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11월이 뜨거워야만 하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12년 우리의 가을은 뜨겁기만 하다. 가을보다 뜨거워질 초겨울의 선택을 준비하고 있는 까닭이다. 대통령제의 공과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당장 코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는 현실임에 분명하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선거라지만 차선의 선택이라고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정책과 공약의 검증이 아닌 진보와 보수라는 낡은 잣대로 가늠하고, 행정수도 이전이나 4대강 사업과 같이 이해와 상관된 공약에 현혹된 선택의 결과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핵심은 그가 누구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시하는 비전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안전하고 건강하며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미래는 결코 현재를 잊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선심성 공약에 현혹되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저 잘못된 선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약의 타당성과 적합성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 책임과 부담의 사업들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곳곳에 있다. 어디 선심성 공약뿐이랴?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파행을 겪는 교육현실이나 퇴행적인 문화정책으로 인하여 척박해진 문화현실은 또 어떤가?

물론 바라기는 5년마다 선출되는 대통령에 의해 사회 전체가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시스템의 구축과 그 시스템의 안정이 절실한 시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당장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결국 각 후보가 내세우는 정책과 공약에 대한 준열한 검증과 판단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는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으면서 정치적 중립성 운운하며 은밀하게 정치색을 드러내는 언론에 기대할 것이 없다면 유권자가 준열하고 영리해져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검토하고 검증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만이라도 꼼꼼하게 살펴보자. 후보가 내세우는 비전이 가장 미래지향적인 것인지, 건강한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인지, 보다 많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인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표현에 따른다면 흐림 없는 눈으로 살펴보고 판단해야만 한다.

대학생이 더 이상 사회변혁의 선도가 아니어도 좋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밤새워 토론하고 아파하는 대학생이 아니어도 좋다. 적어도 무관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당장은 학점과 취업이 발등에 불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나의 무관심이 발등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에 불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불로 인한 상처는 아주 오래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뜬 후 준열한 자세로 살펴보자. 우리는 누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가을과 겨울을 뜨겁게 보내야 할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너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한대신문> 20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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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은 답이 아니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날로 치열해져 가는 취업난 속에서 스펙 경쟁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스펙은 specification의 준말이다. 제품 명세, 사양 등의 의미를 지닌 이 말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할 조건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품의 사양이야 그렇다고 쳐도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일괄적인 자격과 조건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펙이라는 말은 취업이 절대선이 되어버린 대학사회에서 이미 더 이상의 회의나 비판을 요구하지 않는 신화화된 단어가 되어 버렸다.

스펙 지상주의의 망령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성적을 기반으로 서열화에 익숙한 입시선발 제도를 비롯하여 글로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기업채용 과정은 물론 공무원 선발과정에 이르기까지 소위 객관성이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무책임하고 안이한 평가 및 선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특성화된 선발 기준 대신 자격증, 어학성적, 봉사 및 인턴십 경력 등을 객관성의 허울 뒤에 숨은 아니한 조건만 요구하는 것이다. 직군과 직능이 다르다면 선발의 기준이나 평가의 잣대 역시 달라져야 하는 것이 이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각 회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따라서 좀더 섬세하고 특성화된 선발 기준과 평가 시스템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스펙 무용론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엇비슷한 스펙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과 필요한 인재를 차별화된 자기들의 기준으로 선발해야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선발기준과 시험을 마련하고, 합숙 면접을 시행하고, 인턴제를 활성화하여 인성 및 업무 수행 능력을 브라인드 상태에서 체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다. 졸업 후의 진로가 오로지 취업뿐이냐는 고민은 일단 접어두자. 취업을 해야 한다면 준비해야할 것은 고만고만한 스펙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껏 열심히 뛰어왔던 당신을 가파른 스펙 경쟁으로 내몰지 마라. 학점과 어학성적을 비롯한 스펙 3종세트니 5종 세트니 하는 소문에 휘둘리지 말자. 물론 당신은 성실하게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과 어학성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제시한 학점과 어학성적을 살펴보라. 정상적으로 대학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넘어설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스펙이 말해주지 않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학은 스펙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스펙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당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내는 곳이다. 당신의 삶이 지향해왔고 앞으로도 지향할 가치는 무엇인가? 지금 취업을 준비하는 당신이라면 먼저 당신의 가치를 고민하라. 그리고 당신의 가치가 스펙을 넘어서서 빛날 수 있게 준비하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갖출 수 있는 스펙은 빛나지 않는 의무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찾고 지속적으로 육화시키려는 노력이다. 그것만이 당신을 빛나게 할 수 있다.

