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810일 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밤새도록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비는 문득, 간단하게 그쳐버렸다. 밤새도록 사위는 온통 빗소리뿐이더니 비가 그친 아침은 온통 초록이다. 비가 내리고 어두워서 어제 밤에는 몰랐는데 숙소는 유난히 나무가 많은 숲에 포옥 안겨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숲에 안겨서 그렇게 숲과 더불어 나이를 먹고 있었다. 시간이 데려간 것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니 초록의 숲길은 오히려 적막했다.

우리도 서두른다고 서둘러 숙소 식당으로 갔는데 벌써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제 본 중국 학생 관광단인 줄 알았는데, 그들 사이에서 얼핏얼핏 우리말이 들렸다. 중국 학생 관광단 말고도 개인적으로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중고생 자녀들과 함께인 가족들이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듯한 음식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숙소 주변에는 숲만 있을 뿐 딱히 식당을 찾을 수도 없었다. 캠브리지까지 나오는 길은 1차선이 한참 이어졌고, 도로가 2차선으로 넓어진 곳에서 차들은 그 이상 늘어나서 정체가 심했다. 예상치 못한 정체덕분에 길가에 오래된 주택들과 낡은 건물들을 천천히 지켜볼 수 있었지만, 시간은 예상보다 40분 이상 지체되고 있었다.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가니 도서관이 보였다. 마침 그곳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우리도 그를 따라서 도서관부터 본관 앞 잔디마당까지 차분히 설명을 들으며 따라 다녔다. 그런데 본관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던 가이드가 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차에 올라서 점심을 먹은 후에 하버드로 간단다. 우리는 MIT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하고 투어 중이던 가이드였던 것이다. 순간, 우리 가족은 머쓱해서 뒤로 빠지면서 우리끼리 한참을 웃었다.

MIT에서 발견한 김우중 회장의 사진과 거북선 모형

도서관을 돌다보니 눈에 익은 사진이 보였다. MIT 기계공학과에 많은 기부금을 낸 8명의 사진이었는데, 그 중에서 전 대우그룹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 부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가이드가 정보 하나를 더 준다. 그 사진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거액 기부 이후에 모두 망한 기업가들이란다. 김 회장이 MIT에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몰라도, 차입경영으로 무너진 대우를 기억하는 내게는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돈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우사태로 인하여 부실해진 은행을 세금으로 매워주었으니 그것은 국민의 고혈(膏血)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대우의 몰락 이후 대우는 물론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들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으며 가슴 뛰는 경험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열패감도 지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우리나라 샐러리맨의 신화가 아니었던가? 자신만 똑똑하면 언제든 불끈 일어서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자기 근면과 성실에 대한 낙관을 대표하던 그가 무너진 것은 대우라는 그룹이 무너진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낯선 나라 대학 도서관 벽에 걸린 그의 자랑스러워야할 사진이 안쓰럽고 부끄러웠다. 더구나 거액을 기부 했던 사람으로 칭송되다가 실패한 사업가로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아이러니했다.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 선박 전시관에서 거북선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인들이라면 거북선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환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찍고 싶은 것이 거북선인지 MIT 안에 거북선이 있다는 사실인지 모호했다. 거북선을 우리 스스로 자부하며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MIT가 인정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닐지내 생각은 또 삐딱해졌다.

전시장의 거북선을 보면서 김훈의 칼의 노래가 떠오른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이 작품을 수사(修辭)만 앞선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제압 없이 나올 수 있는 수사가 어디 있겠는가? 수사가 빼어나다는 말은 그만큼 대상에 대한 파악이 진지하고 절절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아파하고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그려낸 김훈의 이 빼어난 작품을 읽으면서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의 상황이었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대신들을 생각하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적의 칼과 배고픔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상황, 더구나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견뎌낼 뿐 표현할 수 없었던 고뇌는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그의 시대에서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현재이고 보면, 낯선 나라의 전시장에서 만난 조그마한 거북선 앞에서 결코 밝게만 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MIT 본관과 도서관

입학식과 졸업식을 진행하다는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MIT 본관과 찰스 강이 마주보고 있었다. MIT를 알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으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MIT 졸업생들의 기행(奇行) 기사는 서울 변두리 중학생이었던 내게 너무도 신나는 충격이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기숙사 방안에 차를 옮겨놓는다거나 돔 위에 경찰차를 올린다는 기사는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이라는 외화시리즈가 인기였는데, 밤샘 공부를 하고 가서 킹스필드 교수의 질문공세에 쩔쩔매면서도 자신의 의견으로 대답하는 하트의 모습만큼이나 그것은 대견한 일탈이고, 짜릿한 특권이었다. 그러한 기행의 현장이 본관 돔이란다.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경찰 순찰차, 황소 등 특이한 것들을 돔에 올렸다는 사실이다. 경찰 순찰차를 헬기로 내렸다고 하니 올린 기발한 방법이 자못 궁금하다. 돔 위에 이러한 것들을 올리는 비법은 4학년들에게만 전수가 된다고 하니 재미있는 전통임에 틀림이 없다.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졸업을 앞두고 그 정도의 이벤트는 귀엽기까지 했다. 다만, 올리기는 학생들이 올리는데 내리는 것은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어려움이 많단다. 천재들이 올린 것을 보통사람인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그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졸업식에서 본관 앞에 올라가 있는 경찰 순찰차를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물론 그것이 황소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과 손(Mens et Manus) 조형물 앞에서 어색한 아이들. 아이들에게 MIT방문이 얼마나 맥락 없고 어색한 아빠의 욕심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마음과 손’(Mens et Manus)[각주:1] 조형물 앞에 아이들을 세우고 보니 영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MIT를 돌면서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효진이야 어려서 그렇다 해도 유진이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이유는 아이들이 MIT를 전혀 몰랐고, 별다른 관심 없는 분야의 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에서 감흥이 생길 리 만무했다. 숙소에서 만났던 중국 학생 관광단이 생각났다. 아마 그들도 이곳을 다녀갔거나 다녀가리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부모 된 사람으로서 탓할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기대는 부모만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이곳에 왜 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박하게 세계적인 대학이니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는데, 마음 저 밑에는 더 큰 욕심이 있었나보다. 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안쪽으로 더 보아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핑계로 그만 보기로 했다. 바로 보스턴 시내로 들어가서 시내를 볼까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기 캠브리지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것도 어색한 동선이었다.

MIT에서 하버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버드까지 가는 길은 아침에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처럼 오래된 건물들과 주택들이 소박하게 모여 있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 학교 근처를 몇 바퀴 돌면서 보니 미국 중소도시의 주택 밀집지역처럼 학교를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는 주택들이 정겹게 보였다. 겉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 학교 부근의 원룸이나 하숙 밀집 지역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의 대학을 보면서 문득 우리대학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한참을 헤매다가 학교에서 조금 먼 곳에 코인 주차를 했다. 아내는 어떻게 알았는지 안내 센터에서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를 구입했다. 영어 버전을 우리말로 번역했는지 다소 어색한 표현이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무척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들고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하버드 곳곳을 둘러보았다. 방학 중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아 보이는 관광객 투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래드클리프 캠퍼스까지 다 돌아보지는 못했으나 건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아우라는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하버드 야드에서 책을 보는 학생

하버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하버드 야드에 의자 두 개를 붙이고 책을 읽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어제 비가 내려서 볕이 그리웠는지,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도 학생들이 아무 곳에서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책과 노트북을 펴고 공부를 하고, 심지어 노천광장에 놓인 탁자에 앉아서도 공부하는 모습은 내게는 낯선 모습이었다.[각주:2] 여러 개의 도서관에 좌석이 꽉 찬 것도 아닌데 야외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앉아서 책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에는 무척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좌석과 좌석 사이에 칸막이가 세워진 독서실 같은 분위기의 도서관에 앉아야지만 공부가 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어디든 자신이 편안하게 집중할 수만 있다면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론 이 말이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 비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Widener Library, 1914)80에 달하는 서가와 350만권 이상의 장서로 유명하다. 와이드너 도서관은 1912년 타이타닉호에서 사망한 하버드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거금을 기부하여 1914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와이드너 도서관의 내력담은 필라델피아의 거부, 하버드 졸업생, 희귀서적 수집가, 타이타닉호 침몰로 인한 사망, 어머니의 기부 등 극적인 서사의 좋은 구성요소를 지녔다. 더구나 타이타닉호 침몰은 두 차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극적인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와이드너의 어머니가 하버드 졸업생들이 자기 아들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졸업 전에 반드시 수영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기부조건을 걸었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실제로 하버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영 테스트가 있었으니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란다.[각주:3] 수영 테스트는 하버드만 했던 것도 아니고, 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전 국민에게 수영을 보급했던 일과 관계된 것이란다. 결국 와이드너 도서관에 얽힌 극적 서사가 브랜드가 되어, 추가적인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됨으로써 스스로 이야기를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각주:4]

남북전쟁에 희생된 하버드 출신을 기리는 메모리얼 홀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 1878)은 남북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졸업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136명의 이름이 건물의 양쪽 벽에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을 보면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남북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 문제까지 접근했던 이 작품은 강의 시간에도 자주 언급할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계급 차이에 근거한 상반된 두 캐릭터인 아이다 먼로(니콜 키드먼 분)과 루비(르네 젤위거 분)가 정서적 연대를 이루어가는 모습과 전쟁의 폭력과 야만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연상시키는 인만(주 드로 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잊히지 않은 작품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산야에서 인간의 가장 마지막을 보여줌으로써 더 처절하게 다가왔던 이 작품의 후반부에 눈 내린 협곡에서 인만을 부르던 아이다의 그 절절한 음성은 오랫동안 귀울림을 만들기도 했었다. 메모리얼 홀을 보면서 <콜드 마운틴>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오늘도 내 생각은 산만하고 종잡을 수 없다.

