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은 황우석이 아니다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황우석은 이제 황우석이 아니다. 줄기세포 선도연구자로서의 황우석은 이미 개인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배아 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거친 레토릭이 가능하다면, 이미 황우석은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담론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린 먼저 황우석 교수의 업적을 세계 최고나 생명공학의 선도 기술이라는 식의 발표에 눈이 멀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파악이나 성격에 대한 고민 없이 막연한 기대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고 진지하게 성찰해야한다. 사실 우리는 성체줄기세포와 배아줄기세포의 차이를 구분하거나 그 연구의 내용을 조금 더 알려는 노력보다 그 연구의 경제적 효과는 얼마나 되는지, 당장 모든 난치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지, 심지어 황우석 교수가 노벨상을 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따위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연구는 그 가시적 성과나 향후 그것을 활용한 기대만큼이나 생명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깊이를 확보해야하는 시점에 다다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루에 41백 명, 1년에 150만 명의 낙태가 행해지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배아줄기 세포를 가지고 생명이냐 아니냐고 논쟁하는 것은 서글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의 낙태문제에 대하여 그동안 종교계가 보여 왔던 원칙적이지만 소극적인 대응에 비하여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단호한 태도에 당혹스런 의아함을 감추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가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서글픈 아이러니나 당혹스런 의아함 따위야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적으로 배양된 줄기세포가 자궁에 착상돼 인간이 될 확률은 없어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인간복제는 구분돼야 한다는 황우석 교수의 주장이나 사람의 생명은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순간부터이기 때문에 인간 생명체인 배아를 복제하여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단언하는 종교계의 주장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이 없다. 환자의 골수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하기 때문에 생명윤리와 상관없는 성체줄기세포 방식을 선택해야한다는 주장이나, 성체줄기세포 방식은 수명도 짧고 분화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치료에 한계가 있으므로 배아줄기세포 방식을 택해야한다는 주장도 모두 납득할만한 것들이다.

어설프게 황희 정승의 흉내를 내자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주장들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제부터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단호한 주장만 있고 상대 논리가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닫아버린 논쟁이 아니라 상대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를 기반으로 엄정한 논리와 논거를 통한 설득의 노력이 지금은 필요한 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우석 교수와 종교계 인사가 만났듯이 과학과 종교, 과학과 윤리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서 만나고 토론해야한다. 과학이든 종교든 윤리든 간에 모두 인간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만나야할 이유임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르지 않다면 만나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만나서 격론을 벌여야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소망한다, 이번 논쟁이 보다 격렬하게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그것의 격렬할수록 생명 윤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깊이 있는 천착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이 오래 지속될수록 논쟁의 내용은 인간다움에 무게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명 윤리가 그 존엄성과 상관된 것이라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는 신의 몫이자 우리 인류 공동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생존을 넘어서 인간다운 품위와 자존을 만들어가는 노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소망한다, 배아줄기세포의 연구와 같이 우리의 존귀함을 깨닫고 지켜갈 수 있는 의식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시작될 수 있기를. 아울러 황우석이 황우석만이 아닌 것처럼, 생명은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다움은 실체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찾고 가꾸고 지켜가려는 노력이라는 것은 이번 논쟁이 결과하기를.

한화한화인2005.6

이 글이 쓰여지고 불과 몇달 뒤에 황우석 사태가 벌어진다. 생명윤리 이전에 연구윤리에 대한 검증이 우선이었다. 급한 신화화를 검증하고 되묻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는 계기였다.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냄비근성, 관심과 열정의 다른 이름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우리 사회의 문제로 냄비근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각종 정관계 비리나 사회 부조리 심지어 축구의 승패 등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어떠한 이견도 용납하지 않고 몰아대며 들끓어대는 여론이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현상을 냄비의 쉽게 끓고 쉽게 식어버리는 속성에 비유해 꼬집는 말이다. 들어보면 틀리지 않은 말 같다. 분명 우리 사회는 냄비처럼 쉽게 끓고 쉽게 식어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특성으로 은근과 끈기냄비근성이라는 상반된 속성의 말을 함께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패러독스로서 전자나 후자 어느 것도 주도적인 속성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일반적으로 전자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를 경계의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할 때, 우리 사회가 은근과 끈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냄비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효율성의 이름으로 도입된 조리 기구일 뿐이다. 근성이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굳이 그러한 근성이 있다면 냄비 근성보다는 오히려 가마솥 근성이라고 해야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백보 양보해서 냄비근성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과연 버려야할 부끄러운 우리의 근성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또는 다양한 것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과 관심의 발로로 볼 수는 없는가? 쉽게 끓기 위해서는 끓기 위한 준비가 되어야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의 다른 이름이다. 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는데 끓어오를 수 없는 까닭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학생운동이라고 한다.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대한 관심을 접어버린 일본의 대학사회와 비교해 볼 때, 사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뜨거운 한국의 대학가는 살아 있고, 대학의 청년정신이 살아있는 한 한국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과 열정이 어디 대학가뿐이겠는가? 아울러 쉽게 식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관심과 참여가 일회적이고 산발적이어서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될 때인데, 과연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끝임 없이 등장하는 사회적 이슈에 우리가 빠짐없이 관심과 집중을 보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그것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것과 선택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것일 때에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관심은 냄비근성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참여와 열정의 에너지를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어떻게 긍정적 에너지로 바꿀 것인가로 수렴되어야만 한다. 아무 이유 없이 냄비만 달구었다 식혔다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냄비를 달구기 전에 무엇을 위해 냄비를 달구어야 하는지, 냄비는 어떻게 달구는 것이 가장 생산적인 것인지, 냄비를 식히는 시기와 방법을 조절할 수는 없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냄비에 끓일 때 맛있는 음식과 솥에 끓일 때 맛있는 음식 정도는 구별하는 지혜도 더불어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는 냄비가 아니라 컵라면 용기처럼 즉시 끓일 수 있는 것들이 선호되기도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끓이고 식는 속도에 의한 가치의 우열 판단이 아니라 그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는 점이며,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냄비근성이라는 말에 움츠리지 말자. 그렇게 빨리 끓을 수 있는 것은 얇게 만들 수 있는 준비가 있었고 스스로 뜨겁게 달굴 수 있는 관심과 열정이 있어서가 아닌가? 모든 음식이 은근하게 끓고 천천히 식어야지만 맛있는 것은 아니다. 냄비는 냄비로서 족하다. 땜장이 아저씨가 솜씨 좋게 때워 놓은 낡은 양은냄비에 푸짐하게 끓여 먹는 라면을 나는 좋아한다. 인스턴트 라면은 가장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달굴 수 있고 식힐 수 있는 냄비가 제격이다. 그것은 곰탕을 끓이기 위해서는 가마솥이 제격인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은 집에 가서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잔뜩 끓여 냄비 채 놓고 식구들과 나누어 먹어야겠다.