<한대신문>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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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꿈

칼럼로그 2018. 7. 13. 10:40

당신의 꿈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유난히 춥다는 올 겨울, 그 모진 기세에도 불구하고 새해 첫날이 밝았다. 요즘 같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썼던 예전에 새해는 봄과 함께 왔다. 농경이 삶의 기준이었던 그 시절, 새해는 새로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새로운 농사는 새로운 삶이었고 꿈이었다. 그 오랜 반복은 의식하지 못할 영역에 남아서 더 이상 농사가 삶의 중심이거나 음력을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김없는 설렘으로 새해를 열게 한다.

새해 당신이 꿈은 무엇인가? 지난해 못 다했던 계획도 계획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당신의 의욕과 열정을 부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부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대학에서 공부에서 꿈을 찾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새해에는 당신의 꿈이 오롯하게 행복할 수 있는 곳에 모이길 희망한다. 새내기에서부터 졸업을 앞둔 사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에게 물을 일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지, 스스로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이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것인지, 당신과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진지하고 꼼꼼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새해의 꿈이 당신을 설레게 하는 것은 지금 꾸고 있는 당신의 꿈이 오늘보다 행복한 내일을 열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니 그 꿈은 단지 얼마를 벌고 어디서 살고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꿈은 당신이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행복할 것이냐는 문제이며 그것이 여러분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달린 것이다.

새해에는 날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행복을 꿈꾸고 있는가, 그 꿈을 위해서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그런 의미에서 새해 당신의 꿈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의 의지로 가득해야만 한다. 언니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1년간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던 󰡔혼자 책 읽는 시간󰡕의 니나 상코비치, 이혼 후 아이가 외로움을 느낄까봐 3218일간 매일 저녁 책을 읽어준 아빠와의 약속을 기록한 󰡔리딩스 프라미스󰡕의 앨리스 오즈마 등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아니 당신 스스로 감동을 줄만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새해 아침 스스로 물어보자. 물어서 대답할 수 없거든 실망하지 말고 그런 꿈을 하나씩 만들어보자.

매일매일 스스로 행복해지는 한 해가 되자. 그것은 분명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곳으로 이끄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성공이나 성취에 맹목이 되어서는 결코 얻을 수 없으며, 오늘이 내일에 저당 잡혀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새해의 첫 해를 보면서 올 한 해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새해에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꿈을 꾸자. 지금 당장!

<한대신문> 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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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콘텐츠의 보고, 그래픽노블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0674억 달러에 픽사를 합병한 디즈니는 2009년 마블 코믹스를 40억 달러에 인수한다. 전자가 새로움에 대한 투자라면 후자는 익숙함에 대한 기대다.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새로움과 익숙함의 이율배반적인 요구, 특히 익숙함에 대한 요구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익숙한 원작을 활용해 새로움을 구현한 영화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함으로써 마블은 원천콘텐츠의 화수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마음껏 올릴 수 있었다. 이미 영화 판권을 판 대표적인 작품들을 제외하고도 마블 코믹스가 디즈니에 넘겨줄 수 있는 캐릭터는 5000여개에 달했다. 스토리에서 강점을 보이는 DC코믹스에 비해 캐릭터에서 압도적인 마블코믹스의 5000여개 캐릭터는 곧 그 이상의 영화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워너브라더스에 편입된 DC코믹스나 디즈니에 인수된 마블 코믹스는 미국 만화 시장을 이끌어온 두 축이다. 워너브라더스와 디즈니는 거금을 들여 왜 이들을 사들여야했을까? 대표적인 3H 산업(High-cost, High-risk, High-return)인 영화에서 전환(adaptation)이나 프랜차이즈 필름(franchise film)화는 대표적인 리스크 헷지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환과 프랜차이즈 필름의 출발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향후 지속적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콘텐츠의 확보인데,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는 이미 수천종의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회사가 가지고 있는 원천콘텐츠가 바로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다.

