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준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3일부터 시작했던 미국에서의 여행이 78일까지 늘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여행은 늘 내 일 때문에 34일이면 족했고, 그나마도 가족들은 집을 떠나면 아프거나 화장실 등의 문제로 곤란을 겪곤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툰 미국이 아니던가? 78일 여행을 마치고 가족들은 모두 제 각기 제법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실 미국 횡단 여행은 내가 한국에서부터 생각해온 것이었다. 평소에 중앙아시아 횡단을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항상 시간과 자금 그리고 가족의 동의가 문제였다. 중앙아시아 횡단을 이야기하면 아내는 늘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고, 그나마 타협한 것이 가려면 혼자가라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미국횡단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워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차 안에서 슬쩍 가족들에게 방학 중에 미국 횡단을 하면 어떨까라고 운을 떼었더니, 아내의 저항이 예상보다 적었다. 아이들은 좋다고 했으니 됐고, 아내만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캐멀에서 얼바인으로 돌아오며 7-8시간 정도의 운전은 견딜만하다고 이야기하며 다시 횡단 여행의 군불을 지폈다. 아내도 낯선 곳에서 몇 번의 여행으로 그것이 걱정하는 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계획을 좀 더 구체화시킨 것은 옐로우스톤 여행 계획을 짜던 6월초였다. 얼바인에서 옐로우스톤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솔트레이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렌터카로 도는데, 예약은 이미 늦어서 항공료가 지나치게 비싸고, 솔트레이크까지의 자동차로 달리면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행 기간을 2-3일 정도 더 잡고 자동차로 떠날 것을 계획하고, 이번 여행을 하면서 과연 횡단여행이 가능할 것인지 가늠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작 횡단여행이 결정된 것은 옐로우스톤 여행을 다녀와서가 아니라 떠나기 전이었다. 아이들 방학 중 스케줄을 점검하고는 떠날 날과 돌아올 날을 가늠해보고, 가야할 곳을 지도에 표시하며 소요 시간 등을 구글로 확인하고, 예산을 짜다보니, 어느새 횡단여행 계획이 되었고,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횡단여행 진행도

횡단여행 계획을 짜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횡단 루트를 정하는 일이었다. Route66을 따라서 얼바인세도나앨버커키산타페오클라호마시티세인트루이스시카고까지 간 후에 시카고에서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보스턴뉴욕필라델피아워싱턴까지 가기로 횡단 루트를 결정했다. Route66은 철저히 나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고, 동부 쪽 루트는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중심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막상 계획을 세우면서 지도에 경로를 표시하다보니 남부지역까지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존 스타인벡도 주문제작한 캠핑카인 로시난테를 몰고 남부를 포함해서 4개월간 동안 돌지 않았던가?[각주:1] 하지만 방학과 함께 둘째의 독서 캠프가 시작되고, 방학 후반기에는 첫째의 마칭밴드 캠프가 시작되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을뿐더러 여행경비도 문제였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이동을 하면서 많은 곳들을 보거나 아니면 중요 도시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보는 방식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했지만, 우리는 두 방식의 절충안을 선택했다. Route66을 따라가는 길은 가급적 많은 도시를 둘러보고, 동부에서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은 상대적으로 꼼꼼하게 보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의 방학 중 스케줄로 주어진 시간은 21일이니 그것을 전제로, 거리와 소요 시간을 측정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면서 일정을 짰다. 그러다보니 자동차로는 돌아올 시간을 확보할 수가 없어서 워싱턴에서는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동차로 21일 간 달린 거리를 비행기로 5시간 30분 만에 돌아오는 다소 허무할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숙소를 알아보다보니 뉴욕에서는 주차가 힘들고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뉴욕에서는 도착하는 날 차를 반납하고, 떠나는 날 다시 차를 렌트하기로 결정하니, 장기 렌트의 혜택을 포기하더라도 주차비, 렌트비, 연료비를 고려하면 약 200달러 정도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안전하면서도 저렴한 차를 렌트하기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과 취소를 네 번쯤 반복한 결과였다.[각주:2]

비행기의 경우, 미국의 큰 도시는 비행장이 여러 개일 수 있기 때문에 구글에서 비행장의 위치를 확인 한 후, 여행 사이트에서 가격을 비교한 후 가장 저렴한 것으로 선택을 했다. 워싱턴(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에서 얼바인(John Wayne Airport)까지로 경로를 확정하고, 덴버공항에서 환승하는 조건의 저가항공인 프론티어 항공(Frontier Airline)을 선택했다. 저가항공의 경우 빨리 예약할수록 착한 가격에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고, 우리가 이용해야 하는 시기가 제일 성수기여서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저가 항공의 경우, 따로 부치는 짐에는 하나당 20달러의 추가 요금이 붙기 때문에, 큰 캐리어 2개에 모든 짐을 싣고,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개인 가방, 아내의 가방[각주:3]은 각자 기내에 가지고 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덕분에 자동차 여행에 필수품인 아이스박스나 기타 여행 중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기기들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여행 경로를 정하고 나서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아야할지를 여행안내 책자, 아이들의 의견, 인터넷 여행 후기, 여행 사이트 등을 통해서 며칠에 걸쳐 파악하고 정리해 두었다. 동부의 주요도시는 여행 책자를 비롯해서 각종 사이트 등에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었고, 효과적인 여행을 할 수 있는 팁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Route66 코스는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무엇을 보아야할지 시간을 들여서 꼼꼼하게 찾아야만 했다. 덕분에 미리 해당 도시의 역사, 지리, 특성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횡단 내내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여행 경로와 무엇을 볼 것인지를 결정하고 나서 숙소를 예약했다. 일정에 따라서 1박 할 곳과 2박 할 곳, 3박 이상 할 곳 등을 결정하고, 보아야할 곳과의 거리 등을 고려해서 숙소를 정했지만, 그보다 먼저 고려한 것은 가격 대비 숙소의 쾌적함이었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서 자동차가 있으니 어느 정도의 거리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소위 관광지의 형편없는 숙소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최고급 호텔을 잡기에는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짧은 여행도 아니고 2021일 동안 돌아다녀야 하고, 동부 주요 도시의 살인적인 물가를 고려할 때, 아낄 수 있는 것은 Route66코스의 숙소 비용뿐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아침을 제공하고 가격이 저렴한 인(Inn)[각주:4]과 아침은 제공하지 않지만 저렴하고 쾌적한 공항 근처의 호텔을 주로 잡게 되었다. 숙소에서 아침을 제공해주면 비용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미국은 한국처럼 어딜 가나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 식당을 찾는 일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의 여행으로 다양한 숙소를 예약하다 보니 중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도 공항 근처의 호텔들은 어디나 가격도 저렴하고 쾌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여행 사이트의 정보를 모아보니 유명 관광지나 주요 도시의 숙박비가 살인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인근에 대체할만한 지역과 숙소가 소개되어 있어서, 그것을 적극 활용했다. 어차피 걸어 다닐 거리는 아니고 자동차로 움직여야 한다면, 10분 이동하나 20분 이동하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캠핑카나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것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린 딸 둘과 아내에게 야영을 하며 미국 횡단을 하자고 할 용기도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안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장기간 진행되는 여행인데다가 여자가 셋이다 보니 무엇보다 빨래와 샤워가 중요한 문제였기에 인터넷에 제공된 사진을 통해 샤워시설이나 방의 분위기, 침대, 숙소의 규모, 사용 후기 등을 꼼꼼하게 따져서 결정했다. 횡단 도중에 수시로 정보를 확인하고 이메일 등을 체크하기 위해서 인터넷이 무료로 제공되는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미국의 대부분 숙소는 아주 빠른 와이파이(Wi-Fi)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선전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인터넷 환경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 속도는 지독히도 느리고 심지어 일부 숙소는 24시간 기준 기기당 이용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여행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숙소는 환불이 되지 않는, 그래서 저렴한 환불 불가(non refundable)’ 옵션을 선택했다. 예약한 곳이 환불이 되지 않으니 무조건 갈 수밖에 없도록 하여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한 것이다. 물론 예약은 가격을 비교해서 가장 저렴한 사이트를 이용했고, 몇몇 곳은 자동차 보험을 들고 있는 AAA(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에서 제공하는 10% 할인을 받기도 하였다. 덕분에 뉴욕을 제외하면[각주:5] 1박에 평균 91달러, 뉴욕을 포함하면 1박에 평균 112달러에 이용할 수 있었다. 세금까지 포함된 이 금액이 아주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비교적 괜찮은 아침식사까지 포함되었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비싸다고도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6월 중순 옐로우스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된 준비였기 때문에 조금 여유롭게 이것저것 고려할 수 있었다. 몇 번의 여행으로 가져가야할 것과 현지에서 조달할 것 등을 나눌 수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주말 세일 등을 통하여 가격을 비교해 가면서 경제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미국에 와서 유난히 밥을 더 찾는 아이들 때문에 햇반과 3분 카레, 컵라면, 김 등은 한인마트 세일 하는 기간에 구입해 두었고, 필요한 생수와 간단한 간식은 코스트코(Costco)에서 준비했다. AAA에 가서 주요 도시의 지도와 안내책자를 받았다. 지도와 안내 책자의 부피는 예상보다 크고 무거웠다. 여행지별로 AAA회원들을 위한 할인매장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여행지에 가면 할인되는 곳들은 AAA표시가 붙어 있어서 굳이 가져갈 이유는 없었다.[각주:6]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각 도시별 이동 경로를 구글 지도로 시뮬레이션해보고, 우리의 희망 경로와 비교하여 조정하고 나서 출력해두었다. 숙소 예약 확인 메일과 이동 경로를 각각 출력하고 보니 크기가 작은 책만 해졌다. 숙소 예약 확인 메일은 보통의 경우 필요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잘못된 경우 매우 유용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출력해 둔 것이었다.

뉴스에서는 폭염으로 동부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얼바인도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던 7월말, 우리 차창 앞에 붙어서 고집스런 말투로 길을 안내하던 사만다를 떼어서 렌터카에 옮겨달면서 횡단여행은 시작되었다.

 

  1. 존 스타인 벡 / 이정우 역, 《찰리와 함께한 여행》 궁리, 2006. [본문으로]
  2. 미국의 렌터카 회사들은 7일 단위의 렌트에 할인 혜택을 준다. 애초 계획대로 21일 동안 빌렸다면 상당한 할인혜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모션을 위해서 수시로 핫딜 상품이 나오기 때문에 수시로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차를 렌트할 때, 세금이나 보험까지 꼼꼼하게 계산하여 결정해야지만 가장 저렴한 차를 빌릴 수 있다. 메이저 렌터카 회사들의 경우, 대부분 새 차이기 때문에 차의 성능이나 상태가 매우 좋으며,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고장 시 서비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처음에 연료가 가득했던 차들은 반드시 가득 채워 반납해야 하는데, 공항에서 반납할 경우 대부분 주유소를 찾지 못해서 그대로 반납하게 된다. 그럴 경우 시중 가격보다 두 배쯤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본문으로]
  3. 횡단 여행에 필요한 일정표, 약, 지도, 간식, 휴지 등이 들어 있어서 아이들은 아내의 가방을 ‘도라에몽 가방’이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4. 미국에서의 인(Inn)은 말 그대로 경우마다 천차만별이다. 프랜차이즈 인일 경우에도 이름만 같을 뿐, 지역과 위치에 따라서 요금, 시설, 서비스 등은 제각각이다. 요금이 40달러에서부터 200달러 이상까지 제각각이지만, 시설이나 서비스가 반드시 요금에 따라 결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역과 위치에 따라 정해진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5. 뉴욕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과도하게 숙소비가 비싸서 민박을 했는데, 민박 역시 호텔에 비해서는 저렴했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거의 2배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했다. 따라서 평균 숙박비를 산정할 때, 뉴욕이 포함될 경우 다소 금액의 왜곡이 있을 수 있다. [본문으로]
  6. 몇몇 곳에서는 할인되는 줄 몰랐는데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여는데, 직원이 거기에 꽂혀있는 AAA카드를 보고 할인을 해주기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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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떠나는 여행

728일 얼바인세도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 7시에 렌터카를 인수하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가 집에서 10마일(16)쯤 떨어져 있으니 우리차로 가서, 렌터카는 내가 몰고, 우리 차는 아내가 몰고 와야 했다. 미국에서 처음 차를 렌트하려다 보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나보다 영어가 원활한 첫째를 태우고 가야했고, 그러다보니 둘째만 집에 둘 수가 없어서 결국 온 가족이 가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여행 전날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일찍 자라는 말에도 흥분이 되는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이 길어지면 아침이 분주하다. 결국 분주한 만큼 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05도로를 타고 10여분쯤 달리다가 빠져나와서 우회전을 하려는데, 뒤에 있던 BMW가 슬그머니 와서 우리 차를 받았다. 추돌 사고였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망해하며 내렸다. 뒤에 BMW로 가보니 운전자는 창문도 내리지도 않고 안에서 혼자서 떠들 뿐이었다. 일단 갓길로 대라고 손짓을 하니 그제야 뒤따라왔다.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이곳에 오자마자 들었는데, BMW 운전자는 느릿느릿 내리더니 역시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화가 났지만 내차에 큰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라고 했더니 그제야 미안하단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횡단여행을 떠나는 첫 날이 아니던가? 아침, 첫날, 새봄 등등 처음 시작하는 것에 유난히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알기에, 여행을 시작하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그를 잡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아이들 보기에 볼썽사나울뿐더러 이미 놀라 있는 아이들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과를 받아내기에는 불행히도 나의 영어실력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저 횡단여행의 액땜을 했다고 믿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정보다 30분쯤 늦었다. 예약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났더니 하루 15달러를 추가부담하면 보험이 가능하단다. 렌터카 보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225달러의 예상하지 못한 경비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고 횡단을 시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는가?

모든 서류 처리를 끝내고 차를 인수하고 보니 전에 설명했던 차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아내와 풀 사이즈 카’(full-size car)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그보다 한 사이즈 작은 스탠더드 카’(standard car)급과의 연비 차이는 얼마가 되는지, 그리고 MP3는 사용 가능한지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렌터카 회사를 미리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담당자 말이 어느 차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타 캠리나 닛산의 알티마2.5[각주:1] 정도가 될 것인데, 캠리는 예약 상 없을 듯하고 알티마2.5가 될 것이라고 했다. MP3는 사용 가능할 것이고, ‘스탠더드 카급과의 연비 차이는 크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알티마2.5겠지 했는데 느닷없이 브라운색 마즈다6. 알티마2.5가 마즈다6보다 좋은 차인지 아닌지는 몰아본 적이 없는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마즈다6의 기어인데 D로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M에 놓고 출발을 해서 엄청난 소음과 저속을 경험하였다. 운전한지 20년이 넘었는데 낯선 것은 낯선 것이다.

차량 외부와 6,000마일(9,650) 정도 주행한 것으로 보아 새 차인 것은 분명한데, 차량 내부를 보니 마치 5-6년은 운행한 차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차가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숙소 예약이 끝나있는 상황이고, 오늘 달려야 할 거리와 시간은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둘째를 우리차로 보내고, 나는 첫째와 그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조금 달리다보니 차량소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몇 번을 달리고 서고를 반복해보았는데, 이 차로는 횡단은 둘째 치고 집까지 가는 것도 어려웠다. 차를 돌려 다시 렌터카 회사로 가서 차량 소음이 너무 심하니 다른 차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직원이 나와서 시동을 걸더니 무슨 소음이 나냐고 묻는다. 혹시 D가 아니라 M에다 놓고 운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속기어에 두고 운전을 했으니 그 소음이 오죽했으랴, 추돌 사고와 마음에 들지 않는 차, 떠나려는 바쁜 마음이 겹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차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강력하게 차를 바꾸어달라고 하자 직원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편도(one-way)로 뉴욕까지 가는 우리에게 좋은 차를 주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만약 다른 차가 없다면 하나 아래의 스탠더드 카급의 차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다며 코발트색 마즈다6을 보여주었다. 5,000마일(8,046) 정도를 달린 새 차인데 내부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고, 운전을 해보니 앞에 차보다 편했다. 이 차로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서류를 모두 다시 꾸며야 한단다. 그제야 직원이 왜 그렇게 싫은 기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차종인데 그냥 타지, 왜 서류를 다시 꾸미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뉴욕까지 15일을 같이 해야 할 차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차로 찝찝한 기분에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차에는 MP3 연결잭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놓고 들었더니 소리가 제법 들을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여행에서 운전의 피로를 풀어주던(때론 피로를 가중시키던) 유진이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약하면서 몇 번을 확인했는데, 그 때에는 MP3 연결 잭이 있다고 해놓고서 막상 차를 받고 보니 없었던 것이다. 횡단하면서 듣겠다고 유진이가 며칠 전부터 음악파일을 다운 받고, 정리해 놓은 터였다. 운전하는 나도 나였지만 차 안에서 장시간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유진이의 실망이 걱정 되었다. 유진이에게 미안해서 이거 어떻게 하지?”라고 했더니, 아이는 추돌 사고에 차 교환 등으로 이미 놀라고 지쳐있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팟 자체 스피커로 들으면 된단다. 아이가 아빠보다 현명했다. 고민 끝에 아이팟을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 놓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위에서 소리가 나니 훨씬 음량이 좋았다. 다소 옹색하긴 했지만 어쩔 것인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면 통()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실었다. 떠나 있는 기간에 비례해서 짐은 늘고, 여정이 진행될수록 짐으로 인한 수고도 는다.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 12개들이 햇반 두 상자, 카레를 비롯한 즉석 요리 24, 6개들이 컵라면 세 박스,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작은 가방, 1리터 생수 24개 한 상자, 약과 간식이 들어 있는 아내의 가방, 여행 중 아이스박스 역할을 해 줄 방수 가방 등이 전부였다. 21일 간의 여행이지만 캐리어와 카메라 가방, 노트북 등을 제외하고는 가는 도중 모두 먹어 없어질 것들이었다. 비행기로 돌아올 때 짐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옷은 가급적 적게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나는 마치 난파선에서 짐을 꺼내어 물품을 확인하는 15소년 표류기[각주:2]의 소년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먼 길 떠난다고 옆집에 사시는 이 교수님 사모님은 짐을 싣는 내내 곁에서 도와주시며 배웅을 해주셨다.[각주:3] 얼바인을 벗어난 차는 평균 시속 70마일(112)로 달리면서 점차 내게 익숙해졌다. 차가 익숙해지자 마음이 놓이면서 차 안의 장치들이 궁금해졌다. 특히 내 차에도 있지만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크루즈(Cruise)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On 버튼을 누르고 가속 스위치를 올리니 크루즈 기능이 작동되었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라스베이거스 근처에서 과속으로 벌금을 문 이후로 정속운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프리웨이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어느새 과속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크루즈 기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허용되는 최대속도에 크루즈 기능을 설정해두면, 과속 염려도 없을뿐더러 엑셀을 밟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였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영락없는 나비족으로 만들어주는 팔토시다. 그렇다면 팔토시가 아바타인가? 빼는 것을 잊고 차에서 내리면 여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하는 패션 아이템이다.

동부에서는 화씨 117(섭씨 47)까지 올라가는 기록적인 찜통더위로 3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지만, 우리가 있는 서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여름을 생각하면 쾌적한 편이었다. 기온은 높이 올라가도 건조한 날씨 때문에 그늘에 있으면 오히려 서늘했다. 낮에 무방비로 햇빛에 노출되는 것만 피하면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어서 여름 내내 냉방기를 한 번도 틀지 않고 지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여행이 서부에서 동부로 간다는 것이고, 더구나 낮 시간 동안 사막지대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의 열기는 살인적인 것이었는데, 네바다 사막지대를 달리다보면 차가 과열 될 수 있으니 에어컨을 끄라는 경고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온뿐만 아니라 차창으로 내리쬐는 자외선도 큰 문제였다. 피부가 까맣게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8시간쯤 달려야 한다면 자외선 차단제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미리 한인마트에서 특수소재로 만들었다는 쿨토시(팔토시)를 준비했다. 토시를 끼면 손가락 두 마디만 남기고 손부터 시작해서 팔뚝까지 온전히 덮을 수 있었다. 게다가 특수소재라 가볍고 얇을뿐더러 시원하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것은 팔토시의 색깔이 파란색이어서 그것을 끼고 나면 영락없는 <아바타>(Avatar, 2009)의 나비족이었다. 팔토시는 보기보다 시원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했다I-15를 타고 가다가 주로 I-40을 달렸다. 우리가 달리는 길옆으로 Route66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Route66은 도로의 형태나 기능을 잃은 곳이 많았고, 새로 만든 표지판만 어색하게 선명했다.

존 스타인벡이 ‘The Mother Road’로 명명한 Route66은 시카고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까지 2,200마일(3,500)에 이르는 동부와 서부를 잇는 동맥으로서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한 도로였다. Route661925국가 고속도로 시스템 구축 계획이 발표된 이후, 각 주정부에 의해 건설되었고, 1940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노이 주-미주리 주-캔자스 주-오클라호마 주-텍사스 주-뉴멕시코 주-애리조나 주-캘리포니아 주를 이어준 Route66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나던 절박한 길이었고, 2차 세계 대전에는 전장으로 가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의무와 명분의 길이었으며, 전후에는 자동차와 함께 개인의 자유를 구가하던 낭만의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의 역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건너던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낡은 도로가 되어 갔고, 마침내 1985년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Route66은 도로건설 기술이 현재와 같이 발전하기 이전에 건설된 도로였고, 주정부가 건설하다보니 도로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주요 도시의 중심도로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횡단도로로서의 효율성 면에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건널 수 없었고,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의 고속도로들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워버린 Route66을 살려낸 것이 존 라세터(John Lasseter)의 애니메이션 <>(Cars, 2006)였다. <>Route66의 어느 한 마을인 듯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단지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 말고도 삶에는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성취, 효율, 속도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삶에 대비하여 과정, 즐거움, 여유로 상징되던 Route66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기 위하여 존 라세터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가 <Cars>의 제작 동기에 대한 언급이 눈에 뜨였다. 2001년 존 라세터의 아내는 가족 여행을 제안하며 가족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자라 우리를 떠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족의 소중한 부분을 영영 잃고 말 것이라고 했단다. 그 말은 마치 내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내와 존 라세터의 아내가 서로 통화하는 사이도 아닐 터이고 보면,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나보다. 아내의 그 말을 들은 존 라세터는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는가?”라며, 가족들과 두 달 동안의 트레일러 여행을 떠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Cars>를 제작했단다.

아마 그때였으리라, 연구년을 미국으로 간다면 반드시 가족들과 Route66을 함께 여행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횡단여행이 시작되었다. 21일 동안 오롯이 가족들과 함께 달려가야 할 즐거운 여정이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서로의 모습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는 느슨한 기대를 품어본다.

Route66은 이제 다른 도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끊어져 있다. I-40표지판 옆에 Route66이 함께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표지를 따라 내려서면 쇠락한 마을이거나 끊어진 길의 어디쯤이다. 시대적 효용을 잃는 것들의 쓸쓸한 모습과 같다.

Route66은 달리던 그 시간에 멈추어 있었다. 멈춘 시간을 멈춘 그대로 두었다면 그 시간은 차라리 나름대로 흐를 수 있지 않았을까? 멈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색칠하려다 보니 그것은 추억 없는 기억이 되거나 아주 천박하게 화려해진 슬픔이 되고 말았다. 길은 사라지고 도로표지만 살아서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싸구려 기념품으로는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의 Route66이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 길과 같은 시대를 달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가뭇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쟁, 효율, 성취라는 목표지향적인 삶의 속도는 협력, 여유, 과정의 미덕을 야유할 뿐이었다. 그 야유 속에서 소중한 것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거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존 라세터가 <>에서 그리워하며 복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낡은 도로의 추억이 아니라 그곳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아니었을까? 낡은 Route66은 그렇게 길 아래로 나란히 달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Route66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곳곳에서 내려서 달려보았지만, 길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정쩡한 시제로 바람에 날릴 뿐이었다. Route66 옆으로 달리는 I-40은 지평선이 이끌고 있었다. 길은 높낮이와 곱고 굽음의 차이가 있을 뿐 집요하게 지평선을 향해 있었고, 지평선은 끝 모를 하늘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서부쪽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지평선을 보고 달려간다. 지평선을 이끄는 것은 늘 하늘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멀어질수록 사막과 스텝의 중간지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따금 마을들이 달려왔지만 빠르게 뒤로 달아날 뿐이었다. 몇 시간을 줄곧 앞으로만 달리는 길이니 사만다는 긴 침묵에 빠져 들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아이들은 차가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 각자의 취향대로 잠이 들었다. 자기는 음악을 틀어야 한다며 아내 대신 굳이 조수석에 앉은 유진이는 의자를 잔뜩 눕힌 채 다리를 대쉬보드에 올리고 목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고, 효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물론 강한 햇빛은 햇빛 가리개로 모두 가리고,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온 간식을 배불리 먹은 뒤의 일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이 아까워 밖을 보라고 깨우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살아가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엄마 무릎 베고 따듯하게 잠들 날이 또 앞으로 몇 날이나 될 것인가? 그래 많은 것을 보는 것만 여행의 풍미겠는가? 자기 취향대로 느끼고 가져가 두고두고 따듯해할 수 있는 기억을 일구는 일이 여행의 기쁨 아니겠는가? 여행준비로 피곤했던 아내도 졸릴 것이 분명한데 운전하는 내가 졸까봐 룸미러로 나를 훔쳐보며 계속 이야기를 걸고 있었다. 서너 시간쯤 달린 후, 유진이가 깨서 음악을 틀자 안심이 되었는지 아내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부 쪽 고속도로[각주:4]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길에 올라서고 내려서는 일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굳이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 진출입로 주변에 음식점, 주유소, 숙박시설을 표시해둘 뿐이다. 물론 고속도로 위에 아주 드물게 쉼터(Rest Area)를 두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간격이 너무 멀고, 화장실과 피크닉이 가능한 식탁 정도가 놓여 있을 뿐이니 한국식 휴게소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유료도로(Pike, Turnpike)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식 휴게소와 비교적 유사한 휴게소들이 고속도로 위에 있다.

캐나다 마트의 전경이다. 주유소와 마트가 결합된 미국의 전형적인 주유소이다. 건물을 압도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주던 곳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에서 깬 것은 다섯 시간 넘게 달리고 주유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 킹맨(Kingman)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섰을 때였다. ‘캐나다 마트라는 생뚱맞은 이름의 작고 낡은 마트는 주유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은 휘발유 가격이 1갤런에 3.38달러로 얼바인에서 가장 싸다는 코스트코 주유소의 3.67달러에 비해 29센트나 저렴했다. 그깟 29센트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횡단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금액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12갤런을 주유했으니 3.48달러를 아낀 것이다. 빠듯한 여행 경비도 절약해야 했지만, 동부의 대도시로 가면 이곳에서 아낀 기름 값만큼 혹은 그 이상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주유소와 편의점을 함께 운영하며, 화장실은 편의점 안에 있기 때문에 주유를 하고서는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속도로 위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으니 주유할 때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 ‘캐나다 마트라는 곳은 일반 관광객보다는 트럭기사들이 주 이용객들인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에는 독립적인 샤워부스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장실 시설은 오히려 아주 소박했다. 마트 안팎으로 Route66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관련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소박한 수준의 Route66 기념품뿐이었다.

