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다

86일 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감기약 기운 때문인지 몸이 침대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어젯밤 약을 먹고 잠이 들면서 춥기도 했지만 땀을 흠뻑 빼고 나면 개운해지리라는 생각에 긴팔 후드티를 입고 잠이 들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진이가 아파서 새벽에 잠이 깼다. 약을 챙겨주었지만 유진이도 좀처럼 몸살을 떨치지 못했다. 빡빡한 여행 일정에 먹는 것은 부실한데, 날씨는 더워서 에어컨을 계속 틀고 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약을 먹고 땀을 흘린 덕에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나도 순간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는데 내가 아프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아파도 일정은 진행해야만 했다. 더구나 아침에는 형식이 부부와 아침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더욱 기운을 내야만 했다.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그쳤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형식이 부부가 숙소 로비로 왔다. 근처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식은 우리 아이들을 어렸을 때 보고 처음 보는 것이다. 그가 뉴욕지사 근무를 하느라 미국에 있는 동안 세월은 부지런히 갔고, 돌아왔을 때에는 아이들이 커서 제 각각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가족끼리 만나는 모임을 별로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식은 훌쩍 자란 유진이와 효진이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이 무모한 횡단여행을 감행하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는 대학교 졸업 이후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늘 분주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바쁘게 뛰느라 늘 피곤한 모습으로 만나곤 했었다. 그런데 시카고 지사로 나온 불과 몇 달 사이에 형식은 건강과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형식의 눈에 나도 아마 그렇게 비춰졌으리라. 남의 나라에 와서 비로소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보면 한국에서 우리 생활이 가파르긴 가파른가보다. 치열하고 분주하기만한 우리네 일상의 정체를 남의 나라에 와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형식이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형식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과외를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다. 형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착하고 순해서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3, 어렵게 부모님을 설득해서 평생 처음 과외를 막 시작했는데 바로 과외금지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더 보지 못하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친해졌던 친구다. 늘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면 형식이네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자주 놀았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딱히 무엇을 하고 노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형식의 집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주 다닌 만큼 그곳에서의 추억은 언제나 화수분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형식은 내게 출발 전에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핀잔을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우리로 인해 번거로워지는 것은 아내나 나나 딱 질색이었다. 형식의 아내는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먹은 것으로 하자고 사양했다. 내일 일정이 바쁘기도 했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의 얼굴 보았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시카고는 보아야할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 뉴욕이나 워싱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빼고 시카고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아이들이 과학 산업 박물관(Museum of Science and Industry)을 보고 싶어 해서 먼저 그곳으로 갔다.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 전경()과 뒤쪽 공원에서 주말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과 임시로 설치한 놀이기구()

과학 산업 박물관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메인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크고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이 돋보였다. 건물도 건물이었지만 그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서 건물 뒤쪽으로 가보니 숲과 잔디밭이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한가하게 즐기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 놓고 가볍게 춤을 추는 사람들, 아이들을 위해 공기를 불어넣어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있는 사람들, 바비큐를 만드는 사람들, 앉거나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운동을 하는 사람들……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 풍경이었다. 제 각기 자신의 취향대로 즐기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이렇게 주말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적극적으로 쉰다는 점이다. 한나절 쉬겠다고 차일부터 테이블, 의자, 간이침대, 앰프, 음악 믹싱기, 이동식 놀이기구, 엄청난 양의 음료와 음식을 트럭에 싣고 와서 일일이 그것을 설치하고 즐기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 많은 짐을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만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테고, 그것을 일일이 설치하는 일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거기에 바비큐 그릴을 설치하고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우면서 마시고 노는 그들의 모습은 유쾌하고 건강해보였다. 아내와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쉬고 노는 것에 참 결사적이다.

산업과학박물관 내부(), 비상구에 새겨진 닐 암스트롱의 경구(), 로봇 팔을 체험하는 아이들()

미국 중서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이라더니 정말 산업과학박물관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1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우주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나올 때 찾아가란다. 물론 선택사항이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20-30달러를 요구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크루즈를 타기 전에 사진을 찍었는데, 크루즈를 마치고 나오니 금문교와 합성해서 멋진 사진을 만들어 두었었다. 크고 작은 사진과 작은 액자까지 포함해서 30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사진이 낯선 곳에 걸려 있다가 폐기되는 것이 꺼림칙해서 구입한 이후로는 이런 식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에서 완성된 사진은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박물관을 돌다보니 항목별로 몇 군데 사진촬영 장소가 더 있었다. 입장료 외에 수익을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돌아보니 모든 전시물이 체험중심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지고, 타보고, 조정하는 것이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초등학생들이 메인 타깃으로 보였다. 그러니 효진이가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진이까지 좋아하니 다행이었다. 전시된 콘텐츠도 콘텐츠지만 그것을 즐기게 하는 방식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방학 숙제하느라 서울국립과학관을 찾았던 나이가 유진이보다 한 살 어릴 때였으니 1980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책으로만 보고 외우고 평가하던 것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었던지그때의 감동이 생각났다. 방학숙제 하느라 친구와 세운상가에 가서 라디오 조립 키트를 구입한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는데, 서울국립과학관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배고픈 것도 모르고 문 닫을 때까지 있다가 집에 늦게 돌아와 꾸중을 들었던 기억까지 나면서 그때 같이 갔던 친구 우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낯선 시카고에서 느닷없이 1980년 서울을 만났다.

미국식 유머인 샌드위치(), 동작센서에 의해 인터랙션하는 체험(), 공기분사 체험()

산업과학박물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진진했다. 박물관 초입에 놓여있던 몇 개의 전시물은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추측해보는 것이었는데, 모래(sand) 위에 마녀(witch)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샌드위치(sandwich)를 연상하는 식이었다. 몇 개는 답을 찾고 아이들과 웃었는데, 몇 개는 도통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양한 종류의 과학실험도 실험이었지만 일상 속에서 궁금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체험코스가 구성되어 있었다. 가령 대형 트랙터와 영상을 결합하여 옥수수를 어떻게 수확하는지를 보여주는 체험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옥수수대를 자르고 낱알을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물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고, 트랙터를 실제로 조정해볼 수 있게 하였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군함과 상선을 5,000척 이상 격침시켰다는 독일 잠수함 U보트(U-boat)의 실물을 전시하고 내부도 둘러볼 수 있게 하였다. U보트는 역사적 맥락을 누락한 채 전설의 잠수함으로 전시도리 뿐이었다. U보트 전시관 끝에는 예상대로 U보트 관련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체험할 것이 많다보니 관람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냉방이 너무도 잘되고 있어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는 몹시 추웠다. 몸이 으슬으슬 거리고 이곳저곳이 쑤셔왔다. 무리했다가는 나머지 일정과 내일 이동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관람을 멈출 수는 없고, 아내에게 잠깐만 차에 가서 쉬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 직사광선으로 차 안은 무척 더웠다. 창을 조금 내리고 직사광선은 조금 가리고 한 시간쯤 그곳에서 몸을 데웠다. 마치 샌프란시스코나 몬트레이에서 만났던 바다사자가 햇볕에 몸을 데웠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찜통처럼 느껴졌을 차 안이 오히려 고마웠다. 한 시간쯤 차 안에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산업과학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산업과학박물관은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유니크한 아이템을 전시했다거나 굉장한 과학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궁금해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직접 만지고, 타보고, 체험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관람자 수가 연간 400만 명에 달한다니 그 체험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과학과 산업을 절묘하게 통합하고 있다는 점과 박물관과 외부의 공원이 유기적으로 잘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박물관도 보고 가벼운 피크닉도 즐길 수 있다면 주말 프로그램으로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것은 시설이나 전시물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힘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을 보다가 또 점심때를 놓쳤다. 이미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나 시카고 미술관을 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고, 몸도 좋지 않으니 시카고의 명물이라는 우노 피자를 먹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종의 여행 중 조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일 일정을 장담하기 어려운 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시건 호를 따라서 달리는 도로()와 미시건호 주변에서 세그웨이를 즐기는 사람들()

차로 달리면서 보니 미시건호 주변에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는 모습이 여유로워보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에서 체험했던 세그웨이를 타고 호수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잔디밭에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멀리 요트를 타고 나간 사람들까지 한가로운 주말의 풍경이었다.

시카고에서 보아야할 것이 어디 한가롭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일까 마는 내게는 그 모습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분주하기만한 한국에서의 내 생활 때문이었을까? 평소에도 보면 미국인들은 평일 저녁에도 운동장에 불을 켜고 운동을 즐긴다. 어디 그뿐인가, 야구,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을 시즌별로 나누어 일 년 내내 직접 즐기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업무를 마치고도 업무의 연장인 약속이 계속되고, ‘월화수목금금금이 반복되는 생활인데, 여기서는 그런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지 마음가짐의 차이만은 아니리라. 사회적 합의와 분위기가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였을 것이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일 텐데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아 자꾸 그들의 모습과 견주어 보게 되었다.

시카고 시내(), 보도 위에 새겨진 이정표(), 주차 표지판()

시카고에 가면 피자를 꼭 먹어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우노 피자나 지오다노 피자가 그것인데, 이왕이면 우노 피자를 먹어보라고 했다. 시간이 된다면 둘 다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우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피제리아 우노’(Pizzeria Uno) 레스토랑과 지오다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지오다노’(Giordano's)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피제리아 우노에서 피자를 먹고, 이어서 지오다노로 가서 피자를 먹겠다는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피제리아 우노로 갔다.

피제리아 우노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비교적 저렴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주차장이 없어서 근처에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 주차를 했다. ‘피제리아 우노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미 많았다. 생각보다 레스토랑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테라스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예약을 해주는 아가씨가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서 갔더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조금 기다리는 사이 먼저 주문을 하란다. 그러면 자리와 동시에 피자가 나온단다. 주문을 하고 있으려니 바로 자리가 났다. 1943년에 처음 영업을 시작한 장소라서 그런지 낡은 건물과 소박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정겨웠다. 실내는 조금 어두운 편이었고, 테이블 사이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비교적 넓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피제리아 우노(), Numero Uno 피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 아가씨 혼자서 피자를 먹고 있었는데 그 두께와 양을 보고 놀랐다. 메뉴에는 딥 디쉬(Deep Dish) 피자라고 적혀있었는데 옆 테이블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자 팬의 깊이가 무척 깊었기 때문이다. 양이 넉넉해 보였지만 먹성 좋은 우리 가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믿고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로 시켰다. 피자가 나온 것을 보니 양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효진이는 미트볼 스파게티, 유진이는 샐러드를 시켰으니 양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오늘은 제대로 먹는 날이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아니면 어제 아내의 말을 기억한 것인지 모두 시키고 싶은 것들을 시켰다. 음식은 예상대로 모두 양이 넉넉했다. 특히 피자 반죽이 아니라 파이 반죽으로 만든다는 두툼한 도우(dough)의 양이 많다보니 결국 피자는 1/2밖에 먹지 못하고 가져와야 했다. 미트볼 스파게티는 미트볼은 맛이 있었으나 스파게티는 싱거워 기대만 못했지만 샐러드는 야채와 소스가 신선했다. 물론 피자의 맛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조금 많다싶을 정도로 넉넉한 토핑의 신선한 풍미와 치즈의 식감 그리고 두툼한 도우의 바삭함이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사람들은 피자를 먹으며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 삭스 간의 야구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곳이 시카고니 당연히 이만수 감독이 한국인 최초의 유급코치로 활동하던 시카고 화이트 삭스 경기를 볼 줄 알았는데, 뉴욕과 보스턴의 경기를 보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미국인들에게는 영원한 라이벌인 뉴욕 양키즈와 보스톤 레드삭스가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고 들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각자 피자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응원하는 팀의 안타나 호수비에 조금씩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나는 시카고 맥주를 한 잔 시켜서 피자와 같이 먹었다. 시카고 맥주는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향이 깊은 묘한 맛이었다. 물맛이 중요한 맥주는 반드시 현지 맥주를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시킨 것은 한 잔이었지만 500cc 정도 되는 양이 나왔다. 피자도 그렇고 맥주도 그렇고 양이 참 넉넉했다. 이탈리안 식당 특유의 넉넉함이었을까?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누어서 천천히 마셨다.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 가격이 27.29달러니 한국 피자 가격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피자를 먹고 나자 우리 중 누구도 지오다노 피자를 먹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두 곳의 피자를 다 먹겠다고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다 먹지 못하고 싸온 우노 피자가 알려주고 있었다.

주차비를 정산하고 보니 25달러였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피자 값보다 주차비가 더 클 뻔했다. 토요일인데도 시카고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곳곳에 공사 중이어서 사만다의 데이터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카고 외곽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사만다가 우회로를 택했는데, 거기서 헤매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정을 빨리 마쳤음에도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 길과 올 때 길이 달랐으니 좀 더 많은 것을 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발견하는 길들은 대체로 나름의 운치와 체험을 주는 것들이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면서 버릴 경험이 없듯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세상 모든 길을 다녀보았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아직 다녀보지 않은 더 많은 길들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언제나 새로 생기고 없어짐으로써 새로운 길이 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자신이다. 어느 길이든 볼 것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위를 걷는 자의 체험이다. 항상 체험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하여 단지 두 지점을 연결할 뿐인 속도의 길은 길이 아니라 도로일 뿐이다. 도로는 속도를 이야기할 뿐 그 안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새롭거나 내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횡단을 통해 만나는 그 모든 길들은 아직 우리에게 길로 기억되고 있다. 체험으로 구성되는 우리의 길들이 어떠한 새로움과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나의 낙관적 기대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가고 있는 이 길과 관계되리라는 것은 안다. 아직은 그것으로 족하다.

몸이 아프니 상념만 깊어진다. 사위는 온통 어둠인데 의식은 또렷해질 뿐이다. 조바심은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길 위에 오르고 나니 그 몹쓸 습벽이 살아나나보다. 하지만 굳이 따라온 녀석을 내칠 일도 아니리라. 그게 우리의 길이고 여행의 스타일이라면 우리 스타일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당위적인 답안을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 아니지 않는가? 길이 데려다 주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속도가 횡단여행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니 이제 조바심도 따라온다면 데리고 다녀야겠다.

내일은 밀레니엄 파크와 시카고 미술관을 들렸다가 클리블랜드까지 달려야 한다. 오늘 몸 상태로 봐서는 내일 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 며칠째 먹고 있는 감기약은 독할 뿐 좀처럼 감기를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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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87일 시카고클리블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남겨온 피자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설 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비가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몸살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보니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비는 밀레니엄 파크로 이동하는 중에 그쳤다.

오늘은 클리블랜드까지 371마일(594)을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딱히 볼 것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와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보고 시카고에서 느지막이 떠나기로 했다.

여행계획을 짤 때도 클리블랜드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외에는 클리블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보니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까지 10시간 정도 거리니까 무리하면 못 달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약 지체되면 클리블랜드를 생략하고 나이아가라로 가서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설정해 둔 것이 클리블랜드였다. 다행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시카고에서 늦게 출발하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나이아가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우리는 시카고 미술관을 꼭 들러보기로 했다. 또 시간이 된다면 밀레니엄파크도 보려고 했는데, 마침 두 곳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두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사실 시카고에 도착하면서부터 사만다가 거의 패닉상태였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유난히 많은 고가도로 밑에서는 수신이 원활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고는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카고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사만다는 다급해지거나 침묵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만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들이었다.

길을 잃고 다시 만난 길(), 그 와중에 만난 시카고 극장()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시카고에서 사만다는 자주 길을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만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길을 잃으면 새 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문득 시카고 극장 앞이었다. 1921년에 개관한 시카고 극장은 미국 최초의 대형 극장이라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을 축소한 모양인데 특히 건물 앞에 걸린 초대형 붉은 간판이 선명했다. 그 앞에서 롭 마샬 감독의 영화 <시카고>(Chicago, 2002)[각주:1]가 떠오른 것도 그 붉은 간판의 선명함 때문이리라. 영화 <시카고>에서 보여준 뜨거운 욕망을 지금 이곳시카고에서 보기에는 머물 시간이 너무 짧았다. 주중에 그토록 분주하고 혼잡스러웠던 시카고의 일요일 오전은 서울의 그것처럼 한가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처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처연한 기분은 밀레니엄 파크에 도착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밀레니엄 파크 건너편 시카고 미술관 옆에서 음악공연이 있어서 공연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성스러운 분위기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지도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은 2004년에 했다고 한다. 음악공연 관계로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밀려드는 차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밀레니엄 파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야외 음악당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루리가든(Lurie garden),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왼쪽으로 루리가든(Lurie garden)이었다. 피에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했다는 루리가든은 부단히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일 년 내내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는 주차장에서 바로 북쪽으로 걸어가서 찾았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는 일상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시카고 미술관에 빼앗기고 있어서 입구를 찾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루리가든 앞쪽으로 걸어가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이 등장했다. 웅장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객석과 대규모 잔디밭(Great Lawn)을 두고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잔디밭 위까지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전경과 지붕

잔디밭을 덮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에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근처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와 있었다. 공연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은 지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봉과 봉이 만들어내는 프레임 사이로 주변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오고, 그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밀레니엄 파크가 시카고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련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공연장 지붕을 덮고 있는 조형물만큼이나 이 봉 구조물의 다채로운 프레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는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공연장만큼 스산한 풍경은 없다. 일요일 오전, 비가 내린 후의 야외 공연장은 그저 푸른 잔디밭일 뿐이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은 공연장으로 설계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새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공연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연장의 조형물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공연장과 잔디밭을 오간다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설치미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을 보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애니쉬 카푸(Anish Kapoor)가 만든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나타났다. 크라우드 게이트를 보는 순간 일단 그 크기(높이 10m, 너비 13m, 길이 20m)에 압도된다. 밀레니엄 파크의 방문 인증샷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10톤이 넘는다는 무게와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다 스테인리스를 이음매 없이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람과 안개 그리고 추위로 유명한 시카고의 일기를 생각할 때, 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되는 표면에 두 번 놀라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 세 번 놀라게 된다.

크라우드 게이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신을 비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면 구름을 형상화한 것인데, 영감은 액체수은에서 얻었다고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콩(Bean)이라고 부르니 재미있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혹은 다양성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밖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굴절되어 반사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크라우드 게이트는 되비춤을 통해서 세계를 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밀레니엄 파크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의 모습과 다양한 상호작용의 사례

크라우드 게이트는 중앙에 3.7m의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거울 앞에 서 보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낯선 모습의 나와 너라면 그것은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가족들 사진도 찍고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강하게 밀었다. 어디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이었다. 무례하고 세련되지 못한 중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횡단 여행 중 곳곳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례를 넘어 난폭하기까지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바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야 뭐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을 휩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만났던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LA 인근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에서는 중국인 전담 종업원을 두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소공녀소공자라고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의 무례함[각주:2]은 그 끝을 모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원을 만들어 웃고 떠들며 주변은 무시한 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더 불쾌해질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폭력이 폭력을 부르듯 무례는 무례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들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크라우드 게이트 옆으로 조금 이동하니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가 있었다.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설계를 했다는 이 작품은 제작을 위해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레스터 크라운(Laster Crown)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24m 높이의 두 개 기둥에는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13분마다 얼굴이 비디오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카고 시민들이라고 하니 공공미술(public art)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과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완성과 해체를 거듭하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과 크라우드 게이트 그리고 크라운 분수까지, 밀레니엄 파크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곳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 새 천년을 기념으로 공원을 조성하며 시카고가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블어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것이 새천년의 시카고에서 이루어지길 기원한 내용이었으리라.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는 개개의 독립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 간의 소통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상호소통을 통해서 밀레니엄 파크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직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미술관 안에 벌써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들의 이름이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점이었다. 이름까지 좀 더 멋스러운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름을 내주고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름까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시카고 미술관 전경과 입구 그리고 실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이라는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밀레니엄 파크와 니콜라스 다리(The Nicholas Bridgeway)로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규모 면에서도 미국 내 2위에 해당한다는 시카고 미술관은 26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간 18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1866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 아트 아카데미를 거쳐 1882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과 미술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3콜럼버스 세계 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 이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축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가 증축한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다리를 통하여 2009년에 증축했다는 현대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무료고 어른은 18달러의 입장료를 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무료였고, 시카고미술관은 어린이들은 무료인데, 둘 다 신선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화공간의 무료관람을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1층은 18-19세기 미국 미술, 2층은 미국 모더니즘을 테마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호, 세잔, 르노아르,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등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들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 밖에서 만난 강렬한 느낌의 그림들은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미국작가들의 작품임을 알았다. 특히 시카고 미술관에서 꼭 봐야한다고 소개된 그림들은 그 소개가 아니더라도 미국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인해 그림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

스로우 호머의 <The Herring Net>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Nightlife>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각주:3]<Nighthawks>는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도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보여지는 아이러니의 공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모두 어긋나고 있는 관계의 메타포, 텅 빈 듯한 공간의 구도 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Arcibald J. Motley Jr.)<Nightlife><Nighthawks>와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도 소란스러운 공허가 읽히는 작품이었다. 윈스로우 호머(Winslow Homer)<The Herring Net>는 프레임 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꽉 찬 두 어부와 청어 그물이 거센 파도와 함께 고된 노동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면서 같이 보고 그 느낌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따라갔다.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내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손을 잡고 때론 어깨를 걸고, 옆에 세우기도 하고 앞에 안기도 하면서 좋은 그림을 가족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감상에 젖어서 내가 미술관을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가본 것은 대학교 입학한 이후였을 것이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미술책이 전부였던 내에게 미술관은 차라리 강박에 가까웠다. 꼭 가서보아야 한다고 늘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가서는 낯설고 불편했던 공간이 미술관이었다. 대학원 시절 화집을 사서 모으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그림을 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한 이 체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 품에 안겨서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따듯한 체험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품들을 코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신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갤러리를 돌고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의자가 있으면 자꾸 앉으려 하고 몹시 지쳐있었다. 아내와 나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일러주고 좀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들을 도통 몰랐다. 어린 효진이는 그렇다고 쳐도 유진이는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요즘 미술시간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는단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외울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시회에 가면 작품 옆에 다 적혀있지 않은가? 작품을 보고 좋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엄마랑 아빠가 보는 동안 쉬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법 많은 방을 같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버릴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손잡고 작품을 설명해주던 엄마의 손길, 안고 이야기해주던 엄마의 체취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따듯한 기억이 될 것인가? 세계적인 명화도 명화였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시카고 미술관에는 동양 예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많았고 우리 것은 거의 없어서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들이 모두 합당한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던졌다. 전시된 개인 소장품들은 대부분 고서화나 오래된 도자기들이었는데, 그것이 약탈이나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더라도 유실 가능했던 것들이 잘 보존되었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약탈이나 밀반출의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소유로 볼 수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채우고 그것을 세계 최고 박물관 운운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등.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창작된 그 나라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방적인 약탈이나 불법적인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당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소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대여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나라 미술관에서 자기 나라 유물들이 많고 적음을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문화적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인정투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거나 합법적인 경로로 마련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몇 개의 전시물로 과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작고 소박한 한국관을 보면서 갑자기 맥락 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내와 나는 더 돌아보고 싶은데 유진이가 감기의 여파로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효진이가 피곤하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2시쯤에는 관람을 마칠 계획이었다. 시카고에서 끝나는 것이 Route66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보겠다는 욕심에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다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만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제대로 보려면 2-3일쯤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쩌면 미술관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책 한 권 읽듯이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에 가까운 것이리라. 문화에 모두, 전부, 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개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체험하는 향유 자체가 문화가 아니던가?

