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순결과 산문의 휘황함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훈은 깡마른 샤먼이다. 시리도록 파랗게 벼린 언어의 작두 위에서 그는 뛰어 오르고 올라간 거리만큼 내려서며 굿을 벌인다. 은유의 아름다움과 현상학적 환원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레토릭은 완과 급을 조절하며 읽는 이를 몰아쳐간다. 그의 단호한 어조는 문장의 단단한 뼈가되고 힘 있는 근육이 되어 신화 속의 사내들을 불러내곤 한다. 그러면 그의 글은 지금 이곳의 사내들이 잃고 있는 억센 완력과 뜨거운 생명력으로 난장이 되고 만다. 그 난장의 생명은 산문의 휘황함으로 빛나는데, 그 빛의 중심에 깡마른 샤먼 김훈이 있다.


산문이 살아 있는 시대는 아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다. 산문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과 팽팽한 긴장으로 자신의 몫을 지켜가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가장 뼈아픈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산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성의 사유나 세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정신을 글에서 잃었다. 그러한 산문이 김훈의 글쓰기를 통하여 복원되고 있다.

김훈의 글쓰기는 특정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종과 횡으로 달린다.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미학적인 혜안이 빛나던 문학평론은 물론 두 개의 은륜 사이를 달리며 몸으로 써내려간 여행 산문과 현실에 대한 물러서지 않는 정신을 촌철살인의 언설로 일구어낸 세설(世說) 그리고 남성서사의 예를 보여주는 소설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지난 겨울부터 필자의 책상에 두고 보는 것이 자전거 여행칼의 노래그리고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이다. 세 권 모두 김훈 산문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특히 칼의 노래는 신열을 앓듯이 읽히는 작품이다.

김훈의칼의 노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즐길 수 있다. 하나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내면을 엿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훈의 산문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칼의 노래는 이광수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나 박정희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탐색하고 있다. 이순신을 이용한 민족주의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 재생산은 지금도 정치권력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중대 결심을 앞두고 현충사를 방문하거나, 서울의 핵심부인 세종로를 압도하고 있는 이순신의 동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신화화가 인간 이순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그 결과 그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할지는 몰라도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 만날 수는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칼의 노래는 탁월하다. 백의종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왕과 권력층의 견제에 의한 억울한 옥살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장으로 향해야하는 아들의 슬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거대한 적의 수군과 맞서야하는 절망감, 부하들을 먹이지 못하는 지휘관의 무력감, 온 천지에 널린 주검과 굶주림과 적의 칼날 사이에서 대면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이순신을 작가는 복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와 시적이면서도 단호한 작가의 호흡을 통해 읽는 이를 굶주림과 피비린내가 주검으로 넘실대는 남해의 전장을 끌고 들어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의 노래의 또 다른 미덕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그토록 끔직하고 섬뜩한 현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미학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산문 곳곳에서 보이던 향기롭고 찬란한 통찰들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을 얻고, 이순신의 사적(史籍)으로 뼈대를 세워 살아난 것이 바로 칼의 노래인 것이다.

칼의 노래로 이순신은 자유로워졌다. 독재자의 지배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역사속의 인물로 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김훈의 산문정신을 통해서였다. 오늘 우린 칼의 노래에서 단순하고 순결했던 한 무장의 칼과 단호하고 꼿꼿한 한 산문가의 고뇌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창원대신문> 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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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輪의 길, 산문의

김훈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람이 앞서지 못하는 바퀴와 사람을 앞설 수 없는 바퀴 사이에서 마른 바람을 맞으며 사내가 달린다. 사내는 자신의 자전거를 풍륜(風輪)이라고 부른다. 사내의 풍륜은 세상의 길을 온몸으로 감으며 오르고 감은 길만큼 풀어주며 내려온다. 산이 불러 산까지 데리고 간 길을 내려놓고 어둠을 싣고 데려오고, 어둠을 싣고 가는 날에는 전조등 밝혀 길을 데리고 내려오는 그의 풍륜은 때때로 바다까지 흘러가서 넓고 붉게 물든 노을과 길고 검게 느린 그림자 사이에 서 있곤 한다. 그곳에서 사내는 깊이 밀고 멀리 당기는서해의 관능이나 날카롭고 명징하고 눈부시게일출을 향해 달리는 동해에 이르는 강들의 고단함을 본다. ‘소금이 오는 옥구 염전에서 사내는 짜고 향기로운 소금을 보고, 제 몸을 태워 날아가는 만경강 하구의 도요새에게서 필멸(必滅)의 장엄함을 본다.