MIT보다 하버드에 관광객들이 더 붐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별 상관도 없는 하버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고 이야기 하는 곳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겠지만, 그렇다고 MIT처럼 하버드는 건물이나 도서관 등을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교육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공개한다한들 그것을 그 짧은 시간에 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달리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은 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집작하건데 세계 최고의 대학을 보여줌으로써 동기를 부여하여 하버드에 진학하거나 비록 진학은 못하더라도 건강한 자극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부모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버드를 방문하는 것은 꼭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하버드 유니버시티홀 정면에서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존 하버드 목사의 동상. 그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갈 수 있다는 속신으로 인하여 구두만 닳았다

설립자인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 동상[각주:5]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진학한다는 속신(俗信) 때문에 그것을 만지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대부분 그 옆에 서서 구두에 손을 얹고 멋쩍은 표정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속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재미있는 속신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속신의 대상이 왜 하필 구두였을까? 구두가 동상의 가장 밑에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있는 부분이어서 선택되었겠지만, 구두가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명예, , 굴레, 자기정체성 등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세계 최고라는 압도적인 칭호에 압도되지 말고 정말 하버드에서 보아야할 것은 다양성의 존중과 배려, 역사와 전통의 보전, 학문적 자유와 학교 운영의 자율성 보장, 체계화된 후원 시스템, 다양한 방식의 학생 선발 방식 등이 아니었을까? 멋스럽게 세월을 입고 있는 그레이스 홀(Grays Hall, 1863)과 매티우스 홀(Matthews Hall, 1872)을 굳이 신입생 기숙사로 배정하고, 그 옆으로 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자들이 근무하는 소박한 건물에 눈이 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리라.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언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나 나라별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기준이라는 것이 이미 명문화된 대학의 성공 요소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면 기존의 서열 체계를 은밀하게 확정하거나 재생산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몇 언론사들의 대학 평가는 공정성은 차지하고서라도 대학교육의 지향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대학교육의 파행을 부추기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언론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대학을 평가하는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평가가 어떠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이 교육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 설득하고, 그것에 대하여 객관적인 검증을 수행한 평가인지 우리는 이제 되물어야 한다. 몇몇 언론사는 해외의 기존 평가기관과 공동으로 대학 평가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평가지표가 얼마나 우리 현실에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봐야만 한다. 학교별 특색이나 전공별 차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평가 지표와 평가 자료를 준비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해야하는 비효율성 그리고 학교별 서열 외에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하는 결과 등의 모순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대학평가를 이제는 과감하게 거부해야할 것이다. 최근 국내 언론사들도 앞 다투어 대학평가를 시행하고 있는데, 대학평가 발표 전후로 해당 언론사에 여러 대학의 전면광고가 실리는 것을 보면, 우리가 대학 평가를 거부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게 된다.[각주:6] 영어전용강의 시수 등을 평가항목에 삽입함으로써 전공, 과목 등의 특성은 물론 그 성취 정도와 무관하게 영어전용강의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은 슬픈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사의 평가 기준을 따라가느라 기형적인 파행을 거듭하는 대학의 현실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몇 위, 한국에서 몇 위를 따지기 전에 자기 대학만의 분명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을 모색하는 것이 대학의 본 모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꾸로 자기 대학만의 교육방식과 교육목표를 가지고 세계 대학을 평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버드 앞 연경, 양이 많았던 볶음국수, 결국 남은 것들은 저녁이 되었다

하버드를 보고나니 점심때였다. 학교 바로 앞에 연경(燕京)’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규모가 컸고 손님도 많았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볶음국수가 생각나서 볶음국수 2, 볶음밥, 만두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1인분씩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는데[각주:7] 나온 양을 보니 2인분은 족히 넘는 양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시킬 때 양이 많다고 미리 이야기해주면 좋았으련만, 이 친구들 필요할 때는 입을 닫는다. 음식은 오클라호마시티의 그 집에 비해 좀 더 미국화 된 맛이었지만 우리를 위로해줄만한 맛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거리가 보이고, 왁자한 실내 분위기가 졸업식 날 학교 앞 중국집 분위기가 나서 혼자서 웃었다. 모처럼 배부른 점심을 먹고 났지만 음식이 많이 남아서 싸달라고 했더니 세 개의 상자에 담아다 주었다. 덕분에 그것으로 저녁까지 먹을 수 있었다.

건국 시기 복장을 한 프리덤 트레일 가이드와 도로에 새겨진 문장

점심을 먹고 캠브리지에서 보스턴으로 들어갔다. 효진이가 꼭 해보고 싶다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각주:8]을 하기 위해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으로 갔다. 보스턴 코먼은 1634년에 문을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프리덤 트레일16개의 건국 사적을 돌아보는 4답사인데, 보스턴 코먼을 시작으로 보도에 새겨진 붉은 라인을 따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코스다.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가이드는 정해진 시간에 티켓(어른 13.65달러, 어린이 7달러)을 가져온 사람들을 모아서 투어를 시작한다.

주의사당(상), 킹스채플(), 올드 사우스 집회소()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원로 가이드는 가는 곳마다 열정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마이크 없이 20명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극적인 묘사에 연기까지 해가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했다. 이민자의 나라에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할까 궁금했는데, 투어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우리 일행 중에 영국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독립과정과 영국의 만행 등에 대하여 가이드에게 질문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진지하게 투어 내내 계속되었다. 가이드는 연배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도 이동 중에도 우리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때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무척 열정적으로 보였다. 효진이는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보스턴과 관련된 미국의 역사를 배우고 왔기 때문에 투어 내내 맨 앞자리에서 주의 깊게 듣고는 우리에게 설명해주면서 뿌듯해했다.

프리덤 트레일 코스는 다운타운의 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서 가이드를 따라 걷다보면 현재 보스턴의 거리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적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고, 현재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주의사당처럼 지금은 다른 용도로 변경된 것도 있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존 행콕, 사무엘 아담스, 그리고 보스턴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래너리 묘지는 관리와 정비가 부족해서 황폐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이드를 따라 돌면서 아내와 나는 미국의 역사보다 고풍스러운 도시를 천천히 산책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프리덤 트레일을 걷는 내내 가이드는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애국자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설명하며, 영국의 역사적 과오를 지적하기도 했다. 보스턴 학살과 같은 영국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설명했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립전쟁 이후 미국인들이 보여준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노예제도나 서부개척이라는 명분으로 인디언과 멕시칸들에게 자행했던 폭력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횡단여행 내내 눈으로 확인하며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역사적 과오를 진정한 반성 없이 은폐해 버림으로써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과오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고궁이나 경주를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여유 있게 걸어본 기억이 없다. 경복궁에 몇 차례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어릴 때였고, 크고 나서는 함께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제 아이들도 커서 함께 답사를 해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다만, 귀국하면 고등학교에 가게 될 큰아이와 다시 분주해질 내 일상을 생각하면 함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라도 다녀야할 듯하다. 경복궁을 보러가면서 허균의 고궁산책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경복궁을 다녀오게 하는데, 보는 눈들이 달라져왔다. 이제 아이들도 이 책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연구실에 있는 책을 아이들 책꽂이에 먼저 가져다주어야 할 듯하다.

프리덤 트레일은 퍼네일 홀에서 끝났다. 퍼네일 홀 앞에는 사무엘 아담스의 동상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애국자가 아닌 맥주상표로 알려져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옆으로 노스마켓(North Market), 퀸시마켓(Quincy Market), 사우스 마켓(South Market)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퍼네일 홀 마켓플레이스(Faneuil Hall Marketplace)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멋스러운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축제에 온 것처럼 모두들 즐거운 모습들이었다. 마켓이 다 마켓이지 뭐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세 개의 마켓이 어울려 있어서 그런지 흥겨운 분위기에 같이 흥겨워지는 곳이었다. 아내는 퀸시마켓에서 먹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 와보는 도시인데 아내는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참 잘 안다. 마이크스 패스트리 샵에서 파는 초코릿 칩스 카놀라가 그것이었는데, 가서 보니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것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으며 걷다보니 부두였다.

퍼네일 홀과 사무엘 아담스 동상(), 퀀시 마켓 광장(), 초코릿 칩스 카놀라()

마켓과 부두 사이에 시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Jobs Not Cuts”라는 피켓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잔디밭에서는 시위대의 일원들로 보이는 브라스밴드가 연주를 하며 시선을 끌고 있었다.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예산 문제와 경기 침체로 인한 일자리 창출 실패로 인하여 청년 실업의 문제가 이곳에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은 분명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세계화, 시장경제의 극단화된 양극화, 불공정성의 문제가 사회적 합의와 수긍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것이었다.

