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의 허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월이 시작되고 독감이 지독한 목통증까지 데리고 왔다. 며칠 잘 먹고 쉬면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한 주가 지나고 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문제는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전혀 식욕이 없으니 기운을 차릴 도리가 없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엉덩이쪽이 부어서 병원에 가보니 엉덩이에 염증이 생겨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얼결에 수술을 받고 다시 연구실에 나갈 때까지 또 한참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중에서

앓다가 수술 받고 통원치료 하느라 집에 있다 보니 그날이 그날 같았다. 더구나 엉덩이 수술로 앉지를 못하고 주로 침대에 누워 있자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침대에 깔아둔 전기장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오한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보일러 온도만으로는 부족해 전기장판에 불을 넣으면 금방 따듯해졌다. 금방 따듯해지는 만큼 또 금방 뜨거워져서 꺼야하니 번거로웠다. 그러다보니 뜨듯한 열기로 온몸을 지지거나, 은근한 온기를 지속해주었던 어린 시절 아랫목이 그리웠다. 그 시절 아랫목에는 늦게 귀가하는 식구의 밥이 주발에 담겨 항상 담요로 덮여 있었다. 밥도 못 먹고 다니냐는 싫지 않은 핀잔과 함께 별다른 반찬 없이도 한 주발 뚝딱할 수 있었던 것은 식구들의 따듯한 기다림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든든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쌀 두 가마니와 연탄 천 장 그리고 김장 한 접을 하고는 안도하곤 하셨다. 없는 살림에 여덟 식구(게다가 우리 오남매의 먹성은 또 얼마나 좋았던가)의 겨울을 늘 걱정하셨는데, 쌀과 김치 그리고 연탄을 장만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아내와 아이들이 생기면서 식구들이 배곯지 않고 따듯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 일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그 시절 어머니의 겨울맞이가 자주 생각나는 것도, 아랫목 한 주발의 밥이 자꾸 그리운 것도 사는 일의 고단함과 허기 때문은 아닐까.

몸이 불편한 상태로 누워서 TV채널을 돌리다보니 온통 먹방이다. 최고만을 먹는다는 미식회에서부터 전국의 유명 맛집의 순위를 정하고 신화화하는 프로그램은 물론 죽은 상권을 살리겠다며 유명 외식업체 사장의 맛 컨설팅 프로그램까지, 심지어 과식과 폭식까지 화제가 되어 얼마나 먹느냐를 즐기는 프로그램까지 먹방은 차고 넘쳤다. 누가 봐도 지나치게 많이 먹는, 먹는 행위 그 자체가 화제가 되는 1인 방송의 진행자들은 시청자들의 자발적 성원으로 억대 연봉 이상의 수입을 거둔다니 놀랍고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살면서 즐길 것이 얼마나 많은데 오로지 먹는 것에만 이토록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결핍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다이어트 때문에 자신은 못 먹지만 누군가가 대신해서 먹는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은 가학을 넘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매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는 방송을 하면서 마른 체형을 유지하기 위해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으로 보낸다는 유명 BJ의 방송에서 지독한 허기를 느끼는 것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었을까?

이가라시 다이스케(五十嵐大介)의 만화 리틀 포레스트가 최근 한국에서도 영화화되며 화제다. 이 작품은 음식 그 자체보다는 자연에서 재료를 얻는 과정,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비중을 두고, 그 안에서 삶을 이야기한다. 음식만화임에도 완성된 음식의 매혹이나 맛에 대한 찬미보다는 재료와 조리 과정에 최대한 많은 시간과 언어를 배려함으로써 충분히 생각하고 즐길 시간을 준다. 이 작품을 읽으며 먹방으로 드러난 폭식과 폭식으로 은폐된 우리의 허기를 생각한다. 우리가 따듯한 포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랫목 한 주발의 밥으로 기다려줄 따듯함, 그것이 있다는 든든함을 잃고 있어서는 아닐까? 이제 봄이라는데 아직 날은 차다. 오늘밤은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콩비지에 넉넉하게 밥 한 주발 말아 이제 끝물일 총각김치를 얹어 한 사발 깨끗하게 비워내고 싶다

월간 에세이》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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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지 않으면 즐겁지 않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캠퍼스 곳곳에 각종 행사 포스터가 빼곡하다. 대부분 학과별, 동아리별, 학회별 발표행사다. 한 해 동안 익히고 실천해온 성과를 모아서 그 결실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이니 학생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의미 있고 즐거운 행사가 아닐 수 없다.