한화한화인, 2005.4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아이 권하는 사회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육아의 질이 높아지고 교육에 대한 부담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핑크족과 딩크족의 등장은 놀랄 일만도 아니다. '핑크족(PINK·Poor Income, No Kids)'은 돈이 없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이며,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s)'은 자기 성취나 삶을 즐기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를 의미한다. 이 말들을 곱씹어보면 아이의 문제가 핑크족은 돈으로, 딩크족은 부모의 노력으로 귀착됨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을 낳아 기르고 제 몫의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는 돈과 부모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일 것이다.

핑크족이라는 말에는 아이를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하는 부부의 경제적 상황과 우리네 경제적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조적인 동조와 동시에 아이 양육에 엄청난 개인 차원의 비용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함께 담겨져 있다. 반면 딩크족이라는 말에는 부정적 의미와 비난의 어조가 실려 있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자기 삶을 즐기는 데 사용하고 있는 책임지기 싫어하는 철이 덜 든 신세대 부부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딩크족이 자기 성취자기 삶 즐기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들은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성취보다는 우리의 성취나 행복에, 즐기는 삶보다는 책임지는 삶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 때문이다. 우리와 자기를, 책임과 즐거움을 분리하는 사고방식으로는 딩크족의 등장은 그저 책임지지 않으려는 철이 덜 든 부부의 등장이라는 말 이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우리나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는 책임이란 지극히 공허한 말이 아닌가? 자기 성취나 자기 삶의 즐거움으로 자식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자신만의 성취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린 좀 더 다양한 삶을 확보하고,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며,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핑크족과 딩크족의 등장을 나는 자기 자신의 발견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으로 해석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문제는 아이와 돈이 아니라 나 자신의 발견에게 있는 것이다. 전혜성의 소설 마요네즈에서는 자신을 가꾸기 위해 마요네즈로 머리를 감는 철없는 엄마 때문에 의무에 눌려 사는 딸이 엄마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며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진정한 이해와 화해에 이른다. 이러한 맥락을 확장해보면 딩크족은 부모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 좀 더 의미를 주어야하지 않을까?

아이는 내 삶의 일부이지 삶 그 자체이거나 전부는 아니다. 이와 같은 나 자신의 발견에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야한다는 당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이유는 아이는 선택이 아닌 그 자체로 충만한 기쁨이며 사랑이라는 사실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발견이나 성취와 아이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부조를 통하여 출생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일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주체적인 삶 속에서 아이와 더불어함께 갈 것이냐와 즐거움과 책임이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고민하느냐에 있다.

두 딸을 두고 있는 나는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다. 다만 부모로서 내가 주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아이들도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는 있다고는 말할 수는 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광고의 문구나 내가 없어도 세상은 계속된다는 이승훈의 시가 말해주는 엄혹한 질서를 오늘 다시 생각해본다. 핑크족과 딩크족, 이들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다양이며 발견이다.