그래픽노블은 1930년대 이후 이슈(issue)단위로 연속되는 슈퍼히어로 중심의 연재물 포맷의 코믹북을 주제의 심화와 내러티브의 완결로 차별화하면서 1960년대 이후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은 코믹북과의 대타적(對他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픽노블은 독립된 작품으로서 차별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1)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 구조와 완결성을 전제로 2) 유니크한 작화를 바탕으로 작가주의적 아우라 확보하고 3) 보다 성숙하고 다양한 독자를 대상으로 4) 사회적 문제는 물론 개인의 내면에 대한 천착을 통하여 보편적 공감과 테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구현한다.


이와 같은 그래픽노블의 특성은 독립된 장르로서 충분한 의미를 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거점콘텐츠로 전환할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이 된다. 무엇보다 작품 단위의 밀도와 완성도를 확보한 내러티브차별화된 영상 연출이 가능한 유니크한 작화는 거점콘텐츠로 전환하기 용이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콘텐츠로서 향유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소다. 이 말은 초기 코믹스처럼 가루비누 같은 세제나 껌을 팔기위한 프로모션 툴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 있는 문화행위로서 그래픽노블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는 잉여의 행위다. 잉여의 행위기 때문에 창작/향유의 과정에서 반드시 스스로 의미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만화 같은만화니까라는 이중적인 레토릭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는 B급문화로서 저급한 문화행위로 취급해 왔다. 이러한 편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그래픽노블이다. ‘만화 같은이 주는 상상력과 표현 그리고 발언의 자유로움을 극대화하면서 현실과 부딪칠 수 있는 요소들은 만화니까로 견제함으로써 여타의 다른 예술과는 차별적인 우위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만화에 예술성과 진지한 깊이를 더한 것이 그래픽노블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현재와 절망한 역사를 흑백의 절묘한 미학으로 그리고 역동적인 정지의 역설을 보여준 프랭크 밀러의 <300>이나 <씬시티>나 미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아이콘 무정부주의자 V를 그려낸 앨런 무어의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는 서구의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할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품들이다. 신화적 분석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의 풍요로운 텍스트인 뫼비우스의 <잉칼>, 신과 인간에 대한 사유와 정치풍자가 유니크하게 어우러진 앵키 빌랄의 <니코폴>, 중년의 위기와 진정한 자아 찾기를 그린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 만화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트 슈피겔만의 <: 한 생존자의 이야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 부침하는 인간을 리얼리즘 문학보다 더 리얼하게 그려낸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동성애와 성장담을 교직시킨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 불행한 소년에게 찾아온 첫사랑의 성장통을 크레이그 톰슨의 <담요> 등은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물을 제외한 대표적인 그래픽노블이다. 우리 작가들로는 동심의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질곡을 그려낸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울기엔 좀 애매한>,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년>, 웹툰이라는 매체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픽노블의 특성을 여실히 구현하고 있는 윤태호의 <이끼>, <미생>,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 킬러>, <발광하는 현대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 주목받는 그래픽노블은 대부분 사회의 문제나 개인의 성장에 중심을 두고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성취를 지향하는 리터러리(Literary) 그래픽노블이라는 점이다. 킬링타임용 싸구려 B급문화의 탐닉이 아니라 만화라는 즐거운 장르를 통해 가치 있는 문화체험을 하고자 하는 욕구와 영화, 드라마와 같은 거점콘텐츠로 주목받은 원천콘텐츠를 즐김으로써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Transmedia Storytelling)을 향유하려는 적극적인 욕구가 그래픽노블을 통해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 만화는 그래픽노블이나 웹툰을 통하여 만화 너머를 말하거나 만화를 넘어서려는다양한 시도로 충만하다. 문화콘텐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보다는 그것을 왜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그래픽노블이 지닌 소구요소와 그것에 반응하는 우리의 문화적 욕구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문화적 경로 등에 더 눈길이 가야 하는 이유다.