팀플이 유난히 많은 우리과 학생들에게 2학기는 무척 분주하고 힘든 학기다. 전공 학습량도 살인적인데다가 자신만의 대외활동이나 아르바이트까지 동시에 진행하다보니 서로 팀플 시간 맞추느라 무척 애를 쓴다. 결국 팀플은 늘 늦은 시간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이어지게 되고, 그런 팀플이 한 주에 3-4개이니 3-4일은 학교에서 밤샘하기 일쑤다. 그 바쁜 와중에 사진전시회, 영상발표회, 댄스 공연, 뮤지컬 공연 등을 진행하는 것을 놀라울 뿐이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에 학생들은 열과 성을 다한다.


최근 우리 학교 안에서 유쾌한 소란이 매일 계속된다. 홈커밍데이 행사를 위해서 ‘LOVE’라는 조형물을 설치해두었는데, 학생들이 밤마다 이 조형물의 철자를 조합하여 기상천외한 단어나 조형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철자의 조합을 바꾸거나, 아래위를 뒤집거나, 정면으로 서 있어야할 철자를 측면으로 세워서 매일매일 새로운 단어나 조형을 만들어낸다. 가령, V자는 뒤집고, LO는 측면으로 세우면 한글로 씨티가 된다거나, O만 측면으로 세우면 ‘LIVE’가 된다거나, 철자 순서를 바꾸고 V를 뒤집어서 ‘LEON’을 만드는 식이다. 누가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아침이면 여지없이 SNS를 통해 즐겁게 공유되고 한다. 학교도 학생들의 기발한 발상과 창의적인 시도를 즐겁게 지켜볼 뿐이다. 세계 유명 도시마다 LOVE 조형물은 숱하게 설치되어 있지만, 이렇게 즐겁고 창의적으로 향유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지난 학기에는 우리과 학생들이 학교글꼴을 만들 적이 있다. 학생회관 앞에 책상을 설치하고 오가는 재학생들의 손글씨를 직접 받아, 프로그램을 통해 글꼴로 만들 것이다. 500여명의 학생들의 손글씨는 3000자 가량 모아서 만들어낸 글꼴이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기존 글꼴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문서작성용 글꼴이라기보다는 팬시용품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글꼴이었다. 자비를 들여서 그 글꼴로 만들어 온 엽서의 글귀를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그 감동 때문이었으리라. “애도 어른도 아닌 나이 때, 그저 나일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나!”, “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디지털이든 4차 산업 혁명이든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 구호가 무엇이든 간에 그 핵심은 사람값을 지금보다 높이고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와 노력이 아니겠는가? 미래가 어떨지 섣불리 예견할 수야 없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이야기할 수 있다. ‘참여와 체험을 통한 즐거움의 창출이 그것이다. 누가 하는 것 혹은 보여주는 것을 일방적으로 보고 즐기던 시대는 끝났다. 향유자가 자발적으로 콘텐츠에 참여하여,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체험하고, 지속적으로 콘텐츠와 대화할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즐겼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참여와 체험을 통해 즐기는 과정을 향유다. 향유는 지금 이곳의 문화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이 되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 웹툰, <프로듀스 101>, 방탄소년단, 팬덤 등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향유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여 성공한 예라는 것이다.