태평천하를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태평천정이 된 조악한 기념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서면서 입구의 기념품점에 들렀다. 기억이 될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만한 것이 없었다.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써져 있어야 할 곳에 태평천정(太平天丁)이라고 적힌 기념품을 보면서 저것도 혹시 중국제품이라면 웃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조악한 모조품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특히 엉터리로 한자를 써놓은 기념품들을 보면서 씁쓸했다. 시카고를 떠나면서 시카고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되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그곳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오늘의 감동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욕심나고 더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의 1단계인 Route66 코스는 마쳤다. 이제 클리블랜드부터는 여행의 2단계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동부여행이다. 풍광이나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까지 I-90I-80타고 갔다. 이 도로들은 이전까지의 도로들과는 다르게 유료도로기 때문에 서비스플라자(Service Plaza)가 설치되어 도로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비스플라자는 주유소,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피자집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보아온 주유소나 패스트푸드점과는 브랜드가 바뀌어 있었다. 달리면서 몇 군데 서비스 플라자에 들러보니 대부분 bp주유소,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이곳의 서비스플라자도 제품 대비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시카고 스카이웨이 톨게이트(),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에 만난 철교()

아직 유료도로가 시작되기 전인 시카고를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내려섰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감기약만 구입해서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사만다의 혼란은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어서, 일러준 그대로 달려가다 보면 공사 중이거나 막힌 길이었고, 목적지라고 해서 보면 낯선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사만다를 무시하고 표지판만 보고 음식점을 찾기에는 찾아야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배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료도로를 만나 서비스플라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계획보다 많이 남은 햇반

8시가 지나서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기대보다 괜찮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제공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저녁이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컵라면 2개와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이제 슬슬 김치가 그립기 시작했다. 그나마 느끼한 현지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컵라면이 떨어졌으니 큰일이다. 한인마트를 찾아야 구입할 수 있을 텐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한인마트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보다 컵라면은 많이 먹었고, 햇반과 3분 카레 등은 기대만큼 먹지 않아 많이 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햇반의 어정쩡한 온도와 흐물거리는 3분 카레의 식감에 물리나보다. 나도 그러니 어린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군말 없이 잘 참아주니 고맙고 대견하다.

내일은 일찍 나이아가라로 출발해야 한다. 일찍 출발할수록 좀 더 많이 보거나 천천히 깊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실수로 캐나다 쪽 숙소를 잡은 덕분에 내일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보다 캐나다 쪽이 더 멋있다고 위로하며 출발 전에 학교 인터내셔널 오피스에서 입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왔다.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입출국사무소 관리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던데, 기대가 된다. 실수는 대부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1. 192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연극작품을 1975년 뮤지컬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자 2002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가 출현한 뮤지컬 영화다. 재즈, 갱, 관능, 쇼 비즈니스 등과 같은 시카고의 이미지와 황색언론, 살인 등의 대중적인 요소들을 통합해서 구현한 뮤지컬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All That Jazz'와 'Roxie' 같은 넘버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정 당 한 명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자녀를 공주와 왕자로 키우는 중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 이렇게 여섯 명의 어른이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와 공주로 성장하게 되고, 이들의 모습을 비꼬아 소공자, 소공녀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3.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알랭드 보통은 그의 그림에서 고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공허에 마음이 울렸다. 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국내 최고의 웹툰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페이스 북에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체험을 구현하는 작가의 매혹은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 눈을 빼앗기고 가슴에 새기게 되나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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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일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 폭포(캐나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어이 클리블랜드는 괄호 속에 묶으려는 듯,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는 급하게 서둘러 클리블랜드를 떠났다.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229마일(366)이니 네 시간이면 족할 거리였다. 횡단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 네 시간 정도의 거리는 아주 행복하게 즐길만한 거리였고, 심지어 그 다음 일정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거리였다. 심리적인 거리는 언제든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선다.

사람 사는 동네니 클리블랜드라고 왜 볼 것이 없었을까마는 볼 것 많은 시카고와 나이아가라 폭포 사이의 일정이다 보니 마음은 이미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너무 이르게 떠나고 있었다. 일찍 출발을 서두른 덕분에 우리는 점심도 먹기 전에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고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오후를 온전히 보내고 야경까지 돌아본 후에 내일 아침 일찍 보스턴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서는 오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의 일정을 마쳐야했다. 더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가 오늘 달린 거리의 족히 두 배는 되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클리블랜드를 떠나오는 길에 우연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장인 프로그레시브 필드 (Progressive Field)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에 오면서부터 추신수 선수와는 묘한 인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유진이가 추가 보완검색을 받느라 탑승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추신수 선수 가족이 우리 가족 옆을 지나가서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 많은 탑승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서너 명을 뽑아서 하는 추가 보완검색에 하필 유진이가 지명되어 지체된 것부터, 덕분에 추신수 선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묘한 우연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날 유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추가 보완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신을 벗게 하는 바람에 아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 추가 보완검색을 마치고 나온 유진이에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고 하니, 아이는 태연히 공항에서 이미 보았는데, 그가 박태환 선수인 줄 알았단다. 그 특유의 호쾌한 타격과 빨랫줄 송구를 좋아하는데,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탄 것은 미국행의 좋은 징조가 아니었을까?

LA에인절스 구장에 온 추신수 선수 응원 문구.

4월 중순쯤인가 코스트코에서 LA 에인절스 스타디움 입장 티켓을 세일해서 팔고 있었다. 집에 와서 경기 스케줄을 확인하니 마침 5월초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가 있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LA 에인절스의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더구나 LA 에인절스에는 행크 콩고(한국명 최현)까지 뛰고 있으니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티켓을 구입하고 에너하임의 LA 에인절스 구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당일 입장권으로 교환을 했다. 홈팀인 LA에인절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방문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입장권으로 교환하면서 고민을 했었는데, 유진이가 단호하게 LA 에인절스에서 응원해야 한단다. 그것이 이 지역에 사는 도리란다.

두 선수를 경기장에서 볼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추신수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아야 해서 그날 경기에 출장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망하고 응원 플래카드도 만들지 않고 있었는데, 경기가 있던 당일 인터넷에서 보니 재판이 연기되어 추신수 선수가 출전한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유진이와 급하게 응원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추신수 선수만 응원하기 아쉬워 뒤편에는 영어로 행크 콩고의 응원 문구를 넣었다. 작은 플래카드였으니 반대편에 있던 추신수 선수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메이저리그 구장에서는 특정 선수의 이름이 적힘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것은 불법이란다. 응원문구를 한글로 적어서 그랬는지 우리는 별문제 없이 응원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리그에서 수많은 차별을 극복하면서 우뚝 선 추신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벅찬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주운전 파문을 잘 알고 있는 LA 에인절스 관중들이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타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날 경기를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매일 승부의 세계를 건너고 있는 추신수 선수의 스트레스나 내면의 갈증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기를 원하는 우리가 알 도리가 없는 부분이겠지만,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가파름만은 느낄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늘 그 실천이 가파를 수밖에 없다. 한 발 제겨디딜 곳 없는 승부의 세계, 모든 것이 낯설고 노골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공간, 최고가 되지 않으면 다음이 없는 상황, 그 가운데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 겪게 될 그 절박함은 막연한 예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뉴욕 여행과 연계하여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는다는데,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두 미국 쪽 보다는 캐나다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나중에 일러주었다. 그렇다고 정보에 둔감한 내가 그것을 알고 캐나다 쪽에 숙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가격대비 좋은 숙소를 찾다보니 환불이 안 되는 조건이지만 맞춤한 것이 있어서 예약했다. 예약을 하고 주소를 정리하다가 보니 숙소는 캐나다에 있었다. 환불이 안 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캐나다를 다녀오려면 UCI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방문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아둔하면 침착하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명민하지도 못하고 덜렁대기까지 하다가 얼떨결에 캐나다 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실수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 되었으니 변방 늙은이의 말(塞翁之馬)을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는 일이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입국할 때 입국심사는 까다롭지 않았다. 여권, 미국 비자, DS2019, I-94서류만 의례적으로 확인하며,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정도를 묻는 수준이었다. 다만 차 한 대당 3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했다. 어떤 명목으로 내는지 알지도 못하고서 수수료를 내려니 금액을 떠나서 조금 억울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입국심사를 하는 붉은 제복의 청년이 친절한 것이 위로가 되었다.

문득 미국에 입국할 때 LA공항에서 가족들과 두 시간을 기다렸던 생각이 났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지 불필요한 것까지 챙기면서도 무성의하고 더디기만 했던 미국 입국심사는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에서 보여주었던 과장된 공포의 단면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순간 반미를 넘어 혐미(嫌美)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어쩔 수도 없었던 체험이었다. 두려움은 미혹을 부르고, 미혹은 다시 더 큰 두려움을 부르는 공포의 환()이 끊임없이 이어져,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는 두려움만 남은 상태였다. 그것에 비하면 캐나다 국경은 입국환영행사장에 가까웠다.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의 맥락 없고 소박한 거리

시카고에서 그토록 정신 차리지 못하던 사만다가 오히려 캐나다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국경을 통과해서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 보니 소박한 거리가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어져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으면서 보니 주변 거리가 참 맥락 없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카지노,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Ripley's Believe It Or Not!), 기네스 세계 기록, 왁스 뮤지엄 등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박하거나 조악하다는 느낌을 넘어서기 어려운 놀이 시설과 식당들이 줄지어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주차를 하려고보니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까울수록 주차비가 비쌌는데, 하루 종일 7달러12달러15달러였고, 6시 이후에는 5달러였다. 시카고에 비하면 그리 비싼 금액이 아니었고, 조금 먼 주차장이라고 해도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먼 곳에 주차하고 거리를 구경하며 폭포까지 걸어 내려갔다.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다양한 패키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안개 아가씨호(Maid of the Mist)를 타고 폭포만 체험(어른 14.60달러, 어린이 8.94달러에 세금 13% 추가)하고, 남는 시간에 폭포 주변과 폭포 외곽을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안개 아가씨호 예약을 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밥은 예외 없이 규칙적이고, 몸과 마음의 상태와 무관하게 진솔했다.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진다는 예외 없는 규칙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반복되고 있었다. 더구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밥은 늘 푸지고 넉넉했다. 더구나 끼니를 거르는 일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가족은 늘 밥과 상관되어 있다. 언제나 저녁 밥 짓는 냄새는 눈물겹다. 그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따듯함이거나 위로에 가까운 것이다. 하루의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기진해서 돌아와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더 먹으라는 사랑스런 성화와 함께 나누는 따듯한 밥과 국의 위로는 밥이지만 늘 밥 그 이상이다.

여행을 하면서 아침은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이동 중에 패스트푸드로, 저녁은 햇반, 카레, 짜장, 컵라면 등을 이용하거나 몇 차례 현지식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밥을 벌어오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힘들어도 밥이 만족스러우면, 그것이 힘이고 위안이 될 텐데, 밥이 부실하니 가장으로서 미안할 뿐이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가족 모두 아침의 간편식에는 적응이 되어갔지만, 패스트푸드와 햇반에 카레는 서서히 물려가고 있었다. 옐로우스톤 여행 때까지만 해도 어쭙잖은 현지식보다 햇반에 카레가 제일 맛있다고들 했었는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입맛은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서니 딱히 마땅한 곳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스테이크를 먹은 적이 없어서 스테이크 전문점에 갔다. 집에 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수영장 옆에서 바비큐를 해주었을 것이다. 한국에 비해 식료품 값이 무척 저렴한 얼바인에서는 특히 소고기는 가격 대비 감동이었다.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이들 데리고 풀장에 나가 바비큐를 해서 먹고,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은 김치 볶음밥을 해주면 하루가 행복했다. 그렇게 먹고 풀장 옆에 누워서 썬텐을 하면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여유였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Kelsey's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중 깔끔하고 가장 식당스러워 보였다. 그곳에서 스테이크, 키즈 메뉴 2, 스테이크 샌드위치, 캐나디안 맥주를 시켰다. 나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스테이크는 어디를 가나 신뢰할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팁을 포함해서 78달러의 호사였다. 호사는 대부분 대가를 치르는 것이어서 덕분에 저녁은 다시 햇반에 3분 카레를 먹어야 했다.


안개 아가씨호 티켓판매소(),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안개 아가씨호(), 레인보우 브리지()

안개 아가씨호를 타기 위해 서서 기다리는 줄이 평소보다는 짧다고 했다. 줄을 서서 선착장까지 내려가는 길이 폭포 쪽으로 트여 있어서 기다리며 바라보는 폭포와 그것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사람 수만큼이나 많이 오가고 있었다. 안개 아가씨호라는 배 이름이 참 매력적이었다. 배의 크기나 용도와 상관없이 크고 강한 이름을 지은 배들을 보면 이름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은데, 안개 아가씨호는 작고 소박하면서 그 배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이름이었다. 뱃머리에 쓰여 있는 Maid of the Mist를 보니, M자가 주는 단단한 느낌까지 더해주고 있었다.

비옷을 입은 아내와 아이들. 효진이는 얼굴 젖는 것을 싫어해서 얼굴도 가렸다.

배를 탄 사람들을 보니 모두 코발트색 비옷을 입고 있었다. 비옷이라고는 하지만 얼핏 보면, 1970년대 많이 쓰던 파란색 비닐우산이 연상되는 비옷이었다. 비옷의 색깔도 색깔이었지만 비닐의 두께가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비닐우산이었다. 우비를 입고 폭포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내와 나는 우비를 그냥 주는 것일까, 구입하는 것일까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아내는 그냥 주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공짜가 어디 있겠느냐, 아이들의 동의를 구해가며 갈린 의견을 다잡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우리도 배에 오를 차례가 되었을 때, 한 청년이 커다란 비닐 통에 비옷을 잔뜩 쌓아놓고 서서 웃으면서 비옷을 나눠 주고 있었다. 비옷을 받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거 봐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내는 늘 옳다.

비옷을 펼치어 입고 보니 모두가 똑같아 보였다. 우비는 덩치 큰 이곳 사람들의 크기에 맞추었는지 효진이에게는 너무 커서 앞쪽을 한번 묶어주었다. 안개 아가씨호는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배에 오르자마자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보겠다고 사람들은 모두 2층 난간으로 몰렸다. 배는 지체 없이 떠났다. 멀리 레인보우 브리지(Rainbow Bridge)가 보였다. 내일은 아마도 저 다리를 건너야 하리라. 몇 마디 안전 수칙에 대한 안내 방송이 끝나갈 무렵, 배는 미국 쪽 폭포 앞에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미국 쪽 폭포는 낙차가 56m, 너비가 320m라는데, 보여주는 모습도 그랬지만 그 엄청난 소리만으로도 넉넉한 압도였다. 폭포 전체를 조망하면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몸이 젖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서 배는 멈추는듯하더니 이내 뱃머리를 돌려서 캐나다 쪽 폭포로 향했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고 오는 다른 배가 옆을 스쳐가자 모두들 유쾌한 함성을 질렀다. 캐나다 쪽 폭포는 낙차 54m, 너비가 675m인데 말발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호스슈(Horse Shoes)라고도 불린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본류라고 볼 수 있는 캐나다 쪽 폭포는 미국 쪽 폭포에 비해 수량이 여섯 배나 많다고 한다. 캐나다 쪽 폭포에 다가서자 사람들의 탄성이 잦아졌는데, 크게 탄성이 터져서 돌아보니 폭포 주변에 낮은 높이의 무지개가 선명했다. 비웃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젖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보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데, 보고 즐기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고 보면, 두 쪽 모두를 온전히 살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만, 나이아가라 폭포에 와서 캐나다 쪽 폭포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캐나다로 건너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폭포만큼이나 낯선 캐나다 사람들의 매력까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스슈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 위 작은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는 물새들이 기진한 날개를 쉬는 듯 서 있었는데, 그 실루엣은 물새들을 더 작게 만들고 있었다. 폭포 소리에 이미 울음소리는 스러져버린 작은 물새들의 바위 옆으로 크고 작은 물결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폭포에서는 떨어지는 높이가 늘 솟구쳐 오르는 높이보다 크다. 떨어지는 높이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차고 오르는 높이도 큰 것이 또한 변함없는 이치다. 가늠할 수 없는 양과 거역하기 힘든 속도로 밀고 와서 문득 떨어져버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산 것들의 냄새, 살아야 한다거나 살고 싶다거나 하는 의지 이전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 그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천지 사방에 가득 찰 때쯤, 배는 출발한 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폭포를 돌아볼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더운 날이었다. 비옷을 벗고 나니 시원했다, 잠시 동안만. 나이아가라 폭포 기념품점에 들러서 아내는 냉장고 자석을, 아이들은 엽서를 구입했다. 나이아가라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꿈틀대는 장면에 압도된 가족들은 야경을 보고 숙소로 가자고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저녁 9시에 조명이 들어오니 꼼짝없이 9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상점에서 발견한 아이디어 상품들

근처에는 선물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미국과는 다른 독특한 제품들이 보였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스 와인이나 메이플 시럽은 워낙 유명한 것들이고, 매장을 둘러보다 아이스하키 피큐어를 하나 구입했다. 아이스하키 복장과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복장을 결합하여 만든 캐릭터가 재미있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소방관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가게는 아이디어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생활 속의 작은 아이디어들을 상품화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엇보다 그런 상품이 개발되고 판매되는 문화가 부러웠다. 세상을 뒤집을만한 즐거움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잊고 있다가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장난스러운 소품들, 보면서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이 시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것들, 생활 속의 작은 불편을 해소시켜주는 소품들이 끊임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그 매장의 대표상품은 왁스로 자신의 손 모양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조악한 색깔의 투박한 모형보다 아이디어 상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모래를 이용해 투명한 호리병 안에 그림을 그리는 노인은 쉬지 않고 떠들면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골 장터에서 만났던 혁필 화가를 보는 듯 쉬지 않고 떠들면서 손님과 이야기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판매하기도 했다. 투명한 호리병 안의 그림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만드는 과정만은 넋을 빼앗길 만큼 신기했다. 깔때기로 필요한 색깔의 모래를 원하는 위치에 넣고 얇은 봉을 가지고 모양을 만드는 것만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일 텐데 끊임없이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거나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해서 숙련된 것이 분명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그렇게 신기했던 것이 막상 완성되고 나면 소박하기만 했다. 과정을 즐기라더니, 이 작업이 그랬다.

모래 그림을 그리는 노인

근처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허쉬 초콜릿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기사에 경악하면서 마구 성토하면서도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은 꼭 봐야한단다. 초콜릿의 달콤한 유혹이 벌레를 넘어선 모양이다. 미국에 와서 본 전문 매장(코카콜라, M&M's, 기라델리 초콜릿, 버드와이저 등)이 보여주는 매력과 소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문매장은 관련 상품 개발, 브랜드 이미지 및 고객 충성도 제고, 미래 고객 확보 등의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지만, 사지 않고 매장만 둘러보더라도 허쉬 초콜릿에 대한 충성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티켓센터의 모습

이곳 오락실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고득점을 성취하면 기계가 표를 발행하는데, 그 표를 티켓 기계에 넣으면 선물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티켓이 발매되는 방식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티켓의 양이 득점수와 비례하기 때문에, 고득점을 획득했을 경우에 한 아름 티켓을 안고 가야했다. 당연히 티켓이 출력되어 나오는 시간도 상당해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왜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아마 고득점을 얻고 나서 그 성취감을 티켓이 출력되어 나올 때까지 즐기라는 모양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수레 가득 지폐를 싣고 가서 감자 한 자루와 바꾸었다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우리와 달라서 즐거운 장면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매장마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격이 모두 다르고, 미국 달러를 내면 수수료 10%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직불카드로 계산을 해도 캐나다 달러 환율로 계산하여 추가요금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율 시세를 따져보니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비쌌고, 아무리 이웃 국가지만 환전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거스름돈은 캐나다 달러로 주면서, 그 때에는 거의 1:1로 계산을 해주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아홉 시를 기다렸다. 아홉 시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폭포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서히 폭포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기대만큼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사람들 이야기로는 근처의 타워에 올라가서 찍으면 정말 좋다는데, 짐 때문에 삼각대로 챙겨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곳에서 야간촬영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이곳에서 보고 찍을 수 있을 정도만 찍기로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나이아가라 폭포는 빛도 빛이었지만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낮 동안 숨죽여 있었던 듯, 자기가 낼 수 있는 속울음의 끝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어둠을 타고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점점 커져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인지, 아름다워서 살아남은 것들인지는 몰라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겁게 차고 오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것들과 관계된 것이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의 밤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야경()과 주변의 야경()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로 한숨에 달려와서, 캐나다 국경을 넘고 부지런히 돌아본 하루였다. 캐나다는 캐나다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폭포를 제외하고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싸구려 유원지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몰라도, 조금 실망스러운 풍경이었다. 폭포만 볼 수 있었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폭포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차를 몰아 숙소로 갔다. 마실 물이 떨어져서 근처 마트에서 물 한 박스를 또 샀다. 캐나다의 밤도 어둡기는 매 한 가지였다. 사만다에 의지해 달려와 보니 숙소였다. 이미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원 한 명이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체크인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친절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 직원들의 느리고 부정확한 일처리에 늘 답답했는데, 캐나다 직원의 일처리 속도는 가히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처리 속도가 빠르다보니 말도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진이가 옆에서 알아듣고 무사히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숙소의 직원뿐만 아니라 낮에 만난 캐나다의 매장 직원들은 미국 직원들에 비하여 젊고 예쁘고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미국 서부의 대형할인매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어서, 도대체 미국 젊은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아내와 농담을 했었는데, 캐나다에서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노동 인구의 연령으로 사회의 젊음을 측정하는 지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캐나다의 노동 인구가 미국 서부의 그들보다 젊은 것은 분명했다.

숙소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었고 깨끗했다. 아침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복도에는 열 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을 입고 1층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곳 사람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즐기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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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서 나를 보다

89일 나이아가라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더위는 식지만 운전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오늘처럼 이렇게 폭우 수준으로 쏟아질 때면 더욱 그렇다.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폭우를 뚫고 운전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한다고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심조심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보스턴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최소 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재입국할 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인보우 브리지를 통과했다. 멀리서 보기는 더없이 낭만적인 모양으로 캐나다와 미국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막상 달려보니 국경은 국경이었다. 수수료로 3달러를 요구했지만 친절했던 캐나다 쪽과는 다르게 미국 쪽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했다. 서류를 챙겨서 주었더니 대충 훑어보면서, 창문을 내리라고 하고, 불법적인 물품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여행객이라고 말하니 다시 서류를 훑어보고는 통과를 시켜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테러가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려서 꼼꼼하게 확인을 하든가, 불법적인 물품이 그렇게 염려스러우면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지, 고압적인 자세로 묻고 넘어갈 것을 그렇게 불쾌한 어투와 표정을 지을 것을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불법적인 물품을 가져오면서 가져온다고 말하겠는가?

