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ody'가 차라리 폭력인 까닭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다시 원더걸스다. 'Tell me'에서 시작된 원더걸스 열풍은 'Nobody'까지 지칠 줄 모른다. 원더걸스는 소녀시대만큼 예쁘다거나 깜찍하지도 않고 씨야나 브라운아이드걸스처럼 가창력으로 승부를 거는 가수도 아니다. 어리다고는 하나 보아를 생각하면 그리 어린 것도 아니다. 더구나 댄스가수라고는 하지만 그녀들의 춤은 비나 박진영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왜 원더걸스에 열광하는 걸까?

원더걸스 열풍의 원인이야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콘텐츠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내적 요인으로는 익숙한 복고풍 리듬, 다소 촌스럽다는 느낌을 강조한 원색 중심의 스타일, 멤버 간의 조화보다는 개성적인 불일치, 쉽고 편안하게 반복할 수 있는 노래가 새롭지만 지극히 편안한 B급 감성에서 찾을 수 있다. 외적 요인으로는 'Tell me' UCC와 박진영의 안무 영상 그리고 발굴부터 데뷔까지의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의 지속적인 제공 등이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Tell me' UCC는 존 피스크가 이야기했던 텍스트적 생산성의 실례로서, 향유가 가장 활성화된 상태다. 아주 극적인 순간에 미국에서 보냈다는 박진영의 안무 영상은 치밀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지만 매우 개연성 있고 후광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며칠 전, 이왕표와 밥셉이 보여주었던 맥락 없는 타격과 어색한 긴장의 기자회견을 상기해보면, 박진영의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인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20-30%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무한도전>의 프로그램 포맷은 포맷의 없음이다. 특정한 틀이나 형식을 지향하기 보다는 시청자들의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나 방식을 발굴해서 평균 이하의 캐릭터들이 그것을 실현해가는 과정을 즐기는 지극히 단순한 포맷이다. <무한도전>의 이러한 전략은 무식, 무능력, 유치함으로 각기 특화시켜 설정한 평균 이하의 캐릭터들이 재미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한 이기심과 유치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이루거나 삶의 의미나 성찰의 깊이를 확보하는 서사의 역할은 <무한도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도전>과 같은 소위 한국식 리얼 버라이어티(real variety)’ 포맷은 동일한 시간대에 스핀오프(spin-off)<12>, <패밀리가 떴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지금 이곳 예능 콘텐츠의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다.

그렇다고 작위적인 중간 이하의 캐릭터 설정, A/B급의 의도적 대비, 사소하고 무용한 것들에 목숨 거는 상황, 어설픈 계몽, 생경한 조어와 말 줄이기, 유치한 장난, 어이없는 무식 등을 이 글에서 문제 삼자는 것은 아니다. 폭력, 섹스, 유치, 천박 등 주류문화에서 억압된 근원적 욕망을 B급 문화를 통해 배설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성향이야 새로울 것도 없고, 그것이 위협적이라고 하기에는 과장된 호들갑에 가깝다. 강박 없는 즐거움은 문화의 생산 동력이며, 즐거움의 유혹은 딱딱하고 무거운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오히려 신선한 긴장이 될 것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A급이 거세된 B급만의 획일성은 A급의 문화 권력만큼이나 우려스럽다는 점이다. 비보이들의 배틀에서 보듯이, A급 문화의 가치 중심의 서열주의가 아닌 다름을 전제로 한 진솔한 대중 장악의 퍼포먼스B급 문화의 미덕이라는 점에서 다름을 전제로 한 다양성은 필수적이다. 물론 그 다양성은 A급 문화가 될 수도 있고 B급 문화 안의 그것일 수도 있다.

원더걸스의 'Nobody'는 강력한 매혹이다. 다만, 그것은 브라운아이드걸스, 부가킹즈, 빅뱅 은 물론 장윤정, 송대관, 조용필과 같은 다양성을 배경으로 할 때에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온 국민이 'Nobody'만을 부르며 손뼉을 치는 모습은 그래서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곧 폐지되는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소중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대신문 2008.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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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이 힘이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트랜스포머>, <스파이더맨 >, <디워>의 공통점은 내용중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각적인 놀라움과 즐거움이 압도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서사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의 내러티브에서 탈피하여 비주얼스토리텔링을 향유의 중심에 둔 영화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영화 모두 올 여름 극장가를 강타했다는 점이다. 특히, <디워>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과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디워>의 내러티브 부재를 지적했던 사람들은 옳았지만 틀렸다. 분명 <디워>의 내러티브 부재를 꼬집었던 그들의 지적은 옳았지만, 그 정당한 지적은 <디워>를 향유한 800만 이상의 관객들의 즐거움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틀렸다. <디워>의 국내 흥행 대박을 비주얼스토리텔링에 대한 향유가 본격화된 징후로 보아야 한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역시 비주얼스토리텔링이 압도적인 콘텐츠였지만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이 내러티브가 부재한 <디워>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토리텔링은 비주얼스토리텔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말하기’(tell) 그리고 현장성과 상호작용성(ing)으로 구성된 것이다. ,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문화 환경의 도래와 뉴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스토리만큼이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과 구현하는 방식이 중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2의 구술성 시대의 도래가 가능해짐으로써 상호작용성에 기반한 향유의 극대화 과정이 더욱 부각된 결과다. 쉽게 말하자면 이제 말하는 내용만큼이나 말하는 방식과 구현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고, 어떻게 향유를 극대화하느냐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유희성이 전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원더걸스의 <텔미> 열풍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외모나 가창력 면에서 압도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원더걸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텔미>라는 노래와 춤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구현된 결과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텔미> UCC 동영상을 보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재생산하고 있는 <텔미> UCC 동영상들은 향유자들이 이 노래에서 즐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변하고 있다. 특히 절묘한 시점에 공개된 원더걸스 프로듀서이기도 한 박진영의 <텔미> 춤의 원본 UCC를 보면, 이 열품이 얼마나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흥미로운 것은 향유자들이 이 각각의 것들을 <텔미>라는 노래와 함게 즐기지만, 노래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래의 텔링에 해당할 수 있는 곡 해석력이나 가창력 등은 물론 춤이나 구성원들의 연출된 이미지 그리고 심지어 제작과정의 비화까지를 매우 주도적인 자세로 통합적으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의 근간은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은 향유자들이 텍스트와 소통하는 기본 회로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특히 One Source Multi Use틀 통한 문화콘텐츠 수익 실현과정에서 중심이 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텍스트의 완성도와 대중적 소구를 결정짓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은 기존의 내러티브 논의와 같이 해석 중심의 의미 탐구가 아니라 생산을 위한 전략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만 한다.

