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토럴 시대의 스토리텔링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은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하는 능동적인 소통이다. 가치나 즐거움을 지나치게 교조적인 의미나 윤리적인 의미로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가치, 즐거움, 능동적 소통은 스토리텔링의 특성을 드러내는 핵심 요소다. 축자적인 의미에서 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다양한 방식(tell)을 통하여 향유를 강화하는(ing)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심도 있게 읽어보면, 스토리텔링은 향유자의 적극적인 참여 과정을 통해서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는 일체의 소통 과정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스토리텔링은 그것이 통용되는 문화권, 적용 분야 및 해당 장르, 구현 미디어 환경, 최종 콘텐츠의 형태 등에 따라 상이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개념에 대한 합의나 실체에 대한 규정은 지극히 개방적인 형태로 설정되어 있다.


존 라세터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재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로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을 압도한 픽사 애니메이션의 핵심은 스토리다. 사실 이 말은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스토리는 단지 이야기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현 방식 그리고 향유자와의 소통이 어우러지는 일체의 과정, 즉 스토리텔링이다. <토이스토리> 시리즈의 즐거움은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어린 시절 장난감, 주제가(You've got a friend in me), 성장과 이별의 두려움과 같은 보편적 정서의 유대 요소들과 패러디, 대구와 강화를 통한 안정적 서사 구조 구축, 속편으로 수렴하는 프리퀼(prequel)의 적층적 활용, 집단적인 중심 캐릭터 설정과 편마다 새로운 캐릭터의 보강을 통한 서사의 심화, 애니메이션의 본질인 투명한 액션의 효과적 구현 등을 통해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토리텔링의 문제는 스토리와 구현방식 그리고 향유가 어우러지는 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느냐에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구현 미디어 환경, 최종 콘텐츠의 형태 등은 스토리텔링 전략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곳을 압도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환경은 정보의 복합성, 쌍방향성, 네트워크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말은 무엇보다 향유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존 닐슨은 디지털 문화환경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형질의 스토리텔러를 디지털 호모나랜스(Digital Homo Narrans)’라고 부른 바 있다. 그들은 디지털 문화 조건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디지털 호모 나랜스는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 포털, 동호회 등에서 문자·그림·사진·영상 등을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스스로 이야기를 생산-공유-전파하는 주체적인 스토리텔러다. 적극적인 생산자이자 향유자인 그들에게 더 이상 생산과 향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단지 소통할 뿐이다. 그러한 소통은 가치 있는 즐거움 창출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수렴한다.

초당 3,500장의 사진을 업로드하는 페이스북과 분당 72시간의 영상을 업로드하는 유투브는 이미 격렬하게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의 장이 되었다. 누가 지시하거나 어떤 물질적인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데도 각종 디바이스를 가지고 다양한 플랫폼에 접근하여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스토리텔링의 양상은 이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유전형질을 지녔다. 그 형질의 특성을 읽고 싶다면 당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열어보라. 향유자의 체험에 기반한 자발적 생산과 창작 그리고 무한 공유의 스토리텔링이 다양한 층위에서 격렬하게 증식하고, 공유로서 더욱 강력한 맥락을 생산하고, 그만큼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열고 있지 않은가?

헨리 젠킨스도 󰡔컨버전스 컬처󰡕에서 지금 이곳의 향유에 주목하고 주체적인 체험의 생산성과 향유의 자발성 그리고 공유의 즐거움을 강조한 바 있다. 특히 그가 제안한 장르 간, 플랫폼 간, 저자와 독자 간, 생산과 소비 간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은 디지털 문화 환경 속에서 스토리텔링의 핵심을 지적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생산자에 의해 이미 완성된 스토리텔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향유자에 의한 참여중심, 과정중심, 향유중심의 스토리텔링이다.

그래서 타이 몬터규는 스토리텔링을 넘어선 스토리두잉(story-doing)을 주창한다. 실천으로서의 스토리를 강조하는 스토리두잉에서 핵심은 향유자가 어떻게 그 스토리에 참여-반응-생산-공유하는 실천을 활성화할 수 있느냐이다.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스토리를 실천하고 자기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동안 향유과정의 이면에 잠재된 형태였지만 이제는 실천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 필수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로 기획된다. 스토리두잉은 기업의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데, 신발 한 켤레를 사면 한 켤레를 어려운 이에게 기증한다는 기부 실천행위를 브랜드 전략으로 활용한 탐스, 자신이 만든 디지털콘텐츠를 등록하고 한번 다운로드 받을 때마다 1.25달러씩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식량으로 기부하는 ‘1.25 미라클마켓’,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남미의 어느 가난한 농부에게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한다는 공정무역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향유자가 어떤 형태로든 스토리에 참여해야함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스토리두잉의 전제는 스토리텔링의 핵심요소였던 가치 있는 즐거움이다. 최근 유명 인사나 스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아이스버킷 챌린지(Icebucket challenge)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부문화를 환기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유명 인사나 스타가 참여하고, 그것이 딱딱한 기부행사가 아니라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퍼포먼스로 즐겁게 진행하고, 참여자가 세 명의 다음 사람을 지정하는 기록을 웹에서 공유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기부라는 가치 있는 행위를 간명하게 제시하고 즐거운 퍼포먼스로 3배씩 확산해나가는 스토리텔링 전략은 그 효과면에서도 탁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곳은 디지토럴의 시대(Digitoral Era). 죠나 삭스가 창안한 디지토럴은 아이디어의 창조와 전파에 향유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적합한 아이디어만 살아남던 구전전통이 디지털 문화환경과 창조적으로 결합한 양상을 말한다. 구전전통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곧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그 과정에서 모든 스토리텔링은 고정되지 않고 향유의 횟수만큼 격렬한 활성화가 이뤄지며, 그 활성화의 정도가 스토리텔링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한 구전전통의 현재적 구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문화 환경 덕분이다.

