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리별, 위로와 치유의 여행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랑은 당신의 얼굴에서 나를 보는 과정이다. 사람은 혼자서 온전히 자신을 볼 수 없는 까닭에 자신과 마음을 나누는 이에게서 자신을 얼굴을 보려고 한다. 둘은 서로 상대의 얼굴에서 자신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좀처럼 자신을 볼 수가 없고 늘 조금씩 어긋한 위치에서 틀어진 각도와 차이를 볼 뿐이다. 하여 사랑은 늘 온전히 제 모습을 비추어주지 않는 당신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다. 그 아쉬움의 안달과 조바심으로 결국 당신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 나는 그 텅 빈 당신의 부재를 앞에 두고 나를 보게 된다.

박영주의 고양이 달은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고양이 달은 감상적인 사랑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희생과 치유의 위로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로서 아리별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머리 셋을 한 몸에 지닌 고양이 아리를 동화적으로 설정하지만 캐릭터의 구도와 서사 전개는 현실의 맥락을 심층에 견고하게 구축해놓고 곳곳에 알레고리를 감추고 있는 까닭에 읽을수록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별을 가지고 있다는 소박한 설정은 그것이 자기 눈 안에 들어 있으며 교감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지점에 이르면 그리 간단한 설정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몸 하나에 각기 다른 머리 셋을 가진 고양이 아리의 설정은 일견 그로테스크해 보이지만 얼마나 짜릿하고 적실한 상상력인가? 노아가 만나는 숱한 캐릭터들이 그려내는 창의적인 세계는 알레고리의 심도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밝은 세계를 보여주는 긴장이 재미있다.

고양이 달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지만 누구도 선뜻 내주지 않는 교감, 소통, 이해, 치유, 위로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렴하고 있다. 동화적인 분위기를 견지하면서도 우화가 되는 것은 거부하고,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알레고리의 심도를 드러내는 이 작품의 다층적인 특성은 사랑의 수다한 부면을 표현하기 위한 최적화 전략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비롯하여 수다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닮은듯하고, 복잡한 구도와 세계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것과 유사한듯하지만 고양이 달만의 아우라(aura)를 갖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익숙한 모티브의 창조적 수용과 낯선 변용을 주제의 심도와 특유의 화법으로 수렴하고 만만치 않은 분량의 유려한 호흡으로 이끌어내는 솜씨는 스토리텔러로서 작가의 역량을 능히 가늠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 달은 또 다른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것은 원천콘텐츠로서 기획되고 창작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 이 작품은 독립적인 출판콘텐츠로서의 가치는 물론 멀티북, 뮤직비디오, OST는 물론 이후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거점콘텐츠로의 장르 전환(adaptation)을 전략적으로 견지하면서 창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장르 전환을 중심으로 한 One Source Multi Use의 매개로서 이 작품의 스토리텔링 전략이 얼마나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할지 자못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기대가 날로 높아지는 지금 이곳에서 독립된 개별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십분 발휘하면서 향후 전개될 장르 전환을 염두에 둔 스토리텔링 그 시도와 결과 모두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달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에 있다. 낯선 세계를 전혀 낯설지 않게 소구해내고,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이야기를 완과 급을 조절하며 풀어내는 작가의 내공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누가 뭐래도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이야기다. 이야기의 근력이 있어야지만 견실한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 전환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 모두, 고양이 달을 아주 천천히 읽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별을 찾고, 자신의 쌍성을 발견하여 우리에게 또 다른 고양이 달을 들려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도 나는 당신의 얼굴에서 조금 비껴서 있다.