 

제일기획 사보 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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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문화올림픽, 잔치를 넘어 축제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평창 동계 올림픽에 대한 우려는 기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올림픽 시설로 인한 자연 훼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부터 막대한 예산 투입으로 인한 재정 부담과 경제적·문화적 효과에 대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평창 동계 올림픽에 대한 우려는 개최 결정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더구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정투쟁을 벗어나지 못했던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 대한 학습 효과는 그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려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올림픽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창 동계올림픽에 거는 기대는 무엇일까?


벤쿠버, 베이징, 런던 올림픽에서 보았듯이 올림픽은 이미 단순한 스포츠 축전이 아니다. 근대 올림픽을 주창했던 쿠베르탱 남작도 올림픽의 핵심요소로 스포츠, 문화, 교육을 꼽았었고,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부터 스포츠와 동일한 방식의 예술경기대회를 개최해왔었다. 근대 올림픽은 이미 스포츠를 중심으로 문화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로 자리매김해왔다. 이러한 맥락을 전제로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과를 금메달 수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문화 올림픽(Cultural Olympiad)의 관점에서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면 앞서 걱정했던 것들은 대부분 불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문화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 풍요와 무형의 가치 그리고 브랜드 효과와 그로인한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는 실로 무한하기 때문이다. 다만 평창 동계올림픽이 문화 올림픽을 지향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는 늘 그렇듯 어떻게 그것에 이를 수 있느냐에 있다.

정부도 이러한 인식 위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다양한 방안과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먼저 눈에 뛰는 것은 5G, IoT, UHD, VR, AI 등을 활용한 ICT올림픽으로 특화시키고, 실감콘텐츠, 차세대방송, 스마트한 서비스를 구현함으로써 올림픽은 물론 다양한 문화자산을 콘텐츠로 보급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코리아 프리미엄 창출, 올림픽 문화유산, 국민 참여와 대통합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한국의 정체성을 세계화하고, 강원도의 동아시아 문화벨트화, 전 국민의 문화 참여를 핵심 과제로 제시하였다. 첨단의 ICT를 활용한 세계 최고의 빠르고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스마트 올림픽을 구현하고, 이를 매개로 우리문화 및 콘텐츠를 선양하겠다는 의지다. 이러한 의지와 촘촘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평창 올림픽에 대한 낙관적 전망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제시한 계획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그것을 채워나갈 콘텐츠에 대한 지향이나 구체성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그 콘텐츠가 무엇이냐는 실체적 질문이라기보다는 보다 그것의 정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그러한 첨단 기술과 다양한 기획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어떤 성격의 콘텐츠여야 하는지, 그것을 왜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해야 하는지, 한다면 그것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토론 그리고 합의의 과정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 가장 아쉬운 지점이다. 문화올림픽은 올림픽을 전후로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것의 지향 가치나 향유 주체를 고려한 무엇을, , 지금 여기에서에 대한 납득 가능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선결과제를 풀어야지만 중장기적인 국가 문화정책과의 연동 가능성 혹은 연동 전략, 우리가 가진 문화적 역량을 올림픽으로 수렴·결집시켜 브랜드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 향후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전략과 같은 실체적인 접근이 가능한 까닭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정투쟁의 단기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동계 스포츠를 진일보시킬 기점이고, 우리의 문화역량을 선양할 수 있는 계기이며, 뚜렷한 지향 가치를 통하여 우리 문화 정체성을 규명하고 부각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장()’이 되어야만 한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살아있는 장으로서 문화올림픽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보여주기 위한 일방적인 잔치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될 수 있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정선, 강릉, 평창과 같은 개최도시 주민들이, 강원도민들이, 우리 국민들이 참여하고 더불어 즐김으로써 지지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올림픽 기간 동안의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올림픽을 기점으로 지속가능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것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문화정책과 유기적인 연쇄 안에서 고려할 일이다.


런던 올림픽에서는 4년간 18만 건의 문화이벤트가 지속적으로 전개됨으로써 문화 올림픽으로서왜 지금 이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아우라(Aura)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규모 매스게임이나 물량공세로 압도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반문화적인 행사가 아니라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고양시킬 수 있는 콘텐츠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한 콘텐츠가 올림픽을 잔치가 아닌 축제로 만들기 위한 참여와 가치 그리고 즐거움의 문화적 실천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금메달을 목에 걸 우리 선수들만큼이나 기대되는 것은 올림픽 전후로 펼쳐질 문화올림픽 기간 동안 우리를 매혹시킬 콘텐츠가 아니겠는가?

