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영화가 가슴으로 읽히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간이 남아서 하는 일보다 시간을 내어서 하는 일이 재미있다. 숨넘어갈 듯 분주할 때면 그런 시간이 더욱 간절해지고는 하는데, 지난 주말이 그랬다. 해야 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영화 두 편을 보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는 분노와 화해를 이야기한다. 영화 속 세 개의 빌보드는 딸아이의 억울한 죽음에 무관심한 세상을 향해 진실 규명의 요구이며, 범인을 꼭 잡겠다는 의지이고, 딸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의 표현이다. 세 개의 빌보드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은 거침없고 당당한 엄마 밀드레드의 분노였다. 지켜주지 못했으면 그 죽음의 억울함만이라도 풀어주어야 할 텐데, 진실을 밝혀주어야 할 경찰이 손 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밀드레드는 분노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이어간다. 암 투병 중 자살하는 경찰서장 윌러비, 방화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제임스, 파면된 이후에도 진실을 밝히려 노력하는 경찰관 딕슨. 이들은 모두 흠결과 모순 안에 존재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밀드레드를 도와 진실을 밝혀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당위적인 화해나 구원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왜 화해에 이르지 못하는지, 화해에 이르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각기 다른 존재인지, 그럼에도 화해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스콧 쿠퍼 감독의 <몬태나>는 폭력과 증오의 역사를 지나온 사람들의 화해와 구원을 이야기한다. 전역을 앞둔 전쟁영웅 블로커 대위, 죽음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추장 옐로우 호크 일가, 코만치 족에게 가족 모두를 잃은 퀘이드 부인, 인디언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윌스 병장. 이들은 증오와 폭력이 반복하면서 그려낸 피해와 가해의 무간지옥과 그곳으로부터의 구원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 용서하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정의는 언제든 갖가지 이해관계나 다양한 맥락에 의해 변질되고 왜곡될 수 있지만 용서와 화해는 더불어 살 수 있는 변하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코만치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퀘이드 부인이 백인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인디안 소년을 데리고 시카고로 떠나는 것도, 그 기차에 인디언 학살로 인해 전쟁 여웅이 된 블로커 대위가 전역한 모습으로 오르는 것도 그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거친 말 대잔치’라도 벌이는 듯, 거칠고 센 말들이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요즘이다. 거칠고 센 말들은 잠시 이목을 끌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소통하거나 설득시킬 수는 없는 언어다. 더구나 거칠고 센말은 그 강도로 인해 왜곡되고 다양한 매체에 흔적을 남김으로써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을 배반하고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더구나 SNS를 통해 공론의 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개별화된 정보가 터무니없는 신뢰를 갖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공유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거칠고 센 말들은 가공할만한 폭력으로 확대재생산 되지 않는가. 이청준은 《떠도는 말들-언어사회학 서설Ⅰ》에서 인간이 말을 배반함으로써 말들은 제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왜곡되어 길을 잃고 떠돌고 있다고 비판했다. 작가가 두렵게 예견했던 일이 약 40년이 흘러 지금 이곳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인간이 말을 배반하고 결국 말은 인간을 배반하게 됨으로써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불통의 폭력이 되고 있는 현실, 그것이 앞으로 어떤 괴물이 될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렵다.
2018년 지금 이곳에서 <쓰리 빌보드>와 <몬태나>가 가슴으로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밀드레드와 퀘이드 부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용서를 보았다. 원수지간이던 블로커 대위와 옐로우 호크가 어떻게 이해하고 화해하는지도 보았다. 구시대의 언어로 윽박지르는 빅마우스가 선두에 서던 시대는 갔다. 자극적인 말로 거칠게 공포와 분노를 부르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다. 협박의 언어는 지지를 얻을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좀 더 진정성 있는 이해의 언어 세련된 설득의 언어가 필요한 시대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부를 뿐이라는 대사가 절절한 이유다.
2018.05.1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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