문화콘텐츠가 많은 자본(high-cost)을 요구하는 까닭에 위험이 많은(high-risk) 분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위험을 어떻게 줄이고 성공 가능성을 높일 것이냐에 있는데, 그 중심에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수준은 그리 높아보이질 않는다. 객관적이고 정치한 선행사례 분석을 통하여 보다 양질의 스토리텔링을 생산하려는 노력보다는 한 작가나 기획자의 발상이나 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전근대적인 마인드가 아직도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드처럼 시즌제를 기반으로 6개월 제작 6개월 방영의 주기적 순환을 통하여 제작 일정의 안정적 확보가 어려운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스토리텔링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문화콘텐츠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의 연구와 생산의 노력이 시급하다. 이러한 모든 노력의 토대가 스토리텔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속적인 창작을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중심도시 광주에서 스토리텔링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선택과 집중에 의한 과감한 교육모델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더구나 광주는 풍부한 예술 역량을 도시 속에 내재화하고 있고, 숱한 이야기꾼들의 아기집 노릇을 해왔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 아카데미에 거는 우리의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서, 동시에 문화콘텐츠의 생산 허브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주가 지닌 스토리텔링 역량을 결집시키고 구체화해야할 것이다. 정부와 시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직 광주의 문화콘텐츠 생산 역량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노력들을 수렴하고 하나로 꿰어낼 수 있는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영역과 분야 그리고 미디어들의 소통회로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스토리텔링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스토리텔링과 상관한 광주의 문화 역량을 모으고, 광주 지역 소재 대학들의 유관학과와 연계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산학협력을 기반으로 연구-교육-생산의 체계를 구축하며, 멘토링 시스템을 통한 실천적인 노력을 경주한다면, 오늘 우리의 기대는 멀지 않은 미래의 현실이 될 것이다. 광주가 스토리텔링을 선점하고 특화시킬 수 있을 때, 광주를 중심으로 한 문화콘텐츠 성공모델이 등장할 것이고, 그것은 다시 90%이상 서울에 몰려 있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의 광주행 러시로 이어질 것이다.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할 문화콘텐츠에 대한 기대가 이제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7년 <광주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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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매트릭스, 세컨드 라이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는 퍼스트 라이프(First Life)가 아니다. 세컨드 라이프는 핍진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퍼스트 라이프와 흡사하지만 현실원칙에서는 자유롭다는 점에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현실과 흡사하기 때문에 몰입할 수 있고, 현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창조의 공간이 세컨드 라이프다.


실제와 유사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현실원칙에서는 벗어난 이 개방형 가상세계의 매력은 향유자 스스로 참여해서 즐길 것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이 관계하지만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사랑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일방적 욕망의 콘텐츠들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이곳에서 세컨드 라이프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랑스럽게 나를 위해 반응해주기만을 기대할 뿐 돌봐주거나 챙겨줄 의무는 없는 로봇 개, 내가 원하는대로 꾸며주고 감정을 배설하기는 하지만 상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일방적 사랑의 대상인 관절인형, 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스스로 꾸밀 수 있지만 언제든 스스로를 닫아걸 수 있는 싸이월드, 스스로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거나 볼만한 것을 만들어 올리는 UCC 등에 익숙한 우리에게 린든 랩이 제공하는 세컨드 라이프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세컨드 라이프는 참여, 공유, 개방이라는 웹2.0의 서비스 전략과 일치한다. 세컨드 라이프는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생산자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제한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제공되고 이미 만들어진 것은 제한적으로 수용하면서 향유자의 참여와 공유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신과 세계를 열어간다는 두드러진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컨드 라이프는 가상세계에서 주도적으로 참여와 수행을 지속하는 향유자, 그들과 세계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리마커블(remarkable)’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벌이는 지극히 자유로운 카니발적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세컨드 라이프가 즐거운 것은 즐거움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향유자 스스로 그곳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컨드 라이프는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지 않고 그래픽 제작 프로그램 등만 제공하여 UCC를 활성화시킨다. UCC의 즐거움은 자유로움에 있는데, 이것은 승패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향유자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성취의 자유이다. 기대와 성취의 과정은 향유자 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다양한 즐거움을 자유롭게 추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매한 아이템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생산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는 네트워킹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강력한 플랫폼이다.