얼마나 사느냐만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시대라고 한다. 이 말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즐거움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다양하게 자발적으로 즐길 수 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삶이 재미없다면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참여하여 체험하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 있는지. 당신,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2017.12.0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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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아닌 사람으로 기억될 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선수, 이승엽이 은퇴를 한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어도 길고 긴 23년이라는 시간을 숨 막히는 승부의 정글 속에서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시간 내내 그는 늘 최고였고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기록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마흔둘의 나이에도 최고의 기량으로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은퇴시기를 미리 정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은퇴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그와 관련된 프로야구 기록과 극적인 순간의 영상 그리고 팬들과의 숱한 미담이 쏟아졌다. 그 모든 기록과 승부와 미담 가운데 인간 이승엽이 보였다. 홈런을 치고도 상대 투수에 대한 예의로 고개를 숙이고 홈으로 들어온다거나, 벤치 클리어링 이후에도 상대 외국인 선수를 다독이는 모습에서 배려하는 최고를 보았고, 언제나 자신이 아닌 코칭스텝이나 동료들에게 공을 돌리는 모습에서 겸손의 최고를 보았고, 홈런왕이 되고나서도 끝없이 스윙폼을 바꾸는 모습에서 최선 없는 최고가 없음을 보았다. 잊을 수 없는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준결승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그가 보였던 뜨거운 눈물이다. 올림픽 기간 동안의 부진으로 그가 느꼈을 부담감, 자책감, 책임감을 8회 역전 홈런으로 떨쳐내고 흘리던 그 뜨거운 눈물의 진정성에 우리는 같이 울며 공감하며 희망을 꿈꾸지 않았던가.

사실 돌아보면 최고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최고는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자의 것일 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승엽은 우리에게 왜 이토록 특별한 것일까? 은퇴 투어 내내 다른 구단과 선수단에서 그에게 준비해준 은퇴선물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기량이 뛰어난 야구선수, 최고의 기록을 가진 야구선수가 아니라 겸손과 배려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최고가 아닌 최선으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한 야구선수였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물러설 때가 아름답기 어렵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신이 어긋나 있고, 언제나 욕망은 불만족의 현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때를 정하고 단호하게 은퇴를 택하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자존심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다른 삶에 대한 꿈꾸기를 통해 온전한 자기 삶을 가꾸어내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살아가야할 시간은 늘고 있는데 은퇴 시기는 점점 빨라지는 지금 이곳에서 이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이승엽처럼 최고는 아니겠지만 자기 나름의 아름다운 은퇴는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마무리로서의 은퇴가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위한 출발로서의 은퇴 말이다. 물론 그것은 은퇴 이후의 경제적인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에 대한 섬세한 준비와 남은 생을 어떻게 가꾸어갈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통장의 잔고나 부동산 혹은 연금이 그 준비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두지 않는 것에서부터 은퇴할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는 것과 은퇴 이후 더 멋진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준비에는 많은 생각과 상의와 가늠이 필요할 것이다. 준비 없이 충실했던 시간이 어디 있던가? 이러한 준비에 앞서 우선 노트 위에 그동안의 삶의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그동안 무엇을 위해(Why), 무엇을 하며(What), 어떻게 살아왔는지(How) 꼼꼼하게 적어보고 진솔하게 스스로 물어보자. 그래서 행복했는지?

전설은 숫자상의 기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그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기억하고 이야기할만한 가치를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 그를 우리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른다. 살아있는 전설 그가 있어서 우리는 행복하다.

 

2017.10.13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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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너의 이름은? 나의 이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올해 초 우리는 낯선 팬덤을 만나야 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느닷없이 등장한 혼모노(本物) 현상이 그것이다. 이 말은 극장에서 <너의 이름은>이 상영되는 도중에 OST를 크게 따라 부르거나, 객석에서 일어나서 호응을 유도하며 소란을 떤다거나, 감독 인터뷰 현장에서 자신에게 질문할 기회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통역의 진행을 무시하고 일본어로 직접 질문을 하는 등 개념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등장을 의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나 콘텐츠와의 상호작용이 원활해진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다양한 팬덤의 등장은 콘텐츠 생태계의 관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최근 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화된 팬덤의 역동성은 스타는 물론 관련 콘텐츠를 활성화하고 새로운 향유문화를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혼모노 현상은 여전히 낯설고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단지 오타쿠의 일탈적인 행동 혹은 기이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천착해 보면 그 기저에서 지금 이곳의 가오나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등장했던 가오나시는 얼굴이 없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그리스 신화의 에코처럼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없고 누군가를 삼켜야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혼모노의 기저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 혼모노의 심리 기저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에 대한 친연성과 전문성을 드러냄으로써 타자와 구별짓기를 시도하고, 구별짓기를 통해 충성도나 특별한 유대를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놓여있다.