박영주의 고양이 달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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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11월이 뜨거워야만 하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12년 우리의 가을은 뜨겁기만 하다. 가을보다 뜨거워질 초겨울의 선택을 준비하고 있는 까닭이다. 대통령제의 공과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당장 코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는 현실임에 분명하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선거라지만 차선의 선택이라고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정책과 공약의 검증이 아닌 진보와 보수라는 낡은 잣대로 가늠하고, 행정수도 이전이나 4대강 사업과 같이 이해와 상관된 공약에 현혹된 선택의 결과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핵심은 그가 누구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시하는 비전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안전하고 건강하며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미래는 결코 현재를 잊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선심성 공약에 현혹되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저 잘못된 선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약의 타당성과 적합성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 책임과 부담의 사업들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곳곳에 있다. 어디 선심성 공약뿐이랴?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파행을 겪는 교육현실이나 퇴행적인 문화정책으로 인하여 척박해진 문화현실은 또 어떤가?

물론 바라기는 5년마다 선출되는 대통령에 의해 사회 전체가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시스템의 구축과 그 시스템의 안정이 절실한 시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당장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결국 각 후보가 내세우는 정책과 공약에 대한 준열한 검증과 판단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는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으면서 정치적 중립성 운운하며 은밀하게 정치색을 드러내는 언론에 기대할 것이 없다면 유권자가 준열하고 영리해져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검토하고 검증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만이라도 꼼꼼하게 살펴보자. 후보가 내세우는 비전이 가장 미래지향적인 것인지, 건강한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인지, 보다 많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인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표현에 따른다면 흐림 없는 눈으로 살펴보고 판단해야만 한다.

대학생이 더 이상 사회변혁의 선도가 아니어도 좋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밤새워 토론하고 아파하는 대학생이 아니어도 좋다. 적어도 무관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당장은 학점과 취업이 발등에 불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나의 무관심이 발등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에 불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불로 인한 상처는 아주 오래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뜬 후 준열한 자세로 살펴보자. 우리는 누구를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가을과 겨울을 뜨겁게 보내야 할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너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한대신문> 20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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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은 답이 아니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날로 치열해져 가는 취업난 속에서 스펙 경쟁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스펙은 specification의 준말이다. 제품 명세, 사양 등의 의미를 지닌 이 말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할 조건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품의 사양이야 그렇다고 쳐도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일괄적인 자격과 조건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펙이라는 말은 취업이 절대선이 되어버린 대학사회에서 이미 더 이상의 회의나 비판을 요구하지 않는 신화화된 단어가 되어 버렸다.

스펙 지상주의의 망령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성적을 기반으로 서열화에 익숙한 입시선발 제도를 비롯하여 글로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기업채용 과정은 물론 공무원 선발과정에 이르기까지 소위 객관성이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무책임하고 안이한 평가 및 선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특성화된 선발 기준 대신 자격증, 어학성적, 봉사 및 인턴십 경력 등을 객관성의 허울 뒤에 숨은 아니한 조건만 요구하는 것이다. 직군과 직능이 다르다면 선발의 기준이나 평가의 잣대 역시 달라져야 하는 것이 이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각 회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따라서 좀더 섬세하고 특성화된 선발 기준과 평가 시스템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스펙 무용론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엇비슷한 스펙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과 필요한 인재를 차별화된 자기들의 기준으로 선발해야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선발기준과 시험을 마련하고, 합숙 면접을 시행하고, 인턴제를 활성화하여 인성 및 업무 수행 능력을 브라인드 상태에서 체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다. 졸업 후의 진로가 오로지 취업뿐이냐는 고민은 일단 접어두자. 취업을 해야 한다면 준비해야할 것은 고만고만한 스펙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껏 열심히 뛰어왔던 당신을 가파른 스펙 경쟁으로 내몰지 마라. 학점과 어학성적을 비롯한 스펙 3종세트니 5종 세트니 하는 소문에 휘둘리지 말자. 물론 당신은 성실하게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과 어학성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제시한 학점과 어학성적을 살펴보라. 정상적으로 대학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넘어설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스펙이 말해주지 않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학은 스펙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스펙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당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내는 곳이다. 당신의 삶이 지향해왔고 앞으로도 지향할 가치는 무엇인가? 지금 취업을 준비하는 당신이라면 먼저 당신의 가치를 고민하라. 그리고 당신의 가치가 스펙을 넘어서서 빛날 수 있게 준비하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갖출 수 있는 스펙은 빛나지 않는 의무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찾고 지속적으로 육화시키려는 노력이다. 그것만이 당신을 빛나게 할 수 있다.

