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떠나는 여행

728일 얼바인세도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 7시에 렌터카를 인수하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가 집에서 10마일(16)쯤 떨어져 있으니 우리차로 가서, 렌터카는 내가 몰고, 우리 차는 아내가 몰고 와야 했다. 미국에서 처음 차를 렌트하려다 보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나보다 영어가 원활한 첫째를 태우고 가야했고, 그러다보니 둘째만 집에 둘 수가 없어서 결국 온 가족이 가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여행 전날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일찍 자라는 말에도 흥분이 되는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이 길어지면 아침이 분주하다. 결국 분주한 만큼 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05도로를 타고 10여분쯤 달리다가 빠져나와서 우회전을 하려는데, 뒤에 있던 BMW가 슬그머니 와서 우리 차를 받았다. 추돌 사고였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망해하며 내렸다. 뒤에 BMW로 가보니 운전자는 창문도 내리지도 않고 안에서 혼자서 떠들 뿐이었다. 일단 갓길로 대라고 손짓을 하니 그제야 뒤따라왔다.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이곳에 오자마자 들었는데, BMW 운전자는 느릿느릿 내리더니 역시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화가 났지만 내차에 큰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라고 했더니 그제야 미안하단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횡단여행을 떠나는 첫 날이 아니던가? 아침, 첫날, 새봄 등등 처음 시작하는 것에 유난히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알기에, 여행을 시작하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그를 잡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아이들 보기에 볼썽사나울뿐더러 이미 놀라 있는 아이들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과를 받아내기에는 불행히도 나의 영어실력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저 횡단여행의 액땜을 했다고 믿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정보다 30분쯤 늦었다. 예약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났더니 하루 15달러를 추가부담하면 보험이 가능하단다. 렌터카 보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225달러의 예상하지 못한 경비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고 횡단을 시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는가?

모든 서류 처리를 끝내고 차를 인수하고 보니 전에 설명했던 차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아내와 풀 사이즈 카’(full-size car)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그보다 한 사이즈 작은 스탠더드 카’(standard car)급과의 연비 차이는 얼마가 되는지, 그리고 MP3는 사용 가능한지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렌터카 회사를 미리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담당자 말이 어느 차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타 캠리나 닛산의 알티마2.5[각주:1] 정도가 될 것인데, 캠리는 예약 상 없을 듯하고 알티마2.5가 될 것이라고 했다. MP3는 사용 가능할 것이고, ‘스탠더드 카급과의 연비 차이는 크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알티마2.5겠지 했는데 느닷없이 브라운색 마즈다6. 알티마2.5가 마즈다6보다 좋은 차인지 아닌지는 몰아본 적이 없는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마즈다6의 기어인데 D로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M에 놓고 출발을 해서 엄청난 소음과 저속을 경험하였다. 운전한지 20년이 넘었는데 낯선 것은 낯선 것이다.

