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문화올림픽, 잔치를 넘어 축제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평창 동계 올림픽에 대한 우려는 기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올림픽 시설로 인한 자연 훼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부터 막대한 예산 투입으로 인한 재정 부담과 경제적·문화적 효과에 대한 의문에 이르기까지 평창 동계 올림픽에 대한 우려는 개최 결정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더구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정투쟁을 벗어나지 못했던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 대한 학습 효과는 그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려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올림픽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창 동계올림픽에 거는 기대는 무엇일까?


벤쿠버, 베이징, 런던 올림픽에서 보았듯이 올림픽은 이미 단순한 스포츠 축전이 아니다. 근대 올림픽을 주창했던 쿠베르탱 남작도 올림픽의 핵심요소로 스포츠, 문화, 교육을 꼽았었고,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부터 스포츠와 동일한 방식의 예술경기대회를 개최해왔었다. 근대 올림픽은 이미 스포츠를 중심으로 문화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로 자리매김해왔다. 이러한 맥락을 전제로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과를 금메달 수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문화 올림픽(Cultural Olympiad)의 관점에서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면 앞서 걱정했던 것들은 대부분 불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문화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 풍요와 무형의 가치 그리고 브랜드 효과와 그로인한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는 실로 무한하기 때문이다. 다만 평창 동계올림픽이 문화 올림픽을 지향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제는 늘 그렇듯 어떻게 그것에 이를 수 있느냐에 있다.

정부도 이러한 인식 위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다양한 방안과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먼저 눈에 뛰는 것은 5G, IoT, UHD, VR, AI 등을 활용한 ICT올림픽으로 특화시키고, 실감콘텐츠, 차세대방송, 스마트한 서비스를 구현함으로써 올림픽은 물론 다양한 문화자산을 콘텐츠로 보급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코리아 프리미엄 창출, 올림픽 문화유산, 국민 참여와 대통합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한국의 정체성을 세계화하고, 강원도의 동아시아 문화벨트화, 전 국민의 문화 참여를 핵심 과제로 제시하였다. 첨단의 ICT를 활용한 세계 최고의 빠르고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스마트 올림픽을 구현하고, 이를 매개로 우리문화 및 콘텐츠를 선양하겠다는 의지다. 이러한 의지와 촘촘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평창 올림픽에 대한 낙관적 전망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제시한 계획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그것을 채워나갈 콘텐츠에 대한 지향이나 구체성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그 콘텐츠가 무엇이냐는 실체적 질문이라기보다는 보다 그것의 정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그러한 첨단 기술과 다양한 기획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어떤 성격의 콘텐츠여야 하는지, 그것을 왜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해야 하는지, 한다면 그것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토론 그리고 합의의 과정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 가장 아쉬운 지점이다. 문화올림픽은 올림픽을 전후로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것의 지향 가치나 향유 주체를 고려한 무엇을, , 지금 여기에서에 대한 납득 가능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선결과제를 풀어야지만 중장기적인 국가 문화정책과의 연동 가능성 혹은 연동 전략, 우리가 가진 문화적 역량을 올림픽으로 수렴·결집시켜 브랜드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 향후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전략과 같은 실체적인 접근이 가능한 까닭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정투쟁의 단기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동계 스포츠를 진일보시킬 기점이고, 우리의 문화역량을 선양할 수 있는 계기이며, 뚜렷한 지향 가치를 통하여 우리 문화 정체성을 규명하고 부각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장()’이 되어야만 한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살아있는 장으로서 문화올림픽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보여주기 위한 일방적인 잔치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될 수 있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정선, 강릉, 평창과 같은 개최도시 주민들이, 강원도민들이, 우리 국민들이 참여하고 더불어 즐김으로써 지지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올림픽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올림픽 기간 동안의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올림픽을 기점으로 지속가능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것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문화정책과 유기적인 연쇄 안에서 고려할 일이다.


런던 올림픽에서는 4년간 18만 건의 문화이벤트가 지속적으로 전개됨으로써 문화 올림픽으로서왜 지금 이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아우라(Aura)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규모 매스게임이나 물량공세로 압도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반문화적인 행사가 아니라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고양시킬 수 있는 콘텐츠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한 콘텐츠가 올림픽을 잔치가 아닌 축제로 만들기 위한 참여와 가치 그리고 즐거움의 문화적 실천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금메달을 목에 걸 우리 선수들만큼이나 기대되는 것은 올림픽 전후로 펼쳐질 문화올림픽 기간 동안 우리를 매혹시킬 콘텐츠가 아니겠는가?

 

<매거진서울스포츠> 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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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한류로부터 얻어야 할 것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한류(限韓流)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한령(限韓令, 중국 내 한류 콘텐츠 금지령)으로 인한 한류 콘텐츠 관련 기업의 주가 급락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한한류는 그 이전부터 예견되었고 예측했어야만 했다. 한한류는 명분상으로는 한국의 사드(THAAD)배치 결정에 따라 중국의 경고이자 위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국문화보호와 문화콘텐츠의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다양한 포석으로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한한령 이전에도 스크린쿼터로 외국영화는 한 해 30편만 개봉할 수 있고, 해외 드라마는 반드시 심의 통과 필증을 받아야하며, 골든타임에 외국 판권을 수입해 리메이크한 프로그램은 1년에 두 편을 초과할 수 없다는 등 외국 콘텐츠의 규제를 꾸준히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공식 문건은 없었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광전총국의 한한령은 한국 단체의 중국 내 연출 금지, 신규 한국 연예기획사에 대한 투자 금지, 1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한국 아이돌의 공연 금지, 한국 드라마·예능 협력 프로젝트 체결 금지,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중국 내 송출 금지 등이다. 진위나 강도가 어찌되었든 한류콘텐츠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의 타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 문화콘텐츠 시장에 들어와 있는 29000억원의 차이나머니를 고려할 때 투자금지 조항은 더욱 뼈아플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한한류의 진위 확인이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명분상 한한류는 정치, 외교, 안보, 경제가 종합적으로 맞물린 일이니 정부 차원에서 매우 치밀하고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정부가 사드 배치에 대한 의견을 국민에게 물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한한류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할 의향도 없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중국 역시 한한류를 공식 문건화 하지 않은 이유는 국제간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판단일 테고, 우리 정부 역시 대중국 외교, 안보, 경제 문제의 우선순위를 고려할 때 한한류의 문제가 최우선 선결과제가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류의 시작이 그러했듯이 한류콘텐츠업계 스스로 타개책을 마련해야할 것이다. 한류콘텐츠의 중국시장 편중을 개선한다거나, 지상파 채널이나 위성 채널을 넘어서는 스트리밍서비스와 같은 다양한 플랫폼을 확보한다거나,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이미 투자되어 있는 중국 자본에도 그 피해가 돌아가는 공멸의 길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 방안이 도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시장 편중은 한류 초기 일본 시장 편중과 성장-확장-쇠토의 주기가 상당히 유사해보이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중국은 단지 콘텐츠만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이다. 그들의 목적은 한국콘텐츠 산업의 성공신화와 전략을 활용내지 학습함으로써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콘텐츠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단지 판권을 사들여 중국 내에서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겠다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한국 드라마, 영화, 연예기획사에 투자해온 것은 한국콘텐츠에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선진 노하우를 속속들이 얻어가기 위한 거시적인 접근이었다. 결국 한한류의 문제도 한류와 연관된 모든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한류는 자발적인 문화교류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한한류의 문제를 지나치게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다보니 문화콘텐츠가 화장품이나 부동산처럼 취급되고 있다. 한류의 힘은 경제적인 파급력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유대와 공감에 있다. 문화가 지닌 자발성과 역동성 그리고 상호이해의 힘은 그 어떤 경제적인 효과와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 문화에 국가명을 붙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 1990년대를 압도했던 일류를 쓰지 않는 것은 그 콘텐츠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굳이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한류를 걱정하거나 비난하는 차원이 아니라 문화콘텐츠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에 우리의 관심이 모여야 하는 이유다.