Jobs Not Cuts을 들고 시위하는 여성

그런데 이곳의 시위를 보면 참 온건하다. 피켓을 들고 오고가거나 길목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정도였다. UCI에서 시위를 하는 것을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의사 표시만 할뿐 우리식의 시위는 보지 못했다. 시위로 의사 표시하는 것이 자유이듯 침묵하는 것도 자유라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모습이었다. UCI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대중 집회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그 주변에서는 발언을 경청하면서 피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자유롭게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몹시 신선했다. 캠퍼스 폴리스 두어 명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주변에서 지켜볼 뿐, 자유롭게 무척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집회였다.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대중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위도 자신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가 지니는 파괴력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신선한 것만은 분명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 부두는 조용했다. 크루즈 티켓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다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보여주는 듯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부둣가 벤치에 앉아서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찍어주겠단다. 한국에서 가족끼리 동네 산책하다가 아이들 머리핀을 사고 붕어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처럼 여유 있고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퀸시마켓 광장을 통과해서 돌아오는데 분위기가 마치 마을 축제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에 늘어선 보스턴의 시간들은 아주 따듯한 기억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숙소에 다가갈수록 숲이 많아졌고, 숲이 늘어나는 만큼 주변의 소리는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소리가 숨어버린 만큼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1. MIT의 교훈이다. 지식의 실제생활에서의 적용을 중시하는 MIT의 정신을 압축하고 있다. MIT 동문이 세운 회사에서 2조 달러의 이익을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라고 하니 그들의 실용학풍을 가늠하게 한다. [본문으로]
  2. 유진이가 제 선배와 스터디를 한다고 집 앞 빵집에서 방과 후에 공부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무슨 공부가 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픽업하러 가보면 상당수의 학생들이 빵집을 스터디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어학원 앞 커피전문점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본문으로]
  3.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우연히 읽게 된 주경철 교수의 칼럼을 통하여 이 이야기가 허구임을 알 수 있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2/2011090202304.html) [본문으로]
  4. 강력한 브랜드의 포지셔닝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해당 브랜드의 후광효과를 노리는 다양한 이야기들과의 관련성이 폭발적으로 증가됨으로써 브랜드는 더욱 강력해지고 추가된 이야기는 더욱 극적인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대부분 고찰이 의상대사나 원효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갖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 동상은 ‘3대 거짓말 동상’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동상의 비문에 “설립자 존 하버드, 1638”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1) 존 하버드의 초상화가 없어서 이 동상의 얼굴은 한 학생을 모델로 한 것이고, 2) 하버드는 존 하버드에 의해 설립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뿐이며, 3) 하버드는 1636년에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 총독부의 표결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미국에서도
  7.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중국집에서는 한국처럼 1인분 2인분 개념이 아니라 요리개념으로 여럿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 것이었다. [본문으로]
  8. 보스턴 코먼→주의사당(State House)→파크 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그래너리 묘지(Old Granary Burying Ground)→킹스 채플(King's Chapel)→최초의 공립학교 유적지(Site of First Public School)→올드 코너 서점(Old Corner Book Store)→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옛 주의사당(Old State House)→보스턴 학살 유적(State of the Boston Massacre)→퍼네일 홀(Faneuil Hall)→폴 리비어 하우스(Paul Revere House)→올드 노스 교회(Old North Church)→콥스 힐 묘지(Copp's Hill Burial Ground)→USS 콘스티튜션(USS Constitution)→벙커 힐 기념탑(Bunker Hill Monument) 순으로 진행되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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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811일 보스턴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드디어 뉴욕에 도착했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쌓아가고 있던 보스턴을 떠나면서 아쉬웠던 것은 그 시간의 질서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도시에서 볼 것에 쫓겨 다니다 떠나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만큼 보스턴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뉴욕에서는 숙소보다 라과디아 공항(La Guardia Airport)에 먼저 들러야 했다. 숙소로 정한 민박집에 주차 시설이 없고, 뉴욕의 교통지옥 속에서 운전을 하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렌터카를 반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 다시 새로운 차를 렌트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렌터카 회사에서 알려준 주소를 사만다에게 알려줘도 사만다가 정확하게 위치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라과디아 공항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근처에 가서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다.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는 화이트스톤 브리지(Whitestone Bridge)에 올라서면서부터 사만다가 당황하기 시작해서, 할 수 없이 표지판만 보고 공항 내에 렌터카 회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렌터카 회사를 찾아서 차를 반납했다. 렌터카 회사 직원은 차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기름을 체크했다. 기름을 가득 채워서 반납해야 했는데 공항 주변에 주유소가 없어서 그냥 왔다가 추가요금 42.97달러를 더 냈다. 주유소의 기름 값보다 2배 이상 비싼 금액이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공항 가까이 가서 주유를 하겠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공항주변으로 오니 주유소도 없고, 차를 돌리기도 어려운 길이어서 그냥 반납한 탓이다. 안타깝지만 또 하나 배웠다. 문제는 배움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반납하고 렌터카 회사 직원이 건네준 영수증을 보니 얼바인에서 뉴욕까지 3,948마일(6,353)을 달렸다. 처음에 구글 지도를 보며 워싱턴까지 예상했던 거리를 뉴욕까지 오는데 모두 써버린 것이다. 더 달린 만큼 많이 보았을 것이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렇게 낯설던 자동차가 이제는 내차처럼 익숙해졌는데 막상 반납을 하려고 하니 같이 고생한 정 때문인지 아쉽기만 했다. 차에 싣고 있던 짐을 모두 내리고 보니 난민이 따로 없었다. 볼품없는 트렁크와 여행 동안 어설프게 줄어든 짐 그리고 기념품 등으로 늘어난 가방을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나누어 들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뉴욕 숙소를 예약하는데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부탁을 해두었다. 도착 1 시간 전에 연락을 달라고 해서 연락을 하니 시간을 맞추어 공항으로 온단다. 픽업 하러 오기로 했던 분은 렌트카 회사가 있는 곳을 몰라서 몇 차례 전화를 하더니 30분쯤 늦게 도착을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 분이셨는데, 공항에서 맨해튼 숙소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이민사(移民史)를 들려주셨다. 재미는 있었는데 중간중간 지나치게 욕을 많이 해서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다.

맨해튼의 교통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뉴욕에서 민박은 대부분 다른 사람 건물의 방을 빌려서 하는데, 불법이란다. 그러니 집에 드나들 때 관광객처럼 하지 말고 당당하게 다니란다. 불법인데 어떻게 당당하란 말인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줄 돈 다 주고도 불법이라니 황당했다. 뉴욕의 호텔 가격이 워낙 비싸고, 민박도 한 번 체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선택한 것인데 처음부터 꼬였다. 픽업도 민박집에서 서비스로 해주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민박집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45달러를 내란다.

뉴욕 숙소 침실, 침실과 붙어있는 기계식 주차장휴대용 가스 버너와 휴지

미드타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내 돈을 주고 불법이라는 민박에 머무는 것도 언짢은 일인데 숙소는 낡고 지저분했다. 인터넷에서 가격대비 시설이 양호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이 모양이었다. 사진으로 보니 깨끗하고, 취사가 가능하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밥을 해서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용 후기를 읽어보니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보니 낡고 지저분했다. 가스레인지도 없고 휴대용 가스버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약을 6월 중순에 했으니 두 달 전에 기억이고, 사진과 다소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한 구석을 보니 직전에 머물렀던 손님들의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뉴욕을 마저 둘러보고 떠나느라 추가 요금을 내고 짐을 맡겨 두었단다. 5시쯤 찾으러 올 거란다.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가 짐을 내줄 거라며 양해를 구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낯선 땅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그 정도 편의도 못 봐 줄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뮤지컬 입장권을 구하고 장도 좀 보아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더구나 안내를 해주고 있는 사람은 집주인도 아니었고, 아르바이트 학생처럼 보이니 그에게 항의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뉴욕에서의 처음을 따지고 다투면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타임스퀘어의 모습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사만다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길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작은 지도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찾은 후에 타임 스퀘어(Times Square)를 찾아보고 지도를 따라서 걸었다. 가로축과 세로축을 맞추어 우리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코스를 찾아서 걸어갔다. 뉴욕의 악명을 여기저기서 너무도 많이 듣고 온 탓에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해가 남아 있었고, 비교적 큰 길들인데다가 우리는 모두 네 명이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네 명은 순식간에 한 명의 보호자와 세 명의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바뀌겠지만, 어쨌든 함께가 아니던가?

타임스퀘어는 아이들이 <무한도전>에서 보고, 꼭 가고 싶다던 곳이었다. 꽉 막힌 차들 옆으로 걸어보니, 맨해튼에서는 걷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1904년 뉴욕타임스 본사가 42번가로 오면서 타임스퀘어로 불리기 시작했고, 한때는 성인영화관과 성인용품점 등이 즐비했던 범죄의 소굴이었으나, 1990년대부터 재개발에 들어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현재를 볼 수 있다는 타임스퀘어에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광판들이 어지럽게 점멸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타임 스퀘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와 전광판에 비친 우리 가족. 포에버21 전광판 속 아이돌 스타가 우리 사진을 찍어주지 않으니 아빠가 찍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였다. 포에버21은 이민 온 한국인이 만든 의류회사인데, 미국 내 88위의 부자가 될 정도로 성공한 이민자의 기업이란다. 그것은 대형 전광판 안에 등장하는 아이돌 스타가 전광판을 바라보며 즐기는 행인들 중에서 가장 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는 인터랙션 이벤트였다. 아주 짧은 주기로 남녀 스타가 번갈아 나오면서 행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찍힌 사진이 대형 전광판에 바로 공개가 되기 때문에 행인들이 무척 즐겁게 참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찍히려니 어지간히 튀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래도 어림도 없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과한 몸짓을 해도 다른 사람들만 찍혔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그냥 두면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가서 빨리 뮤지컬 입장권을 구해야했기 때문에, 내 카메라로 전광판에 비친 우리 모습을 찍었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어쨌든 찍은 것은 찍은 것이다.

아내의 계획에 따르면 오늘밤이 아니면 뮤지컬 공연을 볼 시간이 마땅하질 않단다. 사실 미리 숙소 측에 공연 예약은 가능한지를 문의했었는데, 도착해서 표를 구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냥 온 것인데,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급해진 것이다. 타임스퀘어로 먼저 갔다. 타임스퀘어에 있는 안내센터를 먼저 찾아갔다. 공연 관련 정보와 예매가 가능했는데,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오페라의 유령>은 가장 좋은 위치인 137달러 좌석만 남아 있었다. 유진이는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어 했다. 안내센터 직원에게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공연장은 이미 매진된 상태라고 확인을 해주면서, 혹시 길거리에서 입장권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와 메리어트 호텔 앞에 있던 입장권 판매원에게 물어보니 61달러와 115달러 좌석이 있단다. 그런데 61달러 좌석의 경우에는 입장권이 없을 수 있다는 말에 115달러짜리 오케스트라 뒷좌석을 구입하였다. 안내센터에서 말했던  137달러 좌석을 이곳에서는 115달러에 판매하고 있던 것이다. 공식적인 입장권 판매 장소였던 안내센터보다 메리어트호텔에 소속된 입장권 판매원의 판매가가 어떻게 더 낮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입장권 판매원까지 써가면서 더 저렴하게 파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 이야기로는 메리어트호텔에서 투숙객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극장 측과 연간 계약을 맺어서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입장권을 구매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공연을 조금 저렴한 가격에 가장 좋은 좌석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이 극장에 가서 입장권을 구매해 놓을 터이니 7시에 다시 와서 입장권을 받아가란다. 남는 1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한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 타임스퀘어에서 한인마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조금씩 지쳐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걸어서 그곳에 가보니 얼바인에서 일반적으로 H마트라고 부르는 한아름이었다. 김치, , 삼겹살, 스팸, 계란 등의 식료품을 구입하고 보니 얼바인보다 가격이 거의 두 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구입한 식료품을 들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숙소에 가져다 놓고, 허겁지겁 메리어트 호텔로 달려갔다.

입장권판매원이 손으로 써 준 메모의 따듯함에 감동하다.

호텔에서 입장권을 받아 나오면서 입장권을 확인하는데 봉투 안에 작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이 입장권과 함께 넣어준 직접 손으로 쓴 카드였다.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졌다. 아마 다시 브로드웨이를 찾는다면 가격과 상관없이 나는 분명히 이곳에 와서 다시 입장권을 구입할 것이다. 그건 작은 메모 이상의 신뢰였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호의에 문득 따듯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뉴욕은 내게 내내 불안한 장소였다. 뉴스나 영화를 통해서 이미지화된 뉴욕은 말 그대로 고담시(Gotham City)였다. 탐욕과 부패와 범죄로 타락한 도시를 상징하는 <배트맨>의 고담시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뉴욕은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였다. 그런데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메모가 그 어둡고 불안한 이미지를 씻어낸 것이다.

공연 시작까지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숙소 때문에 기분 나빠지고, 일정보다 늦어지면서 종종대느라 피곤했는데, 메모 덕분에 모두들 유쾌해진 모습이었다. 공연이 10시가 넘어서 끝나니 공연 시작 전에 무엇을 간단하게라도 먹어둬야 했다. 마침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는 매저스틱 극장(Majestic Theatre) 바로 옆에 주니어스(Junior's)가 있었다. 주니어스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치즈 케이크 집이라는데, 뉴욕에서 꼭 먹어볼 것 중에 하나로 아내가 벼르고 있던 것이었으니 더욱 좋았다. 게다가 늘 가장 먼저 배고프고 입이 까다로운 효진이가 정말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가 아닌가.