사내의 풍륜은 본다’. 흐르면서 본다. 산을 보고 들을 보고 바다와 강을 보며 하늘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척박한 풍요를 수납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생의 시간들을 본다. 사내가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들으면 말하게 되고 말하면 논()하게 되는 까닭이다. 논하면 시비에 매이고 시비에 매이면 떠난 길이 단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길,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밖을 봄으로써 안을 비추고, 안을 비춤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며 깊어지는 이치를 사내의 풍륜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사내의 풍륜은 뒤차를 인도하기 위해 후미 등을 켜고 달리는 것이 아니며 앞차와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전조등을 켜는 것도 아니다. 사내의 코앞을 동그랗게 비추어 선도(先導)해주는 전조등이 사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라면, 빨갛게 불든 후미 등은 지나온 길의 증거다. 그래서 어둠이 내린 길에서 사내의 풍륜은 의지증거사이를 달린다. 하여 사내의 풍륜이 보는 것은 의지와 증거 사이에 머문다.

달리던 바람이 멎고 풍륜이 자는 밤이면 사내는 원고지에 꾹꾹 눌러 손으로 글을 빚는다. 사내는 풍륜 아래서 풍륜 위의 일들을 기록하고 증언한다. 그래서 사내의 글에서 풍륜이 본 것과 사내가 본 것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 거북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나아가는 여수 돌산 향일암에서 서울의 여의도까지 서른 곳이다. 풍륜이 보고 달려온 것들은 사내의 레토릭을 넘지 못하고 사내의 레토릭은 풍륜을 앞서 달리지 않는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 들이나 바다, 그 어느 곳 생의 시간들이 다녀간 자리에는 사연이 길을 만들고 길은 내력을 들려주는데, 그곳은 듣는 이가 없어 적막하다. 적막이 만드는 깊이 마다 시간이 고이고 고인 시간에는 사내가 데려간 속기(俗氣)가 부끄럽게 낯을 씻는다. 씻은 낯을 바람에 말리며 사내의 풍륜은 먼지 낀 세상으로 내려오고, 내려온 거리만큼 다시 안개 낀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사내의 병은 불치(不治).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은 경이롭다. 우선 상업자본에 의해 공공연하게 압도되어 있는 중요 일간지에서 이와 같은 미학적이고 그래서 별로 쓸모가 없는(?) 글을 서른 회나 연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욱 필자를 경악케 하는 것은 8개월 만에 이 책이 10쇄를 찍어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해리포터처럼 환타지의 몰입 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교양으로 위협하지 않는다.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김훈은 조앤 K 롤링이거나 유홍준이 아니다. 물론 그는 김진명이거나 신경숙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대중적인 흡입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 있는 시퍼렇게 살아서 뛰어오를 것 같은 문장과 삶의 한복판을 꿰뚫는 것 같은 섬뜩한 레토릭에서 그 까닭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나 수사의 힘만으로 이 낯선 책의 흡입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간지에 연재되면서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었고, 최근 큼직큼직한 양서와 베스트셀러를 외줄을 타 듯 잘 내고 있는 출판사 마케팅의 힘이라기에도 무엇인가 모자란다. 어쩌면 자전거 여행의 성공은 산문의 힘, 그 근력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의 부활이었으면 좋겠다.

산문이 살아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소설이 산문 영역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불행한 일이다. 소설은 산문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그것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또 얼마나 자명한가? 소설의 가공할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또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 산문 영역에서 소설의 압도는 다른 형태의 산문들, 즉 곡진한 생활 글이라든가, 날 선 감각의 기행문이라든가, 읽는 이에게 온 마음을 전하는 편지글이라든가, 미더운 주장의 논설이라든가 그 종류는 굳이 한문학의 수다한 종류의 그것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다양한 산문들이 살아야 글이 제 몫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탐구와 모색, 삶의 비의(秘意)를 캐려는 부단한 시도,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 즉 소위 산문정신의 구현을 소설로 국한하는 것은 아무래도 편협하다. 이러한 편협함은 글을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러한 글을 읽는 행위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지적 허영이나 호사스런 기호(嗜好) 정도로 전락시켜 버렸다. 산문이 읽히지 않는데 그보다 행간이 넓은 시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글의 호위를 받지 못하고 걷는 삶의 길들은 얼마나 무모하고 불운한 것이냐?