 

<서울신문>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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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폭력의 비정함과 살아내는 자의 쓸쓸함

다윈 쿡,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시리즈, 시공사, 2014.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 하드보일드, 무자비한 세계를 건너는 냉혈한

하드보일드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세계에 대한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풍경을 냉혹하게 그려간다.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변질된 미국 대도시를 배경으로 윤리와 도덕은 배제한 채 무정부주의적인 자세로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을 신뢰하며 질주하는 안티 히어로의 폭력적인 액션으로 가득한 장르가 하드보일드가 아니던가? 이상과 미덕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고, 존경과 권위는 이미 그 중심을 잃은 자본주의의 냉혹한 메커니즘 안에서 차가운 규칙만 만들어내는 비열한 거리를 단호한 폭력으로 폭주하는 안티히어로의 매력은 매혹과 공포 사이에 있다. 너무도 크고 견고해서 감히 덤비어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대 도시 가운데를 거침없이 달리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안티히어로의 매혹이 압도적일수록 그와 적으로 만났을 때의 벗어날 수 없는 공포는 더욱 지독하기 때문이다.

하드보일드는 소설의 영역에서 추리소설의 대체재(substitute goods)로 등장하였다.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절정을 구가하던 영국의 고전적인 추리소설은 셜록 홈즈처럼 책상에 앉아서 혹은 실험실에서 논리를 만들고 현장에서 검증하며 범인을 잡았다. 김용언에 따르면 “19세기 탐정들은 복잡하고 역동적인 모더니티의 영향 아래 선형적인 진보와 개혁, 안정된 발전을 추구하고, ‘하나의범죄가 발생시켰던 균열을 솜씨 좋게 봉합하면서 범죄자의 체포라는 안전한 해결로 마무리 지었다. 범죄자는 사적인 욕망 때문에 사회의 근간이 되는 질서를 뒤흔든 나쁜 피이며, 그들 사회에서 추방함으로써(체포 혹은 자살유도) 다시금 안정은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로 돌아[각주:1]올 수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나 희망이 사라지고,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핵폭탄의 가공할 학살의 트라우마(Trauma)를 갖게 된 인류에게 이성과 논리로만 무장한 천재들의 말의 향연은 더 이상 재미나 현재성을 주지 못했다. 더구나 계급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선에 갇혀 우아한 매너리즘을 반복하던 고전적인 추리소설로는 더욱 심각해진 현실의 민낯과 속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양 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와 풍요로움을 약속했던 자본주의는 더 큰 괴물이 되어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거나 일부에게만 축복을 내려주었고, 안정과 평화는 그 어떤 것에서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끔찍한 현실 속에서 윤리와 도덕 그리고 공동체에를 토대로 한 삶의 질서는 향수의 대상일 뿐 더 이상 현실이 아니었다. 누구도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옥 같은 현실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냉정하고 이기적으로 자신의 세계, 자기 몫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등장한 하드보일드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캐릭터는 현장으로 뛰어든 탐정이거나 그들을 조롱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매력적인 범죄자였다. 범죄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는데, 범죄자가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매혹적인 액션을 전개해가는 하드보일드 소설, 하드보일드 그래픽노블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가 아닐까? 싸워야할 적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가 부조리하면 할수록, 그래서 싸워야할 이유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싸우고 있는 자신이 무력하거나 그러한 저항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절망의 시대에 하드보일드는 반짝반짝 빛나곤 한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엄혹했던 1980년대 우리를 매혹시켰던 무협의 세계 역시 그렇지 않았던가? ‘지금 이곳을 살아내야만 하는 우리에게 하드보일드 그래픽노블이 새삼 통쾌하게 읽히는 이유다.

다윈 쿡의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은 미국 범죄소설을 대표하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가 리처드 스타크라는 필명으로 쓴 파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이 책의 국내 출간은 그 엄혹했던 시절의 원인을 제공했던 독재자의 아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지금 이곳에서 냉혹한 복수를 이야기하고, 거대 조직에 내상(內傷)을 입히며 그 보스를 제거한다는 점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매력적인 캐릭터 파커는 다윈 쿡뿐만 아니라 브라이언 핼겔랜드 감독의 영화 <페이백>(1999)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연속적인 장르 전환(adaptation)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리처드 스타크의 원작은 파커의 주목할 만한 캐릭터성으로 한층 풍부해진 이야기성을 가지고 있다. 빼어난 원작의 후광효과(halo effect)뿐만 아니라 다윈 쿡의 인상적인 그래픽노블에서의 성취는 독립적이고 고유한 미학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성과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파커라는 압도적인 캐릭터가 있다. 파커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 월드(trans media story world)를 구축하려는 듯, 리처드 스타크를 비롯한 여타 장르의 많은 작가나 감독들이 자기 나름대로 파커의 이야기를 생산해온 것만 보더라도 파커의 이야기성은 충분히 증명이 된다.

파커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안티히어로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세계에 대한 절망적 인식에서 출발한 단순한 악당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독한 환멸을 나름의 방식으로 대면하고 있는 캐릭터다. 세계에 대한 환멸적 인식을 파커는 특유의 압도적인 폭력과 감정을 거세한 냉혹함으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진실에 이를 때까지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진솔한 방식의 폭력으로 되갚아준다. 그 과정에서 파커는 부패와 범죄, 폭력의 내용과 과정을 정교하게 구현함으로써 향유자에게 대리보상의 통쾌함과 해방감을 선사한다. 이렇듯 파커가 응전하고 있는 세계는 범죄세계이며, 그와의 개인적인 원한과 이해관계로 인하여 잔혹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범죄는 항상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혼란을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기호화하고는 스펙터클 뒤로 숨고는 한다. 하드보일드 그래픽노블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스펙터클 뒤로 숨어있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의 메타포를 읽을 수 있어야 하며, 그 메타포를 그래픽노블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작가 고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윈 쿡은 성공적이다. 더할 수 없는 하드보일드의 거칠고 냉혹한 감성을 굵고 거친 선과 연출로 표현함으로써 원작과는 또 다른 미학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커는 대부분 대사를 철저하게 절제하며 칸 안의 연출이나 칸과 칸 사이의 속도로 차별화된 미학을 만들고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커의 남성적인 대사나 그와 어우러지는 장면 연출 그리고 전개 속도의 조화를 구성하는 드러내지 않으며 표현하려는작가 고유의 전략으로 압도적이다.

 

2.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는 파커시리즈의 시작으로 냉혹한 복수담이다. 탁월한 능력의 무법자 파커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절제하며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발각되거나 구속되지 않는다. 우연히 말 레스닉이 제안한 불법무기거래 현장을 터는 데 성공하고 돈을 나누어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파커의 몫까지 탐내는 말의 계략으로 파커의 아내 린은 파커를 배신하고 그에게 총격을 가한다. 나머지 일당도 모두 제거한 말은 린을 뉴욕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파커를 죽인 죄책감에 불면에 시달리며 말에게 린이 마음을 열지 않자 그녀를 두고 말은 떠난다. 말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린을 찾은 파커, 린은 거절하는 파커의 태도와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을 택한다. 생활비 배달을 온 악당을 추궁하고 그의 연결고리를 찾아 마침내 말의 위치를 알아낸 파커는 그를 죽이고, 자신의 돈을 찾기 위해 조직 아웃핏을 찾아간다. 중간보스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돈을 찾아 나오지만 조직 아웃핏으로부터 쫓기게 된 파커는 성형을 하고 잠적할 것이라며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총 4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파커의 등장, 말과 얽힌 복수의 내력담(來歷談)→ ② 돌아온 파커를 눈치 챈 말의 대처, 말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그날 사건의 전모 → ③ 파커가 말을 찾는 과정의 이야기 → ④ 말을 죽이고 조직 아웃핏을 자극하여 돈을 찾아 도주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작품의 4장의 구조는 내력담, 재구성담, 추적담, 도주담이라는 익숙한 모티브의 재구성임을 알 수 있다.