차량 외부와 6,000마일(9,650) 정도 주행한 것으로 보아 새 차인 것은 분명한데, 차량 내부를 보니 마치 5-6년은 운행한 차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차가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숙소 예약이 끝나있는 상황이고, 오늘 달려야 할 거리와 시간은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둘째를 우리차로 보내고, 나는 첫째와 그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조금 달리다보니 차량소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몇 번을 달리고 서고를 반복해보았는데, 이 차로는 횡단은 둘째 치고 집까지 가는 것도 어려웠다. 차를 돌려 다시 렌터카 회사로 가서 차량 소음이 너무 심하니 다른 차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직원이 나와서 시동을 걸더니 무슨 소음이 나냐고 묻는다. 혹시 D가 아니라 M에다 놓고 운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속기어에 두고 운전을 했으니 그 소음이 오죽했으랴, 추돌 사고와 마음에 들지 않는 차, 떠나려는 바쁜 마음이 겹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차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강력하게 차를 바꾸어달라고 하자 직원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편도(one-way)로 뉴욕까지 가는 우리에게 좋은 차를 주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만약 다른 차가 없다면 하나 아래의 스탠더드 카급의 차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다며 코발트색 마즈다6을 보여주었다. 5,000마일(8,046) 정도를 달린 새 차인데 내부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고, 운전을 해보니 앞에 차보다 편했다. 이 차로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서류를 모두 다시 꾸며야 한단다. 그제야 직원이 왜 그렇게 싫은 기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차종인데 그냥 타지, 왜 서류를 다시 꾸미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뉴욕까지 15일을 같이 해야 할 차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차로 찝찝한 기분에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차에는 MP3 연결잭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놓고 들었더니 소리가 제법 들을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여행에서 운전의 피로를 풀어주던(때론 피로를 가중시키던) 유진이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약하면서 몇 번을 확인했는데, 그 때에는 MP3 연결 잭이 있다고 해놓고서 막상 차를 받고 보니 없었던 것이다. 횡단하면서 듣겠다고 유진이가 며칠 전부터 음악파일을 다운 받고, 정리해 놓은 터였다. 운전하는 나도 나였지만 차 안에서 장시간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유진이의 실망이 걱정 되었다. 유진이에게 미안해서 이거 어떻게 하지?”라고 했더니, 아이는 추돌 사고에 차 교환 등으로 이미 놀라고 지쳐있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팟 자체 스피커로 들으면 된단다. 아이가 아빠보다 현명했다. 고민 끝에 아이팟을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 놓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위에서 소리가 나니 훨씬 음량이 좋았다. 다소 옹색하긴 했지만 어쩔 것인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면 통()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실었다. 떠나 있는 기간에 비례해서 짐은 늘고, 여정이 진행될수록 짐으로 인한 수고도 는다.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 12개들이 햇반 두 상자, 카레를 비롯한 즉석 요리 24, 6개들이 컵라면 세 박스,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작은 가방, 1리터 생수 24개 한 상자, 약과 간식이 들어 있는 아내의 가방, 여행 중 아이스박스 역할을 해 줄 방수 가방 등이 전부였다. 21일 간의 여행이지만 캐리어와 카메라 가방, 노트북 등을 제외하고는 가는 도중 모두 먹어 없어질 것들이었다. 비행기로 돌아올 때 짐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옷은 가급적 적게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나는 마치 난파선에서 짐을 꺼내어 물품을 확인하는 15소년 표류기[각주:2]의 소년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먼 길 떠난다고 옆집에 사시는 이 교수님 사모님은 짐을 싣는 내내 곁에서 도와주시며 배웅을 해주셨다.[각주:3] 얼바인을 벗어난 차는 평균 시속 70마일(112)로 달리면서 점차 내게 익숙해졌다. 차가 익숙해지자 마음이 놓이면서 차 안의 장치들이 궁금해졌다. 특히 내 차에도 있지만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크루즈(Cruise)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On 버튼을 누르고 가속 스위치를 올리니 크루즈 기능이 작동되었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라스베이거스 근처에서 과속으로 벌금을 문 이후로 정속운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프리웨이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어느새 과속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크루즈 기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허용되는 최대속도에 크루즈 기능을 설정해두면, 과속 염려도 없을뿐더러 엑셀을 밟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였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영락없는 나비족으로 만들어주는 팔토시다. 그렇다면 팔토시가 아바타인가? 빼는 것을 잊고 차에서 내리면 여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하는 패션 아이템이다.

동부에서는 화씨 117(섭씨 47)까지 올라가는 기록적인 찜통더위로 3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지만, 우리가 있는 서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여름을 생각하면 쾌적한 편이었다. 기온은 높이 올라가도 건조한 날씨 때문에 그늘에 있으면 오히려 서늘했다. 낮에 무방비로 햇빛에 노출되는 것만 피하면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어서 여름 내내 냉방기를 한 번도 틀지 않고 지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여행이 서부에서 동부로 간다는 것이고, 더구나 낮 시간 동안 사막지대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의 열기는 살인적인 것이었는데, 네바다 사막지대를 달리다보면 차가 과열 될 수 있으니 에어컨을 끄라는 경고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온뿐만 아니라 차창으로 내리쬐는 자외선도 큰 문제였다. 피부가 까맣게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8시간쯤 달려야 한다면 자외선 차단제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미리 한인마트에서 특수소재로 만들었다는 쿨토시(팔토시)를 준비했다. 토시를 끼면 손가락 두 마디만 남기고 손부터 시작해서 팔뚝까지 온전히 덮을 수 있었다. 게다가 특수소재라 가볍고 얇을뿐더러 시원하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것은 팔토시의 색깔이 파란색이어서 그것을 끼고 나면 영락없는 <아바타>(Avatar, 2009)의 나비족이었다. 팔토시는 보기보다 시원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했다I-15를 타고 가다가 주로 I-40을 달렸다. 우리가 달리는 길옆으로 Route66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Route66은 도로의 형태나 기능을 잃은 곳이 많았고, 새로 만든 표지판만 어색하게 선명했다.

