스미스소니언 국립박물관들 지도

미국 역사박물관은 워싱턴 기념탑 쪽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국립미술관의 동관과 서관을 지나서 가야했다. 새로운 길로 가보자고 국립미술관 앞쪽이 아닌 뒤쪽으로 가다보니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날도 많이 더웠다. 걸어가다가 지칠 판이었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 국립미술관 조각정원(National Gallery of Art Sculpture Garden)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록시 페인의 ‘Graft’

알렉산더 칼더의 ‘Red Horse’

루이스 브루주아의 ‘spider’

호안 미로의 ‘Gothic personage, Bird-Flash’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House1’

클래스 올랜버그와 쿠제 반 브루겐의 ‘Typewriter Eraser,

그저 거리를 줄이려고 들어선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은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1991년에 개관했다는 이곳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17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문과 문 사이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저녁에는 음악공연이 펼쳐지고, 겨울에는 이곳을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분수 주변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분수대 옆의 카페테리아에서는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팔고 있었다. 카페테리아 앞쪽으로 록시 페인(Roxy Paine)‘Graft’이 서 있었다. ‘Graft’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나무였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느낌과 앙상한 가지에서 견고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 주변으로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House1’,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Red Horse’, 호안 미로(Joan Miro)‘Gothic personage, Bird-Flash’, 클래스 올랜버그(Claes Oldenburg)와 쿠제 반 브루겐(Coosje van Bruggen)‘Typewriter Eraser, Scale X’, 루이스 브루주아(Louise Bourgeois)‘spider’등이 있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spider’는 롯본기 힐스에서 보았던 ‘maman’과 비슷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이 거미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maman'은 말 그대로 어머니의 이미지와 연관된 것이다. ‘maman'은 유년기의 두려움과 상관된 어머니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었고, 이 작품은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물적인 존재로서의 거미와 상관된 것이었다.

작품의 규모나 대담함에 압도되어 이러저런 시점에서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진은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한 촬영기술 때문이겠지만, 정지된 시간 외에는 현재의 다른 무엇도 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분수에 발을 담그거나 그 주변의 그늘에 담요를 깔고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작품 속으로 일상이 들어간 것인지, 일상 속으로 작품이 들어온 것인지도 몰라도, 부러운 여유와 풍요였다.

미국역사박물관 입구에서 만난 어린 아이들() 이름표를 등 쪽으로 달았다

사진을 찍다보니 조각정원 뒤쪽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멋스러운 건물이 들어왔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는 독립선언서 같은 국가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National Treasure, 2004)에 등장했다고 하니 아이들도 그제야 관심을 갖는다.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을 나와서 미국 역사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앞쪽에 견학을 온 것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귀여웠다. 손에는 흙장난할 때 쓰는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하나같이 이름표는 등 뒤에다 달았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솔하는 선생님이 뒤에서 아이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이름표를 등 쪽에 달고 친구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미국의 다락방(the nation attic)이라고도 불린다는 미국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은 미국 생활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가까운 과거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일상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들이 중심이라서 훨씬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대통령, 전쟁, 오락, 인종문제, 교통수단 등등의 테마별로 설명보다는 즉물적인 제시가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 층의 규모가 대단히 컸지만 테마를 따라 돌다보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었다.

세사미 스트리트 초기 인형들

마이클 잭슨 모자

도로시의 구두, 세사미 스트리트, 피너츠의 초기 버전, 마이클 잭슨 모자, 알리의 권투 장갑, 루게릭의 야구공 등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전시는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국 역사박물관 안에 전시된 대중문화 전시가 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유독 미국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흑인대학생들이 백인전용 좌석에 앉음으로써 분리주의에 항의했던 그린스보로의 가게 의자