최근 세컨드 라이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세컨드 라이프가 국내에서도 그 열풍을 이어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컨드 라이프가 우리의 퍼스트 라이프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우려에 대한 것이다.

국내에서 세컨드 라이프가 활성화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비관적이다. 그 근거로 온라인게임에 익숙해 구낸 향유자들에게 세컨드라이프의 가상현실은 새롭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는 점, 국내 향유자들의 경우 싸이월드나 MMORPG 등 더 재미있는 대체재들이 많다는 점, 시작하기 전까지 배우고 조작해야할 것이 너무 많다는 점, 목적이나 임무가 없기 때문에 창조적으로 즐길 수 있는 향유자가 아니라면 뚜렷한 즐거움을 찾기 어렵다는 점, 번역기가 제공되지만 언어적인 장벽 등을 제기한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놀라운 성장세에 힘입어 세계 최초로 한국 지사(물론 세컨드 라이프 안에서지만)가 설치되고, 새로운 놀이와 비즈니스의 공간으로서 새로운 것의 전위에 서기 좋아하는 우리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세컨드 라이프의 국내 성공 여부에 대한 막연한 비관이나 낙관이 아니라 낙관적 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일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매달 50만명씩 향유자의 증가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인 무엇인지, 토지 분양과 관리비 외에 국내적 특성을 반영한 수익모델은 어떤 것이 가능할지, 사이버아이덴티티의 퍼스트 라이프에 대한 긍정적 견인 방안 등에 대한 생산적 탐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세컨드 라이프가 퍼스트 라이프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이제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해야할 과제이지 세컨드 라이프를 칭송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판단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사이버 세계가 부상하면서 제기되었던 비관과 낙관의 다양한 견해들을 가장 새롭고 구체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세컨드 라이프를 통하여 진지하게 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버 아이덴티티의 문제, 퍼스트 라이프와의 법적, 윤리적 상관성의 문제, 대중추수주의에 따른 문화적 타락과 전환의 문제, 현실 세계의 황폐화 등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할 문제이지 판단의 근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세컨드 라이프가 제공하는 자유는 퍼스트 라이프를 전제로 하는 상대적 자유기 때문에, 현실의 탈락보다는 현실과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창출된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세컨드 라이프로 인하여 야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보다 선도적인 자세로 전략적인 대응을 해야만 한다. 세컨드 라이프가 게임이냐 아니냐를 논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창출하는 리마커블한 요소가 무엇인가에 주목하는 전략적 탐색, 사이버 아이덴티티를 통해서 견제하는 현실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 문화적 타락을 견제할 수 있는 치유 방안 등에 대한 실천적인 탐구 등이 그것이다.

세컨드 라이프와 퍼스트 라이프의 공분모는 그것을 향유하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날마다 진화하며, 진화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충한다. 정체성의 확충은 진화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내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로서 존재하는 세컨드 라이프에서 내가 누리고 추구하는 것들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 자신이 갈구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컨드 라이프는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천국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그 즐거움의 원천이 자유로움이라면, 그것을 통해 구체화된 나 아닌 나의 자유를 통하여 나인 나를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찰하는 나인 나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 는 끊임없이 참여하고 공유하고 개방하는 과정을 주체적으로 즐길 줄 하는 여야만 할 것이다.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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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야 하는데 놀 줄은 모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놀고 싶다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놀 시간과 놀 수 있는 경제적 여건 그리고 마음의 여유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어도 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위해 논다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대부분 놀기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시기를 이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일과 놀이는 아무래도 하나가 되기는 무척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놀고 싶어 합니다.

오월이 아름다운 것은 대학의 축제가 있기 때문이라던가요. 하지만 정작 축제가 끝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재미없었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한 학생이 정치적 이슈가 있었던 1980년대 축제는 멋지지 않았냐고 제게 묻습니다. 축제를 마친 다음 날이면 소방호스로 캠퍼스 곳곳에 하얀 버짐처럼 떨어져 있는 최루탄 가루를 치우던 관리 아저씨의 모습이 문득 떠올리며,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그 시절에 그 경직된 축제문화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축제를 폐지하고 대동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 무렵), 1970년대 축제에는 낭만이 있었느니, 퇴폐적이었느니 운운했을 것입니다. 설사 지나간 시절의 축제가 재미있었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내가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난 요즘 오빠의 노트북이 되고 싶어!”