 

<매거진서울스포츠> 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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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한류로부터 얻어야 할 것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한류(限韓流)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한령(限韓令, 중국 내 한류 콘텐츠 금지령)으로 인한 한류 콘텐츠 관련 기업의 주가 급락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한한류는 그 이전부터 예견되었고 예측했어야만 했다. 한한류는 명분상으로는 한국의 사드(THAAD)배치 결정에 따라 중국의 경고이자 위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국문화보호와 문화콘텐츠의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다양한 포석으로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한한령 이전에도 스크린쿼터로 외국영화는 한 해 30편만 개봉할 수 있고, 해외 드라마는 반드시 심의 통과 필증을 받아야하며, 골든타임에 외국 판권을 수입해 리메이크한 프로그램은 1년에 두 편을 초과할 수 없다는 등 외국 콘텐츠의 규제를 꾸준히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공식 문건은 없었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광전총국의 한한령은 한국 단체의 중국 내 연출 금지, 신규 한국 연예기획사에 대한 투자 금지, 1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한국 아이돌의 공연 금지, 한국 드라마·예능 협력 프로젝트 체결 금지,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중국 내 송출 금지 등이다. 진위나 강도가 어찌되었든 한류콘텐츠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의 타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 문화콘텐츠 시장에 들어와 있는 29000억원의 차이나머니를 고려할 때 투자금지 조항은 더욱 뼈아플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한한류의 진위 확인이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명분상 한한류는 정치, 외교, 안보, 경제가 종합적으로 맞물린 일이니 정부 차원에서 매우 치밀하고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정부가 사드 배치에 대한 의견을 국민에게 물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한한류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할 의향도 없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중국 역시 한한류를 공식 문건화 하지 않은 이유는 국제간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판단일 테고, 우리 정부 역시 대중국 외교, 안보, 경제 문제의 우선순위를 고려할 때 한한류의 문제가 최우선 선결과제가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류의 시작이 그러했듯이 한류콘텐츠업계 스스로 타개책을 마련해야할 것이다. 한류콘텐츠의 중국시장 편중을 개선한다거나, 지상파 채널이나 위성 채널을 넘어서는 스트리밍서비스와 같은 다양한 플랫폼을 확보한다거나,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이미 투자되어 있는 중국 자본에도 그 피해가 돌아가는 공멸의 길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 방안이 도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시장 편중은 한류 초기 일본 시장 편중과 성장-확장-쇠토의 주기가 상당히 유사해보이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중국은 단지 콘텐츠만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이다. 그들의 목적은 한국콘텐츠 산업의 성공신화와 전략을 활용내지 학습함으로써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콘텐츠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단지 판권을 사들여 중국 내에서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겠다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한국 드라마, 영화, 연예기획사에 투자해온 것은 한국콘텐츠에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선진 노하우를 속속들이 얻어가기 위한 거시적인 접근이었다. 결국 한한류의 문제도 한류와 연관된 모든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한류는 자발적인 문화교류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한한류의 문제를 지나치게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다보니 문화콘텐츠가 화장품이나 부동산처럼 취급되고 있다. 한류의 힘은 경제적인 파급력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유대와 공감에 있다. 문화가 지닌 자발성과 역동성 그리고 상호이해의 힘은 그 어떤 경제적인 효과와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 문화에 국가명을 붙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 1990년대를 압도했던 일류를 쓰지 않는 것은 그 콘텐츠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굳이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한류를 걱정하거나 비난하는 차원이 아니라 문화콘텐츠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에 우리의 관심이 모여야 하는 이유다.