킹맨에서 세도나(Sedona)까지는 세 시간쯤의 거리였다. 잠에서 깬 아내와 아이는 이번 여행의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미리 조사해둔 몇몇 곳을 꼭 들러줄 것을 요구했고, 효진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보스턴과 워싱턴의 몇몇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대면서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뉴욕을 가장 많이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구체적인 어떤 곳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동안 만나게 될 풍경들과 차 안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말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여행 출발 전에 약속했던 여행의 기록을 각자 어떤 식으로든 남기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신혼여행부터 꼼꼼하게 기록해왔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아내는 첫 여행부터 냉장고 자석을 모으고 있었고, 유진이는 엽서와 각종 팸플릿들을 모아왔는데 이번에는 효진이도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방신기의 노래를 몇 번쯤 듣는 사이 표지판은 세도나 인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를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눈이 먼저 현혹되고 만다. 사만다의 안내가 없었음에도 플래그스태프 표지판을 보자마자 차는 벌써 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사만다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미웠는지 잠시 먹통이 되었다가 플래그스태프를 한 바퀴 돌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자 정신을 차렸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길을 몇 번 놓친 끝에 Arizona 89A를 만나서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Midgley Bridge의 전경이다. 아래로 트레킹 코스가 위험스런 유혹을 하지만 위로는 평온한 다리일 뿐이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에 들어서자 이미 붉은색의 강한 기운이 산과 절벽들로 이어진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날씨 탓인지 먹구름이 몰려들어 석양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사나운 표정이었다. 달려드는 풍경에 이끌려 몇 번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세웠다. 갓길이라기에는 너무 협소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풍경이 잡히질 않았다. 광각렌즈로 바꾸어 보았지만 렌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이 될 만한 뷰 포인트는 모두 유료화 되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온전히 풍경을 담을 수 없었다. 트레킹을 하며 풍경 안으로 좀 더 들어가야 얻고 싶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날은 흐리고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오크 크릭 캐니언에서 세도나로 들어서는 길에 미즐리 브리지(Midgley Bridge)를 만났다. 평소에는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두세 대만 주차해 있었고 그마저도 금방 떠났다. 미즐리 브리지 옆으로 몇 개의 트레일(trail)이 지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즐리 브리지는 윌슨 캐니언(Wilson Canyon)과 오크 크릭 캐니언을 이어주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막상 두 캐니언을 바라보니 이름과 구분은 그저 인간의 몫일뿐이었다.

미즐리 브리지를 넘어서 얼마가지 않으니 업타운 세도나(Uptown Sedona)였다. 먼저 안내 센터에 들러야 했지만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가까웠고, 이미 490마일(784km)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숙소 직원이 붉은 펜으로 설명해준 세도나 지도

숙소로 잡은 스카이 렌치 랏지(Sky Ranch Lodge)는 업타운 세도나를 지나서 산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세도나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숙소 앞에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는 세도나의 대표적인 볼텍스 (Vortex) 지점 중의 하나라는데 내게는 그보다 노을이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노을을 기대하고 부지런히 달려갔지만 간간이 비가 내리고 이미 너무 어두워졌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밤이 내리는 세도나의 풍경만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세도나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기부를 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일본어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환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황급하게 차로 돌아와야 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세도나 안내지도를 부탁하니 약간 여성스러운 남자 직원이 친절하게 붉은 펜으로 표시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멕시코 풍의 숙소는 정성들여 가꾼 정원과 신경 쓴 소품들로 낡은 느낌이 오히려 멋스러웠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저녁 준비를 했다. 딱히 근처에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온 햇반과 즉석 카레 그리고 컵라면을 준비했다. 햇반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즉석 카레는 물 끓이는 기구로 데우고, 물을 따로 끓여 컵라면에 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와 물 끓이는 기구의 코드를 꽂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면서 물을 끓이려하니 과부하가 걸려서 퓨즈가 나간 것이다.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즉시 사람을 보내주어 바로 고쳤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리니 전기가 또 나갔다. 이번에는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니 사람을 또 보내주어 불은 들어왔지만 전자레인지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방안에 불도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끄고 전자레인지만 돌리니 돌아갔다. 햇반과 카레를 데우고, 컵라면 물을 끓여서 간신히 저녁을 먹었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달려온 거리에 비해서는 모두 활력이 넘쳤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씻게 하고, 찍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내려서 정리를 했다. 페이스북에 간단한 경과를 올리고, 내일 일정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볼 것을 선택해야했고, 보아야할 곳의 동선을 잘 짜야했다. 아이들은 첫날의 흥분 때문인지 낮에 차에서 잤던 탓인지 여행 일기를 적고나서도 한참을 떠들다 자정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오늘은 I-40Route66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달리고 또 달려왔다. 출발할 때는 낯설었던 차가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일 년 동안의 연구년은 조금 긴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분명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은 여행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횡단 여행은 미국에서의 일 년 여행 중에 떠난 또 다른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아침에 인수한 차처럼 이제 조금 익숙해졌을 뿐인데, 무엇을 찾아 무모하게 횡단을 감행하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 년 간 미국으로의 여행이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잃어버린 것,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듯, 횡단여행을 통해 낯선 공간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볼 뿐이다. 내일은 세도나를 보고 앨버커키(Albuquerque)로 달릴 것이다. 늘 밤은 낮보다 시간이 더디 흐른다.

 

  1.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소나타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Hertz에는 소나타가 없었다. 렌터카를 예약하는 사이트에서는 풀 사이즈 카 급의 차로 Chevrolet Impala급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어떤 차가 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문으로]
  2.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신나게 읽었던 소설이다. 아이들끼리 무인도에서 2년 간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내가 열여섯 번째 소년이 되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3. 21일 간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우편물 등을 옆집의 이 교수님 댁에 부탁을 하고 떠나야했다. 이 교수님은 나처럼 UCI에 교환교수로 나와 계셨고, 우리처럼 딸 둘이 있어서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했다. 이 교수님 댁과는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편물도 우편물이었지만 집을 떠나면서 돌아올 곳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푸근함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한 면적의 100쯤에 달하는 미국의 동맥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프리웨이(free way)라고 부르는 자동차 도로들이다. 처음에는 서부 고속도로가 무료이기 때문에 프리웨이인 줄 알았는데, 미국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로라는 의미에서 프리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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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729일 세도나앨버커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면서 여지없는 것들이 있다. 밥이 그렇다. 밥은 늘 끼니때마다 예외 없이 절실하다. 어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오늘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않는다. 야속하리만치 허기는 규칙적이다. 그래서 늘 밥은 어김없는 현실이다. 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삶에 진지하다. 그 밥이 어떻게 마련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삶에 태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밥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의 어쭙잖은 오만을 나는 혐오한다. 그래서인지 김훈의 칼의 노래(2001)를 읽다가 이순신이 전투를 치르러 나가는 병사들에게 고구마를 나누어 주며 독려하는 장면에서 나는 속절없이 울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양식인 고구마를 나누어 주고, 전투에서 이겨 살아 돌아오면 적의 군량미로 밥을 먹을 것이고 죽게 되면 더 이상 끼니가 소용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나는 이보다 더 투명하고 진지한 밥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아침은 허기와 함께 온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아침은 참 난감한 숙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숙소에서 아침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침 식사를 할 곳을 찾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만족할만한 식당을 찾는 것도 일이지만 찾아도 대부분 패스트푸드 가게의 조악한 정크 푸드(junk food)였다. 게다가 그 조악한 음식을 찾으러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맥 풀리는 일인가? 횡단을 계획하면서 가급적 아침을 제공하는 숙소를 골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군데는 아침이 제공되지 않는 숙소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세도나의 숙소가 그랬다. 더구나 그 높은 숙소 주변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세도나에서의 아침은 집에서 미리 가져온 빵과 쨈 그리고 우유로 소박하게 마쳤다.

에어포트 메사에서 바라본 세도나 시내의 전경

숙소를 나서면서 보니 전날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던 에어포트 메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그보다 먼저 세도나의 전경이 발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주보이는 레드 락(red rock)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아니어도 붉은 빛으로 충만했고, 그 아래로 세도나 시가는 제몫의 나무들을 품에 안고 평화로웠다. 사진을 찍고 떠나려는데 어제의 기부를 권하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결국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을 기부함에 넣고, 레드 락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미국의 10대 관광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는 세도나에서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를 만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원래 브로큰 애로우는 기병대와 인디언 사이에 협상을 진행하던 중, 인디언이 화살을 부러뜨려서 협상의 결렬을 나타낸 것에서 유래했다는 말로 최악의 상황[각주:1]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가장 좋다는 곳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나는 것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는 1853년 참혹한 비극으로 끝난 브로큰 애로우 전투다. 이 전투 이전에도 인디언[각주:2]들은 금과 땅과 바이슨 가죽 등을 원했던 백인들에 의해 19세기 초까지 학살되거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야만 했다. 세도나는 원래는 나바호족, 아파치족, 야바파이족 등 인디언들의 성지(聖地)였는데, 서부개척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땅에서 내몰리던 그들은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야바파이족과 아파치족이 그랜드 캐니언 일대로 쫓겨나면서, 세도나는 결국 백인들의 땅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기중심의 명분과 탐욕으로 인디언을 몰살시키거나 내쫓은[각주:3] 브로큰 애로우 전투가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다.

1980년대 이후 이곳에서 볼텍스(Vortex)가 나온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관광지로 급부상했고, 그 덕분에 세도나에는 매년 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단다.[각주:4]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 번째 브로큰 애로우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왜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는지는 살피지 않고, 과학적 효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볼텍스 운운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의 맹목과 오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영적인 삶을 추구했고, 그것에 세도나의 자연이 반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면서 볼텍스만을 믿고 세도나로 몰려와서 그 치유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믿음의 시작이다. 세도나는 그런 면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믿음을 만들어 신화화하고 있었다. ‘세도나를 처음 보고서 감탄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자고 있는 중일 것이라거나 신은 그랜드 캐니언을 창조했지만 그는 세도나에 산다는 말만 들어도 세도나의 자연을 신화화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숙소에서 Arizona 89A를 타고 레드 락 주립공원까지 가는 길은 무척 이채로운 길이었다. 도시 전체가 세도나의 붉은 빛을 유지하면서 멋스러운 어도비(Adobe) 양식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만다가 조금 헤매는 동안 발견한 한적한 길가의 주택들은 하나같이 소박했지만 자기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는 세도나 전체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지금도 세도나에서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들도 2층 이상 건축할 수 없고,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고유의 노란색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제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신호등에서부터 도로 표지판까지 자연의 붉은 빛을 거스르지 않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붉은 빛의 바위들 사이를 이어 달리고 있는 세도나의 도로는 온통 붉은 빛이다. 신호등과 표지판,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세도나의 빛을 입고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2층을 넘어서지 않는다.

세도나의 주립 공원들은 각각 입장료를 받는다.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연간회원권(80달러)을 끊으면 언제 어디서나 이용이 가능한데, 주립공원의 경우에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레드 락은 10달러, 슬라이드 락(Slide Rock)20달러의 입장료를 받는데, 입장권에 적힌 글을 읽어보니 주립공원 건설에 쓰인단다.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입맛은 쓰다. 세도나의 곳곳이 그렇지만 레드 락도 트레킹 코스가 아주 좋단다. 먼저 안내센터에 갔더니 세도나 홍보 영화를 상영했다. 세도나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이게 지나치게 길었다. 앞부분은 세도나의 곳곳에 대한 설명과 즐기는 모습이 제대로 구성되었는데, 후반부에는 세도나의 풍광과 동식물들의 영상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어, 우린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세도나를 보고 7시간쯤 달려서 앨버커키로 넘어가야 하는 날이었고, 세도나에는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트레킹을 포기할 때쯤 변함없이 또 허기가 찾아왔다.

아침이 소박하면 점심은 알차게 해주어야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 현지식으로 먹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다. 음식만큼 그곳의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없고, 낯선 음식을 즐기는 재미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이곳 음식을 체험해야한다고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를 하고,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에서보다 더 많이 한식으로 먹고있다. 몇 해 전에 신장 결석을 앓고 난 이후로는 짠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 탓도 있지만, 이곳 음식이 지나치게 짜고 기름졌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종입맛인 나는 비교적 견딜만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견디질 못했다. 가리는 음식이 많고 새로운 음식을 두려워하는 효진이도 효진였지만, 가리는 것 없고 새로운 음식 도전을 즐기고, 외국에서 1년 생활한 경험도 있는 유진이가 더욱 강경한 것은 의외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이곳 음식을 체험할 기회가 많지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업타운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 오악사카(Oaxaca)에 갔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근처 타코벨(Taco Bell)에서 먹었던 타코와 브리또 맛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반기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패스트푸드가 아니고 다른 메뉴도 있을 것이라고 설득해서 들어갔다. 오악사카에 들어서니 달큼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시장기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초와 살사소스를 내주면서 음료주문을 먼저 받았다. 나초와 살사소스는 큰 볼에 두 개나 나왔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사진 먼저 찍고 먹자고 약속했었는데 배가 고팠던 우리는 까맣게 잊고 먹다가 기억해내서 가까스로 사진을 찍었다. 타코와 브리또 그리고 키즈메뉴를 시켰는데, 넉넉한 양도 양이었지만 맛이 탁월했다.

오악사카 레스토랑의 나초. 브리또, 타코

모두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산서를 받고 보니 처음에 준 나초가 공짜가 아니었다. 주문하지도 않은 나초를 주고 계산서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쾌했지만 이곳은 관광지고, 나초의 맛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산서를 자세히 보니 팁이 이미 포함된 금액이 적혀 있었다. 관광지의 경우 계산서에 팁을 미리 포함해서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손님 입장에서도 얼마를 주어야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이 더 편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카드를 건네주니 계산을 마쳤는데, 다시 가져온 전표에는 추가 팁(additional tip)란이 또 있다. 추가 팁란을 비워두고 총액을 적고 사인을 해주었다. 참 지독한 관광지다.

미국에 와서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팁문화다. 보통 금액의 15% 정도를 주면 적당한데, 50달러가 넘으면 20%를 줘야한단다. 그동안은 세금을 포함한 총액의 15%를 주었는데, 알고 보니 세금을 제외한 금액의 15%를 주는 것이란다. 팁문화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는 음식값에 서비스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는 한국식 사고에 젖어 있는 탓도 있지만, 딱히 친절한 서비스를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팁을 주어야하나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를 줘야하나 매번 계산하는 것도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몇 해 전에 같이 책을 낸 후 미국에 와서 학술대회에서 우연하게 만났던 펜실베니아주립대학의 강인규 선생의 책[각주:5]에 따르면, 미국에서 팁은 임금의 일부로서 포함되며 심지어 소득세까지 물고 있단다. 팁문화는 소위 고용주가 부담해야할 임금을 소비자가 부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팁 노동자의 저임금은 개선되지 않는 고용주 중심의 불합리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생활화된 미국인들도 팁문화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는데 하물며 낯선 한국인의 눈에 비친 팁문화야 오죽했겠는가?

점심을 먹고 어제 오는 길에 지나쳐 온 슬라이드 락을 보러 갔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옆에 표지를 보니 입장료가 20달러였다. 어차피 슬라이드 락의 핵심은 흐르는 물에서 슬라이딩하는 것인데 우리는 물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고, 시간상으로 트레킹을 할 수도 없었다. 차 안에서 급하게 회의를 한 결과, 차를 돌리기로 했다. 앨버커키까지 7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고, 초행길에 사만다만 믿고 밤길 운전을 하기는 어렸기 때문에 틀라케파케(Tlaquepaque)와 홀리 크로스 채플(Chapel of The Holy Cross)만 보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틀라케파케의 거리와 상점. 1970년대에 지어졌지만 기존의 나무를 그대로 살리면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멋스러운 풍경을 얻을 수 있었다. 틀라케파케라는 말 그대로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 되었다.

틀라케파케는 멕시코 분위기가 압도적인 미국 남서부의 대표적인 예술마을이자 상가였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지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과 광장을 중심으로 작은 벽돌이 깔린 보도를 따라서 다수의 갤러리와 상가가 연계된 곳이었다. 틀라케파케는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라는데, 멕시코 과달라하라 인근 예술마을의 이름이란다. 아치형 골목을 따라가면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이어져 부드럽고, 건물마다 큰 나무를 가슴에 안고 넝쿨로 세월을 얹고 있는 풍경은 아늑했다. 주변을 거스르지 않고 지나가는 세월을 안으로 수납하는 이곳의 건물들은 고즈넉하고 향기로웠다.

틀라케파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도비 양식의 건물과 그 중심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보여주는 조화였다.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어도비 양식의 개성적인 건물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들이 어우러졌다. 거기에 근처 식당에서 풍겨오는 멕시코 음식 특유의 넉넉하고 맵싸한 냄새가 더해져 더할 수 없이 따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는 틀라케파케가 이렇게 오랜 수령의 나무들 사이에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원래 이곳의 땅주인의 판매 조건 때문이었단다. 원래 땅주인이 이곳의 나무들을 훼손하지 않는 조건으로 땅을 팔았고, 새 주인이 그 뜻에 따라 나무들을 그대로 둔 채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의 아름다운 뜻이 나무의 세월을 살리고, 건물에 시간을 얹었다. 탁 트인 광장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나무, 푸근한 높이에서 깊게 울려오는 종소리, 그 나무와 종소리가 만나는 곳마다 멈춰있는 조각들, 조각들을 따라 조용히 늘어선 작은 입구의 갤러리와 수공예품 가게들의 어우러짐이 틀라케파케의 아우라였다.

Chapel of The Holy Cross의 외부 전경과 내부의 전면 유리로 바라본 세도나

틀라케파케를 둘러보는 동안 간간이 비가 내렸고, 카메라를 셔츠 안에 넣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다녔다. 갤러리나 수공예품 가게에 들어가면 비가 그쳤고, 밖으로 나와 이동을 하다보면 다시 비가 내려서 근처 가게에 들어가곤 했는데, 들어가는 가게마다 특색 있는 상품들로 한참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이나 광장에서 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모습은 우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문득 자유롭고 즐거웠다. 내리는 비로 인해 달콤한 먼지 냄새가 건물 사이에서 번져왔고, 비가 지나간 숲그늘에선 나른한 상념마저 피어올랐다.

클라케파케를 나와 좀 더 짙은 붉은 기운을 따라가다 보니 홀리 크로스 채플이 나타났다. 레드 락 카운티(Red Rock County)답게 붉은 바위 위에 약 27m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건축한 홀리 크로스 채플은 그 자체로 이미 숙연한 묵상이었다.

1956년에 마거리트 브러스위그 스터드(Marguerite Bruswig Staude)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홀리 크로스 채플은 가톨릭 성당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창조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기도와 묵상의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단다. 거대한 자연의 압도 위에 성당을 짓겠다는 발상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 발상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거스르지 않고 이루어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곳이었다.

사다리꼴 외관의 성당 전면은 빛이 충만할 수 있도록 유리로 하고, 그 중심에 거대한 십자가를 전면화한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곳의 디자인은 표면적으로는 도저히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성당까지 걸어서 올라가다보니 이 조화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붉은 바위들이 가까이 혹은 멀리서 성당을 둘러싸고 있고, 성당에 오르는 램프는 구름다리 형식으로 붉은 바위의 곡선을 따라가고 있었으며, 성당까지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서 하늘과 바로 맞닿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보면 성당은 아주 단아하고 견고한 희원(希願)처럼 보였다. 성당의 입구 쪽으로 들어서면 중앙의 십자가와 그 주변의 규칙적인 직사각형 무늬로 구분된 전면 유리를 통과한 빛이 성당 내부를 더욱 경건하게 만들었다. 성당 내부에는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밝혔을 수많은 작은 촛불이 쉼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램프, 성당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욕을 먹고 있는 성당 아래 대저택의 전경 그리고 정상의 모습.

성당 밖으로 나왔을 때 흐린 하늘은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당 아래에는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 있는 대저택이 있었는데, 몹시 눈에 거슬렸다.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불린다는 이 저택은 성당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대저택은 집 크기와 화려함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였는데, 그것을 앞세우고 있는 집주인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시간은 이미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앨버커키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떠나도 벅찬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미티어 크레이터(Meteor Crater)에 들려보고 싶어 했다. 저녁 먹는 시간을 줄이면 30분 정도만 더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고, 세계 최대의 운석이 떨어진 곳이라는 말이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미티어 크레이터로 향했다. I-40으로 1시간 30분쯤 달려가니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를 보고 내려섰는데 허허벌판에 길만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 위로 새로 포장한 듯한 도로가 7마일(11)쯤 묻지도 않고 앞으로만 내닫고 있었고 그 위로 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었다. 표지판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텅 빈 사막의 한 가운데 미티어 크레이터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의 7마일에 달하는 진입로

7시에 문을 닫는데 530분을 조금 넘어선 시간에 도착하고 보니 마음이 급했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8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는데, 표를 받는 사람이 안내 영화를 상영하니 꼭 보란다. 상영 시간을 몰라서 기념품점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6시부터란다. 조금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을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달려와서 이제 영화 상영을 할 텐데, 늦으면 문이 자동으로 닫히니 빨리 가서 보란다.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친절 덕분에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 전경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가니 운석공(Crater)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운석공의 중심까지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는 5만 년 전에 50-100m 크기의 소행성이 초속 12로 충돌하여 생긴 운석공으로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베린저 운석공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행성과의 충돌 시 파괴력이 TNT 25백만 톤(히로시마 원폭의 150)이라고 하는데, 그 파괴력은 운석공의 규모(직경 1,200m, 깊이 170m)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가족들 사진을 찍어주는데 옆에 있던 미국인이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묻는다.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낯선 친절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어색한 표정으로 거절하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물으면 웃으면서 사진을 부탁한다. 물론 사진을 찍어주면 반드시 상대에게도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례란다. 사진기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전망대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지 말지를 이야기하는데 눈치로 알아차리고 사진 찍기 좋으니 꼭 올라가 보라는 관광객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잘 표시하지 않고, 상대가 요구하지 않으면 굳이 나서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관례화된 친절[각주:6]과 선이 분명한 타인과의 경계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도 서로 돕는 합리적인 문화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으로 말하는 우리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애리조나 사막 한 가운데서 낯선 친절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운석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기의 망원경에 갇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과학자를 풍자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아내도 웃고 나도 웃었다. 아마 같은 의미였으리라.

전시관에는 그곳에서 채취한 운석들과 운석공이 생기게 되는 과정을 재구성해놓았고, 운석공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동선의 유도 외에는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시장은 다소 소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였지만 즐거운 분위기였다. 곳곳에 만져보라는 글귀와 함께 체험을 유도하고, 그것을 거침없이 즐기는 과정이 전시물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시간은 이미 폐관 시간인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바로 출발해도 앨버커키에는 자정 안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흐린 날로 인해 밖은 이미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전시관 내부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차 안에서 먹으며 가기했다. 사실 서브웨이 참사이후로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였다. 서브웨이 참사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 학교문제로 분주히 다닐 때 벌어졌다. 유진이 학교에서 서류 처리를 하고, 온 가족이 집 앞 쇼핑센터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해했던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아내가 한국에서도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하려는데 마침 특별 메뉴가 양도 넉넉하고 다양해 보여서 호기롭게 그것을 주문했다. 특별메뉴를 주문했더니 종업원이 당황한 듯 종이를 들고 뛰어나와서 빵의 종류부터 소스까지 상세히 묻고 들어갔다. 가격은 30달러였는데, 한국에서 가격을 생각하고 그 정도면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계산서를 본 아내가 내게 화를 냈고, 그 와중에 음식이 나왔다. 쟁반만한 사이즈에 3층 높이로 샌드위치가 나왔다. 이 특별 메뉴는 파티용 메뉴였던 것이다. 음식을 보고 놀란 아내는 벌떡 일어서더니 도저히 저 큰 사이즈를 창피해서 이 매장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분별없이 지출한다고 화가 잔뜩 난 아내는 샌드위치에 손도 대지 않았고, 나에게 다 먹으라고 했다. 아내가 화가 나 있으니 나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눈치를 보면서 자기 양보다 많이 먹었는데도, 야속하게도 커다란 샌드위치는 15조각이나 남았다. 그 샌드위치는 모두 자기양보다 많이 저녁으로 먹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 아닌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참사를 기억하는 나는 빠지면서 아내에게 주문을 하라고 했다. 사실 빵의 종류도 많고, 내용물도 다양하고, 소스도 여러 가지다보니 내 깜냥으로는 주문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빵 전문가답게, 마치 늘 먹는 음식 주문하듯 주문을 하고, 입장권 뒤에 있던 할인권으로 할인까지 받아냈다. 역시 주문은 아내의 몫이다. 이럴 때보면 아내는 마치 대학에서 주문을 전공한 사람 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달리다보니 날이 조금 개는 듯 아직 약간의 해가 남아 있었다. 해가 남아 있는 동안 더 많이 달려야 어둠 속에서 달릴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달렸다. 평소보다 바람이 조금 세다는 느낌이었는데 멀리서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두어 개의 회오리바람이 종잡을 수 없이 대지를 훑고 있었다. 이 황량한 대지를 건너오는 회오리바람은 우리가 비록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1900)의 도로시는 아니었지만 낯선 오즈의 세계로 데려갈 듯한 기세였다.

회오리바람이 전혀 낯설지 않을 듯한 황량한 들판 저 멀리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길옆으로는 마른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부는데 들판 저 앞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둠은 순식간에 사위를 감쌌고 천둥을 동반한 번개가 영화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3D 킹콩 어트랙션을 체험하고 있는 듯 지극히 비현실적인 장면이 실사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만 어둠을 가를 뿐, 세계는 이미 무거운 어둠에 포획되어 있었다.

아리조나의 회오리바람()은 캔자스의 그것만은 못해도 도로여행자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대평원에서 만나는 번개(, 이 사진은 그랜드 캐니언 여행에서 처제가 찍은 것임). 경이와 두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앨버커키는 이름처럼 낯설고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도시 같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고 그럴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만 갔다. 가로등을 기대할 수 없는 미국 고속도로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앞서 달리고 있는 대형트럭뿐이었다. 시원한 불빛으로 앞을 밝혀주는 대형트럭을 따라가는 것은 겉으로는 안전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대형트럭이 보이지만 대형트럭은 우리가 잘 보이지 않고, 전방의 상황도 잘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어두웠고, 1차선의 승용차들에 비해 대형트럭은 상대적으로 저속으로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운전이 두려운 나로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를 340마일(544)정도를 계속 달리다보니 사만다도 조용했고, 이따금 지나치는 도시들의 불빛만 다가왔다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차 안에서 다소 지루해진 우리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순간순간이 경이였고, 날마다가 기적이었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웠다. 아이들도 귀를 쫑긋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자기가 일구었다는 그 시절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장실 때문에 쉼터에 정차를 했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대형 트럭을 위한 쉼터였다. 커다란 주차장에는 대형트럭들만 주차해 있고, 멀리 화장실 불빛만 보였지만 환한 가로등 덕분에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다.