한화한화인》2005. 5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로하스와 웰빙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삶은 몇 가지 단서를 데리고 다닌다. 그 중에서 가장 절박한 것은 더불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아주 소박하게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는 쉽게 살아가기 위해 수행해야하는 번거로운 숱한 일들과 함께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심리적정서적 공황상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함께해야 할 대상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이나 세계로 확대되거나 또는 과거의 조상들로부터 미래의 후손들까지로 확대된다면 그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아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로하스의 사전적인 의미는 건강과 지속 성장성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이다.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로하스는 건강과 환경이 결합된 생활을 지향함으로써 자신의 건강은 물론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를 뜻한다.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로하스족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정보에 밝고 독자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로하스족은 친환경적이고 합리적인 소비패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개인적 차원의 참살이를 지향했던 웰빙과는 달리 사회적 차원의 참살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손쉬움과 안락함을 추구하기 자연을 거스르고 이웃을 배려하지 않은 결과, 지금 이곳에는 자연과 이웃으로부터의 숱한 위협이 상존하게 하였다. 이러한 위협들은 대체로 총체적인 것이어서 그 원인을 어느 것 하나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유를 들자면, 살면서 우리를 쉽고 안락하게 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것이며, 내가 배려하지 않았던 이웃들이 그들이다. 하여 해답은 자명하다. 그것이 자연이든 이웃이든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어야지만, 진정한 참살이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하스는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로하스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같은 이유로 자명하다. 로하스의 전제는 더불어 함께여야만 하며, 그 결과가 개인의 참살이는 물론 사회적 참살이여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몰려오는 로하스 열풍은 이전의 웰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웰빙이 있는 자들의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개인적 차원의 참살이였다는 점에서 비판 받았다면, 웰빙에 환경적인 관심만을 더한 것이 지금 이곳의 보하스 열풍이라고 거칠게 단순화시켜도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생활용품을 사용하고 유기농 먹거리만 먹으며 생태관광을 즐기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은 이기적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일회용품 줄이기, 장바구니 들고 다니기, 천기저귀 쓰기, 대안생리대 쓰기 등과 같은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라면 소박하다.

문제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 차원에서 더불어 함께할 것이냐이다. 그것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와 어떻게 함께 나눌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노력은 공시적으로는 너와 나의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통시적으로는 우리 후손들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굳이 그 중에서 우선할 것을 고르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우리 주변의 이웃에 대한 배려를 선택해야만 한다. 오늘의 우리가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면서 내일의 후손들에 대한 책임 운운하는 것은 저급한 기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하지 못하는 보하스는 꿈일 뿐이다. 네가 행복하지 않고서는 나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단순한 이치에서 우리의 고민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이 선행되지 못한 지금 이곳의 로하스는 웰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웰빙은 절대 웰빙이 될 수 없으며, 보하스는 보하스가 될 수 없기에 꿈이다. 꿈에는 늘 내가 없다.

 한화한화인》2005. 3.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X파일과 당연하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X맨을 찾아라>가 인기다. 사실 X맨을 찾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재미는 있는 모양이다. X맨은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게임에 고의로 져주면 된다. 출연자나 시청자의 심리 게임을 유도함으로써 재미를 유도한다는 의도지만, 사실 그 즐거움의 실체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이 공인된 속임이다. 속인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감추고 찾아내는 사이의 긴장을 즐기는 것이다.

<X맨을 찾아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당연하지 게임이다. 이 게임의 원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물을 수 없는 치부들을 스스로 시인하게 하거나, 또는 개연성 있는 사실이나 터무니없는 사실에 대한 시인을 유도함으로써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허구와 진실의 모호한 경계를 이용하는 이 게임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까발림, 용인된 무례함, 터무니없음 등으로 표현되는 이 저급한 욕망의 밑바닥에는 연예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이 있다. 그것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X파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X 파일이 존재하는 사회는 투명하지 못한 사회다. X파일이 존재한다는 말은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 드러내기 어려운 혹은 감추어야 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드러낼 것과 감추어야 할 것을 가름하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감추면서도 완전히 폐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감추면서도 폐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은 X파일의 사실과 무관하다는 도덕적 우월성이나 알리바이를 위한 것이라는데 있다. X파일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욕망도 이와 같이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의식을 기반으로 한 음험한 변별 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르네 지라르가 말했던 희생양의 현재 모습이 아닌가? 문제는 도덕적 구분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자기 정당화의 논리는 상대적인 우월의식을 통하여 희생양에 대한 가혹한 윤리적 비난과 처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좀 더 이성이고 자기 성찰적인 시각으로 X파일을 보면 어떨까?

연예인 X파일은 연예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며 동시에 우리가 지닌 음험한 욕망에 다름 아니다. X파일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좋아하는 꿈의 실체이며,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러리라는 우리의 기대와 상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박한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둘 다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이제 겨우 드러나기 시작한 근현대사 X파일들의 존재다.

속속 드러나는 과거사 X파일을 보며 X파일이 존재하지 않는 세대가 행복한 세대라는 당위적인 요구는 하지 말자. 이해관계가 결부된 사실에 대한 당위적 요구는 얼마나 공허한가? 문제는 또 다른 X파일이 존재하지 않도록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있다. X파일의 존치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결정권자의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좀 더 준열하고 엄정할 수 있도록 비판과 견제를 상시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사회적 파장으로 인해 당대에는 드러낼 수 없는 사실이기에 X파일이 불가피하다면 반드시 일정 시간 이후의 공개를 원칙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감출 수 있다는 미련한 의지를 거세시킬 수 있으며, 감출 수 없기에 사회와 역사에 대한 겸허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더 록>에서 X파일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을 보며 환호하는 니콘라스 케이지의 환호보다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감옥행을 택한 손 코넬리의 의지를 좋아한다.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스파이더맨의 공통점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X맨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를 돕는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들이지만 허구이기에 감동이 없다. 하지만 구산동 결핵촌에 매년 익명으로 쌀을 보낸다는 우리 시대의 X맨들은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현실의 이웃이기에 감동적이다. 올해에는 추잡하고 폭력적인, 그러기에 언젠가는 까발려져서 엄혹한 심판대에 서야하는 X파일 말고, 드러내지 않음으로 더욱 즐거워지는 그런 X파일을 우리 모두 실천해보면 좋지 않을까? 당연하지!

