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고 대견한 탈퇴

 

박기수(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원더걸스의 선미가 탈퇴를 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공식발표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텔미노바디로 국내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고 미국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데뷔를 이끌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원더걸스에서 굳이 탈퇴를 선언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보아의 아이돌 한류 이후 전방위적인 아이돌 육성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가 최근의 가요계이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물론 브라운아이드걸스, 포미닛, 2NE1, 애프터스쿨, 카라, 티아라,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SS501, 샤이니, 2AM, 2PM, FT 아일랜드 등 새로운 콘셉트와 아이템으로 매혹하는 아이돌의 등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물론 조기에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하여 스타로 육성하겠다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향유 주체와 비슷한 연령의 아이돌을 통하여 스타와의 동일시를 강화하고 몰입과 소통을 극대화하겠다는 매우 유효한 전략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최근 아이돌은 단지 젊은 층의 지지뿐만 아니라 아저씨 부대와 아줌마 부대의 열광을 이끌고 있다. 로리타 신드롬과 상관하여 음란한 판타지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엔터테인먼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만큼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획의 성과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어리다는 데 있다. 사회적, 문화적 체험이 부족하고 정신적으로 미성숙 상태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며 무차별적인 대중의 열광과 비난을 감내해야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얼마 전 2AM의 조권은 자신처럼 긴 연습생 시절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단지 연습 기간이 길었다는 하소연이 아니라 연습기간 내내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청소년기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말이다. 또래들과 함께 즐기며 체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끝이 보이지 않는 연습 기간으로 보내야 하고, 데뷔 이후에는 그동안의 투자를 보상받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내야하기 때문에 다시 또래들의 체험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악순환 속을 거듭해야만 한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이나 활동이 아니라 기획사의 콘셉트에 따라 만들어진 캐릭터와 아이템으로 활동해야하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와 환호가 높을수록 그들의 우울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돌은 이 시대의 극단화된 욕망이다. 향유자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을 아이돌에게 투사함으로써 일체감을 느끼고 소통하려 하기 때문이다. 조기교육, 노예계약, 또래로부터 유리된 생활, 몸짱 등 아이돌과 관련된 코드들은 모두 우리시대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미의 탈퇴는 반갑고 대견하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스스로 판단함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회복하려는 노력! 지금 이곳의 우리가 갖지 못한 고민과 결단의 모습을 선미에게서 보아서 일까? 난 선미의 탈퇴가 반갑고 대견하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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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이 부르는 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동계올림픽이 뜨겁다. 금메달도 금메달이지만 이번 동계올림픽을 보며 우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턱없이 부족한 동계스포츠 인프라나 열세인 체력 등으로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는 금메달을 딴 모태범과 이상화의 당당함과 즐거움을 보라. 쇼트트랙에서 탈락했던 이승훈이 올림픽 출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출전하여 따낸 은메달은 얼마나 극적인가? 동료의 실수로 날아간 아들의 메달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흔연히 달려가 실수한 선수를 위로해주던 성시백 어머니의 포옹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20여년의 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비록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는 못했으나 메달을 딴 모든 후배들에서 나오던 이규혁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계올림픽이 기대되는 것은 그곳에서 희망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2-3위로 달리다가 결승선을 앞두고 충돌하여 실격 처리된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신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고, 또 다른 실격을 기대했다는 안톤 오노의 몰염치와 경망스러움을 더 이상 비난하고 싶지 않다. 스포츠 정신을 모르고 결과로서의 승패만을 얻으려는 그런 선수에게서는 희망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는 재주보다 밀치는 손재주가 더 낫다는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에게 픽사 애니메이션 <>를 보여주고 싶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154Cm 45Kg의 작은 몸으로 덩치 큰 서구 선수들 앞을 달리던 이은별 선수의 당찬 열정이나 비록 선수복을 경기 전날 수선해 입을 정도로 열악한 지원 속에서도 결선까지 진출했던 스키 점프 선수들의 당당한 도전 그 자체가 희망이 아니던가? 메달도 메달이지만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자신들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줄 아는 그 젊음의 당찬 미소와 유쾌함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결선에 오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땀을 흘리고 최선을 다해 준비해온 이름도 낯선 종목의 선수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매스컴의 각광을 받거나 노력의 결과로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시상대에 오를 가능성을 그리 높지 않지만 하루하루 부끄럽지 않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희망일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발견하듯 그들도 우리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는 까닭이다. 서로가 서로의 위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동계올림픽의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최상이 아닌 최선을 보여주는 그들과 최선을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이 이 엄혹한 계절을 위로하며 우리의 봄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아니 우린 서로 그렇게 위로하고 응원하며 우리의 봄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봄이 오고 있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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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봄이 더디더니 가을도 굼뜨긴 매한가지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의 영문 제목처럼 <April Snow>가 내리던 봄이더니 추석이 코앞인데 아직 여름일뿐이다. .