몇 년 전부터 미국인들은 살인적인 의료서비스 비용과 약값을 이기지 못해서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서 의료서비스를 받거나 약품을 사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40,000달러가 넘는다는 나라에서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른 나라로 나라에 약을 사러 다니는 의약난민’(drug refugee)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제약사와 보험회사의 이익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태만이 맞물려 기형적인 약값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한 의약난민들 때문인지 국경에서 미국 입국심사관들은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는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나이아가라에서 보스톤으로 가는 I-90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I-90위를 달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인지 운전을 하는 내내 답답했고, 같은 차선의 도로임에도 좁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달려온 서부 쪽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길가에 나무들이 울창해서 그 밖을 쳐다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무성한 나무들은 길 밖의 풍경을 잠그고 있었고, 내리는 비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차를 가둘 기세였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서부 쪽의 고속도로들에 비해 도로 상태가 양호했다는 것이다. LA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로를 비롯해서 서부 쪽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노면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 도로인데 보수할 각 주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 모양이라고 했다.[각주:1] 동부는 서부에 비해서 재정 상태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료도로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로 상태가 무척 양호했다. 보스턴까지 몇 개의 톨 플라자를 통과했는데, 나중에 합산해 보니 18달러 정도의 톨게이트 비를 물었다. 유료도로기 때문에 내려서고 올라서는 일이 번거로운지라 서부에서는 볼 수 없는 휴게소가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휴게소에는 백인과 동양계가 유독 많았다. 백인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고, 동양계는 어린 학생들과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방학을 맞아서 동부 명문대학교를 보러가는 가족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턴을 방문하는 우리의 목적 중에 하나도 하버드와 MIT를 보는 것이었다. 그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여행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성이는 나를 꺼내어 되돌아오는 과정이 아니던가? 휴게소에서 만나는 동양계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방학이라는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미국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안에 보고 배워야 할 대상으로서 미국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학만은 보스턴의 그 유명 대학의 서열을 인정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해주길 바라는 속물근성이 스멀거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런 우려는 그저 소심한 아빠의 기우였다.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가졌던 미국은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우리와 다른 나라로 객관화 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일 뿐이고, 그 다른 점 중에서 우리보다 나은 것과 우리보다 못한 것을 아이들은 제 기준으로 나누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로 돌아와서 보스턴으로 달리면서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도 한국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적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유진이는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하니 힘들단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높은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것에 대한 이해가 이곳 아이들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단다. 미국에서도 미국 아이들보다 높은 클래스에서 최고의 영어 성적을 받고 있다며 늘 자부심을 갖는 유진이였지만,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다만, 한국에 비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은 좋단다. 강압적이고 불필요한 규제와 간섭으로 신경을 써야 하는 한국의 학교보다는 자유롭고 즐겁다고 했다. 유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 편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른 문제였다. 편하지는 않으나 즐겁기는 한 공부와 생활,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구현하고 싶어 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즐거운 학교생활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이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같은 시기, 삶의 계산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운 때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늘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으로 신열을 앓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게 빛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 있겠는가? 환한 웃음보다는 늘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가고 지친 몸으로 학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 실정을 생각할 때, 아이가 이야기 하는 즐거운 학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리적인 교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기면 타협 없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자유와 자율이 보장한다거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험이 한 학기 내내 진행됨으로써 평소에 꾸준히 공부할 뿐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이 적다거나, 특별활동의 비중이 높고 대학 진학에 그것이 반영된다거나, 심지어 한국의 수학능력평가시험에 해당하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도 본인이 시기를 정해서 보고 싶을 때 보면 된다니 한국에서 학교생활을 한 아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즐겁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곳 고등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주 빼어난 학생이 아니면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싼 칼리지(college)에 입학해서 2년을 마치고, 종합대학교로 편입하는 방법을 택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단다.[각주:2] 유진이 학교의 일부 백인 아이들은 꿈이 동네 빵집에 취직하는 것이라며,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자란 곳이고, 집에서 가까우니 최고의 직장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했단다. 빵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고등학생들이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본적이 없는 아이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동네 빵집에 취업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닐까? 혹은 그 이후에 자신이 원하며 다른 직업을 얻어서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의 유연성이 높다는 의미는 아닐까?

유진이의 발 와이퍼 놀이

비는 보스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졌다. 앞좌석에 탄 유진이는 다리가 아팠는지 대쉬보드 위에 다리를 얹고, 발로 음악에 맞추어 와이퍼처럼 흔들며 논다. 뒷좌석에 효진이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비가 거세어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와이퍼는 분주했다. 그렇지만 차 안은 마치 독립된 우주처럼 아늑하기만 했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서부와는 사뭇 달랐다. 도로나 주변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서부사람들이 유쾌하게 잘 웃는 것에 비하면 동부사람들은 비장한 얼굴로 좀처럼 잘 웃지 않았다. 톨 플라자 직원, 휴게소 직원, 휴게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잘 웃지도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동부와 서부의 거리, 주요 구성 인종, 문화적 토양 등을 생각해보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카고에서 만났던 친구 형식이의 말로는 이곳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해보면,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그 뿌리조차 알기어렵지만, 미국의 시작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을 찾았던 청교도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갔다. 동부를 둘러보는 동안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었다.

10시간 30분쯤 걸려서 드디어 보스턴 숙소에 도착했다. 오면서 식사를 하고, 폭우 때문에 잠시 휴게소에서 쉰 한 시간을 빼면 8시간 20분쯤 소요된 것이니 어떤 날보다도 오래 운전해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하루였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고속도로 주변에 큰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처음에는 상큼한 느낌이 좋았는데, 오랫동안 달리려니 주변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답답했다. 비도 비였지만 길가의 나무들 때문에 도로 폭이 더 좁고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길 위를 달리는 사람에게는 길 밖이 보여야 한다고 차 안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나니 딱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청준의 <줄광대>를 이야기 해주었다. 줄 위에 올라서서 줄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으면 예술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잃게 되고, 줄 위에 올라서 줄 밖에 눈을 빼앗기면 세상과 타협할 수는 있지만 예술을 이룰 수는 없는 줄광대의 숙명을 아버지 줄광대와 아들 줄광대를 통해서 그려낸 작품이 <줄광대>. 작가는 아들 줄광대의 삶에 보다 애정 어린 시선을 두고 있다. 비록 줄밖의 세상에 눈을 빼앗겨 줄 아래로 떨어졌지만 모두들 승천했다고 믿게 된 줄광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시절에 가슴 아파했었다. 그것은 아내를 죽이고 계속 줄을 탔던 아버지 줄광대나 줄보다 사람을 우선에 두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 줄광대의 모습이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와의 지속적인 불화를 통해서 세계를 회의하고 긴장시키는 예술가의 천형(天刑)이 안쓰러웠다.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줄광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나보다.

지금껏 무료도로만 달리다가 유료도로를 달리려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톨 플라자가 보여서 돈을 준비하면 티켓만 뽑는 데고, 티켓을 뽑으려 하면 돈 내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하이패스를 사용한지 몇 년이 되었으니 티켓 뽑고 돈을 내고 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톨 플라자와 톨 플라자 사이가 너무 멀어서 자꾸 순서를 헷갈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그 때마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는 보스턴 외곽에 있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형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해있었다. 체크인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버스 앞에 붙은 표지를 보니 중국 학생 관광단이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동부 쪽 아이비리그를 둘러보는 투어 코스가 있다더니 그들인 모양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만났던 중국집 주인이 생각났다.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면서도 종업원을 쓰지 않고 부부끼리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튜터를 붙여 공부시키던 모습이나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이들의 모습이나 10시간 30분을 달려 보스턴에 도착한 우리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밀려드는 손님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한 표정이 역력했다. 직원이 정신없어 할수록 체크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전화 받으면서 밀려드는 손님을 빠르게 처리했던 캐나다 숙소의 직원이 떠올랐다. 방 키를 받아서 방에 올라가보니 조금 낡았지만 정갈한 느낌의 방이었다. 숙소의 침대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여행 중에 보니 지역에 따라서 이불 색깔이 다양했다. 딴에는 보기 좋으라고 했겠지만 어떤 색깔이나 무늬도 흰색의 정갈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침대의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보스턴은 효진이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도시다. 지난 학기에 미국 역사를 배우면서 보스턴에 대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니 여행 계획을 짜는 내게 보스턴은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버드와 MIT를 보여줄 겸 들르려고 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을 보여주면 늘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이 본다.

숙소로 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보스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역사를 배우기 전에 미국 역사를 먼저 배워버린 아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우리 역사를 정규 교과로 배우지 못한 효진이에게 한국 역사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일 뿐 아직 역사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와서 정규교과로 미국 역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의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니 혹시라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염려 되었다. 역사도 언어처럼 자기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로 다른 나라의 것들을 배워야지 제대로 된 정보의 선택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으니 지금 효진이 나이였을 것이다. 방학 때 작은집에 놀러가서 15권짜리 이야기 한국사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또래의 사촌들과 경쟁하듯 읽어버린 그 책은 15권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야기 한국사로 만난 한국사는 역사책 보다 설득력 있었고, 강렬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려웠던 그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집에 있던 계몽사판 한국위인전기전집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 느닷없고 맥락 없는 나의 독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 독서 습관을 효진이가 많이 닮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를 다녀오면, 할머니는 가급적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보거나 공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지만, 그런 나와는 조금 다르게 효진이는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보문고, 학교 도서관, 동네 도서관, 이동도서관을 모두 훑고 다녔다. 아내, 유진 그리고 제 몫의 독서 카드를 모두 활용해서 빌릴 수 있을 만큼 책을 빌려와 책상 위에 쌓아놓고 탐식에 가까운 독서를 하곤 했다. 효진이가 읽는 책들은 제 나이에 맞는 것부터 그 이상의 것에 이르기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읽는 방법도 빠르게 읽기도 하고 한 권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기도 하는 아주 자유로웠다. 그러던 녀석이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한국책을 구하지 못해서 아내와 내 책을 탐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과 지역 공립 도서관에서 영어 책들을 빌려다 읽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는 주로 판타지 소설들을 빌려다 읽는 눈치였고, 덕분에 매주 도서관에 책을 빌리고 반납하러 부지런히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런 아이에게 이야기처럼 들려진 미국 역사는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는가? 그런 녀석이 보스턴을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아내는 빨래를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내에 에어컨이 돌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뽀송뽀송은 몰라도 바짝 마를 것은 분명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다소 가라 앉아있지만, 내일은 힘내서 보스턴 시내를 돌아볼 것이다. 효진이의 미국 역사와 유진이의 미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미국 역사에 밝지 않은 아내와 내게만 보스턴은 낯선 도시 같다.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동선을 확인하면서 독한 술 한 잔이 그리웠다. 우리 방이 2층에 있어서 그런지 빗소리가 더 선명했다. 물을 가지러 차에 내려갔더니 비가 뿌려놓은 물비린내가 여린 풀냄새처럼 차 주변에 가득했다. 이렇게 빗소리가 선명한 밤은 도통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속수무책이다. 독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1. 궁색한 재정은 서부 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 주에서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자갈과 같은 자재로 도로를 다시 깔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앨라배마, 오하이오 등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미시건주 83개 카운티 중에 38개 카운티가 자갈을 깔았다고 한다. (김광기,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동아시아, 2011, pp.16-17참고) [본문으로]
  2. 한국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 학비에 대한 부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보다 2배 가까운 학비를 부담해야하는 한국 유학생들 중 극히 일부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과 결혼하여 그 부담을 덜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사례라고 믿고 싶지만 학비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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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810일 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밤새도록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비는 문득, 간단하게 그쳐버렸다. 밤새도록 사위는 온통 빗소리뿐이더니 비가 그친 아침은 온통 초록이다. 비가 내리고 어두워서 어제 밤에는 몰랐는데 숙소는 유난히 나무가 많은 숲에 포옥 안겨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숲에 안겨서 그렇게 숲과 더불어 나이를 먹고 있었다. 시간이 데려간 것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니 초록의 숲길은 오히려 적막했다.

우리도 서두른다고 서둘러 숙소 식당으로 갔는데 벌써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제 본 중국 학생 관광단인 줄 알았는데, 그들 사이에서 얼핏얼핏 우리말이 들렸다. 중국 학생 관광단 말고도 개인적으로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중고생 자녀들과 함께인 가족들이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듯한 음식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숙소 주변에는 숲만 있을 뿐 딱히 식당을 찾을 수도 없었다. 캠브리지까지 나오는 길은 1차선이 한참 이어졌고, 도로가 2차선으로 넓어진 곳에서 차들은 그 이상 늘어나서 정체가 심했다. 예상치 못한 정체덕분에 길가에 오래된 주택들과 낡은 건물들을 천천히 지켜볼 수 있었지만, 시간은 예상보다 40분 이상 지체되고 있었다.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가니 도서관이 보였다. 마침 그곳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우리도 그를 따라서 도서관부터 본관 앞 잔디마당까지 차분히 설명을 들으며 따라 다녔다. 그런데 본관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던 가이드가 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차에 올라서 점심을 먹은 후에 하버드로 간단다. 우리는 MIT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하고 투어 중이던 가이드였던 것이다. 순간, 우리 가족은 머쓱해서 뒤로 빠지면서 우리끼리 한참을 웃었다.

MIT에서 발견한 김우중 회장의 사진과 거북선 모형

도서관을 돌다보니 눈에 익은 사진이 보였다. MIT 기계공학과에 많은 기부금을 낸 8명의 사진이었는데, 그 중에서 전 대우그룹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 부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가이드가 정보 하나를 더 준다. 그 사진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거액 기부 이후에 모두 망한 기업가들이란다. 김 회장이 MIT에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몰라도, 차입경영으로 무너진 대우를 기억하는 내게는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돈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우사태로 인하여 부실해진 은행을 세금으로 매워주었으니 그것은 국민의 고혈(膏血)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대우의 몰락 이후 대우는 물론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들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으며 가슴 뛰는 경험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열패감도 지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우리나라 샐러리맨의 신화가 아니었던가? 자신만 똑똑하면 언제든 불끈 일어서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자기 근면과 성실에 대한 낙관을 대표하던 그가 무너진 것은 대우라는 그룹이 무너진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낯선 나라 대학 도서관 벽에 걸린 그의 자랑스러워야할 사진이 안쓰럽고 부끄러웠다. 더구나 거액을 기부 했던 사람으로 칭송되다가 실패한 사업가로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아이러니했다.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 선박 전시관에서 거북선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인들이라면 거북선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환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찍고 싶은 것이 거북선인지 MIT 안에 거북선이 있다는 사실인지 모호했다. 거북선을 우리 스스로 자부하며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MIT가 인정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닐지내 생각은 또 삐딱해졌다.

전시장의 거북선을 보면서 김훈의 칼의 노래가 떠오른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이 작품을 수사(修辭)만 앞선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제압 없이 나올 수 있는 수사가 어디 있겠는가? 수사가 빼어나다는 말은 그만큼 대상에 대한 파악이 진지하고 절절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아파하고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그려낸 김훈의 이 빼어난 작품을 읽으면서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의 상황이었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대신들을 생각하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적의 칼과 배고픔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상황, 더구나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견뎌낼 뿐 표현할 수 없었던 고뇌는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그의 시대에서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현재이고 보면, 낯선 나라의 전시장에서 만난 조그마한 거북선 앞에서 결코 밝게만 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MIT 본관과 도서관

입학식과 졸업식을 진행하다는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MIT 본관과 찰스 강이 마주보고 있었다. MIT를 알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으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MIT 졸업생들의 기행(奇行) 기사는 서울 변두리 중학생이었던 내게 너무도 신나는 충격이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기숙사 방안에 차를 옮겨놓는다거나 돔 위에 경찰차를 올린다는 기사는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이라는 외화시리즈가 인기였는데, 밤샘 공부를 하고 가서 킹스필드 교수의 질문공세에 쩔쩔매면서도 자신의 의견으로 대답하는 하트의 모습만큼이나 그것은 대견한 일탈이고, 짜릿한 특권이었다. 그러한 기행의 현장이 본관 돔이란다.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경찰 순찰차, 황소 등 특이한 것들을 돔에 올렸다는 사실이다. 경찰 순찰차를 헬기로 내렸다고 하니 올린 기발한 방법이 자못 궁금하다. 돔 위에 이러한 것들을 올리는 비법은 4학년들에게만 전수가 된다고 하니 재미있는 전통임에 틀림이 없다.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졸업을 앞두고 그 정도의 이벤트는 귀엽기까지 했다. 다만, 올리기는 학생들이 올리는데 내리는 것은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어려움이 많단다. 천재들이 올린 것을 보통사람인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그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졸업식에서 본관 앞에 올라가 있는 경찰 순찰차를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물론 그것이 황소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과 손(Mens et Manus) 조형물 앞에서 어색한 아이들. 아이들에게 MIT방문이 얼마나 맥락 없고 어색한 아빠의 욕심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마음과 손’(Mens et Manus)[각주:1] 조형물 앞에 아이들을 세우고 보니 영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MIT를 돌면서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효진이야 어려서 그렇다 해도 유진이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이유는 아이들이 MIT를 전혀 몰랐고, 별다른 관심 없는 분야의 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에서 감흥이 생길 리 만무했다. 숙소에서 만났던 중국 학생 관광단이 생각났다. 아마 그들도 이곳을 다녀갔거나 다녀가리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부모 된 사람으로서 탓할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기대는 부모만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이곳에 왜 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박하게 세계적인 대학이니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는데, 마음 저 밑에는 더 큰 욕심이 있었나보다. 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안쪽으로 더 보아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핑계로 그만 보기로 했다. 바로 보스턴 시내로 들어가서 시내를 볼까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기 캠브리지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것도 어색한 동선이었다.

MIT에서 하버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버드까지 가는 길은 아침에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처럼 오래된 건물들과 주택들이 소박하게 모여 있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 학교 근처를 몇 바퀴 돌면서 보니 미국 중소도시의 주택 밀집지역처럼 학교를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는 주택들이 정겹게 보였다. 겉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 학교 부근의 원룸이나 하숙 밀집 지역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의 대학을 보면서 문득 우리대학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한참을 헤매다가 학교에서 조금 먼 곳에 코인 주차를 했다. 아내는 어떻게 알았는지 안내 센터에서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를 구입했다. 영어 버전을 우리말로 번역했는지 다소 어색한 표현이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무척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들고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하버드 곳곳을 둘러보았다. 방학 중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아 보이는 관광객 투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래드클리프 캠퍼스까지 다 돌아보지는 못했으나 건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아우라는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하버드 야드에서 책을 보는 학생

하버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하버드 야드에 의자 두 개를 붙이고 책을 읽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어제 비가 내려서 볕이 그리웠는지,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도 학생들이 아무 곳에서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책과 노트북을 펴고 공부를 하고, 심지어 노천광장에 놓인 탁자에 앉아서도 공부하는 모습은 내게는 낯선 모습이었다.[각주:2] 여러 개의 도서관에 좌석이 꽉 찬 것도 아닌데 야외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앉아서 책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에는 무척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좌석과 좌석 사이에 칸막이가 세워진 독서실 같은 분위기의 도서관에 앉아야지만 공부가 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어디든 자신이 편안하게 집중할 수만 있다면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론 이 말이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 비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Widener Library, 1914)80에 달하는 서가와 350만권 이상의 장서로 유명하다. 와이드너 도서관은 1912년 타이타닉호에서 사망한 하버드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거금을 기부하여 1914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와이드너 도서관의 내력담은 필라델피아의 거부, 하버드 졸업생, 희귀서적 수집가, 타이타닉호 침몰로 인한 사망, 어머니의 기부 등 극적인 서사의 좋은 구성요소를 지녔다. 더구나 타이타닉호 침몰은 두 차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극적인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와이드너의 어머니가 하버드 졸업생들이 자기 아들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졸업 전에 반드시 수영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기부조건을 걸었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실제로 하버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영 테스트가 있었으니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란다.[각주:3] 수영 테스트는 하버드만 했던 것도 아니고, 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전 국민에게 수영을 보급했던 일과 관계된 것이란다. 결국 와이드너 도서관에 얽힌 극적 서사가 브랜드가 되어, 추가적인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됨으로써 스스로 이야기를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각주:4]

남북전쟁에 희생된 하버드 출신을 기리는 메모리얼 홀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 1878)은 남북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졸업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136명의 이름이 건물의 양쪽 벽에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을 보면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남북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 문제까지 접근했던 이 작품은 강의 시간에도 자주 언급할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계급 차이에 근거한 상반된 두 캐릭터인 아이다 먼로(니콜 키드먼 분)과 루비(르네 젤위거 분)가 정서적 연대를 이루어가는 모습과 전쟁의 폭력과 야만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연상시키는 인만(주 드로 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잊히지 않은 작품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산야에서 인간의 가장 마지막을 보여줌으로써 더 처절하게 다가왔던 이 작품의 후반부에 눈 내린 협곡에서 인만을 부르던 아이다의 그 절절한 음성은 오랫동안 귀울림을 만들기도 했었다. 메모리얼 홀을 보면서 <콜드 마운틴>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오늘도 내 생각은 산만하고 종잡을 수 없다.