 한화한화인》2005. 2.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B형 남자, 상수항과 변수항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최근 ‘B형 남자라는 노래와 영화 때문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라기에는 그것의 범위가 깊이가 그리 간단치 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100대 기업 CEO38.7%B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B형은 개성이 뚜렷하고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에 BCEO가 많은 것은 우리경제가 기존의 경영형태에서 변화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증거라는 식의 근거 없는 확대 해석으로 우리의 인식 압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협중앙회 한밭사업단이 공제보험 담당 직원을 모집하면서 지원자의 혈액형을 O형과 B형으로 제한했다는 기사는 혈액형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재미를 넘어 맹신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맹신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폭력은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데 기민하고, 그 가름은 언제나 근거나 논리를 넘어선 것들로서 견고하기까지 하다. A형은 성실하고 책임감은 강한데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B형은 개성적이고 진취적이지만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바람둥이가 많고, O형은 활달한 성격에 사교적이지만 즉흥적이고, AB형은 괴팍하다는 식의 가름은 재미로 본다고 쳐도, 그것으로 업무 능력이나 궁합 등의 근거로 활용하는 것은 다분히 폭력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혈액형은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자기 것이 된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혈액형은 성격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질병과 밀접한 상관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혈액형에 의존하는 것일까?

혈액형은 상수항이다. 상수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기 싶다. 내 혈액형이 이래서 내 성격이 이런 걸 어떻게 하겠냐는 생각, 그의 혈액형이 이렇기 때문에 나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생각 등에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전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을 때마다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서 기능하게 된다. 또 다른 원인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기 성찰의 부재에 있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간에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파악하고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에도 서툴고 서툰 만큼 자신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타인에 대한 성찰과 파악을 대신해줄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정체성은 타자(他者)로부터 온다고 했다. 주체를 부정한 이 말은 주체가 타자에 종속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혈액형을 통해서 성격을 가늠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상수항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그러므로 준비해야할 변수항을 찾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삶이 명사적 의미보다는 살아가겠다는 의지적이고 동사적인 의미가 더 강해야 한다. 그러한 의지를 통한 개선의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서는 通變之謂事(달라져 감을 온전히 알아냄을 일이라고 한다)”고 했다. 낼숨()과 들숨()의 쉼 없는 반복을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 변화가 삶의 기본 원리이기에 주역에서 성현들은 그 변화의 도를 파악하고 깨닫는 것이 일이라고 칭하여 중히 여긴 것이다. 변할 수 없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파악하는 일은 기만일 뿐이다. 그래서 상수항인 혈액형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야할 성격을 파악하려는 지금 이곳의 시도들은 성찰 없는 시대의 우울한 초상일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그래도 굳이 혈액형으로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러므로 준비해야할 변수항이거나 변화하기 위해 준비해야할 의지여야만 한다고. 혈액이 내 안에 있듯, 성격도 내가 만들어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화한화인2005.1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미스 스트롱, 두려움과 분노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신문은 연초에 새해의 트렌드를 예측하며 미스 스트롱이라는 낯선 조어를 빼놓지 않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신문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트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이다. 물론 권투, 프로레슬링, 이종격투기, 익스트림 스포츠 등과 같이 그동안 여성들의 기피하던 영역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미스 스트롱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따위의 순진한 견해에서부터 남녀의 경계허물기로 인식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장들이 차고 넘쳤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이냐에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남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부재를 의미하며, 궁핍하고 척박했던 전후에 어머니가 이끌던 나목(裸木)의 시대를 상징한다는 해석을 상기하면서, 이와 같은 논리를 미스 스트롱의 트렌드에 적용하고자 할 수도 있다. 혹은 미스 스트롱의 트렌드화는 남성이 스트롱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라는 식의 위험한 단순논리도 등장할 수 있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구원투수처럼 등장하는 여성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읽으려는 거칠고 소박한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또는 미스 스트롱의 등장을 미스터 뷰티의 등장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을 하며 양성 간의 경계허물기의 일환으로 일반화시키려는 근거없는 주장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미스 스트롱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트렌드화하려는 그 의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미스 스트롱의 예로 자주 등장하는 <다모><대장금>을 기억해보자. <다모>의 채옥은 이전의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강인한 정신력과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대자금>의 장금이도 불굴의 의지와 빼어난 재능으로 남성들을 제압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미스 스트롱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옥과 장금이의 걸출한 능력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나 가부장적 권력구조로 다시 수렴되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도 결국 장군과 결혼하는 것을 행복한 결말로 설정하고 있지 않은가?