앨버커키에 거의 도착했을 때, ‘Route66 카지노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상당한 규모의 카지노로 보였는데,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Route66 카지노임을 알리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향수와 도박이 결합하여 역사가 팬시화 되는 현장이었다. 할리우드의 수정주의 서부극처럼 역사는 맥락 없이 다시 팬시화 되고 있었다. Route66은 이제 더 이상 ‘The Mother Road’가 아니라 단지 싸구려 브랜드일 뿐이고, 역사가 아니라 팬시상품일 뿐이었다. 추억과 향수를 파는 것이 나쁠 것은 없는 일이지만 그 안에 역사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은 참으로 허망하고 공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횡단여행의 출발동기였던 Route66이 이제 경로만 남고 역사와 실체는 사라진 꼴이었다. 이것이 오늘 만난 세 번째 브로큰 애로우였다.

애초에 우리의 횡단여행이 미국의 맨얼굴과 속살을 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오늘 만난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는 차라리 행운이었다. 횡단여행의 전반부를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Route66이 실망스럽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Route66을 따라 달려갈 것이다. 우리가 비록 존 라세터나 존 스타인벡은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여행에서 그랬듯이 Route66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여행을 디자인할 것이다. 존 라세터가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았듯이, 존 스타인벡이 절절한 현실과 고독한 자신을 발견했듯이…….

앨버커키 공항 부근 쉐라톤 호텔에 도착한 것은 자정을 한참 넘기고서였다. 세도나를 출발해서 413마일(660)을 달린 것이다. 체크인하는 카운터 직원이 너무 늦었다며 농담을 했지만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이번 횡단여행 중 가장 좋은 숙소인 쉐라톤 호텔에서 정작 우리는 머물 시간이 그리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앨버커키의 어둠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1. 그래서 미 국방부는 브로큰 애로우를 핵무기 관련 중대한 사고, 즉 핵무기의 허가 없는 발사, 핵무기의 분실이나 폭발, 방사능 오염과 같은 핵무기 사고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오우삼 감독의 <브로큰 애로우>(1996)는 이와 같은 중대한 핵무기 사고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2. 인디언보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보다 객관적인 용어일 것이다. 인도에 도착한 줄 알았던 콜롬버스가 이곳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인디언은 타자로 대상화된 명칭이다. 주체인 백인들의 시각에서 오인한 대상을 오인한 채로 부르는 것은 철저히 타자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중립적인 용어가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이라는 말을 현재 관용적으로 써오고 있기 때문에 의미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서 인디언으로 쓴다. [본문으로]
  3. 수정주의 서부극(revisionist western) 등에서 인디언에 대한 죄의식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 정부는 아직도 보호구역 내에서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카지노 산업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세계의 인권을 운운하는 미국이 숨기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모순된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본문으로]
  4. 그래서인지 기아 자동차의 카니발이 미국에서는 세도나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세도나의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리라. [본문으로]
  5. 강인규,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인물과 사상사, 2008. [본문으로]
  6. 여기서 말하는 ‘관례화된 친절’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거나.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뒷사람을 위해서 기다려주는 모습,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을 하는 모습들을 말한다. 이것은 우러나오는 친절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관례화된 예절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함께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예절일 뿐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누군가를 위한 특별한 친절은 아닌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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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나라

730일 앨버커키산타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앨버커키(Albuquerque)에 자정을 한참 지나 도착해서 씻고 정리하다 늦게 잠든 탓에 다들 아침이 힘든 모양이었다. 앞으로 묶게 될 숙소들에 비해 무척 럭셔리한 앨버커키 숙소에서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정작 숙소에 머물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조금 늦게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치니 9시였다.

한참 외모에 신경 쓸 나이인 딸이 둘이다보니 아침에 나갈 준비하는 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게다가 미국에 와서는 머리를 자르지 못한 탓에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평소 효진이는 밤에 머리를 감고 아침에는 빗고만 나가는 고육지책을 쓰는데,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머리를 감지 못하고 잠이 들었고, 덕분에 아침이 더욱 분주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우리 집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누나 둘,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나까지 매일 아침 북새통을 떨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초등학교 시절, 샴푸가 막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누나들은 머리를 감기 위해 물을 끓여야 했고 그만큼 더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드라이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누나들의 아침은 얼마나 더 분주했으랴? 누구보다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하시며 오남매의 등교준비를 도와주시던 할머니의 고생은 또 오죽했으랴?

빨리 출발해야 한다는 아빠의 분주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앨버커키 쉐라톤 호텔 로비에 놓인 매력적인 체스판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

혼자서 옛날 생각을 하는 동안 얼추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서 호텔 로비로 나서는데 커다란 체스판이 보였다. 장식용인지 실제 경기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아이들은 체스판 앞에 앉아 있었다. 출발이 급했던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몇 번의 성화 끝에 결국 체스판에서 일어났다.

이곳 호텔에서는 아침을 무료로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어제 호텔로 들어오면서 식당을 찾아보았는데, 마침 근처에 I-HOP[각주:1]가 있었다. I-HOP에는 아침인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원래 가격도 비싼 편은 아니지만 아침 메뉴는 더 저렴한 편이고, 근처에 패스트푸드점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식당도 없었기 때문이다. I-HOP도 대부분의 미국식당이 그렇듯 음식 주문 전에 음료수 주문을 먼저 받았다. 커피를 주문했더니 I-HOP 특유의 스테인리스 보온병에 가득 커피를 담아다 줬다. 5-6잔을 따라 마시고 리필을 부탁하면 다시 가득 채워다 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흔히 만나는 무한리필 음료수대다. 이 근처에 앉아있으면 풍요가 왜 병이 될 수밖에 없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무한 리필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음료수는 무한리필이다. 아예 음료수 기계를 객장 쪽으로 설치해두고 계산대에서는 컵만 나누어준다. 재미있는 것은 컵 사이즈별로 가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어차피 무한리필인데 컵 사이즈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그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라지 사이즈 컵에 가득 콜라를 따라 마시며 몇 번이나 리필해서 마신다.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하면서 끊임없이 탄산음료를 마셔대는 그들의 몸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뚱뚱하다. “미국인의 61% 정도가 과체중이고, 그 가운데 27% 정도가 비만환자로서 미국에서 비만은 이미 흡연보다 중대한 질병[각주:2]으로 취급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풍요가 병이 되고 있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저렴하고 넉넉하다. 곳간이 그득해서 넉넉하게 먹고 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이야기할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이 모든 것이 그들의 노력으로 쌓아둔 그들의 곳간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그들만의 풍요는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과 제3세계의 보이지 않는 희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만의 풍요를 위해 타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건강까지 해치고 있는 아이러니의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이제는 그들도 어쩌지 못하는 거대 자본의 무한 증식 논리가 있는 것이다.

 

앨버커키 도심의 현대적 건물과 그 사이사이 멕시코 전통문양이 삽입된 장식. 시내 곳곳에 자신들의 고유 문양을 다양한 방식으로 꾸며 놓고 있다. 인디언의 땅에 스페인이 도시를 건설하고, 멕시코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은 미국인 땅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하는 도심이었다.

아침을 먹고 바로 산타페(Santa Fe)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워 앨버커키 시내라도 보자고 가다보니 뉴멕시코 대학교(University of New Mexico, UNM) 앞까지 가게 되었다. Route66이 앨버커키 도심을 관통하기 때문인지 현대식 건물과 다소 쇠락한 분위기의 시가가 학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1706년 스페인인 사람들에 의해 이 도시는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인들 왜 원주민이 없었을까마는 그들 역시 인디언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앨버커키는 1880년 철도가 건설되고, 1930년대 Route66이 이곳을 관통하면서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인텔(Intel)이 인근에 들어오면서 급성장을 했다고 한다.

뉴멕시코 대학교에 대해서는 인류학과 사진학으로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내서 둘러보면 좋으련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뉴멕시코 대학교는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로 자신들의 정체와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학교 앞은 여느 대학의 거리처럼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앨버커키가 자랑하는 올드타운 플라자(Old Town Plaza)와 앨버커키 국제 열기구 축제(Albuquerque International Balloon Fiesta)는 시간이 부족하고 시기가 맞지 않아서 명성만 듣고 떠나야 했다.

뉴멕시코 대학교 앞의 풍경.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벽화, 어머니의 음식 다음으로 맛있는 식당이라는 대학가다운 레스토랑 간판, 오래된 모자점,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개성만점의 벽화가 돋보이는 상점. 뉴멕시코 대학교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과 상반되는 화려하고 대담한 색상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앨버커키에서 산타페까지는 85마일(136)로 이번 여행의 평균 이동거리를 생각해보면 이동이랄 것도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한산해서 예상보다 빨리 산타페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서자마자 패션 아울렛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타페 초입에 패션아울렛이 있으니 도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쇼핑도 관광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어색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비해서 미국의 옷값은 무척 저렴한 편인데, 아울렛의 가격은 그것보다 더 저렴하니 경제적인 쇼핑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울렛 입구에서 두 개의 할인쿠폰과 아울렛 라디오 홍보 티셔츠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할인쿠폰 한 장은 100달러 이상 구입하면 20%를 깎아준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쿠폰북이었다. 마침 세일 기간이어서 매장마다 할인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추가로 더해주는 할인쿠폰이니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렛 정상 가격의 30%를 할인해주는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100달러가 넘어서 20% 쿠폰을 내고 계산을 하려는 순간, 아내가 25% 할인쿠폰을 내밀었다. 250달러가 넘으면 25%를 할인해주는 쿠폰이 쿠폰북 안에 있었던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추가 할인쿠폰은 두 개를 동시에 적용할 수 없으니, 좀 더 할인 폭이 큰 25%쿠폰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더니 계산하던 직원이 당황을 했다. 잠시 후 그 직원보다 상급 직원이 와서 계산을 하더니 25% 할인을 했단다.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정말 25%를 할인한 것 맞느냐고 몇 차례 물었고, 그들이 카운터의 계산기로 계산하는 것을 보았으니 믿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와서 다시 계산해보니 역시 맞지 않았다. 몇 번을 계산해보아도 20% 할인을 했을 뿐, 25% 할인을 한 것이 아니다. 400달러 정도 쇼핑을 했으니 5%20달러 정도의 차이가 났다. 돈도 돈이지만 바보 취급을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우선 나빴다. 다시 매장으로 갔다. 가서 그들 앞에서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했더니, 계산했던 그 직원은 정작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보는 앞에서 20%25%를 계산해주었더니 그제야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시인하고, 매장 책임자를 불렀다. 한국에서라면 간단하게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책임자까지 부른 것이다. 매장의 책임자가 와서 전후사정을 듣더니 한 번 기계가 읽고 입력한 것은 쿠폰교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들에게 화가 나서, 그렇다면 모두 환불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25% 쿠폰으로 교체하여 주었다.

세도나와 알버커키에서 볼 것을 적은 아내의 메모

황당한 일이었다. 계산하는 직원이 전자계산기로 20%25% 계산도 하지 못한다는 것, 돌발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 책임자 역시 앞의 주문을 취소하고 다시 계산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점에 아내와 나는 놀랐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겪어본 그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국어와 문화적 토양 위에서 영어를 사용하다보니 일정수준 이상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업무처리가 매뉴얼화 되지 않으면 효과적인 운영과 관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이 매뉴얼화 되어 있고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고집스러울 만큼 잘 따른다. 도로공사[각주:3]나 신호등 없는 교차로의 진행 순서[각주:4]와 같은 일에서부터 심지어 남자 화장실 예절[각주:5]에 이르기까지 매뉴얼을 숙지시키고 철저하게 지켜간다. 그러다보니 매뉴얼에 대한 숙지가 떨어지거나, 매뉴얼의 예외 사항에 대해서는 잘못 처리했을 경우,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각주:6]이 된다. 아울렛에서의 소동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산타페 관광의 중심이라는 플라자(The Plaza)에 도착하고 보니 7월 내내 열리는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매우 혼잡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플라자를 중심으로 몇 바퀴를 돌다가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길가에 주차를 하고 성 프랜시스 대성당(St. Francis Cathedral)으로 갔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이 거의 문 닫을 시간이어서 급하게 둘러보아야 했다. 성당으로 들어서자 햇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제 빛을 버리고 경건하게 아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성당 안 중앙부의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는 예수상은 양쪽의 아치형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과 고유의 붉은 빛이 어우러져 고통의 순간을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중앙의 예수상, 성당의 외관, 어도비 양식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전경. 각도와 시간에 따라 빛을 달리는 성당의 모습도 무척 이채롭다. 

현재의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라미 대주교(Archbishop Jean Baptiste Lamy)1869년에 시작해서 15년만인 1884년에 완성했단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주변과 차별화되고 있지만 주변의 빛깔을 수납하며 위압하지 않는 권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성당 앞에는 최초의 인디언 출신 성자인 카레리 데카크위타(Kateri Takakwitha)의 모습은 정복자의 성자가 아닌 피지배자의 성자로서 위안을 주고 있었다.

성당 앞 광장에서는 7월 동안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성당 쪽으로 차량 진입을 막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전통 수공예품과 예술작품을 비롯해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은데다가 폐장 시간이 가까이 오니 좌판을 정리하는 분위기여서 더욱 어수선 했지만, 아이들 손을 잡고 천천히 둘러보니 정겨웠다. 소박한 수준의 것에서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좌판에서는 수공예로 제작된 가톨릭 성물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스페인 마켓 좌판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톨릭 성물과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토착신앙이 결합된 성물 수공예품. 이 땅이 산타페(거룩한 믿음)이길 원했던 정복자들과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 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혼합된 결과다. 

산타페는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 1846-1848)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푸에블로 인디언 문화와 히스패닉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이곳을 햇살이 춤추는 곳이라고 불렀었는데, 정복자였던 스페인사람들은 산타페’, 거룩한 믿음(Holy Faith)’으로 불렀다고 한다. 각기 부르는 이름의 차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푸에블로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의 이 땅에 대한 인식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에게 이 땅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의 땅이었음에 비해, 정복자인 스페인 사람들의 눈에는 개종시켜야할 야만의 땅으로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 전경과 로레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비교적 조화를 이루며 잘 지내던 이들이 갈등을 빚게 된 것도 푸에블로 인디언의 종교 의식을 악마의 의식으로 인식한 가톨릭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16세기에 이러한 종교적 갈등[각주:7]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엄청난 대량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고 생활의 곳곳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복자들의 핍박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주민의 비참한 삶과 그 결과 원주민들이 정복자의 종교로 들어가 그 안에서 평안을 갈구하는 아이러니한 순환의 고리가 씁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17세기 이후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만나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문화와 종교적 색채가 그 안으로 스며들었고, 이것이 바로 산타페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레토 교회 앞의 소박한 예수상과 기적의 계단을 안내하는 표지판

성 프랜시스 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로레토 교회(Loretto Chapel)[각주:8]가 있었다. 교회 옆에 어른 서너 명이 맞잡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는 은행나무와 아주 소박하게 조각한 예수상이 좌우에서 정겨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교회가 고딕양식(Gothic style)으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풍경과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는 기적의 계단(Miraculous Staircase)과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건물로 유명하다. ‘기적의 계단은 성가대 자리와 연결된 나선형 모양의 계단으로 별도의 통로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주차가 늦어지면서 문을 닫아 볼 수 없었다. 이 교회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나무로만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해질 무렵 내려앉은 석양과 어우러진 교회의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교회 옆으로 청동으로 만든 기발한 형상의 바람개비들이 부지런히 돌고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천막의 노점에서는 사람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유쾌한 관광객들은 은행나무의 둘레에 서서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고, 바람은 은행잎을 소리 내어 흔들고 있었다. 때마침 교회에서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덕분에 교회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신부의 아름다운 미소와 그 뒤로 축복하듯 두 팔을 벌리고 선 소박한 예수상이 성스러웠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의 멋스러운 간판들 

로레토 교회 근처의 다운타운 상가는 아주 독특한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운타운의 멋스러운 상점이나 갤러리 등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으면 예외 없이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허락해주었다. 상점마다 개성 만점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고, 표지판마다 재치가 넘쳤다. 다운타운의 상가나 노점에서 만나는 상인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특히 노점의 원주민들은 영어로 말을 건네도 스페인어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건은 예상보다 비쌌지만 거침없고 유쾌한 수공예품들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고추를 매달아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부른다는 리스트라()와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인 코코펠리()

고추를 길게 묶어 걸어놓은 리스트라(ristra)나 호피족의 수호신이라는 코코펠리(Kokopelli)는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리스트라는 매운 것을 좋아하는 이곳 원주민들의 식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멕시코 음식점에 가면 붉은 고추를 길게 묶어놓은 리스트라를 보면서 그 의미를 물으면 대부분 그냥 고추 말리는 것이라고 맥 빠진 대답을 듣고는 했었는데, 산타페에 와서야 제대로 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코코펠리는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이란다. 코코펠리는 곱사등인데, 곱사등 안에 씨앗과 노래가 들었다는 호피족의 수호신이다. 리스트라와 코코펠리의 상상력은 즐겁고 간절한 희원이었다. 그 상상력은 절실한 만큼 소박하고, 신실한 만큼 재미있었다. 코코펠리는 캐릭터상품의 관점에서 보아도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이 아주 뛰어난 캐릭터였다.

예술가의 도시답게 산타페 다운타운 곳곳에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어도비 건물이 늘어선 다운타운 거리에는 노점들이 내어놓은 수공예품과 함께, 예술작품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는 어처구니없는 경고 문구 대신 자유롭게 보고, 만지고 즐기라는 듯이 거의 모든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만난 예술작품들

산타페 다운타운은 어도비(Adobe) 양식의 보고(寶庫)였다. 어도비는 원래 햇빛에 잘 말린 벽돌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막처럼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해서 효과적인 단열이 필요한 지역에서 주로 활용을 했단다. 어도비는 모래, 진흙, , 나뭇가지, 거름 등을 넣어 만드는데 거름은 방충 작용을 한다고 한다. 어도비 양식은 저렴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도 뛰어나 콘크리트보다 5-10배 정도 강하고, 기온과 습도를 유지하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전통적인 푸에블로 인디언의 양식을 유럽에서 가져간 것이란다. 1950년대부터 뉴멕시코 주 정부는 산타페에서는 어도비 양식으로만 건물을 짓게 하고, 3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을 따라 걷다보면 유쾌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수공예품들이 밝고 화려한 색깔로 치장하고 있으며, 표정과 몸짓이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의 가혹한 면을 가사에 담고, 그 지독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의지는 후렴구에 담아 부름으로써 현실의 고뇌를 넘어서려했던 <청산별곡>처럼, 그들도 현실의 고단한 삶을 작품 속의 웃음을 통해 건너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상점의 주인들도 대체로 밝고 친절한 모습이었지만, 노점에 나와 있는 원주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는 수공예품을 팔고 있는 모습은 무척 어색한 조화였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에서 만난 춤추는 인디언()와 춤추는 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시가지는 다운타운의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낡고 쇠락한 것들이었다. 낡고 오래된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쓰러질 듯 서 있었고, 간판들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매달려 있었다. 붉은 색칠을 한 낡은 기차에는 흑백의 그림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현대 원주민 예술 박물관(Museum if Contemporary Native Arts)에서 보았던 절제된 분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절제된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로 한 복판으로 기차가 지나고 있었다.

다운타운을 벗어난 산타페의 외곽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기차에 흑백으로 그려진 원주민()과 부츠를 닦아준다고 써 붙인 원주민의 낡은 벤은 다운타운 노점에서 만났던 원주민의 무거운 표정처럼 느껴졌다. 

정지를 명령하는 붉은 신호등 옆으로 “DO NOT STOP IN BOX”라는 글귀가 쓸쓸한 위협처럼 쓰여 있었다. 문득 산타페에서 본 것과 보고도 보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산타페는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지만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숙소 옆 공터에서 부츠를 닦아준다는 원주민의 밴을 보면서 노점에서 만난 원주민의 무거운 얼굴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산타페의 밤은 아주 천천히 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산타페의 오후에 깊게 매료된 표정으로 내일 만나게 될 산타페의 맨 얼굴을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가 만났던 산타페의 오후를 기록하고 정리하느라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1. 우리 가족은 I-HOP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효진이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상으로 30달러짜리 I-HOP상품권을 받아왔다.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가끔씩 상품을 걸고 재미있는 경연을 벌이는데, 그림을 그려서 받았단다. 그것을 가지고 토요일 점심에 온가족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가격도 적당하고 음식도 좋았던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아침은 I-HOP에서 먹기로 했다. [본문으로]
  2. 강인규, 앞의 책, p.77. [본문으로]
  3. 미국에서 도로공사를 할 경우, 경고 표지판 개수와 설치 위치 및 유도등에 대한 매뉴얼에 따라서 설비를 안전하게 설치한 이후에 작업을 한다. 이러한 매뉴얼은 작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본문으로]
  4. 미국에서는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는 먼저 온 순서대로 진행을 한다. 처음에는 서툴고 불편하기만 했는데, 익숙해지니 무척 합리적인 방법이다. [본문으로]
  5. 미국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기를 사용하는 순서에 대한 화장실 예절이 블로그나 웹사이트 등에서 종종 화제가 된다. 가령 다섯 개의 소변기가 있다면 첫 번째 사람은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소변기를 사용해야 하며, 두 번째 사람은 그와 가장 먼 소변기를 선택해야하고, 세 번째 사람은 가운데 변기를 고르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강인규, 앞의 책, pp.59-61참고) [본문으로]
  6. 일 년 동안 있으려면 미국 운전면허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해서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 아내와 갔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는 면허시험 신청이 안 된단다. 같이 같던 솔이 엄마가 다른 창구에서 하면 될 것이라고 해서 다시 번호를 받아서 다른 창구로 갔더니 문제없이 면허신청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도 창구 담당자별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매뉴얼에 비추어 책임질 수 있는 한도까지만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각자의 책임 범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된 예이다. [본문으로]
  7.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제사에서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서 신께 바치는 행위를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의식으로 판단하고 강력하게 금지시키고, 개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8. 주교가 상주하는 대성당을 ‘Cathedral’이라고 부르고, 성채가 없는 예배당을 성당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정도의 의미로 ‘Chapel’로 부른다고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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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일 산타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늘은 이동하지 않고 산타페에 하루 더 머물렀다. 산타페에 대한 정보는 이미 떠나기 전부터 차고 넘쳤다. 어젯밤에 오늘 움직일 동선을 구글 지도로 확인을 해두었기 때문에 그대로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다만, 사만다가 심통을 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긴 심통을 부린다면 예상했던 길 밖의 길을 만날 테니 그것도 크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산타페 Comfort Inn 간판. 실내풀장과 맛있고 따듯한 아침 그리고 와이파이 무료 제공. 다만 질은 보장하지 못한다.

숙소(Comport Inn)에서는 아침을 제공해줬다.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는 블랙퍼스트 뷔페(Breakfast Buffet)라고 적혀 있었고, 입구의 간판에 커다랗게 ‘Delicious Hot Breakfast’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은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Continental Breakfast)로 제공한다던 몬트레이의 숙소에서는 코스트코에서 파는 머핀을 4등분한 것이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비닐봉지에 담긴 빵을 커피가 전부였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가 원래 점심때까지 허기를 달래기 위한 간단한 빵과 음료라지만, 코스트코 머핀 4등분이나 비닐봉지 빵은 조금 심했다. 덕분에 이제는 숙소를 예약하기 전에 반드시 블랙퍼스트 뷔페나 아메리칸 블랙퍼스트(American Breakfast)[각주:1]라고 표시 된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옐로우스톤에서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제공해주었다. 숙소에서는 별도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의 양과 질 면에서 모두 만족스러웠다. 계산대에서 식사티켓을 냈더니, 식사는 무료인데 1인당 46센트의 세금과 팁 2달러는 내야 한다고 했다. 12달러 정도의 식사는 무료로 제공받고 세금과 팁은 부담해야 한다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사실 진짜 웃지 못 할 상황은 주문과정에서 있었다. “How would you like your eggs?”라고 묻는 웨이트리스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Well done!”이라고 답한 것이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 수도 있었으련만 그 웨이트리스는 정확한 답이 나올 때까지 같은 질문만 계속했다. 마치 정답을 맞힐 때까지 절대 주문을 끝낼 수 없다는 듯이. 결국 거꾸로 물어서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언제 미국 식당에서 계란 요리를 먹어봤어야지 'Sunny side up!', 'Over easy!', ‘Over hard!’란 말을 알 것 아닌가? 어쨌든 덕분에 하나 배우기는 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산타페 숙소의 블랙퍼스트 뷔페는 자못 진지했다. 토스트, 베이글, 와플, 삶은 계란, 해시 브라운 포테이토(hash brown potatoes), 에그 스크럼블, 두 종류의 주스, 두 종류의 커피, 네 가지 시리얼, 바나나, 사과, 오렌지, 요구르트에 대기하는 직원까지 있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아침식사다운 식사라서 먹으면서 힘이 났다. 그런데 6시부터 9시까지로 식사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8시 무렵 사람들이 몰려서 식당에 자리가 부족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들 음식접시를 들고 나와서 로비의 소파에 앉아서도 먹고, 주차장에 나가서 먹으면서도 웃고 떠들며 아침을 즐긴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에게 어디서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는데 입이 짧은 효진이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내와 내가 이것저것 가져다주면서 그것이 얼마나 몸에 좋고 맛있는 것인지를 설명하며 먹이려 해도 제 입에 맞지 않으면 먹으려 들지 않았다. 음식은 체험인데, 체험을 해야 좀 더 다양한 것을 먹어볼 수 있는데, 효진이의 입맛은 아주 소극적이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먹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음식체험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음식의 즐거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까봐 걱정이었다. 효진이는 어려서 심하게 편식을 하던 나를 닮은 모양이었다. 편식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 속을 많이도 썩여드렸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효진에게서 돌려받고 있는 것이다.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전경(),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 전경(),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입구()

배불리 먹고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담아서 사만다의 지시에 따라 박물관으로 갔다. 산타페 외곽으로 벗어나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간 것 같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운타운과 가까운 거리였다. 어도비 양식으로 멋스럽게 만들어진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Museum of International Folk Art)과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Museum of Indian Arts & Culture)은 같은 공간에 다른 건물로 붙어 있었다. 박물관 건물은 어도비 양식의 탁월한 건축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Portable Altars를 가지고 다니는 볼리비아인()Portable Altars의 모습()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입장권은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을 포함해서 어른만 15달러(하나만 본다면 9달러)이고 16세 미만은 무료였다. 박물관이 가치 있는 문화유산들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거나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사설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공자금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입장료를 또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자주 박물관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타페를 비롯한 미국의 몇몇 도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의 박물관 무료입장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민속공예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100개 이상 국가의 디오라마(diorama)[각주:2]와 민속예술품을 135,000점 이상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에서는 안데스 민속예술(Folk Art of the Andes)’생존의 예술(The Arts Of Survival)’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안데스 민속예술전시는 가톨릭과 결합된 민속예술이 대부분이었다. 안데스 문명은 남미의 3대 문명이라고 하는 잉카문명, 아스텍문명, 마야문명 중의 하나인 잉카문명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페루, 볼리비아 등의 기반이 되었다. 안데스 문명은 16세기 스페인의 침공으로 아주 철저히 붕괴되고 말살된다. 그러한 문명의 붕괴와 말살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Hughes Galeano)불의 기억에서 말하고 있듯이 기억의 강탈을 낳는다.