존 스타인벡이 ‘The Mother Road’로 명명한 Route66은 시카고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까지 2,200마일(3,500)에 이르는 동부와 서부를 잇는 동맥으로서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한 도로였다. Route661925국가 고속도로 시스템 구축 계획이 발표된 이후, 각 주정부에 의해 건설되었고, 1940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노이 주-미주리 주-캔자스 주-오클라호마 주-텍사스 주-뉴멕시코 주-애리조나 주-캘리포니아 주를 이어준 Route66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나던 절박한 길이었고, 2차 세계 대전에는 전장으로 가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의무와 명분의 길이었으며, 전후에는 자동차와 함께 개인의 자유를 구가하던 낭만의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의 역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건너던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낡은 도로가 되어 갔고, 마침내 1985년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Route66은 도로건설 기술이 현재와 같이 발전하기 이전에 건설된 도로였고, 주정부가 건설하다보니 도로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주요 도시의 중심도로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횡단도로로서의 효율성 면에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건널 수 없었고,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의 고속도로들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워버린 Route66을 살려낸 것이 존 라세터(John Lasseter)의 애니메이션 <>(Cars, 2006)였다. <>Route66의 어느 한 마을인 듯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단지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 말고도 삶에는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성취, 효율, 속도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삶에 대비하여 과정, 즐거움, 여유로 상징되던 Route66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기 위하여 존 라세터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가 <Cars>의 제작 동기에 대한 언급이 눈에 뜨였다. 2001년 존 라세터의 아내는 가족 여행을 제안하며 가족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자라 우리를 떠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족의 소중한 부분을 영영 잃고 말 것이라고 했단다. 그 말은 마치 내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내와 존 라세터의 아내가 서로 통화하는 사이도 아닐 터이고 보면,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나보다. 아내의 그 말을 들은 존 라세터는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는가?”라며, 가족들과 두 달 동안의 트레일러 여행을 떠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Cars>를 제작했단다.

아마 그때였으리라, 연구년을 미국으로 간다면 반드시 가족들과 Route66을 함께 여행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횡단여행이 시작되었다. 21일 동안 오롯이 가족들과 함께 달려가야 할 즐거운 여정이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서로의 모습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는 느슨한 기대를 품어본다.

Route66은 이제 다른 도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끊어져 있다. I-40표지판 옆에 Route66이 함께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표지를 따라 내려서면 쇠락한 마을이거나 끊어진 길의 어디쯤이다. 시대적 효용을 잃는 것들의 쓸쓸한 모습과 같다.

Route66은 달리던 그 시간에 멈추어 있었다. 멈춘 시간을 멈춘 그대로 두었다면 그 시간은 차라리 나름대로 흐를 수 있지 않았을까? 멈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색칠하려다 보니 그것은 추억 없는 기억이 되거나 아주 천박하게 화려해진 슬픔이 되고 말았다. 길은 사라지고 도로표지만 살아서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싸구려 기념품으로는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의 Route66이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 길과 같은 시대를 달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가뭇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쟁, 효율, 성취라는 목표지향적인 삶의 속도는 협력, 여유, 과정의 미덕을 야유할 뿐이었다. 그 야유 속에서 소중한 것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거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존 라세터가 <>에서 그리워하며 복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낡은 도로의 추억이 아니라 그곳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아니었을까? 낡은 Route66은 그렇게 길 아래로 나란히 달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Route66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곳곳에서 내려서 달려보았지만, 길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정쩡한 시제로 바람에 날릴 뿐이었다. Route66 옆으로 달리는 I-40은 지평선이 이끌고 있었다. 길은 높낮이와 곱고 굽음의 차이가 있을 뿐 집요하게 지평선을 향해 있었고, 지평선은 끝 모를 하늘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서부쪽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지평선을 보고 달려간다. 지평선을 이끄는 것은 늘 하늘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멀어질수록 사막과 스텝의 중간지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따금 마을들이 달려왔지만 빠르게 뒤로 달아날 뿐이었다. 몇 시간을 줄곧 앞으로만 달리는 길이니 사만다는 긴 침묵에 빠져 들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아이들은 차가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 각자의 취향대로 잠이 들었다. 자기는 음악을 틀어야 한다며 아내 대신 굳이 조수석에 앉은 유진이는 의자를 잔뜩 눕힌 채 다리를 대쉬보드에 올리고 목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고, 효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물론 강한 햇빛은 햇빛 가리개로 모두 가리고,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온 간식을 배불리 먹은 뒤의 일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이 아까워 밖을 보라고 깨우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살아가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엄마 무릎 베고 따듯하게 잠들 날이 또 앞으로 몇 날이나 될 것인가? 그래 많은 것을 보는 것만 여행의 풍미겠는가? 자기 취향대로 느끼고 가져가 두고두고 따듯해할 수 있는 기억을 일구는 일이 여행의 기쁨 아니겠는가? 여행준비로 피곤했던 아내도 졸릴 것이 분명한데 운전하는 내가 졸까봐 룸미러로 나를 훔쳐보며 계속 이야기를 걸고 있었다. 서너 시간쯤 달린 후, 유진이가 깨서 음악을 틀자 안심이 되었는지 아내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부 쪽 고속도로[각주:4]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길에 올라서고 내려서는 일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굳이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 진출입로 주변에 음식점, 주유소, 숙박시설을 표시해둘 뿐이다. 물론 고속도로 위에 아주 드물게 쉼터(Rest Area)를 두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간격이 너무 멀고, 화장실과 피크닉이 가능한 식탁 정도가 놓여 있을 뿐이니 한국식 휴게소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유료도로(Pike, Turnpike)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식 휴게소와 비교적 유사한 휴게소들이 고속도로 위에 있다.