다시 자전거 기행으로 돌아오자. 이 책이 지닌 몇 가지 중요한 의의는 남성적 글쓰기의 복원, 산문의 현대적 형태 모색, 레토릭을 통한 미적체험의 가능성을 증거하고, 무엇보다 그러한 다양한 시도가 대중성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2001년 동인문학상 작품인 칼의 노래에서도 잘 나타난 바와 같이 김훈 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어법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덕은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는 프롤로그의 시작에서부터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며,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라는 프롤로그의 마지막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숨 막히는 긴장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곳곳에서 왜 길이 도()가 될 수밖에 없는지 시나브로 드러내고 있다. 길은 인간의 것이기에 마을을 떠나 마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그의 인식은 결국 그가 그 길을 끝없이 달려야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는 실존적 차원의 인식과 의지이며,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는 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길에 대한 신뢰는 유한한 삶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대가 적막한 산야와 처연한 풍광사이로 그의 풍륜을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풍륜이 간다. 이 천박하고 척박한 시대에 붉은 먼지를 일으키며 아직은 안개 낀 들과 강과 바다를 달린다. 은빛 바퀴에서는 그의 수사(修辭)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빛나고, 그 빛은 차가운 금속의 그것이 아니라 풍륜이 보고 달리고 있는 산야와 바다의 것이다. 그래서 풍륜의 바퀴는 반사하지 않고 삼투한다. 금속의 삼투, 삼투의 절묘한 균형, 그 중심에 이 책이 놓인다. 원고지 칸칸이 그가 덖고 있는 글에서 피어나는 향은 물 없이도 그 쌉쌀한 맛을 우려낼 것만 같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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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의 지독한 스토리텔링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골프 황제가 섹스머신이 되었다. 골프 황제의 신화를 만들던 대중매체들은 그의 숨겨놓은 여자가 몇 명인지, 라스베가스 VIP룸에서 받았다던 서비스가 무엇인지, 그의 아내가 받게 될 위자료는 얼마인지로 차갑고 단호하게 관심을 돌렸다. 타이거 우즈는 사라지고 그에 관한 스토리텔링만 남았다. 나는 우즈의 일을 통해 일상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이며 환경이란 얼마나 처절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인지혹은 ‘1인자의 고독또는 혼외정사의 비윤리성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이거 우즈의 스캔들이 지독한 스토리텔링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story)+말하기(tell)+향유하기(ing)의 합성어인 스토리텔링은 문화는 물론 사회 전반의 화두다. 스토리텔링의 전면화는 하늘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고갈의식과 뉴미디어의 눈부신 발전에 따른 말하기 방식의 다양화통합화 그리고 감성적 소통과 체험을 전제로 한 재미의 추구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스토리텔링은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우즈의 스캔들은 스토리텔링의 최적화 요소를 지녔다. ‘모범적인 스포츠 스타의 불륜 행각은 스토리로서 뿐만 아니라 기획의 하이컨셉으로서 매우 매력적인 소재다. 골프 황제, 선정적이고 은밀한 직업의 미녀들, 스타의 은밀한 사생활,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 등은 그것을 더욱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고, 수준과 상관없이 전방위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와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내는 매스 미디어의 활약은 가공할만한 즐거움을 생산한다. 그런데 이 지독한 스토리텔링 앞에서 왜 우리는 즐겁지 않은가?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얼마나 향유를 활성화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향유란 향유자가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향유의 대상이 즐길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즈의 이야기는 차라리 두려움이다. 신화가 되길 원했던 신뢰할만한 스포츠 스타의 몰락과 자본 앞에서 이어지는 폭로와 매스컴의 확대재생산 구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는 불신의 흔적들. 그것들은 모두 무엇 하나 즐거울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밥이 되지는 않지만 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스토리텔링은 즐거움이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의 즐거움 향유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하는 체험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더욱 간절한 계절이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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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봄이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올 봄은 참 더디게 온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의 영문 제목처럼 <April Snow>가 내릴 정도니 달력도 무색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성급한 꽃잎은 벌써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학생들의 연구실 방문이 잦다. 스스럼없이 연구실을 찾아오는 제자들이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번 방문은 조금 무겁고 진지하다. 찾아오는 4학년들 의 손에 자기소개서가 창백하게 들려 있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질문의 성격과 요구가 다르다보니 자기들이 써놓은 내용은 선생들에게 점검 받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어 공인점수는 이제 별다른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하는지 어학연수는 필수이고, 국내는 물론 해외봉사 실적까지 은연중에 요구하는 실정이다 보니 학생들은 늘 갖춘 조건보다 갖추어야 할 조건에 늘 쫓기게 된다. 학생이 들고 온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뒤에 잔뜩 붙어 있는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보다가 그의 쫓기듯 달려왔을 대학시절이 문득 안타까워졌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학교에서 과제와 팀 프로젝트로 밤샘을 하면서 집안 사정으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했던 그 학생의 일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안다고 했는데, 외국어 점수와 각종 자격증은 물론 국내외 봉사활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그의 자기소개서에는 정작 보여야할 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도 둘째도 중간고사란다. 첫째는 학원 보강으로 늦은 시간 학원이란다. 연구실에서 들어가면서 데리러 갔더니 아직 수업중이라고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 백화점이 있고 주변에 상가와 의심스러운 술집들이 밀집된 지역에 아이의 학원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부모들이 차 안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11시가 다 되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내려왔다. 아직 중학교 2학년인 아이의 핼쑥한 볼이 안쓰러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에게 부모의 생각대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그 경쟁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면서 내내 복잡했던 것은 늦은 시간 학원 앞 도로만이 아니었다.