MIT보다 하버드에 관광객들이 더 붐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별 상관도 없는 하버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고 이야기 하는 곳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겠지만, 그렇다고 MIT처럼 하버드는 건물이나 도서관 등을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교육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공개한다한들 그것을 그 짧은 시간에 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달리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은 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집작하건데 세계 최고의 대학을 보여줌으로써 동기를 부여하여 하버드에 진학하거나 비록 진학은 못하더라도 건강한 자극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부모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버드를 방문하는 것은 꼭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하버드 유니버시티홀 정면에서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존 하버드 목사의 동상. 그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갈 수 있다는 속신으로 인하여 구두만 닳았다

설립자인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 동상[각주:5]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진학한다는 속신(俗信) 때문에 그것을 만지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대부분 그 옆에 서서 구두에 손을 얹고 멋쩍은 표정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속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재미있는 속신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속신의 대상이 왜 하필 구두였을까? 구두가 동상의 가장 밑에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있는 부분이어서 선택되었겠지만, 구두가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명예, , 굴레, 자기정체성 등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세계 최고라는 압도적인 칭호에 압도되지 말고 정말 하버드에서 보아야할 것은 다양성의 존중과 배려, 역사와 전통의 보전, 학문적 자유와 학교 운영의 자율성 보장, 체계화된 후원 시스템, 다양한 방식의 학생 선발 방식 등이 아니었을까? 멋스럽게 세월을 입고 있는 그레이스 홀(Grays Hall, 1863)과 매티우스 홀(Matthews Hall, 1872)을 굳이 신입생 기숙사로 배정하고, 그 옆으로 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자들이 근무하는 소박한 건물에 눈이 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리라.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언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나 나라별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기준이라는 것이 이미 명문화된 대학의 성공 요소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면 기존의 서열 체계를 은밀하게 확정하거나 재생산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몇 언론사들의 대학 평가는 공정성은 차지하고서라도 대학교육의 지향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대학교육의 파행을 부추기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언론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대학을 평가하는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평가가 어떠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이 교육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 설득하고, 그것에 대하여 객관적인 검증을 수행한 평가인지 우리는 이제 되물어야 한다. 몇몇 언론사는 해외의 기존 평가기관과 공동으로 대학 평가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평가지표가 얼마나 우리 현실에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봐야만 한다. 학교별 특색이나 전공별 차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평가 지표와 평가 자료를 준비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해야하는 비효율성 그리고 학교별 서열 외에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하는 결과 등의 모순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대학평가를 이제는 과감하게 거부해야할 것이다. 최근 국내 언론사들도 앞 다투어 대학평가를 시행하고 있는데, 대학평가 발표 전후로 해당 언론사에 여러 대학의 전면광고가 실리는 것을 보면, 우리가 대학 평가를 거부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게 된다.[각주:6] 영어전용강의 시수 등을 평가항목에 삽입함으로써 전공, 과목 등의 특성은 물론 그 성취 정도와 무관하게 영어전용강의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은 슬픈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사의 평가 기준을 따라가느라 기형적인 파행을 거듭하는 대학의 현실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몇 위, 한국에서 몇 위를 따지기 전에 자기 대학만의 분명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을 모색하는 것이 대학의 본 모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꾸로 자기 대학만의 교육방식과 교육목표를 가지고 세계 대학을 평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버드 앞 연경, 양이 많았던 볶음국수, 결국 남은 것들은 저녁이 되었다

하버드를 보고나니 점심때였다. 학교 바로 앞에 연경(燕京)’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규모가 컸고 손님도 많았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볶음국수가 생각나서 볶음국수 2, 볶음밥, 만두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1인분씩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는데[각주:7] 나온 양을 보니 2인분은 족히 넘는 양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시킬 때 양이 많다고 미리 이야기해주면 좋았으련만, 이 친구들 필요할 때는 입을 닫는다. 음식은 오클라호마시티의 그 집에 비해 좀 더 미국화 된 맛이었지만 우리를 위로해줄만한 맛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거리가 보이고, 왁자한 실내 분위기가 졸업식 날 학교 앞 중국집 분위기가 나서 혼자서 웃었다. 모처럼 배부른 점심을 먹고 났지만 음식이 많이 남아서 싸달라고 했더니 세 개의 상자에 담아다 주었다. 덕분에 그것으로 저녁까지 먹을 수 있었다.

건국 시기 복장을 한 프리덤 트레일 가이드와 도로에 새겨진 문장

점심을 먹고 캠브리지에서 보스턴으로 들어갔다. 효진이가 꼭 해보고 싶다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각주:8]을 하기 위해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으로 갔다. 보스턴 코먼은 1634년에 문을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프리덤 트레일16개의 건국 사적을 돌아보는 4답사인데, 보스턴 코먼을 시작으로 보도에 새겨진 붉은 라인을 따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코스다.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가이드는 정해진 시간에 티켓(어른 13.65달러, 어린이 7달러)을 가져온 사람들을 모아서 투어를 시작한다.

주의사당(상), 킹스채플(), 올드 사우스 집회소()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원로 가이드는 가는 곳마다 열정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마이크 없이 20명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극적인 묘사에 연기까지 해가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했다. 이민자의 나라에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할까 궁금했는데, 투어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우리 일행 중에 영국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독립과정과 영국의 만행 등에 대하여 가이드에게 질문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진지하게 투어 내내 계속되었다. 가이드는 연배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도 이동 중에도 우리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때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무척 열정적으로 보였다. 효진이는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보스턴과 관련된 미국의 역사를 배우고 왔기 때문에 투어 내내 맨 앞자리에서 주의 깊게 듣고는 우리에게 설명해주면서 뿌듯해했다.

프리덤 트레일 코스는 다운타운의 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서 가이드를 따라 걷다보면 현재 보스턴의 거리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적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고, 현재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주의사당처럼 지금은 다른 용도로 변경된 것도 있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존 행콕, 사무엘 아담스, 그리고 보스턴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래너리 묘지는 관리와 정비가 부족해서 황폐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이드를 따라 돌면서 아내와 나는 미국의 역사보다 고풍스러운 도시를 천천히 산책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프리덤 트레일을 걷는 내내 가이드는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애국자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설명하며, 영국의 역사적 과오를 지적하기도 했다. 보스턴 학살과 같은 영국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설명했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립전쟁 이후 미국인들이 보여준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노예제도나 서부개척이라는 명분으로 인디언과 멕시칸들에게 자행했던 폭력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횡단여행 내내 눈으로 확인하며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역사적 과오를 진정한 반성 없이 은폐해 버림으로써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과오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고궁이나 경주를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여유 있게 걸어본 기억이 없다. 경복궁에 몇 차례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어릴 때였고, 크고 나서는 함께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제 아이들도 커서 함께 답사를 해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다만, 귀국하면 고등학교에 가게 될 큰아이와 다시 분주해질 내 일상을 생각하면 함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라도 다녀야할 듯하다. 경복궁을 보러가면서 허균의 고궁산책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경복궁을 다녀오게 하는데, 보는 눈들이 달라져왔다. 이제 아이들도 이 책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연구실에 있는 책을 아이들 책꽂이에 먼저 가져다주어야 할 듯하다.

프리덤 트레일은 퍼네일 홀에서 끝났다. 퍼네일 홀 앞에는 사무엘 아담스의 동상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애국자가 아닌 맥주상표로 알려져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옆으로 노스마켓(North Market), 퀸시마켓(Quincy Market), 사우스 마켓(South Market)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퍼네일 홀 마켓플레이스(Faneuil Hall Marketplace)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멋스러운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축제에 온 것처럼 모두들 즐거운 모습들이었다. 마켓이 다 마켓이지 뭐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세 개의 마켓이 어울려 있어서 그런지 흥겨운 분위기에 같이 흥겨워지는 곳이었다. 아내는 퀸시마켓에서 먹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 와보는 도시인데 아내는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참 잘 안다. 마이크스 패스트리 샵에서 파는 초코릿 칩스 카놀라가 그것이었는데, 가서 보니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것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으며 걷다보니 부두였다.

퍼네일 홀과 사무엘 아담스 동상(), 퀀시 마켓 광장(), 초코릿 칩스 카놀라()

마켓과 부두 사이에 시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Jobs Not Cuts”라는 피켓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잔디밭에서는 시위대의 일원들로 보이는 브라스밴드가 연주를 하며 시선을 끌고 있었다.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예산 문제와 경기 침체로 인한 일자리 창출 실패로 인하여 청년 실업의 문제가 이곳에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은 분명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세계화, 시장경제의 극단화된 양극화, 불공정성의 문제가 사회적 합의와 수긍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것이었다.

Jobs Not Cuts을 들고 시위하는 여성

그런데 이곳의 시위를 보면 참 온건하다. 피켓을 들고 오고가거나 길목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정도였다. UCI에서 시위를 하는 것을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의사 표시만 할뿐 우리식의 시위는 보지 못했다. 시위로 의사 표시하는 것이 자유이듯 침묵하는 것도 자유라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모습이었다. UCI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대중 집회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그 주변에서는 발언을 경청하면서 피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자유롭게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몹시 신선했다. 캠퍼스 폴리스 두어 명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주변에서 지켜볼 뿐, 자유롭게 무척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집회였다.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대중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위도 자신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가 지니는 파괴력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신선한 것만은 분명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 부두는 조용했다. 크루즈 티켓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다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보여주는 듯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부둣가 벤치에 앉아서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찍어주겠단다. 한국에서 가족끼리 동네 산책하다가 아이들 머리핀을 사고 붕어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처럼 여유 있고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퀸시마켓 광장을 통과해서 돌아오는데 분위기가 마치 마을 축제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에 늘어선 보스턴의 시간들은 아주 따듯한 기억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숙소에 다가갈수록 숲이 많아졌고, 숲이 늘어나는 만큼 주변의 소리는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소리가 숨어버린 만큼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1. MIT의 교훈이다. 지식의 실제생활에서의 적용을 중시하는 MIT의 정신을 압축하고 있다. MIT 동문이 세운 회사에서 2조 달러의 이익을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라고 하니 그들의 실용학풍을 가늠하게 한다. [본문으로]
  2. 유진이가 제 선배와 스터디를 한다고 집 앞 빵집에서 방과 후에 공부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무슨 공부가 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픽업하러 가보면 상당수의 학생들이 빵집을 스터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어학원 앞 커피전문점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본문으로]
  3.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우연히 읽게 된 주경철 교수의 칼럼을 통하여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알 수 있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2/2011090202304.html) [본문으로]
  4. 강력한 브랜드의 포지셔닝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해당 브랜드의 후광효과를 노리는 다양한 이야기들과의 관련성이 폭발적으로 증가됨으로써 브랜드는 더욱 강력해지고 추가된 이야기는 더욱 극적인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대부분 고찰이 의상대사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 동상은 ‘3대 거짓말 동상’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동상의 비문에 “설립자 존 하버드, 1638”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1) 존 하버드의 초상화가 없어서 이 동상의 얼굴은 한 학생을 모델로 한 것이고, 2) 하버드는 존 하버드에 의해 설립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뿐이며, 3) 하버드는 1636년에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 총독부의 표결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미국에서도
  7.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중국집에서는 한국처럼 1인분 2인분 개념이 아니라 요리개념으로 여럿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 것이었다. [본문으로]
  8. 보스턴 코먼→주의사당(State House)→파크 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그래너리 묘지(Old Granary Burying Ground)→킹스 채플(King's Chapel)→최초의 공립학교 유적지(Site of First Public School)→올드 코너 서점(Old Corner Book Store)→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옛 주의사당(Old State House)→보스턴 학살 유적(State of the Boston Massacre)→퍼네일 홀(Faneuil Hall)→폴 리비어 하우스(Paul Revere House)→올드 노스 교회(Old North Church)→콥스 힐 묘지(Copp's Hill Burial Ground)→USS 콘스티튜션(USS Constitution)→벙커 힐 기념탑(Bunker Hill Monument) 순으로 진행되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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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811일 보스턴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드디어 뉴욕에 도착했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쌓아가고 있던 보스턴을 떠나면서 아쉬웠던 것은 그 시간의 질서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도시에서 볼 것에 쫓겨 다니다 떠나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만큼 보스턴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뉴욕에서는 숙소보다 라과디아 공항(La Guardia Airport)에 먼저 들러야 했다. 숙소로 정한 민박집에 주차 시설이 없고, 뉴욕의 교통지옥 속에서 운전을 하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렌터카를 반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 다시 새로운 차를 렌트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렌터카 회사에서 알려준 주소를 사만다에게 알려줘도 사만다가 정확하게 위치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라과디아 공항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근처에 가서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다.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는 화이트스톤 브리지(Whitestone Bridge)에 올라서면서부터 사만다가 당황하기 시작해서, 할 수 없이 표지판만 보고 공항 내에 렌터카 회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렌터카 회사를 찾아서 차를 반납했다. 렌터카 회사 직원은 차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기름을 체크했다. 기름을 가득 채워서 반납해야 했는데 공항 주변에 주유소가 없어서 그냥 왔다가 추가요금 42.97달러를 더 냈다. 주유소의 기름 값보다 2배 이상 비싼 금액이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공항 가까이 가서 주유를 하겠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공항주변으로 오니 주유소도 없고, 차를 돌리기도 어려운 길이어서 그냥 반납한 탓이다. 안타깝지만 또 하나 배웠다. 문제는 배움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반납하고 렌터카 회사 직원이 건네준 영수증을 보니 얼바인에서 뉴욕까지 3,948마일(6,353)을 달렸다. 처음에 구글 지도를 보며 워싱턴까지 예상했던 거리를 뉴욕까지 오는데 모두 써버린 것이다. 더 달린 만큼 많이 보았을 것이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렇게 낯설던 자동차가 이제는 내차처럼 익숙해졌는데 막상 반납을 하려고 하니 같이 고생한 정 때문인지 아쉽기만 했다. 차에 싣고 있던 짐을 모두 내리고 보니 난민이 따로 없었다. 볼품없는 트렁크와 여행 동안 어설프게 줄어든 짐 그리고 기념품 등으로 늘어난 가방을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나누어 들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뉴욕 숙소를 예약하는데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부탁을 해두었다. 도착 1 시간 전에 연락을 달라고 해서 연락을 하니 시간을 맞추어 공항으로 온단다. 픽업 하러 오기로 했던 분은 렌트카 회사가 있는 곳을 몰라서 몇 차례 전화를 하더니 30분쯤 늦게 도착을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 분이셨는데, 공항에서 맨해튼 숙소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이민사(移民史)를 들려주셨다. 재미는 있었는데 중간중간 지나치게 욕을 많이 해서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다.

맨해튼의 교통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뉴욕에서 민박은 대부분 다른 사람 건물의 방을 빌려서 하는데, 불법이란다. 그러니 집에 드나들 때 관광객처럼 하지 말고 당당하게 다니란다. 불법인데 어떻게 당당하란 말인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줄 돈 다 주고도 불법이라니 황당했다. 뉴욕의 호텔 가격이 워낙 비싸고, 민박도 한 번 체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선택한 것인데 처음부터 꼬였다. 픽업도 민박집에서 서비스로 해주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민박집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45달러를 내란다.

뉴욕 숙소 침실, 침실과 붙어있는 기계식 주차장휴대용 가스 버너와 휴지

미드타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내 돈을 주고 불법이라는 민박에 머무는 것도 언짢은 일인데 숙소는 낡고 지저분했다. 인터넷에서 가격대비 시설이 양호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이 모양이었다. 사진으로 보니 깨끗하고, 취사가 가능하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밥을 해서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용 후기를 읽어보니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보니 낡고 지저분했다. 가스레인지도 없고 휴대용 가스버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약을 6월 중순에 했으니 두 달 전에 기억이고, 사진과 다소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한 구석을 보니 직전에 머물렀던 손님들의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뉴욕을 마저 둘러보고 떠나느라 추가 요금을 내고 짐을 맡겨 두었단다. 5시쯤 찾으러 올 거란다.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가 짐을 내줄 거라며 양해를 구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낯선 땅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그 정도 편의도 못 봐 줄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뮤지컬 입장권을 구하고 장도 좀 보아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더구나 안내를 해주고 있는 사람은 집주인도 아니었고, 아르바이트 학생처럼 보이니 그에게 항의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뉴욕에서의 처음을 따지고 다투면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타임스퀘어의 모습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사만다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길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작은 지도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찾은 후에 타임 스퀘어(Times Square)를 찾아보고 지도를 따라서 걸었다. 가로축과 세로축을 맞추어 우리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코스를 찾아서 걸어갔다. 뉴욕의 악명을 여기저기서 너무도 많이 듣고 온 탓에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해가 남아 있었고, 비교적 큰 길들인데다가 우리는 모두 네 명이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네 명은 순식간에 한 명의 보호자와 세 명의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바뀌겠지만, 어쨌든 함께가 아니던가?

타임스퀘어는 아이들이 <무한도전>에서 보고, 꼭 가고 싶다던 곳이었다. 꽉 막힌 차들 옆으로 걸어보니, 맨해튼에서는 걷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1904년 뉴욕타임스 본사가 42번가로 오면서 타임스퀘어로 불리기 시작했고, 한때는 성인영화관과 성인용품점 등이 즐비했던 범죄의 소굴이었으나, 1990년대부터 재개발에 들어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현재를 볼 수 있다는 타임스퀘어에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광판들이 어지럽게 점멸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타임 스퀘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와 전광판에 비친 우리 가족. 포에버21 전광판 속 아이돌 스타가 우리 사진을 찍어주지 않으니 아빠가 찍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였다. 포에버21은 이민 온 한국인이 만든 의류회사인데, 미국 내 88위의 부자가 될 정도로 성공한 이민자의 기업이란다. 그것은 대형 전광판 안에 등장하는 아이돌 스타가 전광판을 바라보며 즐기는 행인들 중에서 가장 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는 인터랙션 이벤트였다. 아주 짧은 주기로 남녀 스타가 번갈아 나오면서 행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찍힌 사진이 대형 전광판에 바로 공개가 되기 때문에 행인들이 무척 즐겁게 참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찍히려니 어지간히 튀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래도 어림도 없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과한 몸짓을 해도 다른 사람들만 찍혔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그냥 두면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가서 빨리 뮤지컬 입장권을 구해야했기 때문에, 내 카메라로 전광판에 비친 우리 모습을 찍었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어쨌든 찍은 것은 찍은 것이다.

아내의 계획에 따르면 오늘밤이 아니면 뮤지컬 공연을 볼 시간이 마땅하질 않단다. 사실 미리 숙소 측에 공연 예약은 가능한지를 문의했었는데, 도착해서 표를 구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냥 온 것인데,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급해진 것이다. 타임스퀘어로 먼저 갔다. 타임스퀘어에 있는 안내센터를 먼저 찾아갔다. 공연 관련 정보와 예매가 가능했는데,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오페라의 유령>은 가장 좋은 위치인 137달러 좌석만 남아 있었다. 유진이는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어 했다. 안내센터 직원에게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공연장은 이미 매진된 상태라고 확인을 해주면서, 혹시 길거리에서 입장권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와 메리어트 호텔 앞에 있던 입장권 판매원에게 물어보니 61달러와 115달러 좌석이 있단다. 그런데 61달러 좌석의 경우에는 입장권이 없을 수 있다는 말에 115달러짜리 오케스트라 뒷좌석을 구입하였다. 안내센터에서 말했던  137달러 좌석을 이곳에서는 115달러에 판매하고 있던 것이다. 공식적인 입장권 판매 장소였던 안내센터보다 메리어트호텔에 소속된 입장권 판매원의 판매가가 어떻게 더 낮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입장권 판매원까지 써가면서 더 저렴하게 파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 이야기로는 메리어트호텔에서 투숙객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극장 측과 연간 계약을 맺어서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입장권을 구매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공연을 조금 저렴한 가격에 가장 좋은 좌석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이 극장에 가서 입장권을 구매해 놓을 터이니 7시에 다시 와서 입장권을 받아가란다. 남는 1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한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 타임스퀘어에서 한인마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조금씩 지쳐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걸어서 그곳에 가보니 얼바인에서 일반적으로 H마트라고 부르는 한아름이었다. 김치, , 삼겹살, 스팸, 계란 등의 식료품을 구입하고 보니 얼바인보다 가격이 거의 두 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구입한 식료품을 들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숙소에 가져다 놓고, 허겁지겁 메리어트 호텔로 달려갔다.

입장권판매원이 손으로 써 준 메모의 따듯함에 감동하다.

호텔에서 입장권을 받아 나오면서 입장권을 확인하는데 봉투 안에 작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이 입장권과 함께 넣어준 직접 손으로 쓴 카드였다.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졌다. 아마 다시 브로드웨이를 찾는다면 가격과 상관없이 나는 분명히 이곳에 와서 다시 입장권을 구입할 것이다. 그건 작은 메모 이상의 신뢰였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호의에 문득 따듯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뉴욕은 내게 내내 불안한 장소였다. 뉴스나 영화를 통해서 이미지화된 뉴욕은 말 그대로 고담시(Gotham City)였다. 탐욕과 부패와 범죄로 타락한 도시를 상징하는 <배트맨>의 고담시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뉴욕은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였다. 그런데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메모가 그 어둡고 불안한 이미지를 씻어낸 것이다.

공연 시작까지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숙소 때문에 기분 나빠지고, 일정보다 늦어지면서 종종대느라 피곤했는데, 메모 덕분에 모두들 유쾌해진 모습이었다. 공연이 10시가 넘어서 끝나니 공연 시작 전에 무엇을 간단하게라도 먹어둬야 했다. 마침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는 매저스틱 극장(Majestic Theatre) 바로 옆에 주니어스(Junior's)가 있었다. 주니어스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치즈 케이크 집이라는데, 뉴욕에서 꼭 먹어볼 것 중에 하나로 아내가 벼르고 있던 것이었으니 더욱 좋았다. 게다가 늘 가장 먼저 배고프고 입이 까다로운 효진이가 정말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가 아닌가.

주니어스 치즈케이크 흡입신공의 아이들

음식점 가서 가장 바보스러운 질문은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던 직원은 웃으면서 플레인 치즈케이크(Plain Cheesecake)가 제일 맛있단다. 그래서 그것 몇 조각을 샀다. 매장에는 자리가 없어서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들고 먹었다. 한 판으로 사면 30달러였는데, 조각으로 사면 6.5달러란다. 다들 좋아하는 것을 한 판 사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들고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조금 난감한 일이어서 몇 조각을 산 것이다. 사주고보니 정말 맛있게들 먹는다. 가족들이 잘 먹는 것도 복이라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는데, 여행을 다니다보니 그 의미를 알겠다. 가끔은 그 복이 지나치게 넘칠 때도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나로 인한 것이었다.