미스 스트롱(Ms. Strong)은 미스터 뷰티(Mr. Beauty)의 짝패다. ‘미스스트롱의 결합은 미스터뷰티의 결합만큼이나 낯선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둘은 늘 붙어서 쓰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합성한 미스 스트롱2005년 대표적인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흥미롭지만 매우 불순해 보인다. ‘미스 스트롱이 낯선 것은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며 동시에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완강하고 고집스런 기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스 스트롱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독립여성을 의미하는데 그 말 속에는 그럴 수 없는혹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전자는 분노를 낳고 후자는 두려움을 낳았다. 그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19세기 대중의 등장을 아무 생각 없는 무례한 무리들(mass)’이라고 칭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존의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았던 기득권층의 분노와 두려움이 대중이라는 비하적인 의미로 수렵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스 스트롱이라는 말은 표면적으로야 긍정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형적인 여성들이라는 의미의 가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닭살스런 공주에서 주체적인 미스 스트롱으로 거듭난 <슈렉>의 피오나 공주를 보며 우리가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행동을 엽기스럽다고 느꼈기 때문 아니었나? 엽기는 이미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긍정적인 것처럼 읽혀지는 것은 이 트렌드와 함께 그 증거로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한 광고회사의 공이 컸다. 그만큼 미스 스트롱은 상업적 목적을 전제로 한 신조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세대적 정체성이 모호했던 ‘X세대나 실체가 불분명했던 미시족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트렌드는 지금 이곳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전망함으로써 미래의 시장수요와 사회적 흐름을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유념하자. 그렇다면 미스 스트롱을 좀더 긍정적이고 생산적 실체로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이 지닌 장점 위에 이성이 지닌 강점을 융합시키는 양성(兩性) 추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적 영역/사적영역, /, 강함/약함, 주체적/의존적, 이성적/감성적, 우등/열등 따위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나 구분을 던져 버려야 하는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처럼 지구 위의 반은 여성이고 그 나머지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반이 구속되고 의존적이며 약하고 열등해서는 결코 나머지 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 ‘미스 스트롱이 더 이상 낯선 단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한화 한화인> 2005.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당신의 위로가 찬란한 이유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월은 온통 연두다. 연두는 햇빛을 온몸으로 통과시키며 제 빛깔을 만든다. 막힘없고 거침없는 것들은 강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아서 제빛과 어울리게 하는 연두와 같은 것들이다. 오월은 그런 계절이다.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더할 수 없는 찬란함에 이르는 계절, 그것이 오월이다.

어제 저녁 친구의 조문을 다녀왔다. 친구임에는 분명하지만 친구라기에는 25년쯤의 시간을 건너야 하는 대학동기의 빈소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선명한 인상의 그 친구는 작은 소리로 말하지만 크게 움직일 줄 아는 친구였다. 늘 최루탄 가루가 마른버짐처럼 피어나고, 민주화의 구호들이 절실한 만큼 격했던 그 시절, 같이 분노하고 아파하며 그 긴 겨울공화국을 건너왔던 친구들이 전날 벌써 한걸음에 달려왔었다는 말을 이제는 터무니없이 나이든 선배가 전해줬다. 처연하게 타오르는 향 위로 탐스럽게 핀 흰 국화가 쌓이고 있었고, 그 위에서 대학시절의 선한 눈 그대로 친구는 그렇게 시간을 멈춘 채 영정 안에서 웃고 있었다. 작년 여름 동기들이 학교 앞에서 모이던 날, 일이 늦게 끝나서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에게 보자고 약속했는데, 어제 우리 동기들은 다음을 잃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스스로 목숨을 놓기 전, 친구는 동기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각자 사는 일에 분주한 친구들은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고, 결국 빈소에서 영정으로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약속은 부질없을 뿐이다.

대학마다 축제가 한창이다. 혹자는 대학축제가 낭만이 사라졌고, 술만 퍼 마시며, 연예인들의 축하공연 중심이라고 비판한다. 옳은 말이다. 학생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는 해마다 줄고, 그것이 주는 만큼 주점과 어설픈 유흥이 넘치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학생들의 참여가 해마다 줄고 있다는 점이다. 즐길 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없고 즐기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축제가 흥성거릴 수 있겠는가? 가야 볼 게 없다거나 즐길 것이 없다는 볼멘소리는 사실이지만 옳지는 않다. 그것은 잔칫상을 차려야할 주체가 누군가 자기 잔칫상을 차려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찬란한 계절,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찬란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축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있느냐는 사실만으로도 축제는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위로가 필요하다. 그것이 하림의 노래 <위로>이거나 즐거운 축제가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 위로하거나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아볼만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놓을 만큼 위로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그걸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나?”라고 묻는 존 라세터의 말이 시간이 흐를수록 뼈저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찬란한 계절에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있는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할 때다. 연두가 찬란한 오월이다.