 

<서울신문>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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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 대한 어설픈 편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학생들과 쓰촨을 다녀왔다. 방학마다 중국 곳곳을 방문하지만 늘 놀랍고 새로울 뿐이다. 평생을 보아도 제대로 다 보기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과 넓은 지역, 그리고 빠른 속도의 변화가 놀라움이라면, 그 안에서 문득 발견하는 그들의 문화는 새로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화란 삶의 반영이니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삶이라는 것이 당대의 것만도 아니어서 오랜 전통을 온몸으로 체감하지 않고서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은 그들이 자랑하듯 오랜 역사와 수많은 소수민족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개개의 군집적 성격이 더 강하지 않던가? 그러니 현재 중국이 어떻다 이야기하는 것도 섣부른 일이겠지만 코끼리 다리 더듬는 심정으로 그 새로움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이번 탐방에서 무엇보다 새롭게 발견한 것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을 전략적으로 세련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르다는 의미가 단지 동시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과 공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차이까지 현재적 시공간 안으로 수렴하여 구현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55개 다양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나라다보니 특이한 것도 많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지 않고 각각 공존하게 하고 있으니 그 다양성의 경쟁력은 이미 아는 바와 같았다. 거기에 전통 문화를 과감하게 현재적 맥락에서 소환하여 지속적으로 콘텐츠 가치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규모와 실천에서 세련된 참신함이 돋보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인상공연뿐만 아니라 멋스러운 전통 건축물 안에 들어선 스타벅스와 파리바케트 같은 현재적 향유 공간, 전통문화와 연계한 다양한 참여형 콘텐츠, 관광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민의 삶과 연계된 유적지는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포괄이 아닌 배제, 이해가 아닌 강요가 앞서는 닫힌 사회다. 배제와 강요에 익숙해진 닫힌 사회의 구성원들은 누구도 쉽게 수용하지 않듯이 우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문화든 사람이든 혹은 다른 시대이든 물 흐르듯 섞이지 않으면 함께하기 어려운 시대다. 물론 중국이 답이라는 말이 아니다. 광장과 공원마다 국가주의적 색채가 도드라지고, 낯설고 강압적인 구호가 가는 곳마다 붙어있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혼란도 분명한 그들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민족, 시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에 자꾸 눈이 갔던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또 하나 이번 탐방에서는 어설픈 편견이 여지없이 깨졌다. 그동안 중국에서 물건을 살 때, 그들이 달라는 대로 주면 손해라는 인식이 있었다. 사실 반 이상 깎아서 사기도 했으니 꼭 편견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청두에서는 정찰제라서 깎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물건 값에 더욱 신뢰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인민공원에서 우리에게 같이 배드민턴을 치자고 하거나, 전철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던 노부부나, 도강언에서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던 양꼬치 팔던 회족 청년이나, 아미산 부근 숙소에 두고 온 시계를 전화를 걸어 찾아준 주인이나, 거의 모든 결제를 모바일로 하는 모습이나 이번 탐방에서 만난 현재 중국의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대상을 폄훼하는 것은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의 발로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와 같은 IT기업의 급부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중국을 짝퉁상품과 싸구려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편견은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소통하지 못한 결과다. 편견의 원인이야 무엇이든 책임은 편견을 갖는 사람과 그 대상 모두를 해친다. 방학을 맞아 해외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해 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인 이유다.

 

2018.02.02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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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장관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문가는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가지고 그 분야에서 비해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이 하루아침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전문가는 대부분 오랫동안 그 분야의 일을 한 사람이다. 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거나 혹은 밥벌이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문가라는 말에는 자기 분야에 대한 자부와 자존의 품격을 가진 사람들의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Aura)가 있다.

서울신문 중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끈 총감독 송승환 씨의 며칠 전 인터뷰가 화제다. 그는 자신이 잘한 일 중 하나가 MB정부 때 문화부 장관을 거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MB정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 문화부 장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는 직접 물어봐야 알 일이지만, 나는 그 의미가 후자일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그러한 선택이 그가 문화기획전문가로서, 연극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전문가다운 자부와 자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 말은 문화부장관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일생을 바쳐 일궈온 자기 분야 전문가로서의 열정과 자부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멋지지 않은가? 누구는 하지 못해 안달인 자리를 거부하고 자기 분야에서 자기가 즐기는 일을 꼿꼿한 자부와 자존으로 성공적으로 일궈내는 전문가. 평창 동계 올림픽의 개폐회식에서 가슴 뛰는 감동을 얻은 이들이라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드론쇼와 마지막 성화 주자였던 김연아의 공중 스케이팅 그리고 선수단 입장 내내 춤을 함께 춤을 추던 자원봉사자들의 열정에 압도된 이들이라면, 그러한 성취가 어디에서 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송승환 씨는 젊은 시절 텔레비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도 늘 자신을 연극배우라고 불렀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젊은 시절 그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지향점에 대한 반복적인 선언이 아니었을까? 지향해야할 정체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연극으로 시작해서 방송과 공연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는 그가 보여준 전문가로서의 성취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기 분야에서 브랜드를 갖게 된 전문가에게 마치 시혜나 베풀듯 장관직을 권하는 풍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장관이야 해당부서에서 그 분야 일을 평생 해 온 전문 관료들이 맡으면 될 일이다. 20년 전쯤 김영하 작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대다수 작가들이 대학교수로 가는 세태를 꼬집었었다.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마치 교수인양 대학으로 가서는 창작을 이어가지 못하는 세태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작가의 유명세에 편승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모셔가는 대학교를 비판한 것이다.