흑인노예 등에 채찍 상처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에 설치된 네 개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흑인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식당 의자를 전시한 것이다. 1960년 그린스보로의 한 식당에서 백인들만 앉게 되어 있는 의자에 흑인 대학생 네 명이 앉자 주인은 나갈 것을 요구하며 음식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은 27, 그 다음날은 300, 그 다음날은 백인을 포함한 1,000명이 함께 찾아와 백인전용 의자의 부당함에 항의함으로써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연좌운동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미 1955몽고메리 승차거부 운동으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각주:1]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저항이 시작된 상태에서, 그린스보로의 이 사건을 통하여 흑백분리의 부당성과 심각성을 전국적으로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1960년도까지 미국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미국이 아니던가? 이러한 뿌리 깊은 흑백차별 문제는 단지 미국 사회의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득권층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미국 내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이며, 더 나아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굴복해야하는 약소국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이기도 하다.

야만은 과거의 수사가 아니다. 다만 노골적인 것들이 은밀하고 합법적인 형태로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합법과 합리로 정당화되는 미국의 질서 이면에는 기득권층의 일방주의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미국의 기득권층이 백인 기독교도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가 가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캠프에서 쓰던 식기 키트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던 추첨통

이곳에서는 자유를 위한 대가로 불리는 미국의 전쟁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상당한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독립전쟁부터 최근 이라크전까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미국중심의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당시에 화려한 군복과 투박하지만 잘 벼려진 무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며 워싱턴 캠프에서 사용했었다는 식사용 키트는 캠핑세트처럼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부상당한 병사의 팔을 절단하는 모습은 처절했다.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는 추첨에 사용했다는 추첨통이나 매일 지급되었던 반 컵의 럼주[각주:2] 등은 참전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부터는 자유와 평화라는 명분의 정당화와 전시동원 체제 내에서 여성의 참여 독려[각주:3] 그리고 평화수호자로서 미국의 위치와 전력의 우위 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Route66과 관련하여 이동수단, 이주 과정 및 고난, 도로망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아이들은 자기들이 달려본 길이라고 무척 재미있어했다. Route66은 서부로의 확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자연재해로 농토를 잃고 농장노동자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고난의 여정이었고, 세계 대전과 한국전 등에 참전하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길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Route66은 미국의 근현대사의 영욕을 증거하는 길이다.

미국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초기 캘리포니아 농장의 값싼 노동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어려웠던 시기를 막연하게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서부유럽인들의 이민으로 탄생한 미국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등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제한을 합법화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1929년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1880년대 인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출신국별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였다. 기득권을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이민법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중국인 이민자들이었다.

값싼 중국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의 청원이라는 명분 아래 서부유럽계 백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미국 전체 국민총생산의 30%를 담당하고, 전 세계 제조업의 20%를 담당한다는 캘리포니아의 저력은 그러한 이민자들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문화라는 말에 자유와 평등이 함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거나 낭만적인 믿음임에 틀림없다.

미국 역사박물관은 넓고 크긴 했지만 미술관이나 다른 박물관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짐을 부치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에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금 빨리 공항으로 출발했다.