익숙한 모티브를 활용하여 거침없는 복수에 성공하는 비교적 간단한 서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없는 삶의 리듬과 전모를 알 수 없는 거대 조직 그리고 냉혹한 자본의 논리가 폭주하는 거대 도시 안에서 타자에 대한 관용 없는 대응으로 스스로를 지켜내는 냉혈한 캐릭터 파커의 거침없는 행동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익명의 공간에서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무지와 악덕 그리고 불쾌한 악몽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 안위를 확보하려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계. 그 세계의 긴장의 안에서 자신만의 순결한 목표(적어도 파커 자신에게는)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무법자의 자유와 해방의 몸짓은 매혹적이다. 과도한 남성성, 자기중심적인 거친 말투, 지금 해야 할 일에 대한 어김없는 몰입, 흐트러짐 없는 계획과 성공, 차갑게 절제된 욕망과 거세된 감성, 자기 삶의 주체로 부상하려는 여성계층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 윤리나 법에 구애받지 않는 무법의 사고방식, 일방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폭력 등이 파커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주요 향유자였던 백인노동계층 남성들의 로망을 오롯이 수렴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통하여 파커의 깊은 내면의 본모습 찾아간다거나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는 모습이나 갈등을 통한 성장이나 성찰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무법의 냉혈한은 범죄가 놓인 컨텍스트(context)와 대화하지 않기에 해결하는 즐거움은 있어도 그로인한 가치의 성취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성취 이후의 공허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곳을 떠남으로써 해결하려들뿐 자기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공허를 떨쳐내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세계에 있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하드보일드 장르의 비정함은 단지 폭력적인 주제를 냉정하고 무감한 태도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파커의 이러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절망 그리고 세계에 대한 환멸에 맞닿아있다. 따라서 파커의 일상을 지배하는 범죄휴양범죄라는 의도된 단순성은 생각 없는 반복의 고리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환멸과 냉소의 포즈다. 그것은 허망함, 절망감, 무력감, 쓸쓸함이 어우러진 결과이며, 그보다 더 허망하고 절망적인 세계와의 의도된 거리두기의 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범죄가 놓인 컨텍스트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이나 개인과의 연관을 심도 있게 천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빠른 속도의 서사 전개,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자기 확신의 캐릭터, 그 캐릭터가 펼치는 비정하지만 파워풀한 액션이 보여주는 냉혹한 스펙터클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성공적인 시리즈물이고 그래픽노블로 전환하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또 하나 이 작품의 재미를 더하는 것은 원작의 아우라(Aura)를 그래픽노블로 더욱 멋지게 살려낸 다윈 쿡의 세련된 연출력이다. 파커의 등장 시퀀스는 두고두고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멋진 연출이다. 19쪽에 걸쳐 최소한의 대사만을 구사하며 파커라는 캐릭터의 특성과 사건으로 진입해가는 과정을 완급(緩急)과 고저(高低)를 살려가며 그려내고 있는 것은 몇 번을 다시 봐도 멋지다. 파커는 대부분 로우앵글로 잡거나 신체 일부의 클로즈업을 통해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압도감을 표현하고(10-15), 그를 관찰하는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통해 그의 캐릭터를 그려나간다거나(9, 11, 14,15), 속도감 있게 움직이던 그가 가짜 운전면허를 마련하고서는 이제 사회로 돌아올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듯이 거울을 노려보는 장면(20)의 멈춤은 압도적이다. 가짜 운전면허증으로 수표책을 발급받아 양복, 구두, 시계를 마련하고(22-24), 고급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는 모습(25)의 통쾌함과 홀로 술을 마시고 병을 깨버리는 장면(26-27)의 의문과 불안은 전체 서사의 발단을 빠르게 제시하면서 얻어내는 효과라는 점에서 더욱 빛나는 지점이다. 압축적인 사건 요약이나 심도 있는 심리 묘사를 빠른 서사 전개의 마디마디에 배치함으로써 전체 서사의 완급을 조절하고 흥분한 향유자가 파커의 액션뿐만 아니라 그에게 심리적으로 동조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준다.(101, 121)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의 매력은 냉혹한 사냥꾼으로서 파커를 만나는 일이 될 것이다. 필요할 때에만 폭주할 줄 아는, 폭주 이후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적어도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운 매력을 지닌 파커. 이 작품에서 그의 폭주는 복수를 위한 것이다. 배신과 상처로 터진 분노를 절제하며 완수한 복수의 끝은 허망함과 또 다른 범죄의 시작일 뿐이며 벗어날 수 없다는 이 작품의 인식은 극도의 절망과 허무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할 주인공, 그가 파커다.

 

3.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의 다음 이야기다. 원작은 이 두 이야기 사이에 얼굴 없는 남자가 있지만 그래픽노블로는 출간되지 않았다. 다윈 쿡의 그래픽노블은 리처드 스타크 원작의 특성인 독립성과 연계성의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그대로 살리고 있기 때문에 얼굴 없는 남자를 누락해도 이 작품을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에서 성형수술을 하고 잠적하겠다고 했고,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에서 성형 이후의 사건들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 얼굴 없는 남자까지 그래픽노블로 전환되었다면 좀더 촘촘하고 밀도 있는 파커의 스토리월드를 구축했겠지만 빠졌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각권이 전체적으로는파커의 스토리월드를 구축하고 있지만 동시에 독립성을 유지하는 프랜차이즈 노블의 특성을 그래픽노블에서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파커가 세상살이의 전모를 꿰뚫고 있는 듯한 자신 있는 태도, 주체적인 처세, 타고난 동물적 감각의 생존 본능, 대범한 대응으로 거대한 조직 아웃핏과 스펙터클한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다. 이 작품도 전작과 같이 총 4장으로 조직 아웃핏의 파커 암살 기도, 스킴과의 내력담 및 스킴 제거 → ② 아웃핏의 지부들을 털면서 두목 브론슨의 위치 파악 → ③ 브론슨의 조직을 터는 여러 사례(잡지 기사, 약화체 요약) → ④ 브론슨을 없애고 이인자와 거래로 뒷탈을 막고 사라지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형식의 반복은 전환과정에서 원작의 서사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며, 더구나 4장의 구조는 기승전결의 보편적인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반복의 식상함만 극복할 수 있다면 매우 유용한 구조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은 빠른 속도의 전개와 통쾌한 액션 그리고 다채로운 사건들의 흥미로운 연쇄가 이어지기 때문에 식상할 염려는 없다.

싸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거대 조직과 두려움 없이 싸워 승리하는 파커의 서사는 거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공포와 적개심만으로 위축되었던 향유자의 욕망을 해소시켜준다. 조직 아웃핏이 보여주는 자본 축적 방식, 갱단을 회사로 칭하며 일상 안에서 합법화를 가장한 범죄조직, 누군가가 아닌 모두의 일상과 연계되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파커의 반영웅적 행위의 통쾌함과 당위성을 강화시켜준다.


특히 아웃핏의 자본축적 방식이나 범죄의 합법화 과정 같은 정보를 잡지기사의 활용(82-90)이나 각 지역을 터는 과정을 약화체 그림을 통하여 요약(91-109)하는 방식은 전체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게 하면서도 호흡이나 긴장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킴으로써 사건의 스펙터클에 현혹되는 것을 방해하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게 한다. 그 거리는 파커의 행위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아니라 합법을 가장하여 일상 속에 침투해 있는 범죄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파커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거나 그 안에 기생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불신과 절망의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를 되묻고 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혹한 무관심으로 그 모두를 단지 도구화할 뿐인 파커의 스탠스가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 익숙한 리듬을 깨면서까지 확보한 그 거리는 쓸쓸함과 환멸로 가득한 세계, 회복 가능성보다는 타락 가능성이 더욱 농후한 세계 안에서 당신의 스탠스는 무엇인가라고 무심한 듯 묻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한층 더 노골화되는 반영웅적 캐릭터로서 파커의 냉혹한 폭력이 재미있는 것은 절대 강자가 구현하는 안전하지만 통쾌한 복수, 반사회적 범죄의 낱낱을 드러내는 폭로,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선 악당의 악당 징벌, 현실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자유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이유가 종합적으로 작용하는데, 향유자는 1인칭 시점을 따라가며 동반자적 시점을 유지함으로써 심정적인 일체감을 강화할 수 있다. 그러한 일체감은 절대 강자의 두려움 없고, 정당하기에 냉정할 수 있는 복수와 자기 방어를 마치 자신이 수행하는 몰입을 얻을 수 있고, 그 몰입도만큼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 지독한 구타와 살인의 연속 안에서 파커는 도덕과 정의라는 명분 뒤로 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파커에게 도덕적 우위나 정당성을 주지 않는다. 그저 제 능력껏 살아남아서 이야기하는 자로 남겨둘 뿐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에서 파커는 말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말을 해치웠을 것이라는 진술을 통해 말과 파커의 정의나 윤리관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 바 있고, 이것을 다시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에서는 마치 린의 총을 맞는 파커처럼 알마 손에 스킴이 죽임을 당하게 하고 운좋게 살아 돌아오는 동일한 설정을 통해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이 비정한 익명의 도시에서 문제는 살아남아 살아내는 것이지 어떻게 살 것이냐는 네가 판단할 몫일뿐이라고…….