캐나다 마트의 전경이다. 주유소와 마트가 결합된 미국의 전형적인 주유소이다. 건물을 압도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주던 곳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에서 깬 것은 다섯 시간 넘게 달리고 주유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 킹맨(Kingman)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섰을 때였다. ‘캐나다 마트라는 생뚱맞은 이름의 작고 낡은 마트는 주유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은 휘발유 가격이 1갤런에 3.38달러로 얼바인에서 가장 싸다는 코스트코 주유소의 3.67달러에 비해 29센트나 저렴했다. 그깟 29센트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횡단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금액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12갤런을 주유했으니 3.48달러를 아낀 것이다. 빠듯한 여행 경비도 절약해야 했지만, 동부의 대도시로 가면 이곳에서 아낀 기름 값만큼 혹은 그 이상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주유소와 편의점을 함께 운영하며, 화장실은 편의점 안에 있기 때문에 주유를 하고서는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속도로 위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으니 주유할 때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 ‘캐나다 마트라는 곳은 일반 관광객보다는 트럭기사들이 주 이용객들인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에는 독립적인 샤워부스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장실 시설은 오히려 아주 소박했다. 마트 안팎으로 Route66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관련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소박한 수준의 Route66 기념품뿐이었다.

킹맨에서 세도나(Sedona)까지는 세 시간쯤의 거리였다. 잠에서 깬 아내와 아이는 이번 여행의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미리 조사해둔 몇몇 곳을 꼭 들러줄 것을 요구했고, 효진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보스턴과 워싱턴의 몇몇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대면서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뉴욕을 가장 많이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구체적인 어떤 곳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동안 만나게 될 풍경들과 차 안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말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여행 출발 전에 약속했던 여행의 기록을 각자 어떤 식으로든 남기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신혼여행부터 꼼꼼하게 기록해왔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아내는 첫 여행부터 냉장고 자석을 모으고 있었고, 유진이는 엽서와 각종 팸플릿들을 모아왔는데 이번에는 효진이도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방신기의 노래를 몇 번쯤 듣는 사이 표지판은 세도나 인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를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눈이 먼저 현혹되고 만다. 사만다의 안내가 없었음에도 플래그스태프 표지판을 보자마자 차는 벌써 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사만다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미웠는지 잠시 먹통이 되었다가 플래그스태프를 한 바퀴 돌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자 정신을 차렸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길을 몇 번 놓친 끝에 Arizona 89A를 만나서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Midgley Bridge의 전경이다. 아래로 트레킹 코스가 위험스런 유혹을 하지만 위로는 평온한 다리일 뿐이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에 들어서자 이미 붉은색의 강한 기운이 산과 절벽들로 이어진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날씨 탓인지 먹구름이 몰려들어 석양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사나운 표정이었다. 달려드는 풍경에 이끌려 몇 번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세웠다. 갓길이라기에는 너무 협소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풍경이 잡히질 않았다. 광각렌즈로 바꾸어 보았지만 렌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이 될 만한 뷰 포인트는 모두 유료화 되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온전히 풍경을 담을 수 없었다. 트레킹을 하며 풍경 안으로 좀 더 들어가야 얻고 싶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날은 흐리고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오크 크릭 캐니언에서 세도나로 들어서는 길에 미즐리 브리지(Midgley Bridge)를 만났다. 평소에는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두세 대만 주차해 있었고 그마저도 금방 떠났다. 미즐리 브리지 옆으로 몇 개의 트레일(trail)이 지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즐리 브리지는 윌슨 캐니언(Wilson Canyon)과 오크 크릭 캐니언을 이어주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막상 두 캐니언을 바라보니 이름과 구분은 그저 인간의 몫일뿐이었다.

미즐리 브리지를 넘어서 얼마가지 않으니 업타운 세도나(Uptown Sedona)였다. 먼저 안내 센터에 들러야 했지만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가까웠고, 이미 490마일(784km)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숙소 직원이 붉은 펜으로 설명해준 세도나 지도