장관이든 교수든 그것도 전문가의 영역이어야 할 것이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전문가의 영역에 불쑥 다른 영역의 전문가가 들어오는 것은 둘 다의 전문성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분들이 장관 자리를 제안 받고 입각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대부분 기대만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그동안 쌓아왔던 명성에 상처만 내고 초라하게 물러났다. 전문가의 전문성을 유명세 정도로 이해하거나 지나치게 신화화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면 지위나 권력을 앞세워 시혜를 베풀 듯 제안하기 전에 그가 갖고 있는 전문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중을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살아가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송승환 씨의 장관직 거부와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자꾸 연결되며 멋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감상은 아니리라.

 

2018.03.3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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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영화가 가슴으로 읽히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간이 남아서 하는 일보다 시간을 내어서 하는 일이 재미있다. 숨넘어갈 듯 분주할 때면 그런 시간이 더욱 간절해지고는 하는데, 지난 주말이 그랬다. 해야 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영화 두 편을 보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는 분노와 화해를 이야기한다. 영화 속 세 개의 빌보드는 딸아이의 억울한 죽음에 무관심한 세상을 향해 진실 규명의 요구이며, 범인을 꼭 잡겠다는 의지이고, 딸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의 표현이다. 세 개의 빌보드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은 거침없고 당당한 엄마 밀드레드의 분노였다. 지켜주지 못했으면 그 죽음의 억울함만이라도 풀어주어야 할 텐데, 진실을 밝혀주어야 할 경찰이 손 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밀드레드는 분노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이어간다. 암 투병 중 자살하는 경찰서장 윌러비, 방화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제임스, 파면된 이후에도 진실을 밝히려 노력하는 경찰관 딕슨. 이들은 모두 흠결과 모순 안에 존재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밀드레드를 도와 진실을 밝혀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당위적인 화해나 구원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왜 화해에 이르지 못하는지, 화해에 이르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각기 다른 존재인지, 그럼에도 화해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스콧 쿠퍼 감독의 <몬태나>는 폭력과 증오의 역사를 지나온 사람들의 화해와 구원을 이야기한다. 전역을 앞둔 전쟁영웅 블로커 대위, 죽음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추장 옐로우 호크 일가, 코만치 족에게 가족 모두를 잃은 퀘이드 부인, 인디언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윌스 병장. 이들은 증오와 폭력이 반복하면서 그려낸 피해와 가해의 무간지옥과 그곳으로부터의 구원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 용서하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정의는 언제든 갖가지 이해관계나 다양한 맥락에 의해 변질되고 왜곡될 수 있지만 용서와 화해는 더불어 살 수 있는 변하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코만치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퀘이드 부인이 백인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인디안 소년을 데리고 시카고로 떠나는 것도, 그 기차에 인디언 학살로 인해 전쟁 여웅이 된 블로커 대위가 전역한 모습으로 오르는 것도 그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거친 말 대잔치라도 벌이는 듯, 거칠고 센 말들이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요즘이다. 거칠고 센 말들은 잠시 이목을 끌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소통하거나 설득시킬 수는 없는 언어다. 더구나 거칠고 센말은 그 강도로 인해 왜곡되고 다양한 매체에 흔적을 남김으로써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을 배반하고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더구나 SNS를 통해 공론의 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개별화된 정보가 터무니없는 신뢰를 갖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공유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거칠고 센 말들은 가공할만한 폭력으로 확대재생산 되지 않는가. 이청준은 떠도는 말들-언어사회학 서설Ⅰ》에서 인간이 말을 배반함으로써 말들은 제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왜곡되어 길을 잃고 떠돌고 있다고 비판했다. 작가가 두렵게 예견했던 일이 약 40년이 흘러 지금 이곳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인간이 말을 배반하고 결국 말은 인간을 배반하게 됨으로써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불통의 폭력이 되고 있는 현실, 그것이 앞으로 어떤 괴물이 될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렵다.