 

4. 리처드 스타크와 다윈 쿡 사이

리처드 스타크의 빼어난 원작을 그래픽노블로 전환한 다윈 쿡의 작업은 또 다른 파커의 탄생이다.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친 생생함과 체취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다윈 쿡이 시도한 전환의 수준과 가치를 알아본 리처드 스타크는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파커라는 원작 캐릭터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다우니 쿡에게 주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시리즈가 국내에는 아직 3권밖에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거나 같은 작품의 전혀 다른 재미와 풍미를 느끼고 싶다면 리처드 스타크의 원작과 다윈 쿡의 그래픽노블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거기에 존 부어맨 감독의 <포인트 블랭크>나 브라이언 헬겔랜드 감독의 <페이백>(1999),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파커>(2103)까지 더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본격화되지 못한 하드보일드 장르의 그래픽노블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최근처럼 원천콘텐츠로서 만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이라면 장르적 유용성의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은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질주, 노마드의 무한한 지평이 아니던가? 미국에서 하드보일드가 출현하던 시기의 불신, 절망, 환멸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이곳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더욱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당위적으로 요구하는 윤리나 도덕 혹은 정의를 잠시 괄호 속에 묶어놓고 냉혹하고 비정한 이 도시 안에서 어쩌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색다른 스탠스를 만나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더 흥미진지만 하드보일드라는 점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결국 더 센 놈이 살아남는 것인데…….

<만화규장각> 2016.12.13

  1. 김용언,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강, 2012, p.1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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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

지미 볼리외,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야마모토 나오키의 내일 다시 전화할게와 지미 볼리외의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함께 읽은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 포르노그래피라고 부르기에는 두 작품 모두 도발의 강도나 환기의 궁극이 매력적이다. 야마모토 나오키가 일상 안에서 꿈꾸는 혹은 조금 비껴서면 가능할지로 모를 섹스로 각자의 성적 판타지를 소환하고 있다면, 지미 볼리외는 자유와 광기의 당당한 질주와 동력을 즐겁게 그리고 있다. 전자는 현실의 구속 안에서 각자가 비밀스럽게 꿈꾸는 소심한 판타지로 그 안에서 향유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후자는 각자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자유와 광기의 질주를 보여준다.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290쪽의 부피가 최소한의 서사 라인만을 갖추고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의 욕망과 행복에 충실한 자유를 연출한다. 이 작품의 서사라인을 따라가면,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지독한 패러독스의 영화제목이 아닌가?)의 수익으로 구입한 코트 노르의 호텔에서 루이, 코린, 뮈리엘, 레옹스가 벌이는 광기어린 휴식을 만날 수 있고, 코린을 잊지 못하는 아니, 아니를 열망하는 가리에피, 가리에피의 넘어설 수 없는 친구 시몬 등의 이야기가 그 사이사이를 자의적으로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서사적 지향을 가지고 구조를 중심으로 깊이와 울림을 만들어내려는 일반적인 서사물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각 캐릭터의 욕망과 그것이 그려내는 자유를 연출할 뿐이다.

더 이상 낯설거나 부끄럽지도 않은 맨몸과 순간순간 자극적인 검은색 음모, 색과 구도 그리고 연출이 보여주는 비언어적 도발, 대상과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섹스의 자연스러움, 거침없는 대사와 장면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에로틱하기보다는 자유롭다. 그것은 단지 텍스트 전체적으로 펜, 색연필, 매직 등 자유롭게 사용되었다거나 칸의 구속과 순서적 읽기에서 벗어났다거나 2장의 모두부터 보여주는 소설과 만화가 적절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거나 하는 만화연출적인 차원의 문제만 아니다. 루이와 코린이 중심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욕망과 행동에서 거침이 없고 자유로우며, 그들 각자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놓지 않는 절묘한 긴장선 위에서 질주하고 있는 까닭이다. 루이는 호텔을 구입하기 위하여 세상을 향한 야유와 같은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을 만들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을 견디기 위한 위대한 변절이었고, 루이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세상의 원칙으로부터의 자유와 정주를 동시에 꿈꾸는 코린이 보여주는 긴장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지극히 연극적인 공간에서 작위적인 듯 보이지만 거침없는 자유와 광기를 그려내는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들은 무엇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다워지기 위한,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즐거워지려는 진솔한 자유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과격하고 포르노그래피한 장면연출은 숨겨진 은밀한 욕망이나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그 지독한 장면들을 내면화하는 자유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장별로 독립적으로 읽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290쪽의 어느 부분을 펴고 보아도 도발적이지 않은 시도가 없고, 그 숱한 도발이 환기하는 광기와 자유의 경쾌함을 만날 수 있다. 다시 말해 텍스트 전체가 아주 느슨하지만 매우 독립적인 형태의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을 기획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지점이다. 텍스트는 궁극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정(里程)의 기록이 아니라 순간순간 체험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완결된 서사가 보여주는 마지막 지평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체험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당신은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시작이 아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문득 낯선 장면에서 당신이 즐거울 수 있다면 돌아봐야할 것이다.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지금 이곳의 맨살을…….

<만화규장각> 20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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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분, 공유의 텍스트, <미생>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00만권 이상 팔린 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하나의 징후이며 담론이다. 같은 텍스트를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생산적인 소란스러움을 상상해보라. 향유자들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텍스트와 각자의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다성(polyphony)의 소란을 만들어낼 때, 사회문화적 컨텍스트(context)로서 징후가 되고 담론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생>은 이미 우리사회의 징후이며 담론이다. <미생>이 웹툰은 11억 뷰 이상, 책은 200만부 이상, 드라마는 케이블임에도 불구하고 6.7%대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콘텐츠파워지수는 이미 정상에 있고, 100억 이상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수치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미생>의 영향력은 놀랍다. 이토록 살아서 꿈틀대는 이 텍스트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웹툰 <미생>의 힘은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성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도 있게 구현한 스토리텔링에 있다. 스토리텔러로서 윤태호 작가의 비범함은 초기작부터 이미 알고 있던 바이지만, <이끼> 이후 그가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무척 실험적이고 그만큼 흥미롭다. <내부자들>이나 <인천상륙작전>의 스토리텔링이 <이끼>만큼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시도만큼은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미생>의 완성도나 대중적 지지의 근저에도 스토리텔링의 실험이 있다. 종합상사라는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을 철저한 취재를 기반으로 확보하고, 바둑이라는 인생의 메타포를 그 위에 솜씨 좋게 얹은 후에 마이너리티적 감성의 자극을 통해 대중적 공감을 확산하려는 <미생>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압도적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미생>은 아직 살아있지 못한 마이너에 주목함으로써 향유자들이 스스로 심정적인 투사를 통하여 동일시 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메이저의 성공신화보다는 마이너의 악전고투에 동조하는 대중의 심리적 기저를 잘 파악한 결과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미생>이 지닌 텍스트의 내적 리듬이다. <미생>에서는 미시서사의 일정한 마디마다 촌철살인의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하여 지나친 정보 제공으로 인하여 이완될 수 있는 서사의 긴장을 당기고 있다. 종합상사가 배경인 까닭에 무역 전문용어 등이 불가피하게 제공되어야하는 까닭에 자칫 서사가 늘어지거나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것을 미시서사의 전환이나 대사나 내레이션의 미적체험을 강화함으로써 극복하였다. 매주 2회 연재, 2-3일의 연재 간격을 유지해야하는 웹툰의 특성상 향유자의 관심을 유지하고 흥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주단위의 미시서사 전개가 요구되지만, 그렇다고 매주 새로운 미시서사를 제공한다거나 미시서사 단위의 극적 긴장을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미생>의 시도는 웹툰의 장르적 변별성과 대중의 취향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미생>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미덕은 장그래의 성장담(Initiation story)에만 머물지 않고 원인터내셔널 전체 구성원을 캐릭터화하고, 그들 사이의 긴장과 미시서사의 유기적인 조합을 완성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캐릭터들에게 고루 시선을 나눠주고 그들이 살아내고 있는 엄혹한 현실의 맨얼굴과 그 안에서 고분분투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비춰 보게 함으로써 공분(公憤)과 공감(共感)을 공유(共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웹툰 <미생>의 작품성과 정서적 공감을 공유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의 성공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halo effect)One Source Multi Use(이하 OSMU)의 전략적 전개 그리고 빼어난 텍스트적 성취에 기인한다.