숙소로 잡은 스카이 렌치 랏지(Sky Ranch Lodge)는 업타운 세도나를 지나서 산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세도나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숙소 앞에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는 세도나의 대표적인 볼텍스 (Vortex) 지점 중의 하나라는데 내게는 그보다 노을이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노을을 기대하고 부지런히 달려갔지만 간간이 비가 내리고 이미 너무 어두워졌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밤이 내리는 세도나의 풍경만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세도나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기부를 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일본어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환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황급하게 차로 돌아와야 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세도나 안내지도를 부탁하니 약간 여성스러운 남자 직원이 친절하게 붉은 펜으로 표시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멕시코 풍의 숙소는 정성들여 가꾼 정원과 신경 쓴 소품들로 낡은 느낌이 오히려 멋스러웠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저녁 준비를 했다. 딱히 근처에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온 햇반과 즉석 카레 그리고 컵라면을 준비했다. 햇반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즉석 카레는 물 끓이는 기구로 데우고, 물을 따로 끓여 컵라면에 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와 물 끓이는 기구의 코드를 꽂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면서 물을 끓이려하니 과부하가 걸려서 퓨즈가 나간 것이다.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즉시 사람을 보내주어 바로 고쳤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리니 전기가 또 나갔다. 이번에는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니 사람을 또 보내주어 불은 들어왔지만 전자레인지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방안에 불도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끄고 전자레인지만 돌리니 돌아갔다. 햇반과 카레를 데우고, 컵라면 물을 끓여서 간신히 저녁을 먹었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달려온 거리에 비해서는 모두 활력이 넘쳤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씻게 하고, 찍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내려서 정리를 했다. 페이스북에 간단한 경과를 올리고, 내일 일정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볼 것을 선택해야했고, 보아야할 곳의 동선을 잘 짜야했다. 아이들은 첫날의 흥분 때문인지 낮에 차에서 잤던 탓인지 여행 일기를 적고나서도 한참을 떠들다 자정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오늘은 I-40Route66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달리고 또 달려왔다. 출발할 때는 낯설었던 차가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일 년 동안의 연구년은 조금 긴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분명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은 여행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횡단 여행은 미국에서의 일 년 여행 중에 떠난 또 다른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아침에 인수한 차처럼 이제 조금 익숙해졌을 뿐인데, 무엇을 찾아 무모하게 횡단을 감행하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 년 간 미국으로의 여행이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잃어버린 것,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듯, 횡단여행을 통해 낯선 공간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볼 뿐이다. 내일은 세도나를 보고 앨버커키(Albuquerque)로 달릴 것이다. 늘 밤은 낮보다 시간이 더디 흐른다.

 

  1.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소나타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Hertz에는 소나타가 없었다. 렌터카를 예약하는 사이트에서는 풀 사이즈 카 급의 차로 Chevrolet Impala급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어떤 차가 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문으로]
  2.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신나게 읽었던 소설이다. 아이들끼리 무인도에서 2년 간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내가 열여섯 번째 소년이 되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3. 21일 간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우편물 등을 옆집의 이 교수님 댁에 부탁을 하고 떠나야했다. 이 교수님은 나처럼 UCI에 교환교수로 나와 계셨고, 우리처럼 딸 둘이 있어서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했다. 이 교수님 댁과는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편물도 우편물이었지만 집을 떠나면서 돌아올 곳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푸근함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한 면적의 100쯤에 달하는 미국의 동맥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프리웨이(free way)라고 부르는 자동차 도로들이다. 처음에는 서부 고속도로가 무료이기 때문에 프리웨이인 줄 알았는데, 미국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로라는 의미에서 프리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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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817일 워싱턴얼바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여행은 늘 돌아가기 위한 떠남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없다. 떠나지 못해 조바심치고 안타까워하다가 막상 떠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돌아올 날을 꼽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어쩌면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의 설렘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익숙한 곳에 놓아두고 자신의 일상을 문득 정지시켜 놓고 떠나서 낯선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서성이다가 그 안에서 자신을 꺼내어 돌아오는 여행은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여행에서 돌아가는 길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정지시켜 놓았던 일상은 정확히 정지된 만큼 더 분주해질 것이고, 사용된 여행비용만큼 궁핍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빽빽하게 채우고 싶어 했다.

아침식사를 포기하고 모두들 1시간쯤 더 자기로 했다. 1시간 더 잔다고 피곤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편안했다. 오늘은 미국 역사박물관을 3시까지 보고,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를 탈 계획이다. 어제 저녁을 먹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에서 남겨온 머핀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여행을 마치기 전날이라고 어제 저녁은 제대로 먹기로 했는데, 마침 필라델피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페이머스 데이브스가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어서 그곳에 간 것이다. 지난번에 아쉬워했던 콤보를 시켜서 넉넉히 먹으면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고, 서로를 축하했다. 배불리 먹고 났는데도 닭 한 마리 반 정도와 머핀이 많이 남았다. 아내가 너무 많을 것이라고 시키지 말라는 것을 남으면 내가 먹는다고 우겨서 시켰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돌아오는 내내 아내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아침은 머핀으로 해결하지 않았는가?

워싱턴은 매일매일 더 혼잡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주차할 곳이 없었다. 동전주차기가 설치된 곳은 모두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내셔널 몰 주변의 관공서가 몰려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아침 10시까지는 교통 혼잡과 청소 때문에 주차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1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빈 곳이 없었다. 주차할 곳을 찾아서 몇 바퀴를 돌고나서야 차를 빼는 한 곳을 발견하고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앞으로 들어와 주차를 했다. 화가 나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차에서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내렸다. 어쩌겠는가, 힘드셔서 그랬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 역사박물관에서 10분쯤 걸어야 하는 곳에 가까스로 주차를 했다.