 

스페인 군대와 원주민(), 토착신앙과 결합한 예수상(), 해방신학과 결합된 가톨릭().

식민지 건설이라는 세속적인 목적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종교적 사명이 결합된 스페인의 폭력적인 문명 말살정책은 철저하게 원주민들의 기억을 유린했다. 그 이후 300년의 통치 기간 동안 가톨릭은 잉카문명의 토착신앙과 결합되어, 민속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신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삶을 유린했던 지배자로부터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투쟁함으로써 정치적 독립은 얻을 수 있었지만, ‘기억의 강탈로 인하여 끝내 언어와 종교는 돌려놓지 못했다. 더구나 독립 이후에도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짐으로써 그들의 종교에 대한 의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안데스 민속예술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신크레티즘(syncretism)[각주:3]과 관련된 성물들이었고, 그것의 변형된 문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복자의 종교가 수탈과 강압의 역사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지워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내면화한 것이다.

따라서 안데스인들의 가톨릭의 내면화 과정에 대한 비판은 유보되어야 한다. 그러한 비판 이전에 그들이 견디고 건너야 했던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공동체적 이해와 성찰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 가치중립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종교를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왜곡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의 현실에서는 최적화된 방식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좀 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이 그러한 종교에 의지해서 견뎌야 했던, 아니 견디고 있는 침략과 수탈, 부조리와 불평등의 현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이 수반되지 않는 비판과 성찰은 잉카문명과 종교에 대한 소재주의나 이국취미(exoticism)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왜곡이거나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The Arts Of Survival 기부 홍보 전단(), Support 홍보 팔찌(), Vision of January 12th, 2011()

생존의 예술(The Arts Of Survival)’은 재난지대에서 민속예술로 표현된 작품들을 전시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화산폭발), 파키스탄(홍수), 아이티(지진), 멕시코만(허리케인)의 재난의 참상을 소개하고, 그것을 민속예술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재난지역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었다. 재난과 시련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표현된 전시물들은 소박하지만 절박하고, 절박하지만 과장하지 않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작품들은 재난을 과장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속예술의 성격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다. 아이티의 지진과 관련된 작품으로 ‘Vision of January 12th, 2011’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마스크 문화와 상관된 것이었다. ‘안데스 민속예술전시에서 만났던 샤먼들의 마스크나 신들의 마스크와 기본적인 정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 , 대지, 바람의 재난으로 나누어 재난이 어느 특정 지역만의 불행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것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도 인상적인 시도였다.

안데스 보부상()Noisemaker(). 팔 수 있는 것을 지닐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다니며 팔았을 보부상의 모습과 자신들의 생활환경의 특성을 반영한 악기를 개발한 그들의 모습에서 안데스의 얼굴을 본다.

목숨은 기어코 아름다운 것이어서 그것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남루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살아있음을 표현한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표현을 통하여 그 상황을 견디고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야 할 곳은 온전히 부서져 버리고, 주검은 일상으로 널려있는 재난의 현장에서 그 슬픔과 절망을 표현함으로써 넘어서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인간이길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을 지키려는 그들의 의지는 결연하고 숙연한 것이었다. 온몸 가득 상품을 매달고 안데스의 곳곳을 누볐을 보부상에게서 피로와 힘겨움 대신 유쾌하고 환한 웃음을 보고자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노력이었으리라.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의 압권은 세계 각국의 민속문화를 구현한 디오라마(diorama) 전시였다. 각국의 생활문화를 정교하게 축소하여 재현한 디오라마에는 만든 이의 소박한 유머가 곳곳에 녹아 있었다. 지배계층의 화려한 고급예술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만나는 생활문화를 진솔하게 재현함으로써 보면서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 전시된 디오라마는 배경을 정교하게 축소해놓고 그 안에 각기 다른 다수의 인물들을 꼼꼼하게 제 각각의 표정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나무, 점토 등 주변의 재료를 활용하여 제작한 디오라마는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삶의 풍부한 표정들을 진솔하게 담아낸 것들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figure)를 수집하는 내게 이곳의 디오라마는 신선했고, 그만큼 매혹적이었다. 한 작품 안에 수십 명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복색과 표정으로 배경과 어우러진 모습은 플라스틱 피규어로는 구현할 수 없는 유일함과 진솔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우장(), 시장(), 제단()을 표현한 디오라마. 생활공간의 구현과 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표정이 백미인 작품들

디오라마가 구현해 놓은 세계 각국의 문화는 전시장을 이어가며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전시장 벽면은 물론 중앙 홀에도 앞뒤에서 관람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동선이 짜여 있었다. 대부분의 디오라마는 스페인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어우러진 뉴멕시코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 외에 유럽,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문화가 배경이 된 디오라마도 있었지만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다양한 국가와 숱한 인종, 그만큼의 다문화가 뒤섞인 미국에서 한국 것을 찾는 것이 편협한 국수주의적 관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세계 속에서 우리문화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문화의 수준이나 질적 가치와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국내 언론에서는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로 미국 전체가 떠들썩한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아직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음악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만한 음악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라거나 정부가 나서서 국가브랜드를 홍보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정부가 거시적 관점에서 국가브랜드를 체계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사회문화경제적으로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좀 더 주체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거나 그들의 평가에 우리를 꿰어 맞추려는 안타까운 인정투쟁의 몸부림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각주:4]

만물을 창조하는 여성의 현빈(玄牝, ), 풍요를 기원하며 제작된 교미하는 소(이상은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 소장, ), 인디언 수난사를 그린 그림(Cody Historical Museum 소장, )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은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과 정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박물관이다. 그런데 인디언의 예술과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원시적 거주지나 도자기 정도만을 소개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출산과 양육 등과 상관된 여성적 이미지[각주:5]의 것들이었다. 그들의 예술과 문화가 성립될 수 있었던 생활문화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 왜 파괴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무엇인지 등의 맥락이 온전히 누락되어 있었다. 현실과 역사의 맥락이 누락된 유물은 그저 소박한 토기와 조악한 세트에 불과해 보였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들렸던 코디 역사박물관’(Cody Historical Museum)에서 인디언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난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Here, Now and Always’라는 전시테마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였다.

박물관을 나와서 캐니언 로드(Canyon Road)를 찾아갔다. 캐니언 로드에 들어서면서 나는 내심 주차가 걱정스러웠다. 길의 폭으로 보나 주차금지 표지로 보나 노상 주차가 어려워 보였고, 갤러리는 독립된 주차장을 갖기에는 협소해보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일요일이라서 이면도로에는 차를 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얼바인에서 견인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유료주차장을 찾아서 주차를 했다.[각주:6]

캐니언로드 전경

유료임에도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심한 우리는 주차장에 붙은 안내문 따라서 In Art Gallery에 찾아가 5달러를 내고 확인티켓을 받아 대쉬보드에 올려놓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주차비를 내면서 이것저것 묻다보니 어느새 주인은 자신의 갤러리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내로 In Art Gallery부터 본격적인 갤러리 관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갤러리 앞마다 놓여 있는 의자들. 앉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풍경이다.

캐니언 로드가 산 미구엘 교회(Chapel of San Miguel)가 있는 드 베이거스(De Vagas)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거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도로만 가본 사람들의 방식이다. 캐니언 로드는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갤러리들이 길가에 늘어선 풍경 그 자체가 이미 갤러리인 거리다. 아니다, 이것도 지나치게 문자적인 표현이다. 캐니언 로드는 걷기를 권하는, 걸을 수밖에 없는, 걸으며 즐거워지는 길이었다.

캐니언 로드를 만들고 있는 어도비 양식의 갤러리들

 캐니언 로드는 아름다운 속도를 지녔다. 차로는 느낄 수 없는 걷기의 속도를 캐니언 로드가 만들어 내고 있었다. 1차선 이상이 될 것 같지 않은 도로 곁으로 길과 함께 넉넉해졌을 나무들은 그늘을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협소한 도로에는 많은 차들이 오갔지만 모두 걷는 사람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멈추거나 달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빼앗겨 사진 촬영을 위해 차도로 내려서면 달려오던 모든 차들이 조용히 멈추어 주었고, 미안하다는 손 인사에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조용한 미소가 평화로웠다.

캐니언 로드는 길이 만든 길이 아니라 갤러리가 만든 길이었다. 어도비 양식의 기본을 유지하면서 작품의 성격에 맞는 개성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갤러리들이 길 자체가 되어, 캐니언 로드를 만들었다. 거의 모든 갤러리들은 커다란 나무나 아름다운 정원과 어우러져 있었고, 입구에는 예외 없이 밖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쉬라고 내준 것인지,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단한 일상에서 어딘가 앉을 곳이 있고, 누군가 앉게 할 수 있는 배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유롭고 푸근한 풍경이었다.

캐니언 로드에서 만나는 우편함들. 열어보면 문득 나를 기다리는 러브레터라도 들었음직한 풍경이다.

갤러리의 입구나 건물을 따라가다 보면 건물마다 얼굴처럼 소박한 우편함 하나씩을 내밀고 있었다. 대부분 공과금이나 카드요금 청구서가 날아올 우편함이겠지만, 마치 누군가의 따듯한 러브레터가 들어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이와이 순지(岩井俊二)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Love Letter, 1995)가 애틋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거나, 중학교 시절 첫사랑을 성인이 되어 그가 죽고 나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러브레터>의 애틋함은 박인환의 시처럼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때문이 아닐까? 그토록 애틋했던 사랑은 갔지만 옛날은 오롯이 쓸쓸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안타까움, 그것을 기억하는 나는 그 옛날의 내가 아니라는 처연함. 곤 사토시(今敏)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년여우>(Millennium Actress, 2001)의 쓸쓸함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보던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 우편함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어느 갤러리 입구, Jesus Said Buy Fork Art 라는 문구가 재미있다.

갤러리마다 주인들은 작가와 작품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고 때론 차가운 음료를 내주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의 갤러리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을 허용했고, 촬영을 원하지 않는 곳에서는 작품을 촬영한 포스트카드를 무료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서 그저 바라만 보는 작품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보고, 사진도 찍고, 때론 묻기도 하는 살아 있는 갤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니언 로드의 모든 갤러리들은 작품을 팔기 위한 곳이라는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고급 주택에서 우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이라면 모두 뉴욕이나 산타페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꿈꾼다고 한다. 이 거리를 걸어보니 그들의 소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산 미구엘 교회.

캐니언 로드에서 산 미구엘 교회(Chapel of San Miguel)까지는 아주 가까웠다. 교회는 오래된 탓인지 공사가 한창이어서 다소 혼잡스러웠다. 산 미구엘 교회는 1692년에 세워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데, 종교적 충돌로 인하여 원주민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1710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스페인사람들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권하지 않았었는데, 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는 원주민들의 종교 행위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충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교적 충돌 이전에 스페인인들과 원주민들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종교적 충돌로 인하여 극한 갈등을 빚었고, 그 과정에서 산 미구엘 교회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후 스페인이 폭력적으로 원주민을 제압함으로써 산 미구엘 교회는 재건될 수 있었다. 어도비 양식으로 소박하게 지어진 산 미구엘 교회는 시골 예배당처럼 정겨워 보였지만 그 내력을 살펴보면 원주민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장소였다. 모두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데에 방점을 찍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세월동안 그곳에서 어떤 일이 왜 있어났는지 아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인식이 전제되어야지만 가장 오래되었다는 수사(修辭)의 진정한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집전경(), 산타페 역사재단에서 보존가치를 증명한 명패(), 가장 오래된 집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장난스러운 꼬마()

산 미구엘 교회에서 오른쪽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집’(The Oldest House)이 있다. 1740-176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밖에서 보기에는 단지 조금 낡은 평범한 집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산타페 역사재단 명의로 이 건물이 보존 가치가 있는 가장 오래된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출입구로 썼을법한 문이 매워진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이 집의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1인당 1달러를 기부해야만 한단다. 이 돈은 올드 성 미카엘 고등학교(Old St. Michaels High School)에 기부된다고 한다. 도네이션을 하고 내부로 들어가 보니 아주 작은 공간에 그 시절의 살림살이가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몽골에 갔을 때, 게르(Ger) 안의 살림살이를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사람 사는 데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듯 보였다. 정면으로는 밖을 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우리가 밖을 내다보자 밖에 있던 귀여운 꼬마가 안을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여행을 통해 산타페를 잠시 들여다보는 일도 꼬마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퍼 크러스트 피자집의 피자 사이즈(), 꼭 라지 사이즈를 먹어야 한다고 우겨서 시킨 피자(), 그것이 많은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가족들의 피자 접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장 오래된 집과 거의 붙어있는 어퍼 크러스트 피자(Upper Crust Pizza)집으로 갔다. 산타페의 일반적인 음식점처럼 밖에도 테이블을 내서 음식을 즐길 수 있게 했는데, 피자 굽는 냄새에 끌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상류층’(Upper Crust)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소박한 실내의 저렴한 세미 셀프서비스 피자집이었다. 미국에 처음 와서 피자가 먹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코스트코에서 만들어주는 피자와 피자헛 피자를 사준 적이 있었는데, 두 번 모두 지독히 짜서 피자는 그 이후로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집 피자는 짜지 않고 넉넉한 양과 다양한 토핑으로 아주 풍부한 맛을 보여주었다. 점심이 늦은 탓에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눈치 빠른 아내가 사무엘 아담스를 한 잔 시켜주었다. 깊은 맛의 맥주 한 잔과 풍부한 피자의 맛이 어우러져 더할 수 없이 행복해지는 오후였다.

피자를 먹고 아주 행복한 기분이 되어 다시 다운타운 쪽으로 갔다. 어제 보지 못한 기적의 계단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들르기 전에 나는 먼저 카메라 상점에 들러서 광각렌즈에 끼워져 있는 편광필터를 빼야만 했다. 아이들이 카메라 상점에서 엽서를 고르고 있는 동안 잘생긴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니 그는 웃으면서 아주 간단하게 편광필터를 빼주었다. 편광필터는 끼는 부분이 얇아서 잘 빠지지 않으니 주의해서 빼야 한다고 빼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그는 일러주었다. 그 직원의 친절한 서비스에 고마워서 그곳에서 예정에 없던 필터 케이스를 하나 구입했다. 결국 기적의 계단은 시간이 지나서 보지 못했다.

횡단 여행을 준비하면서 풍경을 찍겠다고 광각렌즈를 구입했다. 지금 쓰고 있는 캐논 40D 바디는 캐논 350D를 쓰던 내게 은사님께서 쓰시던 것을 주신 것이다. 탐론 28-300m 표준줌렌즈로는 풍경을 담는데, 다소 아쉬움이 있어서 아내를 졸라 횡단을 시작하기 전에 광각렌즈인 탐론 11-18m를 구입했다. 마침 아마존에서 편광필터까지 저렴한 패키지로 제공하여 그것을 구입하고, 반가운 마음에 덜컥 끼우고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 자꾸 어둡게 나왔다. 운전을 하면서 빠르게 이동을 하였기 때문에 사진이 어둡게 나오는 것은 숙소에서 노트북으로 보고나서 알게 되었다. 결국 편광필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고 빼려고 했으나 이게 생각보다 잘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봐둔 카메라 상점으로 와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사실 편광필터도 필터였지만 조리개 값이나 셔터 스피드를 제대로 조정하지 않았던 데 더 큰 원인이 있었다. 새로운 렌즈와 필터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기본적으로 돌아보아야할 것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생각을 카메라 샵을 나오면서 했다는 것이다. 늘 외양간은 소를 잃고 나서 고치나 보다.

시간을 보니 520분이었다. 산타페 인근에 있다는 피코스 국립역사공원(Pecos National Historical Park)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에 급하게 그곳으로 달렸다. 사만다가 한번 심통을 부려서 헤매고, 다시 허겁지겁 찾아갔는데 6시다. 혹시나 했는데 퇴근하는 직원들이 오늘은 문을 닫았으니 내일 오란다. 여행자에게 내일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역시 과한 욕심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덕분에 산타페의 석양을 온전히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람은 산타페처럼 시원했다.

  1. 일반적으로 아메리칸 블랙퍼스트의 경우에는 계절과일, 주스류, 시리얼, 계란요리, 음료, 케이크류, 빵 종류, 햄, 베이컨, 소시지 등이 나온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라고 적힌 곳은 대부분 독립적인 식당을 갖추지 못한 곳에서 빵과 커피 정도를 제공할 뿐이다. [본문으로]
  2. 일정한 배경 위에 축소모형을 설치하여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근대에 귀족들이 역사적인 전투를 재현하기 위하여 축소모형을 만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국제 민속 예술 박물관의 디오라마는 규모나 종류는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민속 예술작품으로 탁월하다. [본문으로]
  3. 종교적 융합을 가리키는 말로서, 침략과 정복 혹은 문화가 교류를 통하여 상이한 종교가 상호 융합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토착종교가 있는 곳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서 상호 융합하는 과정에서 상이한 두 종교는 위계화되거나 결합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안데스 지역의 경우, 잉카문명의 토착신앙을 가톨릭은 부정하면서 종교적 박해를 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원주민들에게 정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적 요소가 가톨릭과 결합되는 독특한 양상을 드러내기 때문에 신크레티즘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4. 가령 대학평가만 하더라도 해외 언론사나 해외 대학에서 하는 평가는 참고 사항일 뿐이지, 우리가 그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그들의 평가 기준에 맞추어 대학을 재편한다는 것은 얼마나 웃지 못 할 이야기인가? 오히려 세계의 주목을 받고 싶다면 그들과는 차별화된 평가기준으로 우리가 그들을 평가하는 쪽이 승산이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5. 아이를 낳고 있는 여성의 성기를 과장하여 표현한 것은 󰡔도덕경󰡕에서 표현한 현빈(玄牝)과 같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도덕경󰡕에서 만물의 근원으로 꼽는 현빈의 구체화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현빈을 형상화하여 학교의 발전을 기원했던 한양대학교 50주년 조형물에서도 구현된 바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본문으로]
  6. UCI에서는 한 달에 55달러를 내면 학교에 주차를 할 수 있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고 차를 집에 놔두고, 연구실로 나오면 오후에 아이들 픽업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래야 5시까지 온전히 연구실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내가 아프고 나도 몸이 좋지 않아서 차를 학교에 가져간 날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하듯이 UCI 앞 상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차가 없었다. 차를 찾고 있는데 멕시칸으로 보이는 보안요원이 다가와 내 차가 도난을 당했단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 친구 영어가 많이 서툴렀다. 재차 물으니 2시간 이상 주차가 되어 있어서 견인해갔다고 했다. 결국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견인사무소까지 가서 160달러의 벌금을 물고 차를 찾아야 했다. 차를 찾으며 벌금이 너무 비싸다고 하니까 다른 도시에서는 300달러가 넘는단다. 다른 도시 벌금이 300달러가 넘든 3000달러가 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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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 주를 달리다.

81일 산타페오클라호마시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늘은 산타페에서 오클라호마시티로 이동을 했다. 뉴멕시코 주 산타페를 출발해서 텍사스 주를 건너 오클라호마 주 오클라호마시티에 도착하는 531마일(849)의 여정이었다. 구글 지도는 9시간 30분정도를 예상했지만, 휴식시간과 식사시간 등을 합하니 10시간 이상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세도나에서 욕심을 부리다가 앨버커키에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던 경험 덕분에 여행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욕심을 부리면 다른 곳을 놓친다는 것, 미국에서의 여행은 해가 있을 때까지만 가능하다는 것,[각주:1] 장시간 운전은 운전하는 나보다 아이들을 먼저 지치게 한다는 점, 아이들이 지치는 순간 여행은 멈춘다는 것 등의 깨달음이었다.

오늘은 온 가족이 아침부터 서둘렀다. 지난 여행의 경험으로 숙소로 가지고 올라갈 짐도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차 트렁크에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서 짐을 쌀 때, 여정에 맞추어 짐을 분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몇 번의 여행 덕분인지 아내의 노하우가 발휘되었다. 옷 트렁크 하나, 물을 차갑게 보관할 아이스백,[각주:2] 간식과 약 등을 담은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 노트북과 카메라 가방이 숙소로 가지고 올라간 짐의 전부였다. 그러면 다음 날에도 아내와 내가 후다닥 짐을 싸면 각자 맡은 짐을 가지고 체크아웃 하면 되는 일이었다.

산타페 비지터 센터. 직원과 자원봉사자가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담아가지고 차로 돌아오니 유진이가 어제 들렀던 비지터 센터를 다시 들러야 한단다. 이번 횡단여행을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각자 어떤 형태로든지 여행의 기록을 남겨보라고 했더니, 효진이는 여행일기를 쓰고 유진이는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 어제 그곳에서 가져오지 못한 자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가장 손쉽게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은 비지터 센터다. 내 경우에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AAA사무실에 가서 무료지도와 안내 책자를 먼저 받고, 그것을 참고하여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서 숙소 예약을 한다. 그리고 여행지에 가서는 제일 먼저 비지터 센터를 찾아간다. 그곳에 가면 정확한 지역 안내 지도와 함께 효과적인 동선까지 체크해주고, 거기에 내가 더 필요로 하는 것을 물으면 아주 친절하고 꼼꼼하게 대답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현지 여행안내 자료들과 할인 쿠폰 등을 풍부하게 제공받을 수도 있으니 더욱 유용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옐로우스톤에 갔을 때에는 비지터 센터에서 친절하고 상세한 안내를 받은 후, 어느 식당이 싸고 가장 맛이 좋으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랬더니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직원이 옐로우스톤의 식당들은 싸지는 않지만 맛은 모두 있다라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비지터 센터를 나오면서 나는 캐니언 로드에 잠시만 들렸다가 출발하자고 제안을 했다. 어제 캐니언 로드를 올라가면서 사진을 찍느라 내가 자꾸 뒤처지자, 아내는 편하게 사진을 찍으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갤러리를 따로 돌았다. 거리와 풍경을 찍느라 내가 놓친 갤러리에서 아주 재미있는 작품을 보았다는 아내의 말에 출발 전에 꼭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Fleet wood Gallery 전경돠 입구에 전시된 바이슨 그리고 붉은 말

그곳은 Fleet wood Gallery라는 곳이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문을 열었을까 걱정을 했는데, 마침 정원 문을 열고 있었다. 정원 문을 열고 있는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전시장을 구경할 수 있는지, 구경을 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Please!”란다.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어서 다소 얼떨떨해 있는 내게 유진이가 알려준다. 흔쾌히 허락하는 표현이란다. 상대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때, 흔쾌히 승낙하며 하는 표현이란다.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하는 유진이에게서 오늘도 하나 또 배웠다.

종이학을 소재로 각기 다른 세 가지 표현이 이채롭다. 철판으로 종이학을 접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주변 소재나 조명이라는 맥락에 따라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이채로운 작품이었다.

고맙다고 하고 채 열지도 않는 전시장에 들어가서 문제의 작품들을 보았다. 철판을 소재로 오리가미(origami) 콘셉트의 작품을 만든 것도 기발한데, 작품마다 아이디어가 거침없었다. 어제 효진이가 작품을 보자마자 “Rock-Scissors-Paper!”라고 해서 갤러리 주인을 놀라게 했다는 작품은 언어를 즉물화(卽物化)한 단순한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했다.

Rock-Scissors-Paper

비행기 설계도와 종이비행기

구겨진 종이 컨셉의 철제 오리가미

비행기 설계도를 정밀묘사 해놓고 그 아래 다시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그려놓아서 두 이미지를 충돌시킴으로써 인식의 틀을 깨고, 그 그림에서 비행기가 접혀서 나오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림과 실재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발상은 한참 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틀 부수기와 즉물적 변환은 마치 잘 만들어진 극적 전환(adaptation)을 보는 것 같았다. 구겨진 종이를 펴는 과정 혹은 반대로 종이를 구기는 과정을 철판으로 보여준 작품은 존재의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의 양태를 일시 정지시킴으로써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이 작품의 시도는 사진의 문법과 같은 맥락이었다. 시간을 정지시킴으로써 존재를 시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힘, 그것이었다.

작품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유진이와 이야기 하는 동안 주인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고,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었다. 질료의 변화와 맥락의 변화를 통하여, 이미지와 실재의 경계를 허물고, 존재의 시간을 보여준 이 작품들을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주 소박한 견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Fleet wood Gallery를 마지막으로 산타페를 떠났다.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산타페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텍사스주 스텝에서 만난 회오리바람. 작고 큰 회오리바람 서너 개가 벌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차는 거침없이 잘 달렸다. 뉴멕시코 주를 건너서 텍사스 주에 이르자 풍경은 더욱 삭막해지고, 뜨겁고 메마른 바람은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얼바인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 주를 자주 건너게 된다. 스텝과 사막 기후인 네바다 주를 건너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에 이곳의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옆에 달리는 대형트럭의 그늘만으로도 기뻐할 정도였다. 그런데 텍사스를 달려보니 네바다 못지않았다. 메마른 스텝을 가로지르는 I-40위로 마른 바람이 거칠게 불어오더니, 마침내 회오리바람이 되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회오리바람에 비하면 세도나에서 앨버커키로 가는 길에 만났던 회오리바람은 소박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규모는 아니더라도 제법 규모가 있는 것이 동시에 벌판을 가로질러 서너 개씩 달려드니 처음에는 경이롭더니 점점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여행을 하면서 동일한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단조로운 풍경이 지루하게 계속 되었다. 이토록 삭막하고 메마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텍사스 오스틴에 살고 있는 유진이 친구 서연이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서연이는 유진이의 절친인데 우리보다 한 달 전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아빠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태어나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빠가 텍사스로 의대를 진학하게 되어 서연이도 함께 텍사스로 간 것이었다. 매일 유진이와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070전화를 붙잡고 말리지 않으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통화를 하는 사이였다. 핸드폰을 주고 텍사스를 지나고 있으니 서연이에게 통화를 해보라고 했더니 유진이가 아주 신이 났다. 서연이는 학원 쉬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곳에 와서도 한국 아이들은 바쁘다. 사실 우리에게 텍사스는 낯선 동네다. 내 기억 속의 텍사스는 박찬호가 소속되었던 텍사스 레인저스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주지사를 지냈던 동네라거나, 목축지와 유전이 많은 곳이라거나,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기억에는 없지만 나타샤 킨스키(Nastassja Kinski)가 주연을 했던 영화 <파리텍사스>(Paris, Texas, 1984)의 그것이 전부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게 미국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딱히 알 이유도 없지 않은가? 미국에 와서 겨우 그것이 지도 어느 자락쯤에 있다는 것과 전에 텍사스공화국이었다는 것 그리고 멕시코-미국 전쟁의 계기가 되었고,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 발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렇게 막연한 관념일 뿐이었던 텍사스는 그것의 가장 북쪽 도로를 달리면서 비로소 실재로 다가왔다.