2009년 <한대신문>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퍼놀로지, 즐겁지 않은 것은 독이다.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학과 커뮤니티에 누군가 게임을 올려놓았다. 테트리스와 유사한 <떼굴떼굴>이라는 게임인데,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게임에 학과 학생들이 푹 빠져버렸다. 학사 관련 공지나 과 행사 등을 알리거나 행사사진 정도만 올리던 커뮤니티가 갑자기 북적거렸다. 인터넷을 굳이 뒤지지 않더라도 이 정도 게임이야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인데 이토록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곳이 학과 커뮤니티였기 때문이다. 클릭만하면 할 수 있도록 게임 아이콘을 학과 커뮤니티 대문에 달아두었는데 그곳에 1등의 이름이 게재되었다. 다른 게임 사이트에서의 랭킹이야 거의 익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이곳은 우리과 학생들끼리의 경쟁이니 손쉽게 순위가 바뀌고 그것이 즉시즉시 공지가 되는 현장성을 확보하고 있는 탓이었다. 더구나 게임이 간단하다보니 접근이 용이하고 조금만 집중하면 상위 랭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매력까지 있으니 어떻게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사카에 있는 유니버설스튜디오 재팬 (Universal Studios Japan)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어트랙션(attraction)<스파이더맨>이다. 대부분의 어트랙션이 50분 이상 기다려야하는데 <스파이더맨> 어트랙션은 90분 이상의 기다림을 요구한다. 10시에 개장을 하면 입구부터 <스파이더맨> 어트랙션까지 뛰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참 볼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관람객들은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다 못해 극도로 화가 날 지경이 되면 신문사처럼 꾸며진 지하창고와 사무실을 거쳐 어트랙션 앞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일단 어트랙션에 타고나면 그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후회되지 않는다. 완성도 높은 4D 영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람하는 동안에 온몸의 감각을 깨워놓는 강력한 음향과 어트랙션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가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퍼놀로지(funology)’는 첨단 기술(technology)을 기반으로 즐거움(fun)을 추구하는 트렌드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최근 더욱 주목받고 있는 것은 퍼놀로지가 이제 주도적인 트렌드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떼굴떼굴>과 같은 소박한 형태의 인터넷 게임에서부터 <스파이더맨> 어트랙션과 같은 첨단의 기술을 요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퍼놀로지의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화면을 가로로 볼 수 있게 한 애니콜 V500, MP3와 연동되어 운동량을 알려주는 나이키 신발, 졸음 방지 센서 이어폰, 둘둘 말아서 휴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낼 수 있는 롤 피아노, LCD 모니터를 장착한 러닝머신 등과 같이 첨단 기술을 통해 즐거움을 강화한 퍼놀로지 상품들뿐만 아니라 이노디자인의 랍스터 버너,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3단계 원형 배낭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즐거움을 배가시킨 상품들이 퍼놀로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유희가 인간의 본성(homo ludens이라고 할 때, 즐거움의 추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위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중세에는 즐거움은 경계하고 금기시할 요소로 억압되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상기해보라. <희극론>을 숨기기 위하여 책에 독을 발라 놓고 이것을 읽는 사람들을 살해하던 사제의 엄숙주의의 근원이 바로 즐거움은 불경의 근원이라는 믿음이다. 이와 같은 즐거움에 대한 경계는 근대 산업사회에서도 계속되는데 유용성과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경향은 후기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변화한다. 향유자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향유 여부가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면서부터 즐거움은 모든 문화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즐거움은 더 이상 금기시해야할 요소가 아니다. 일하기 위해서 즐겁게 쉬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일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인 것만 보아도 이러한 변화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물론 후기산업사회의 도래로 인한 사회의 고도화와 물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황폐화로 인하여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찾지 않을 수 없다는 절박함도 그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세가 트렌드로 급부상한 것이 퍼놀로지다. 단순한 소비를 넘어서서 보다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소비가 경제활동의 일환이라면 즐거움의 추구는 문화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와 문화 사이에 퍼놀로지가 있다. 특히 지식기반경제의 첨병으로 각광받고 있는 문화콘텐츠의 경우, 바로 이와 같은 퍼놀로지의 문화적 양상이라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즐거움을 기반으로 하는 무형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재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콘텐츠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면 우리가 퍼놀로지를 어떻게 보아야할지 판단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미니홈피에는 즐겁지 않은 것은 독이다라고 적혀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즐거운 일만해도 모자라는 인생 마음껏 즐기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원래 의도는 주도적으로 생활하고 스스로 해야할 일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주도하자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것도 독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해두자. 마치 <떼굴떼굴>을 하며 얻은 즐거움이나 <스파이더맨> 어트랙션을 타고나서 느끼는 재미를 쉽게 긍정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종삼은 <북치는 소년>에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떼굴떼굴>이나 <스파이더맨> 어트랙션은 그 열광적인 지지에 화답해줄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내용을 갖지 못한 즐거움은 공허하다. 공허한 즐거움은 쉽게 질리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퍼놀로지의 다양한 미덕이 미덕으로 남기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경계허물기를 통하여 문화적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과 다양한 퍼놀로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절실하다. 다시 한 번 말해두자, “즐겁지 않은 것은 독이다!”