유료 가트

기내에 가지고 탔던 누추한 여행의 흔적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국제공항(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에 기름을 넣을까 하다가 아침에 주유를 한 터라 괜찮을 듯싶어서 그대로 가져다주었다. 뉴욕에서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48달러나 더 내야했었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이 정도면 됐단다. 그동안 차에 싣고 있던 짐들을 꺼내 놓으니 의외로 많았다. 어제 저녁에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많았다. 우리가 예약한 저가항공의 경우에는 트렁크 하나당 20달러의 요금을 받아서 40달러의 추가요금을 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내 캐리어는 그냥 가지고 타도 될 뻔 했는데 저가항공은 처음이라서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예상했던 금액보다는 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작은 짐들은 가족들이 나누어 들기로 했지만 그래도 적은 양은 아니었다. 그래서 탑승 전까지는 가트에 모두 싣기로 했는데 가트가 3달러를 내야 이용을 할 수 있었다. 3달러를 지불하면 가트를 뺄 수 있었는데, 나중에 반납하면 25센트만 돌려주는 아주 야박한 인심이었다. 왜 인천공항이 세계 1위 공항으로 매년 선정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는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저녁을 주지 않는단다. 그래서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것을 시켰는데, 착한 가격에 제법 그럴 듯한 음식이 나왔다. 오늘 제대로 된 식사는 처음이었다. 모두들 돌아간다는 설렘에 배고픈 줄도 몰랐나보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사실 고민을 했었다. 저가항공이 가격은 저렴한데 한 번도 타보지 않아서 어떨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 국내선 저가항공의 수준이나 서비스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기내식이나 기타 없어도 될 서비스만 빠진 것이라기에 예약을 했다. 이왕 저가항공을 탔으니 조금 더 불편을 감수하고 예산을 줄이자는 생각에 덴버에서 한 번 갈아타는 조건으로 가장 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여행 관련 예매는 수시로 제공되는 핫딜(hot deal)을 제외하고는 미리 할수록 저렴하다. 운 좋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핫딜이 제공되면 가장 좋지만 원하는 날에 좌석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예약을 한 것이다. 더구나 숙소일 경우에는 핫딜이 뜨면 환불하고 그것을 예약하면 되는데, 항공권의 경우에는 환불 수수료가 붙기 때문에 그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상당히 저렴하게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덴버에서 갈아타는 것을 포함해서 4시간 30분 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동부와 서부가 3시간의 시차가 있으니까 7시간 30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산타 아나 공항에 10시쯤 도착해서 짐 찾으면서도 택시가 없을까봐서 아내는 계속 걱정을 했다. 아내가 들은 정보로는 이곳에서는 밤늦게는 공항택시가 없단다. 그래서 노심초사했는데 마침 우리가 탄 것이 마지막 비행기 전이라 택시가 있었다. 사실 택시가 끊기면 아는 분들께 픽업을 부탁해야 하는데 서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알려주고, 우리끼리 우리말로 택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도 한국 사람이란다. 우리는 기사분이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우리말이 그리웠는지 기사분은 이것저것 물었다. 3주간의 횡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비용이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걱정해준다. 이번 횡단 여행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우려가 있었지만 비용을 걱정해준 사람은 기사분이 처음이었다. 사실 여행은 아주 철저한 현실이 아니던가? 먹고 자고 보는 모든 것들이 아주 규칙적으로 비용을 요구하고, 일단 시작하면 돌아올 때까지 그 요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여행이 아니던가? 아마도 기사분의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묻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이민사를 들려준다. 이민 와서 부지런히 생활하고 돈을 모았던 이야기며,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까지그래도 지금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집이었다.

한국 기사 아저씨 덕분에 편안하게 집에 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집이 너무 낯설지만 편안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족들 모두 약간은 흥분상태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 아내와 나는 큰 짐을 정리했다. 엄청난 빨래와 여행 중 구입한 기념품 등을 정리했다. 여행을 떠나면서 걱정하실까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떠났었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를 드리고 씻었다. 씻고 나니 그제야 집이라고 피로가 몰려왔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이곳을 한 번도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편안하고 푸근한 것을 보면, 이곳이 이제 내게 집이 되어가고 있나보다. 떠나보아야지만 자기가 있는 곳을 안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3주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달려온 4,359마일(7,015)[각주:4]의 거리나 7,758달러의 비용이 만만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경유하는 도시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남루해지고 피곤해졌지만 그것을 이유로 내려서거나 돌아올 수는 없었다. 오로지 앞으로 가야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다. 3주 동안 1만장 넘는 사진을 찍고, 대형 바인더 두 개 분량의 자료를 모으고, A4 50장 분량의 빽빽한 메모를 적었지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련하다.