브로드웨이 극장가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화려한 불빛이 어둠보다 먼저 소란을 떨었지만, 브로드웨이에서는 어둠이 먼저 물들어왔다. 매저스틱 극장 앞은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에 나오는 1930년대 뉴욕 뒷골목의 분위기를 재연한 것 같았다. 나는 1930년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지금보다 조금 덜 빠르고 조금 더 인간적이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탓인지, 어린 시절 명화극장을 통해 본 영화들의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무척 매력적인 시대였다.[각주:1]

아직 어둠이 온전히 제압하지 못한 매저스틱 극장 앞에는 차들은 느리게 정지했고, 기마경찰과 삼륜의 경찰차가 정물처럼 서 있었다. 기마경찰은 관광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주거나 사람들에게 미소를 던져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브로드웨이의 기마경찰

극장마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고, 그 앞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이 줄을 섰다. 우리처럼 폴로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에서부터 보타이(bow tie)에 정장을 한 사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 각기 달랐지만 모두들 밝고 환한 표정만은 같았다. 치즈 케이크로 충분히 행복해진 아이들도 공연을 볼 생각에 들뜬 표정이었다. 약간은 들뜨고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이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저스틱 극장 전경

<오페라의 유령> 중간 휴식시간 극장 내부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보러갔을 때에는 오랫동안 서서 기다리면서 많이 답답했었다. 대부분의 공연장이 카지노와 연결되어 있었고, 카지노의 탁한 공기와 소란스러움이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로드웨이에서는 극장마다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면서 나름 즐기는 모습들이 오히려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기다리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공연장 주변 분위기에 따라서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각자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어느새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무며 즐기고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낡은 극장은 오히려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매저스틱 극장은 생각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용관이 주는 다양한 무대 장치는 돋보였다. 아내는 인기 있는 작품인데도 입장권 가격이 한국보다 싸다고 했다. 아마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이리라. 전용관과 상설공연은 관객뿐만 아니라 공연을 하는 측에서도 보다 안정적인 준비와 투자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의 배우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이나 무대장치들은 몇 번 공연을 하나 똑같이 들어가는데,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는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은 감소하지만, 한국처럼 공연장 부족으로 단기간 공연에 그치면 공연장을 옮길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고, 새로운 공연을 위한 배우들의 준비에 또 추가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뮤지컬 공연 관람료가 비싸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구조에서는 우리만의 창작 뮤지컬이 나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원작료를 주고 외국 작품을 사와야 하니 입장권 가격은 또 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최근 몇 년 동안 뮤지컬의 대중적인 지지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못해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이 이곳에 와서 보니 더욱 안타까웠다.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데 여기저기서 우리말이 들렸다. 이곳에서는 조건반사처럼 우리말이 들리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뒷좌석도 한국인 부부였다. 극장은 만원이었다. 전용관답게 공연은 극장 전체를 무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무대 아래와 뒤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의 변형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같은 레퍼토리를 몇 번씩 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공연의 매력이 아닐까? 동일한 작품을 배우나 연출자 그리고 극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해내는 그 변화를 읽는 것이 공연의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공연 중간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다보니 의외로 턱시도를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입기 힘든 드레스를 입고 온 여성들은 물론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에 맞춘 옷차림을 한 남성들도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동부 쪽 무더위가 대단하다는 뉴스에 짧은 옷만 준비해서 떠난 탓에 폴로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나와는 너무 대조되었다. 사실 공연문화라는 것이 단지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공연을 보러가는 과정과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참여 방식까지 포함된 것인데, 우리는 너무 여행의 효율성만 생각했었나보다. 좋은 공연을 보러가면서 조금 멋스럽게 꾸미고 가는 것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입을까를 고민하고, 그러한 복식에 맞는 행동을 하면서 즐기는 것도 공연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마칠 때까지 아이들의 몰입은 참 대단했다. 몰입이 대단했던 만큼 그 여운도 오래가는 듯 공연을 보고 나오자마자 뉴욕을 떠나기 전에 또 한 작품을 보면 안 되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여행 경비가 빠듯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난감해하는데, 눈치 빠른 아내가 안 된단다. 공연을 하나 더 보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쭉 설명하자 아이들도 납득을 한다. 늘 그렇듯 오늘도 아내는 현명하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되도록 밝고 큰 길을 찾았다. 10시 넘어서는 걸어 다니지 말라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이 생각나서 43번가 쪽으로 가서 숙소로 돌아왔다. 43번가 쪽에는 뉴욕 타임즈 본사와 대형 호텔, 슈퍼마켓, 음식점 등이 이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성인용품 판매점 등이 있어서 아이들 데리고 걷기가 민망했다. 도대체 치안이 불안한 도시가 어떻게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불안을 씻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으니 세계 제1의 도시겠지만, 생각해보면 자유와 안전을 상쇄해줄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안전하게 인간다움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던가?

걸어오면서 보니 늦게까지 영업하는 커피전문점들은 아직 불이 환하다. 세련된 옷차림의 뉴요커들이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전문점 앞 보도에는 쓰레기봉투가 어른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악취도 악취였지만 깔끔하고 환한 커피전문점과 투명유리로 분리되어 쓰레기봉투를 잔뜩 쌓아두고 있는 거리는 지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쓰레기 수거를 위해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흉물스럽고 악취가 지나쳤다. 나와 너, 안과 밖을 분명하게 나누는 이 도시의 정서가 차갑고 안쓰러웠다. 뉴욕의 첫 이미지가 이 쓰레기봉투로만 기억되지는 않겠지만 쉽게 잊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내가 저녁을 준비했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김치도 꺼내어 썰었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이들이 노래하던 삼겹살을 구웠다. 거의 1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에 아이들은 참 야무지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하다. 그동안 밥, 김치, 삼겹살이 많이 그리웠었나보다. 어른들이야 어찌 견딘다고 하겠지만 아이들은 힘들었나 보다. 여행을 떠난 지 보름째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여행 경비도 경비였지만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간편식으로 해결해왔는데, 아이들 밥 먹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아내는 오늘 하루 지출한 내역을 정리하며 일기를 적고, 나는 오늘 촬영한 사진을 노트북에 정리했다. 내일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연결하려니 와이파이가 안 된다. 예약할 때 인터넷이 된다고 했는데뭐가 잘못된 것인지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늦어서 전화를 거는 것은 실례인 듯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유진이가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다. 욕실이 깨끗하지 않으니 들어가기가 그랬나보다. 말로는 귀찮아서 그런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침실은 침대 두 개가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좁았다. 침구도 그렇게 정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숙소와 유료주차장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24시간 운영되는 이 주차장을 기계식 주차를 하고 있어서 차를 내리고 올릴 때 소음이 고스란히 침실로 전해졌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그러나 돈은 이미 지불했고, 새로 숙소를 구할 요량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견뎌야한다. 다시 한 번 문이 잘 잠겼나 확인했다. TV 등에 나오는 민박만 보고 내가 너무 경솔하게 결정한 모양이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했기 때문에 이곳 맨해튼 미드타운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 저렴한 호텔이라도 찾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은 오늘 여행의 노획물들을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아내도 마음이 좋지 않은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오늘 조금 만나본 뉴욕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10시 넘어서 숙소까지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내게 아직은 뉴욕은 고담시다. 고담시는 배트맨이 지켜주었는데, 이곳은 누가 지켜줄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시민의 안전과 쾌적이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면, 뉴욕은 기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시 내가 뉴욕을 콘텐츠를 통해서 이미지로만 알고 온 것은 아닐까? 아직 세계 제1의 도시라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게는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 2002)에 나오는 뉴욕의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이 궁금하다. 왜 이곳이 세계 제1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궁금하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다니면서 찾아보아야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유령의 공간이다.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유령이다. 어렴풋하게라도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나 뉴스로만 전해온 뉴욕은 이미지였지 구체의 현실이 아니었다. 뉴욕의 맨얼굴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

 

  1. 내게 1930년대는 영화 이미지 그 자체다. 기름 바른 짧고 단정한 머리에 중절모, 조금 넉넉한 더블양복과 롱코트, 그 사이로 당당하게 들고 선 기관단총…<대부>, <언터쳐블>, <좋은 친구들>, <퍼브릭 에너미>, <딕 트레이시> 등 할리우드가 생산한 이미지는 그 내용과 무관하게 낭만적으로 각인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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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812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핸드폰 알람을 맞추어 두었는데, 알람보다 먼저 깼다. 숙소 옆 주차장의 기계음 때문인지 낯선 숙소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까닭이야 분명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내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피곤한 일정을 강행군하다보니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침을 준비했다. 따듯한 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스팸만으로도 넉넉하고 배부른 아침이었다. 보잘 것 없는 그릇에 없는 반찬이었지만 아이들이 모처럼 맛있게 밥을 먹는 것을 보니까 흐뭇했다. 어려서 오남매 밥을 챙기는 것에 결사적이셨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부모님이 밖에서 생활을 하실 때여서 할머니가 우리들 끼니는 챙겨주셨는데,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오남매의 도시락을 싸시고 아침을 꼭 먹이셨다. 잠이 밥보다는 좋을 나이였으니 우리는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어 했는데, 할머니는 예외가 없으셨다. ‘밥 괄시하는 놈치고 잘 된 놈 없다는 말씀으로 아침을 꼭 먹게 하셨다. 자리를 보전하시고 누워계실 때에도 손자들 밥걱정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역할을 지금은 어머니가 하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이들 밥에 예민한 편인데, 오늘 이렇게 아이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지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고 있나보다.

휴대용 버너에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 한인 마트에서도 가스는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구해야 할지 직원에게 물어보아야겠는데, 어젯밤에 보낸 문자도 답신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치우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욕실 쪽에서 바퀴벌레를 본 모양이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예상했던 일인데 막상 눈으로 보니 화가 났다. 바퀴벌레가 있으면 약을 치든가 미리 약을 준비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숙소를 나오면서 직원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어제 일도 그렇지 않은가? 손님의 짐을 우리 방에 두는데 왜 자기들이 추가요금을 받는가? 어제부터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우리가 양해했으면 되는 일 아닌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버스투어를 하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인터넷은 침대 밑에 선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고, 가스는 H마트에 없어서 대형할인마트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내일 가져다준단다. 그나마 우리가 구입하러 가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화가 치밀었다. 예약할 때만 해도 가스레인지가 있다고 한 숙소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도 주인이 아니었다. 그에게 화를 내보아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

그레이라인 버스 티켓, 길기도 길다

타임스퀘어 부근에는 그레인 라인(Gray Line) 직원들이 붉은 조끼를 입고 티켓을 팔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어른 54달러, 아이 44달러면 이틀 동안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야하는데, 우리가 보고 싶은 곳은 다 그레이 라인의 루프에 속해 있으니 이동과 투어를 같이 할 수 있어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가이드가 함께 타서 설명을 해주고, 나이트 루프도 이용 가능하다고 하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달러를 주고 티켓을 끊었다. 판매원은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휴대용 카드결제기로 결제를 했는데, 결제와 동시에 40Cm 정도 되는 붉은 티켓이 출력되어 나왔다. 4명의 티켓을 출력하는 데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어처구니없이 긴 티켓을 보며 가족들 모두 한참 웃었다. 왜 긴가 보았더니 광고가 여러 개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본 <오페라의 유령> 20달러 할인 쿠폰이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아쉬웠지만 어쩌랴. 몰라서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틀 동안 우리를 여러 곳에 데려다 줄 티켓이니 잘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레이 라인 버스는 모두 4개의 루프 투어를 운행하는데, 다운타운 루프(downtown loop), 업타운 루프(uptown loop), 브룩클린 루프(brooklyn loop), 나이트 루프(night loop)가 그것이었다. 4개의 루프를 따라 돌면 뉴욕의 핵심인 맨해튼은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운타운 루프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였는데 1층 좌석에는 아무도 타지 않고 모두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없는 2층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입담 좋은 가이드가 버스 앞에 앉아서 지나가고 있는 곳을 설명해주는 방식의 투어였다. 가이드는 운행 중에 일어서면 안 된다는 경고했다. 2층 버스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가로등 밑이나 나무 밑을 지나갔기 때문에 만약 일어선다면 완벽한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거나 뉴욕타임즈 1면에 사진이 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곳곳에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내리고, 다 돌아보면 다른 버스를 타고 계속 돌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시로 내리고 탔다.

그레이라인 2층 버스

2층 버스 위에서 바라본 뉴욕 시가

2층 버스는 직사광선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금방 머리가 뜨거워졌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 대부분 차로 움직일 것이니 모자가 필요 없을 듯해서 짐을 줄이자고 가족들 모두 모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가?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머리가 뜨거워지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팸플릿 등으로 머리를 간신히 가리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쪽을 보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1층에서 운전하는 기사와 가이드의 호흡이 참 절묘했는데, 그 혼잡한 교통 상황에서도 가이드의 설명 속도와 버스의 진행 속도가 절묘하게 일치했다.

다운타운 루프[각주:1]는 말 그대로 맨해튼을 상하로 나누었을 때, 아래쪽의 주요지점을 토는 루프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직접 내려서 보고 싶으면 내려서 보고 다음 차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투어였다.

여행 내내 내가 운전을 하다 보니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어서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버스를 타고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니까 한결 여유로웠다. 귀로 설명을 들으면서 보라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것은 좀 더 볼 수 있고,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으니 내 여행은 오늘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달리는 2층 버스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좋은 뷰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천천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뉴욕공립도서관

뉴욕 가로등 위의 비둘기들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라는 뉴욕공립도서관은 어제 H마트에 갈 때도 보았던 곳인데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도서관 앞에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국에 와서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공립 도서관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장서를 갖춘 공립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다는 그들의 도서관 네트워크와 시스템은 한 없이 부러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도서관을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이용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도서관을 독서실로 이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책을 빌리고, 책과 관계된 문화행사를 즐기는 허브로 이용하는 모습은 더없이 부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이 숨 막히게 분주한 도시에서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어진 도서관 계단에 자유롭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향기로운 풍경이었다.

버스는 아주 무심한 듯이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서 스파이더맨과 고블린이 싸웠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나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 자주 등장하던 컵 케이크 전문점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스파이더맨>에 등장했던 플랫아이언 빌딩(Flatiron Building) 등을 스쳐갔다. 영화를 통해 소개됨으로써 실재보다 더 풍요로워진 공간들이 눈앞에 쉬지 않고 이어졌고, 그럴수록 그것을 소개하는 가이드는 분주해졌다.

세 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에 세워진 삼각형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

1902년 세워진 다리미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flat iron Building)은 세계 최초의 20층 이상 건물이었다고 한다. 100년의 세월을 건너왔을 이 빌딩을 보면서 나는 뜬금없이 일본 지성을 대표한다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고양이 빌딩이 생각났다. 아마도 주어진 공간의 제약을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플랫아이언 빌딩보다는 고양이 빌딩에 좀 더 매력을 느끼는 쪽인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발상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보관할 곳이 필요해서 건물을 지으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는데, 그 금액은 80대까지 꾸준히 원고를 써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란다. 그러니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80대까지 살아야 하고, 살아서 원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원고를 쓰기 위해서 빌딩이 필요한 것인지, 빌딩을 세웠기 때문에 원고를 써야하는 것인지 순환논리에 빠져버린 것 같지만,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독한 공부벌레들의 자부에서 기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신감도 자신감이지만 그러한 계획에 선뜻 대출을 해 준 은행의 안목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뉴욕은 어디를 보아도 100년 이상 된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들을 모두 현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정작 미국 본토가 전쟁터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00년쯤 넘어서도 오늘의 이름값을 가지고 제몫을 해내고 있는 건물들은 과거이자 오늘이며 내일이었다. 100년을 건너온 건물들을 보면서 새로 짓는 건물 역시 100년 이상을 건널 수 있도록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곳곳에 옛 양식으로 지은 새 건물들인데, 그 건물이 들어선 공간의 맥락을 외면한 채 지나치게 호사스러웠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화려한 장식과 호사가 아니라 조화를 외면한 생경한 돌출이었다. 이 화려한 마천루의 도시에서 100년 이상을 갈 수 있는 유니크한 건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와 의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들어설 공간이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폭력에 가까워 보였다.

센트럴파크(Central Park)는 풍경보다 냄새로 먼저 왔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차가 많았는데, 그만큼 말도 많았고, 말의 배설물도 많았던 탓이다. 앨런 블링클리(Alan Brinkley)에 의하면[각주:2], 1850년대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상류층이 압력을 넣은 결과라는데, 그 압력의 동기가 재미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상류층들은 명품과 사치로 그들만의 문화를 구별짓기(Distinction) 시작하던 시기였다. 유럽의 명품과 사치품들로 꾸미고 매일 마차를 타고 나들이할 장소가 필요했던 그들이 시에 압력을 넣어 조성된 것이 센트럴파크란다. 부와 명예를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별짓기 시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격식이나 의례를 만든다더니, 결국 센트럴파크의 시작은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과시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해 2,500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으며, 뉴욕시민들로 자유롭게 산책과 피크닉 그리고 조깅 등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밤의 치안이 불안한 것이 문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들어질 때보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건강해진 것은 분명했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Chinatown)은 다소 낡고 남루한 느낌으로 활기찼다. 차이나타운은 근처에서 비슷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를 대부분 밀어내고 그 영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단다. 차이나타운의 남루한 활기는 저렴하게 때로는 멋스럽게 적혀있는 중국 간자(簡字)들에게서 먼저 왔다. 가이드는 차이나타운에는 화장실 없는 건물도 있어서 공동 화장실을 쓰는 곳도 있다고 강조했다. 차이나타운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나름의 코리아타운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날 때도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억척스럽다는 말을 비아냥대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또 그런다.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해도 이렇게 우회적으로 비꼬는 것을 보면 서양인들 눈에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동양인들의 모습이 거슬렸나보다. 자기들의 땅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동양인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이러한 비아냥거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내와 유진이도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쟤네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라고 살짝 이야기 해주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에 원래 주인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굳이 원래 주인을 따지자면 이민자들에 의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거나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아니겠는가? 일찍 도착하고 조금 늦게 도착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주인이란 말은 이미자의 나라에서는 기만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철도나 도로 그리고 주요 교량과 캘리포니아의 농장들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임금으로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가 아니던가? 물론 그 사이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도 아직 온전히 미국과 동화되지 못하고, 기어이 차이나타운이라는 자신들만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국인들의 기질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뭉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보면 미국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그러한 개별 이익집단의 힘이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난 이 사회의 특성에 대한 문제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볼 수 있는 리버티 섬으로 가기 위해 배터리 파크(Battery Park)에서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고 리버티 섬으로 가야하는데, 티켓을 사는데도 한참을 기다리고, 배를 타려면 또 대책 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를 발견했다. 미국에 와서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우연치 않게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물들을 곳곳에서 만났다. 지난번 코디에 갔을 때에도 숙소 바로 앞에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와 그 앞에 선명하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마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정서적 유대와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복잡다단한 감정은 우리와 미국의 관계,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 FTA나 통상마찰, 주한 미군 주둔 문제,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 등의 미국과의 현재적인 문제들, 세계사적 맥락에서 미국의 정체 등이 얽혀있는 복합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전참전용사 추모비

거리의 악사

승선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뒤에 있던 한국 학생들 사진도 찍어주고,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사진도 찍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여전히 지루했다. 그 때 근처에서 경쾌한 타악기 연주가 들려왔는데 한국 노래였다. 그곳을 쳐다보니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흑인 한 명이 작은 북처럼 생긴 스테인리스 원반을 목에 걸고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 옆에 놓여있는 상자에 돈을 넣어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기로 자기 앞에 있는 관광객의 국적을 추측해서 해당 국가의 노래를 연주하고 팁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우리를 보더니 이내 한국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낯선 눈으로 보아도 우리가 확실하게 한국인으로 보였나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팁을 상자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에 똑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지만 두 번의 감동은 없었다.

배에 오르자 사람들은 좀 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배 위에서는 맨해튼 시내를 넓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더위를 데려가고 압도적인 맨해튼의 풍경을 데려왔다. 맨해튼에서 멀어질수록 맨해튼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금 더 멀어지자 브룩클린 다리가 처음과 끝을 온전히 드러냈다. 리버티 섬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내린 배를 타기 위해서 잔뜩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바라본 맨해튼

배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자유의 여신상까지 갔을 때에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티켓 구입과 승선 과정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인지 더위 때문인지 이미 진이 빠져버린 우리는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 말고는 딱히 보거나 즐길 것이 없었다는 것도 실망스러웠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유의 여신상 왕관에 올라가야하는데, 이것은 예약을 하고서도 1시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단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왕관에 올라갈 수 없었다. 이렇게 왕관에 올라가는 것도 201111월로 끝이라는데 아쉬웠다.

뉴욕의 상징처럼 이야기 되는 자유의 여신상인데 그 주변에 함께 즐길 콘텐츠가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게다가 무던히도 잘 기다리는 미국인이 아닌 우리에게 기다림은 아까운 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사오는 사이 나는 선착장에 먼저 가서 줄을 서기로 했다. 그런데 매점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몇 사람이나 앞으로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원래 페리의 코스는 배터리파크를 출발해 리버티 섬과 엘리스 섬을 돌고 배터리 파크로 돌아오는 것인데, 우리는 엘리스섬은 가지 않기로 하고, 엘리스섬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근처에 9/11 테러의 현장인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와 세계 금유의 중심이라는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소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불리는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는 공사 중이라는 가이드의 안내도 있었지만, 그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어떠한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클라호마시티 국립추모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잔혹한 기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슬픔의 흔적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또한 9/11테러로 인하여 벌어진 납득하기 어려운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으로 인하여 숱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직 월드트레이드 센터의 붕괴 원인[각주:3]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혹들이 남아 있지 않던가? 인터넷과 SNS 등을 활용하여 세계는 동시간대를 살고 있고, 정보의 독점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만은 충분한 정보와 납득할만한 근거가 제공되지 않으니 오히려 소문만 무성하다. 소문은 음모론을 낳는데, 음모론은 듣는 사람을 더욱 불신에 빠지게 한다. 책임 있고 신뢰할만한 기관에서 사실 관계를 규명하고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드러내주어야 할 텐데, 무슨 이유인지 이 사건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월스트리트17세기 네덜란드 인들이 인디언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방벽(Wall)에서 유래한 것이다. 1624년 맨해튼에 도착한 피터 미누이트는 이주민 대표가 되어 인디언 대표들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물품을 주고 맨해튼을 양도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뉴욕의 시작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계약 아닌 계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 맨해튼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곳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을 영국이 빼앗고 뉴욕이라고 부른 것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침략, 강탈, 매수 그리고 합법화를 위한 매매계약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개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640년에 뉴욕에서는 이미 18개국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하니 가히 국제적인 출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지금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전쟁의 기원과 그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모두 지쳐있었다.

다시 버스에 오르기 전에 생수 두 병을 구입했다. 뉴욕 시내 전체가 얼린 생수 한 병에 1달러 받기로 합의를 했는지 모든 가판대에서 가격이 동일했다. 그 생수라는 것이 대형할인마트에서 24병 혹은 36병에 병 값 포함해서 7달러 정도면 구입하는 것이고 보면,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생수를 구입하려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두 병을 쥐고 1달러란다. 그래서 두 병을 받고 1달러를 주니까 생수를 팔던 이 친구 얼굴이 확 변하면서 화를 낸다. 손에 두 병을 쥐고 1달러라고 하니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날이 더운 탓이다.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버스는 만원이었다. 아내와 효진이만 같은 자리에 앉고 유진이와 나는 따로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앞쪽 자리에 앉았고, 나는 맨 뒷좌석에 한 자리가 있어서 앉았다. 새로운 가이드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권태로운 음성으로 아주 느릿느릿 설명을 하고 있었다. 유진이가 피곤했는지 꼬박꼬박 졸았고, 나도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잠시 졸았던 모양인지, 졸았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아내는 판옵티콘이다.그러는 사이 버스는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에 도착을 했다. 현대미술관은 금요일 오후 4시부터 무료관람이었다. 원래는 어른 20달러, 아이 12달러인 입장료가 무료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금방 입장할 수 있었다. 눈이 밝은 아이들은 오디오 가이드(Moma Audio Guide)를 받겠다고 줄을 서서 기어코 오디오 기기를 받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추가 비용 없이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인터랙션 기기였다. 한국어 서비스도 지원되는 이 기기는 해당 작품 옆에 적힌 숫자를 누르면 그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와서 관람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무료관람이 가능한 시간이라서 그런지 현대미술관은 여행 중에 들렀던 미술관 중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았다. 6층 건물의 어느 한 층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샤갈의 <나와 마을>,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과 같이 잘 알려진 작품들과 모딜리아니, 몬드리안, 고갱, 마티스, 모네, 쇠라, 모네, 세잔, 프리다 칼로, 칸딘스키 등의 숱한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5층에 전시되어 있었고, 엔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락 등의 작품은 4층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층의 혼잡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혼잡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다 보았다. 언제 또 이런 작품들을 이러한 거리에서 뛰는 가슴으로 체험하겠는가?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작품을 좀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강의 중에 자주 활용하는 고호의 <별의 빛나는 밤>에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더욱 새로웠다. 모처럼 뛰는 가슴에 행복해진 것은 나만은 아닌지 아내도 무척 즐거운 모습이었다.