2008년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문화콘텐츠의 정체와 가능성 그리고 광주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콘텐츠의 정의는 생성적이다. 뉴미디어와 다양한 콘텐츠의 결합으로 인하여 문화콘텐츠의 영역은 개방적 폭식성(暴食性)을 보이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규범론적인 정의든 범주론적인 정의든 간에 끊임없는 수정을 요구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콘텐츠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잠정적인 형태의 정의라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합의된 정의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는 문화콘텐츠를는 문화, 예술, 학술적 내용의 창작 또는 제작물 뿐 아니라, 창작물을 이용하여 재생산된 모든 가공물, 그리고 창작물의 수집, 가공을 통해서 상품화된 결과물들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정의한다. 여기에 심상민교수는은 원작자가 누구인지, 어떤 가공 프로세스를 거쳐 만들어졌는지가 명확해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콘텐츠 재화(contents good)'적 인식을 강조한다. 그는 또 창작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 예술작품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을 문화산업이라고 한다면, 놀이와 감상의 성격을 강화한 것을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고 하고, 그 가운데 상업화의 가능성이 높고’ ‘매체 연계성이 높은분야를 문화콘텐츠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비교적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할 때, 문화콘텐츠는 문화콘텐츠의 합성어로서, 문화적 특성과 콘텐츠적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는 매우 포괄적이며 인간의 삶과 밀접한 상관을 지니고 있는 탓에 실체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조형적 개념에 가깝다. 콘텐츠비즈니스연구소에 따르면 콘텐츠문자영상소리 등의 정보를 제작하고 가공해서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정보 상품이다. 이와 같이 상이한 성격의 두 개념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문화콘텐츠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부면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작권의 소재가 분명한 정보 상품이라거나 문화의 재화적 가치를 극대화한 것이라거나 그 정의가 무엇이든 간에 문화콘텐츠를 통합적인 실체로서 파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가령 문화콘텐츠 경영 전략이라거나 문화콘텐츠 기획혹은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등의 말들은 명료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매우 성기고 심지어 허구적인 개념들이다. 왜냐하면 문화콘텐츠라는 말이 매우 다양한 장르와 수다한 매체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그것들을 생산을 전제로 실천적 차원에서 파악해보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욱 유용하기 때문이다. 즉 각기 다른 것들을 포괄적으로 묶어놓고 그것을 통합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매우 공소할 수 있는 까닭이다. 물론 우리가 소위 문화콘텐츠라고 부르는 분야를 미국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영국에서는 창조산업 등으로 부르며 통합적으로 논의한 연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배적인 특정 장르를 중심으로 한 논의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개별적인 영역, 즉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캐릭터 등으로 불리고 있는 문화콘텐츠를 굳이 새로운 조어(造語)까지 하면서 정부가 주도했던 것은 뉴밀레니엄을 앞두고 새로운 정책적 비전 제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콘텐츠라는 용어는 실체적 개념이라기보다는 구성적인 정책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문화콘텐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사회적 흐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기보다는 매우 돌발적인 것이었고, 민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관()이 앞에서 선도하는 형국이었고, 문화적 역량이 결집된 결과 아니라 경제적 부가가치에 편향된 기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정책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노력에 비하여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것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개념과 범주로 묶으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문화콘텐츠에 대한 국내에서의 활발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세계적으로 두루 통용되는 보편적인 용어는 아니다. 사실 문화콘텐츠는 그 각각의 실체는 확인할 수 있지만 조형적이며 생성적인 현재 진행형 정의와 범주의 자기증식으로 인하여 개념적으로는 매우 모호한 상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문화콘텐츠를 둘러싼 담론들은 보다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양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러한 구체화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화콘텐츠를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파악하고 정부 부처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지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투자 리스크를 줄이고 보다 효과적인 기획-생산-유통의 합리적인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 모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문화콘텐츠가 대학 교육을 통해 학문적 탐구와 체계적인 교육이 본격화되고 있는 결과이다. 지속적인 사회적 수요와 학문적 체계화의 노력 그리고 산학이 연계한 다양한 실천적 시도들은 문화콘텐츠의 모호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문화콘텐츠의 구성과 실체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문화콘텐츠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그것에 관한 비관적 우려조차도 낙관적 미래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함과 의지의 다른 표현일정도로 강박에 가깝다. 이제 문제는 문화콘텐츠에 대한 보다 실천적인 논의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며, 그 결과가 얼마나 생산적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콘텐츠는 문화콘텐츠의 합성어로서, 문화적 특성과 콘텐츠적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양자는 동시에 구현되어야 하는 특성을 지닌다. 즉 문화가 콘텐츠에 종속되거나 콘텐츠가 문화에 종속되는 식의 종속관계가 아닌 문화와 콘텐츠가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문화콘텐츠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문화콘텐츠에 대한 관심은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에 대한 기대에 편중됨으로써 오히려 부가가치 창출에 실패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왔다. 문화콘텐츠가 지닌 문화의 자본화 가능성은 경제적 가치만을 지향함으로써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가치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느냐에 좌우되는 까닭이다. 경제적 가치에 편향되어 문화를 도구화하거나 효율성을 앞세워 창의성을 매몰시키는 일은 문화적 가치에 압도되어 경제적 가치를 배려하지 않는 일만큼이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문화콘텐츠를 통한 지속 가능한 성장엔진의 모색은 기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두 번째 특성은 문화콘텐츠 분야가 매우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장르의 다양성과 매체의 다양성 그리고 대상의 다양성을 문화콘텐츠라는 말은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가 광범위하다는 말은 그만큼 상호 연동이 용이하고, 상생적 결합에 의한 생산성이 높다는 말이며,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지식기반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음반, 캐릭터, 게임, 드라마, 공연, 뮤지컬 등의 장르와 웹, 모바일, TV, DVD, CD, DMB 등과 같은 매체 그리고 기획, 시나리오, 창작기술, 비즈니스마케팅 등의 분야를 고려할 때, 문화콘텐츠가 포괄해야 하는 영역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알 수 있다. 문제는 문화콘텐츠 분야가 광범위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모든 분야가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공통의 지향을 마련하여 협업 시스템을 지향해야한다는 것이다.