우선 드라마 <미생>의 텍스트의 변별성은 스토리텔링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미생>은 웹툰에 비해 업무의 사실성보다는 그것을 수행하는 캐릭터들의 대응에 중점을 두어 다양한 캐릭터군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 매주 2화로 구성하는 미시서사의 주제 단위가 선명하다는 점, 주제단위별 중심 캐릭터가 다양하게 등장시킨다는 점, 장그래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조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서 거시서사의 흐름을 유지한다는 점, 지금 이곳에서 예민한 소재들을 전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등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하였다. 특히 눈여겨 볼 지점은 장그래, 장백기, 안영이, 한석률을 취업준비생인턴신입사원(정직원/계약직)’의 과정에서 구현하고, 그들이 대응할 세계를 긍/부정의 다양한 캐릭터 군상과 갈등하게 함으로써 사건을 전개한다. 이러한 갈등 과정은 오과장, 김대리, 장그래의 영업3팀을 긍정적 공동체로 그리고 대비적으로 각 팀을 그리고, 그 안에서 장백기, 안영이, 한석률의 미시적 갈등을 다시 구현하는 영리한 서사 구조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정규직/계약직의 문제, 성차별의 문제, 회사 내 정치의 문제, 일중독, 조직의 부속품일 뿐인 개인의 문제 등을 집중 부각시킴으로서 향유자와의 심리적 접속을 유도하고, 공감과 공분을 확장하는 효과를 성공적으로 거두고 있다. 프로진입 실패, 고졸 학력, 낙하산을 중심으로 마이너적 캐릭터를 구현한 장그래, 회사 내 정치와는 무관하게 올바른 자세로 윤리적 우위성과 보편적 양심을 확보한 분명한 오과장, 빼어난 실력에도 성차별을 받는 안영이(마치 헤르미온느처럼),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본능적으로 합리화하는 냉혈한 최전무 등의 캐릭터는 향유의 지향과 정서적 동조가 가능한 수렴점으로서 성공적으로 기능한다.

<미생>OSMU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OSMU는 장르전환(adaptation), 창구효과(window effects), 상품화, 브랜드 창출 효과 등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마케팅 활동을 의미한다. OSMU의 동력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 여부, 원천콘텐츠의 전환 적합성, 거점콘텐츠의 최적화 여부, 연동 콘텐츠 간의 상호 프로모션, 다양한 창구로의 확산, 브랜드 가디언의 효과적인 통제에 의한 상품화, 지속적인 브랜드 창출 등에 있다. 그동안 콘텐츠 업계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강력한 원천콘텐츠의 확보 방안, 전환의 최적화 장르 파악 및 전략 탐색, 상호 프로모션 방안, 상품화 전략 등에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콘텐츠의 제작 규모가 커지면서 콘텐츠의 리스크 헷지(risk hedge) 전략으로 이미 인지도를 확보한 원천콘텐츠를 중심으로 장르전환에 중심을 두면서 블록버스터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강력한 원천콘텐츠였던 웹툰 <미생>은 드라마 방영에 맞추어 프리퀄(prequel)에 해당하는 사석을 5화 연재함으로써 원천콘텐츠는 물론 거점콘텐츠인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환기시켰다. 사석의 연재로 <미생>은 일종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을 매우 흥미로운 형태로 구현했다. <미생>은 원천콘텐츠에서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면서 원천콘텐츠의 프리퀄을 첨가하면서 원천콘텐츠의 전사에 해당하는 오과장의 신입사원시절을 추가하였다. <미생>의 프리퀄은 여타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과는 다르게 새로운 서사를 추가함으로써 보다 완성된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점콘텐츠의 방영에 맞춘 일종의 프로모션 툴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프로모션 툴은 뜻하지 않게 상품화의 결과로서도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미생>은 웹툰의 성공에 힘입어 드라마 이전에 이미 단행본 출간, 캔커피, 종이컵, 헛개수, 노트, 티셔츠 등의 상품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부가가치는 물론 <미생>이라는 브랜드 창출에 긍정적인 부메랑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미생>은 성공적인 PPL(Product Placement)을 통하여 미시콘텐츠(micro contents)를 활성화였다. 낯선 이물감 없이 전체 서사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숙취음료, 홍삼, 복사지, 일회용커피 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인 PPL의 경우 상품당 1000만원이지만 <미생>의 경우에는 4000만원 수준이라는 것만 봐도 그 효과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시콘텐츠의 활성화는 단지 수익의 극대화뿐만 아니라 향후 콘텐츠의 수명 연장 및 프랜차이즈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면에서 주목해야할 요소다.

현재적 의미에서 <미생>을 통해 드러난 콘텐츠 향유 경로의 변화와 그에 다른 수익창구의 다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드라마 <미생>을 제 시간에 케이블을 통해서 보는 시청자만큼이나 다양한 스마트기기를 통해서 즐기는 향유자가 증가한 것이 현실이다. 스마트환경 하에서의 콘텐츠 향유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다양한 만큼의 수익 창구를 갖게 되는데, <미생>의 경우에는 주문형비디오(VOD)와 푸티지(footage) 광고 매출이 두드러진다. 편당 제작비 3억의 시청률 6.7%대의 20부작 드라마의 VOD 매출 30억은 유의미한 수익이며, 더구나 일부 영상만 뽑아서 활용하는 푸티지 광고 역시 20억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콘텐츠의 수익 창구의 변화는 콘텐츠 자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향후 스마트환경 하에서 드라마는 구현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의 디바이스적 특성과 향유 경로와 연동하는 수익 창구의 성격에 따라서 스토리텔링 전략을 최적화해야하기 때문이다. PPL이 자연스러운 서사 요소의 확충, 미시콘텐츠를 활성화할 수 있는 서사 전략, 푸티지 광고가 가능한 연출 전략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기획 단계부터 고려해야만 한다. 여기에 원천콘텐츠의 장르 전환까지 고려해야한다면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익 창구의 다변화와 신규 개발은 드라마의 질적 성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고, 그와 더불어 원천콘텐츠이 웹툰의 수익 창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탐구해야할 문제이다.