아내의 이 한마디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휴일도 없이 몇 개월째 계속되는 제 강행군은 아이들은 물론 아내에게서도 멀리 나와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주년 되는 결혼기념일에도 춘천에서 학회 발표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급한 일들만 마무리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평창에 다녀왔습니다. 새로 지어진 팬션은 세련되고 깔끔했습니다. 허브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아버님과 소주를 마시고 아내와는 맥주를 마시는 동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 다녔습니다. 다음날에는 봉평장 구경을 하고 속초 대포 항까지 다녀왔습니다. 23일 동안 분주하게 차를 몰아댄 것은 사실 갑자기 주어진 그 시간 동안 함께할 프로그램이 딱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70이 넘으신 부모님과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두 딸 아이, 그리고 아내와 제가 함께 공유할만한 놀이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냥 푹 쉬면 될 거 아니냐고 물으시겠지만, 문제는 무엇을 하며 쉬느냐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고민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이웃 팬션의 사람들도 무척 분주해보였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차릴 수 없이 분주하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을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대로 노는 일의 중심에는 물론 우리 자신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노는 것도 평소에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은 좀처럼 가볍게 즐길 수 없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취향과 시간적경제적 여유에 적합한 놀이를 찾아보고,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굳이 전문가들에게서 배우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죠. 자전거를 배우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탈 수가 없습니다. 자전거 타는 즐거움은 자전거를 배우는 즐거움과 배운 이후에 그것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다 포함하는 말이겠죠.

이와 같이 놀 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낯부끄러운 향락적인 밤 문화는 많이 사라지겠죠. 그것이 꼭 고급한 놀이 문화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부부가 함께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 전시회에 다니는 일도 좋지만 취향에 따라서 같이 바둑을 둔다거나 요즘 인기 있는 영화를 노부부가 두 손 꼭 쥐고 함께 본다면 어떨까요? 자식들 이야기 하며 친구 부부들과 포커 한판은 어떨까요? 물론 보다 우아하고 의미 있는 놀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저는 이정도로도 만족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 분주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만큼 놀이의 강도와 만족도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겠죠. 그렇다면 쉰다거나 노는 일 자체에 감사해하는 지금과는 달리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만할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만나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놀만한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2003오픈아이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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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와 소주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요일 아침 아내는 좀처럼 잠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녀석을 깨워서 씻기고 입히고 먹여서 내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인지, 아침에 나갔다가 늦은 밤을 데리고 들어오는 제가 모처럼 집에 있는 날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아내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내가 일어나지 않아도 허기는 아이들을 깨우고, 깬 아이들은 저를 깨웁니다. 제가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이라고 우기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만화채널을 넘나들며 애니메이션을 봅니다. 벌써 소파에는 녀석들이 먹었음직한 과자 봉지와 첫째가 제 목숨처럼 아끼는 스티커 북이 멋모르고 제 언니를 따라하는 둘째의 스티커 북과 함께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을 치우는 동안 짜파게티 끓일 물이 끓을 때쯤 햇살은 벌써 소파에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이 먹는 짜파게티 만큼이나 저는 녀석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 불만입니다.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이 거침없이 반복되는 그것들을 그만 보게 하고 싶은데, 늘 잠의 유혹은 아버지의 의무보다 달콤합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섰던 제가 아이들의 애니메이션에 불만을 갖는 것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편향성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일본 코믹물이 대부분인데, 그것들의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을 아이들은 이내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TV에 나오는 내용을 아이들을 보고 따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아이들의 모방을 보면서 그런 걱정은 지나쳐도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녀석들에게 이런 애니메이션 말고 다른 채널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줄라치면 녀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둘째의 울음에 저는 대책이 없습니다. 둘째를 달래기 위해 TV에 피코를 연결해주고, 첫째의 컴퓨터 오락을 묵인해줍니다. SEGA에서 개발한 것을 삼성이 수입 판매한 피코는 원래 첫째의 것인데, 늘 그렇듯 첫째의 것은 둘째의 것입니다. 싱가폴 사는 제 이모가 가져다 준 일제 컴퓨터 게임CD는 첫째의 보물입니다. 두 녀석은 각자의 보물과 꽤 오래 같이 놉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지루해지면 녀석들은 제게 달고나를 해 달라고 조릅니다. 할인매장에서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구입해온 달고나 세트는 아이들의 일요일 군입거리입니다. 어설프게 눌러준 뽑기를 손에 들고 이제부터 자신들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 것이냐고 다그치듯이 쳐다보면 저는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이들과 PS2 게임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열에 두세 번은 PS2를 설치합니다. PS2게임은 아이들이 어리고, 저도 할줄 아는 게임이 많지 않아서 간단한 철권을 함께합니다. 한글화 되어있지만 음성은 일본어로 나오는 철권을 하다보면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저 사람들은 왜 싸워?” 게임의 스토리를 설명하려다가 그만둡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이들의 자전거를 가지고 집근처 공원에 갑니다. 둘째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고 어리광이 심해서 세발자전거 앞에 끈을 묶어 끌고 가는 경우 많습니다. 물론 더 심하면 아이를 업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시간 쯤 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은 저를 문방구로 데리고 갑니다. 스티커 몇 장을 사달라는 거지요. 국적불명의 캐릭터들의 스티커를 사주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주면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어줍니다. 배가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두툼해진 아이들의 스티커 북에는 일요일마다 새로운 스티커 캐릭터들이 붙습니다.