주니어스 치즈케이크 흡입신공의 아이들

음식점 가서 가장 바보스러운 질문은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던 직원은 웃으면서 플레인 치즈케이크(Plain Cheesecake)가 제일 맛있단다. 그래서 그것 몇 조각을 샀다. 매장에는 자리가 없어서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들고 먹었다. 한 판으로 사면 30달러였는데, 조각으로 사면 6.5달러란다. 다들 좋아하는 것을 한 판 사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들고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조금 난감한 일이어서 몇 조각을 산 것이다. 사주고보니 정말 맛있게들 먹는다. 가족들이 잘 먹는 것도 복이라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는데, 여행을 다니다보니 그 의미를 알겠다. 가끔은 그 복이 지나치게 넘칠 때도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나로 인한 것이었다.

브로드웨이 극장가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화려한 불빛이 어둠보다 먼저 소란을 떨었지만, 브로드웨이에서는 어둠이 먼저 물들어왔다. 매저스틱 극장 앞은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에 나오는 1930년대 뉴욕 뒷골목의 분위기를 재연한 것 같았다. 나는 1930년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지금보다 조금 덜 빠르고 조금 더 인간적이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탓인지, 어린 시절 명화극장을 통해 본 영화들의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무척 매력적인 시대였다.[각주:1]

아직 어둠이 온전히 제압하지 못한 매저스틱 극장 앞에는 차들은 느리게 정지했고, 기마경찰과 삼륜의 경찰차가 정물처럼 서 있었다. 기마경찰은 관광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주거나 사람들에게 미소를 던져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브로드웨이의 기마경찰

극장마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고, 그 앞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이 줄을 섰다. 우리처럼 폴로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에서부터 보타이(bow tie)에 정장을 한 사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 각기 달랐지만 모두들 밝고 환한 표정만은 같았다. 치즈 케이크로 충분히 행복해진 아이들도 공연을 볼 생각에 들뜬 표정이었다. 약간은 들뜨고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이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저스틱 극장 전경

<오페라의 유령> 중간 휴식시간 극장 내부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보러갔을 때에는 오랫동안 서서 기다리면서 많이 답답했었다. 대부분의 공연장이 카지노와 연결되어 있었고, 카지노의 탁한 공기와 소란스러움이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로드웨이에서는 극장마다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면서 나름 즐기는 모습들이 오히려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기다리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공연장 주변 분위기에 따라서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각자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어느새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무며 즐기고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낡은 극장은 오히려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매저스틱 극장은 생각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용관이 주는 다양한 무대 장치는 돋보였다. 아내는 인기 있는 작품인데도 입장권 가격이 한국보다 싸다고 했다. 아마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이리라. 전용관과 상설공연은 관객뿐만 아니라 공연을 하는 측에서도 보다 안정적인 준비와 투자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의 배우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이나 무대장치들은 몇 번 공연을 하나 똑같이 들어가는데,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는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은 감소하지만, 한국처럼 공연장 부족으로 단기간 공연에 그치면 공연장을 옮길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고, 새로운 공연을 위한 배우들의 준비에 또 추가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뮤지컬 공연 관람료가 비싸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구조에서는 우리만의 창작 뮤지컬이 나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원작료를 주고 외국 작품을 사와야 하니 입장권 가격은 또 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최근 몇 년 동안 뮤지컬의 대중적인 지지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못해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이 이곳에 와서 보니 더욱 안타까웠다.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데 여기저기서 우리말이 들렸다. 이곳에서는 조건반사처럼 우리말이 들리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뒷좌석도 한국인 부부였다. 극장은 만원이었다. 전용관답게 공연은 극장 전체를 무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무대 아래와 뒤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의 변형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같은 레퍼토리를 몇 번씩 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공연의 매력이 아닐까? 동일한 작품을 배우나 연출자 그리고 극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해내는 그 변화를 읽는 것이 공연의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공연 중간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다보니 의외로 턱시도를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입기 힘든 드레스를 입고 온 여성들은 물론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에 맞춘 옷차림을 한 남성들도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동부 쪽 무더위가 대단하다는 뉴스에 짧은 옷만 준비해서 떠난 탓에 폴로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나와는 너무 대조되었다. 사실 공연문화라는 것이 단지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공연을 보러가는 과정과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참여 방식까지 포함된 것인데, 우리는 너무 여행의 효율성만 생각했었나보다. 좋은 공연을 보러가면서 조금 멋스럽게 꾸미고 가는 것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입을까를 고민하고, 그러한 복식에 맞는 행동을 하면서 즐기는 것도 공연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마칠 때까지 아이들의 몰입은 참 대단했다. 몰입이 대단했던 만큼 그 여운도 오래가는 듯 공연을 보고 나오자마자 뉴욕을 떠나기 전에 또 한 작품을 보면 안 되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여행 경비가 빠듯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난감해하는데, 눈치 빠른 아내가 안 된단다. 공연을 하나 더 보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쭉 설명하자 아이들도 납득을 한다. 늘 그렇듯 오늘도 아내는 현명하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되도록 밝고 큰 길을 찾았다. 10시 넘어서는 걸어 다니지 말라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이 생각나서 43번가 쪽으로 가서 숙소로 돌아왔다. 43번가 쪽에는 뉴욕 타임즈 본사와 대형 호텔, 슈퍼마켓, 음식점 등이 이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성인용품 판매점 등이 있어서 아이들 데리고 걷기가 민망했다. 도대체 치안이 불안한 도시가 어떻게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불안을 씻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으니 세계 제1의 도시겠지만, 생각해보면 자유와 안전을 상쇄해줄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안전하게 인간다움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던가?

걸어오면서 보니 늦게까지 영업하는 커피전문점들은 아직 불이 환하다. 세련된 옷차림의 뉴요커들이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전문점 앞 보도에는 쓰레기봉투가 어른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악취도 악취였지만 깔끔하고 환한 커피전문점과 투명유리로 분리되어 쓰레기봉투를 잔뜩 쌓아두고 있는 거리는 지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쓰레기 수거를 위해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흉물스럽고 악취가 지나쳤다. 나와 너, 안과 밖을 분명하게 나누는 이 도시의 정서가 차갑고 안쓰러웠다. 뉴욕의 첫 이미지가 이 쓰레기봉투로만 기억되지는 않겠지만 쉽게 잊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내가 저녁을 준비했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김치도 꺼내어 썰었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이들이 노래하던 삼겹살을 구웠다. 거의 1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에 아이들은 참 야무지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하다. 그동안 밥, 김치, 삼겹살이 많이 그리웠었나보다. 어른들이야 어찌 견딘다고 하겠지만 아이들은 힘들었나 보다. 여행을 떠난 지 보름째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여행 경비도 경비였지만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간편식으로 해결해왔는데, 아이들 밥 먹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아내는 오늘 하루 지출한 내역을 정리하며 일기를 적고, 나는 오늘 촬영한 사진을 노트북에 정리했다. 내일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연결하려니 와이파이가 안 된다. 예약할 때 인터넷이 된다고 했는데뭐가 잘못된 것인지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늦어서 전화를 거는 것은 실례인 듯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유진이가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다. 욕실이 깨끗하지 않으니 들어가기가 그랬나보다. 말로는 귀찮아서 그런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침실은 침대 두 개가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좁았다. 침구도 그렇게 정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숙소와 유료주차장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24시간 운영되는 이 주차장을 기계식 주차를 하고 있어서 차를 내리고 올릴 때 소음이 고스란히 침실로 전해졌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그러나 돈은 이미 지불했고, 새로 숙소를 구할 요량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견뎌야한다. 다시 한 번 문이 잘 잠겼나 확인했다. TV 등에 나오는 민박만 보고 내가 너무 경솔하게 결정한 모양이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했기 때문에 이곳 맨해튼 미드타운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 저렴한 호텔이라도 찾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은 오늘 여행의 노획물들을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아내도 마음이 좋지 않은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오늘 조금 만나본 뉴욕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10시 넘어서 숙소까지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내게 아직은 뉴욕은 고담시다. 고담시는 배트맨이 지켜주었는데, 이곳은 누가 지켜줄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시민의 안전과 쾌적이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면, 뉴욕은 기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시 내가 뉴욕을 콘텐츠를 통해서 이미지로만 알고 온 것은 아닐까? 아직 세계 제1의 도시라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게는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 2002)에 나오는 뉴욕의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이 궁금하다. 왜 이곳이 세계 제1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궁금하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다니면서 찾아보아야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유령의 공간이다.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유령이다. 어렴풋하게라도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나 뉴스로만 전해온 뉴욕은 이미지였지 구체의 현실이 아니었다. 뉴욕의 맨얼굴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

 

  1. 내게 1930년대는 영화 이미지 그 자체다. 기름 바른 짧고 단정한 머리에 중절모, 조금 넉넉한 더블양복과 롱코트, 그 사이로 당당하게 들고 선 기관단총…<대부>, <언터쳐블>, <좋은 친구들>, <퍼브릭 에너미>, <딕 트레이시> 등 할리우드가 생산한 이미지는 그 내용과 무관하게 낭만적으로 각인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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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816일 워싱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피곤한 효진이는 아침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침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겠는지 따라나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려서는 이런 상황에 칭얼거리고 울다가 아내나 나에게 안겨서 숙소를 나왔을 것인데, 이제 컸다고 군말이 없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큰다. 횡단을 하는 동안에도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이 언뜻언뜻 보인다. 유진이는 이제 아내와 키를 재지 않는다. 유진이가 더 크기 때문이다. 크면서 부지런히 아내와 키를 견주더니 이제 슬쩍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아내는 최근까지 자신이 더 크다고 우기더니 요즘은 저항을 포기한 모양이다. 효진이도 제법 많이 컸지만 아직은 기둥에서 키를 잰다. 아버지 댁에 가면 기둥에 붙어 있는 기린 그림 위에 아버지가 키를 재고 표시해주시는데, 이곳에 와서도 효진이는 그렇게 재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댁에는 오남매의 아이들 키와 그것을 잰 날짜가 기린 그림 위에 가득한데, 그 중 유진이와 효진이 것이 가장 많고 촘촘하다.

맑은 날 아침의 워싱턴은 어제보다 선명했다. 숙소에서 워싱턴으로 오면서 본 주택가는 조용했지만 오고가는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보아야할 곳은 워싱턴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닐까? 출근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으로 향하는 자동차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워싱턴은 어제와는 다른 도시였다. 분주하게 오고가는 사람들과 수많은 자동차들이 어디서 일시에 쏟아져 나온 것만 같았다. 다행히 우리가 가는 포드극장 쪽으로 갈수록 차들은 한산한 편이었다. 걱정했던 주차도 인근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편리했다.