메마른 바람만큼이나 벌레도 집요하게 달려들어 죽어갔다. 차창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서 주유할 때마다 지워야 했다.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내려서서 기름값을 보니 비쌌다. 그렇게 대규모 유전이 많다던 텍사스의 기름값이 얼바인 만큼 비쌌다. 그 주에 유전이 많으니 기름값이 싸야한다는 법은 또 어디 있으랴마는 그래도 유전이 있는 지역이니 싸야하는 것 아닌가? 주유를 하면서 차창에 부딪혀 죽은 벌레들의 흔적을 부지런히 지웠다. <아바타>의 나비족이 되어 햇빛은 피했는데 벌레는 피할 수 없었다. 달리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벌레들의 죽은 흔적이 유리창에 남아서 사진에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인도인이 운영하는 작은 주유소였는데, 식당을 같이하고 있어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보니 음식도 형편없고 지저분해서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더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는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고 십 분쯤 달려야 하는데, 창을 열면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게다가 앞좌석의 나와 유진이는 햇빛이 무릎까지 내려서 따가울 정도였고,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목 뒤쪽이 익어가고 있었다. 무릎과 목이야 수건 등으로 가리면 되는데, 더위가 문제였다.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에어컨을 계속 틀었고, 덕분에 콧물을 훌쩍이는 앞좌석의 나와 유진이는 후드로 앞섶을 가렸는데,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더위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조그마한 차 안에서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체감하는 온도가 이렇게 다른데, 성별, 연령, 지역, 계층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각자의 이해와 취향은 또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것을 단순화하고 일괄적으로 몰아가며 일사분란함을 질서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결국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밤 인터넷으로 확인한 한국의 무상급식 선택투표가 발의 되었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거웠다. 무상급식 문제는 평등의 문제 이전에 어린 아이들의 밥에 대한 문제라는 점, 밥은 양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절박한 문제라는 점, 그래서 밥으로 인한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번 문제의 핵심이다. 예산의 효율적 사용은 시의 책임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 이전에 다른 예산들은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도 필수불가결한 예산이 있다면 먼저 지출해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닌가? 나는 적어도 한강르네상스보다는 아이들의 밥에 먼저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너와 나의 이해를 따지기 이전에, 적어도 밥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각주:3]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달리다가 그래도 가끔씩 에어컨을 껐다. 나와 유진이가 훌쩍인 탓도 있지만 효진이가 에어컨에 아주 약했다. 효진이는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면서도 에어컨만 조금 키면 감기에 걸리거나 더 심한 경우도 생겼었기 때문이다.[각주:4] 그러니 조금 덥더라도 에어컨을 끄고 가끔씩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더위에도 유진이는 춘옥이를 꼭 껴안고 잔다. 자다 깨서는 춘옥이 일광욕을 시킨다면서 옷을 벗겨 대쉬보드 위에 올려놓는다. 아내와 내가 놀려도 소용없는 일이다. 춘옥이는 유진이의 소중한 곰돌이 인형이다. 그래도 이름이 춘옥이가 무엇인가? 9학년이 무슨 곰돌이 인형이냐고 놀려도 유진이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위안인가보다.

유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06년 이모가 살던 싱가포르에 갔다가 말레이시아까지 가서 1년을 지내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떠나기 전에 외삼촌이 사준 인형이 춘옥이다.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자기 반 아이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하소연하던 유진이는 이모가 싱가포르에 같이 가자는 말에 겁도 없이 그러고 싶다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었다. 우리는 어학연수 하는 셈 쳤고, 어려서부터 이웃에서 같이 생활했던 이모에다가 또래 오빠 준성이가 있었고, 늘 딸 하나를 갖고 싶다던 이모부까지……아내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싱가포르에 가서 아이가 적응할 때까지 한 달 간 같이 있다가 돌아왔고, 그 후에도  아이가 보고 싶다며 밤마다 눈물로 지새기 일쑤였다. 덕분에 1년 동안 아내는 체중이 7나 빠져 버렸다. 어려서 낯선 곳에서 혼자 생활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꿋꿋했다. 아니 여태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유진이의 춘옥이. 이 녀석이 암놈인지 수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진이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 한 살짜리 아닌가? 아무리 이모가 잘해줘도 낯선 나라에서 생활하는 열 한 살짜리에게 무섭고 두려운 것이 왜 없었겠는가? 그 때 자기 방에서 혼자 잘 때 무서워서 춘옥이를 늘 꼭 껴안고 잤단다. 생각해보면 다른 가족과 함께 있던 부모도 아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는데, 고작 열 한 살의 아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는 그 이야기를 춘옥이에 대한 애착으로 계속 이야기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들었다. 늘 그렇지만 아빠는 바보다.그래서인지 춘옥이에 대한 애착은 아내의 유진이에 대한 그것과 닮았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춘옥이를 욕실까지 데리고 다닌다. 유진이가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을 텐데, 늘 언니가 끼고 다니는 춘옥이가 부러웠는지 언니가 수련회에 간 사이에 효진이가 일을 저질러 버렸다. 춘옥이의 자라지도 않는 털을 깎아주겠다고 가위로 가슴에 상처를 낸 것이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유진이는 화를 낸다. 어쨌든 유진이의 춘옥이는 그동안 몇 번 세탁을 했음에도 때가 탔다. 요세미티를 다녀와서 아내가 손세탁을 했는데, 건조기에서 눈에 상처가 날지도 모른다고 안절부절못하는 유진이의 모습은 차마 웃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때가 탔다고 이야기했더니, 앞으로는 빨지 않고 일광욕을 시키겠단다. 이제는 차에 타서 생각나면 이렇게 대쉬보드 위에 춘옥이를 올려놓고 일광욕을 시킨다. 일광욕하는 춘옥이를 보면서 바보 아빠는 그 녀석이 문득 고맙다. 우리 집에서는 정말 아빠라고 쓰고 바보라고 읽어야 하나보다.

I-40은 스텝사이를 끝도 없이 달리는 단조로운 길이었다. 덕분에 크루즈를 설정해두고 차 안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눌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다보니 결국 내가 유진이에게 당부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눈치 빠른 아내가 화제를 돌려서 유진이가 말레이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아내는 당시에 내게 서운했었던 것을 이야기했고, 효진이는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살면서도 서로 가장 잘 안다고 하면서도 속내를 제대로 몰라서 서로 상처 받고, 상처를 주고 있었나보다. 각자 열심히 산다고 뛰어다녔지만 정작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오늘은 이동일, 크게 매력적인 현지식이 없으면 간단히 먹어야 한다. 그래서 버거팅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이 버거킹 치킨텐더를 좋아했는데, 작은 조각 20개가 들어간 한 팩이 4.99달러니 아주 저렴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한참을 달려도 사만다는 조용하기만 했다. 사만다가 조용한 것을 보니 길에 큰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체로키(Cherokee)족과 관련된 관광 상품점이나 식당 광고가 늘어나고 있었다. 오클라호마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클라호마는 촉타오(Choctaw)족의 언어로 빨간색의 사람들’(okla homma)을 말하는데 인디언을 의미하는 말이다.

I-40의 전경(상), 중부지역을 달리다 쉽게 발견하는 대형 십자가(), 이제는 식당 이름으로 남은 체로키()

오클라호마를 인디언과 서부개척의 요람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운 것이다. 오클라호마를 개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곳에 먼저 강제 이주해 있던 인디언들을 다시 이 땅에서 몰아낸 것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 주에 살던 체로키족 영토에서 금이 발견되자 체로키족을 그곳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1830년 인디언 이주법(The Indian Removal Act)[각주:5]을 제정하고, 서부로 강제 이주시키는데 그 길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불렀다. 강제 이주하는 과정에서 15,000명 중 8,000명의 체로키족이 죽임을 당하면서 도착한 곳이 지금의 오클라호마다. 체로키족을 비롯해 소위 다섯 개의 문명화된 부족이라고 불리는 치카소족, 촉타오족, 크리크족, 세미놀족과 그 밖의 다른 인디언 부족들이 비슷한 연유와 경로로 오클라호마에 강제이주 되어 온다. 오클라호마가 1834년 인디언 왕래 법령(The Indian Intercourse Act)에 의해 인디언구역으로 정해졌던 것이 19세기말 이곳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백인들은 다시 이곳을 빼앗기 위하여 1907년 인디언 구역을 병합하여 오클라호마 주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디언 부족들은 모두 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미국 내에는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202개 부족 1,500,000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그들은 한반도 보다 넓은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잊고, 국가 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높은 실업률, 마약 및 알코올 중독, 도박, 자살 등의 문제로 고사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2010년에 미국 정부는 초기 정부가 인디언을 탄압[각주:6]하고 강제 이주 시킨 점에 사과했지만, 현재 진행형인 이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는 좀 더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준열한 미국 정부가 왜 자신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에 대해서 애써 외면했는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현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들이 왜 보호구역에 갇히게 되었는지 밝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전 그들의 땅이었던 곳에 대한 소송이 줄을 이을 것이고, 그 결과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각주:7]

오클라호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 일가가 살길을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유전이 발견되었지만 몇몇 자본가들의 몫이고, 가난한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척박한 땅과 모진 기후에 언제나 힘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 오클라호마다. 삶의 기반을 모조리 처분해서 얻은 돈으로 낡은 트럭에 온 가족을 싣고 떠나는 조드 일가의 모습은 1974년 서울로 올라오던 우리식구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각주:8] 하지만 그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척박한 땅이나 모진 기후보다 더 지독한 농장주들의 횡포와 자본의 부조리한 논리가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들이 캘리포니아의 축복어린 풍요 앞에서도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그들의 무지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재도 그러한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 소외의 대상이 이민자들이나 제3세계의 값싼 인력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토록 엄혹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길들여진 미국의 농작물과 경쟁해야하는 FTA 이후의 우리 농촌이 걱정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체로키족의 슬픈 사연이나 살기 위해 떠났던 1930년대 빈농의 모습이 이제는 그저 옛이야기처럼 팬시화 되어 거리 곳곳에 관광객을 호객하는 간판으로만 걸려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비극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체로키족이 그랬듯이 신도시 개발, 서울시 뉴타운 정책 등으로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지 않는가?

여러 시간을 달려왔기 때문에 유진의 아이팟도 밧데리가 다 되었다. 덕분에 지루해하는 가족들에게 영화 <노트북>(The Notebook, 2004)<콜드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미국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사랑 이야기로 넘어간 것이다. <콜드마운틴>은 강의 시간에 이야기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활용하는 작품인데 이야기를 하면서 더 감동을 느끼는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콜드마운틴>의 감독이었던 안소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와 그가 제작을 맡았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2008)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어려서 주말과 일요일 밤이면 볼 수 있었던 <주말의 명화><명화극장>이 떠올랐다. 어려서 우리 집에서는 저녁 7시면 어린이 방송이 끝나고 모두 공부방으로 돌아가 공부를 했었는데, 아버지는 <주말의 명화><명화극장>만은 챙겨서 보여주셨다. 여쭈어 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는 어린나이에 보기 어려운 영화도 있었고, 보다가 잠들던 영화도 있었다. 이따금 영화를 보다가 아버지 고등학교 때 본 영화라고 이야기를 해주시거나, 출연한 배우의 다른 작품을 이야기 해주시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영화 이야기를 하다말고 문득 그 시절, 아버지와 <명화극장>을 같이 보던 그 때의 아버지 나이를 내가 지금 지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 아이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서 제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나를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따듯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오클라호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8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조금 남아 있었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가볍게 차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마치 20061224일 싱가포르 창이공항(Changi Airport)에 내렸을 때 느꼈던 그 숨 막힘의 압도 같았다. 서울에서는 겨울에 출발했고, 비행기에서는 내내 시원했기 때문에 공항에 내리는 순간, 기대와 어긋나며 문득 느껴지던 숨 막힘! 차에서 내내 에어컨을 틀고 왔으니 밖의 기온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크라호마시티는 절절 끓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까지 짐을 옮기는데 지열이 엄청났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오클라호마의 숙소는 매우 저렴한 곳(다른 지역 평균의 1/2 가격)을 골랐는데, 가격 대비 시설은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방으로 올라와 보니 에어컨은 이미 켜져 있었다. 시원은 했지만 우리가 언제 올 줄 알고 이렇게 에어컨을 켜둔단 말인가? 덕분에 시원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풍요가 과한 나라인 것은 분명했다.

오클라호마시티의 숙소

 숙소에서 아내가 손으로 빤 빨래들

오늘은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빨래를 해야만 한다. 예약을 할 때, 숙소 정보를 보니 세탁실(Laundry room)이 있다고 해서 빨래를 싸들고 내려갔는데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세제도 없었지만 시설이 워낙 낡고 더러웠다. 결국 다시 빨래를 싸들고 방으로 올라와 아내가 손빨래를 했다. 비누로 빨고 몇 번을 헹구어 주면 내가 손으로 짜서 널었다. 아내의 말처럼 살기 위해서 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일들은 티도 나지 않는, 매일매일 반복해야 하는 고단한 것들이다.

빨래를 하고 내일 돌아볼 오클라호마시티의 중요 지점과 이동 거리 그리고 동선을 구글 지도에서 확인하고, 아이들을 재우려고 보니 모두 콧물을 훌쩍거린다. 아마도 하루 종일 차 에어컨 바람 앞에 있었고, 숙소의 에어컨 바람이 과했나보다. 약을 찾아서 먹였다. 밤이 깊어도 더위는 좀처럼 식지 않고, 숙소 전체에서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만 요란했다.

 

  1. 미국인들의 퇴근본능은 거의 신앙 수준이었다. 일과 중에 아이들을 픽업하러 나오는 그들의 모습에 놀라고, 칼같이 지켜지는 그들의 퇴근본능에 질리고, 저녁식사는 가족과 함께라는 그들의 문화가 부러웠다. 이러한 모습에서 무엇을 위해 왜 일하는지 아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지?”하는 의구심이 일었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워커홀릭의 한계일까? [본문으로]
  2. 아이스백은 얼바인 요거랜드의 경품으로 얻은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아이스박스를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장거리 운전 시에 물을 차갑게 보관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크아웃 하기 전에 숙소에서 아이스백 가득 얼음을 채워 와야 했기 때문에 아이스백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본문으로]
  3. 일본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유치원비 지원 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소득층의 교육비는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만약 유치원에서 교육비를 받으면, 누가 돈을 내고 누구는 무상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유치원에서 알 게 될 테고, 그러면 혹시라도 차별이 발생하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것을 우려한 정부는 유치원 비용을 교육청에서 수납하게 한단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배려가 복지의 시작임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본문으로]
  4. 2005년 여름휴가를 대구를 거쳐 경주로 갔었는데, 내려가는 차 안에서 에어컨을 계속 켜고 갔었다. 아이는 대구에서 잘 놀고 경주에 도착해서도 풀장에서 잘 놀았다. 다음날 석굴암에 올라가는데 효진이가 자꾸 아프다고 했다. 당시 다섯 살이었으니 그 더위에 조금 많이 걸으니 꾀가 나서 업어달라는 줄 알고, 아내와 번갈아서 아이를 업고 다녔다. 그런데 밤에 숙소에서 아이들을 재웠는데, 아무래도 효진이 숨소리가 이상했다. 덜컥 겁이 나서 아이를 태우고 경주에서 병원을 갔는데, 자신들은 잘 모르겠으니 더 큰 병원에 가라고 해서, 경주동국대병원에 찾아갔더니 폐렴 같단다. 응급조치를 해줄 테니 빨리 서울에 더 큰 병원으로 가란다. 그길로 짐을 꾸려 밤샘 운전을 하며 분당으로 돌아와 집 뒤에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시켰고, 며칠을 그렇게 입원해 있어야만 했다. 무모한 부모 덕분에 아이가 고생했던 사건이다. [본문으로]
  5. 인디언 이주법은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 부족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시킨다는 법으로1930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법은 인디언 거주 지역의 땅과 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산업혁명이후 영국에서 면화수요가 급증하자 호황을 누리던 조지아 주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서는 농장 확장을 위해 인디언의 땅이 필요했고, 1928년 조지아 주 인디언 거주지에서 금이 발견되자 인디언을 이주시키고 합법적으로 그 땅을 차지하려는 백인들의 탐욕으로 탄생한 법이다. 이 법으로 약 10만명의 인디언들이 지금의 오클라호마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동의였지만 거부하면 연방 조약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부족이 아닌 개인 단위로 취급되거나 부족의 존망을 위협받는 무력시위에 시달려야했다. [본문으로]
  6. 1890년 미군 제7기병대에 의해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수족 200여명이 항복한 상태에서 무참히 학살당한 운디드니 학살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본문으로]
  7. 이러한 결론의 근거로는 체로키족의 소송을 들 수 있다. 미시시피 강 동쪽의 체로키 영토를 5,000,000달러에 미국정부에 양도한다는 내용으로 1835년 체결된 뉴이코타 조약이 불법이라고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거부로 집행이 무산된 적도 있었다. [본문으로]
  8.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야 달랐지만 낯설고 모진 공간으로 떠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서울로 이사해온 이후 끈 떨어진 연처럼 늘 떠돌고 있다는 쓸쓸한 느낌은 당시 서울로 떠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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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라호마에서 울다.

82일 오클라호마시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아내를 제외한 셋이 모두 감기약을 먹고 누워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잠든 탓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9시까지 아침을 준다고 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에 붙어있는 간이 테이블 3개가 놓인 식당에 갔더니 머핀과 식빵 그리고 우유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나마도 담고 보니 방으로 가지고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붙어있다. 한참을 고민하다고 다 두고 왔다. 예약 사이트에서 본 숙소의 아침은 콘티넨탈 블랙퍼스트(Continental Breakfast)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숙소근처에는 아침을 해결할만한 음식점이 없었고, 심지어 패스트푸드점도 없었다.

출발 전 머리를 묶는 유진

숙소를 나서려는데, 좀처럼 머리를 묶지 않는 아이 둘이 모두 머리를 묶었다. 한참 멋을 부릴 나이에다가 이곳 아이들이 대부분 생머리를 묶지 않고 다니니, 아이들은 내 잔소리에도 머리를 늘 풀고 다녔다. 더구나 이곳은 머리하는 비용이 비싸서 한국에서 온 머리 그대로다보니 점점 아이들 머리는 주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클라호마의 더위를 체험한 아이들이 스스로 머리를 묶은 것이다. 그렇다, 아빠의 잔소리보다는 자기들이 겪으면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고, 진짜 알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움직인다. 왜 부모인 내 뜻을 따르지 않느냐를 고민[각주:1]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소통 능력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묶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머리 묶는 유진이 옆에는 어제 아내가 손으로 빤 빨래가 말라가고 있었다. 여행은 여지없는 생활이다.

일단 식당은 국립추모박물관(National Memorial & Museum)으로 가서 그 주변에서 찾기로 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아침인데도 어제보다 더 더웠다. 더운 것이 아니라 뜨거웠다. 차창을 모두 열고 열기를 뺀 후에 에어컨을 한참 켠 후에야 차에 겨우 탈 수 있을 정도였다. 국립추모박물관에 가서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기대했던 음식점은 없었고, 조금 더 밖으로 나오니 몇몇 패스트 푸드점만 보였다.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시키는 사이 화장실을 갔는데 잠겨 있었다. 문 앞에 스티커를 읽어보니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서 열어야 한단다. 미국은 대체로 화장실 인심이 고약하다. 심지어 물건을 살 사람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문구를 내건 편의점도 있었다. 프런트로 가려는데 앞 사람이 나오며 문을 잡아준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변을 보려면 일일이 프런트에 가서 열쇠를 달라고 해야 하는 곳에 미국사람들은 참 속도 없이 잘도 다닌다. 하긴 우리도 그런 곳에서 아침을 먹었으니 속없기는 둘 다 똑같다.

맥도날드에서 시킨 음식

맥도날드의 인색한 화장실

맥도날드보다 더 야박했던 4월에 요세미티국립공원 가는 길에 만났던 주유소 내 편의점 화장실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효진이는 스머프를 끼워주는 해피밀(happy meal)[각주:2]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피밀은 말도 안 되는 음식이라고 시켜주지 않았을 텐데, 어제 울면서 엄마가 아닌 아빠와 잔 효진이가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그냥 시켜준 모양이다. 효진이는 5학년인데도 아내에게 아기처럼 군다. 늘 엄마와 같이 자고 싶어 하는 효진이는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내와 한 침대를 써왔다. 늘 아내에게 찰싹 붙어서 스킨십을 하는 효진이 때문에 아내가 다소 힘들어했다. 어제는 유진이가 감기기운이 있다니까 아내가 유진이랑 한 침대를 쓰고 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잤는데, 그게 못내 서운했는지 결국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그러는 모습이 또 좀 안 돼 보여서 꼭 안아주고, 작은 소리로 효진이를 위로해주고 서로 킥킥대다가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진이는 엄마가 첫째다. 생각해보면 우린 누구나 엄마가 최고가 아닌가?

아이들과 한 침대를 쓰면서 자기 전에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즐거움 중에 하나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배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해주다보면, 어느새 내 배 위에서 잠들곤 했었다. 그러면 아이의 숨 쉬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봐 나도 조심스럽게 숨을 쉬곤 했던 기억이 났다. 아이들은 크고, 나도 너무 바빠서, 아이를 재워주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 즐거움을 찾은 것이다. 누워서 이야기하다보면 낮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을 먹고 다시 차를 타는데 숨이 탁탁 막혔다. 대구에서 자란 아내는 덥다는 소리를 잘하지 않는데, 뜨겁단다. 더위 때문인지 여정이 힘든 탓인지 모두들 다소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국립추모박물관에서 주차할 곳을 찾는데 근처 성당 주차장이 텅텅 비어서 살펴보니 허락 없이 주차하면 견인이라는 표지가 무서웠다. 그 바로 옆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그곳에 주차를 했다. 주차를 하고보니 후불도 아닌데 주차비 낼 곳이 없다. 주변을 살펴보니 주차비 징수 박스가 있었는데, 자기번호에 주차비 3달러를 밀어 넣으면 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를 밀어 넣어도 영수증이나 주차증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보고 있으니 알아서 주차비를 내고 가라는 것이다. 판옵티콘(Panopticon)[각주:3]이 따로 없다. 이것은 판옵티콘처럼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당하는 사람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 징수 박스는 원시적인데 그것을 운영하는 시스템은 무서운 감시 시스템이라며 웃었지만, 마냥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차를 대고 싶었으나 날이 너무 더웠다. 더위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오전이었다.

유료 주차장 주차비 징수박스. 지폐를 자기 번호에 넣고, 납작한 쇠로 빠지지 않도록 밀어 넣게 되어 있다.

국립추모박물관은 1995419일 오전 92분에 발생했던 오클라호마 폭탄테러(Oklahoma City bombing)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는 1993년 텍사스에서 집단 자살한 사교집단 다윗파에 대한 연방정부의 불만족스러운 처리에 불만을 품은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가 알프레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Alfred P. Murrah Federal Building) 앞에서 폭발물 트럭을 폭발시킴으로써 168명의 사상자와 6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And Jesus Wept 과 조형물에 대한 설명

주차장에서 국립추모박물관으로 가는 신호등 앞에 조형물 ‘And Jesus Wept’이 서 있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1135절의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더라를 인용한 것으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의 168명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원한 안식을 찾게 하려는 추모 조형물이었다. 168명의 희생자를 상징하는 화강암 벽의 틈을 마주선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조형물의 안내에는 자신의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다고만 적혀있지만, 성서에 의하면 죽은 나사로를 걸어 나오게 하셨다고 적혀 있다. 희생자들의 부활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연민과 사랑으로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조형물이었다. 이 조형물을 설명한 판을 읽다보면, 희생자들에 대한 안식의 기원과 함께 희생자의 가족들을 향한 위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1:25)라고 적음으로써 희생자들이 영혼의 안식을 찾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And Jesus Wept’ 앞에서 나는 이미 비애와 절망으로 참혹해졌다. 물론 이 조형물은 오히려 그러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종교적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테러의 참혹함과 조형물의 깊은 슬픔이 먼저 전해졌다. 그 참혹함은 언어 이전의 것이었고 가슴을 베고 지나는 상처 같아서 실체가 잡히지는 않았지만, 관람 내내 아리고 아팠다.

9:03 게이트와 그 앞의 Reflecting Pool과 9:01 게이트

길을 건너서 국립추모박물관의 ‘9:03 게이트로 들어갔다. 게이트를 들어서자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 건너로 보이는 ‘9:01 게이트가 보였다. 이것은 폭탄테러가 일어난 1995419일 오전 92분을 기억하기 위하여 91분과 93분 사이를 비워둔 것이다. 그 사이에 리플렉팅 풀을 두고 그것을 통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테러에 대한 경각심 등을 일깨우고 있었다. 두 문과 풀을 망연스레 보다가 문득, 이들은 어쩌면 92분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킴으로써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번다한 조형물을 세우는 대신 두 개의 벽 같은 문을 만들어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 사이 누락된 시간에 일어난 일을 관람자 스스로 물에 비추어보게 함으로써 더욱 깊은 슬픔과 기억을 만들고 있었다.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 19개의 작은 의자는 어린 희생자들을 상징하는데, 그 텅 빈 자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9:03 게이트를 걸어 들어가다 보니 각기 다른 크기의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가 기다리고 있었다. 빈 의자는 이곳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상징하고, 그 중에 작은 의자들은 19명의 어린이 희생자들을 표상한다. 이 의자는 9열로 정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희생되었던 건물의 9개 층을 의미한단다. 이 의자는 반투명 유리 위에 청동과 돌을 얹었기 때문에 낮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밤에는 불이 들어와 희망의 신호를 밝힐 수 있게 하였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청동이 입은 세월의 흔적과 그것이 흘러내려 유리 받침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희생자들의 애틋한 사연과 그들을 준비 없이 보냈던 가족들의 슬픔도 그렇게 세월과 함께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빈 의자들은 9:03게이트와 9:01게이트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그 희생의 시간 동안 그들의 생명이 하나하나 속절없이 스러져 간 것을 의미하는 듯 했다.

9:03게이트에서 빈 의자들을 따라 9:01게이트 쪽으로 걸어가니 ‘Survival Wall’이 서 있다. 폭탄이 터졌던 건물의 마지막 남은 벽이다. 이 벽은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부상자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벽에는 그곳에서 생존한 600명 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urvival Wall’를 보고, 9:01 게이트를 지나니 ‘The Survival Tree’가 서 있었다. 수령이 90년 이상 된 이 느릅나무는 테러 현장을 목격한 나무로서, 지금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놀라운 치유능력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온갖 애도와 상처들을 지켜보았을 느릅나무를 바라보다가 국립추모박물관으로 향했다.