끝없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는 대학생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쟁 안에서 갈수록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없는 자기 소개서와 내적 성장 없는 학습으로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제자와 아이에게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과 부모의 조언보다는 아이폰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어플리케이션이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 지금 이곳에서 우린 과연 삶의 봄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봄은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의미고,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변화가 생명의 중심인 것은 지금 이곳의 무엇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다. 그저 지금보다는 내일이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좀더 알 찬 삶을 살아내려는 옹골찬 의지가 변화다. 진정한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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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배려의 아름다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무상급식 문제로 정치권이 뜨겁다. 전면적 무상급식이냐 선별적 무상급식이냐를 놓고 지방선거와 연계하여 정치권은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이해할만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설득과정이 아니라 쌍방 모두 다분히 포퓰리즘적인 선동이라는 의구를 떨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필자는 무엇이 옳다고 판단하거나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솔직하지 못한 논란 속에서 말은 못하지만 심하게 상처받고 있을 아이들에 대한 염려는 떨치기 어렵다.

1970년대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때에는 학기초면 선배들의 교과서를 물려받을 학생들 신청을 받곤 하였다. 교과서 대금이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는데 선뜻 손을 드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 그 수요를 조사하면서 모두들 눈을 감으라고 하시던 장면이다. 손을 드는 아이가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봐 조심하시던 선생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은 아마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서였을 것이다.

언젠가 선배에게 어떻게 아이를 낳아 기르며 박사과정 공부를 할 수 있었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별다른 직업 없이 공부를 하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던 시절, 그 길을 몇 년 먼저 간 선배에게 물은 것이다. 그 선배는 날마다가 기적이었다고 씁쓸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었다. 박사를 마칠 무렵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하루하루가 참 벅찼던 시절, 어느 날인가 은사님께서 차를 가지고 댁으로 오라고 하셨다. 은사님은 당신을 어느 곳까지 태워다달라고 하셨다. 평소 제자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 의아한 일이었다. 그런데 은사님은 가시다말고 대형마트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가트를 두 개 끌고 오라고 하시고는 분유와 기저귀를 두 가트에 가득 담아주셨다. 넉넉하지는 않았도 아이의 분유와 기저귀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물이 핑 돌정도로 감사로 벅차오르던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불안하고 힘겨운 시간을 위로해주시기 위해 일부러 부르시고서는, 제자가 부담을 느낄까봐 당신을 어딘가로 태워다달라고 말씀하시던 은사님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은퇴하시고 나서도 그 해에 가장 연구업적이 뛰어나 제자에게 적지 않은 돈과 족자를 내리시고는 송구스러워할 제자에게 글을 주었으니 글값으로 과일을 사오라고 하시던 선생님. 당신이 200만원을 상금으로 내리시고 그깟 과일값이 없어서 그리 하셨겠는가?

일본에서는 유치원비를 담당 관청으로 내게 한다고 한다. 저소득층의 유치원비를 나라에서 지급하는데, 유치원에서 유치원비를 직접 거두면 누가 저소득층인지 알게 될 터이고, 그것이 혹시라도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금융 위기 이후로 좀처럼 경제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무상급식이 문제 인 것은 무상급식의 대상이 될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배려를 누가 뭐라겠는가? 다만, 그 배려의 과정이 좀 더 은근하고 조심스럽기를 바랄 뿐이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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