2018년 지금 이곳에서 <쓰리 빌보드><몬태나>가 가슴으로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밀드레드와 퀘이드 부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용서를 보았다. 원수지간이던 블로커 대위와 옐로우 호크가 어떻게 이해하고 화해하는지도 보았다. 구시대의 언어로 윽박지르는 빅마우스가 선두에 서던 시대는 갔다. 자극적인 말로 거칠게 공포와 분노를 부르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다. 협박의 언어는 지지를 얻을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좀 더 진정성 있는 이해의 언어 세련된 설득의 언어가 필요한 시대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부를 뿐이라는 대사가 절절한 이유다.

 

2018.05.1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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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헤어롤 혹은 거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하철을 탈 때면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사이를 오간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딱히 눈을 둘 곳도 귀를 기울일 곳도 없는 까닭이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관심이나 접촉이 두려워서다. 혹여 라도 뜻하지 않은 접촉으로 오해를 부를까 손도 팔짱을 끼어 단속을 한다. 그날도 그랬다. 지하철을 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낯설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딸아이 나이 또래의 여대생이었는데 앞머리에 핑크색 헤어롤을 감고 있었다. 차분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앞머리에 핑크색 헤어롤을 매달고 있는 모습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따금 우리과 학생들도 강의시간에 헤어롤을 감고 들어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처음 본 모습이었다.


헤어롤을 감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그 헤어스타일은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더욱 멋진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 텐데,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공공장소에서 보여주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녀에게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보여주고 싶은 사람의 밖에 존재하는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무관한 존재 혹은 아직 관계를 맺기 전인 존재들 사이에서 허락된 익명의 자유로움. 그 익명의 자유가 숨겨준 것이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자신이 익명화시켜버린 지하철 안의 사람들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그 정도의 거리로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1초에 41,000개의 게시물이 업로드 되고 1분마다 180만개의 좋아요가 눌러진다는 페이스북은 어떠한가? 나 역시 페이스북에 일기처럼 글을 자주 올린다. 보여줄 만한 사진만 골라서 올리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만 다듬어 들려주는 페이스북은 누구에게나 절묘한 거리를 유지시켜 준다. 페이스북이 확보해주는 거리는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충족시키는 자기 증거욕과 동시에 온전히 노출하지는 않음으로써 은폐하는 익명의 자유 사이에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 혹은 보여주지 못하는 페이스북식 말 걸기는 진정한 이야기에 이르지 못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좋아요와 댓글을 달면서 즐기는 페이스북이 진정한 이야기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쉬운 일이다.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즐거운 말 걸기여야 한다. 삶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한 것들을 타자와 나누고자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과정, 타자에게 말을 걸고 소통함으로써 관계를 맺으려는 과정이 이야기여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이야기에는 타자가 전제되어야 하며, 그들과의 건강한 관계 맺기를 위한 시도와 고민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지 이야기를 통해 타자를 이해할 수 있고, 타자를 이해한 만큼 삶은 깊어지고 향기로워질 수 있기 않겠는가.

헤어롤을 어디서 하고 있든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괄호 속에 묶어버리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을 괄호 속에 묶는다면 그렇게 묶고 있는 자신도 다른 이의 시선에서 배제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페이스북을 통해 자기만족적인 드러내기를 하거나 적당한 익명성 뒤에 숨는 것 역시 큰 허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오인하고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페이스북에서 정말 보고 싶은 것이 화려한 먹방 사진이 아니라 그것을 찍고 있는 사람의 진면목이듯이 다른 이들이 보고 싶은 것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7.08.1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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