구조5팀에서 적어놓은 글귀

국립추모박물관 현관의 문구

국립추모박물관 벽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당시 구조에 참여했던 구조5팀이 적어 놓은 것이다. 거기에는 “We search for the truth. We seek Justice. The Courts require it. The Victims Cry for it. And God demands it!”라고 적혀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폭탄테러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짧고 단호한 글귀에서 배어 나왔다. 익명의 대중을 향한 무차별의 테러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절대로 용납될 수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구조5팀이 적어놓은 글귀를 보면서 진실과 정의라는 지독히 추상적인 말의 구체화된 현실을 떠올리며 씁쓸해졌다. 진실과 정의가 소중한 것은 누구의 관점이 아니라 모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추모박물관 입구에 공간의 의미를 적은 글귀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앞의 문장들보다 마지막 문장에 눈이 갔다. 여기서 위로, , 평화, 희망, 평온을 얻어가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슬픔은 집요하고 마음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겠지만, 그것이 비롯된 곳에서 치유와 극복의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참으로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개선하고, 극복해 나갈 것이냐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테러 현장의 생존자들이 갖고 있을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씻어 주기위한 전 사회적 배려와 노력은 우리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폭파사건의 시간대별 구성

카메라에 잡힌 범행 전 트럭

미국 정부 휘장

구조 단체의 모자

국립추모박물관 관람은 3층부터 시작했다. 3층은 테러리즘의 배경, 이곳의 역사,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 폭탄테러 순간의 혼란 체험, 테러 이후의 무질서 체험, 구조 체험, 세계의 반응, 구조와 복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사건 발생 한 시간의 수사 상황과 첫 날의 수사 상황을 삽입함으로써 전시의 긴장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폐허 속의 성경

열어야 할 방도 열 사람도 사라진 열쇠

그날 이후 멈추어버린 시계

당시 건물에서 나온 손목시계, , 신발, 안경, 열쇠 등의 물품들을 전시하고, 그 날 이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벽시계의 단호한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 공간 곳곳에서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결국 복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 미국의 상징물들이 전략적으로 노출되고 있고 있었다. 사건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하여 마치 사건의 진행 과정에 관람자가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점도 매우 돋보이는 구성이었다. 또 하나, 테러범을 구속하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극적인 흥미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고, 구조 현장에 참여했었던 기자, 구조대원, 자원봉사자들을 모자, 구조장비, 취재수첩 등의 소품으로 현장의 긴박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온 위로와 격려

마지막 희생자의 발견

생존자 및 목격자의 이야기

구조 활동 도중 숨진 간호사

희생자 가족들 이야기

건물철거 이후 활용에 대한 설문 조사

듣는 것은 보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지만, 보는 것은 느끼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 3층의 전시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동선의 유도를 통하여 전략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희생자들에 대한 감상적인 추모나 테러리즘에 대한 계몽의 일방성에서 탈피하여, 구조과정의 감동적인 스토리(사건이 보도되고 피가 모자란다는 보도에 달려오는 헌혈자들, 미국 전역으로부터의 희망 메시지 등등)와 희생자 각자의 스토리 그리고 범행 과정 및 검거 과정까지 흥미롭게 구성해 놓음으로써 관람자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특히 관람이 진행되면서 뒤쪽으로 갈수록 이러한 참혹한 재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용기와 구조대원들의 헌신적인 희생 등을 부각시켜감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의 상기를 넘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가 아닌 우리 이웃을 영웅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지점이었다. 거기에 어린이들의 따듯한 편지, 미국 전역에서 보내오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생중계로 진행되는 구조과정, 그 중간 중간 테러리즘에 대한 경고와 사회적 공분(公憤) 만들기, 정의 구현의 필요성과 그 주체가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의지 천명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인종, 다문화, 다언어 사회인 미국의 다양성은 미국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그것은 다시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은 신속하고 명확하게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정의를 선취함으로써 정당성과 자부심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효과적인 단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속하고 견고한 일치는 스스로 절대선(絶對善)의 맹목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높고,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을 제거할 가능성이 높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2층에 내려오니, 이 박물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라는 ‘Gallery of Honor’로 이어졌다. 방 안 가득 168명의 희생자 사진과 그들의 유품 하나씩을 놓아 꾸민 방이었다.

아기 희생자와 젖꼭지(), 희생자와 아이의 편지(),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을 위한 티슈박스(하)

방 가운데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작은 티슈박스가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유품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특히 건물 안에 어린이 집(Day Care Center)이 있었기 때문에 유아들의 희생이 컸고, 그래서 희생자 중에는 유난히 아기들이 많았다. 아기들의 젖꼭지, 인형 등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뒤돌아보니 아내도 울고 있었다. 아내가 우는 모습에 아이들이 티슈박스에서 휴지를 뽑아다 주었다. 그 때 효진이가 손을 잡아끌어 그곳에 가보니 희생당한 엄마에게 아이가 쓴 짧은 편지가 있었다.

이 작은 편지에 또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느닷없이 떠나는 일은 모진 일이지만, 떠나는 사람이 선택한 길이 아니지 않는가. 준비 없이 남게 된 어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했을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Life is sad without you.”라는 말에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슬픔도 공명이 되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제야 왜 이 방 안에 티슈박스가 놓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2층은 폭탄 테러 이후의 대처와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방의 테마는 희망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 엽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통로에는 어린이들이 보내준 27,000개의 페니로 만들었다는 ‘The penny path’와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해주기 위해 홀로 기다리는 노인 자원봉사자의 모습에서 미국의 근력이 보였다. 희망의 방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천장에 가득 매달린 수많은 황금학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내온 엽서와 그림

The penny path

희망의 방에 매달린 황금학

벽에 붙은 안내문에는 일본 아이 사다코의 사연과 종이학의 전설 그리고 일본에서는 종이학이 치유의 상징이라고 밝히면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후 며칠 후부터 미국 전역에서 아이들이 10,000개 이상의 종이학을 용기 내라는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내준 종이학을 모티브로 희망의 방 천장에는 수많은 황금학을 매달아 놓았단다. 슬픔과 절망을 건너는 법을 아이들은 마음을 모으는 데서 찾은 것이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지독한 슬픔을 건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위로와 용기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Symbol of Comfort

미국 정부는 1995423일 추도식장에서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Symbol of Comfort’라는 곰인형을 하나씩 주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의도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추도식 사진 속에서 유가족들이 하나씩 안고 있는 곰인형은 위안과 위로를 주는 듯 보였다. 희생자들이 곰인형처럼 함께 할 것이라는 의미인지, 종이학을 접어서 보냈던 아이들처럼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용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분명한 의도와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 지독한 슬픔 속에서 작은 곰인형이 주었을 위안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곰인형을 나눠줄 생각을 한 사람의 감성이 아름다웠다.

박물관 앞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희생자의 유품이거나 좋아했을 물건으로 보이는 곰인형, , 신발 등을 매달아둔 벽이 있었다. 어떤 것은 낡고 어떤 것은 새것으로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희생자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 거친 철망에는 따듯한 기억들이 매달려 있었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테러에 대한 분노나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는 별도로 문화콘텐츠 연구자로서 이 박물관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을 전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느냐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전개한 스토리텔링이 아주 돋보였다. 폭탄테러를 추모하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해봐야 그거겠지 라고 별 기대 없이 온 것인데, 기대 이상이었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라는 콘셉트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함으로써 여러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승전결의 거시 구조로 전개하면서도 각 단계별도 2-3개의 테마가 동시에 진행되게 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이 돋보였다. 특히 관람객의 의문에 대한 답을 미리미리 제시하면서도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재적소에 마련해 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었다.

희생자의 유품이나 좋아하는 것을 매단 추모의 벽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

특히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컴퓨터에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테러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과 희생자 역시 당신과 같은 일상 안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의 시간과 관람객 개개인의 시간의 연결시킴으로써 이 사건과 은연중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 탁월했다. 결국 그곳을 떠나면서 우리는 방명록에 ‘We will never forget!’이라는 결의를 남기고 왔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역시 문제는 참여였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거의 한증막이었다. 차를 찾아 문을 열려는데 손이 델 것만 같았다. 실내의 더운 기운을 빼려고 차창을 내리려는데, 스위치가 손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에어컨을 한참 튼 후에 차에 탔다. 카메라는 들고 다녔지만, 렌즈를 담아둔 카메라 가방은 차안에 두고 다녀서 온도에 예민한 렌즈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큰 고장은 없었다.

세그웨이를 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Science Museum Oklahoma)은 서울에 있는 국립과학관 같은 규모와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과학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와서 과학적 현상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1층에 대부분의 체험 프로그램이었고, 2층에는 우주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기다리지 않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가급적 더 많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을 찾은 나만의 은밀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그웨이(Segway)였다. 정보를 검색하다가 이곳에서 세그웨이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걸작으로 평가받는 세그웨이는 처음 소개될 때부터 타고 싶어 했는데, 이곳에서 탈 수 있다니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것이다. 두발로 가는 새로운 탈 것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이것이 왜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보니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다. 다소 머쓱해서 직원에게 어른도 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는다. 유진이와 효진이가 먼저 타고 나는 나중에 탔다. 안전 때문인지 아이들은 옆에서 직원이 따라다니며 운전을 도와줬다. 작은 실내였기 때문에 속도를 최대치까지 높인다거나 고속에서 방향전환을 한다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무척 간단하고 기동성 좋은 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서서 운전을 해야 하고, 방향 전환이나 속도조절 등이 운전자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왜 세그웨이를 미국에 와서도 자주 보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각주:4]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은 우리 아이들보다는 조금 어린 아이들 취향이었다. 그래도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신나서 여러 체험을 즐겼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Route66과 관련된 박물관은 물론 도시마다 다양한 아이템의 박물관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미국인들이 기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보존 의식이 남다르기 때문인지, 역사가 짧은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보상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문화가 서양인들의 보편적 의식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박물관이 많다보니 전시 방법이나 관람형태에 대한 상당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박물관의 콘셉트가 설정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구성해내고 있었다. 또한 운영에 있어서도 다양한 후원시스템과 자원봉사자들을 적극 활용하고, 관련 상품 개발 등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박물관이나 기념관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는 프랑스의 경우도 그 자체만으로 수익을 내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활성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지역문화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밤에는 지역의 다양한 문화공연을 진행할 수 있도록 꾸미는 것이다. 문화 역시 경제적인 가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다양한 보상을 가지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둘 사이의 적적한 조화를 이룰 것이냐 인데, 이곳의 박물관들을 좀 더 연구해보면 하나의 답쯤은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 2층을 보지 못했다. 다행히 2층은 우주탐사 중심의 소박한 전시여서 금방 돌고 시간에 맞추어 나올 수 있었다. 밖은 여전히 한증막이었다. 숙소에서 가지고 나온 물도 떨어지고 모두들 지쳐 있었다. 브릭타운 쪽에 가서 맛있는 현지식을 사주겠다고 브릭타운으로 갔지만, 마치 재개발 직전의 아파트 단지처럼 그곳은 썰렁하기만 했다. 브릭타운을 몇 바퀴 돌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다. 그래서 어제 숙소에서 본 팸플릿의 중국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제 본 바로는 가격도 적당했고, 집 떠난 지 엿새째라 모두들 제대로 된 음식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영어로는 Lotus Mandarine, 한자로는 루외루(樓外樓)[각주:5]라는 중국음식점이었다. 어제 그 팸플릿을 방으로 가져오면서 이름이 특이해서 찾아보았더니, 루외루(樓外樓)는 청나라 때 지은 항주 서호주변의 대형 음식점이란다. 1,500개 좌석이라니 역사도 역사지만 규모가 대단한 음식점이다. 특히 서호초어(西湖醋魚)와 규화동계(叫花童鷄) 그리고 동파육(東坡肉)으로 유명하고, 지금은 식품회사와 생수공장까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오클라호마시티의 루외루(樓外樓)에 들어가 보니 실내는 제법 규모가 있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카운터를 보고, 안주인은 서빙을 하고, 바깥주인은 주방을 맡고 있었다. 아내에게 주인이 아마 항주사람인가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물을 가지고 오던 안주인이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물었다. 한국인인데 얼바인에서 왔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동양인을 보기가 어려웠다. 미국 웬만한 곳에서도 동양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오클라호마시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내도 반가웠는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주문을 했다.

실내에는 미국인 두 가족과 우리뿐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카운터를 보던 아이의 튜터가 왔고, 그곳의 구석 테이블에서 둘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혼자서 서빙을 다하느라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안주인을 보니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을 바깥주인도 금방 그려졌다. 안주인의 영어가 서툰 것으로 보아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부부가 뛰면서도 아들의 공부를 위해 튜터를 붙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비록 항주 서호의 유명한 식당이름을 붙인 이유를 묻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미국에서 그렇게 큰 식당을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자식 세대를 위한 것임을 튜터와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쳐다보는 안주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외루의 음식들.

루외루는 음식도 훌륭했고 가격은 더 훌륭했다. 처음 시킨 것이 조금 부족해서 한 번 더 시키니 안주인이 웃는다. 모두 요리 일곱 개를 시켰는데도 가격은 38.49달러였다. 안주인이 웃으면서 얼바인은 모두 비싸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는 이야기다. 얼바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얼바인에서는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들이 많아서 서로 묘한 긴장관계를 보이는데, 이곳처럼 동양인을 보기 어려운 곳에서는 반갑고 서로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게 되나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아내도 공감했다. 문화가 비슷해서 서양인보다는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낯선 나라에서 고생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들 이야기로는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모두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이란다. 하교 후 근처 공공도서관에 가보면 인도인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와서 숙제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유진이 이야기로는 수업시간에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모두 아시아 학생들을 쳐다본단다. 이곳 아이들이 보기에도 아시아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그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의 뒤에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가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괄호 속에 묶는 부모의 모습은 어디서나 눈물겹다. 이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만난 중국인 안주인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우리 모두의 부모 모습을 보아서였을까, 문득 푸근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내에게 꼭 다시 오라고 몇 번씩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가족들도 정말 맛있게 먹은 모양이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싸오면서 내일 또 오면 안 되냐고 내게 묻는다. 그럴 수 있으면 그러자고 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지만, 무엇보다 아주머니의 정이 따듯했다. 모처럼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탓에 모두들 힘이 나는지 즐거워했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방 청소를 해놓지 않은 것이다. 카운터(이곳은 로비가 없다)에 가서 이야기 하니 자기들은 원래 이틀에 한번 청소를 한단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를 하니까 필요한 수건과 샴푸, , 청소봉투만 준다. 더 따지고 싶었지만 논리로 이겨낼 만큼 내 영어는 편안하질 않았고, 유진이는 누군가에게 따지는 것을 겁내하니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잡았더니 결국 이런 일을 겪는다.

숙소 방에 들어와서야 모두들 과식한 줄 안다. 아이들도 침대 위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잠들었다. 오늘은 행복한 과식이었다. 내일은 세인트루이스까지 8시간 이상의 운전을 해야 한다. 부디 오늘 같은 더위는 이곳에 두고 가고 싶다.

 

  1. 이러한 안타까움은 “자식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냐?”라든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같은 논리가 전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어느 자식이 부모 속상하라고 일부러 그러겠어요.”라는 전제만큼이나 부모자식 소통에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전제는 “내 뜻대로 너를 만들고 싶어”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본문으로]
  2. 해피밀은 디즈니의 토털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었다. 디즈니는 패스트푸드와 자신들의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계하여 프로모션할 계획을 가지고 맥도널드에 제안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버거킹과 제휴를 하여 그해 디즈니와 버거킹은 둘 다 대박을 낸다. 버거킹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낀 맥도널드가 이번에는 디즈니에 제안을 한다. 버거킹보다 훨씬 조직적인 유통망을 지닌 맥도널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디즈니는 이후 맥도널드와 제휴한다. 그렇게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둘은 스티브잡스가 디즈니의 최대 주주가 되면서 깨져버린다.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기업이 정크푸드와 제휴하여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해피밀 프로모션을 중단시킨 것이다. 역시 스티브 잡스다. [본문으로]
  3. 판옵티콘은 18세기 제레미 밴담이 제안한 원형감옥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형공간의 중앙에 높고 어두운 감시탑을 세우고, 그 둘레에 낮고 밝은 죄수의 방을 만들어,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죄수들은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죄수들은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감시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함으로써 보편화된 개념이다. [본문으로]
  4. 그러나 동부도시들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다. 특히 시카고와 워싱턴에서는 세그웨이를 이용한 투어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본문으로]
  5. 루외루(樓外樓)라는 식당 이름은 남송시대에 시인 임승(林昇)의 “山外靑山樓外樓,西湖歌舞几時休, 暖風熏得游人醉,直把杭州作汴州”라는 시에서 가져 온 것이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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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개척은 없다

83일 오클라호마시티세인트루이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늘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동하는 날이다. 오클라호마시티는 강렬했다. 한증막 같은 더위와 청소해주지 않는 숙소, 그리고 폭탄테러로 가시지 않는 슬픔이 그러했다. 그래도 한 번 둘러본 도시라고 떠나는 길이 눈에 익었다. 이름으로만 알던 도시의 맨 얼굴을 보고 나면, 그때부터 그 도시는 이야기가 되고 기억이 되어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살아 숨 쉬는 기억이라야 비로소 여행이 된다. 김춘수는 이름을 불러 몸짓을 의미로 만들었지만, 여행자는 이름에 체험을 붙여 기억으로 남긴다. 늘 기억은 살아 있는 것이어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오늘도 사만다는 심통이 났는지 우리를 엉뚱한 길로 데리고 갔다. 길은 정직해서 정확히 잘못 든 거리만큼 더 달리게 한다.

오늘은 549마일(878)을 달렸는데, 더 달린 시간만큼 차 안의 이야기도 풍성했다. 아이팟에서 동방신기와 JYJ의 음악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SMJYJ의 분쟁에 대하여 아내와 유진이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데, 구체적인 정보며 논리가 흥미로웠다. 팬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팬덤 현상에 대해서는 미국에서 콜로키엄(colloquium)을 함께하는 이승아 선생을 통해서 익히 들은 바 있었지만, 아내와 유진이의 정보량과 관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놀라고 있으려니 이야기의 중심 화제는 JYJ에서 한국과 미국의 문화가 달라서 벌어졌던 에피소드들로 바뀌었다. 아이들에 체계화된 사회적 보호, 철저하게 가족중심의 생활,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철저한 존중, 느리고 융통성 없는 업무처리, 합리적인 시간 문화, 여가의 존중 등이 주로 이야기 되었다. 무엇보다 처음에 와서 낯선 문화와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인해서 주로 내가 겪었던 일들로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문화적 차이를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이야기는 미국이 벌여온 전쟁 이야기로 바뀌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각주:1]이라는 팽창주의 논리에 따라 인디언들은 물론 멕시칸들까지 내쫓은 전쟁들과 미국이 다양한 명분으로 전 세계에서 치르고 있는 전쟁의 성격 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아이들도 제법 진지하게 들으며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이 제 생각과 의견을 내는 것을 보니 대견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큰다던데, 부모로서 나의 믿음은 늘 아이들 보다 앞서 있거나 뒤에 있었나보다. 부끄러운 착오였다.

오클라호마 주에서 미주리 주로 넘어서면서 길은 제법 험해졌다. 그래서인지 미주리 주 인근에서는 Route66을 한 때 피의 66’(Bloody 66)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유를 하거나 식사를 하기 위해 I-44를 내려서 본 풍경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퇴락해 있었다. 재개발을 앞둔 연립주택처럼 똑같이 생긴 작은 집들과 정원 없는 마당에 서 있는 덩치 큰 낡은 차들, 여기저기 언제 멈추었는지도 모를 트레일러의 반쯤 열린 문이 초라해 보였다. 요즘 무겁게 가라 앉아 있는 미국 경기 때문인지, 번화한 중심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이곳의 위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상태는 제법 심각해보였다.

I-44의 쓰레기 투기 경고문.

I-44I-40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곳곳에 교통법규를 어기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협박성 경고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차에서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면 ‘1,000달러 그리고/또는 1년 구속이라는 경고 문구의 단호함과 그리고/또는의 애매함은 웃지 못 할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미국에서 스티커를 발부 받아 본 사람은 이런 표지판이 주는 강한 압박감을 안다. 미국은 마치 벌금으로 다스리는 나라 같다. 이곳에서 오래 생활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속도로를 관리할 주 정부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고,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쓰레기를 정기적으로 청소하기가 어려워서 벌금으로 쓰레기를 줄이려한다는 것이다. 주차 위반으로 견인되고, 속도위반으로 스티커를 끊어 도합 420달러의 벌금을 경험한 나로서는 이런 표지판은 이유 없이 두려웠다. 보통의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고속도로에서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안다.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표지판은 위협적인 것이었다. 위협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은연중에 과속을 하게 될까봐 크루즈로 설정을 하고, 조심조심 정속으로 달렸다. 물론 창은 열지도 않았다.세인트루이스는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기 때문인지 더위는 조금 물러서 있었다. 세인트루이스는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가르는 도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동부에서 서부로 갔기 때문에 ‘The Gateway City’라고 불리었다.

기록에 의하면, 유럽인들의 미국 식민지 개척의 전형적인 수순과 같이, 프랑스 가톨릭 사제들이 세인트루이스에 선교 거점을 확보하고, 뒤이어 모피상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1763년 뉴올리언즈에서 북상한 모피상 피에르 라클레드(Pierre Laclede)가 이곳에 상단의 거점을 확보했다. 그해 체결된 파리조약(Treaties of Paris, 1763)[각주:2]으로 미시시피 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 넘겨줌으로써 프랑스인들이 대거 세인트루이스 지역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치적 약학에 의해 프랑스 식민지임에도 불구하고 1768년 이후 스페인 정부가 통치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가, 1803년 영국 견제책의 일환으로 미국독립을 지원했던 프랑스는 이 땅을 미국에 매각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이후 세인트루이스의 성격을 대표하는 서부 개척이라는 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세인트루이스는 ‘The Mound City’라고 불릴 정도로 인디언들의 큰 무덤(Mound)이 대규모로 조성 되어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원주민들은 이곳에 살고 있었고, 무덤의 규모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은 뒤늦게 나타나 자기들의 언어로 이 땅의 이름을 짓고, 제멋대로 자신의 소유임으로 공표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자기들끼리 주고받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땅의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대상화해야 했다.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아야지만 난폭한 침탈행위를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곳의 큰 무덤들을 원주민이 세웠다는 사실마저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왜곡했다. 그 정도 규모의 무덤을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야만인이라고 규정하기도 어려운 까닭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원주민을 부정하고 가상의 마운드 빌더’(Mound Builders)라는 존재를 내세우고, 그들은 유럽에서 온 백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마운드 빌더가 유럽에서 온 백인이라면 이 땅의 주인은 원주민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기 위한 억지였다. 이러한 억지 논리는 눈물의 길’(Trail of Tears)로 알려진, 인디언을 자기 땅에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도 강력한 논리적 근거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세인트루이스는 새로운 영토 확장의 무자비한 욕망과 흥분이 들끓고, 그것의 실천이 출발한 곳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종석이 자신의 칼럼에서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서부개척의 공격적 상징물이라고 본 것은 탁견이다. 사실 서부 개척이라는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 수사(rhetoric)인가? ‘서부 개척이라는 말은 서부에 이미 살고 있던 인디언들을 괄호 속에 묶고, 땅만을 그 중심에 둔 표현이다. 이 일방적인 수사에는 원주민의 존재와 문화를 개척해야할 대상으로만 여기고, 행위주체를 백인으로만 고정시키는 시각이 전제 되어 있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서부개척이라는 철저하게 백인 중심적이며 일방적인 표현에 별다른 이의가 없었던 것은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이 컸던 탓이다. 개척이라는 말의 진취적 어감과 맞물려 대상화된 원주민에 대한 폭력은 용맹과 낭만으로 미화되었다. 특히 인디언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자유 활용되던 죽은 자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것도 사실은 백인들에게서 먼저 시작된 것이다.[각주:3] 이런 사실을 오히려 왜곡하고 백인 주인공을 공격하는 인디언의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 가죽 벗기는 장면을 넣어놓은 얼마나 많은 서부극을 우리는 낭만적으로 보아왔던가? 이와 같은 서부개척의 왜곡된 신화 안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죄의식은 괄호 속에 묶고 카우보이나 기병대 혹은 총잡이의 남성성, 낭만, 자유 등으로 미화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신화화의 결과, 서부개척은 미국인들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미식축구를 통해 아직도 향수되고 있다. 또한 개척의 도구로 활용되었던 총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착[각주:4]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서부개척의 방향을 역전시켜 서부에서 동부로 가고 있다. 뜻하지는 않았지만, 그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상처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고 있다. 과거는 현재의 미화된 모습으로 좀처럼 덮여지지 않는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지고 깊어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잊어도 역사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 여정에서 만나는 모습들 역시 그 옛날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않았고, 더 심각해 보이는 것은 인디언에 대한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세계 각지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인디언을 만들고 있는 미국의 모습은 지독한 오만이거나 폭력이라는 것을 그들 자신만 모른다는 것이다. 역사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또 한 번 절감한다.

여행이 일주일째 접어들자 가족들은 여행에 적응해가고 있다. 오히려 남은 기간을 가늠해보고, 점점 줄어드는 그것을 아쉬워했다. 아내와 나는 짐을 싸고 푸는 일, 그날그날 빨래하고 말리는 일, 낯선 도로에서 운전하는 일에 점점 이력이 나고 있다. 이동하는 날에는 모두들 맥도날드나 버거킹 식사도 적당히 즐기고 있다. 마땅한 곳이 없으면 대부분의 저녁은 숙소에서 햇반과 카레, 컵라면 등으로 해결하고 있다. 덕분에 매운 것을 못 먹던 효진이도 이제 제법 매운 컵라면을 잘 먹는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한 나만의 컵라면 조리법도 날로 발전하고 있다. 아이들은 여행일기와 기록을 매일 정리하고, 아내와 나는 각자 스타일의 정리를 만들고 있다.

존 스타인벡은 찰리와 함께한 여행에서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사람을 끌어낸다고 하였다. 길 위에서 바람을 맞아본 사람이라면 그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여행이란 애초부터 모두에게 납득 가능한 이유 따위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길을 보며 떠남에 대한 신열을 앓다가 그저 떠나는 것이다. 신열을 앓는 샤먼이 이유를 가질리 만무하다. 이유가 없으니 계획은 있어도 성취는 없다. 떠나기 전에 세우는 계획이라는 것도 그곳의 과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현재 위를 걸어야 하는 각자의 여행에서는 늘 어긋나기 마련이다. 물론 계획을 세울 때의 나도 이미 현재의 내가 아니지 않는가?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여행은 예측불허의 젊음 같다. 기대와 불안이 수시로 몸을 바꾸는 여정 안에서 스스로 몸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여행의 긴장이고 즐거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제 비로소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보이는 풍경에 눈을 빼앗기는 여행이 아니라 여행이 이끄는 우리들의 풍경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풍경이 그것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들의 합, 그 이상으로 이루어지듯 누가 뭐랄 것 없는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굳이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 위에서의 각자의 시간을 서로의 시간과 조화시켜가며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 그 자체가 소중했다. 말 하지 않았지만 우리들 모두 각자의 시간 앞에서 점점 진솔해지고 있었다.