<한대신문>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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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꿈

칼럼로그 2018. 7. 13. 10:40

당신의 꿈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유난히 춥다는 올 겨울, 그 모진 기세에도 불구하고 새해 첫날이 밝았다. 요즘 같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썼던 예전에 새해는 봄과 함께 왔다. 농경이 삶의 기준이었던 그 시절, 새해는 새로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새로운 농사는 새로운 삶이었고 꿈이었다. 그 오랜 반복은 의식하지 못할 영역에 남아서 더 이상 농사가 삶의 중심이거나 음력을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김없는 설렘으로 새해를 열게 한다.

새해 당신이 꿈은 무엇인가? 지난해 못 다했던 계획도 계획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당신의 의욕과 열정을 부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부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대학에서 공부에서 꿈을 찾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새해에는 당신의 꿈이 오롯하게 행복할 수 있는 곳에 모이길 희망한다. 새내기에서부터 졸업을 앞둔 사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에게 물을 일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지, 스스로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이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것인지, 당신과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진지하고 꼼꼼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새해의 꿈이 당신을 설레게 하는 것은 지금 꾸고 있는 당신의 꿈이 오늘보다 행복한 내일을 열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니 그 꿈은 단지 얼마를 벌고 어디서 살고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꿈은 당신이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행복할 것이냐는 문제이며 그것이 여러분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달린 것이다.

새해에는 날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행복을 꿈꾸고 있는가, 그 꿈을 위해서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그런 의미에서 새해 당신의 꿈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의 의지로 가득해야만 한다. 언니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1년간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던 󰡔혼자 책 읽는 시간󰡕의 니나 상코비치, 이혼 후 아이가 외로움을 느낄까봐 3218일간 매일 저녁 책을 읽어준 아빠와의 약속을 기록한 󰡔리딩스 프라미스󰡕의 앨리스 오즈마 등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아니 당신 스스로 감동을 줄만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새해 아침 스스로 물어보자. 물어서 대답할 수 없거든 실망하지 말고 그런 꿈을 하나씩 만들어보자.

매일매일 스스로 행복해지는 한 해가 되자. 그것은 분명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곳으로 이끄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성공이나 성취에 맹목이 되어서는 결코 얻을 수 없으며, 오늘이 내일에 저당 잡혀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새해의 첫 해를 보면서 올 한 해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새해에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 행복해지는 꿈을 꾸자. 지금 당장!

<한대신문> 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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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콘텐츠의 보고, 그래픽노블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0674억 달러에 픽사를 합병한 디즈니는 2009년 마블 코믹스를 40억 달러에 인수한다. 전자가 새로움에 대한 투자라면 후자는 익숙함에 대한 기대다.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새로움과 익숙함의 이율배반적인 요구, 특히 익숙함에 대한 요구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익숙한 원작을 활용해 새로움을 구현한 영화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함으로써 마블은 원천콘텐츠의 화수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마음껏 올릴 수 있었다. 이미 영화 판권을 판 대표적인 작품들을 제외하고도 마블 코믹스가 디즈니에 넘겨줄 수 있는 캐릭터는 5000여개에 달했다. 스토리에서 강점을 보이는 DC코믹스에 비해 캐릭터에서 압도적인 마블코믹스의 5000여개 캐릭터는 곧 그 이상의 영화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워너브라더스에 편입된 DC코믹스나 디즈니에 인수된 마블 코믹스는 미국 만화 시장을 이끌어온 두 축이다. 워너브라더스와 디즈니는 거금을 들여 왜 이들을 사들여야했을까? 대표적인 3H 산업(High-cost, High-risk, High-return)인 영화에서 전환(adaptation)이나 프랜차이즈 필름(franchise film)화는 대표적인 리스크 헷지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환과 프랜차이즈 필름의 출발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향후 지속적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콘텐츠의 확보인데,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는 이미 수천종의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회사가 가지고 있는 원천콘텐츠가 바로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다.