이청준의 자신의 스터디셀러 󰡔당신들의 천국󰡕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고 단언한 바 있지만, 그 작품은 현재가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 이청준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윤태호의 <미생>이 읽히는 시대는 온전히 완생에 이르지 못한 시대다. 아니 우리가 완생을 꿈꾸는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미생>은 현재 진행형이며 완생을 향한 준열한 성찰의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지금 이곳에서 <미생>이 불러오는 공분(公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공감(共感)이며 공유(共有)의 힘이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웹툰으로 단행본으로 드라마로 <미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만화규장각> 20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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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최선, 낙관의 유쾌한 고군분투

-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다릴 것이 생겼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한참을 기다리던 요시다 아키미의바닷마을 다이어리7권을 그렇게 후딱 읽어버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기다린 시간만큼 아주 천천히 차를 우리듯 읽었어야할 작품을 급한 마음에 후루룩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그 허전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였다. 물론 그 못된 습벽으로 이 작품마저도 정주행하고 말았지만,바닷마을 다이어리8권을 기다리듯중쇄를 찍자4권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설렘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긍정적인 주인공의 성장의 고군분투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그리 새롭지는 않다. 중성적인 여성 혹은 작고 다부져서 아기 곰처럼 생겼다고 묘사된 유도선수 출신 출판사 신입직원 쿠로사와 코코로, 진심과 최선이라면 언제든 기대할 수 있는 선의와 낙관 그리고 여지없는 긍정의 결말은 대중서사의 익숙한 컨벤션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랬듯이 알고 보면 모두가 선한 사람이라는 이 작품의 설정은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구조 밖에 있다. 점점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 즉 서로 다른 존재와 세계, 정서나 목표 간의 충돌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갈등에 대한 피로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지향을 통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것일까? 갈등을 통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가 유용하듯이 갈등을 이완시킴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즐거움도 지금 이곳서사의 주목할 지점이다.

중쇄를 찍자에 마음을 뺏긴 것은 출판 현장의 살아있는 모습을 중심소재로 활용하는 있다는 점, 쿠로사와 코코로에게서 장그래가 읽혔다는 점(물론 장그래 보다는 밝고 조금 가벼운), 중심 서사의 캐릭터와 에피소드별 중심 캐릭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물론 우리는 이러한 예로슬램덩크라는 탁월한 예를 알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진심과 선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만화출판이라는 소재의 현장성을 제대로 살리면서도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는 작가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출판현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만화출판 정보가 가볍게 제공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만화를 팔고자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 안에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기 곰의 분투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 역시 현실의 모습과는 무관한 우리가 보고 싶은우리의 모습을 투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진심, 최선, 낙관의 긍정적 기대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가슴을 뛰게 한다. 그것은 아직은 나와 무관하지만 그러한 문맥 위에 스스로를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인한다. 전체적으로 씩씩한 모습으로 유쾌함을 유지하는 쿄토칸사람들의 열정을 통해서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다고 근거 없는 기대와 자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엄혹한 현실 안에서 무기력하게 무릎 꺾인 우리의 처음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 사는 일이 그렇다고 자조하는 우리에게 올곧은 체축으로 다시 한 번 서보라고 따듯하게 이야기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즐겁다. ‘팔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판 것이다라는 쿄토칸식구들의 자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重版出來는 초판을 소진하고 중쇄를 찍어 돈을 벌겠다는 천박한 갈망이 아니라 사람들의 꿈을 짓고 있는 만화가에게 지속적인 창작의 기회를 마련해주려는 편집자의 따듯한 소망이다.

취향에 따라서 이 작품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서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림의 완성도는 독특한 연출이나 완벽한 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분위기와 속도 그리고 이야기와 어우러진 정도가 아니겠는가?

 

<만화규장각> 20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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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의 소환과 즐거움의 호명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도깨비감투에는 1970년대 풍경(landscape)이 있다. 그곳에는 서울 어느 골목에 사는 혁이네 가족만의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몰장소적 풍경으로서의 다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 김홍중에 따르면 풍경은 향수자가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구성하는 일종의 제도적 세계상이며, 동시에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변동을 통하여 지각되고 감지되는 역사의 구성물이다. 그는 풍경을 주체의 경험을 초월하는 선험적인 인식틀이고, 체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제도로서 현실의 물질적 토대를 포함하며, 언어적논리적 질서를 넘어서는 영상적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깨비감투에서 만날 수 있는 1970년대 풍경은 특정 시공간을 잘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적인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곳’(現在)이 소환하는 풍경이다. 그것은 실체적 공간으로서의 1970년대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으로부터 재구하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대표성을 갖게 되는 시공간이며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는 사라진 소중한 무엇인가가 찾아가는 대타적인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도깨비감투의 풍경 속에서는 문 밖을 나서면 친구들이 있고, 서로의 이야기가 있고, 좁았지만 자유로웠던 골목이 있고,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을 밥상이 있고, 꾸중하는 어른이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옳은 일에 모두 수긍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명랑만화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일종의 컨벤션이다. 박인하와 김낙호는 1970년대를 명랑만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은 웃기는 만화라기보다는 일상을 그린 만화로 규정하며, 그 핵심은 친근함과 일상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명랑만화 안에서 친근함과 일상을 구성하는 컨벤션에는 당대가 지향했던 양친부모가 모두 있는 중산층 가정,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단독주택), 이웃과 함께하는 골목길이라는 물적 토대는 물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도덕 기준과 합의 가능한 가치관이 내재화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당시의 보편적인 풍경이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풍경을 당위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명랑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교화적, 도덕적, 당위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명랑보다는 바른만화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은 도깨비감투가 명랑만화보다는 바른만화에 가까웠다는 말이 아니라 바른만화의 성격을 내재화한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작품 발표 당시 지향했던 보편적 일상의 반영이거나 검열과 심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적 타협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핵가족화, 이웃 간의 관계 단절, 가치관의 아노미화 현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동시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바라본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던 개발독재정권의 검열과 탄압이 심의라는 이름으로 혹독하게 자행되는 시기라는 점을 상기할 때, 도깨비감투를 비롯한 당대의 명랑만화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일상은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요구받는 일상이거나 과장된 낙관 속에 은폐된 일상에 가깝다.

도깨비감투만약 내게 〇〇〇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판타지를 한국적인 소재인 감투로 바꾸어 하이콘셉트(high concept)로 전면화한 작품이다. 도깨비감투는 투명인간의 변형으로 해리포터의 투명망토와도 다르지 않고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꿔봤을 소박했지만 보편적이었던 판타지의 구현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도깨비감투라는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도구를 획득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상담과 모험담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마법의 도구를 얻게 되기까지의 모험담과 마법의 도구를 얻음으로써 새롭게 생긴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의 모험 및 성장담 그리고 그 능력을 슬기롭게 처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귀환담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도깨비감투는 이러한 상례에서 벗어나 도깨비감투를 얻고 난 이후에 일상 속의 소소한 소동 혹은 다소 낙관적이거나 맥락 없는 모험을 그려냈다. 제사, 방학, 도둑, 위문공연, 눈싸움, 목욕탕, 성적표, 불우이웃돕기, 설날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납치범 검거, 밀수범 검거, 탈옥수 자수, 북한, 땅굴 등이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월간이라는 특성과 초등학생이 중심 독자였다는 점에서 전자와 같이 1년 단위로 가정과 학교의 루틴을 중심 소재로 활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소 이물(異物)스럽거나 맥락 없는 소재임에 분명하다. 특히 우연하게 북한에 도착하고 그곳의 실상을 바라보고 땅굴을 발견하는 등의 에피소드(별책부록14/ 복간본 페이지가 픽스되면 복간본 기준으로 권수 표기 하겠습니다.)는 애니메이션 <똘이장군>(1978) 식의 반공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명랑만화에서까지 왜 굳이 북한을, 그것도 아주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려야했는지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부의 압력에 의한 작가의 창작권 침해나 작품의 완성도 저하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깨비감투의 중심 서사는 중심캐릭터인 혁이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단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들을 도깨비감투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다만, 일반적인 서사물은 대부분의 뚜렷한 적대자 캐릭터를 상정하고 그들과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향 가치를 부각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도깨비감투에서는 뚜렷한 적대자나 본격적인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명랑만화의 성격상 본격적인 갈등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 중심의 재미에 그 중심을 두고 매월 단위의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요소와의 해소과정을 통한 성찰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결론(미덕)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의 일방적 서사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모험담의 동력이 되어야할 성장이나 성찰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서사적 결함이 아니라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월간 잡지라는 압도적인 매체를 통해, 월간이라는 분명한 주기를 가지고, 초등학생이라는 뚜렷한 타깃에 맞추어, 연재물이지만 단편적인 성격이 강했던, 일상 속의 재미를 지향했던 명랑만화의 장르적 특성에서 본다면, 도깨비감투의 이와 같은 서사적 특성은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지 명랑만화가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꺼벙이, 탱구, 두심이, 요철이, 고집세 등)를 중심으로 일상 속에서의 웃음을 전면화하였지만, 이 작품은 개성적인 캐릭터(혁이)보다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도구(도깨비감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할 수 있다.