올해 전면 개방된 일본문화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몇몇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일본문화가 아니라 일본문화콘텐츠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오신 은사님께서 일본인들이 소주를 술집에 keeping해 두고 마시며, 심지어 소주에 얼음을 타서 마신다며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함께 웃으며 소주를 마시다가 보아를 떠올렸습니다. 소주는 어떻게 마시든 한국식이라는 이름이 붙겠지만 보아가 부르는 노래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한류는 있지만 한국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일본문화의 유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문화의 일본 진출은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어떻게 수출할 것이냐가 아닐까요? 또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정체성에 대한 실체적 탐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아이들은 스티커 북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아내는 어느새 피코와 PS2를 치운 모양입니다. 제 서재에는 이번 논문의 테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몬스터 주식회사>, <치킨 런> 등의 CD가 놓여 있습니다. 분석한 메모들도 아내가 정리한 모양입니다. 니콘 디지털 카메라나 도시바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듯, 보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일본에서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문화코드에 열광하느냐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해봅니다. 아이들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봄의 나른한 햇살은 이제 거실 끝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아내는 이제 저녁을 지을 모양입니다. 저는 다시 애니메이션 CD를 노트북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2003오픈아이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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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넌 대장금이 되지 말거라.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난 설에 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인 처남네 아이들이 세배를 와서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나라 오나라……아내와 저는 신기해서 웃고, 장모님은 대견해서 웃고, 큰딸은 부러워서 웃고, 작은딸은 우리가 모두 웃으니까 웃었습니다. 인터넷에 가사를 다운 받아서 고모네 가서 들려준다고 며칠 연습을 했답니다. 물론 처남네 아이들이 이틀 간 머무는 사이에 두 딸들도 그 노래를 배웠고, 할아버지 생신날 멋지게 불렀지요.

<대장금>의 인기를 설명하는 것은 구구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장금>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효한 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대장금>은 드라마의 작품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콘텐츠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실현한 대표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대장금>의 인기는 캐릭터와 공간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캐릭터를 구현하는 곳이 공간적 배경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지요. 수라간과 내의원이라는 공간 설정은 음식건강이라는 코드로 요약이 되며, 이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관심이 가장 많이 모이는 것들입니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시식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요리 프로에서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이야기 속에서 구현된 것은 흔치 않은 일로 무척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의술은 <허준> 등을 통해 이미 대중성을 인정받았던 분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음식은 경쟁의 형태로, 의술은 생사의 절박함으로 등장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두 소재는 콘텐츠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면, <대장금>은 그것의 인기보다는 성공한 캐릭터나 독창적인 캐릭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히 읽어봅시다.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하는 여성입니다. 섬세한 시청자라면 장금이를 보면서 <허준>의 예진아씨와 <인어공주>의 아리영, 그리고 <다모>의 채옥을 쉽게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진 아씨의 탁월한 의술과 지고한 정신적 사랑, 아리영의 다재다능함과 복수를 위한 당찬 의지, 채옥의 빼어난 무술실력과 주체적인 삶의 의지 등을 모두 조합하면 장금이가 탄생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이루어내면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어머니와 스승의 한까지 풀어내는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하는 여성형 아니 인간형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옳은 탓에 그릅니다. 옳은 이유는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한다는 것이고, 그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인물이 아니며 이 시대의 고민을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장금이는 자기 시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 평생 궁녀로 살아야하는지, 어머니와 스승을 죽음으로 내모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 부조리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따위는 그녀의 관심이 아닙니다. 극의 후반부에서 장금이가 내의원의 안락함이나 권위를 버리고 백성들 사이의 의원으로 남고자 하는 것 등을 통해서 이러한 한계를 해소하려하지만, 그것이 갈등의 현장인 대궐을 벗어남으로써 이루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여기서 좀더 나가면 그녀를 욕망하는 이 시대의 문제가 남게 됩니다. ‘에 대한 선망,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기 처지에 대한 두려움, 평범함을 넘어서고 싶은 보상심리 등이 장금이를 그려내고 있지만, 우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은 짱 신드롬이 철저한 배제의 원리로 운용이 되며, 우린 대부분 포함이 아닌 배제되는 쪽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장금이를 통해서 두려움을 넘어서고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우리의 심리적 이행은 현실이 누락된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장금이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은 모두 장금이의 성공담을 위한 배경적 캐릭터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한상궁은 인기는 얻었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는 얻지 못했고, 같은 이유로 금영은 최상궁의 캐릭터와 다르지 않으며, 민정호는 중종과 변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장금이의 캐릭터도 예진아씨와 아리영 그리고 채옥을 더한 후에 채옥의 무술만 제외하면 만들어지는 캐릭터로서 아니던가요. 문제는 장금이가 이들 캐릭터의 섞어찌개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한계를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체적인 여성 같지만 여성스러움이나 남성종속적인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고, 주체적인 자기 삶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 기획되었던 부분까지는 어머니와 스승의 복수담을 넘어서지 못했고, 이후에 주체적이 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은 극적 긴장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 등이 그 증거지요.