입장하면서 받은 팸플릿에는 한 시간(하이라이트 관람), 두 시간(탐구 관람), 가족 프로그램으로 나누어 관람을 안내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유형과 관람 시간에 따른 안내가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도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고 열심히 들으며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5층의 회화 작품들을 진지하게 보던 아이들은 4층의 팝아트와 현대 미술을 보면서는 무척 재미있어 했다. 새로운 표현 방식과 대중적인 표현들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현대미술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가는 도중에 러브(LOVE) 조형물을 만났다. 젊은 연인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사진 찍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연인들이 있었고, 우리 차례는 그 다음이었다. 그냥 글자조각 같은데 의미 때문인지, 장소성(placeness) 조형물이 있다는 뉴욕동경필라델피아의 때문인지 무척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사람들의 열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두 커플 모두 글자와 어울려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형물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탁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처음에 출발했던 타임스퀘어로 돌아왔다. 유진이가 메이저리그 야구 모자를 하나 사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머리가 뜨거워 고생을 한 터라 근처 메이저리그 용품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덩치가 크고 등과 팔에 온갖 문신을 한 직원들 셋이 30Cm쯤 되는 모형 야구방방이를 들고 탁구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자기들도 머쓱했는지 웃는다. 모자는 한국보다 조금 저렴한 편이었는데, 아이들과 나는 모자를 하나씩 샀고, 아내는 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신혼 초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자를 선물했으니나는 도통 아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었다.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간신히 준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낮에 더워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밥도 많이 먹지를 않고 피곤해 했다. 오늘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모두들 함께 보았다. 이제 매일 저녁 그날 찍은 사진을 가족과 함께 보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즐거움이 되었다. 한참을 웃으면서 사진을 보다보니 정말 우리가 그곳에 갔었던 것일까 라고 느낄 정도로 새로웠다. 낮에 다녀온 곳이 저녁에 새롭다. 오늘 다녀온 곳도 이런데,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우린 무엇을 얼마나 기억에 남기고 가슴에 담을 것인가? 그것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이 아니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곳을 체험하면서 비록 언어화되지 못하거나 스스로 기억한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체험의 원형질은 가슴에 남아 다양한 형태로 발아하고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도록 2011년의 무모했던 여행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오늘 찍은 사진 속의 우리가 나이를 먹지 않듯 기억 속의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고 매년 오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운전하지 않고 사진기에 의지해 돌아볼 수 있는 하루였다.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말투나 걸어 다니며 만났던 거리의 풍경도 운전을 하면서는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다운타운 루프에서 보았던 100년 이상을 건너왔고, 앞으로 건너갈 최고의 위용을 뽐내는 건물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다만,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 눈에는 화려하고 많은 공력이 투입된 건축물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주변 공간이나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의견이니 그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만난 것들은 아주 가슴 뛰거나 우울한 고민을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문화적 인프라와 시스템은 가슴 뛸 정도로 매력적인 것들이었지만, 도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남루한 어둠은 짙고 우울한 그림자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뉴욕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였다. 지나치게 보고 느낄 것이 많아서 그런지 모른다. 우린 이 도시의 겉모습만 달리는 말에서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곳에 머무는 시간동안 말 위에서라도 좀 더 부지런히 보아야겠다. 오늘 밤에도 기계식 주차는 멈추지를 않는다.

 

 

  1. 다운타운 루프는 타임스퀘어→브로드웨이 극장가→메디슨스퀘어 가든→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플랫아이언 빌딩→유니언 스퀘어 쇼핑가→그리니치 빌리지→소호→차이나타운→시청, 월들 트레이드 센터 자리→배터리 파크, 자유의 여신상→사우스 스트리트 항구→ 로워 이스트 사이드→이스트 빌리지→UN→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록펠러 센터, 라디오 시티 뮤직홀→센트럴 파크→파크 센트럴 호텔→윈터 가든 극장→타임스퀘어로 돌아오는 코스다. [본문으로]
  2. 앨런 블링클리 / 황혜성 역,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05. [본문으로]
  3. 911 테러를 음모론적 시간에서 다룬 딜런 에이버리 감독의 <911 - Loose Change>를 보면 아직 우리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고 있지 못하는 12가지의 의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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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813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을 준비하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바보처럼 뒤늦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집이 우리가 예약한 집과 내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벌써 두 달 전 일이니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해서 예약했던 사이트로 들어가서 주소와 사진을 확인해보았다. 예약한 집과 주소가 달랐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숙소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왔으니 당연히 예약한 집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예약을 하면서 숙박료의 반을 선금으로 보냈고, 도착해서 나머지 반의 잔금을 치렀고, 벌써 이틀 밤을 잤으니 항의해야 무슨 소용일까 마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아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예약했던 집과 다르다고 항의를 했더니, 주소는 다르지만 스펙은 같단다. 화가 났다. 하지만 곁에서 아내와 아이가 보고 있으니 화를 냈다가는 그들이 불안해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정이 있어서 예약과 다른 숙소를 배정했으면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미안하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의 항의란 얼마나 공허한가? 전화기 너머의 직원도 내가 뭐라고 화를 크게 내고 빨리 전화만 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내 잘못이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민박이라서 무조건 믿었고, 인터넷의 이용후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낯선 뉴욕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또 얼마나 실망하고, 불신과 자괴감을 갖게 될 것인가?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속은 것만큼 속상하는 일이 또 있을까? 화도 제대로 낼 수 없고, 화를 내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처럼 불쾌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 일정을 망칠 수는 없었다.

타임스퀘어로 걸어가서 그곳에서 업타운 루프(Uptown Loop)[각주:1]를 도는 버스를 탔다. 어제 돌았던 다운타운 루프의 반대쪽을 도는 코스였다. 다운타운 루프처럼 업타운 루프도 보아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가일 같은 헤어스타일의 흑인 가이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설명을 했는데, 마치 라임(rhyme)이 잘 맞는 랩을 듣는 느낌이었다.

센트럴 파크 주변으로 고급 아파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장식의 외벽과 규모만으로도 압도되는 것들이었다. 레너드 번스타인, 존 레논이 살았다는 다코타 아파트(Dacota Apt)도 겉보기에는 그것들에 비해 오히려 소박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존 레논이 저격당했던 다코타 아파트 정문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마루에 놓여 있던 라디오 뉴스에서 존 레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던 기억이 난다. 팝음악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가 누군지조차 몰랐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 그가 대단한 뮤지션이었다는 것을 알았었다. 지금은 불교방송 기자를 하는 대학후배는 대학시절 비틀즈 팬클럽 회장을 맡았었는데, 거의 일 년 내내 비틀즈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비틀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야만인 취급하고는 했었다.

다코타 아파트에는 아직도 오노 요코가 살고 있다고 하니,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 간 곳을 매일 지나쳐 다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대단한 결기를 지닌 여인인가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며 미국 음악 시장을 장악했던 비틀즈는 뮤지션을 넘어서 1960년대 새로운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 그가 발표했던 <John Lennon / Plastic Ono Band>는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회자된다. 그러고 보면 오노 요코로부터 존 레논이 영감을 얻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술가에게 배우자는 화수분 같은 영감이 되거나 잔혹한 현실의 규율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존 레논은 행운아였던 것이다. 존 레논의 명성이나 부에 비해 전위예술가였던 오노 요코가 보잘 것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음악적인 재능에 화수분 같은 영감의 원천과 사랑을 나누었으니 좋은 음악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뉴욕의 고급 아파트

존 레논이 저격당한 다코타 아파트 정문

그 음반의 곡들은 아니지만 ‘I Want To Hold Your Hand’, ‘Let it be me’, ‘Hey Jude’, ‘Norwegian wood’, ‘Imagine’과 같은 곡들은 지금 들어도 좋은 곡들이다. ‘Norwegian wood’는 노래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로 먼저 읽으면서 가사를 보고 노래를 나중에 들었던 곳이다. 그것이 노르웨이의 숲이냐 노르웨이산 가구냐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듣고, 그것을 토대로 소설을 구상한 것이고 보면,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이 옳을 듯싶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문학사상사판에서는 아예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꾸고 있다. 원곡을 만든 비틀즈나 그것을 소설로 바꾼 무라카미 하루키의 감성도 대단할뿐더러 그 사이의 간극을 본 번역자가 그것을 다시 다른 제목으로 번역해낸 것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코타 아파트를 지나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재미있었는데, 다음이 우리가 내릴 미국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었다. 세계 최대 과학박물관이라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은 우리를 반기지 않는지 입구가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자유롭게 기부(Donation)하고 입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어른 19달러, 아이 10.5달러를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3,500만점의 전시물이 있다는데 얼마를 기부해야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하느니 그냥 입장권을 사는 것이 속이 편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당혹스러웠던 것이 기부 문화였다. 아이들 학교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기부를 권장했는데, 이걸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목은 기부인데 반강제인 경우도 많았고, 기부가 안 되면 학생들 행사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재정이 어려워 교육예산을 삭감했고, 그 덕분에 기부 권유가 더 늘었다고 한다. 처음 와서 효진이네 학교에서 학용품을 기부하라고 목록을 보내왔기에 아내와 고민 끝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을 구입해서 가지고 갔더니 진짜 가져왔어!’하는 눈빛으로 행정 직원이 받았다. 유진이네 학교에서는 학생 행사 관련해서 기부를 받아서 버스를 운행할 계획이었는데, 기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혼선을 빚다가 결국 운행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부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반강제적인 모금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자발적인 기부인지, 어느 정도 규모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매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모를 때, 오늘처럼 다른 방식이 있으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속 편했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공룡 뼈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꼭 들러야 한다고 우긴 것은 유진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족끼리 함께 보았던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 2006)의 배경이 이곳인지 아닌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로비에 있는 공룡 뼈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박물관을 다 보고나서도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워싱턴에 있는 자연사박물관과 이곳에서 나누어 찍었단다.

1층에서 밀스타인 기념 해양 생물관과 보석 전시장이 이채로웠다. 이름으로만 듣던 것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크기 그대로 눈앞에 등장했을 때 느끼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해양 생물관에서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결국 대부분 언어적 인식이거나 영상화된 이미지 이상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비릿한 냄새는 아니더라도 그것들의 크기와 구체적인 생김새만으로도 낯설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사실 이런 전시물 앞에서 더 놀라면서 흥미를 갖는 것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산산이 깨지면서 더 놀라고 놀란 만큼 즐거워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와 나는 그랬다.

보석 전시실에는 예상대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저 보석의 이름과 모양을 일치시켜보는 수준이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관심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내는 보석 같은 것에는 욕심이 없는 줄 알았었는데, 무척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니 새로웠다. 결혼하고 공부하면서 보석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 관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란다. ‘인도의 별처럼 보석을 가공해서 새롭게 붙여놓은 이름들이 보석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그 이름의 유래나 내력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려고 찾으니 벌써 아내와 다른 보석 앞에 가 있었다.

2층과 3층에 있는 애캘리 기념 아프리카 포유류관에는 아주 정밀하게 제작된 동물 박제들이 있었다. 조명과 배경 덕도 있었겠지만 박제 자체가 아주 사실적이었다. 탐험가, 동물학자, 사냥꾼이었던 칼 애캘리(Carl Akeley)는 박제술을 발명한 사람으로 이것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들이다. 그는 단순히 박제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경 등을 설치하여 하나의 디오라마(diorama)를 구성하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 아프리카 포유류를 전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칼 애캘리였고, 그가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을 잡아 박제를 만들었다고 하니 이 홀에 그의 이름이 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고릴라의 표정을 보고 사냥을 그만두고 동물 보호론자가 되었다고 하니 아주 극적이다.

멕시코 중남미관에서 뽀로로를 닮은 조형물

멕시코와 중남미관에서 발견한 조형물들은 섬세한 표현과 다양한 표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조형물 하나가 뽀로로를 닮았다고 보여주니 아이들이 웃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도 이런 디자인과 표정을 좋아했었다니, 뽀로로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곳곳에 소박하지만 정교하고 진솔한 표정의 목각들이 많았는데, 민속예술의 성격 때문인가 보다.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것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보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 없이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재미있는 표정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어쨌든 그들만의 소통이니 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라스트 모히칸>을 연상시켰던 토마호크

3층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관이 있었는데 이미 여러 곳에서 인디언 관련 전시를 보아온 터라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무기 중에서 토마호크(tomahawk)였다. 토마호크는 단지 돌이나 금속 도끼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던지거나 때릴 수 있는 무기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란다. 돌이나 뼈뿐만 아니라 금속을 날카롭게 벼려 나무에 붙여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가장 멋진 토마호크 씬은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 1992)의 끝부분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가 적을 향해 무참하게 그러나 아주 정교하게 휘두르던 장면이다. 그것은 마치 장예모의 영화 <영웅>(Hero, 2002) 에서 의식적으로 구현했던 칼과 활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같이 민첩하고 단호했었다. 앞뒤로 모두 살상이 가능하고, 원심력을 이용하는 토마호크의 특성을 잘 살려서 분노를 표현했지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타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비에 공룡 뼈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은 4층 전시실이었는데 그곳에 공룡과 멸종된 포유류 뼈가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이었음이 분명한 사라져 버린 것들의 견고한 뼈가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직 그 뼈에는 살을 갖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거칠게 포효했을 때의 기력이 남아 있는 듯 역동적인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림들만 오히려 그 단호한 정지 앞에서 지극히 초라한 비교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손을 피하기 위해 유리관에 갇혀 있거나 작은 철선으로 골격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녀석들조차 살아서 가장 강했던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죽어서 살아있는 이것들의 현재는 슬픈 매혹이었다. 주어진 시간에서 조금도 비껴 설 수 없는 살아서 유한한 것들의 운명과 그 안에서 스스로의 격을 유지하려는 몸짓이 잔혹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이 들려 돌아보니 한국인 모자가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제 더 볼 공룡이 없다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들 때문인지 엄마도 그 낯설고 긴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엄마가 저 정도라면 아들은 학위 없는 박사일 게다. 아들도 대단하고 엄마도 대단했다. 도통 공룡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나나 우리 아이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 같았다. 아들이 좋아한다고 같이 관심을 갖고, 분명 외워지지 않았을 그 이름을 외웠을 엄마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박물관은 토요일이라서 매우 혼잡했다. 더구나 워낙 박물관이 넓다보니 관람 동선 안내가 필요했는데, 이게 친절하게 되어 있지를 않았고, 직원들도 다소 고압적이고 불친절해서 아쉬웠다. 관람객이 이러한 불편을 느끼게 된다면 아무리 훌륭한 전시물이 있어도 최고라는 말은 듣기 어려우리라.

길거리에서 구입한 Lamb of rice.

박물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 가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그 냄새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작은 트럭에서 캐밥(kebop)을 팔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8달러를 주고 양 고기밥(Lamb of rice)을 샀다. 어제 현대미술관 앞에서 이것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맛만 볼 요량으로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밥과 양고기 그리고 야채의 조화에 무척 절묘했다. 주문하는 과정에서 주인에게 한 소리 들었다. 내 순서인 줄 알고 주문을 했더니 네가 올라와서 10명의 사람을 한 번 상대해볼래?”라고 이야기한다. 내 순서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주인은 주문받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 앞에서 조금 창피했다. 그래도 그거 하나 먹어보겠다고 꿋꿋하게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주인도 미안했는지 음식은 제일 빨리 준다. 나는 속도 없이 그게 맛있었다. 유진이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며 재미있어 한다. 그래 너희가 재미있으면 됐다.

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은 압도적이었다. 1892년에 짓기 시작해서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 중인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거라는 이 성당은 2050년에 완공이 된단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풋볼 경기장 2개 크기에 17층 높이로 8,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볼 수 있는 규모라니 크긴 큰 모양이다. 특히 장미창(Rose Window)1만개 이상의 유리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공력이 대단하다. 100년 전부터 짓기 시작했으니 완공도 되기 전에 이미 건물에는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건축이 중단되기도 했고, 2001년에는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단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느껴졌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이 건물 곳곳에서 빛났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100년을 넘기는 대역사를 꿋꿋하게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자기 자신이 시작과 끝을 모두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위대한 예술 작품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겸허함과 뒤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의 다양한 모습. 100년 전에 지어진 것부터 현재 짓고 있는 것까지 시간이 공존한다.

100년이 넘게 짓고 있고, 화재까지 나다보니 대성당은 각 부분이 자기 몫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만 봐서는 하나의 건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차이가 드러났지만,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정도 시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앞으로 그 차이를 지울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견디고 지탱하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미국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330만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독특한 건물 디자인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서보고 싶어 한다는 카네기 홀 그리고 뉴욕의 상징적인 공간인 센트럴 파크도 그냥 버스로 돌아보아야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보자는 생각에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서 볼 것을 결정하다보니 나와 아내가 보고 싶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센트럴파크 산책 등이 빠지게 된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제대로 보려면 지금 일정의 두 배 이상이 시간이 필요하고, 더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이기에 이미 예정된 한계였다. 어느새 버스는 다시 타임스퀘어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의뢰를 받아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규명하는 보고서[각주:2]를 제출한 적이 있다. 소설과 영화를 분석해서 <해리포터 시리즈>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덕분에 나도 다시 꼼꼼하게 분석할 기회를 갖게 되었었다. 우리 아이들도 모두 <해리포터 시리즈>의 광팬이었다. 효진이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열광했고, 유진이는 책도 책이지만 영화를 더 탐닉했다. 그러다보니 해리포터 전시회가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는 길에 해리포터 전시회(Harry Poter Exhibition)’가 열리는 곳을 보아둔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꼭 보고 싶다고 했는지 아내는 나이트 루프 전에 그것을 보자고 한다. 전시 공간이나 성격으로 보아서 별 것 없을 것 같다고 나는 몇 번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4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서 들어간 전시회장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람료(어른 27달러, 아이 20.5달러)에 비해 전시 내용이나 전개가 턱없이 부실했고, 무엇보다 즐길 것이 없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의상과 소품을 전시해 둔 수준이었고, CG로 처리해서 실재하지 않는 소품들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좋았지만, 그 수준이 조악했다. 그나마 전시실도 몇 개 되지 않아서 기다린 시간보다 관람시간이 턱 없이 모자랐고, 그 시간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많아서 앞으로 움직이지를 못해서였다. 아이들도 적지 않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브랜드 가디언(brand guardian)으로서 엄격한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이나 워너브라더스가 어떻게 이렇게 부실한 전시회를 허가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전시회는 9월까지 뉴욕에서 전시를 한단다. 빈약한 콘텐츠로 인해서 아이들은 실망하겠지만 업자들은 아마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들었다. 전시회장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볼 것도 없는 것이 사진도 못 찍게 한다고 투덜댔지만, 경험재(experience good)인 이와 같은 전시회는 못 찍게 하는 것이 옳다. 직접 봄으로써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그 구분에 대가를 지불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의 끝은 예상대로 관련 상품 매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해리포터라는 브랜드만 활용하는 팬시상품에서부터,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기숙사별 넥타이, 망토, 목도리와 모자 같은 실용적인 물품은 물론, 다이애건 앨리에서 팔렸던 귀지 맛 캔디, 마법지팡이, 님부스2000같은 빗자루 등과 같은 물품들까지 해리포터로 팔 수 있는 것들은 다 모여 있었다. 전시회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볼 게 많았다. 스토리노믹스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열풍을 일으켰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끝났지만 그것의 브랜드는 살아서 당분간 더 충성도 높은 팬덤을 형성할 것이 분명하다. 매장을 나오면서 아이들은 엽서를, 나는 ‘Hogwarts Express 9¾’이라고 새겨진 자석을 구입했다. 내년 봄부터 내 연구실 앞에는 아마 이 자석이 붙어있게 될 것이다.

나이트 루프를 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캘리포니아에 인앤아웃(In-N-Out) 햄버거[각주:3]가 있다면 뉴욕에는 셰이크 섀크 버거(Shake Shack Burger)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침 근처였다. 이틀 동안 타임스퀘어를 오가면서 꼭 먹어보리라 벼르다가 드디어 먹었다. 20분쯤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았다. 20분밖에 기다리지 않았으니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우리도 이제 기다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지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 넓은 매장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매우 소란스러워서 정신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자리를 잡으라고 하고, 나는 주문한 버거가 나오길 기다렸다. 셰이크 섀크 버거는 4.5달러로 버거의 양과 질에 비해서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다시 20분쯤 기다려서 주문한 버거를 받았다. 햄버거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아삭거리면서도 씹으면 촉촉했던 패티, 그리고 촉촉한 빵과 아삭한 프렌치프라이와 치즈의 맛이 탁월했다. 조금만 덜 소란스럽고 혼잡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가격에 이렇게 맛이 있으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고 사람이 몰리는 만큼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고보면, 감수해야할 부분이었다.

셰이크 섀크 버거

음식점 등급 표시

뉴욕에서는 음식점 앞에 ABC등급이 매겨져서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음식점의 등급표시라는데, 물론 A가 가장 좋고, B, C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식당이 A를 걸고 있었다. 만약 C가 걸려 있으면 식당 문 앞에서 얼른 도망가야 할 수준이란다.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형태라는 게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이렇게 등급을 매겨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이전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나보다. 어쨌든 처음 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친절한 구분이지만, 평가받는 식당 입장에서는 참 모진 구분이 아닐 수 없다. 음식 맛, 청결도, 요리사 등급, 가격, 서비스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라는데, 한국의 유명 음식점들은 어떤 등급을 받게 될까 궁금했다. 허름한데 음식 맛은 최고인 집들은 이 평가 기준으로 하면 A를 받을 수 있을까?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같은 데는 욕도 서비스로 평가해야 할 텐데, 다른 곳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것 같고…….