지난주부터 학생들의 연구실 방문이 잦다. 스스럼없이 연구실을 찾아오는 제자들이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요즘 방문은 조금 무겁고 진지하다. 찾아오는 4학년들 의 손에 자기소개서가 창백하게 들려 있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질문의 성격과 요구가 다르다보니 자기들이 써놓은 내용은 선생들에게 점검 받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어 공인점수는 이제 별다른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하는지 어학연수는 필수이고, 국내는 물론 해외봉사 실적까지 은연중에 요구하는 실정이다 보니 학생들은 늘 갖춘 조건보다 갖추어야 할 조건에 늘 쫓기게 된다. 학생이 들고 온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뒤에 잔뜩 붙어 있는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보다가 그의 쫓기듯 달려왔을 대학시절이 문득 안타까워졌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학교에서 과제와 팀 프로젝트로 밤샘을 하면서 집안 사정으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했던 그 학생들의 일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안다고 했는데, 외국어 점수와 각종 자격증은 물론 국내외 봉사활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그의 자기소개서에는 정작 보여야할 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고생들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학원에서 쏟아지고 부보들은 그들을 허겁지겁 차에 태우기 바쁘다. 학원 끝날 시간이면 부모들은 길가에 차를 대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자정이 다되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내려오는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좀처럼 내일을 보기 어렵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에게 부모의 생각대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그 경쟁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무모한 일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내일을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끝없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는 대학생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쟁 안에서 갈수록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없는 자기 소개서와 내적 성장 없는 학습으로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들에게 그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이야기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과 부모의 조언보다는 아이폰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어플리케이션이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 지금 이곳에서 우린 과연 진정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교육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행복에 다가설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편일률적인 언론사의 대학 평가 기준에 우리가 얼마나 부합하며 몇 위가 되는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우리만 지향과 좌표를 설정해야만 한다. 입학생 대비 재학생 비율이 평가 기준이 될 것이 아니라 그 학교 졸업생의 윤리의식이나 봉사정신 등이 평가의 기준이 되면 안되는 것일까? 우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언론사의 비교육적이며 폭력적인 평가기준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인재상에 부합하는 평가기준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더 나아가 세계 대학을 평가하면 안 되는 것일까? 자기소개서 한 장에서 그 학생만의 차별성이 보이고 밤늦은 시간 학원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 만들기에 좀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교육에서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은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의미고,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변화가 생명의 중심인 것은 지금 이곳의 무엇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다. 그저 지금보다는 내일이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좀더 알 찬 삶을 살아내려는 옹골찬 의지가 변화다. 진정한 교육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한대신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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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을 넘어선 스토리텔링의 매혹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시대다.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story)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고(tell) 즐기게 할 것이냐(ing)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를 훼손시켜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내용만큼이나 어떻게 이야기 하고 어떻게 즐기게 할 것이냐도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북극의 눈물>, <한반도의 공룡>, <누들로드>, <차마고도>, <아마존의 눈물> 등등 특별 기획 다큐멘터리는 물론 <다큐멘터리 3>, <인간극장>과 같은 정기적인 다큐멘터리까지 가히 다큐멘터리의 폭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지상파뿐만 아니라 케이블에 위성까지 다수 채널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채널별로 차별화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저렴한 비용을 투자해서 보다 광범위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로 경사되고 있는 실정에서 솔직담백한 다큐멘터리의 진지한 행보에 매혹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세계적인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체험함으로써 리터러시 능력은 물론 기대수준까지 한껏 높아져 있고,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무엇보다 지배적인 채널에서 고만고만한 컨셉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출연자 그리고 공허하기만한 말장난과 불쾌할 정도의 막말이 난무하는 오락 프로그램과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막장 드라마 그리고 10대들의 전유물이 된 가요 프로그램 등으로의 편향이 최근 다큐멘터리 붐으로 이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다큐멘터리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알고 싶으나 알려주지 않던 진실이나 차가운 이성 중심의 지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금 이곳의 진실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다루고 있는 <지식e><다큐프라임>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들은 책으로 다시 출간되어 방송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콘텐츠 업계에서 소위 말하는 One Source Multi Use의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구현 가능한 만화나 소설 등의 도서류가 원천콘텐츠로 먼저 출시되어 시장성 검증을 받으면, 그 결과를 보고 매스 미디어와 결합한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같은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 One Source Multi Use 중 장르전환의 예인데, 이들의 경우는 프로그램이 계속 방송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노출이 가능하고, 이미 방송을 통해 관심을 끈 아이템에 대하여 문자를 통한 말하기로 보완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개가 가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전문가들은 스토리가 내러티브를 낳고, 내러티브가 스토리텔링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스토리는 구술 언어를 중심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컨텍스트를 확보한 상황에서 전달되는 내용중심의 이야기를 말한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밑도 끝도 없이 옛날 옛날에라는 관용구로 시작할 수 있고, 이야기를 듣던 여러분이 잠들면 언제든 끝낼 수 있었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인 스토리의 유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스토리가 문자언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익명의 다수 대중들을 향하는 도서의 형태로 바뀌면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컨텍스트를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고 효율적인 이야기 방식이 필요했고,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내러티브다. 정해진 분량 안에서 익명의 다수 대중을 향해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의 고안과 활용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문자라는 매우 제한된 표현방식으로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는 더욱 정교하고 전략화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디지털 문화환경과 결합함으로써 보다 창조적인 형태의 이야기로 전개된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쌍방향성, 네트워크성, 통합성이라는 디지털의 특성을 창조적으로 수납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이야기를 구현할 수 있게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단선적인 발전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기대하는 효과에 따라서 이 세 형태는 전략적으로 선택되어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식e>가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도서로서도 전폭적인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현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은 정해진 시간에 다양한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멀티미디어적 구현이 가장 효과적인 말하기 방식이라고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말하려는 내용과 목적 그리고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송 시간의 제한은 정보 제공 시간의 제한을 가져온다는 치명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한다면 그 한계는 더욱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e>의 경우에는 멀티미디어적 요소를 지극히 제한적으로 활용하면서 지배소의 선택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짧은 시간에 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정보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이를 완과 급을 조절함으로써 향유자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이 과정에서 상술되어야했거나 더 생각해볼 거리를 보완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생각해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어 취사선택하고, 방송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와 책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방송만 보았거나 책만 보았다는 것이 온전한 체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독립적인 스토리텔링을 즐긴 것이 된다. 물론 둘 다 보았다면 그 가슴울림은 두 배가 되었겠지만.