3주간 신고 다닌 크록스

크록스 구멍 부위가 탄 발등

미국 횡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부터 일상 속에서 반추하며 지속적으로 구성해나갈 부분인지도 모른다. 이제 휘발성 강한 기억을 노트 위에 기록해야 할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겸허하게 되비추어야 할 것이다. 여행 내내 길을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길이 날 데려왔음을 깨닫는다. 결국 여행에서 만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같이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늘 집으로 돌아오나 보다.

2011년 여름은 뜨거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는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길이 데려다 놓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모든 것을 놓고 떠날 길을 생각한다. 다가올 날들에는 떠나고 돌아오는 길이 더 멀고 길어져서 나를 좀 더 깊고 온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풀어놓은 남루한 짐들을 빨고 기워서 언제든 다시 꾸리고 떠날 수 있도록 내 안에 설렘이 더욱 강성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움은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그리움을 만든다.

 

  1. 짐 크로 법(1876-1965)은 학교, 버스, 공원, 병원, 식당, 감옥, 식수대 등의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이다. 이 법은 모든 공공기관에서 흑백의 분리를 의무화했으며, 1896년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즉 ‘분리되어 있으되 평등하다’는 기만적인 흑백분리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 법으로 인하여 흑인들은 공공기관에서 모멸스러운 불평등을 감내해야했다. 짐 크로(Jim Crow)라는 말은 “니그로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으며 가난과 어리석음의 대명사”(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325)였다. [본문으로]
  2.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적인 술이었던 럼주는 17세기 근대화된 군대가 등장하면서부터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하루에 지급되는 양은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취기를 느낄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전시에 공장 등으로 불려나왔던 여성들은 종전과 함께 귀환한 남성들과 일자리 경쟁이 불가피했다. 남성들의 일자리 보장을 위해서 종전 후에는 여성들을 일터라는 공적공간에서 불러내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다양한 여성상과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다. [본문으로]
  4. 인천공항에서 LA공항까지가 9,637㎞니 횡단여행 동안 달린 거리가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음을 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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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야할 길이 있는 당신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횡단여행 경유지마다 가져온 냉장고 자석. 귀국 후에 보니 냉장고표면이 플라스틱이어서 붙이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짐


먼 길을 오랫동안 다녀왔다. 막연한 기대와 성취 사이를 오가며 되풀이해서 가슴으로 꿈꾸던 길이었다. 정작 떠날 때에는 그 모든 것을 집에 두고 떠났다. 가능한 조건보다는 불가능한 여건이 더 많았던 길이었기에 그저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신기하고 고맙게도 그 낯설고 험한 길을 떠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조차 없었다. 그저 가족이 함께 먼 길을 떠난다는 가벼운 흥분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무모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바라기는 걸어서 횡단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내와 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시애틀에서 얼바인까지 자전거로 여행을 하겠다는 제시카의 말에 부러워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도 우리의 몫은 아니었다. 기차나 비행기로는 구석구석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 없을뿐더러 시간에 구애가 너무 컸다. 장시간 운전의 피로만 넘어설 수 있다면 자동차는 기동력과 독립성 면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만 자동차의 속도는 우리들 욕심과 항상 비례하는 것이어서 스스로 다스리지 않으면 여행이 아닌 이동이 될 수 있기에 경계가 필요했다.

여행자에게 허투루 지나칠 것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길이 데려다 준 곳곳마다 눈을 주고 마음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계획에 없던 것에 넋을 놓다가 계획했던 것을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길 위에 꼭 보아야할 것은 어디 있으며 우연히 만나는 것은 또 어디 있으랴. 만나야할 것은 만나야할 곳에서는 만나는 것이고, 단지 그 모든 것들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 설렐 뿐이었다.