<대장금>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장금이처럼 되고 싶냐고.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다섯 살 둘째야 물정 모르는 녀석이고, 첫째는 장금이 처럼은 싫고 의사선생님은 되고 싶다며 아비의 염려를 피해갑니다. 그래 그러렴. 염려 많은 아비는 바랍니다. 아이가 장금이 처럼 살지 않기를. 그것은 장금이의 삶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녀의 삶을 살지 못했고 자기 시대를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릴 수 있다면 삶이 고단한들 뭐 그리 대수이겠느냐고. 하지만 끝내 마지막 말은 하지 못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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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살면 다냐?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비 오는 날에는 자장면이 먹고 싶다던 시인이 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며 야간학교 국어교사를 했던 그분이 끼니를 놓치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허겁지겁 비워내던 한 그릇의 자장면에는 고단한 일상이 자장이 되고 면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한 주 용돈이 5000원이던 대학시절,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했죠. 토요일에 강의가 없는 것은 순전히 제 용돈이 그 하루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기던 시절이었지요. 학교 앞 시장에서 500원짜리 국수를 사 먹고 나머지 돈으로 사서 읽던 시집들. 그것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읽다보면 어느새 암송할 수 있게 되면 술자리에서 약간의 취기를 가장해서 암송하던 치기어린 시절이었지요. 자취하던 녀석에게 집에 김치 한 포기 가져다주고 그것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던 그 시절을 전 가끔 풍요의 시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을 요즘 웰빙(well-being)이라고 부르지요. 그것이 꼭 유기농 채소를 먹거나 휘트니스 클럽에서 달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한 삶이 품목들을 채워가며 자신의 사람값을 높이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사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사람값을 제대로 못 받고 살고 있다는 뜻이겠죠. 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사람값의 맨 마지막 항목이라는 것이죠.

하루는 선배 교수님이 아침에 욕실에 들어 간 초등학교 3학년 딸이 나오지를 않아 욕실을 열어보니 딸아이가 울고 있더랍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아이를 달래고 보니 아이가 세면대를 잡고 그러더랍니다. “아빠 사는 게 힘들어!”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웃다가 모두들 말없이 쓴 소주만 거칠게 비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겝니다. 강의를 마치고 출판사에 들려서 회의하고 자정이 다돼서 집으로 들어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창고의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결국 차를 갓길에 세웠던 것이……. 만만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만만하면 삶은 또 뭐 그리 살만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잘 사는 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자고 우린 필사적입니다. 요리 프로그램도 전에는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전부 맛집이나 맛난 요리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입니다. 입고 먹고 사는 곳에 힘을 모으다보니 정작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지 따위에는 좀처럼 생각을 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한없이 비대해지고, 비대해진 욕망만큼 결핍을 낳게 되고, 결핍은 다시 욕망을 낳는 악순환에 치여서 생각하고 의미를 만들어갈 우리 삶의 몫들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영양실조고, 17%는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협박조의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 먹고 잘 사는 일은 항상 주변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유기농 농산물을 먹고 비만해진 몸을 팻다운을 먹고 운동을 하며 줄여가는 것은 마치 로마인들이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먹고 토했다던 그 야만을 지금 이곳에서 되풀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인들이 그런 도락을 즐기는 동안에 뙤약볕에서 땀흘려야했던 노예들이 있었고 굶어죽어 가던 식민지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함께하지 않고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던 로마인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일 수밖에 없었고, 서로가 서로의 천국을 파괴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은 제가 여기서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되겠죠.

웰빙은 단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무엇을 위해사는 것인지 돌아보고 살피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허겁지겁 때늦은 자장면을 먹던 시인이 먹었던 것이 어디 면과 자장만이 아니었듯이, 점심과 바꾼 것이 시집만은 아니듯이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것이 유기농 채소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염된 채소라도 웃으며 함께 나눌 사람들, 그들과 함께 채워 가야할 우리 삶의 시간들, 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갈 의지와 소양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따듯한 사랑이 우리가 우리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웰빙의 조건들이 아닐까요?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아이에게 손톱이 퍼렇게 알로에 껍질을 까서 강판에 갈아서 밤새 문질러줬다는 선배나 가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밤새 자신의 침을 발라주었다는 친척형님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배워가는 요즘입니다. 봄이 익어갈수록 꽃이 흐드러집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색깔이나 향 때문이 아니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 봄 안에 있어 행복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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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와 염색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저는 향수를 좋아합니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보니 늘 아침이 분주한 제게 스킨을 바르고 타이 뒤나 손목에 가볍게 향수를 뿌리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차 안에서 아침에 뿌린 향을 느끼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가끔씩 향이 좋다고 아는 척이라도 해주는 동료들이 있으면 내심 반가워합니다.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거리에서 좋은 향을 맡으면 누구든 따라가서 그 향과 향수의 이름을 묻곤 했으니 약간 병적이라고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 버버리 여름용 여자향수의 달큰함과 샤넬 넘버5의 강렬한 유혹 그리고 아라미스의 상큼한 아침도 그 무렵 제가 좋아하던 녀석들이죠. 아내는 간혹 제가 욕실에서 뿌린 향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요즘 강의실에서 이채로운 것은 남학생의 염색과 귀걸이입니다. 남학생의 1/3정도가 귀걸이를 했고, 3/4정도는 염색을 했으니 이제 사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요.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핑콜퍼머 정도가 가장 멋을 부린다고 부리던 것이고 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나마 그거라도 하고 온 녀석들은 교수님께 한 소리 듣거나 동료들의 놀림을 감내해야했습니다. 사실 귀걸이를 멋스럽게 하고 고은 색의 염색은 제가 봐도 멋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도 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언젠가는 하얀색 브릿지와 귀걸이를 해보겠노라고 농담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긴 이제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브릿지에 돈 들릴 일을 없을 것 같고, 사회적 지탄이 없다하더라도 겁이 많은 제가 귀를 어떻게 뚫겠습니까.