포드극장 전경

포드극장(Ford's Theater)1865년 링컨대통령이 저격당했던 장소다. 포드극장은 9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먼저 극장 안에서 입장 가능한 시간의 입장권을 받아야 했다. 입장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어서 입구에 기념품점을 먼저 둘러보았다. 작은 규모의 기념품점에는 링컨과 남북전쟁 관련 상품들이 팔리고 있었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줄을 서서 15분쯤 기다리니 입장 시켜주었다.

포드극장은 저격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입장이 시작되면 지하의 링컨박물관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링컨과 남북전쟁의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링컨박물관 곳곳에는 링컨의 모습을 브론즈나 석상으로 세워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링컨의 암살범인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와 그의 일당들의 사진과 모의했던 장소, 저격 무기 등은 물론 링컨의 피 묻은 베개까지 전시되어 당시 참혹했던 그의 죽음을 흐트러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남북전쟁에 참가한 흑인병사들

박물관에서 극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저격 당일 링컨의 행적과 범인들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구성하여 서로 마주보게 전시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었다. 링컨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전시 중간 중간에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내력과 사건의 맥락을 짚어주고, 강조할 부분을 극적으로 재구함으로써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미국의 대부분의 박물관들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나 다큐멘터리로 대체하고 있었다. 링컨의 연설문이나 발언 중 감동적인 부분을 타이포그래피화해서 전시하고 있었고, 당시 흑인들의 비참했던 생활과 전쟁 중 활약상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전시물과 상호관련 되면서 매우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남북전쟁에 흑인병사들이 참전했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남북전쟁 이전에도 북군에는 흑인병사들이 있었다.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목숨 걸고 싸워야했던 흑인병사들의 처지는 월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인 병사의 월급이 14달러인데 반해 흑인병사의 월급은 7달러였다고 하니 북군 내에서조차 자유와 평등은 멀기만 했었나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링컨 암살범의 현상금이 50,000달러에 달했는데, 이 금액은 흑인 병사의 595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링컨을 저격한 권총

링컨에게 소지를 권했었다는 무기

링컨의 후두부를 쏘았다는 권총은 아주 단아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오히려 볼티모어에서의 암살계획이 드러난 이후 보좌진이 안전을 위해 권했다는 칼과 고글과 너클 등이 더 치명적으로 보였다. 암살범 일당들의 사진 등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설명이 없다면 당시 평범한 미국 사람들의 사진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인생의 질곡을 모두 잘 넘어와서 618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남북전쟁을 승리로 잘 이끌어온 링컨이 워싱턴 한 복판 극장에서 그것도 후두부에 총을 맞아 사망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면에서 저격을 당했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암살계획이 포착된 상황에서 2VIP석에 앉은 대통령의 후방이 그렇게 허술하게 열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2층에서 뛰어내려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것이나 숨어 있는 곳에 불을 질러 암살범을 죽게 했다는 것[각주:1]까지 링컨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링컨의 죽음에 대해서는 평행이론이나 테쿰세의 저주’(Curse of Tippecanoe)[각주:2] 등과 같은 말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링컨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는 무관하게 그에 대한 신화화는 더욱 강해져서 가는 곳마다 링컨을 추모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그가 죽음을 당했던 포드 극장을 2,500만 달러를 들여서 2009년 재개관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링컨을 기리며 그의 죽음을 상기하지만 그 진실은 아직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얼마나 섬뜩하고 냉정한 선언인가

링컨박물관에서 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선언적 예견은 분명 역사의 책무나 소명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나는 거기서 터무니없이 역사의 진실을 생각했다. 진실이 보장되지 않는 역사 앞에서의 책무와 소명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공소한 일일 텐가? 1980년대 대학시절에 나를 괴롭히던 고민을 맥락 없이 링컨 기념관에서 다시 만난다. 크고 강한 이야기는 대부분 당위를 강조하지만, 삶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해서 그렇게 클 수도, 강할 수도, 당위를 요구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링컨박물관에서 나오면 당시 저격이 벌어졌던 극장이다. 객석에 앉아서 안내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링컨 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는 2층 오른쪽 VIP석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링컨이 저격당했던 1865414일은 로버트 리 장군이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종식된 지 닷새 후였다. 더구나 이날은 각료회의를 통하여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를 해제한 날이었다. 케네스 데이비스의 주장에 의하면, 링컨은 모든 이들에게 중용과 화해를 권유했고 온전한 재건계획을 세워 최소한의 보복과 처벌로 반역 주들을 다시 연방의 품으로 끌어들이려 했[각주:3]고 그것의 가시적인 노력이 남부연합에 대한 봉쇄 해제였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군이 4168백 명 전사했는데, 남북전쟁에서는 618천 명이 전사한 것만 보아도 그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인한 상흔의 깊이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링컨의 암살도 그러한 상흔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링컨은 관용과 화해로 상처를 보듬으려했는데 암살범은 보복과 암살로 그것을 파괴하려했던 것이다. 이것은 남북전쟁의 승자와 패자라는 확연한 입장 차이와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극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링컨이 암살당함으로써 남북의 각성을 이끌어 화해가 이루어져야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흑인에 대한 차별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곪다가[각주:4] 1950년대부터 흑인들의 저항과 개선의 노력[각주:5]이 본격화된다. 뚱뚱한 여자 안내인의 설명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극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포드극장 길 건너 맞은편에는 저격 다음날 아침 링컨이 죽음을 맞은 페터슨 하우스(Peterson's House)가 있다. 총격을 당한 링컨의 상태가 위중해서 병원으로 옮기지 못하고 임시로 옮긴 곳인데 그는 거기서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페터슨 하우스였다. 원래는 안을 둘러볼 수 있는데 현재 공사 중이라서 관람을 할 수는 없었다. 집 앞에 두른 무성의한 합판 담장의 색깔이 어울리지 않았고, 공사 중이어서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판 역시 무척 차갑게 보였다.

포드극장 앞 기념품 상점에서 만난 미국적인 기념품들

페터슨 하우스에서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대형 기념품점이 있었다. 포드극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일 테지만, 기념품의 콘셉트는 링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워싱턴과 미국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만큼 상품의 종류가 다양했는데 우리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매장이었다. 미국을 상징할 수 있는 것들, 미국 역사의 주요 장면들, 그와 관련된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것들, 미국의 애국자들과 영웅들 등등 보여주고 싶은 것보고 싶어 하는 것들사이에 절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내가 피규어를 모으고 있는 것을 잘 아는 아내는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하라고 했지만, 그것들의 미국중심적인 색채가 내게는 거슬렸다. 아이들만 기념엽서를 구입해서 나왔다.

다음으로 우리는 내셔널 몰에 있는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을 보러 갔다. 어제 주차를 했던 국회의사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면 되겠다 싶어서 차를 대고 보니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우리가 용감하게 주차했던 국회의사당 앞 주차장이 사실은 허가 받은 사람만 주차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용감하게 주차를 하고 다녔으니 혹시라도 어제 주차 위반 스티커라도 발부된 것 아닌가 슬쩍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를 다시 뽑아서 국립미술관을 비롯해서 내셔널 몰 주변을 다 돌았는데도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하나 발견한 곳은 주차기에 장애인 표시가 붙어 있었고, 동전만 받는 것이라서 포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인도 주차가 가능한 곳이었다. 다시 주변을 몇 바퀴를 돌다가 국립미술관에서 상당히 떨어진 교통국(Department of Transportation) 주변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최대 2시간밖에 주차가 안 되는 지역이었다. 관람하다가 중간에 나와서 시간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미술관은 내셔널 몰의 박물관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관은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고, 동관은 현대 작품 중심인데 규모는 서관이 몇 배 컸다. 규모면에서도 그동안 보아온 미술관과는 달랐다. 내셔널 몰 주변의 수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경은 차분한 압도였다. 규모로 보면 웅장했지만, 웅장하다고만 하기에는 친숙했고, 친숙하다고만 하기에는 웅장한 모습으로 차분히 압도해왔다. 사실 미술관은 어디를 가나 실망이 없다. 작품이 적으면 적은대로 느긋하게 볼 수 있어서 좋고, 많으면 말 그대로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 돌아본 미술관들은 대부분 미술관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미술관 주변부터 미술관 건물 그리고 동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구조까지 늘 제한된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런 마음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데, 다만 아이들이 미술관에서 유독 빨리 지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국립미술관 전경

국립미술관의 규모와 3만점의 소장품을 오늘 다 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라고 생각하고, 서관부터 보기로 했다. 게다가 주차 시간의 제한이 있으니 보다가 내가 나가서 시간을 연장할 수 있으면 하고, 그렇지 못하면 볼 수 있을 만큼만 보기로 했다.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중세부터의 종교화들에게서 보는 눈이 어두운 나는 큰 감동을 얻지 못했다. 모든 예술이 학습을 통해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미술사의 앞부분을 좀 더 차분히 읽어두었다면 또 다른 감흥을 얻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국립미술관은 공간을 넉넉하게 활용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다양한 시점과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실 중앙에는 앉아서 볼만한 소파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메모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주제별, 시기별로 모아서 전시를 하고,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해주는 오디오 기기를 제공 받아서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인데, 그것이 모두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니 놀랍고 고마울 뿐이었다.

피카소의 연인

이번 여행 중 둘러본 미술관에서 기뻤던 것은 사진으로만 보던 세계적인 작품들을 직접 보는 것도 보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작가의 또 다른 작품과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식견은 좁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피카소였다. 그동안 피카소의 작품은 입체파 혹은 미술책에 등장한 작품들에 갇혀 있었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화풍의 작품들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감이나 선을 보면 그가 보였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묘사한 연인이나 발가벗고 있는 두 젊은 남자를 그린 작품이나 모두, 피카소 외에는 답이 없는 작품들이다.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

이곳에서 만나는 세잔, 라파엘, 드가, 고호, 고갱, 다빈치, 램브란트의 작품들도 하나 둘 그런 기쁨을 주었다. 특히 르누아르의 오달리스크에서는 퇴폐적이고 관음증적 시선과 응시가 겹쳐진 끈끈한 분위기에 한참을 넋을 주고 서 있어야만 했다. 크림트의 느낌이 들었는데 가서 자세히 보니 르누아르였다. ‘오달리스크는 매춘부를 그린 것이라는데, 관음증적 판타지를 응축시킨 작품 표정도 재미있지만 소품과 옷의 색깔만으로도 끈적끈적한 욕망의 색깔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했던 기만, 허위, 은폐, 억압 등에서 탈주해 대안적 세계로 추구했던 것인 오리엔탈적 세계였는데, 그러한 경향의 한 작품이란다. 신비와 퇴폐의 노골화가 과연 오리엔탈적인 것이냐는 것은 철저히 당시 유럽인들의 시각이고 보면, 지금 우리가 말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유럽세계의 기만과 황폐의 대안을 오리엔탈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육체와 욕망 그리고 시선과 상관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신보다는 인간에, 거대담론보다는 미시담론에, 당위보다는 존재에 주목한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립미술관은 시카고나 뉴욕에 비해 한가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할 수는 있었지만, 직원들의 고압적인 자세가 눈에 거슬렸다. 우리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람객을 대하는 고압적인 말투며 행동거지가 몹시 불쾌했다. 이렇게 좋은 소장품들과 전시공간을 가지고서 그것을 온전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미술관이 안타까웠다. 그것은 그 많은 전시공간마다의 테마가 스토리텔링으로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아쉬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향유 자체를 방해하고, 그로 인해 세계적인 작품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에 가까웠다.