횡단 여행 내내 아이들이 아내와 나와 같이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쓸쓸했고, 기뻤다. 분만실에서 갓 나온 첫째와 둘째의 모습을 보며 울컥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데, 아이들은 제 몫의 시간을 잘 데리고 아빠의 예상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낯설고 깜찍한 표정을 짓고, 충만한 기쁨으로 나이테를 하나둘 품어왔건만, 내게 아이들은 아직 보호해야할 어린 새순들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시간을 정지시켜놓고 바라보기만 하던 내게 횡단 여행은 아이들의 제 나이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제 나이의 아이들을 보는 일은 대견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유진과 효진의 어린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쓸쓸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그 나이 때 내 모습을 자꾸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힘들 때마다 지금 내 나이 때를 건너시던 아버지 모습을 상기하며 위안을 삼는 것과도 닮은 듯 어긋난 맥락이리라.

자동차는 지극히 독립적인 공간이어서 오롯이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되고, 위안이 되어주었다. 폭염은 우리 차를 따라오지 못했고, 사막의 열기도 차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이따금 스텝의 회오리바람이 옆에서 위협했지만 두렵기보다는 신기할 뿐이었다. 차창에 부딪혀 횡사한 작은 날벌레를 주기적으로 닦아내야 했지만 그것도 앞으로 달리던 차의 시야를 가리지는 못했다. 며칠을 달려도 지평선은 또 다른 지평선을 보여줄 뿐 그 너머를 보여주지 않았다. 척박한 대지 위로 불모의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그 때에도 예외 없이 하늘은 압도적인 코발트빛이거나 스카이블루였다. 그런 풍경을 보며 몇 시간씩 달리다보면 어느새 길 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소리조차 슬며시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사라지면 오롯이 차 안의 가족들만 남았다.

떠나는 곳과 돌아오는 곳이 같지 않은 출발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낭만적 유목을 꿈꾸지 못하는 이유다. 일상의 평온과 성실을 사랑하는 소시민으로서 여행의 달콤한 일탈을 희망할 뿐이지, 일상을 폐기하는 일탈은 감히 꿈꾸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희망하지 않는다.

여행을 정리하며 돌아보니 우리의 횡단여행은 우리다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애초에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처럼 철학적 방랑이거나, 한비야처럼 자기 확신의 자유이거나, 김훈처럼 풍경을 압도하는 은륜(銀輪)의 언어이거나, 이병률처럼 따듯하고 명징한 감성이거나, 성석제처럼 유쾌한 의뭉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들을 명분이나 목표에 구속되지 않고 돌아본 소박한 길이었다. 언제나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부족한 우리 가족에게는 가는 곳마다 새롭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오히려 모든 길이 고단한 기쁨이 되었다.

길이 매력적인 것은 그곳에 우연과 돌발이 있기 때문이다. 계획할 수는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는 어긋남의 연속, 그 어긋남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길의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돌발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을 때 여행은 자유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우연과 돌발을 잠재운 길은 결코 여행이 될 수 없다. 하여 여행은 길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데려가야 하는 것이다. 길이 데려가는 길 위에서 새로움과 변화의 자신을 만나는 일, 그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은 유연하고 부드럽고 넉넉하다. 여행은 분리나 경계의 단단함보다는 포괄과 탈경계의 유연함과 부드러움을 꿈꾸기 때문이다.

떠나야할 길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단한 일상에서 기진한 모습으로 황폐해진 나를 꾸역꾸역 버티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다시 길 위에서 짐을 꾸리게 될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이름도 지도 위의 위치도 낯선 그곳에서 만나는 로컬 맥주의 시원한 목 넘김처럼 행복할 것이다.

21일간의 길에 대한 꼼꼼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낯선 황홀과 설렘은 조금도 표현하거나 기록하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빈약한 언어와 거칠고 성긴 감성 그리고 일천하기 그지없는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모자란 것이 며칠 사이에 채워질 성질의 것이 아니고 보면, 부족한대로 드러내는 것이 진솔한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무릅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21일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새로운 신열을 앓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이며 동시에 그 길을 걷고 있을 그 때의 나에 대한 기대이다. 이 신열로 또 얼마간 난 은밀하지만 달뜬 행복을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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