I-44주변에는 아이들이 선호하는 버거킹은 없고 맥도날드뿐이다. 미국 문화를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화가 맥도날드 문화라지만, 길 위에 여행자들에게 문화는 대안 없는 음식일 뿐이다. 그동안 맥도날드 성공의 첫 번째 요소라는 표준화는 이제 저렴하고, 성의 없는 음식이라는 의미로 대체되었다. 미국에 와서 감동적인 맥도날드를 만난 적이 없었다. 딱딱하게 냉동된 패티와 자동으로 햄버거를 만들어주는 기계의 절묘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맥도날드는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참아야 하는 음식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도날드에 대한 속단은 위험하다. 그들이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 모세혈관처럼 자리잡게 된 것은 분명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맥도날드는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만은 유지한 채, 지역마다 고유의 문화와 결합하고 있었다. 세도나의 맥도날드가 그랬고 미주리의 맥도날드도 그랬다. 지역마다 가격이나 피클 맛이 달랐다는 것은 맥너겟이 버거킹보다 비쌌다는 사실만큼이나 놀라운 발견이었다.

길이 소중한 것은 그것이 이르는 곳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꼭 내게 기쁨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이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더할 수 없이 좋다. 미주리 주로 넘어와서 2시쯤 점심을 먹기 위해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4인용인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2인용 테이블이 대부분인 매장 안은 붐볐다. 1인용인 탁자에 홀로 앉아서 햄버거를 드시는 연세 지긋한 노인분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주문을 하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처럼 등이 굽은 할머니가 우리 앞에서 주문을 하고 계셨다. 워낙 작은 소리여서 잘 알아듣지 못하자 몇 번씩 같은 과정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자 뒤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서 자기가 직접 주문을 받았다.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가면서, 할머니가 음식을 선택할 때마다 최선의 선택이라고 찬사까지 보내면서 말이다. 주문을 마친 할머니가 앉지 않고 서서 기다리자 이내 할머니의 음식을 들고 나와서 환한 미소와 함께 배웅까지 했다. 우리 어느 시골 음식점에서 동네 어른을 모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표준화와 효율성을 전면에 내세운 미국의 맥도날드에서 벌어진 일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통통한 체형에 촌스러운 금테 안경을 쓴 그 청년은 우리의 주문과정에서도 똑같은 미소와 친절을 보여주었다. 내가 주문받는 직원의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또 어디선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나타나서 직접 주문을 받으며, 할머니의 주문에 보냈던 찬사보다 더 강한 찬사를 보내주었다. 효진이의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러 가서, 남은 음식을 싸갈 종이백을 달라는 말을 다른 종업원이 못 알아듣자 번개 같이 뛰어나와 자신이 직접 챙겨주기까지 했다. 나오면서 다 먹은 것들을 휴지통에 넣고 있는데, 조금 양이 많아서 내가 더디자 또 어디선가 나타나서 도와주었다. 마치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의 홍반장 같은 캐릭터를 미주리에서 만난 것이다. 그것은 단지 판매를 위한 친절이 아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미국인들의 자동화된 미소나 입에 발린 친절이 아니라 진짜 순수한 친절이었다.

그의 친절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은 나만은 아니었나보다. 아내와 아이들도 그의 친절에 대해서 차에 오르고 나서도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일을 잘하는 것은 단지 기능적인 숙련도나 속도만을 의미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즐기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만난 맥도날드의 그 청년은 정말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 모두의 오후가 내내 즐거웠으니 말이다.

효진이의 여행 일기

사진을 정리하며 마신 맥주(). 맥주는 언제나 옳다.

세인트루이스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여행일기와 자료를 정리하는 사이 아내와 빨래를 했다. 딱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빨래는 계속 나온다. 한 여름의 여정이라 빨래는 피할 수 없었고, 짐을 줄이겠다고 겉옷과 속옷의 개수도 빨래를 전제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날 빨래는 그날그날 빨았다. 문제는 빨래를 하는 것보다 빨래를 말리는 일이었다. 아내가 욕실에서 손빨래를 해서 주면 내가 있는 힘껏 빨래를 짜고, 펴서 널었다. 한 도시에서 이틀 정도만 머물러도 숙소에서 말리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채 마르지도 않은 빨래를 걷어서 차 안에 널어야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빨래를 말리는 차가 우리 차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캠핑카나 트레일러 창으로 보이는 그들의 빨래를 보며 우리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번 횡단여행 내내 빨래와 더불어 다녀야 할 듯하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내일 가야할 곳을 정리하고 그곳의 주소와 그곳들 사이의 거리를 다시 한 번 체크했다. 떠날 때 가지고 온 생수 한 박스가 바닥이 났다. 날이 더운 탓도 있었지만 컵라면도 물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숙소 근처에 대형 편의점이 있어서 물을 사러 갔는데, 아주 매력적인 가격의 맥주가 보였다. Hamms라는 맥주였는데 3캔에 1.59달러였다. 처음 보는 맥주였는데, 맥주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무엇보다 맥주가 지닌 그 시원한 목 넘김이 필요했다. 사진을 정리하며 두 캔을 마셨더니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다.

미국은 맥주가 싸고 많다. 코스트코에서 24병 한 박스가 종류에 따라서 19-22달러 정도 하니 병당 1달러가 안 된다. 처음에는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등을 마시다가 동서가 출장 오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져온 사무엘 아담스에 감동해서 그것을 마시다, 결국 블루문을 마셨다. 냉장고에 차게 해두었다가 아내와 <나는 가수다>를 보면서 마시는 맥주는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내가 출발할 때 집에 있는 블루문 6병을 차에 싣는 것을 깨진다고 내려놓고 나서는 첫날부터 뼈저리게 후회했었다. 그리고 이레 만에 그 차가운 목 넘김을 만난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맥주에 감동했다. 맛보다는 맥주라는 이름, 그 차가운 목 넘김에 흐뭇해졌다. 세인트루이스에서도 맥주는 옳다.

 

  1. ‘명백한 운명’은 1845년 저널리스트였던 존 오설리번(John O'Sullivan)이 처음 주장했고, 제임스 녹스 포크 대통령에 의해 미국 영토 확장의 논리로 재천명되었다. ‘명맥한 운명’이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인종적 우월성을 지닌 앵글로색슨의 확장은 신이 부영한 명백한 운명이라는 영토 확장의 논리다.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오리건의 병합 과정에서 영토 확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로 사용되며, 이후 인종차별 문제까지 확장되어 활용된다. [본문으로]
  2. 숱한 파리 조약이 있지만, 이 파리조약은 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로 영국‧프랑스‧스페인이 체결한 조약을 말한다. 이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동쪽의 루이지애나를 영국, 서쪽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넘기고 북아메리카에서 영토를 잃는다. 그 대신 스페인은 영국에게 플로리다를 넘긴다. 식민지 전쟁에서 프랑스의 몰락을 가져오는 조약이다. [본문으로]
  3. 1700년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을 중심으로 한 식민주의자들은 인디언을 몰아내기 위하여 ‘머리가죽 상금’, 즉 원주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오는 사람들에게 상금을 지급한다. 1703년에는 개당 12파운드, 1722년에는 개당 100파운드까지 폭등했었고, 벤저민 프랭클린조차 1763년 인디언 머리 가죽 상금안을 승인해달라고 의회에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고 한다.(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96) [본문으로]
  4. 미국의 총기문화의 악명은 알려진 것보다 심각하다. 그 심각성은 이라크전에서 미군 4,500명이 사망한 같은 기간 동안 미국 내에서 총기사고로 희생된 사람 수가 170,000명인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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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미술관 혹은 버드와이저

84일 세인트루이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세인트루이스의 아침은 평온했다.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의 강바람은 부지런히 무더위를 데려가고 있었다. 인색했던 오클라호마의 숙소와는 달리 세인트루이스의 숙소는 넉넉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아침은 마음부터 든든했다. 여행은 여드레째 접어들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족들은 아직 지친 기색이 없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세인트루이스는 정형화된 이미지였다. 미리 읽어둔 자료들을 통해서 게이트웨이 아치, 버드와이저 공장,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이미지를 내 나름의 지도 위에 그려놓고 있었다. 일단 그려진 이미지는 그것의 정확도와는 무관하게 견고해진다. 견고한 선입견은 단호하고, 단호한 만큼 위험하다. 정말 우습게도 나는 귀에 익은 미국 도시들을 모두 같은 이미지로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분주하고 혼잡스럽거나 어둡고 무질서했다. 세인트루이스도 역시 그랬다. 분주하고 혼잡스러운 대도시 이미지 위에 세인트루이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모아 그려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하지만 견고했던 이미지들은 이미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The Cathedral Basilica of St. Louis)으로 가는 길에 산산이 부서졌다. 세인트루이스는 미국 10대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편안한 높이의 집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아주 멋스럽게 낡아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제법 넉넉한 품의 나무들이 제 몫의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껏 달려온 도시들과는 또 다른 풍경이 빚어내는 여유로움에 차는 차대로 속도를 늦추고, 나는 나대로 여유를 부리다가 길을 몇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몇 번이나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까지의 경로를 다시 계산하며 조급하게 지시하던 사만다가 조용해졌다. 우리 앞으로 예상보다 큰 규모의 성당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 외부 전경과 내부

1914년에 완공되었다는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각주:1] 주변은 몇몇 고층 건물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고즈넉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의외로 성당은 한산 했다. 주차장을 찾지 못해서 성당 앞 도로에 차를 세우느라 식구들은 먼저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조금 늦게 성당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석조건물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건물 자체가 내뿜는 아우라는 지극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은 넓은 본당 좌우로 열주(列柱)들이 서 있었고 그 너머로 다시 측랑(側廊)이 배치되어 있어서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바실리카 양식이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공회장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건물 양식을 교회건물에 적용한 것이라고 하니, 2,500명도 많은 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 내부 돔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은 본당을 따라 들어가면 제단 앞 중앙에 큰 돔(dome)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작은 돔들이 연결되어 있는 이채로운 구조였다. 돔마다 둘레에 작은 창들이 나 있어서 그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신비롭기만 했다. 돔 안쪽으로 성경의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그 사이로 구원의 징후처럼 아스라이 부서져 내리는 빛이 감동적이었다. 성당 내부의 천정에는 곳곳에 금빛 모자이크로 성인(聖人)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지만 크고 작은 창과 그 안으로 강성하게 쏟아져 내리던 빛이 오히려 압도적이었다. 창마다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로 장식되었는데도 그것이 소박한 색과 형태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의 강성한 압도 때문이리라. 성당 안내 자료에 따르면, 성당 안에는 415,000개의 조각, 7,000개 이상의 색상으로 구성된 모자이크가 있다는데, 그것을 분별할만한 눈을 가지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그것은 그저 숫자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성당 내부도 들어오는 빛과 인공조명의 조화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엄숙함과 예술미

그곳에서 처음으로 파이프 오르간의 직접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밝은 귀를 갖지 못한 내게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극장판 12전율의 악보’(名探偵コナン 戰慄樂譜, 2008)[각주:2]였다. 그것은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에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 앞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늘 그렇듯 내 생각은 맥락도 없이 제멋대로다. 비록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명탐정 코난>을 떠올린 덕분에 파이프 오르간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듣는 듯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 가는 길에 본 오래된 주택과 수리 장면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에서에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St. Louis Art Museum)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잎과 가지에 시간을 넉넉하게 얹고 있는 가로수와 각기 자신의 시간을 건너왔을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을 바라보며 아내는 안타까워했다. 아내는 새것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세월의 연륜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오늘과 내일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잦은 전쟁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도쿄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미군의 폭격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매점과 지하식당으로 바꾸어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돈이 없어서 허물고 새 건물을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간직하고 그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조직에 대한 소속감이나 그 안에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기 때문에 기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 그러한 노력을 통해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었다. 오래된 것들을 단지 보존과 관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대상으로 소환하는 일, 그것은 그 안에서 스스로의 뿌리와 정체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그러한 면이 부족했던 것은 지독했던 식민지의 상처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자기 부정의 흔적이거나 왜곡된 가치의식 때문이리라. 새로움과 선취 혹은 선점을 통해 상대적 우위를 점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우리의 강박이 새로움에 대한 맹목적인 경사를 낳은 것이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달리다 사만다와 함께 길을 또 잃었다. 사만다가 정신을 차리고 데려다 준 곳은 최근 급성장해서 미국 내 11위권이라는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Danforth Campus)부근이었다. 그 맞은편에 포레스트 파크(Forest Park)가 있었는데, 미술관은 그 안에 있었다. 포레스트 파크는 1904년 세계무역박람회가 열린 곳이란다. 표지판을 따라 조금 언덕진 곳으로 올라가다보니 왼쪽으로 주차장이 있었지만 이미 만원이었고, 미술관 옆으로 주차할 곳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공사장이었다. 다시 차를 돌려서 올라온 길을 내려가다 보니 마침 차 한 대가 나가고 있었다. 주차를 하고 다시 그 길을 올라가서보니 미술관 앞으로 탁 트인 전망이 아름다웠다. 미술관은 확장 공사를 하느라 일부 가림막을 하고 있었지만 단아한 석조건물과 그 앞으로 펼쳐진 풍경만으로도 무척 여유롭고 넉넉한 오전을 만들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미술관 전경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미국에서 본 미술관 중 가장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것은 미술관의 규모나 전시물의 많고 적음과는 별도로 그곳이 만들고 있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고흐, 피카소, 고갱, 쇠라, 세잔과 같은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슴 뛰는 공간이었다. 더욱이 그곳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고, 작품 30정도 앞에 그려진 선만 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플래시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진촬영도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러한 공간을 아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배려였다. 우리가 방문했던 시간이 한가한 시간이었는지 미술관은 한산했고, 전시실마다 소파나 의자가 놓여 있어서 여유롭게 쉬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내의 설명을 듣는 아이들. 바닥에는 접근 가능한 지점까지 선이 표시되어 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우리 가족들 모두 화집(畵集)으로나 보았던 작품들을 직접 보면서 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아내와 내게는 그것은 무척 가슴 뛰는 일이었다. 어려서 미술책에서 보던 그림들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않은가? 아내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작품마다 아주 천천히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관람을 했고, 나는 나대로 사진을 촬영하면서 뒤를 따라다녔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유명 전시회에 갔다가 작품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인파에 밀려다니다가 돌아온 몇 번의 경험 때문인지, 이곳의 이 한가한 속도는 무척 부러운 것이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2012년 완공을 예정으로 증축 공사 중이었지만 관람객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선을 효과적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호수만 적힌 전시실 하나하나를 찾아가며 그곳의 테마와 작품들을 연결하며 감상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2층의 대형 창문으로 바라본 미술관 앞 호수와 분수대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포레스트 파크와 고풍스러운 시가지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전경을 보면서 교토(京都)에 있는 시구라덴(時雨殿)[각주:3]의 진입로가 떠올랐다. 왼쪽으로는 큰 강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일본 전통 가옥과 전통 음식점이 멋스럽게 들어서 있던 그 길은 보도블록과 경계석에도 일본 전통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흐르는 강물소리와 전통가옥의 풍취 때문인지 채 십분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걷고 시구라덴에 들어설 때는 일행들 모두 이미 일본적인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을 보며 시구라덴을 떠올린 것은 두 공간 자체의 의미도 의미였지만 그곳에까지 이르는 과정이나 주변 공간과 어우러진 공간의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다.

미술관에는 작품만 보러가는 것이 아니다. 미술관은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아우라와 미술관에 간다라는 행위의 심리적 보상까지를 포함하여 그 모든 것을 취향에 따라 종합적으로 혹은 선택적으로 즐기기 위한 곳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과 공간을 관람자가 즐길 수 있도록 어떻게 구성해낼 것이냐, 무엇을 즐기고 가게 할 것이냐의 문제를 고심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페트론

가족 모두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작품들에 매료되어 미술관에서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은 모두 돌아보았다. 그런 까닭에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관람이 아니라 차라리 행운이었다. 그러다보니 미술관을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도네이션 박스에 도네이션을 하게 되었다. 입구 쪽으로 나오면서 오른쪽 벽을 보니 미술관 운영에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21세기의 페트론(patron)들이다. 사실 이러한 기부자들의 명단은 동네 공공도서관에만 가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큰 명분에 이끌리어 이름을 앞세우는 기부가 아니라 소박하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자신의 능력만큼 기부하는 문화는 무척 부러운 것 중의 하나였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문득, 세인트루이스가 게이트웨이 아치가 아닌 미술관으로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관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려고 보니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제 계획한 일정으로는 게이트웨이 아치를 거쳐 버드와이저 공장까지 돌아보는 것이 오늘 계획이었는데, 미술관에 매료되어 지나치게 지체했기 때문이다. 밝을 때 아치에 올라가서 세인트루이스 시내를 보고 싶었다. 버드와이저 공장 투어는 6시에 마치기 때문에 점심은 뒤로 미루고 서둘러 이동했다. 어제 밤에 계획을 짤 때에는 미술관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낼 줄은 몰랐다. 계획은 늘 어긋나게 마련이고, 보아야할 것은 볼수록 느는 것이 여행이니 서두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서부 개척의 시발점으로서 세인트루이스의 상징이 된 게이트웨이 아치(The Gateway Arch)는 높이와 밑면이 모두 192m인 대형 조형물이다. 주차장에서 아치까지 이어진 공원 옆으로 미시시피 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 조성된 나무 터널 산책로에는 한가한 속도의 산책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게이트웨이 아치 전경

게이트웨이 아치와 미국의 다른 조형물들의 높이를 비교한 엽서

마크 트웨인(Mark Twain) 덕분에 미시시피 강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강처럼 느껴졌지만 사실은 처음 보는 낯선 강일뿐이었다. 미시시피 강은 아메리카 인디언말로 위대한 강이라는 뜻을 지녔다. 길이는 6,210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고 그 유역은 324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다고 하는데, 왜 내 눈에는 그저 탁류가 흐르는 소박한 강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강 건너로 보이는 카지노 퀸(Casino Queen)의 모습은 중국 내륙의 어느 호텔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게이트웨이 아치 바로 아래에는 서부확장 기념관(Museum of Westward Expansion)과 정상까지 올라가는 트램을 탈 수 있는 시설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아내는 아치 정상에 올라가봐야 별것 없을 것 같은데 입장료(어른 10달러, 아이 5달러)까지 내면서 꼭 올라가야하느냐, 밖에서 보았으면 된 것 아니냐, 서부확장 기념관만 보고 가자고 계속 이야기했다. 여행이 진행되면서 초과되고 있는 여행 경비를 어떻게든 줄여보려는 아내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래도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올라가서 보고 별 것 없다고 느끼는 것과 올라가지 않고 신포도 바라보듯 별것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고 우겨서 결국 모두 올라가게 되었다.

트램을 타기 위해서 대기하는 승강장(), 아치 빌더들을 기리는 부조상(), 아치의 운행을 나타내주는 모니터(하)

게이트웨이 아치의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쪽과 북쪽에 있는 작은 트램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입장권을 사고 보니 7일 동안 유효하단다. 트램을 타기 위해서 남쪽과 북쪽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립공원도 아니고 7일 동안 유효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7일 동안 몇 번이고 탈 수 있게 하니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것인지, 이렇게 사람이 많이 기다리고 있는데 또 타러 오겠냐는 압력인지 잘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트램을 타고 정상에 올라가고 나서 보니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트램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줄 옆으로 게이트웨이 아치의 건설과정과 역사가 소개되고 있었다. 1947년 설계 공모를 통해 설계를 채택해 놓고 정작 착공은 1963년에 해서 1965년에 완공된 후, 1967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설계 채택 이후 마땅한 공법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지만 예산 확보 및 활용성 등의 논란이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이 되는 지점이다. 건설 과정의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을 따라가면서 보다보니 직원 한 명이 커다란 번호표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1부터 8까지 적힌 A4용지만한 크기의 번호표였는데, 그것은 타야할 게이트 번호였다. 트램을 타는 곳으로 갔더니 1부터 8까지 적혀있는 게이트 앞에 각각 5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트램이 도착해서 트램 안의 사람들이 내리면 기다리던 사람들은 벽으로 바짝 붙어서 그들이 지나가게 해주어야할 정도로 비좁았다는 것이다. 사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트램이 아치 내부로 운행되다보니 아치 안을 통과할 수 있게 크기가 제한되는 바람에 트램 내부가 매우 좁다는 것이다. 동양 사람들이 타도 비좁을 공간에 덩치가 큰 미국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풍경은 딱하기까지 했는데, 내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익살스러웠다. 무안해서 그러는 것인지 천성이 낙천적인지 따라가서 묻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트램에는 미국인 한 명과 같이 타야했는데 너무 비좁아서 다섯 명의 무릎이 닿을 정도였다. 그것을 타기 전에는 트램을 타면 올라가면서 밖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타서보니 트램은 꽉 막혀서 밖을 볼 수 없는 구조였고, 무척 답답했다. 같이 탔던 미국인도 머쓱했는지 어디서 왔느냐, 너무 좁지 않느냐고 물었다. 무엇보다 뚱뚱하고 덩치 큰 당신 때문에 너무 좁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너희 가족 네 명 때문에 좁다고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혼자서 웃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동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리면서 보니까 탈 때와 똑같이 사람들이 벽으로 붙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었다.

게이트웨이 아치 정상에서 촬영한 부시 스타디움

게이트웨이 아치 정상에서 촬영한 옛 법원청사

트램에서 내려 짧은 계단을 올라가서 보니 정상도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었다. 남쪽과 북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아주 작은 몇 개의 유리창을 통하여 아치 주변을 둘러보거나, 최정상 630피트(192m) 표시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뿐만 아니라 올라가서도 불편하고 크게 볼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치 앞으로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각주:4]로 유명한 옛 법원청사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장 이 보였고, 반대편으로는 미시시피 강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족들도 아치가 보여주는 풍경을 만끽하며 재미있는 표정으로 사진도 찍었지만 정상에 머무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트램을 타고 내려오면서 아내는 그것 봐라 별 것 없지 않느냐고 이야기했고, 아이들과 나는 그런 소리도 와봤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정상에 올라갔다와 보니 입장권에 적힌 7일 동안 유효하다는 말의 속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7일이 아니라 70일을 줘도 체험은 한 번으로 족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아치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그제야 배가 고팠다. 그도 그럴 것이 4시가 다되어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념품점 안에서 파는 머핀과 빵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으면서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서부확장 기념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서부확장 기념관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부터 1890년 서부개척 종료까지의 역사와 기념물이 전시된 공간이었는데, 기대보다는 소박했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보았던 서부의 이미지를 밀랍 인형 등으로 소박하게 재현해 놓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지난번 옐로우스톤 여행을 할 때 코디에서 보았던 다양한 유물과 자료들을 이미 보았던 터라 이곳의 전시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부확장기념관 내부. 총칼과 측량 기기로 대표되는 서부확장의 폭력성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아치를 나와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이 무척 평화로웠다. 버드와이저 공장 투어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모두들 서두르고 있었는데도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도 없는 숲과 나뭇길이어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보존해야하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고, 들어가는 것이 통제되는 그런 숲이 아니라 생활공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숲, 굳이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각주:5]을 운운하지 않아도 보존해야할 우선순위임은 분명했다.

여유를 부리며 걷다보니 주차장 옆으로 이드스 다리(Eads Bridge)가 보였다. 1874년 완공 당시에 1,964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아치교였고, 철강을 사용한 첫 다리였단다. 세인트루이스와 세인트루이스 평원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완공된 후에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코끼리를 데리고  건넜다고 하는데, 코끼리는 안전하지 않은 구조물은 피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드스 다리는 게이트웨이 아치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인트루이스의 상징이었다는데, 지금은 경전철만 오가는 이야기 속 다리가 되었다. 이 다리는 당시 미시시피 강에서 배를 운행하면서 수익을 얻던 선박 운행 업자들의 반발과 요구가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의 거리나 높이 등에 있어서 제약이 많았고, 그 제약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공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건설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됨으로써 건설한 회사는 1년 만에 부도를 냈다고 하니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효율성과 새로운 이익의 창출을 위해서 다리를 세우려했던 업자나 미시시피 강을 오가며 생활했을 선박 운행 업자들 모두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미시시피 강은 무심한 표정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버드와이저(Budweiser) 공장 투어를 하기 위하여 사만다에게 주소를 알려주고 부지런히 달려갔다. 사만다가 웬일인지 헤매지 않고 잘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옛 법원청사 앞이었다. 아마 미리 적어둔 주소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공장 투어가 가능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는데, 유진이가 내려서 사람들에게 물어오겠다고 나섰다. 사만다에 의지해서 찾아가야하는데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도 주소를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니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유진이가 먼저 나선 것이다. 소심하고 잘 나서지 않는 유진이가 저도 급했는지 먼저 나선 것이다. 옛 법원청사를 구경하고 있던 흑인 커플에게 달려가더니 길을 물어온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며, 찾아가기 쉽단다. 유진이가 일러주는 대로 달려가 보니 붉은 벽돌의 버드와이저 공장이 보인다. 유진이가 사만다보다, 아빠보다 낫다.

버드와이저 공장

1891년에 건설한 세계 최대의 맥주 양조장이라는 버드와이저 공장에 막상 도착하고 보니 투어를 참가하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몰랐다. 이럴 때에는 일단 부딪쳐서 알아보아야 한다. 가장 가까운 입구를 찾아서 들어가서 물었더니 직원이 투어장소와 입구를 알려준다. 공장을 끼고 반 바퀴쯤 돌고 보니 입구가 보였다. 다행히 시간 안에 도착한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가 보니 아직 투어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기다리고 있으란다.

기다리는 곳은 버드와이저 기념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투어를 마치고 나오면 문을 닫을지 몰라서 미리 둘러보기로 했다. 맥주와 상관된 상품들에서부터 단지 버드와이저라는 상표만을 차용한 상품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상품들이 있었다. 미국 관광지 곳곳에서 코카콜라, M&M's, 허쉬 초콜릿 등과 같은 유명 제품의 기념품점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곳처럼 다양한 상품이 저렴하게 판매된 곳은 없었다. 확실히 버드와이저 기념품점은 다른 기념품점에 비하여 가격이 저렴했고, 맥주와 관련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화와 관련 상품들이 다채롭게 제공되어 있었다. 가격이 무척 저렴한 것으로 보아 수익보다는 자신들의 로고가 새겨진 상품을 보급함으로써, 간접홍보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버드와이저 기념품점과 공장에 전시되어 있는 맥주 운반용 트럭과 마차.

기념품점 앞에는 20세기 초에 맥주를 배달했을 작은 트럭이 전시되어 있었다. 빨간 색깔에서부터 단순한 계기판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해질 무렵 동네에 트럭이 들어서고 일을 마친 사람들은 하나 둘 트럭 주변으로 모여들어 웃고 떠들며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여유를 상상하며 혼자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영화 <쇼생크 탈출>(1994)에서 듀프레인이 교도관의 세금을 경감시켜주는 조건으로 작업하는 동료 죄수들과 맥주를 제공받는 장면이 떠올랐다. 옥상 위에서 방수 공사를 하다가 제공된 맥주오랜 감옥생활에 그저 기억 속의 맛으로만 떠올리던 맥주를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던 근육질 사내들의 뒤쪽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들이 쥐고 있던 차가운 맥주병의 촉감만은 아직도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이처럼 내게 맥주는 선명한 이미지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옥상에서 함께 마시던 캔맥주의 풍경은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퇴폐적인 아름다움이다. 불난 앞집의 절박함과는 무관하게 타오르는 불빛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기타를 치며 미숙한 두 청춘이 나누던 은빛 캔맥주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라. 세계와 그 안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없는 미숙한 청춘의 상처가 반짝거렸던 이 소설의 압도적인 이미지는 나오코의 불어동사표이거나 미도리 집 옥상의 캔맥주였다.

