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라, 봄이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올 봄은 참 더디게 온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의 영문 제목처럼 <April Snow>가 내릴 정도니 달력도 무색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성급한 꽃잎은 벌써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학생들의 연구실 방문이 잦다. 스스럼없이 연구실을 찾아오는 제자들이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번 방문은 조금 무겁고 진지하다. 찾아오는 4학년들 의 손에 자기소개서가 창백하게 들려 있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질문의 성격과 요구가 다르다보니 자기들이 써놓은 내용은 선생들에게 점검 받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어 공인점수는 이제 별다른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하는지 어학연수는 필수이고, 국내는 물론 해외봉사 실적까지 은연중에 요구하는 실정이다 보니 학생들은 늘 갖춘 조건보다 갖추어야 할 조건에 늘 쫓기게 된다. 학생이 들고 온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뒤에 잔뜩 붙어 있는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보다가 그의 쫓기듯 달려왔을 대학시절이 문득 안타까워졌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학교에서 과제와 팀 프로젝트로 밤샘을 하면서 집안 사정으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했던 그 학생의 일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안다고 했는데, 외국어 점수와 각종 자격증은 물론 국내외 봉사활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그의 자기소개서에는 정작 보여야할 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도 둘째도 중간고사란다. 첫째는 학원 보강으로 늦은 시간 학원이란다. 연구실에서 들어가면서 데리러 갔더니 아직 수업중이라고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 백화점이 있고 주변에 상가와 의심스러운 술집들이 밀집된 지역에 아이의 학원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부모들이 차 안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11시가 다 되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내려왔다. 아직 중학교 2학년인 아이의 핼쑥한 볼이 안쓰러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에게 부모의 생각대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그 경쟁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면서 내내 복잡했던 것은 늦은 시간 학원 앞 도로만이 아니었다.
끝없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는 대학생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쟁 안에서 갈수록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없는 자기 소개서와 내적 성장 없는 학습으로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제자와 아이에게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과 부모의 조언보다는 아이폰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어플리케이션이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 ‘지금 이곳’에서 우린 과연 삶의 봄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봄은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의미고,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변화가 생명의 중심인 것은 지금 이곳의 무엇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다. 그저 지금보다는 내일이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좀더 알 찬 삶을 살아내려는 옹골찬 의지가 변화다. 진정한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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