이곳도 어제처럼 2시간 한정 주차라서 중간에 한번 다시 나와서 차를 옮기거나 주차를 연장해야 했다. 거리에 서 있는 동전주차기는 오래된 것은 동전만 받지만, 신형은 동전과 카드를 모두 받는다. 25센트 동전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카드가 편하다. 2시간 한정 주차의 경우에는 2시간 이상 입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2시간 후에 나와서 다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연장하는데 동일 카드는 연장이 되지를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니 결제가 된다. 동일인의 동일카드를 인식할 줄 아는 주차기가 동일인의 카드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결제가 되는 것을 보면 조삼모사였다. 내셔널 몰에 그 많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주차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설사 주차를 했다고 해도 2시간 안에 박물관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두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말일 텐데, 우리 같이 숙소가 시외에 있는 여행객들은 어쩌란 말인지 궁금했다.

내셔널 몰 주변의 스미스소니언 국립박물관들 지도

미국 역사박물관은 워싱턴 기념탑 쪽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국립미술관의 동관과 서관을 지나서 가야했다. 새로운 길로 가보자고 국립미술관 앞쪽이 아닌 뒤쪽으로 가다보니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날도 많이 더웠다. 걸어가다가 지칠 판이었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 국립미술관 조각정원(National Gallery of Art Sculpture Garden)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록시 페인의 ‘Graft’

알렉산더 칼더의 ‘Red Horse’

루이스 브루주아의 ‘spider’

호안 미로의 ‘Gothic personage, Bird-Flash’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House1’

클래스 올랜버그와 쿠제 반 브루겐의 ‘Typewriter Eraser,

그저 거리를 줄이려고 들어선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은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1991년에 개관했다는 이곳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17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문과 문 사이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저녁에는 음악공연이 펼쳐지고, 겨울에는 이곳을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분수 주변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분수대 옆의 카페테리아에서는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팔고 있었다. 카페테리아 앞쪽으로 록시 페인(Roxy Paine)‘Graft’이 서 있었다. ‘Graft’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나무였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느낌과 앙상한 가지에서 견고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 주변으로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House1’,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Red Horse’, 호안 미로(Joan Miro)‘Gothic personage, Bird-Flash’, 클래스 올랜버그(Claes Oldenburg)와 쿠제 반 브루겐(Coosje van Bruggen)‘Typewriter Eraser, Scale X’, 루이스 브루주아(Louise Bourgeois)‘spider’등이 있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spider’는 롯본기 힐스에서 보았던 ‘maman’과 비슷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이 거미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maman'은 말 그대로 어머니의 이미지와 연관된 것이다. ‘maman'은 유년기의 두려움과 상관된 어머니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었고, 이 작품은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물적인 존재로서의 거미와 상관된 것이었다.

작품의 규모나 대담함에 압도되어 이러저런 시점에서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진은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한 촬영기술 때문이겠지만, 정지된 시간 외에는 현재의 다른 무엇도 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분수에 발을 담그거나 그 주변의 그늘에 담요를 깔고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작품 속으로 일상이 들어간 것인지, 일상 속으로 작품이 들어온 것인지도 몰라도, 부러운 여유와 풍요였다.

미국역사박물관 입구에서 만난 어린 아이들() 이름표를 등 쪽으로 달았다

사진을 찍다보니 조각정원 뒤쪽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멋스러운 건물이 들어왔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는 독립선언서 같은 국가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National Treasure, 2004)에 등장했다고 하니 아이들도 그제야 관심을 갖는다.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을 나와서 미국 역사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앞쪽에 견학을 온 것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귀여웠다. 손에는 흙장난할 때 쓰는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하나같이 이름표는 등 뒤에다 달았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솔하는 선생님이 뒤에서 아이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이름표를 등 쪽에 달고 친구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미국의 다락방(the nation attic)이라고도 불린다는 미국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은 미국 생활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가까운 과거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일상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들이 중심이라서 훨씬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대통령, 전쟁, 오락, 인종문제, 교통수단 등등의 테마별로 설명보다는 즉물적인 제시가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 층의 규모가 대단히 컸지만 테마를 따라 돌다보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었다.