참여적 수행을 통한 가치 창출의 즐거운 체험을 향유라고 할 때, 그것은 작가나 작품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그것과 대등한 대화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고 자신을 매혹했던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비참한 인정투쟁이거나 기만적인 위로가 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역시 누군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소중한 사람,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잊고 싶지 않은 사람. 누구지, 누구야너의 이름은!”누군지도 모르면서 간절하게 찾아가는 이야기는 그의 데뷔작 이후 반복적으로 탐색해온 모티브다. 이러한 탐색의 모티브를 반복한다는 것은 탐색의 대상이 실체적이라기보다는 메타포에 가깝다는 의미다.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에서 치요코가 평생 찾아가는 대상이 열쇠의 남자가 아니라 그를 만날 때의 자신이었던 것처럼. 따라서 <너의 이름은>에서 찾고 있는 것은 너의 이름이며 동시에 그 이름이 호명할 너이고, 너를 호명하고 있을 나 자신이기도 하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모호한 화법으로 찾는 대상을 딱 꼬집어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이름과 관계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름을 잃어 버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상기해보면, 이름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차적 기호다.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와 미츠하가 끊임없이 서로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고 기억하려 하는 것은 뒤집어 보면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려는 시도와 같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찾으려는 내가 자신의 이름으로 스스로 온전히 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굳이 남녀가 몸이 바뀐다는 식상한 도리카에바(とりかへばや) 모티브를 활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찾아가야할 이름은커녕 자신의 이름까지 잃고도 그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요즈음 뉴스에 자주 나온다. 그들의 하는 변명이나 부인을 들으며 불쾌한 혼모노의 극장을 떠올린 것은 필자만은 아니리라. 이제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시간이다. 잊어서는 안 될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2017.04.21.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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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없는 이야기, 이야기 없는 갈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갈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즐기는 콘텐츠는 대부분 갈등을 매개로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갈등이 발생해서 해소하는 과정이 하나의 이야기다.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소설 등 모든 극적 서사의 핵심은 갈등이다. 그 갈등이 얼마나 밀도 있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 갈등을 통한 변화가 가치 있는 체험을 만들고 있느냐가 극적 서사의 관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콘텐츠에서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표면적으로야 극복해야할 대상이 있고 해소시켜야할 문제가 있다. 하지만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면 본격적인 갈등은 솜씨 좋게 빠져있다. 최근 콘텐츠에서 갈등은 최소한 서사 전개에 필요한 만큼만 제시되거나 제시된 갈등도 지극히 연성화 되어 있다. 뚜렷한 가치를 지향하는 각각의 적대적 세력이 존재해야하고 그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다툼 안에서 공감할만한 가치를 찾고 지지하는 과정을 갈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삶의 또 다른 부면을 드러내거나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할 수 있도록 심화되어야 한다.


최근 <분노의 질주-더 익스트림>을 보았다.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근육질 수퍼히어로를 전면화한 이 영화에서 깊이 있는 캐릭터나 그들 간의 본질적인 갈등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전편에서 드러났던 적대세력과의 가치의 분명한 대립조차 이번에는 사라져 버렸다. 전편에 해당하는 <분노의 질주-더 맥시멈><분노의 질주-더 세븐>에 적대 세력이었던 오웬 쇼나 데카드 쇼가 같은 편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프랜차이즈 필름의 전략이라고 수긍한다 해도, 적대세력으로 등장하는 사이퍼 일당의 행위 동기가 불분명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우니 갈등의 동인이 마련되지 않는다. 몰랐던 아이의 등장으로 인하여 도미닉이 동료들을 배신하고 맹목적으로 사이퍼의 명령을 따른다는 설정은 가짜 갈등일 뿐이며 난센스다. 어디 이 영화만의 일이겠는가?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프랜차이즈화 되면서부터, 우리 영화는 소재주의에 함몰되면서부터 갈등을 통한 깊이 있는 사고나 가치의 탐구 내지 선택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인사청문회가 한창이다. 이름이 무겁고 맡아야할 역할과 책임은 더 중요한 만큼 도덕적 의무와 업무수행능력에 대한 검증은 철저할수록 좋은 일이다. 그 검증이 극적 갈등처럼 뚜렷하게 성격화된 두 세력의 토론과 쟁투의 생산적인 대립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의 소망만은 아닐 것이다. 극적 갈등은 갈등에 참여한 두 세력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의 과정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까닭에 실천적인 긍정을 낳는다. 완성도 높은 극적 갈등은 항상 향유자의 선택에 따라 각각 긍정할 수 있는 적대적인 두 세력을 제시하고, 그들 간의 심도 있는 토론과 치열한 쟁투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누가 승리했느냐가 아니라 갈등의 과정을 통해 향유자가 느끼고 깨닫게 될 삶의 지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본격적인 갈등이고, 갈등을 통한 변화다.