1학년 교양 강의에서 강조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자기를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염색이면 염색을 해봐라. 귀걸이라면 귀걸이를 해라. 담배가 된다면 피워봐라. ,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멋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새내기들의 염색은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습니다. 단체할인을 받으며 한꺼번에 했는지 모두 비슷비슷한 색깔에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흡사한 헤어스타일을 멋스럽게 보기는 좀 어렵죠. 3-4년 전에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스트레이트 퍼머를 해서 앞가르마를 타던 HOT머리를 했고, 1-2년 전에는 배용준의 바람머리가 또 강의실에 넘쳐나곤 했습니다. 자기 얼굴과 상관없이 로봇처럼 똑같은 헤어스타일의 학생들을 강의시간마다 보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불을 질렀던 말콤엑스가 아니더라도, 우린 모두 지금의 자신보다 멋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염색일 수도 있고, 귀걸이를 비롯한 피어싱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저처럼 향수가 될 수도 있겠죠. 문제는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이 19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이어져 오고 있지만 우린 아직도 누드 훔쳐보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몸을 매개로 자신을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보다 멋지게 되기 위한 전제가 지금의 나, 자연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 볼거리입니다.

멋지다는 것을 멋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 멋진 것입니다.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멋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는 제 코가 낮다고 시간 날 때마다 코를 세우듯이 들어오리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또 제 끊어진 눈썹은 어머니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시곤 했습니다. 요즘에는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보면 눈두덩이가 부은 모습이 꼭 12라운드 권투 경기를 마친 것 같아 보여 스스로 ‘12라운드라고 부르며 자조하곤 합니다. 그나마 어디 한군데 번듯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상 나쁘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코가 저만 낮지 않고, 눈썹이 저만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침에 눈이 붓는 것도 저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두 아이의 약간 부어오른 모습을 보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 어쩔 수 없음으로 수납하는 그 일이 여유를 낳고, 여유는 자기긍정을 낳고, 자기긍정은 즐거움을 낳는다는 사실을 오늘도 배웁니다.

멋스러운 사람은 끊임없이 멋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것이 남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몸과 마음에 모두 익어서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멋이 몸에 익은 사람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향수를 가지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그 은은함과 염색약으로서는 낼 수 없는 멋스러운 그 색깔을 치과에서 보철을 하면서도 핑크색으로 해달라던 첫째와 요즘 부쩍 치마를 입겠다고 유치원갈 때마다 우기는 둘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겝니다. “멋은 노력이라고.

2004년 《오픈아이》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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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과 토우슈즈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80년대에는 디스코텍을 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놓고 즐기기 힘들었던 1980년대의 대학가에서 나이트클럽에 간다는 사실이 떳떳할 수는 없는 일이다보니, 그러한 겸연쩍음을 닭장이라는 비어로서 상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닭장이라는 말에는 다소의 경멸내지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비극은 이렇게 스스로 닭장이라고 비하하며 그 곳에 가고 싶어 했고, 더 큰 비극은 춤추는 그곳에서 춤추는 일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입니다. 닭장이 아주 친숙한 친구들, 속칭 죽돌이들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화려한 조명과 음악소리에 압도되어 춤을 제대로 출 수 없었고, 사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춤을 제대로 출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닭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십여 명이 원을 만들고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표면적으로야 그 집단의 소속감과 우의를 다지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속내를 들춰보면 잘 추지 못하는 춤을 집단의 힘으로 커버하려는 시도했습니다. 옆에서 밀어 넣으면 못이기는 척하고 원의 중앙에 나가서 춤을 추면, 평소 마음에 있던 남학생이 파트너를 자청하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자신들의 춤이랄 것도 없는 몸짓을 보여주면, 원을 이룬 친구들은 세상에 그보다 나은 춤은 없다는 듯이 환호성을 질러줌으로 해서 서로 어설픔과 무안함을 넘어서곤 했죠.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압제로 인하여 하고 싶던 것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시절, 애마부인이 이유 없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달리던 그 시절, 기본만 내고 들어가면 물 쇼, 불 쇼, 어우동 쇼까지 감상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원을 이루고 군무(群舞)를 추던 20대의 모습들은 매우 아이러니하고 중의적인 슬픈 풍경이었습니다.