사실 엄혹했던 시대적 배경과 열악했던 산업적 환경 그리고 제한적이었던 소비 및 향유의 토대를 고려할 때, 1970년대 한국 만화산업에서 명랑만화는 최적화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명랑만화는 당국의 심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분명한 독자층과의 원활한 소통에 중심을 맞추기 위하여 단순하지만 분명한 컨벤션의 설정, 단편서사 중심의 스피디한 전개, 심각한 고민보다는 가벼운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략한 선중심의 약화체(略畫體)와 재미있는 희화체(戲畫體)를 활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일상을 중심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운 지점이 될 수밖에 없고, 상이한 가치 간의 긴장과 대립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갈등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명랑만화의 수다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긴장, 갈등, 변화가 내재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 회귀할 뿐인 체제 순응적이며 기존 질서를 강화할 뿐인 장르라는 혐의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와 본격적인 갈등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구나 도깨비감투에서 사회악(社會惡)이나 체제악(體制惡)을 도깨비감투로 제거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은 지극히 표면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명랑만화로서의 장르적 특성과 주 독자층이 초등학생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러한 비판이 유효할 것인가는 좀 더 숙고해볼 문제다.

도깨비감투의 가장 지배적인 설정은 현실에서는 무력하거나 잉여로 취급받았던 어린이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타개해나간다는 판타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십대의 어린 주인공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어른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무력한 현실을 타개하고 싶은 어린이들의 욕구 등을 창조적으로 수렴한 결과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깨비감투의 이러한 설정은 독자와의 공감을 높이고 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는 중요한 서사 장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좋은 일에만 효과가 있는 능력이라는 단서와 언제든지 분실할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모두가 알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설정은 일종의 데드라인(Dead Line) 설정과 같은 서사 장치로서 극적 긴장을 조성할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도깨비감투라는 중심 소재 외에는 매화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되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는 다소 어렵다. 서사적 완성도를 논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피소드별로 분석하여 그 안에서 서사적 완성도를 평가해야할 것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서사적 완성도보다는 시트콤처럼 일상 속의 재미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명랑만화의 계보학적 접근을 통하여 이 작품만의 변별성을 추론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깨비감투만의 평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만화에서 분명한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다소 모호해진 명랑만화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한 토대 작업이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지면과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하여 이 글에서는 문제 제기에 그칠 뿐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어깨동무가 주는 신뢰와 재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에 연재되는 작품의 대중적인 지지와 영향력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도깨비감투를 제대로 읽기위해서는 어깨동무의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다. 현재적 시점에서어깨동무를 발행했던 육영재단의 성격과 실체, 발행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 시절 우리가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작품들을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로운 시점에 단행본 형식으로 읽어보는 것도 도깨비감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 역시 도깨비감투를 무척 즐겁게 읽으며 자란 세대(심지어 그 시절 도깨비감투를 소재로 동화-지금으로는 팬픽까지 써봤음을 실토한다)로서 오십이 넘은 나이에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오히려 단순하고 담백했다. 비쩍 마르고 키만 훌쩍 커버린 초등학생 하나의 소환, 잘 사는 사람보다는 잘 살고 싶어 애쓰던 서울 변두리 풍경의 소환, 친구들에게 빌려 읽던 도깨비감투갱지 냄새의 소환……이 작품을 매개로 타임 슬립(Time Slip)하는 순간 모든 현재가 미끄러지고 오롯이 그 시절의 나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의 기억 어딘가에 도깨비감투와 함께 나를 묻어 두고 있었나보다.

신문수 만화는 도깨비감투가 그러하듯 추억 속의 만화가 아니다. 도깨비감투가 지금 이곳에서 다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깨비감투에는 신문수 특유의 따듯하고 여유 있는 감성이 오롯이 살아있는 까닭이다. 하여 우리는 갈수록 강퍅해지는 세계 안에서 도깨비감투를 읽던 시절처럼 위로받고 의지하고 꿈꾸고 싶다. 처음 만났던 도깨비감투에서처럼.