그래픽노블은 1930년대 이후 이슈(issue)단위로 연속되는 슈퍼히어로 중심의 연재물 포맷의 코믹북을 주제의 심화와 내러티브의 완결로 차별화하면서 1960년대 이후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은 코믹북과의 대타적(對他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픽노블은 독립된 작품으로서 차별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1)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 구조와 완결성을 전제로 2) 유니크한 작화를 바탕으로 작가주의적 아우라 확보하고 3) 보다 성숙하고 다양한 독자를 대상으로 4) 사회적 문제는 물론 개인의 내면에 대한 천착을 통하여 보편적 공감과 테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구현한다.


이와 같은 그래픽노블의 특성은 독립된 장르로서 충분한 의미를 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거점콘텐츠로 전환할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이 된다. 무엇보다 작품 단위의 밀도와 완성도를 확보한 내러티브차별화된 영상 연출이 가능한 유니크한 작화는 거점콘텐츠로 전환하기 용이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콘텐츠로서 향유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소다. 이 말은 초기 코믹스처럼 가루비누 같은 세제나 껌을 팔기위한 프로모션 툴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 있는 문화행위로서 그래픽노블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는 잉여의 행위다. 잉여의 행위기 때문에 창작/향유의 과정에서 반드시 스스로 의미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만화 같은만화니까라는 이중적인 레토릭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는 B급문화로서 저급한 문화행위로 취급해 왔다. 이러한 편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그래픽노블이다. ‘만화 같은이 주는 상상력과 표현 그리고 발언의 자유로움을 극대화하면서 현실과 부딪칠 수 있는 요소들은 만화니까로 견제함으로써 여타의 다른 예술과는 차별적인 우위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만화에 예술성과 진지한 깊이를 더한 것이 그래픽노블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현재와 절망한 역사를 흑백의 절묘한 미학으로 그리고 역동적인 정지의 역설을 보여준 프랭크 밀러의 <300>이나 <씬시티>나 미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아이콘 무정부주의자 V를 그려낸 앨런 무어의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는 서구의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할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품들이다. 신화적 분석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의 풍요로운 텍스트인 뫼비우스의 <잉칼>, 신과 인간에 대한 사유와 정치풍자가 유니크하게 어우러진 앵키 빌랄의 <니코폴>, 중년의 위기와 진정한 자아 찾기를 그린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 만화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트 슈피겔만의 <: 한 생존자의 이야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 부침하는 인간을 리얼리즘 문학보다 더 리얼하게 그려낸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동성애와 성장담을 교직시킨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 불행한 소년에게 찾아온 첫사랑의 성장통을 크레이그 톰슨의 <담요> 등은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물을 제외한 대표적인 그래픽노블이다. 우리 작가들로는 동심의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질곡을 그려낸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울기엔 좀 애매한>,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년>, 웹툰이라는 매체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픽노블의 특성을 여실히 구현하고 있는 윤태호의 <이끼>, <미생>,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 킬러>, <발광하는 현대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 주목받는 그래픽노블은 대부분 사회의 문제나 개인의 성장에 중심을 두고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성취를 지향하는 리터러리(Literary) 그래픽노블이라는 점이다. 킬링타임용 싸구려 B급문화의 탐닉이 아니라 만화라는 즐거운 장르를 통해 가치 있는 문화체험을 하고자 하는 욕구와 영화, 드라마와 같은 거점콘텐츠로 주목받은 원천콘텐츠를 즐김으로써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Transmedia Storytelling)을 향유하려는 적극적인 욕구가 그래픽노블을 통해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 만화는 그래픽노블이나 웹툰을 통하여 만화 너머를 말하거나 만화를 넘어서려는다양한 시도로 충만하다. 문화콘텐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보다는 그것을 왜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그래픽노블이 지닌 소구요소와 그것에 반응하는 우리의 문화적 욕구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문화적 경로 등에 더 눈길이 가야 하는 이유다.

 

제일기획 사보 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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