이것은 미국식 객관화다. 객관화하기 어려운 것을 객관화하기 위해 엄정하고 납득 가능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에 따라 평가하고 공시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부조리한 것들이 이와 같은 예측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대학입시나 입사시험과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각 대학이나 기업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객관적이고 납득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순인 줄 알면서 한계가 분명한 수능으로 평가하거나 외부 평가 기관의 평가나 스펙에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대학별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인재상에 맞추어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해야만 차별화된 교육이 가능할 텐데, 이것을 국가가 틀어쥐고 있으니 기형적인 입시 속에서 너나없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기업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재를 뽑아서 쓰는데, 자신들만의 평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획일적인 영어성적과 스펙만을 강요하는 것도 사회적 묵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객관화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렇게 자율적인 평가 시스템에 맡기었을 때, 모두가 수긍 가능한 공정한 평가를 수행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러다보니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평가에 기대야 하고, 그로 인하여 교육과 평가가 어긋나고, 배움과 능력이 괴리되는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주문한 것을 기다리면서 보니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폐기처분되는 음식들을 볼 수 있었다. 주문한 버거가 나오고 손님을 호출했는데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음식이 식자 여지없이 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주스 전문점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주문이 잘못되어 딴 음료가 나오면 예외 없이 폐기 처분한다. 어디 그뿐이랴. 대형할인매장에서 식료품을 샀다가 반품을 하게 되면 개봉 여부와 상관없이 폐기한단다. 식품에 대한 엄정한 관리라는 점에서는 환영할만하지만 개봉하지 않은 것까지 폐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가 아닐까? 미국에 처음 와서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소시지가 너무 짜서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 반품을 했다. 담당자가 반품한 모든 음식들은 폐기하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몹시 불쾌했는데, 몇 개월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보니 그가 의식 있고 양심적인 직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미국의 모습을 보면, 풍요가 늘 축복은 아닌가보다.

우비를 입고 탄 나이트 루프

저녁을 먹고 나이트 루프(Night loop)를 타러 정류소까지 갔더니 이것은 한번 타면 도착할 때까지 정차하지 않는단다. 1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니 화장실을 들렀다가 타야 할 것 같아서 화장실을 찾는데, 없다. 대부분 업소의 안에 있어서 업소에 들어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처럼 화장실 인심이 고약한 곳이 또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뉴욕처럼 야박한 곳도 없었다. 결국 길 건너에 있는 맥도날드로 갔더니 벌써 십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내 앞에 앞에 차례가 되었는데 한 남자가 아이를 데려와 먼저 이용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앞에 사람은 나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아이는 들어가서 10초도 되지 않고 나온다. 화장실을 보고 부지런히 정류장으로 갔더니 아내와 아이들이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다. 이 지독한 도시에는 화장실도 없고, 있어도 잘 빌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화려하고 압도적인 건물을 세우면 뭐한단 말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를 편안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배려가 없는 도시라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도시가 아니겠는가?

나이트루프는 말 그대로 야경 투어였다. 맨해튼 다리를 건너서 브룩클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기회가 닿으면 브룩클린에 있는 그리말디 피자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줄이 너무 길었고, 투어 중에 내릴 수도 없었다. 버스에 오를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다. 2층 버스에 지붕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했는데 버스 회사에서 모두에게 하얀색 우비를 나누어 준다. 우비를 입고 2층 버스에 앉아서 맨해튼과 브룩클린의 야경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보는 브룩클린과 맨해튼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맨해튼은 불빛으로 도시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불빛 바깥쪽의 어둠은 낮보다 더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대학시절에 본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1989)가 생각나서 꼭 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너무 어두웠다. 창녀 트랄라가 한국전에 참전하는 군인과 며칠을 함께 보내고 떠나보내며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깨닫는 장면은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L'Amant, 1992) 의 마지막 장면처럼 회환과 자기부정의 정서가 표현된 빼어난 장면 중에 하나다. 브룩클린은 그동안 내게 트랄라의 절망과 그 앞에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지켜볼 뿐인 소년 스쿠프 그리고 자신이 성정체성을 깨닫고 방황하는 핸리의 모습이 마구 엉킨 이미지였었는데, 이제 조금 구체적인 도시의 윤곽을 갖게 되었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으로 돌아오며 유쾌해졌다. 내린 비로 밤공기는 맑고 시원해져 있었다. 이제 조금 익숙한 눈으로 복습하듯 거리와 건물들을 확인했고, 그 사이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타임스퀘어에서 밤늦게 만난 중국민주화 시위대

타임스퀘어의 청년

미국스러운 대형 리무진

버스는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그레이라인 버스 투어를 즐기다보니 시작과 끝이 매일 같은 곳이다. 타임스퀘어에는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광고판들은 밤이 깊을수록 더 화려하고 강렬해지는 느낌이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오십 여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중국 민주화와 민주투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외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국에서 할 수 없으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에서 외치는 것이리라.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음직한(아직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동양인들 몇몇이 쳐다볼 뿐, 사람들은 대부분 무관심했다. 근처에서는 한 청년이 “Jesus forgives sin”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길고 호화로운 리무진 두 개가 정차해서 묘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의 다양성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모두들 내일이 뉴욕에서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욕을 부지런히 돌았다. 처음에 올 때 그 정체모를 도시를 조금 아주 조금 보았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머무는 기간에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지 않는 도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아직 뉴욕이 싫다. 숙소는 별도의 문제였다. 그건 속인 사람과 속은 우리의 문제였으니까. 무엇보다 뉴욕이 보여주는 지독한 부조화가 거북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도시 공간에서 세계 제일의 강박에 사로잡힌 화려함은 천박하거나 안쓰러운 과시였다.

나는 왜 뉴욕을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지 아직 의문을 풀지 못했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최고의 도시라면, 뉴욕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문화라는 것에서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사람이 소거된 문화는 더 이상 문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뉴욕을 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두고두고 고민해볼 문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최고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다시 차를 렌트해서 필라델피아로 떠날 것이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창밖으로 빗줄기가 거세다. 아마 운전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동부로 넘어와서는 유난히 비가 많다. 어쨌든 그것도 여행의 일부일 테니 수납해야 하리라. 예측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만큼 긴장되고, 긴장된 만큼 짜릿한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면서.

  1. 업타운 루프는 AOL타임워너 센터→링컨센터→다코타 아파트→미국 자연사 박물관→어퍼 웨스트 사이드→유스호스텔→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리버사이드 교회→아폴로 극장→스미소니언 국립 디자인 박물관→구겐하임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미술관→휘트니 미술관→센트럴파크 등을 도는 코스였다. [본문으로]
  2. 박기수, KOCCA포커스 2010-3 <해리포터, 스토리텔링 성공 전략 분석>, 한국콘텐츠진흥원. [본문으로]
  3. 인앤아웃(In-N-Out)의 햄버거는 패스트푸드이기는 하지만 냉동재료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신선한 재료를 냉장트럭으로 배송해야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되다가 인접한 네바다 주, 애리조나 주, 텍사스 주까지만 지점을 냈단다. 재료의 신선함을 냉장으로 지킬 수 있는 거리까지만 지점을 낸다는 그들의 마인드 때문인지 미국 내 고객만족도 1위 햄버거란다. 매장 내에서 통감자를 기계에 넣고 한 번에 잘라내어서 프렌치프라이를 만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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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필라델피아

814일 뉴욕필라델피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빗소리에 잠을 깨면서 나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냐던 이승환의 노래가 생각났다. 밤새도록 세찬 비가 내리고, 새벽녘에 설핏 잠이 깨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까지 걸어가겠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아침이 되자 비는 더욱 거세졌다.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일단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했다. 여행 올 때 가져온 3분 카레 20개가량과 햇반 7, 뉴욕에서 장을 본 쌀, 김치, 계란 등을 숙소 냉장고에 남겨 놓고 메모를 써 두었다. 남은 일정 동안 이것을 모두 먹을 수 없고, 남은 것을 비행기에 실어 다시 얼바인으로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비가 이렇게 온다면 그것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일단 짐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기로 하고, 이것들을 냉장고에 두고 가기로 했다. 우리보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유용한 물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진하게 메모를 써서 냉장고 앞에 붙여두고 왔다.

숙소는 마지막 정마저 떼려는 듯, 아침에 온수마저 나오지 않았다. 일단 찬물로 씻을 수 있을 만큼 씻으라고 아이들에게 이르고, 숙소를 정리했다. 우리가 머문 자리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을 먹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남의 집을 사용한 최소한의 예의기도 했다. 짐을 일단 다 싼 후에 손에 드는 짐들은 비닐로 잘 덮었다. 그러는 사이, 비는 더욱 거세졌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가서 택시를 잡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택시들이 대부분 예약으로 다니기 때문에 나가서 바로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짐을 끌어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택시에 짐을 싣고 렌터카 회사까지 가는데 곳곳에서 교통통제를 하고 있었다. 1.2마일(2) 되는 거리를 빙빙 돌아서 간신히 도착하고 보니 요금이 12달러가 나왔다. 20달러 지폐를 주니 기사가 잔돈이 없단다. 있는 것만 달라니 6달러를 준다. 그래 그거면 됐다. 비가 이렇게 장하게 내리는데 이 택시가 아니었으면 곤란하지 않았던가?

렌터카 회사 AVIS는 대형 건물 주차장 같은 분위기였다. 예약을 확인하고 차를 배정 받는데, 운전면허를 달란다. 2월에 면허를 획득하고 아직까지도 배달이 되지 않아서 임시 운전면허증(temporary license)을 제시했더니 이건 안 된단다. 얼바인에서는 그것을 제시하고 차를 빌렸다고 하니, 그래도 안 된단다. 사진이 붙어 있는 면허가 있어야 한단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한국 면허를 보여주니 그건 된다고 한다.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그들이 과연 한국 면허증을 무슨 수로 신용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됐으니 된 것이다. 서류를 꾸미고 카드결제를 하려고 데빗 카드(debit card)를 냈더니 데빗 카드는 안 된단다. 잔고가 넉넉한데 왜 안 되냐니까 안 된단다. 신용카드가 없냐고 해서 한국 신용카드를 줬더니 결제가 됐다. 미소를 보이면서 안 된다는 데 화를 낼 수도 없고, 답답했지만 금방 다른 대체 수단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창구 담당자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은 탓에 저항하기 보다는 투항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대체 방법을 이야기 해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는 신형 소나타였다. 차를 배정받아서 짐을 싣고 달리는데 꼭 내차 같다. 처음 타보는 차인데 내 차처럼 편한 것은 소나타의 경쟁력인가 아니면 소나타의 한계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렇게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것은 경쟁력이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최적화된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 한계가 아닐까?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뉴욕을 빠져 나왔다. 렌터카를 뉴욕에서 반납하면서 재웠던 사만다를 며칠 만에 깨웠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초반부터 에러였다. 가뜩이나 난감한 뉴욕에서 사만다가 에러면 헤맬 수밖에 없었다. 사만다는 몇 번의 경로 수정을 하더니 결국 뉴욕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뉴욕을 빠져나오니 날아갈듯 시원한데 폭우는 여전히 지독했다.

필라델피아 시내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바로 이동하려 했다. 4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니까,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면 뉴욕이나 워싱턴에서의 하루를 더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 도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역사를 정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필라델피아가 포함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우애 있는 도시라는 의미란다. 독립전쟁 당시 최대 거점이었고, 19세기에는 미국 내 최대의 도시였다는 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야 할 도시였다.

사실 필라델피아로 달리면서 내심 우리 모두는 유명하다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유진이 학교 앞에 필라델피아 식으로 샌드위치와 프렌치프라이를 파는 필리스’(phillies)라는 가게가 있는데, 여기에서 맛본 바로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는 기대하기에 충분한 음식이었다. 특히 나는 필리스 베스트라는 메뉴가 마음에 들었다. 프렌치프라이와 얇게 저민 소고기를 함께 철판 위에서 구운 후에 그 위에 필라델피아 치즈를 뿌려주는 이 음식은 1인분이면 2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양도 많고, 짜지 않으면서도 치즈 고유의 풍미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아했다. 우리는 모두 캘리포니아에서도 맛이 이 정도인데 필라델피아 현지에서는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 라는 소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뉴욕을 출발해서 필라델피아까지 142마일(227)을 달렸다. 거센 비는 천천히 달리라고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누군가 곡진하고 집요하게 이야기할 때는 듣는 것이 현명하다. 더구나 안전과 상관되는 일은 고집 피울 일이 아니었다. 달리는 내내 사만다의 음성이 다급했는데 지금껏 달렸던 길들과는 달리 시내 주행이 많았기 때문이다. 힘들게 고속도로에 올라선 후에도 자주 길을 바꾸어야 했다. 달린 주요 고속도로들은 I-78, I-95 S, I-276 W였다. 도로명 뒤에 SW가 붙는 것을 보니 우리는 남쪽과 서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만다에 의지해서 달리다보면 내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방향감과 거리감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낯설고 비까지 내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바깥세계와는 단절된 차 안의 작은 세계 안에만 머무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내리는 비 때문인지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내가 졸까봐 뒷좌석에서 룸미러에 비치는 내 눈을 보고 있었다. 힘겹게 빗물을 밀어내는 와이퍼가 지나간 부분을 제외하고는 밖이 잘 보이질 않았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음악도 틀지 않고 있으니 마치 고요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아주 비현실적이고 고립된 것이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점심때였다. 배고픔은 얼마나 규칙적이고 무조건적인가? 다행히 휴게소에는 먹을 만한 새로운 음식들이 많았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이탈리아 음식이었는데 여전히 양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짜지 않아서 좋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출발을 하려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묘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백발의 노인이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소변을 보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진 청바지와 멜빵은 절묘하게 축축한 바닥에 닿지 않았다. 하얀 피부의 엉덩이와 상체에 비해서 턱없이 빈약한 다리가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누구도 그 노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놀라서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소변기 사용 순서도 가르치는 나라이고 보니 내 행동은 무례하거나 불쾌한 것일 수 있어서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매우 강렬한 이미지였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무척 탄탄했을 상체와 여위고 빈약한 하체의 부조화는 처연했다. 젊은 날의 노동을 견실하게 수행했을 그의 상체와 이제는 새로운 삶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도 빈약해진 다리, 그 부조화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쓸쓸했다. 그것은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UP>에서 칼과 앨리가 평생 모험을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앨리가 죽고 나서 칼이 앨범을 통해 추억하는 장면처럼 쓸쓸하고 슬퍼보였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

작은 우비를 입고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으로 가는 아내와 아이들

비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하고 나서도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숙소는 외곽에 잡아두었기 때문에 먼저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로 먼저 갔다. 주소대로 입력을 했는데 사만다가 데려간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차를 세우고 물어보니 한 블록 너머에 있었다. 밖에서 보니 주차가 마땅할 것 같지 않아서 동전으로 주차가 가능한 곳에 일단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비가 너무 거셌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서 우산을 살까 고민하다가 솔이네가 귀국하면서 주고 간 우비를 가져온 것이 생각나서 그것을 우선 쓰기로 했다. 내 것은 정상이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의 것은 모두 많이 작았다. 결국 둘러쓰고 뛰기로 했다. 어린 시절처럼 물첨벙을 하면서 한참을 달려오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아내 우비 뒤에 그려진 미키마우스의 눈이 없었다. 모두 함께 깔깔대며 물첨벙을 하면서 안내도를 받으러 인디펜던스 비지터 센터로 갔다. 폭우 때문에 거리에는 빗물이 도랑처럼 흐르고 있었는데, 물이 맑았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는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 자유의 종이 보관된 리버티 벨 센터(Liberty Bell Center), 미국 최초의 국회의사당(Congress Hall), 올드시티 홀(Old City Hall)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지터 센터가 있는 파크는 무척 고즈넉했다. 파크 자체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파크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과 오고가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전체 지도와 인디펜던스 홀 내부를 둘러보는 투어 티켓을 받았다. 투어를 참가하기 위해 인디펜던스 홀을 찾아가니 아까 주차하고 걸어왔던 그곳이다. 다시 우비를 뒤집어쓰고 아주 궁색한 모습으로 온 길을 되돌아갔다.

미국 최초 의사당 전경

의사당에 딸린 양탄자는 7개 주를 상징

20분쯤 밖에서 기다리니 투어가 시작되었다. 인디펜던스 홀로 들어가 앉아서 해설사의 설명을 20분쯤 들었다. 워낙 빠르게 설명을 하니 들리는 소리보다 놓치는 소리가 많았다. 들리지 않는 부분은 유진이가 대신 들려주었다. 그나마 미국 역사를 미리 조금 파악해두고 간 것이 다행이었다.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회의를 하고, 건국 이후에 상원이 열렸던 최초의 국회의사당에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책상과 의자, 책상마다 놓여 있는 깃털 펜, 촛대, 책자, 서류들을 창으로 들어온 빛이 제한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연출처럼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에 제한적인 조명은 몰입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중간 중간 효진이는 제가 아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학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라며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주었다. 보스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는 책 속의 역사가 현장의 역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식으로서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할 텐데, 아직 효진이의 역사는 지식에 머물러 있다. 아직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역사를 배운 것이 앞으로 우리 역사를 배우는데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했다. 귀국하면 곧바로 한국 역사를 배울 텐데 효진이는 어떻게 두 나라의 역사를 비교하고 이해하게 될지도 기대가 된다. 효진이가 자신이 아는 것을 자꾸 이야기 하니까, 유진이는 그건 미국 역사라고 면박을 준다. 조금 컸다고 우리나라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둘이 그러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현재를 보면서 역사를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몇몇 건물들은 보수중인지 가림막을 설치했는데, 가림막이 아주 멋스러웠다. 보수하는 건물의 원래 모습을 가림막에 흐리게 인쇄해 둔 것이다. 두드러지게 해서 현재 건물의 보이는 부분을 압도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건물 앞으로 워싱턴 동상과 존경 받는 대통령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보도에 박혀 있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수많은 이해가 상충하고, 수많은 가치관이 충돌하는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전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미국과 같이 합중국의 형태를 이룬 나라에서 대통령이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라면 그는 정말 존경받을만한 인물일 것이다. 미국에 와서 보니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대표적인 인물들이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이다. 조지 워싱턴의 탄생일을 기념하며 시작된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s Day)까지 있고, 가는 곳마다 링컨과 관련된 기념관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과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겠다. 조지 워싱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링컨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판 위에 가서 서 있었다. 사진을 찍어주면서 우리나라에도 존경할만한 대통령이 많이 나와서 아이들이 그들을 기리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보수중인 건물의 가림막멋스러운 배려.

필라델피아는 유서 깊은 도시여서 그런지, 돌아보니 곳곳에 동상이 있다. 그 앞에서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제대로 공을 들여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님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동상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바 있다. 동상은 사람들 앞에 우뚝 강건하게 서서 다른 의문이나 반론을 일시에 침묵시키는 힘을 가졌다. 사람들은 동상을 세움으로써 동상 속 인물의 의지와 뜻을 계승하려하고, 그 외의 다른 의견과 문제는 일체 허용하려 들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반성하지 않는 동상의 의지와 뜻은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린 역사와 현실 속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동상의 뒤쪽을 찍으면서 그 어색한 강건함을 생각했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를 둘러보며 다양한 곳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그들의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공사 가림막 뿐만 아니라 화장실 푯말 하나에서도 자신들의 유서 깊은 전통을 드러냄으로써, 장소성을 최대한 살리는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 쪽으로 다시 이동해서 자유의 종(The Liberty Bell)을 보았다. 깨진 부분이 선명한 자유의 종은 묘하게 동상과 대비를 이루었다. 미국독립선언이 공포될 때 쳤다는 이 종은 노예해방론자들에 의해 자유의 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균열이 생겨서 사용하지 않고 전시만 해두었다는데, 가서보니 깨진 금이 선명했다. 자유와 평등을 상징했던 이 종의 균열은 현재 미국의 모습과 상관하여 좋은 유추를 제공했다. 현재적 의미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실체와 그 결과,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보이는 미국의 자유와 평등은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물론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도 분명했다.

자유의 종 엑스레이

멋스러운 여자 화장실 표시

도네이션함

1954년 자유의 종 앞에서 선 어린이 합창단

자유의 종을 보러 간 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954년 인디펜던스 홀에서 공연을 하고 자유의 종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모습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유엔군 위문공연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이 합창단은 휴전이 되자 미국에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무려 4개월 동안 42개 도시를 돌면서 공연을 했는데, 미국 내에서도 화제를 불러 모으면서 4,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족끼리 전쟁을 하면서 다른 나라 군대를 위로하기 위해 어린이를 동원했다는 사실과 전쟁 후에는 남의 나라에 경제 원조를 부탁하러 어린이들을 앞세워야 했던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어린 아이들 옆으로 서 있는 군복을 입은 어른들의 모습에서 그 참혹했던 시기를 건너려했던 눈물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사진이 비록 자랑으로 내세울 것은 아닐지 몰라도 부끄러워하며 숨길 것도 아니었다. 참담한 현실 앞에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려했던 시도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반복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렀는데 눈길 가는 것이 많았다. 독립전쟁, 자유의 종은 물론 미군과 상관된 다양한 상품들도 등장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점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자신들이 가진 원천 소스를 아주 매력적으로 상품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소비해줄 방문객 수에 따라서 기념품의 종류, , 가격이 결정된 것일 테지만, 그 다양성과 품질이 놀라웠다. 기념품점에서 독립전쟁 당시 복식으로 구현한 체스세트를 보았는데, 부피에 대한 부담만 없었다면 구입하고 싶은 것이었다. 뉴욕에서 관람한 해리포터전시회 기념품점에서 본 체스세트는 해리포터-마법사의 돌에 등장했던 체스세트를 그대로 만든 것인데, 무려 500달러나 했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오늘 본 이 체스세트는 가격도 훨씬 싸고 부피도 적어서 몹시 고민을 하다가 내려놓았다. 얼바인까지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다시 귀국할 때 안전하게 가져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양한 기념품들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체스세트

기념품점을 돌아보며 팬시화된 역사를 생각했다. 분명 이곳에서 팔리는 기념품들은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라기보다는 역사를 소비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역사적인 맥락을 소거한 소품으로서 역사를 활용하고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를 통해 관심을 지속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관람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모두들 기대하고 있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로 유명하다는 집을 사만다에 입력하고 출발을 했다. 필라델피아의 멋스러운 시가지를 두루두루 돌아서 찾아갔는데, 그곳에 없다. 주소는 맞는데 샌드위치집이 없다. 허탈해서 주변을 찾다가 포기하고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풀고, 프런트에 물어서 찾아보기로 했다. 숙소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멀었다. 가는 길에 길을 잃어버려 돌다가 어느 주택가로 들어섰다. 똑같이 생긴 작고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집 앞 계단에는 흑인들이 나와 앉아 있었다. 한참을 헤매느라 그 주택가를 돌았는데 백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필라델피아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노예가 아닌 흑인들이 자유를 찾아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흑인들이 많다고 한다.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온전한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머무는 인디언을 생각했다. 자신들의 땅에서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내몰린 인디언들은 미국의 영원한 타자처럼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것은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결콘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더블어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불평등과 부자유가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소외가 분명한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은 소외당한 사람의 몫이라기보다는 소외시킨 사람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소외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흑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고 프런트에 문의했는데, 다시 필라델피아 시내로 들어가야 한단다. 숙소로 오는 길에 바비큐라는 간판을 본 것이 기억나서, 미국 와서 제대로 된 바비큐를 먹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먹어보자고 했다. 이미 모두들 배가 고픈 상태여서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집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각주:1]라는 바비큐 집이었는데, (rib)이 유명하다고 했다.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이 집은 서부에는 없고 동부에만 있단다. 식당 분위기도 밝고 활기찼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데 양도 넉넉하여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Famous Dave's BBQ 음식들

이것저것 맛을 보자고 몇 가지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큰 쟁반에 여러 음식이 함께 나오는 콤보를 먹고 있었다. 쟁반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음식의 양이 대단했다. 저것을 시킬 것을 잘못했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짜서 고생한 버팔로 윙을 제외하고는 음식 맛이 좋은 곳이었다. 특히 립이 왜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직접 구운 옥수수 머핀도 맛이 있었다. 립은 1인분이 12조각이었는데 둘이 먹으면 적당할 양이었다. 프렌치프라이와 머핀도 싸서 숙소로 가져올 정도로 많았다. 음식의 절대량도 많고, 많이 먹고, 즐겨 먹으니 미국인들은 뚱뚱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오늘 아침 뉴욕에서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씻지 못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 후드로 적당히 가리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여행이 아이들을 털털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살다보면 상황에 따라서 늘 따뜻한 물에 정갈한 욕실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스스로 적응하거나 견디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할 때, 견디는 선택지를 하나 더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이들이 이번 여행을 통해서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가족이 함께 낯선 곳을 여행했다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여행의 체험이 아이들에게 무엇이 될지는 그 다음 문제고, 의도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고, 서로 의지하며 낯선 곳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워싱턴으로 갈 것이다. 알 수 없는 기대로 설레는 밤이다.