워싱턴 맥도날드 가판대 메뉴. 횡단 내내 만났던 맥도날드의 평균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품질은 형편없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경을 더 빼앗길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보니 주차시간이 다 되었다. 아내에게 효진이와 더 보고 있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나는 많이 피곤해하는 유진이를 데리고 차를 주차해둔 교통국 부근까지 부지런히 걸어갔다. 날도 덥고 게다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걸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다행히 2분 전에 도착해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추가했는데 30분밖에 더 추가가 안 되었다. 이상해서 주변의 표지판을 살펴보니 오후 4시부터 630분까지는 주차가 금지된 곳이라서 시간이 더 추가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차를 옮기려고 살펴보니 근처가 다 비슷한 형편이었다. 퇴근시간 무렵에 교통 혼잡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논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국립미술관을 그만보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에 어제 어두워져서 제대로 보지 못한 한국전쟁 참전 추모공원과 베트남 참전 용사비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아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는 사이, 우리는 근처에서 발견한 맥도날드 가판대에서 먹을 것을 사기로 했다.

결국 오늘도 그러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일정에 욕심을 내다가 점심을 4시가 지나서 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저녁때가 다 되었으니 지금은 시장기만 지우고, 조금 있다가 저녁은 제대로 된 음식을 사주리라 생각하고 간단한 것을 주문을 하려고 보니 가격이 터무니없었다. 이미 어제부터 워싱턴의 음식이 질과 양에 비해 가격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맥도날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미국 전역 어디서나 같은 가격으로 팔리는 줄 알았던 맥도날드가 워싱턴에선 햄버거가 4, 맥너겟은 2배 이상 비쌌다. 게다가 메뉴의 선택도 여지가 없다. 정식 매장이 아니라 작은 가판대다 보니 직원 둘이 햄버거 기계를 이용해서 기본 버거와 더블버거 그리고 맥너넷만 팔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시장한 것을. 덕분에 꽝꽝 언 냉동 패티가 기계에 들어가서 구워져 자동으로 빵 위에 얹혀 나오는 것을 질리도록 쳐다보아야했다. 그나마도 줄을 서서 불친절한 직원과 말을 섞으며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미주리 주 맥도날드에서 만났던 그 친절한 직원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맥도날드의 표준화도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고, 언제나 그렇듯 친절만큼 불친절은 힘이 세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 공원으로 가기 위해 비지터 센터 주차 구역으로 이동하는데 교통경관이 주차구역에 주차한 다른 차에 스티커를 발부하고 있었다. 합법적인 주차구역인데 왜 스티커를 발부하나 의구심이 들어서 몇 번을 망설이다 앞쪽으로 차를 세우고, 직접 가서 문의했다. 내가 차를 주차한 곳이 주차 구역 맞느냐고 두 번이나 묻고서야 안심을 했다. 하루 종일 주차 스트레스에 시달린 우리는 이렇게 넉넉한 무료주차 공간이 고마울 뿐이었다. 게다가 옆으로 우리와 함께 흐르는 포토맥(Potomac) 강은 비스듬히 누워 햇살로 반짝거렸고, 그 앞의 모든 것들은 역광 때문인지 실루엣으로 아늑했다. 강변을 따라 길 안내 하듯 늘어선 나무들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더위는 따라오지 못했다. 숲그늘의 고즈넉한 표정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비로소 오고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국전쟁 참전 추모 공원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추모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은 어제보다 사람들이 조금 많았다. 빛은 투명하고 명징해서 사진 촬영에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빛이 좋아서 조형물들을 꼼꼼하게 훑어볼 수 있었는데, 어제와는 달리19명의 병사들 표정들에서는 전투의 의지보다는 전쟁의 공포가 먼저 읽혔다. 한 명 한 명의 자세와 표정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읽어갔다. 그 옆에 검은 벽에 새겨진 얼굴들도 어제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앞으로 경계석 위에는 한국전쟁의 사망, 실종, 포로, 부상자의 숫자[각주:6]가 적혀 있었는데, 참혹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랙호크 다운>(Black Hawk Down, 2001)에 등장했던,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던 플라톤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비극적 전망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 지독한 비극의 결과를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원인을 달리하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Vietnam Memorial)1959년에서 1975년까지 연대순으로 6만 명에 달하는 전몰장병의 이름을 검은 대리석에 새겨 놓은 것이다. 검은 대리석 위에 전사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그 앞에 서고 보니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추어졌다. 그 검은 대리석이 직각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곳에 비춰진 모습이 다시 되비춰지기도 했다. 조형물은 관람하는 사람의 현재를 통해 완성되는 구조였다. 베트남 전쟁은 비록 끝났지만 그와 유사한 성격의 전쟁을 세계 각지에서 수행하는 미국의 오늘을 되비추고 있었다. 6만 명에 달하는 아까운 목숨들의 죽음이 오늘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다. 대부분 군대 외에는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없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입대를 했고, 또 정부에서는 그러한 계층들에게 입대를 권했고, 그들은 낯선 땅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져 간 것이다. 미국 사회 양극화가 더 극대화된 현재에 그러한 모습은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징병관들이 저소득층이 머무는 지역을 방문해 입대를 권유하는 모습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은가? 또한 그들에 의해 희생된 그 낯선 지역의 생명들까지이 지독한 참상을 고스란히 조형물은 되비추고 있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비에서 본 봉투 위의 편지

베트남참전용사 조형물

베트남참전 용사비에 비친 필자

역사는 낡거나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 갈 뿐이다. 잊혀진 역사는 여지없이 반복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더 가혹해질 뿐이다. 우리는 역사를 잊지만 역사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더구나 유사한 반복에 번번이 침묵하고 외면하며 현실이 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늘 그렇듯 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듯, 오늘에 침묵하는 몫은 오롯이 자신의 것임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조형물을 따라서 걷다가 손글씨가 쓰인 노란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겉에 쓰여 있는 편지였다. 전몰장병의 지휘관이었던 생존자가 써놓은 글이었는데, 울컥하게 만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위에서 산 자로 남게 된 사람의 미안이 절절했다.

아직 해가 조금 남아서 포토맥 강위로 길게 누워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아직 과거가 아니다. 한국전쟁은 휴전중이며 베트남전쟁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번복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 반복될 뿐인 또 다른 전쟁은 반성 없이 가혹해질 뿐이다. 두 기념물을 보면서 가슴은 한참이나 먹먹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주류전문점에서 버드와이저 40온스짜리를 하나 사왔다. 이곳 호텔에는 대체로 냉장고가 없어서 얼음을 채워와 차갑게 한 후 아내와 마셨다. 오늘은 아내가 더 마셨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여정을 달려온 피로 때문이리라. 내일 돌아가면, 그동안 멈춘 시계를 부지런히 돌려야 한다. 8월도 후반부로 달려가고 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 21일간 횡단여행의 대단원이다. 시카고를 기점으로 시간은 순식간에 달려갔다. 시간이 달리는 만큼 피로는 더 했지만 가족들 모두,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왔다. 무엇을 보고 배우려고 온 여행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는데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싶던 여행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가족들 모두 즐겁고 알찼다고들 했다. 가족들은 다양한 주제로 이번 여행의 베스트와 워스트를 선정하기도 했다. 돌아갈 짐을 모두 꾸리고 내일은 아쉬움에 워싱턴에서 놓친 몇 군데를 더 돌고 공항으로 갈 것이다. 대부분 처음 해보는 것들에 가족들 모두 용기를 가졌다. 돌아갈 곳의 소중함도 모두 같은 심정인가 보다. 꼼꼼하게 여행일정과 경비, 관련 자료, 사진, 정리물 등을 챙겼다. 이제 그것이 몸을 만들 차례다. 그것은 집에서 따듯한 밥과 된장찌개를 한 그릇 먹고부터 시작할 일이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멀리 있지만, 내일이면 하나의 그리움을 지울 수 있겠다.

 

  1. 암살범 존 윌키스 부스는 뛰어내리다가 장식 천에 다리가 걸려 정강이뼈가 부러진 상태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말을 타고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버지니아 볼링그린 담뱃잎 건조장에서투항을 거부하고, 불타는 건조장에서 나오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테쿰세의 저주는 미국 정부에 무력으로 항쟁하던 인디언 추장 테쿰세가 죽으면서 20년에 한 번씩 0으로 끝나는 해에 당선된 대통령은 임기 중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1840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 1860년 아브라함 링컨, 1880년 제임스 A. 가필드, 1900년 윌리엄 매킨리, 1920년 워런 하딩,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1960년 존 F. 케네디는 예외 없이 임기 중에 모두 죽었다. [본문으로]
  3.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276 [본문으로]
  4. 1896년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합법화하는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판결을 내린다. 이에 따라 학교, 식당, 열차, 버스, 식수대 등에서 흑백의 분리를 합법화함으로써 남부에서는 흑백의 갈등이 보다 첨예화된다. (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p.323-325 참고) [본문으로]
  5. 백인전용 학교에 입학을 거부당한 부모가 제기했던 1951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을 비롯하여, 버스의 흑백분리 지정석 제도에 저항한 로자 파크스 사건, 1957년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라는 백인 전용 학교에 흑인학생 9명의 등교 시도 사건은 주방위군까지 출동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본문으로]
  6. 사망(미군: 54.246, 유엔군 628,833), 실종(미군: 8,177, 유엔군: 470,267), 포로(미군: 7,140, 유엔군: 92,970), 부상(미군: 103,284, 유엔군:1,064,4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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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817일 워싱턴얼바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여행은 늘 돌아가기 위한 떠남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없다. 떠나지 못해 조바심치고 안타까워하다가 막상 떠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돌아올 날을 꼽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어쩌면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의 설렘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익숙한 곳에 놓아두고 자신의 일상을 문득 정지시켜 놓고 떠나서 낯선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서성이다가 그 안에서 자신을 꺼내어 돌아오는 여행은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여행에서 돌아가는 길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정지시켜 놓았던 일상은 정확히 정지된 만큼 더 분주해질 것이고, 사용된 여행비용만큼 궁핍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빽빽하게 채우고 싶어 했다.