우리는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갈등이 부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은 갈등이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변화를 추동할 갈등,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그 중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갈등에 현실이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실은 온통 갈등의 요소들로 충만한데 정작 갈등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해소하는 길은 찾지 못하니 분노와 적개심만 들끓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적개심과 분노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변화를 이끄는 것은 건강한 갈등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의 맹폭에 오랜만에 갈등다운 갈등을 보였다는 영화<대립군>이 고전이란다. 이번 주말에는 온 가족과 함께 <대립군>을 보며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과 삶의 변화 그리고 깊이를 읽고 싶다. 갈등이 그리운 늦봄이다.

 

2017.06.23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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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맛집 앞 우울한 풍경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삼미식당 앞 대기줄 

타이베이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78일간 중국 서안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출발하는 일정이라 모든 여행 일정을 대학교 새내기인 첫째가 짰다. 대학입시로 몇 년간 가족 여행은커녕 식사조차 함께하기 어려웠고, 첫째가 끝나자 둘째가 곧 시작해야하는 상황이라서 무리를 해서라도 떠나야 했다. 지난 10월 저렴한 비행기표가 있다는 첫째의 충동질에 얼떨결에 예약을 하고는 학교일로 경황이 없어서 계획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첫째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마치 몇 번을 다녀온 사람처럼 45일의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준비하였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첫째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야한다고 다그쳤다. 택시를 타고 도착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어초밥이 맛있다고 소문이 난 덕분에 개장보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40분쯤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번호표를 받고 심지어 주문할 음식까지 적어내고 나서보니 온통 첫째 또래의 한국인들이다. 그렇게 어렵게 저녁을 먹고 나니 다음은 타이베이 3대 빙수를 먹어야 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유명 제과점의 빵을 사야 한단다. 돌아오는 날까지 이러한 먹방 투어는 계속되었다.


여행 내내 불편한 풍경이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타이베이의 물가가 한국에 비하여 저렴한 편이고, 일본 식민지로 인하여 중국음식과 일본음식 문화가 절묘하게 결합된 음식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고, 먹방 여행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다는 점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타이베이가 인식되었다는 점은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똑같은 맛집과 똑같은 먹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성실하고 역동적인 블로그에 있었다. 인터넷에서 대만여행을 검색하면 46만개 이상의 블로그 기사를 만날 수 있다. 그것들은 아주 친절하고 상세한 최신 여행정보, 그곳에서 반드시 체험해야할 것들, 그것에 대한 단호한 평가,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는 꿀팁들까지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집단지성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구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디지털 내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에게 블로그는 타자와 연결하는 공간이며, 그들의 공감을 통해서 자신의 체험을 평가받을 수 있는 공간이고, 이를 토대로 정서적 유대를 공유하는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의 장이 아니던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청중과의 연결, 청중의 적극적인 참여, 정서적 유대를 기반으로 한 자유로운 공유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함께 나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차별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청중의 긍정적 변화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타이베이 맛집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이나 그들의 블로그에 빠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기계적인 연결과 맹목적인 참여 그리고 무조건적인 정서적 유대는 파시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그것이 연결하고 참여하고 공유할만한 가치 있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있다. 더구나 가치 있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은 지속적인 비판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구성해가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타이베이 맛집 앞에서 인정투쟁 벌이듯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거나 우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지금 이곳이 아닌 곳에서 자유롭게 너와는 다른 심지어 떠나기 전의 나나와도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던가? 이미 누군가 샅샅이 훑고 가면서 자신의 눈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여 공유한 곳을 다시 따라가며 그가 좋다고 했던 것들을 그대로 다시 해보면서 우리는 자유를 만날 수 있을까, 또 다른 나를 만나 볼 수 있을까? 그들과는 다른 나만의 체험을 구현할 수 있을까?