2016년 도깨비감투》복간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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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융합의 즐거운 무한증식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방탄소년단,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웹드라마 <두 여자>, <상사3>, <미생>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공통점 구현 미디어, 플랫폼, 장르, 언어, 팬덤 형성 방식, 수익구조 등 그동안 독립적인 콘텐츠의 고유성을 결정 짓던 주요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융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콘텐츠 융합은 콘텐츠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지속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다. 따라서 융합의 시도는 매우 유연하고 개방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모색될 수 있다. 장르, 미디어, 플랫폼, 구현 기술 등 지금까지 콘텐츠의 고유한 정체와 위상을 규정 짓던 요소들의 경계를 허물고, 콘텐츠가 보다 많은 가치를 보다 오랫동안 창출할 수 있도록 개방적 증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콘텐츠 융합은 네트워크성, 상호작용성, 정보의 통합성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디지털 문화환경이 콘텐츠 생산과 향유에 있어서 완전히 내재화되었다는 점, 이로 인한 다양한 플랫폼이 급부상하면서 차별적인 콘텐츠 구현을 위한 전략적 탐색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 새로운 플랫폼과 유통 채널에 최적화된 수익 모델 탐색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과 같이 다양한 관점과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원인의 다양성만큼이나 융합의 양상도 매우 다양하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융합이 시도되고 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처럼 기존에 제작사가 확보하고 있는 캐릭터를 활용하여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이라는 대전제로 수렴하거나, 방탄소년단처럼 ‘Everything is connected!’라 주장하며 소셜 파워(social power)를 기반으로 다른 장르와 영역에서 시도되었던 콘텐츠 노출 및 전개 방식, 스타덤 및 팬덤 전략 등의 유연한 조형을 드러내거나, 웹드라마 기반의 콘텐티브 브랜드를 구현을 시도하거나, <미생>처럼 비동기식 전개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현하는 등의 사례만 보아도 융합의 다양한 양상은 한 마디로 확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와 같이 콘텐츠 융합의 배경이나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다분히 조형적이지만, 융합의 동기는 분명하다. 콘텐츠 융합은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축함으로써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 및 충성도를 높이고, 여타 콘텐츠에 비해 차별적 우위를 확보하여 수익을 지속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다. 따라서 콘텐츠 융합에서는 기존의 각 장르나 영역이 고수해왔던 고유성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를 논리적 배경으로 디지털 문화환경 그리고 콘텐츠 생태계의 역동적 경쟁체제가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창작자, 원작, 독립성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향유자, 스토리월드, 연결성 중심의 융합의 시도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콘텐츠 융합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디즈니에 의해 42억 달러에 인수된 마블은 단지 만화회사가 아니다. 마블은 확실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5,000여개의 캐릭터를 보유했고, 그들을 창조적으로 수렴하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arvel Cinematic Universe, MCU)라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에 성공하였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축하여 향유자가 스스로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콘텐츠 수명의 지속적 연장이 가능해졌고, 새로운 콘텐츠의 등장, 이에 따른 수익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방탄소년단은 더욱 놀라운 융합의 사례다. 방탄소년단은 직접 음악을 창작함으로써 그들은 음악을 통해 본인들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며, 동시에 그들은 SNS나 다양한 플랫폼으로 통하여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전략을 취했다. 더구나 그들의 음악의 주제는 동시대, 동세대의 고민을 나누는 내용이 중심으로 이룸으로써 팬들은 방탄소년단과 자신들의 고민을 나누고 있다는 강한 심리적 연대를 형성하게 됨으로서 더욱 강력한 팬덤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은 트위터 최다 활동 남성그룹 부문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를 정도로 그들은 SNS를 적극 활용하며, 데뷔 전부터 자신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믹스테잎, 영상, 사진 등을 올리며 팬들과 소통을 시도했다. 가상의 방송국을 개설하여 멤버들이 직접 다양한 포맷의 TV 프로그램에 도전하거나 Mnet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방탄소년단의 아메리칸 허슬 라이프>을 통해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 것도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SNS 그리고 다양한 플랫폼을 가로지르는 전방위적 융합을 시도함으로써 방탄소년단 고유의 스토리월드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최근에 주목해야할 콘텐츠 융합은 웹드라마와 같은 새로운 장르에서의 시도다. 구현 미디어와 플랫폼의 변화에 따라 형질 변환에 성공한 웹드라마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수익구조가 항상 한계로 지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이러한 한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콘텐티드 브랜드전략을 시도하는데, 72TV의 인기 웹드라마 <두 여자>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dxyz 브랜드로의 확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웹드라마의 브랜드 파워를 전면화한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하고, 그와 관련된 콘텐츠는 물론 다양한 파생 상품들로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이다. 그 외에도 마블처럼 고유의 원천 IP 콘텐츠를 활용한 콘텐츠 프렌차이즈화를 시도한다거나, KBS가 시도했던 <간서치열전>처럼 웹드라마와 TV드라마의 상생적 결합 방식도 시도된 바 있다. 무엇보다 웹드라마의 케주얼한 특성을 극대화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구현 시도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향유를 지속, 강화, 확산하기 위하여 복수의 매체와 장르를 가로질러 스토리월드를 확장적으로 구축해나가는 스토리텔링 전략 혹은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전개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축/증식하는 스토리세계를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라고 부른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는 다수의 매체와 장르 전개 과정을 통하여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는 현재진행형의 증식성과 개방성을 지향한다. 개별 미디어와 장르를 통해서 자족적인 형태의 콘텐츠로 창작되지만 그것은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세계로서 스토리월드의 구성요소로서 기능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융합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적 선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양질의 콘텐츠인데, 그 중심에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의 지속적 창출, 즉 향유가 있다. 융합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향유의 놀이터를 마련하는 현재적 대압이 융합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콘텐츠 경북> 201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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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 대한 어설픈 편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학생들과 쓰촨을 다녀왔다. 방학마다 중국 곳곳을 방문하지만 늘 놀랍고 새로울 뿐이다. 평생을 보아도 제대로 다 보기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과 넓은 지역, 그리고 빠른 속도의 변화가 놀라움이라면, 그 안에서 문득 발견하는 그들의 문화는 새로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화란 삶의 반영이니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삶이라는 것이 당대의 것만도 아니어서 오랜 전통을 온몸으로 체감하지 않고서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은 그들이 자랑하듯 오랜 역사와 수많은 소수민족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개개의 군집적 성격이 더 강하지 않던가? 그러니 현재 중국이 어떻다 이야기하는 것도 섣부른 일이겠지만 코끼리 다리 더듬는 심정으로 그 새로움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이번 탐방에서 무엇보다 새롭게 발견한 것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을 전략적으로 세련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르다는 의미가 단지 동시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과 공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차이까지 현재적 시공간 안으로 수렴하여 구현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55개 다양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나라다보니 특이한 것도 많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지 않고 각각 공존하게 하고 있으니 그 다양성의 경쟁력은 이미 아는 바와 같았다. 거기에 전통 문화를 과감하게 현재적 맥락에서 소환하여 지속적으로 콘텐츠 가치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규모와 실천에서 세련된 참신함이 돋보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인상공연뿐만 아니라 멋스러운 전통 건축물 안에 들어선 스타벅스와 파리바케트 같은 현재적 향유 공간, 전통문화와 연계한 다양한 참여형 콘텐츠, 관광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민의 삶과 연계된 유적지는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포괄이 아닌 배제, 이해가 아닌 강요가 앞서는 닫힌 사회다. 배제와 강요에 익숙해진 닫힌 사회의 구성원들은 누구도 쉽게 수용하지 않듯이 우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문화든 사람이든 혹은 다른 시대이든 물 흐르듯 섞이지 않으면 함께하기 어려운 시대다. 물론 중국이 답이라는 말이 아니다. 광장과 공원마다 국가주의적 색채가 도드라지고, 낯설고 강압적인 구호가 가는 곳마다 붙어있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혼란도 분명한 그들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민족, 시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에 자꾸 눈이 갔던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또 하나 이번 탐방에서는 어설픈 편견이 여지없이 깨졌다. 그동안 중국에서 물건을 살 때, 그들이 달라는 대로 주면 손해라는 인식이 있었다. 사실 반 이상 깎아서 사기도 했으니 꼭 편견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청두에서는 정찰제라서 깎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물건 값에 더욱 신뢰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인민공원에서 우리에게 같이 배드민턴을 치자고 하거나, 전철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던 노부부나, 도강언에서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던 양꼬치 팔던 회족 청년이나, 아미산 부근 숙소에 두고 온 시계를 전화를 걸어 찾아준 주인이나, 거의 모든 결제를 모바일로 하는 모습이나 이번 탐방에서 만난 현재 중국의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대상을 폄훼하는 것은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의 발로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와 같은 IT기업의 급부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중국을 짝퉁상품과 싸구려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편견은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소통하지 못한 결과다. 편견의 원인이야 무엇이든 책임은 편견을 갖는 사람과 그 대상 모두를 해친다. 방학을 맞아 해외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해 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인 이유다.

 

2018.02.02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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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장관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문가는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가지고 그 분야에서 비해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이 하루아침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전문가는 대부분 오랫동안 그 분야의 일을 한 사람이다. 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거나 혹은 밥벌이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문가라는 말에는 자기 분야에 대한 자부와 자존의 품격을 가진 사람들의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Aura)가 있다.

서울신문 중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끈 총감독 송승환 씨의 며칠 전 인터뷰가 화제다. 그는 자신이 잘한 일 중 하나가 MB정부 때 문화부 장관을 거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MB정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 문화부 장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는 직접 물어봐야 알 일이지만, 나는 그 의미가 후자일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그러한 선택이 그가 문화기획전문가로서, 연극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전문가다운 자부와 자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 말은 문화부장관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일생을 바쳐 일궈온 자기 분야 전문가로서의 열정과 자부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멋지지 않은가? 누구는 하지 못해 안달인 자리를 거부하고 자기 분야에서 자기가 즐기는 일을 꼿꼿한 자부와 자존으로 성공적으로 일궈내는 전문가. 평창 동계 올림픽의 개폐회식에서 가슴 뛰는 감동을 얻은 이들이라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드론쇼와 마지막 성화 주자였던 김연아의 공중 스케이팅 그리고 선수단 입장 내내 춤을 함께 춤을 추던 자원봉사자들의 열정에 압도된 이들이라면, 그러한 성취가 어디에서 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송승환 씨는 젊은 시절 텔레비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도 늘 자신을 연극배우라고 불렀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젊은 시절 그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지향점에 대한 반복적인 선언이 아니었을까? 지향해야할 정체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연극으로 시작해서 방송과 공연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는 그가 보여준 전문가로서의 성취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기 분야에서 브랜드를 갖게 된 전문가에게 마치 시혜나 베풀듯 장관직을 권하는 풍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장관이야 해당부서에서 그 분야 일을 평생 해 온 전문 관료들이 맡으면 될 일이다. 20년 전쯤 김영하 작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대다수 작가들이 대학교수로 가는 세태를 꼬집었었다.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마치 교수인양 대학으로 가서는 창작을 이어가지 못하는 세태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작가의 유명세에 편승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모셔가는 대학교를 비판한 것이다.

장관이든 교수든 그것도 전문가의 영역이어야 할 것이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전문가의 영역에 불쑥 다른 영역의 전문가가 들어오는 것은 둘 다의 전문성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분들이 장관 자리를 제안 받고 입각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대부분 기대만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그동안 쌓아왔던 명성에 상처만 내고 초라하게 물러났다. 전문가의 전문성을 유명세 정도로 이해하거나 지나치게 신화화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면 지위나 권력을 앞세워 시혜를 베풀 듯 제안하기 전에 그가 갖고 있는 전문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중을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살아가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송승환 씨의 장관직 거부와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자꾸 연결되며 멋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감상은 아니리라.

 

2018.03.3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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