셋째 문화콘텐츠는 One Source Multi Use를 통해 부가가치 생산을 극대화한다. One Source Multi Use(이하 OSMU)란 하나의 원천콘텐츠를 중심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파생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이다. OSMU는 수직적 Multi Use와 수평적 Multi Use로 나눌 수 있다. 수직적 Multi Use는 장르 간 계열화(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음반, 게임 등)를 시도하기 때문에 장르 변화비용(Conversion Cost)이 높고 따라서 risk도 크지만 신규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익의 극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방식이다. 반면 수평적 Multi Use는 시간의 계열화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 즉 동일한 콘텐츠를 매체별로 노출시키는 시기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수직적 Multi Use에 비해 변환 비용이 적게 들어 risk도 줄일 수 있지만 신규시장 창출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기대 수익이 작은 수익 창출 방식이다. 이와 같은 수평적 Multi Use를 일반적으로 Window Effects라고도 하는데 시간적지리적 노출의 차별화를 통하여 배급효과를 높이고, 개별 Window 간의 충돌을 전략적으로 피하면서 기대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콘텐츠의 수익 창출 기간을 확장하는 효과가 있다.

넷째, 문화콘텐츠의 양적/질적 수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를 구축해야한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는 무형의 가치를 기반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양질의 콘텐츠를 누가 선점할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결국 시장의 트렌드를 파악하여 기민하게 대응하거나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도록 양질의 콘텐츠를 선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대규모 자본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국내 시장규모로는 그러한 공급 유도가 쉽지 않은 까닭에 해외시장을 염두에 둔 기획, 투자, 창작, 마케팅이 전개되어야만 한다.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둔 콘텐츠 제작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관관계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화콘텐츠의 변별적 특성을 전략적으로 충분히 고려하여 기획하고 생산한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한 문화콘텐츠이다. 그것이 드라마든 영화든 캐릭터든 애니메이션이든 간에 성공한 문화콘텐츠의 경제적 수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우리의 관심은 그것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총제적인 탐구에 있어야 한다. 선행콘텐츠에 대한 분석은 소문만 무성한 부가 수익에 대한 선망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한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문화콘텐츠에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성공적인 문화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노력과 함께 또 하나 필요한 것이 문화콘텐츠의 허브다. 문화콘텐츠 허브는 기획과 개발의 중심 역할을 하며서 시장 전체를 선도하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인데, 이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집적된 공간이 필수적이다. 일정 규모의 지자체가 허브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문화콘텐츠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정체성을 견지할 수 있고, 물적 지원과 인적 인프라를 수렴해낼 수 있는 의지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문화콘텐츠의 토대가 되는 문화적 역량이 풍성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이고, 동시에 문화콘텐츠의 생산 허브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광주가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문화콘텐츠 업계의 90%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 지역과의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 지역 내 문화콘텐츠업계의 부족, 문화콘텐츠에 대한 두렷한 변별 의식 부족 등은 앞으로 광주가 극복해야할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중에서 문화콘텐츠 허브로서의 희망을 보는 것은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과 과주시의 적극적인 노력 그리고 광부문화산업진흥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전개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 희망하고 있는 것처럼, 광주가 문화콘텐츠를 성장엔진으로 하여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과의 뚜렷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와 광주시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직 광주가 문화콘텐츠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노력들을 수렴하고 하나로 꿰어낼 수 있는 차별화 전략이 부재한 탓이다. 필자는 몇 해전부터 그것이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영역과 분야 그리고 미디어들의 소통회로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점, 스토리텔링의 기반이 되는 문학적 역량이 상당한 광주의 가능성을 상기할 때, 스토리텔링에 대한 주목은 정당하다. 그래서 2007년부터 광주시의 지원을 받아 광주문화산업진흥원에서는 스토리텔링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체계적인 교육을 통하여 역량 있는 스토리텔러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대내적으로는 스토리텔링과 상관한 광주의 문화 역량을 모으고, 광주 지역 소재 대학들의 유관학과와 연계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산학협력을 기반으로 연구-교육-생산의 체계를 구축하며, 멘토링 시스템을 통한 실천적인 노력을 경주한다면, 오늘 우리의 기대는 이내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더구나 문화콘텐츠의 가장 큰 특성중의 하나인 선점효과와 승자독식 구조를 이해한다면 왜 광주가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서울과의 차별성을 견지해야하는지 쉽게 답이 나올 수 있다. 앞으로 우리를 먹여 살릴 성장엔진을 고민해야하는 지금 이곳에서 문화콘텐츠에 대한 주목이 유효했듯이 광주가 스토리텔링을 통한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며 탁월한 선점이 될 것이다. 광주가 스토리텔링을 선점하고 특화시킴으로써 문화콘텐츠의 허브로서 광주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문화중심도시 광주의 새로운 탄생이 기대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