 

2017.03.1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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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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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가 따듯한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금 이곳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시대다. 각종 매스미디어는 물론 1인 미디어, SNS 등을 통하여 엄청난 양의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향한 목마름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찾고 구현하는 이율배반적인 시대, 그 안에 우리가 있다. 드라마만 보아도 <태양의 후예>, <시그널>, <W>, <도깨비> 등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했지만 우리는 늘 새로운 이야기에 목마르지 않았던가? 게다가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서 나름의 이야기를 구현하거나 향유하면서도 매순간 또 다른 이야기에 기웃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단지 이야기(story)를 하는(tell) 것을 넘어 향유자 스스로 공감하고 소통함으로써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과정(ing)을 의미한다. 지금 이곳의 스토리텔링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향유자가 얼마나 가치있는 즐거움체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가치 있는 이야기를 소통하고 공감함으로써 즐거운 체험으로 승화시키는 과정, 그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가 있는 사회, 이야기가 풍성한 시대는 행복하다. 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준거를 만들고, 준거를 기준으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정보만으로는 삶의 총체를 파악할 수 없는 까닭에 삶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상징적 내포와 서사적 원리 그리고 감성적직관적 사유의 보고인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토리텔링은 이성과 논리에 의한 차가운 배제의 질서가 아니라 감성과 직관을 바탕으로 한 따듯한 포괄의 지혜를 지향한다.

존스 홉킨스 병원의 공동 설립자였던 하워드 켈리(Howard A. Kelly)우유 한 잔의 기적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배가 고파서 물을 얻어 마시러 온 하워드 켈리에게 우유 한 잔의 따듯함을 베풀고, ‘좋은 일을 할 때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하라는 인생의 깨달음까지 준 소녀가 십여 년 뒤에 수술을 받고 치료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자그날 한 잔의 우유로 모든 치료비는 지불되었다는 편지와 함께 은혜를 갚았다는 실화는 얼마나 감동적인가? 좋은 일을 할 때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하라는 분명한 가치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느껴지는 따듯한 체험 그리고 감동의 즐거움까지.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은 전염성이 강하고, 누적되면 그 효과는 더욱 폭발적이다. 비슷한 일화를 소재로 만든 태국 통신사 True Move H의 광고는 하워드 켈리의 일화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이유다. 더구나좋은 일을 할 때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하라는 앞의 이야기가 지닌 가치는 베푸는 것이 최고의 소통이라는 유사한 가치로 한층 강화된다. 두 이야기 모두, 1) 실화를 바탕으로 공감 가능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 2) 이야기 전반부에서 핵심 가치를 실천하고, 후반부에서는 멋지게 은혜를 갚음으로써 완결성을 높임으로써 전달력과 흡착력이 높은 스토리텔링을 완성한다. 더구나 3) 하워드 켈리의 일화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존스 홉킨스병원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태국 의사의 일화는 태국 통신사 True Move H가 지향하는 최고의 소통이라는 가치를 성공적으로 성격화한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업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뚜렷하게 부각시킨 세계적인 기업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혼란스러웠던 2016년 우리 사회를 보면서, 빈약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이 말은 이야기할만한 화제가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이야기의 즐거운 체험이 빈약했다는 의미다. 가치 있는 이야기의 즐거운 체험의 전제는 소통과 공감을 위한 노력에서 비롯되며, 소통과 공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의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우리 사회의 빈약한 이야기는 아프고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연휴동안 아내와 <도깨비>를 보면서 따듯했다. 사랑하기에 배려하고, 배려하기에 사랑하는 <도깨비>의 연인들, 좀처럼 갈피조차 잡기 어려울 정도로 풍성한 각자의 전생 이야기, 이승과 저승, 인간과 귀신의 영역을 넘나드는 소통과 공감의 노력, 그래서인지 900년 이상 살아온 도깨비와 이제 스무 살이 되어 첫 소주를 마신 은탁이의 러브스토리는 허황되기보다는 차라리 간절했다

 2017.01.2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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