세사미 스트리트 초기 인형들

마이클 잭슨 모자

도로시의 구두, 세사미 스트리트, 피너츠의 초기 버전, 마이클 잭슨 모자, 알리의 권투 장갑, 루게릭의 야구공 등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전시는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국 역사박물관 안에 전시된 대중문화 전시가 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유독 미국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흑인대학생들이 백인전용 좌석에 앉음으로써 분리주의에 항의했던 그린스보로의 가게 의자

흑인노예 등에 채찍 상처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에 설치된 네 개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흑인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식당 의자를 전시한 것이다. 1960년 그린스보로의 한 식당에서 백인들만 앉게 되어 있는 의자에 흑인 대학생 네 명이 앉자 주인은 나갈 것을 요구하며 음식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은 27, 그 다음날은 300, 그 다음날은 백인을 포함한 1,000명이 함께 찾아와 백인전용 의자의 부당함에 항의함으로써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연좌운동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미 1955몽고메리 승차거부 운동으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각주:1]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저항이 시작된 상태에서, 그린스보로의 이 사건을 통하여 흑백분리의 부당성과 심각성을 전국적으로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1960년도까지 미국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미국이 아니던가? 이러한 뿌리 깊은 흑백차별 문제는 단지 미국 사회의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득권층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미국 내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이며, 더 나아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굴복해야하는 약소국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이기도 하다.

야만은 과거의 수사가 아니다. 다만 노골적인 것들이 은밀하고 합법적인 형태로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합법과 합리로 정당화되는 미국의 질서 이면에는 기득권층의 일방주의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미국의 기득권층이 백인 기독교도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가 가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캠프에서 쓰던 식기 키트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던 추첨통

이곳에서는 자유를 위한 대가로 불리는 미국의 전쟁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상당한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독립전쟁부터 최근 이라크전까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미국중심의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당시에 화려한 군복과 투박하지만 잘 벼려진 무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며 워싱턴 캠프에서 사용했었다는 식사용 키트는 캠핑세트처럼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부상당한 병사의 팔을 절단하는 모습은 처절했다.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는 추첨에 사용했다는 추첨통이나 매일 지급되었던 반 컵의 럼주[각주:2] 등은 참전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부터는 자유와 평화라는 명분의 정당화와 전시동원 체제 내에서 여성의 참여 독려[각주:3] 그리고 평화수호자로서 미국의 위치와 전력의 우위 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Route66과 관련하여 이동수단, 이주 과정 및 고난, 도로망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아이들은 자기들이 달려본 길이라고 무척 재미있어했다. Route66은 서부로의 확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자연재해로 농토를 잃고 농장노동자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고난의 여정이었고, 세계 대전과 한국전 등에 참전하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길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Route66은 미국의 근현대사의 영욕을 증거하는 길이다.

미국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초기 캘리포니아 농장의 값싼 노동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어려웠던 시기를 막연하게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서부유럽인들의 이민으로 탄생한 미국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등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제한을 합법화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1929년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1880년대 인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출신국별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였다. 기득권을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이민법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중국인 이민자들이었다.

값싼 중국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의 청원이라는 명분 아래 서부유럽계 백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미국 전체 국민총생산의 30%를 담당하고, 전 세계 제조업의 20%를 담당한다는 캘리포니아의 저력은 그러한 이민자들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문화라는 말에 자유와 평등이 함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거나 낭만적인 믿음임에 틀림없다.

미국 역사박물관은 넓고 크긴 했지만 미술관이나 다른 박물관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짐을 부치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에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금 빨리 공항으로 출발했다.

유료 가트

기내에 가지고 탔던 누추한 여행의 흔적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국제공항(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에 기름을 넣을까 하다가 아침에 주유를 한 터라 괜찮을 듯싶어서 그대로 가져다주었다. 뉴욕에서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48달러나 더 내야했었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이 정도면 됐단다. 그동안 차에 싣고 있던 짐들을 꺼내 놓으니 의외로 많았다. 어제 저녁에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많았다. 우리가 예약한 저가항공의 경우에는 트렁크 하나당 20달러의 요금을 받아서 40달러의 추가요금을 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내 캐리어는 그냥 가지고 타도 될 뻔 했는데 저가항공은 처음이라서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예상했던 금액보다는 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작은 짐들은 가족들이 나누어 들기로 했지만 그래도 적은 양은 아니었다. 그래서 탑승 전까지는 가트에 모두 싣기로 했는데 가트가 3달러를 내야 이용을 할 수 있었다. 3달러를 지불하면 가트를 뺄 수 있었는데, 나중에 반납하면 25센트만 돌려주는 아주 야박한 인심이었다. 왜 인천공항이 세계 1위 공항으로 매년 선정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는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저녁을 주지 않는단다. 그래서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것을 시켰는데, 착한 가격에 제법 그럴 듯한 음식이 나왔다. 오늘 제대로 된 식사는 처음이었다. 모두들 돌아간다는 설렘에 배고픈 줄도 몰랐나보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사실 고민을 했었다. 저가항공이 가격은 저렴한데 한 번도 타보지 않아서 어떨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 국내선 저가항공의 수준이나 서비스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기내식이나 기타 없어도 될 서비스만 빠진 것이라기에 예약을 했다. 이왕 저가항공을 탔으니 조금 더 불편을 감수하고 예산을 줄이자는 생각에 덴버에서 한 번 갈아타는 조건으로 가장 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여행 관련 예매는 수시로 제공되는 핫딜(hot deal)을 제외하고는 미리 할수록 저렴하다. 운 좋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핫딜이 제공되면 가장 좋지만 원하는 날에 좌석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예약을 한 것이다. 더구나 숙소일 경우에는 핫딜이 뜨면 환불하고 그것을 예약하면 되는데, 항공권의 경우에는 환불 수수료가 붙기 때문에 그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상당히 저렴하게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덴버에서 갈아타는 것을 포함해서 4시간 30분 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동부와 서부가 3시간의 시차가 있으니까 7시간 30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산타 아나 공항에 10시쯤 도착해서 짐 찾으면서도 택시가 없을까봐서 아내는 계속 걱정을 했다. 아내가 들은 정보로는 이곳에서는 밤늦게는 공항택시가 없단다. 그래서 노심초사했는데 마침 우리가 탄 것이 마지막 비행기 전이라 택시가 있었다. 사실 택시가 끊기면 아는 분들께 픽업을 부탁해야 하는데 서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알려주고, 우리끼리 우리말로 택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도 한국 사람이란다. 우리는 기사분이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우리말이 그리웠는지 기사분은 이것저것 물었다. 3주간의 횡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비용이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걱정해준다. 이번 횡단 여행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우려가 있었지만 비용을 걱정해준 사람은 기사분이 처음이었다. 사실 여행은 아주 철저한 현실이 아니던가? 먹고 자고 보는 모든 것들이 아주 규칙적으로 비용을 요구하고, 일단 시작하면 돌아올 때까지 그 요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여행이 아니던가? 아마도 기사분의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묻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이민사를 들려준다. 이민 와서 부지런히 생활하고 돈을 모았던 이야기며,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까지그래도 지금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집이었다.