그 흐뭇함을 알고 있는지 트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신제품 시음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의 다른 음식처럼 맥주도 양이 많아서 시음하라고 주는 것이 300cc 정도로 흐뭇한 양이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나니 하루 종일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조급했던 마음이 어느새 스러지고, 한결 여유로워졌다.

시간이 되자 안내하는 아가씨를 따라서 투어가 진행되었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는 투어코스는 걸어서 진행 되었는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한 호프의 향이 느껴졌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은 공장이라고 하기에는 더 없이 멋스러웠다. 오래된 건물마다 개성 있는 조형물들이 건물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것을 소개하는 직원들의 표정에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맥주도 맥주였지만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자세와 자부심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니, 맥주에 대한 신뢰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맥주를 만드는 과정과 포장까지 보여주고, 실제 생산 라인 곁을 걸어보게 함으로써 투어는 끝났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여러 대의 셔틀버스에 나눠 타고 시음장으로 이동했다. 옆에 앉아 있던 유진이가 앞 버스 후미에 적힌 문구를 보란다. 

Making Friends is Our Business

버스 뒤에는 ‘Making Friends is Our Business.’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적혀있었다.시음장에서는 먼저 작은 봉지의 프레쩰(pretzels)을 집어 들고 카운터에 가서 자신의 취향대로 맥주를 선택하면 두 잔까지 무료로 마실 수 있었다. 미국의 음주문화는 매우 엄격하여 21세가 되지 않으면 술을 마실 수 없고, 마시다 적발되면 부모가 벌금을 내야한다. 그래서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 위해서는 무한리필 음료수대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다섯 종류의 맥주를 무한리필로 제공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세 번째 잔을 받으러 갔더니 몇 잔째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제한을 두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진행되나 보려고 세 잔째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두 잔까지만 제공한단다. 음주운전 문제나 지나치게 취하는 것을 막고, 말 그대로 시음에 의미를 두려는 조치로 보였다.

시음장의 아이용 음료수(), 안주용 프레쩰(), 시음장 전경()

우리 부부에게 버드와이저 맥주는 사연이 있는 맥주였다. 신혼 초에 집 앞 상가에서 하나당 500원에 과격하게 세일을 하는 버드와이저 맥주를 한 박스 구입했던 적이 있었다. 무엇이든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 국산맥주보다도 싼 버드와이저는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박스를 사다두고 아내와 한 병씩 나누어 마셨던 기억이 나서 아이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재미있어 했다. 그때 우리가 오늘처럼 버드와이저 공장에 직접 와서 시음을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고,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멋스럽게 지어진 세인트루이스 카니덜스 구장인 부시 스타디움(Busch Stadium)을 지나왔다. 부시(Bush)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부시 스타디움인가하고 농담을 하며 돌아왔지만, 철자가 다르다. 사실 이 구장의 이름은 버드와이저 맥주를 생산하는 앤호이저 부시 컴퍼니(Anheuser-Busch Companies)에서 따온 것이란다. 이런 맥락이라면 세인트루이스는 내게 버드와이저로만 기억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참 같은 부시인데 누구는 <화씨 911>을 떠올리게 하고, 누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만 이렇게 모아서 고맙게 제공한다. 부시라는 이름이 이토록 다른 이미지를 주는 것을 보면, 역시 맥주와 야구는 힘이 세다.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넉넉하게 남아있어서인지 어제 한 번 지나가서 그런지 길이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 세인트루이스에 가면 반드시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고, 유니언스테이션을 가보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은 먹지 못했고, 유니언스테이션을 지나가면서 보았을 뿐이다. 그래도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이 길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조금 익숙해지면 떠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이제 하루만 되도 정겹기까지 한가보다.

여행은 낯선 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기 위한 것이다. 이제 조금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은 시카고로 달려갈 것이다.

 

  1. 바실리카(Basilica)는 중앙의 폭넓은 본당과 좌우로 각각 일 열의 측랑으로 구성되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가톨릭 성당의 원형을 이루는 건축양식이다. [본문으로]
  2. 이 작품은 평생을 같이한 피아니스트와 조율사의 이야기였는데, 친한 사람들끼리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해와 오해가 중심 모티브였다. 절대음감을 가진 조율사 후와 타쿠미는 아들을 잃고 평생해온 조율사의 일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네 명의 음악가를 차례로 살해하고 피아노 조율을 할 수 없게 한 평생지기 도우토모와 자신이 관장으로 있는 도우토모홀을 없애버리려 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도우토모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은 조율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은 나이가 들면서 절대음감을 잃고 음을 틀리게 조율하는 후와 타쿠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도우토모의 배려였다는 것은 나중에 밝혀진다. 이 작품은 평생지기로 서로 잘 안다고 믿고 있기에 벌어지는 실망과 오해의 모티브를 잘 살리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서사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본문으로]
  3. 시구라덴은 닌텐도가 만든 교토 소재의 작은 테마파크로서 일본전통의 백인일수(百人一首) 게임을 인터랙티브 게임으로 변형하여 구현하고 있다. 와카(和歌)를 기반으로 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몰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게임의 정교함이나 완성도보다는 백인일수 게임에 빠져들게 하는 스토리텔링 구성이 돋보이는 테마파크다. 시구라덴은 화투와 유희왕 카드 게임 등을 만들고, 닌텐도 DS로 유명한 닌텐도가 운영하는 곳인데, 원래 백인일수 게임도 카드 게임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본문으로]
  4.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은 1857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가 흑인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고 내린 판결을 말한다. 드레드 스콧은 자유주였던 일리노이 주와 미네소타 주에 살았음을 근거로 자신이 자유임을 인정해달라고 연방재판소에 요구하였다. 연방최고재판소는 노예는 시민권을 가질 수 없으니 흑인은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고, 따라서 자유주에 거주했다 하더라도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노예제 논쟁을 격화시켰고, 남북전쟁 발발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본문으로]
  5.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자연보호운동이다. 자발적인 기부나 증여 등을 통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구입하여 보호하고 관리하는 환경운동이다. 일본에서 <이웃의 토토로>에 배경이 되는 ‘토토로의 숲’을 구입하여 보존한 예도 그 중 하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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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일 세인트루이스-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카고는 이번 여행의 중간지점이다. 동부와 서부의 경계는 세인트루이스였지만, Route66의 시작인 시카고까지를 Route66 여행, 시카고 이후부터 워싱턴까지를 동부여행이라고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동안 2,566마일(4,106)[각주:1]을 달려서 시카고에 도착을 했다. 여행의 전반부를 마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내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감기몸살까지 시카고에 데려왔다.

세인트루이스에서 334마일(534)을 달려오면서 나랑 유진이는 콧물을 훌쩍이며 추워하고,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뒤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 때문에 더위를 호소했다. 같은 차를 타고 있으니 에어컨을 끌 수도 켤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시카고 초입부터 교통체증으로 막혀서 우회하는 바람에 7시간 30분 정도를 꼼짝없이 차를 타고 있어야했다. 급한 대로 후드로 반바지 입은 다리를 감싸고, 유진이는 후드를 입기도 했지만 시카고에 도착할 때쯤은 근육통과 함께 몸살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정에 맞추어 숙소를 모두 미리 예약해둔 형편이었고, 하루 일정이 어그러지면 다음 일정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물러설 곳이 없으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동하는 날은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워서 조금 일찍 세인트루이스를 떠났다. 볼 것이 많은 시카고이니 일찍 도착해서 조금이라도 봐두면 내일 일정이 한결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밤에 검색을 하다가 링컨 기념관이 도중에 있다는 정보를 얼핏 보았다. 링컨기념관은 워싱턴에서 돌아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메모도 해두지 않고 들를 예정도 없었다. 세인트루이스를 떠나자마자 어제 일정이 조금 힘들었는지 몸살기운 때문인지 모두들 차 안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그때 표지판이 보였다. 어제 인터넷에서 본 것이 저것인가 망설이다가 조금 쉴 요량으로 길을 내려섰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있을 줄 알고 찾아갔는데, 건물은 보이지 않고 고즈넉한 숲길만 계속되었다. 한참 만에 발견한 입구를 발견하고 보니 조용한 숲이었다.

Lincoln Memorial Garden 트레킹 코스(), ‘The better part of one's life consists of his friendship'()

‘Abraham Lincoln Memorial Garden and Nature Center’라는 표지가 입구에 서 있는 숲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링컨이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이 숲은 링컨이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란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국인들이 얼마나 링컨을 존경하고 흠모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연관에도 링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고, 그것을 크게 허물하지 않는 분위기만 보아도 그들의 링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퇴임 후에 존경 받는 대통령이 별로 없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근처를 둘러보고 잠시 쉬는 사이 나는 시카고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는 고등학교 동창 형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간다고 전화를 해야 했지만, 가족 전체가 움직이고 있고, 친구가 부담을 가질까봐 연락을 하지 않고 출발을 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카고를 들르는데 연락하지 않는 것도 서운한 일일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숙소도 따로 잡아두었으니 얼굴 정도 보면 될 일이었다. 형식은 몇 년 전에 뉴욕지사에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몇 년을 근무하고 나서 다시 시카고 지사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던 집이 이 친구 집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였고, 부모님은 가게에 계셔서 집에는 착한 동생들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방과 후에 이 친구 집으로 가서 라면도 끓여먹고 수다도 떨면서 놀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새롭다. 형식은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가장 팝음악에 정통해서 이따금 귀한 팝음반을 구해서 들려주며 설명을 해주기도 했었다. 가족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카고로 달렸다.

사만다가 알려주는 바로는 시카고가 불과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기 때문인지 대도시 입구라서 그런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차가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사만다는 차가 막히면 우회로를 권한다. 얼바인에서 LA를 오갈 때에는 사만다의 우회가 현명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길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돌면서 구경이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사만다가 권하는 길로 내려섰다.

우회도로를 내려서고 보니 시카고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큰 정원수와 멋스러운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럭셔리한 주택단지에서부터 조악한 그라피티(graffiti)로 흉물스러워진 초라한 건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게 사는 모습이 가는 곳곳마다 이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의 상태와 사는 모습이 일치했던 것인데, 럭셔리한 주택가의 도로와 그렇지 못한 곳의 도로 상태가 사는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도로는 대가를 치루지 않더라도 그 혜택에서 배제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공공재(public goods)가 아니던가? 극과 극을 아주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시카고에 우리는 그렇게 들어가고 있었다.

시카고 금요일 오후 정체(), 전철과 도로가 함께 달리고 멀리 시어스 타워가 보이는 시카고()

시카고는 미국 3대 도시이고 가장 미국적인 도시로 불리지만, 내게는 <ER>[각주:2]의 춥고 외로운 도시일 뿐이었다. <ER>은 어둡고 안개가 낀 병원 밖의 풍경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병원 안의 긴박함이 늘 대비되는 드라마였다. 근무를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전철에 오르던 마크 그린의 모습이 유독 춥고 외로워 보였었다. 그래서인지 시카고 시내에 접어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마크 그린이 서 있을 것 같은 도로와 나란히 서 있는 전철역이었다. 아내에게 <ER>이야기를 하자 아내도 <ER>을 함께 보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무척 분주했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한 것이 없었던 그 막막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과로와 박봉에 시달리면서 자기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결혼마저 희생하고 있던 마크 그린을 보면서 근거 없는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배우인 조지 클루니가 맡았던 더글라스 로스보다 머리도 벗어지고 유약해 보이는 마크 그린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언터처블>의 계단 장면으로 유명한 유니언역(), 시카고 시내()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에 진입하자 독특한 건물들이 압도해왔다. 1871년에 시카고 화재(Great Chicago Fire)가 일어나서 도심의 반 이상이 소실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롭고 실험적인 건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오히려 그 건축물들이 시카고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행운이든 불행이든 그것을 맞이하는 변방 늙은이(塞翁)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쉽지는 않으리라. 1871년 화재를 당했던 사람들에게 2011년 시카고의 모습이 뽕나무밭(桑田)이든 바다(碧海)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은 그곳에서 불행이 아닌 행운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읽으려는 인간의 의지와 결의가 아닐까?

시카고의 무서운 주차비(), 미리 정산을 하고 나가야 하는 주차시스템()

시카고 시내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는 듯 제각기 개성을 뽐내며 대형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여행안내 책자에서 보았던 건물들을 찾았고, 찾을 때마다 환호했다. 이미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고, 야간 투어를 한다는 네이비 피어(Navy Pier)로 갔다.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주차비가 1시간까지는 12달러, 1시간에서 2시간까지는 16달러, 2시간에서 3시간까지는 20달러다. 시카고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알 카포네(Al Capone)가 아니라 주차비였다.[각주:3] 그나마 공사 중인 도로가 많고,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몇 바퀴 돈 끝에 네이비 피어 안에서 주차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근에 주차 가능한 건물에 주차를 한 것이다. 입구 쪽에서 112달러로 보고 들어갔는데, 주차하고 내려와서 표지를 보니 1시간까지가 12달러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비싸도 하루에 5달러였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보다가 착각한 것이다.

주차장을 나와서 고가도로 밑을 지나서 네이비 피어까지 걸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몸은 물 먹은 솜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붉은 벽돌로 교각을 만들어놓은 고가도로가 시카고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그 아래에 거리의 악사라도 있으면 더 멋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색소폰을 연주하는 흑인악사가 보였다. 사진을 찍었는데 밤이고 빛이 부족한 공간이라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분위기처럼 느껴졌다. 시카고는 단단해 보이는 붉은 벽돌, 마크 그린의 겨울 전철, 미시건호의 안개와 바람의 이미지였는데, 고가도로 덕분에 거기에 흑인 거리 악사와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이미지를 더하게 생겼다.

네이비 피어 입구 쪽의 양쪽 흉상 NICE(), SHOE()과 안쪽의 브론즈()

네이비 피어의 게이트웨이 파크(Gateway Park) 입구 쪽에 구두를 입에 물고 있는 ‘SHOE’와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NICE’가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쪽으로 3-4인용 청동 소파와 일인용 소파가 거실처럼 놓여 있었다. 구두 한 짝을 입에 물고 있는 신사의 모습이 재미가 있었는지 아이들은 ‘SHOE’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입구에 나란히 양쪽으로 설치된 점과 타이를 맨 신사라는 점 등으로 보아 두 작품은 독립된 작품이지만 동시에 한 세트처럼 보였다. 구두를 입에 문다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두의 관습적인 의미가 결코 좋을 리 없을 것이고 입은 말과 상관된다고 할 때, ‘SHOE’는 말의 신뢰도나 수준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NICE’에서는 두 개의 어긋남이 보였다. 활짝 웃고 있지만 가면처럼 느껴지는 얼굴의 어긋남과 그 상태를 ‘NICE’라고 표현하는 또 다른 어긋남이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NICE’가 무척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오래 기억되었다. ‘SHOE’가 구두 한 짝에 포인트를 두는 제목이라면, ‘NICE’는 웃음/가면의 어긋남이라는 상황에 대한 비틀기라는 점에서 대비가 되고, 그래서 한 세트로서 즐길 수 있는 작품들처럼 느껴졌다. 그 안쪽의 청동으로 거실처럼 꾸며 놓은 작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유쾌한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앉는 것이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안내문을 보니 앉으란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그곳을 즐기는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이렇게 향유자들이 자연스럽게 앉아서 작품을 즐기는 것은 보면 이 작품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구부러진 호’(Tilted Arc)[각주:4]와는 달리 대중성을 제대로 파악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었다. 설치미술과 대중적 요구의 상관관계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네이비 피어로 들어갔다.

시카고는 거대한 호수인 미시건호를 끼고 있다. 처음 본 사람들이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넓다는 미시건호를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 네이비 피어다. 네이비 피어에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와 수상택시(Water taxi) 등을 운행하는 선착장과 놀이기구 그리고 식당과 각종 상점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미시건호에서 출발해서 시카고 강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오며 강변의 건축물들을 즐기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를 타기로 했다. 저녁을 먼저 먹고 야경을 볼 것인지 615분 것을 바로 탈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해가 있을 때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615분 티켓을 끊었다. 여러 종류의 크루즈가 있었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아 보이는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를 선택했는데, 어른은 31.61달러, 어린이는 16.35달러였다.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는 대표적인 아키텍처 크루즈로서 60분 동안 시카고 강 주변에 유명 건축물들을 둘러보는 투어였는데, 동승한 가이드가 건물의 내력과 현재 어떻게 활용되는지 등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해주었다.

출항 전 주의사항을 들려주는 선장과 수화로 통역하는 가이드(), 열정적인 설명으로 압도하는 가이드()

선착장에서 승객이 모두 탑승하자 선장이 운행 중 주의 사항을 뱃머리에 나와서 직접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옆에 가이드가 서서 그 내용을 일일이 수화로 전달해주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유난히 돋보이는 곳이 미국이다 보니 이제는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보인다. 디즈니랜드에서 뮤지컬 <알라딘>을 볼 때, 두 가지에 놀란 적이 있었다. 하나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수화로 공연 내용을 전달해주는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휠체어를 타고 공연을 하는 뮤지컬 배우의 모습이었다. 역동적인 춤을 춰야하는 뮤지컬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연기하는 배우도 배우였지만, 그러한 배우를 차별 없이 기용하는 디즈니에 더욱 놀랐던 기억이 났다. 이러한 예외 없는 배려는 1990년 통과된 미국 장애인 보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의 결과라고 한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화장실에 장애인용이 없는 것은 모든 화장실이 장애인의 편의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미국 장애인 보호법은 일상생활에서 불편과 차별을 겪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특히 교육, 취업, 교통 등과 관련해서 구체적이고 엄격한 적용이 시행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생활공간은 물론 관광지나 놀이공원 등에서 활동적인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이 부러운 몇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Architecture Cruises에서 만난 건물들

배가 출발하자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한 가이드는 시카고 화재와 그 극복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강을 따라 배가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건물 내력담이 소개되었고,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었다.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이 60분 동안 끊임없이 등장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대적인 건축물들과 유서 깊은 건축물들 사이의 조화였다. 시카고 건축물의 놀라움은 그것이 높거나 현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것의 차별적 우위는 모두가 다르다는 것, 다르기 때문에 어우러질 수 있다는 조화의 역설에 있었다. 우리배의 가이드는 히딩크의 압박축구처럼 60분 내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압박해왔다. 겨드랑이에 땀이 밸 정도로 쉬지 않고 무엇 하나라도 더 설명하려던 가이드의 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아내도 그것을 느꼈는지 사진을 찍느라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는다고 내게 몇 차례 핀잔을 주었다.

배는 여러 개의 다리 밑을 통과했는데, 그때마다 다리 위의 사람들과 다리 위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다리 구조물들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벗겨진 만큼 부식되고 있었고, 석조교각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인지 갈 때와 올 때의 빛의 각도가 다르고 건물에 반사되는 모습이 달라서 같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사진을 부지런히 찍었지만 배가 가볍게 흔들리며 계속 움직였고, 더구나 빛까지 수시로 바뀌다보니 사진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가이드는 더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배를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 인도인들 때문에 모두들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들 자기들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당사자들만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크루즈를 마치고 나니 몸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그래도 네이비 피어에 내일 다시 오기 어려우니 볼 것은 보고 가야만했다. 피어는 미시건호를 따라서 길게 늘어선 식당들과 각종 상점들과 그 앞으로 넉넉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넓은 보도로 이루어 져 있었다. 즉흥 연주와 춤을 추기도 한다는데, 볼 수는 없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다보니 대부분 패스트푸드였다. 마땅한 것을 찾으려고 상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Build-A-Bear Workshop’이라는 재미있는 인형 DIY샵을 발견했다. 인형을 직접 만들고, 이름을 붙여주고,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고, 각종 옷과 액세서리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인형 DIY샵이었는데 아이도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더 많았다. ‘One for you and your bear’라는 콘셉트로 인형의 출생과 소유를 연관 지을 수 있는 각종 이야기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Build-A-Bear Workshop에서 곰인형이 완성되는 과정

지난 봄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때 Pier39 Bear Factory에서 효진이가 곰인형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그냥 데리고 나왔는데,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아내가 효진이에게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인형을 많이 사주고, 관련 업체에서 받은 것들을 가져다주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도 짐이 되는지 아내가 정리를 시작했고, 어느새 인형은 구입금지 품목이 되었다. 유진이의 춘옥이가 낡고 오래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쨌든 아내는 아이들에 관해서만은 늘 선명한 기억을 가졌다. 언니가 안고 자는 춘옥이를 늘 부러워하더니 효진이가 드디어 새로운 곰인형을 얻게 된 것이다.

새 식구 골디를 침대에 앉혀놓은 효진이. 막내는 나이를 먹지 않나보다.

30여 종의 곰돌이 모양 앞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안에 솜을 넣어주는 청년에게 가면, 청년은 아이에게 곰인형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묻고, 그것을 적어서 곰인형 가슴에 넣고,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라고 이야기하면서 곰인형의 속을 채워주고, 열린 부분을 간단하게 꿰매어준다. 효진이, 유진이 그리고 아내가 서서 청년의 설명을 듣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보였다. 완성된 곰인형을 받고 돌아서면 옷가지와 다양한 액세서리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옷과 액세서리까지 구입하고 나면 주변에 놓인 컴퓨터로 가서 출생신고를 하고 증명서를 발부받는 것이다. 매장을 둘러보고 곰인형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곰인형 자체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살아나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매력적인 것이었다. 역시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다. 그렇게 우리는 새 식구 골디를 맞았다.곰인형을 안고 상점을 나와서 둘러보아도 저녁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와 유진이는 계속 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띵하고 근육통이 심해졌다. 뜨듯한 국물 있는 것으로 원기를 보충하자고 결정한 후, 출발 전에 시카고에서 한식을 한번 먹자며 미리 찾아온 우래옥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미 830분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만약 찾아갔다가 문을 닫았으면 낭패였다. 전화를 해보니 10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9시까지는 와야 한단다. 다행히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부지런히 달려가 보니 우래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기 굽는 소리와 우리말이 소란스럽게 어우러져 향기로웠다.

메뉴를 받아든 우리는 약간 흥분상태였다. 먹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집 떠난 지 아흐레 동안 한식은 구경도 못했으니 메뉴만 보아도 좋았다. 몸살 기운이 있는 아이들과 나는 뜨듯한 국물로 갈비탕, 아내는 냉면을 시키고, 망설이다 찜닭까지 시켰다. 워낙 먹성 좋은 우리 가족이지만 조금 많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모두들 신나서 먹고 있는데, 몸이 많이 안 좋은지 유진이가 거의 먹지 못하고 있어서 국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며 깍두기를 얹어주니 먹기 시작했다. 우리가 늘 전생에 늑대였을 것이라고 놀릴 정도로 닭은 좋아하는 녀석이 찜닭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뼈까지 발라 주었는데도 많이 먹지 못했다. 나도 입맛은 없었지만 빨리 원기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먹었다. 감기몸살은 잘 먹고 쉬면된다고 하니까 잘 먹고 푹 쉬면 낳을 것이라고 가족들을 위로하며 먹다보니 과식을 했다. 그래도 한식을 먹어서인지 조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역시 밥은 힘이 세다.

모처럼 한식으로 포식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11시가 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예약을 하면서 보니 시카고 시내는 숙소의 질에 비해서 가격이 비쌌다.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숙소를 예약할 때는 도심에서 가까울수록 숙박비가 비싸고, 가격대비 시설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숙소를 정한 것이다. 어차피 차로 이동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 몇 마일 떨어진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를 시카고 시내에서 떨어진 오헤어 국제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근처의 하얏트 호텔로 잡은 것이다. 하얏트 호텔은 모든 시설이 좋았는데 인터넷이 유료로 사용하는 기기 하나당 9.9달러를 받겠단다. 여행 중 모든 숙소가 인터넷이 무료였는데 이곳만 유료였다. 본인들의 방침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기기 하나당 요금을 받겠다는 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메일을 체크하고 내일 동선을 다시 점검해야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유진이가 쓰는 아이팟 와이파이는 이곳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과 나는 감기몸살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형식이네 식구와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는 기운을 차려야 했다. 모두들 침대에 누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내의 이야기에 모두 빵 터졌다. 그것은 오늘 우래옥에서 먹은 저녁에 대한 아내의 평가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앞으로는 먹는 것에 집중하자!”

앞뒤가 맞지 않는 문구였는데, 우리는 모두 공감하며 내일부터의 식사를 기대하니 흐뭇했다. 경비는 내가 집행하지만 매일매일 사용내역을 정리하면서, 당초 계획과 대비하고 있는 아내였다. 여행예산이라는 것이 늘 계획과 어긋나게 마련인데,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막아야지만 그 어긋남의 폭을 줄일 수 있었다. 그동안 먹는 것으로 어긋난 부분을 메워왔기 때문에 아내의 이 말은 내일부터 조금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숙소의 창밖으로 화려한 불빛들이 밤새도록 깜박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주차장에 차가 가득했다. 길 건너 대형 카지노 주차장이었다. 여행 내내 가는 곳마다 카지노가 성황이었다. 이곳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그토록 조용한 미국의 밤 문화에 카지노만 성황이었다. 미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1. 이동한 거리는 매일 자동차의 적산거리계(Odometer)를 확인하고 기록해둔 결과다. [본문으로]
  2. 1994년 NBC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던 의학드라마로 한국에서는 1998년에 SBS에서 방영된 바 있다. [본문으로]
  3. 동부에 비해서 서부에서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차비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동부 쪽 대도시의 경우에는 주차문제 때문인지 주차비가 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우노 피자 먹으러 가서 27달러짜리 피자를 먹기 위해 주차비 25달러를 지불하거나, 그 다음날은 밀레니엄파크에서 30달러의 주차비를 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차비는 아까웠다. 하지만 어쩌랴 내게 차를 이고 다니거나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본문으로]
  4. ‘구부러진 호’는 1981년 미국 연방시설청(GSA)의 ‘건축 속의 미술기금’으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다. 세라의 ‘구부러진 호’는 높이 3.6m 길이 36m의 작품으로 뉴욕 연방광장에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해 통행에 불편을 겪는다는 사람들의 청원에 따라 몇 년간의 소송과정을 거쳐 1989년 철거되었다. 시간과 장소의 특수성과 철의 소재적 특성에 주목했던 이 작품은 연방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연방광장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시간에 따라서 작품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 연방광장이라는 ‘장소 특정성’, 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무겁고 거친 느낌의 철이라는 소재적 특성이 어우러져서 완성되는 설치미술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향유자들의 거부로 폐기된 작품이다. 공공 설치미술 작품의 미학적 논쟁, 예술에 있어서 향유자의 몫, 대중성의 정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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