아침식사를 포기하고 모두들 1시간쯤 더 자기로 했다. 1시간 더 잔다고 피곤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편안했다. 오늘은 미국 역사박물관을 3시까지 보고,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를 탈 계획이다. 어제 저녁을 먹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에서 남겨온 머핀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여행을 마치기 전날이라고 어제 저녁은 제대로 먹기로 했는데, 마침 필라델피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페이머스 데이브스가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어서 그곳에 간 것이다. 지난번에 아쉬워했던 콤보를 시켜서 넉넉히 먹으면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고, 서로를 축하했다. 배불리 먹고 났는데도 닭 한 마리 반 정도와 머핀이 많이 남았다. 아내가 너무 많을 것이라고 시키지 말라는 것을 남으면 내가 먹는다고 우겨서 시켰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돌아오는 내내 아내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아침은 머핀으로 해결하지 않았는가?

워싱턴은 매일매일 더 혼잡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주차할 곳이 없었다. 동전주차기가 설치된 곳은 모두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내셔널 몰 주변의 관공서가 몰려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아침 10시까지는 교통 혼잡과 청소 때문에 주차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1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빈 곳이 없었다. 주차할 곳을 찾아서 몇 바퀴를 돌고나서야 차를 빼는 한 곳을 발견하고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앞으로 들어와 주차를 했다. 화가 나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차에서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내렸다. 어쩌겠는가, 힘드셔서 그랬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 역사박물관에서 10분쯤 걸어야 하는 곳에 가까스로 주차를 했다.

이곳도 어제처럼 2시간 한정 주차라서 중간에 한번 다시 나와서 차를 옮기거나 주차를 연장해야 했다. 거리에 서 있는 동전주차기는 오래된 것은 동전만 받지만, 신형은 동전과 카드를 모두 받는다. 25센트 동전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카드가 편하다. 2시간 한정 주차의 경우에는 2시간 이상 입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2시간 후에 나와서 다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연장하는데 동일 카드는 연장이 되지를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니 결제가 된다. 동일인의 동일카드를 인식할 줄 아는 주차기가 동일인의 카드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결제가 되는 것을 보면 조삼모사였다. 내셔널 몰에 그 많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주차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설사 주차를 했다고 해도 2시간 안에 박물관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두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말일 텐데, 우리 같이 숙소가 시외에 있는 여행객들은 어쩌란 말인지 궁금했다.

내셔널 몰 주변의 스미스소니언 국립박물관들 지도

미국 역사박물관은 워싱턴 기념탑 쪽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국립미술관의 동관과 서관을 지나서 가야했다. 새로운 길로 가보자고 국립미술관 앞쪽이 아닌 뒤쪽으로 가다보니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날도 많이 더웠다. 걸어가다가 지칠 판이었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 국립미술관 조각정원(National Gallery of Art Sculpture Garden)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록시 페인의 ‘Graft’

알렉산더 칼더의 ‘Red Horse’

루이스 브루주아의 ‘spider’

호안 미로의 ‘Gothic personage, Bird-Flash’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House1’

클래스 올랜버그와 쿠제 반 브루겐의 ‘Typewriter Eraser,

그저 거리를 줄이려고 들어선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은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1991년에 개관했다는 이곳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17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문과 문 사이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저녁에는 음악공연이 펼쳐지고, 겨울에는 이곳을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분수 주변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분수대 옆의 카페테리아에서는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팔고 있었다. 카페테리아 앞쪽으로 록시 페인(Roxy Paine)‘Graft’이 서 있었다. ‘Graft’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나무였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느낌과 앙상한 가지에서 견고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 주변으로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House1’,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Red Horse’, 호안 미로(Joan Miro)‘Gothic personage, Bird-Flash’, 클래스 올랜버그(Claes Oldenburg)와 쿠제 반 브루겐(Coosje van Bruggen)‘Typewriter Eraser, Scale X’, 루이스 브루주아(Louise Bourgeois)‘spider’등이 있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spider’는 롯본기 힐스에서 보았던 ‘maman’과 비슷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이 거미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maman'은 말 그대로 어머니의 이미지와 연관된 것이다. ‘maman'은 유년기의 두려움과 상관된 어머니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었고, 이 작품은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물적인 존재로서의 거미와 상관된 것이었다.

작품의 규모나 대담함에 압도되어 이러저런 시점에서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진은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한 촬영기술 때문이겠지만, 정지된 시간 외에는 현재의 다른 무엇도 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분수에 발을 담그거나 그 주변의 그늘에 담요를 깔고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작품 속으로 일상이 들어간 것인지, 일상 속으로 작품이 들어온 것인지도 몰라도, 부러운 여유와 풍요였다.

미국역사박물관 입구에서 만난 어린 아이들() 이름표를 등 쪽으로 달았다

사진을 찍다보니 조각정원 뒤쪽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멋스러운 건물이 들어왔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는 독립선언서 같은 국가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National Treasure, 2004)에 등장했다고 하니 아이들도 그제야 관심을 갖는다.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을 나와서 미국 역사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앞쪽에 견학을 온 것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귀여웠다. 손에는 흙장난할 때 쓰는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하나같이 이름표는 등 뒤에다 달았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솔하는 선생님이 뒤에서 아이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이름표를 등 쪽에 달고 친구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미국의 다락방(the nation attic)이라고도 불린다는 미국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은 미국 생활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가까운 과거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일상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들이 중심이라서 훨씬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대통령, 전쟁, 오락, 인종문제, 교통수단 등등의 테마별로 설명보다는 즉물적인 제시가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 층의 규모가 대단히 컸지만 테마를 따라 돌다보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었다.

세사미 스트리트 초기 인형들

마이클 잭슨 모자

도로시의 구두, 세사미 스트리트, 피너츠의 초기 버전, 마이클 잭슨 모자, 알리의 권투 장갑, 루게릭의 야구공 등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전시는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국 역사박물관 안에 전시된 대중문화 전시가 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유독 미국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흑인대학생들이 백인전용 좌석에 앉음으로써 분리주의에 항의했던 그린스보로의 가게 의자

흑인노예 등에 채찍 상처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에 설치된 네 개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흑인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식당 의자를 전시한 것이다. 1960년 그린스보로의 한 식당에서 백인들만 앉게 되어 있는 의자에 흑인 대학생 네 명이 앉자 주인은 나갈 것을 요구하며 음식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은 27, 그 다음날은 300, 그 다음날은 백인을 포함한 1,000명이 함께 찾아와 백인전용 의자의 부당함에 항의함으로써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연좌운동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미 1955몽고메리 승차거부 운동으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각주:1]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저항이 시작된 상태에서, 그린스보로의 이 사건을 통하여 흑백분리의 부당성과 심각성을 전국적으로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1960년도까지 미국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미국이 아니던가? 이러한 뿌리 깊은 흑백차별 문제는 단지 미국 사회의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득권층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미국 내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이며, 더 나아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굴복해야하는 약소국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이기도 하다.

야만은 과거의 수사가 아니다. 다만 노골적인 것들이 은밀하고 합법적인 형태로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합법과 합리로 정당화되는 미국의 질서 이면에는 기득권층의 일방주의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미국의 기득권층이 백인 기독교도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가 가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캠프에서 쓰던 식기 키트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던 추첨통

이곳에서는 자유를 위한 대가로 불리는 미국의 전쟁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상당한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독립전쟁부터 최근 이라크전까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미국중심의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당시에 화려한 군복과 투박하지만 잘 벼려진 무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며 워싱턴 캠프에서 사용했었다는 식사용 키트는 캠핑세트처럼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부상당한 병사의 팔을 절단하는 모습은 처절했다.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는 추첨에 사용했다는 추첨통이나 매일 지급되었던 반 컵의 럼주[각주:2] 등은 참전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부터는 자유와 평화라는 명분의 정당화와 전시동원 체제 내에서 여성의 참여 독려[각주:3] 그리고 평화수호자로서 미국의 위치와 전력의 우위 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Route66과 관련하여 이동수단, 이주 과정 및 고난, 도로망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아이들은 자기들이 달려본 길이라고 무척 재미있어했다. Route66은 서부로의 확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자연재해로 농토를 잃고 농장노동자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고난의 여정이었고, 세계 대전과 한국전 등에 참전하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길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Route66은 미국의 근현대사의 영욕을 증거하는 길이다.

미국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초기 캘리포니아 농장의 값싼 노동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어려웠던 시기를 막연하게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서부유럽인들의 이민으로 탄생한 미국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등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제한을 합법화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1929년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1880년대 인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출신국별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였다. 기득권을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이민법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중국인 이민자들이었다.

값싼 중국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의 청원이라는 명분 아래 서부유럽계 백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미국 전체 국민총생산의 30%를 담당하고, 전 세계 제조업의 20%를 담당한다는 캘리포니아의 저력은 그러한 이민자들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문화라는 말에 자유와 평등이 함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거나 낭만적인 믿음임에 틀림없다.

미국 역사박물관은 넓고 크긴 했지만 미술관이나 다른 박물관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짐을 부치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에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금 빨리 공항으로 출발했다.