요즘 춤이 열풍이랍니다. 학교에서도 축제 전후가 되면 등장하는 댄스 동아리의 역동적인 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태권도와 권투를 에어로빅과 결합시킨 태보(Tae-Bo)에서부터 매력적인 자극인 살사댄스 그리고 사교댄스에 이르기까지 댄스의 열풍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열풍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계층이나 특정 연령을 뛰어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고 예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춤은 음지의 문화였죠. 가무악(歌舞樂)이 하나였던 원시종합예술형태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본시 춤은 광장의 문화였습니다. 그것은 좁은 공간에서 혼자서 추는 춤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더불어 함께했던 이것인 음지로 들어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먼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기에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의 춤문화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양공주 문화와 기지촌 문화와 결합하면서 밀실의 문화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60-70년대에 효율성만을 중심으로 한 성과주의로 인해 일과 여가의 기형적인 불균형 구조를 낳았고, 그 결과 술집여자와 나누는 춤, 바람난 여자의 징후 등으로 집중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신문에 심심하면 등장하던 카바레에서 잡혀온 아줌마들 사진과 접대문화 운운하며 등장하던 술집여자와 춤추는 중년들의 하반신 사진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저는 문예극장 대극장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억압된 현실 속에서 춤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변형(deformation)을 꾀하는 젊은이들의 숨소리에서서 해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Shall we dance>가 아니더라도 중년부부가 음악에 맞추어 완급을 조절하며 스텝을 맞추는 모습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그것은 단지 일이 곧 삶이 아니라 일은 삶을 더불어 누리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여유로운 사고, 부부가 함께 하고픈 것을 만들고 실천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 제게 몹시 절실하기 때문만은 아니겠죠. 그런 눈으로 보면 몇 년째 브라운관을 압도하는 댄스그룹의 격렬한 춤사위도 생명의 몸짓으로 넉넉하게 볼 수 있습니다. 때론 몸은 따르지 않아도 따라하는(유승준의 가위춤까지는 각이 나왔는데) 제 모습을 보며 웃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도 춤이 주는 또 다른 혜택이라면 지나칠까요?

둘째가 식탁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종아리를 모아 세웠다 풀었다 합니다. 이웃집 아이가 입었다는 발레복이 탐이 나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넉넉하게 보아주어도 통통한 녀석의 허벅지며 종아리를 보며 녀석의 과욕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춤이 자발적인 생명의 파동이었듯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생명의 움직임이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여 녀석이 발레복이 입고 싶다면 사주겠지만(제 언니 것이 있죠) 토유슈즈를 신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할 때 격렬하고 때론 우아한 자신만의 춤을 보일 수 있는 40대를 저는 꿈꿉니다.

2004년 《오픈아이》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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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떠한 이유도 죽음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최근 낯선 죽음 경험해야 해야 했습니다. 먼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삶과 죽음의 가파른 경계에 서 있던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던 그의 조국에서는 외교부의 공과를 따지며 준열한 희생양 만들기에 몰두해 있습니다. 저는 자꾸 비관적인 전망을 갖게 됩니다. 나약하고 원칙 없는 정부의 무지하고 무모한 외교 정책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젊은이들은 명분 없는 그 전쟁의 잔혹사에 피를 뿌리게 될 것이고, 만두파동이 고인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되었듯 또 다른 사건 속에서 고인의 이름은 잊혀지게 될 것이라는 이 근거 없는 확신은 저만의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이 참혹한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회의하지 않는 사회, 성찰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그의 죽음은 단지 그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 지켜낼 힘이 사라지면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지독한 현실, 그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따지고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월드컵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백성의 목숨 하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명분 없는 이 추악한 전쟁에 젊은이를 보내려하는, 다른 나라의 초토 위에서 떡고물을 기대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은 개가 물어 가버린 이 처참한 대한민국에서 우린 무엇입니까? 살려달라는 그의 절규를 보고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조치가 도움을 원치 않는 나라에 도움을 주겠다는 그 기만적인 신념을 단호하게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없었는지, 그 발표로 인하여 만에 하나 그가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할 수 없었는지 우린 이제 엄정하게 되물어야할 때입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씨랜드 화재 참사로 숱한 어린 생명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도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지키며 살아가라고! 그렇다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백성은 죽으라는 말인지. 스스로 지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아닙니다.

요즘은 학교 급식의 식재료도 믿지 못해서 학부모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영양사가 있고, 선생님들이 관리하고, 식재료 업체의 관리도 있고, 교육부나 식약청 등의 관리도 있는데 왜 부모가 나서야 하는 걸까요? 이러다가는 아이들의 캠프장이나 학교 강의실에까지 부모가 따라다녀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뢰 없이 공동체를 꾸려갈 수 없고, 공동체 의식 없는 국가는 모래 위의 집일 뿐입니다. 공동체 의식의 저 밑바닥에는 서로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그의 생명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 어떤 명분도, 그 어떤 현실적 이익도 생명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이 단지 스크린 위의 스펙터클이나 브라운관 안의 뉴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뼈저리게 배웁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스크린이나 브라운 관 안에 설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브라운 관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칙이 필요하고, 그 원칙은 생명을 가장 우선 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랜섬>에서 멜 깁슨은 아들의 몸값으로 지불할 돈을 유괴범들의 현상금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압박했고, 결국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도 그 짜릿한 결단에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해서는 어떠한 용기나 결단도 도박 그 이상일 수 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생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칙이며 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신뢰를 말하고,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삶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 바로 생명의 정신입니다. 이라크의 재건과 이라크 국민의 생명을 위해서 파병한다는 정부의 단호한 명분이 기만적으로 들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기만적인 명분으로 우리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라크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기만과 허위가 또 다른 죽음을 부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이 이라크가 부른 마지막 죽음이기를, 하지만 생명을 부른 의미 있는 죽음으로 기록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4년 《오픈아이》>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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