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
유디트 바니스텐달,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소멸은 사라지는 자의 몫이고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죽음을 둘러싼 소멸과 상실의 기록이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과 생명으로부터 기원하는 개별성의 이율배반적 긴장 안에 있다. 언제든 함께할 수 있지만 딱 한 번의 체험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막함이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의 몫일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는 한다. 하여 죽음은 늘 함께하지만 한두 걸음 비껴 서있는 듯하고, 현재일 때 유효하지만 과거이거나 미래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죽음의 어김없는 실체와 구체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때론 절절하게, 때론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죽음의 충만한 의미값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미덕의 기반에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미리암, 타마르, 파울라, 다비드의 시점이 있다. 각자의 시선으로 다비드의 죽음을 사유하고 수납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놓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리암과 타마르의 시점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차 대신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롤 제시하고 있다. 다비드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에 그보다 확실한 소멸과 상실의 계보도가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소멸과 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의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진실의 조각들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은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한다기보다는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그것은 죽음을 대면한 삶의 모습이 그러한 까닭이며 삶을 둘러싼 죽음의 진면목이 그러한 까닭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유일한 사실과 삶의 맞은편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려드는 모순된, 그 온통의 확실성으로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자명함. 그 막막하고 두려운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실존의 충만한 진실을 만나게다.
후두암에 걸린 아버지(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과장된 감정으로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어둡게만 그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속 깊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상처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치유나 사랑에 가까워보인다. 후두암 발병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는 미리암과 우연하게 듣게 되는 타마르, 그것을 유머러스하게(아빠한테는 손녀만 중요해. 우리도 소중한 딸이라고요) 표현하는 딸이나 어린 타마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모습(그림1)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죽음을 담담하게 배워가며 수납하는 아홉 살 타마르의 이야기는 동화 같은 발랄함과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친구 맥스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어 살리겠다거나, 풍선에 매달아 편지를 보낸다고 믿거나 인어에게 아빠와 죽음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해주거나, 맥스와 함께 썰매를 끌고 병원에 오는 장면은 이 작품이 죽음으로만 경사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면해야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과도하게 감상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따듯하고 진솔하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죽음에 대한 따듯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시각이 아니라 모두의 시각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그것을 수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슬픔은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죽음이 실체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탓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슬픔은 풍화되지 않고 점점 더 그것이 오롯한 자신만의 몫이며,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할뿐이다. 수납할 수밖에 없음을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절절한 현실, 절박한 현재, 적막한 고독이 된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처연한 시간의 연민과 연민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안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서는 루이즈-타마르-미리암-파울라-다비드를 통해 생애 전주기의 연령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후두암 발병소식과 루이즈의 탄생을 연결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순환으로 영원을, 영원으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누구나의 상수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 맞은편에 있는 삶의 매순간의 소중함, 그 순간을 채워내야할 위로와 사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에 있다.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고, 내면적 깊이와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과감한 생략과 선택, 캐릭터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선과 색의 조화는 자칫 무겁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와 속도를 조절하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분위기나 캐릭터별로 변별되는 색이나 선이라기보다는 개개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에 부합하는 선과 색의 구사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개개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의 조합이 다양한 만큼 선과 색의 구사는 자유롭다. 분명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한 상황과 흐릿하거나 여러 번 덧칠한 듯한 선으로 묘사한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텍스트 전체의 서사적 맥락을 따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장처럼 애니메이션은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는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화의 고유한 문법에 최적화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서다. 일상을 낯선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자동화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만화의 기저에 깔린 예술적 요구라면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 기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림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표현의 다양한 영역이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미학적이다. <그림 3>을 보면 파울라가 다비드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파울라에 두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다비드에게 할애하고, 파울라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다비드의 내레이션은 담백하지만 절절하게 울리게 하는 이러한 묘사는 정서적 울림의 깊이는 물론 공감을 부른다. 아울러 텍스트의 전체를 함께해온 독자들의 슬픔과 우울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토릭인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이 얼마나 경직되고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수납하고 준비할 것이냐가 아닐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단지 슬프거나 두렵지만은 않게 매순간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포개어 위로하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잃고 더 이상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메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다비드의 절절함은 늘 무의미한 말을 숱하게 쏟아내면서도 정작 전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위로의 말들에 닿아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만화 규장각> 201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