유료 가트

기내에 가지고 탔던 누추한 여행의 흔적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국제공항(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에 기름을 넣을까 하다가 아침에 주유를 한 터라 괜찮을 듯싶어서 그대로 가져다주었다. 뉴욕에서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48달러나 더 내야했었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이 정도면 됐단다. 그동안 차에 싣고 있던 짐들을 꺼내 놓으니 의외로 많았다. 어제 저녁에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많았다. 우리가 예약한 저가항공의 경우에는 트렁크 하나당 20달러의 요금을 받아서 40달러의 추가요금을 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내 캐리어는 그냥 가지고 타도 될 뻔 했는데 저가항공은 처음이라서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예상했던 금액보다는 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작은 짐들은 가족들이 나누어 들기로 했지만 그래도 적은 양은 아니었다. 그래서 탑승 전까지는 가트에 모두 싣기로 했는데 가트가 3달러를 내야 이용을 할 수 있었다. 3달러를 지불하면 가트를 뺄 수 있었는데, 나중에 반납하면 25센트만 돌려주는 아주 야박한 인심이었다. 왜 인천공항이 세계 1위 공항으로 매년 선정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는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저녁을 주지 않는단다. 그래서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것을 시켰는데, 착한 가격에 제법 그럴 듯한 음식이 나왔다. 오늘 제대로 된 식사는 처음이었다. 모두들 돌아간다는 설렘에 배고픈 줄도 몰랐나보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사실 고민을 했었다. 저가항공이 가격은 저렴한데 한 번도 타보지 않아서 어떨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 국내선 저가항공의 수준이나 서비스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기내식이나 기타 없어도 될 서비스만 빠진 것이라기에 예약을 했다. 이왕 저가항공을 탔으니 조금 더 불편을 감수하고 예산을 줄이자는 생각에 덴버에서 한 번 갈아타는 조건으로 가장 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여행 관련 예매는 수시로 제공되는 핫딜(hot deal)을 제외하고는 미리 할수록 저렴하다. 운 좋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핫딜이 제공되면 가장 좋지만 원하는 날에 좌석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예약을 한 것이다. 더구나 숙소일 경우에는 핫딜이 뜨면 환불하고 그것을 예약하면 되는데, 항공권의 경우에는 환불 수수료가 붙기 때문에 그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상당히 저렴하게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덴버에서 갈아타는 것을 포함해서 4시간 30분 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동부와 서부가 3시간의 시차가 있으니까 7시간 30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산타 아나 공항에 10시쯤 도착해서 짐 찾으면서도 택시가 없을까봐서 아내는 계속 걱정을 했다. 아내가 들은 정보로는 이곳에서는 밤늦게는 공항택시가 없단다. 그래서 노심초사했는데 마침 우리가 탄 것이 마지막 비행기 전이라 택시가 있었다. 사실 택시가 끊기면 아는 분들께 픽업을 부탁해야 하는데 서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알려주고, 우리끼리 우리말로 택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도 한국 사람이란다. 우리는 기사분이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우리말이 그리웠는지 기사분은 이것저것 물었다. 3주간의 횡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비용이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걱정해준다. 이번 횡단 여행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우려가 있었지만 비용을 걱정해준 사람은 기사분이 처음이었다. 사실 여행은 아주 철저한 현실이 아니던가? 먹고 자고 보는 모든 것들이 아주 규칙적으로 비용을 요구하고, 일단 시작하면 돌아올 때까지 그 요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여행이 아니던가? 아마도 기사분의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묻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이민사를 들려준다. 이민 와서 부지런히 생활하고 돈을 모았던 이야기며,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까지그래도 지금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집이었다.

한국 기사 아저씨 덕분에 편안하게 집에 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집이 너무 낯설지만 편안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족들 모두 약간은 흥분상태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 아내와 나는 큰 짐을 정리했다. 엄청난 빨래와 여행 중 구입한 기념품 등을 정리했다. 여행을 떠나면서 걱정하실까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떠났었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를 드리고 씻었다. 씻고 나니 그제야 집이라고 피로가 몰려왔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이곳을 한 번도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편안하고 푸근한 것을 보면, 이곳이 이제 내게 집이 되어가고 있나보다. 떠나보아야지만 자기가 있는 곳을 안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3주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달려온 4,359마일(7,015)[각주:4]의 거리나 7,758달러의 비용이 만만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경유하는 도시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남루해지고 피곤해졌지만 그것을 이유로 내려서거나 돌아올 수는 없었다. 오로지 앞으로 가야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다. 3주 동안 1만장 넘는 사진을 찍고, 대형 바인더 두 개 분량의 자료를 모으고, A4 50장 분량의 빽빽한 메모를 적었지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련하다.

3주간 신고 다닌 크록스

크록스 구멍 부위가 탄 발등

미국 횡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부터 일상 속에서 반추하며 지속적으로 구성해나갈 부분인지도 모른다. 이제 휘발성 강한 기억을 노트 위에 기록해야 할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겸허하게 되비추어야 할 것이다. 여행 내내 길을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길이 날 데려왔음을 깨닫는다. 결국 여행에서 만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같이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늘 집으로 돌아오나 보다.

2011년 여름은 뜨거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는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길이 데려다 놓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모든 것을 놓고 떠날 길을 생각한다. 다가올 날들에는 떠나고 돌아오는 길이 더 멀고 길어져서 나를 좀 더 깊고 온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풀어놓은 남루한 짐들을 빨고 기워서 언제든 다시 꾸리고 떠날 수 있도록 내 안에 설렘이 더욱 강성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움은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그리움을 만든다.

 

  1. 짐 크로 법(1876-1965)은 학교, 버스, 공원, 병원, 식당, 감옥, 식수대 등의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이다. 이 법은 모든 공공기관에서 흑백의 분리를 의무화했으며, 1896년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즉 ‘분리되어 있으되 평등하다’는 기만적인 흑백분리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 법으로 인하여 흑인들은 공공기관에서 모멸스러운 불평등을 감내해야했다. 짐 크로(Jim Crow)라는 말은 “니그로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으며 가난과 어리석음의 대명사”(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325)였다. [본문으로]
  2.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적인 술이었던 럼주는 17세기 근대화된 군대가 등장하면서부터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하루에 지급되는 양은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취기를 느낄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전시에 공장 등으로 불려나왔던 여성들은 종전과 함께 귀환한 남성들과 일자리 경쟁이 불가피했다. 남성들의 일자리 보장을 위해서 종전 후에는 여성들을 일터라는 공적공간에서 불러내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다양한 여성상과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다. [본문으로]
  4. 인천공항에서 LA공항까지가 9,637㎞니 횡단여행 동안 달린 거리가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음을 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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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야할 길이 있는 당신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횡단여행 경유지마다 가져온 냉장고 자석. 귀국 후에 보니 냉장고표면이 플라스틱이어서 붙이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짐


먼 길을 오랫동안 다녀왔다. 막연한 기대와 성취 사이를 오가며 되풀이해서 가슴으로 꿈꾸던 길이었다. 정작 떠날 때에는 그 모든 것을 집에 두고 떠났다. 가능한 조건보다는 불가능한 여건이 더 많았던 길이었기에 그저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신기하고 고맙게도 그 낯설고 험한 길을 떠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조차 없었다. 그저 가족이 함께 먼 길을 떠난다는 가벼운 흥분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무모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바라기는 걸어서 횡단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내와 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시애틀에서 얼바인까지 자전거로 여행을 하겠다는 제시카의 말에 부러워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도 우리의 몫은 아니었다. 기차나 비행기로는 구석구석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 없을뿐더러 시간에 구애가 너무 컸다. 장시간 운전의 피로만 넘어설 수 있다면 자동차는 기동력과 독립성 면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만 자동차의 속도는 우리들 욕심과 항상 비례하는 것이어서 스스로 다스리지 않으면 여행이 아닌 이동이 될 수 있기에 경계가 필요했다.

여행자에게 허투루 지나칠 것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길이 데려다 준 곳곳마다 눈을 주고 마음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계획에 없던 것에 넋을 놓다가 계획했던 것을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길 위에 꼭 보아야할 것은 어디 있으며 우연히 만나는 것은 또 어디 있으랴. 만나야할 것은 만나야할 곳에서는 만나는 것이고, 단지 그 모든 것들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 설렐 뿐이었다.

횡단 여행 내내 아이들이 아내와 나와 같이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쓸쓸했고, 기뻤다. 분만실에서 갓 나온 첫째와 둘째의 모습을 보며 울컥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데, 아이들은 제 몫의 시간을 잘 데리고 아빠의 예상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낯설고 깜찍한 표정을 짓고, 충만한 기쁨으로 나이테를 하나둘 품어왔건만, 내게 아이들은 아직 보호해야할 어린 새순들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시간을 정지시켜놓고 바라보기만 하던 내게 횡단 여행은 아이들의 제 나이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제 나이의 아이들을 보는 일은 대견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유진과 효진의 어린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쓸쓸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그 나이 때 내 모습을 자꾸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힘들 때마다 지금 내 나이 때를 건너시던 아버지 모습을 상기하며 위안을 삼는 것과도 닮은 듯 어긋난 맥락이리라.

자동차는 지극히 독립적인 공간이어서 오롯이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되고, 위안이 되어주었다. 폭염은 우리 차를 따라오지 못했고, 사막의 열기도 차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이따금 스텝의 회오리바람이 옆에서 위협했지만 두렵기보다는 신기할 뿐이었다. 차창에 부딪혀 횡사한 작은 날벌레를 주기적으로 닦아내야 했지만 그것도 앞으로 달리던 차의 시야를 가리지는 못했다. 며칠을 달려도 지평선은 또 다른 지평선을 보여줄 뿐 그 너머를 보여주지 않았다. 척박한 대지 위로 불모의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그 때에도 예외 없이 하늘은 압도적인 코발트빛이거나 스카이블루였다. 그런 풍경을 보며 몇 시간씩 달리다보면 어느새 길 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소리조차 슬며시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사라지면 오롯이 차 안의 가족들만 남았다.

떠나는 곳과 돌아오는 곳이 같지 않은 출발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낭만적 유목을 꿈꾸지 못하는 이유다. 일상의 평온과 성실을 사랑하는 소시민으로서 여행의 달콤한 일탈을 희망할 뿐이지, 일상을 폐기하는 일탈은 감히 꿈꾸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희망하지 않는다.

여행을 정리하며 돌아보니 우리의 횡단여행은 우리다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애초에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처럼 철학적 방랑이거나, 한비야처럼 자기 확신의 자유이거나, 김훈처럼 풍경을 압도하는 은륜(銀輪)의 언어이거나, 이병률처럼 따듯하고 명징한 감성이거나, 성석제처럼 유쾌한 의뭉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들을 명분이나 목표에 구속되지 않고 돌아본 소박한 길이었다. 언제나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부족한 우리 가족에게는 가는 곳마다 새롭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오히려 모든 길이 고단한 기쁨이 되었다.

길이 매력적인 것은 그곳에 우연과 돌발이 있기 때문이다. 계획할 수는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는 어긋남의 연속, 그 어긋남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길의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돌발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을 때 여행은 자유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우연과 돌발을 잠재운 길은 결코 여행이 될 수 없다. 하여 여행은 길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데려가야 하는 것이다. 길이 데려가는 길 위에서 새로움과 변화의 자신을 만나는 일, 그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은 유연하고 부드럽고 넉넉하다. 여행은 분리나 경계의 단단함보다는 포괄과 탈경계의 유연함과 부드러움을 꿈꾸기 때문이다.

떠나야할 길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단한 일상에서 기진한 모습으로 황폐해진 나를 꾸역꾸역 버티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다시 길 위에서 짐을 꾸리게 될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이름도 지도 위의 위치도 낯선 그곳에서 만나는 로컬 맥주의 시원한 목 넘김처럼 행복할 것이다.

21일간의 길에 대한 꼼꼼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낯선 황홀과 설렘은 조금도 표현하거나 기록하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빈약한 언어와 거칠고 성긴 감성 그리고 일천하기 그지없는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모자란 것이 며칠 사이에 채워질 성질의 것이 아니고 보면, 부족한대로 드러내는 것이 진솔한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무릅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21일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새로운 신열을 앓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이며 동시에 그 길을 걷고 있을 그 때의 나에 대한 기대이다. 이 신열로 또 얼마간 난 은밀하지만 달뜬 행복을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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