한국 기사 아저씨 덕분에 편안하게 집에 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집이 너무 낯설지만 편안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족들 모두 약간은 흥분상태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 아내와 나는 큰 짐을 정리했다. 엄청난 빨래와 여행 중 구입한 기념품 등을 정리했다. 여행을 떠나면서 걱정하실까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떠났었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를 드리고 씻었다. 씻고 나니 그제야 집이라고 피로가 몰려왔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이곳을 한 번도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편안하고 푸근한 것을 보면, 이곳이 이제 내게 집이 되어가고 있나보다. 떠나보아야지만 자기가 있는 곳을 안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3주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달려온 4,359마일(7,015)[각주:4]의 거리나 7,758달러의 비용이 만만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경유하는 도시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남루해지고 피곤해졌지만 그것을 이유로 내려서거나 돌아올 수는 없었다. 오로지 앞으로 가야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다. 3주 동안 1만장 넘는 사진을 찍고, 대형 바인더 두 개 분량의 자료를 모으고, A4 50장 분량의 빽빽한 메모를 적었지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련하다.

3주간 신고 다닌 크록스

크록스 구멍 부위가 탄 발등

미국 횡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부터 일상 속에서 반추하며 지속적으로 구성해나갈 부분인지도 모른다. 이제 휘발성 강한 기억을 노트 위에 기록해야 할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겸허하게 되비추어야 할 것이다. 여행 내내 길을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길이 날 데려왔음을 깨닫는다. 결국 여행에서 만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같이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늘 집으로 돌아오나 보다.

2011년 여름은 뜨거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는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길이 데려다 놓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모든 것을 놓고 떠날 길을 생각한다. 다가올 날들에는 떠나고 돌아오는 길이 더 멀고 길어져서 나를 좀 더 깊고 온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풀어놓은 남루한 짐들을 빨고 기워서 언제든 다시 꾸리고 떠날 수 있도록 내 안에 설렘이 더욱 강성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움은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그리움을 만든다.

 

  1. 짐 크로 법(1876-1965)은 학교, 버스, 공원, 병원, 식당, 감옥, 식수대 등의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이다. 이 법은 모든 공공기관에서 흑백의 분리를 의무화했으며, 1896년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즉 ‘분리되어 있으되 평등하다’는 기만적인 흑백분리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 법으로 인하여 흑인들은 공공기관에서 모멸스러운 불평등을 감내해야했다. 짐 크로(Jim Crow)라는 말은 “니그로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으며 가난과 어리석음의 대명사”(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325)였다. [본문으로]
  2.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적인 술이었던 럼주는 17세기 근대화된 군대가 등장하면서부터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하루에 지급되는 양은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취기를 느낄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전시에 공장 등으로 불려나왔던 여성들은 종전과 함께 귀환한 남성들과 일자리 경쟁이 불가피했다. 남성들의 일자리 보장을 위해서 종전 후에는 여성들을 일터라는 공적공간에서 불러내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다양한 여성상과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다. [본문으로]
  4. 인천공항에서 LA공항까지가 9,637㎞니 횡단여행 동안 달린 거리가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음을 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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