<지식e>의 스토리텔링은 매혹적이다. 그 압도적 매혹의 가장 중심에는 그것이<지식e>의 컨셉처럼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지식에 대한 목마름, 박제가 되어버린 다른 세계의 지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아픔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 <지식e>에는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지혜라고 해도 좋을 내용을 <지식e>가 굳이 지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죽어버린 지식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며 무거운 진혼에 다름 아니다. 지금 이곳의 우리가 그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고 있지만 나서서 드러내기 어려운 우리의 부끄러움을 그것이 가슴으로 되묻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들의 천국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던 이청준 선생의 선지적 서문이 기억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일게다.

2009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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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집필기준과 소문의 벽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거짓말은 세 사람을 죽인다. 거짓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그 거짓말을 듣는 사람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거짓말은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 대부분의 오해를 풀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거짓말이 죽인 세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거짓말보다 무서운 것인 소문이다. 소문은 진실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 위에 서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정보로 말하고 듣는 사람 모두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문의 대상이 되는 정보나 사람은 해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며, 설사 주어진다고 해도 일단 소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진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는데, 소문은 대부분 사람들이 믿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까닭이다.

2011년 한국 사회는 유난히 소문이 많다. 182억을 들여서 투표함도 개봉하지 못했던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의 부조리와 부끄러움으로 기억될 흑색선전의 서울시장 선거, 실체를 알 수 없는 한미 FTA 문제 등과 같은 최근 문제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소문의 벽을 생각한다. 그동안 소문이 이토록 힘 센 적은 없었다. 이것은 그만큼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거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진실을 전달해야할 언론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진실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요구하는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 그리고 진실을 향한 사회 전체의 깨어있는 의식만이 진실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지난 8일 발표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의 논란이 뜨겁다. 친일파 청산, 5·16 군사쿠데타,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제주 4·3 사건 등의 역사가 대강화(大綱化) 원칙으로 집필기준에는 빠졌지만 교과서 기술에는 들어갈 것이란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여야 하며, ‘독재정권이 아니라 독재화여야 한단다. 아픈 역사일수록 그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가려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논란은 단지 용어 몇 개를 수정하고, 몇몇 사건을 누락시킨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용어의 수정이나 사건의 누락을 가능하게 했던 역사의식의 문제이며, 역사에 대한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소문으로부터 소환해야할 시점에 역사를 또 다른 소문의 미망 속으로 퇴보시켜버리는 이번 집필기준은 어떤 사건을 빼고 넣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나는 꼼수다>가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지만,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기존의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문의 전달이 아니라 소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찾아낸 진실을 알리려는 두려움 없는 자세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는 우리들의 냉철한 지지가 간절한 시점이다. 역사교과서는 그 출발이기에 더 엄정하고 객관적이며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역사로부터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면, 현실은 결코 소문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한대신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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