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순결과 산문의 휘황함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훈은 깡마른 샤먼이다. 시리도록 파랗게 벼린 언어의 작두 위에서 그는 뛰어 오르고 올라간 거리만큼 내려서며 굿을 벌인다. 은유의 아름다움과 현상학적 환원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레토릭은 완과 급을 조절하며 읽는 이를 몰아쳐간다. 그의 단호한 어조는 문장의 단단한 뼈가되고 힘 있는 근육이 되어 신화 속의 사내들을 불러내곤 한다. 그러면 그의 글은 지금 이곳의 사내들이 잃고 있는 억센 완력과 뜨거운 생명력으로 난장이 되고 만다. 그 난장의 생명은 산문의 휘황함으로 빛나는데, 그 빛의 중심에 깡마른 샤먼 김훈이 있다.
산문이 살아 있는 시대는 아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다. 산문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과 팽팽한 긴장으로 자신의 몫을 지켜가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가장 뼈아픈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산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성의 사유나 세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정신을 글에서 잃었다. 그러한 산문이 김훈의 글쓰기를 통하여 복원되고 있다.
김훈의 글쓰기는 특정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종과 횡으로 달린다.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미학적인 혜안이 빛나던 문학평론은 물론 두 개의 은륜 사이를 달리며 몸으로 써내려간 여행 산문과 현실에 대한 물러서지 않는 정신을 촌철살인의 언설로 일구어낸 세설(世說) 그리고 남성서사의 예를 보여주는 소설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지난 겨울부터 필자의 책상에 두고 보는 것이 《자전거 여행》과 《칼의 노래》그리고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이다. 세 권 모두 김훈 산문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특히 《칼의 노래》는 신열을 앓듯이 읽히는 작품이다.
김훈의《칼의 노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즐길 수 있다. 하나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내면을 엿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훈의 산문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칼의 노래》는 이광수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나 박정희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탐색하고 있다. 이순신을 이용한 민족주의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 재생산은 지금도 정치권력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중대 결심을 앞두고 현충사를 방문하거나, 서울의 핵심부인 세종로를 압도하고 있는 이순신의 동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신화화가 인간 이순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그 결과 그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할지는 몰라도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 만날 수는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칼의 노래》는 탁월하다. 백의종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왕과 권력층의 견제에 의한 억울한 옥살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장으로 향해야하는 아들의 슬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거대한 적의 수군과 맞서야하는 절망감, 부하들을 먹이지 못하는 지휘관의 무력감, 온 천지에 널린 주검과 굶주림과 적의 칼날 사이에서 대면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이순신을 작가는 복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와 시적이면서도 단호한 작가의 호흡을 통해 읽는 이를 굶주림과 피비린내가 주검으로 넘실대는 남해의 전장을 끌고 들어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의 노래》의 또 다른 미덕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그토록 끔직하고 섬뜩한 현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미학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산문 곳곳에서 보이던 향기롭고 찬란한 통찰들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을 얻고, 이순신의 사적(史籍)으로 뼈대를 세워 살아난 것이 바로 《칼의 노래》인 것이다.
《칼의 노래》로 이순신은 자유로워졌다. 독재자의 지배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역사속의 인물로 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김훈의 산문정신을 통해서였다. 오늘 우린 《칼의 노래》에서 단순하고 순결했던 한 무장의 칼과 단호하고 꼿꼿한 한 산문가의 고뇌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창원대신문>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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