  1. 나중에 얼바인에 돌아와서 우연한 기회에 롱비치에 있는 이 집을 발견했다. 동부에만 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였지만, 그 덕분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서부에서 발견했을 때에는 그 기쁨이 더 컸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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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is not Free

815일 필라델피아워싱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필라델피아는 우리에게 비로 기억되고 싶은가보다. 숙소를 나서는 동안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많은 양의 비는 아니었지만 워싱턴 근처까지 오락가락하며 우리 뒤를 따라왔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말이 별로 없었다. 어제 비를 맞아서 피곤한 것인지, 워싱턴 일정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서 지난 3주 동안 미뤄놓은 일들을 몰아서 해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몰라도 모두들 조용했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나니 노곤했다. 포만감 때문인지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졸렸다. 할 수 없이 휴게소에서 커피를 사가지고 차에 올랐는데도 졸음은 좀처럼 달아나지 않았다. 결국 휴게소에서 30분쯤 눈을 붙이고 떠나야 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의식과 행동은 낯선 시공간에 기민하게 적응해갔지만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나보다.

워싱턴에서의 숙소는 메릴랜드 쪽에 잡았기 때문에 워싱턴으로 먼저 가서 시내를 둘러보고 나중에 숙소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워싱턴 근처에 왔을 때 비는 그쳤다. 워싱턴에서 맨 처음 찾은 곳은 미국 국회의사당(United State Capitol)이었다.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18대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의 동상 부근 주차장에 여유가 있어서 차를 댔다.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

율리시즈 그랜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 동상 좌우로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을 기리는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청동의 힘도 당당하게 말 위에 앉아 있는 그랜트 장군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남북전쟁 당시 비극의 현장에 있던 병사들의 모습이 보다 생생하게 서 있었다. 그 생생함은 박물관에서 만나는 박제의 복원된 힘줄이 보여주는 가소로움이 아니라 비극의 현장을 소환하는 힘, 바로 그것이었다. 한참을 병사들을 바라보다 그랜트 장군을 본다. 알코올 중독으로 군에서 제대하고 두 번의 사업 실패로 그토록 자신이 버리고 싶어 하던 가업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던 그랜트에게 남북전쟁은 하나의 기회였단다. 그는 군대로 복귀하여 눈부신 전과를 올리고 마침내 로버트 리 남군사령관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남북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사람이다. 알코올중독자로 군에서 쫓겨나고 두 번의 사업 실패를 연속할 때 누가 그를 영웅으로 보았겠는가? 알코올중독자에게서 북군 사령관의 가능성을 찾아낸 링컨의 밝은 눈도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지도자란 흐림 없는 눈[각주:1]으로 그런 인재를 찾아내고 사심 없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동상 앞쪽으로 캐피톨 리플렉팅 풀(Capitol Reflecting Pool)이 있었고, 그 앞으로 멀리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이 보였다. 지도에 따르면 그 너머로 다시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이 있고 그 너머에 링컨기념관이 있고, 그 뒤로 포토맥 강이 흐르고 있다. 소위 내셔널 몰(The National Mall)이라는 거대한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 끝에는 국회의사당, 중간에는 워싱턴 기념탑, 서쪽 끝에는 링컨기념관이 마주 보고 있었다. 국회의사당과 링컨기념관 사이가 직선거리로 3쯤 되는데, 그 중간에 국립미술관, 국립 자연사 박물관, 미국 역사박물관, 라틴아메리카 근대미술관, 베트남 참전 용사비,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공원, 항공우주박물관, 허시혼 미술관, 스미소니언 본부 등이 모여 있는 구조였다.

미국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에서 바라본 내셔널 몰과 워싱턴 기념탑

여행안내 책자에 국회의사당은 캐피틀 힐(Capital Hill)에 세워졌다는데 근처에 언덕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와서 직접 보니 정말 언덕은 없고 국회의사당이 자그마한 언덕 크기로 서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여유롭고 한가한 주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의회가 열리는 기간이 아니면 개방을 하고 무료 투어가 진행된다는데, 거기에 참가하려면 아침 9시부터 나누어주는 티켓을 교부받아야 한단다. 이미 시간이 늦어서 투어는 불가능했고, 국회의사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국회의사당 뒤로 최고재판소, 국회도서관, 셰익스피어 도서관 등이 있다는데, 직접 가보지 못했다. 테러에 대한 공포로 국민들은 떨게 만들어 놓은 나라의 국회의사당 주변의 경계는 의외로 단출했다. 무장한 경관 한 명이 의사당 계단 부근 그늘에 무료한 듯 기대어 있었고, 순찰차들만 한가롭게 오가고 있었다.

미국 국회 의사당은 웅장한 규모나 건물의 미학보다 그 앞에서 자유롭게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으로 더욱 빛났다. 보이는 곳에서는 적어도 삼엄한 경계 따위는 없었다. 사진들을 찍고 무장한 경관에게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면서 아주 천천히 즐기는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도 사진을 찍고 아이들에게 미국의 상하양원제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화장실을 찾았다. 횡단여행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화장실을 찾는 것이다. 가장 쉽게 이용하는 것은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거기 있는 편의점 안에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인데, 근처에 주유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침 순찰차 주변에 경관들이 있기에 물었더니 근처 워싱턴 식물원(U. S Botanic Garden)에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단다. 식물원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규모가 컸다. 1840년대 열대식물을 채집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워싱턴 식물원은 약 12,000 여종의 식물이 있다고 한다. 사실 팸플릿에 12,000여종이라고 하니까 아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 눈에는 꽃이나 모양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몇몇 식물을 제외하고는 잘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은 라운지를 지나서 식물원 깊은 곳에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본 화장실 중에 가장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중앙에 라운지를 중심으로 사막식물, 약용식물, 하와이의 식물, 아이들의 정원, 원시 정원, 난초들 등이 테마별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식물원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서 무척 여유롭게 둘러보고 나올 수 있었다.

국회의사당 북쪽 주차장

국회의사당 북쪽 주차장옆 길거리의 동전주차기

차를 다시 빼서 국립 자연사 박물관(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쪽으로 가보니 길가에 주차를 할 수 있었는데 빈 자리가 없었다. 주변에서 주차할 장소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다시 국회의사당 쪽으로 와서 캐피톨 리플렉팅 풀 북쪽에 주차를 했다. 국회의사당 앞 캐피톨 리플렉팅 풀의 남쪽과 북쪽으로 주차 공간들이 있었는데, 처음에 주차한 곳은 남쪽이었고, 이번에 주차한 곳은 북쪽 주차장이었다. 길 건너편 박물관들이 모여 있는 곳은 주차할 장소가 없는데, 그나마 이쪽은 주차공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주차하고 국립 자연사 박물관을 보러 갔다.[각주:2]

국립자연사박물관 전경

뉴욕에서 미국 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을 보면서 다소 실망했었다. 워싱턴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규모 면에서는 뉴욕에 비해서 떨어지지만 전시 방식이나 동선 전략 등은 오히려 돋보이는 곳이었다. 많이 보여주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 사례였다. 특히 유사 테마의 연계가 돋보였는데, 가령 포유류, 조류, 어류, 공룡, 인류까지 모두 뼈(bone)로 연결하는 것은 같음다름의 연속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곳곳에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감으로써 관람의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자연 속의 동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도 무척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이 동물들에게서 표현되는 장면을 극적으로 포착한 사진들이었다. 저 순간을 찍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하고 기다렸을지 생각해보면, 사진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지독한 인내임에 틀림이 없다.

이곳에는 도자기 등 200여점이 전시된 한국관이 있었는데 전시된 물품이나 전략 면에서 많이 아쉬운 전시였다. 이번 여행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보면 항상 중국과 일본 전시물은 규모 면에서나 전시된 작품 면에서도 일정 규모와 수준 이상이었다. 반면 한국관은 그렇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던 터에 이곳은 그나마 제대로 된 한국관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왔었는데, 규모만 조금 커졌을 뿐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도통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처럼 콘셉트가 없었다. 30평 정도의 크기에 200여점의 전시물 규모라면 보다 미시적으로 전략화된 콘셉트가 필요했다. 한국 문화를 맨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곳에 지금 전시된 것 같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모호하고 난해하다. 한글과 세종대왕 사진만을 걸어놓고, ‘한글은 한국문화의 자랑이라는 설명이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관람객의 입장과 수준에 맞는 전시물의 구성과 설명이 많이 아쉬운 전시였다.

박물관에서 그림 그리던 청년

관람을 마치고 나오다가 2층 난간에 기대에 노트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청년을 보았다. 목에는 카메라를 걸고 노트에 그림 그리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이 신선해서 옆에서 보다가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으니 흔연히 그러란다. 박물관을 즐기는 나름의 여유가 부러웠다. 박물관 밖에서 박물관을 그리고 있는 두어 명의 사람들을 더 보았는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박물관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신선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2>(Night At The Museum 2: Battle Of The Smithsonian, 2009)의 배경으로 요즘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배경이 가장 구체적인 물건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박물관이라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확실히 뉴욕의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비하여 몰입도가 좋은 것은 분명했다. 전시 콘셉트나 동선 통제 등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탓이겠지만,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 걸으며 느껴지는 주변의 분위기도 상당히 작용했으리라. 내셔널 몰 주변을 따라 늘어선 미술관, 박물관과 끝없이 이어진 잔디밭 안에서 눕거나 앉아서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관람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 자연사 박물관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눈앞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건너왔을 시간이 좀처럼 가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몸 안에 그 시간들을 오롯이 기록하고 있을 전시물들은 깊고 서늘해 보일 뿐이었다. 적막한 시간을 홀로 견디다 누군가 눈 밝은 이의 섬세한 손길로 살아나 이곳에 모여 있는 그것들 앞에 우리가 건너고 있는 일상의 시간은 고작 한 줌일 뿐이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 관람을 마치자 6시가 다 되어 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6시면 예외 없이 문을 닫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내셔널 몰에는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근처에 있다는 백악관(White House)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전에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박물관 앞 잔디밭 쪽으로 작은 가판대에서 핫도그와 샌드위치를 팔았다. 그것으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는데, 그곳도 문 닫을 시간인지 직원들이 마감 분위기였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고 음식의 질도 엉망이었다.

사만다가 몇 번을 헤매는 바람에 우리는 프리덤 플라자(Freedom Plaza) 주변에 주차를 하고 걸어갔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시간 여유만 있다면 걷는 것이 가장 좋은 여행이다. 차로 갈 때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둘러보고 싶은 것을 모두 둘러보면서 걸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워싱턴은 계획된 도시답게 번잡스럽지 않고 가지런했다.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았고, 화려했지만 격조가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건물들을 원형으로 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당당하고 굳건해보였다. 강건한 석재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건물은 지나온 시간의 변화를 조금도 느낄 수 없어서 오히려 차가워 보였다.

백악관은 200년 간 미국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어 왔다는데, 겉보기에는 생각보다 규모도 작고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지붕 위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사방을 살피는 저격수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주변 경계가 허술해 보이니 아내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백악관을 돌아보는 투어가 있다는데 알아보니 6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단다. 백악관 정면에 철책 앞까지는 접근이 가능했는데 그 앞에는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조금 있었고, 그 앞으로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시위 텐트가 보였다. 그 텐트는 작고 남루했는데 주변에 구호만 적혀 있을 뿐이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년째 그러고 있고 당국에서도 내버려두는 모양이었다. 백악관 앞에서 저렇게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그대로 두고 있는 당국이나 둘 다 참 대단하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며, 길 건너 라파예트 스퀘어 쪽으로 건너갔다. 백악관 앞쪽에서 차량을 통제했기 때문에 도로 위에는 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삼각대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백악관 지붕위의 스나이퍼

라파예트 동상

미국 역대 대통령 피규어. 워싱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소품

라파예트 스퀘어(Lafayette Square)는 백악관 정면 길 건너에 있는 광장이다. 이곳에는 미국 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각주:3]의 동상과 독립전쟁 당시 활약한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fayette)[각주:4]과 장군들의 동상이 서 있다. 앤드류 잭슨이나 라파예트 후작이나 모두 전쟁영웅이었고 당시로서는 다소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는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21세기 백악관의 정책을 보면서 이 두 인물은 어떤 대화를 나눌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라파에트 스퀘어에는 한가롭게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서 독서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권위나 특별함 대신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드려야지 가능할 풍경이었다.

백악관 주변에 있는 선물가게에서는 역대 대통령과 백악관이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대통령 관련 상품은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일부는 역대 대통령의 허위나 위선을 풍자하는 재임 시절의 돌발영상이었다. 아기가 클린턴 양복에 토하는 장면, 아버지 부시가 사랑스럽게 아기를 안았다가 사진 촬영이 끝나자 매몰차게 아이를 밀어내는 모습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대통령과 백악관 관련 상품으로만 기념품 가게 하나를 만들 정도로 상품 종류가 많았다. 미국인들은 대중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의 이미지를 상품화하고 소비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권위의 옹벽 안에서 지나치게 신비화된 이미지보다는 실수 가능한 인간적인 이미지가 대통령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저녁 8시가 다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서둘러서 링컨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워싱턴 시내 어디서나 보인다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은 돌아다니면서 보니 정말 어디서나 보였다. 워싱턴 기념탑은 말 그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기념하기 위해 37년 만에 완성한 169m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조구조물이다. 워싱턴에서는 이 탑보다 높게 짓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정말 고층빌딩이 보이질 않았다. 워싱턴 기념탑 앞에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이 있어서 조명을 밝힌 모습으로 물 위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리플렉팅 풀이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은 해질 무렵이 아름답다는 말에 느지막이 찾아간 것이다. 택시기사에게 물어서 다행히 주차를 하고, 걸어서 링컨기념관으로 갔다. 세그웨이를 타고 링컨기념관 주변을 돌아보는 투어팀들이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거기에 참가하고 싶어서 물어보니 가격도 비싸고, 효진이는 어려서 안 된단다. 아쉬워하며 링컨기념관 위로 올라갔다. 날이 흐려서 그 유명한 석양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하늘은 코발트빛으로 가득했다. 오늘 돌아본 여러 군데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아마 그들도 우리처럼 해질 무렵에 이곳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나보다. 링컨 좌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옆에 있던 한국 학생들이 사진을 찍어 달랜다. 사진을 찍어주며 물어보니 방학을 이용해서 어학연수 온 학생들이었다. 어학연수를 나가 있을 우리과 학생들이 문득 보고 싶었다.

링컨기념관 전경

링컨기념관에서 본 공사 중인 리플렉팅 풀

링컨기념관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원형으로 한 건물로 링컨 암살 당시 연방 36개 주를 상징하는 도리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링컨 기념관 중앙에 링컨의 거대한 좌상이 있고 그 뒤로 는 아브라함 링컨의 명성은 그에 의해 구원된 미국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각주:5]라고 새겨져 있다. 좌상 양쪽으로 게티즈버그 연설과 취임연설이 조각되어 있었다. 링컨 기념관은 규모에 비해 콘텐츠가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내뿜은 아우라만은 대단했다. 특히 내셔널 몰의 큰 구조 안에서 국회의사당-워싱턴기념탑-링컨기념관으로 이어지는 상징성은 뚜렷했다. 현재의 국회의사당을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과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이 지켜보고 있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링컨 기념관 남쪽으로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 공원이 있고, 북쪽으로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물 그리고 워싱턴 기념탑 쪽으로 제2차 세계대전 국립기념물(National World War II Memorial)이 있는데, 이것은 미국이 나라 밖에서 치른 대표적인 전쟁들이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공간의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구석이다.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도 바로 이 링컨기념관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곳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했던 장소라고서 알려주고 있었다. 아브라함 링컨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10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에 대한 단단한 결의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워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관 사이에 있어야 할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이 공사 중이었다는 것이다. 리풀렉팅 풀의 인공수조가 새서 물을 비워내고 다시 수조를 만들고 있단다.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에서 제니가 검프를 부르며 건너오던 그 리플렉팅 풀의 아름다운 영상을 기대했던 우리로서는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워싱턴기념탑과 링컨기념관의 야경이 비춰져야 할 곳에는 흙바닥을 드러낸 황량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공사 중인 리플렉팅 풀은 지금 밖에 볼 수 없는 모습이니 우리가 행운 아닌가? 리플렉팅 풀 주변으로 가보니 물이 새서 다시 풀을 만들고 있고 곧 개관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8시가 넘어서고 주변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서 한국전쟁 추모 공원(Korean War Veterans)으로 갔다. 여행을 떠나면서 유진이가 워싱턴에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첫 번째로 꼽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유진이는 미국에 와서 특히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히 느끼는 듯했다.

한국 전쟁 추모 공원에 있는 19인의 병사들 조형물

어둠은 모든 색과 형태를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소리만은 더욱 또렷하게 돌려주었다. 소리가 고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수색대처럼 보이는 19명의 병사들이 판초우의를 입고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 앞에 모여 있었다. 19명의 표정과 동작은 모두 제 각각이었지만 공포와 분노와 결의가 느껴지는 조형물이었다. 어둠과 함께 조형물에 모이는 부분조명은 그 절실한 순간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옆의 검은 벽에는 한국전쟁과 상관된 얼굴들을 검은 돌 위에 새겨 놓고 있었는데 오래된 영상을 보는 듯한 아련함이 느껴졌다. 조형물 앞쪽으로는 한국전쟁의 피해 및 희생 규모를 새겨둔 또 다른 조형물이 아프게 서 있었다. 전쟁 중인 병사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을 보고, 얼굴만 새겨 둔 벽을 지나서 객관적인 수치로 전쟁을 보고하고 있는 조형물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 참혹함은 ‘Freedom is not Free’라는 단호한 문구 앞에서도 결의로 바뀌지 못하고 여전히 참혹할 뿐이었다. 그 참혹함은 19명의 병사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던 생명의 긴장과 공포와 연관된 것이면서 동시에 아직도 그러한 긴장과 공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현실과도 관계된 것이었다. 연구년을 떠나오기 얼마 전 벌어졌던 연평도 포격 사건이 생각났다. 일방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과 공포가 쏟아졌을 그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곳이라는 사실이 상기됐기 때문이다.

Freedom is not Free.

최근 몇 년간을 상기해볼 때, ‘Freedom is not Free’는 두려운 단언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벌여온 전쟁은 자유라는 이름의 복수였고, 자유라는 명분의 침략에 가까웠다.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하겠다고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의 무력한 죽음을 보아야 했다.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장의 이면에는 아직이라는 의미가 강력하게 내재해 있다. 아직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명백한 현실을 나는 어처구니없이 한국전쟁 추모공원에서 읽고 있었다.한국전쟁 추모공원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너무 어두웠다. 워낙에 사진을 잘 찍지 못하는 내게 빛까지 부족하니 촬영이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내일 다시 와서 추가로 촬영하기로 하고 나오면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흐리고 어두운 상태가 전몰의 비극성과 참혹한 분위기를 극대화시켜주고 있었다. 지우려던 사진을 그대로 두었다. 사진의 선명함 보다 그 비극성과 참혹함을 살리기로 했다.

수도로서 워싱턴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 무척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뉴욕과는 품격이 다르고,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내셔널 몰 양쪽으로 모여 있는 각종 박물관과 미술관의 풍요로움과 그것을 무료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더없이 부러웠지만 그 안쪽 잔디에서 즐기거나 주변을 조깅하는 사람들의 평화와 여유가 더 부러웠다. 오늘 돌아본 것만 가지고 이 도시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자부와 자긍의 면모는 볼 수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깨끗하고 격조 있는 도시에서 미국의 난폭함이나 일방주의가 기획된다는 점이었다.

내셔널 몰 주변

주차가 어려운 워싱턴에서 정답은 자전거

내셔널 몰 잔디밭에서의 휴식

여행이 막바지로 향할수록 더 보겠다는 욕심 때문인지 워싱턴에서의 일정은 늦게 끝났다. 메릴랜드에 잡아둔 숙소까지는 조금 멀었다. 이제 누구도 사만다가 한 번에 숙소까지 데려다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사만다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숙소 주변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결국 표지판을 보고 찾고 있으려니 슬며시 사만다가 숙소 앞에 데려다 주었다. 사만다는 심심한가본데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는 지친다. 숙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깨끗하고 편했다. 유명한 곳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같은 가격에 청결하고 안락한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법칙은 오늘도 예외가 없었다. 버려야 얻는다는 변함없는 이치는 이곳에서도 옳았다.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대사의 한 구절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초속 5Cm>에 나오는 ‘올곧은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다. [본문으로]
  2.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주차한 이곳은 허가받은 차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음날 주차 표지판에 적힌 것을 보았는데, 주차할 때만 해도 이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그웨이를 타고 다니며 불법주차 단속을 하던 경관들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용감하게 두 번이나 불법주차를 한 것이다. 정말 모르면 용감하거나 무모해진다. [본문으로]
  3.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최초의 서부출신에 평민 출신 대통령으로 2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실린 인물이다.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대파하고, 세미놀 전쟁에서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플로리다를 침공하여 승리하는 등 전쟁 영웅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서부개척정신을 강조하고, 재산유무에 따라 주어지던 참정권을 확대했으며, 일부 특권층의 전횡을 막기 노력했다. ‘눈물의 길’과 1․2차 세미놀 전쟁을 통하여 무자비하게 인디언을 탄압하고 학살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4. 라파예트 후작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조지 워싱턴 장군을 도와 요크 전투 등의 승리를 이끌었고, 귀국해서는 루이 16세 정부를 설득하여 프랑스군 파병에 기여했다. 라파예트는 프랑스로 돌아가 종교의 자유와 노예무역폐지를 주장했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을 작성하는 등 프랑스혁명 초기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와 똑같은 급으로 조의를 표하고 국장으로 치르게 할 정도로 미국인들의 그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본문으로]
  5. In this temple as in the hearts of the people for whom he saved the union the memory of Abraham Lincoln is enshrined forever.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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