세계의 콘텐츠 시장을 주도한 디즈니 회장인 로버트 아이거는 디지토럴 시대 스토리텔링이 맞춤화된 경험고치 벗어던지기라는 형태로 구현될 것임을 예언한 바 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및 빅 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개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화된 경험을 활성화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경험이 공유의 기술을 통해 고치 벗어던지기를 통해 무한 연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공감 가능한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 <레미제라블>과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좋은 예이다. 공감 가능한 보편성을 확보한 스토리를 최신의 최고 기술로 구현하고, 향유자의 수준과 취향에 소구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텍스트에 수렴하고, 거기에 뮤지컬 넘버들을 삽입함으로써 텍스트 전체가 아니라 뮤지컬 넘버별로 공유 확산할 수 있는 전략을 전면화하였다. 그 결과, 당신은 지금도 <레미제라블><겨울왕국>의 뮤지컬넘버들을 흥얼거리지 않는가?

IT 강국 한국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이야기 하지말자. 디지털 문화 환경을 어떻게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획할 것인가, 향유자별 맞춤화된 경험과 그 경험의 무한 공유를 지속-확산시킬 수 있는 스토리텔링 전략은 무엇인가, 정서적 보편성을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현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자. 다시 문제는 체험, 참여, 공유의 가치 있는 즐거움이다.

<방송작가> 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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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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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의 방법론 탐구를 위한 문제 제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방법론 탐구, 수용과 극복의 이율배반적 시도

 

방법론에 관한 탐구는 연구 대상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고, 기존의 영역과 새로운 지평 사이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논리적 토대 위에서 그것을 넘어서야만 하는 이율배반적인 긴장을 내포한다. 이율배반적 긴장은 방법론을 탐구하는 내내 연구 대상의 실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기능하는가에서 출발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규명/갱신의 연속이다. 물론 여기서 연구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유통-향유되는 생태계를 전제로 해야 한다. 생태계라는 상호유기적인 거시구조 안에서 생산 주체, 유통 구조, 향유 양상의 미시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때, 이 세 요소가 상호 연동함으로써 연출하는 총체적 상관관계의 다양성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을 신뢰할 수 있다면, 만화비평의 방법론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만화의 정체와 기능 방식에서 출발하여 만화비평의 목적 및 방법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안을 각 구성 요소의 상관망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규명해야만 한다.

 

만화의 정체, 건강한 개방과 확장의 無限 根力

 

만화의 정체(正體)에 대해 병렬된 이미지들의 연속성으로 구성된 연속예술과 같은 식으로 규범론적으로 정의하거나 카툰화법(cartooning),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iconotext), 이미지의 연속성(narrative) 등을 중심으로 범주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추수적인 방식이다. 그것은 현재까지의 만화를 재구할 수는 있어도 만화가 지닌 언어와 표현의 건강한 개방성과 총체적 감각을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무한 확장의 가능성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만화는 1) 치열한 작가의식의 창조행위냐 / 가장 저급한 상업문화의 결과물이냐, 2)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냐 / 왜곡된 현실의 의미 없는 과잉이냐, 3) 전 연령이 향유 할 수 있는 문화냐 / 아이들만의 하위문화냐, 4) 웹툰은 만화의 독립적인 영역인가 / 하위 영역인가 등등의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작위적인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처럼 보이는 이 논란은 후자인 현실태 앞에서 전자는 요원한 당위적 요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기형적인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오히려 양자는 전자와 후자의 바람직한 긴장을 통해 표현 언어, 구현 방식, 취급 소재, 주제의 깊이, 사회적 맥락과의 상호관계 등을 풍성하게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방적인 산업 종속과 문화 수준의 정체(停滯)를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만화는 창조적인 언어예술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 가능한 다양한 언어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샤르트르는 색과 음은 사물이지 기호가 아니라라고 단언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문학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려는 강조화법일 뿐이다. 오히려 만화의 문면/이면을 구성하는 언어, 가시적/비가시적으로 구현하는 언어, 언어 계열체( Paradigme) 간의 결합 방식을 통해 생산되는 새로운 형질의 언어 등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만화의 언어는 매우 다양하며, 거기에 각 언어의 상호 조합까지 고려한다면, 그것은 무한 가능성의 영역이며 지속적인 개방과 확장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만화의 언어는 글과 그림의 창조적인 결합이라고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디지털 문화 환경의 도래 이후 다양한 언어들이 만화로 수렴되고 있는 양상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수렴의 결과가 만화 자체의 고유한 문법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웹툰의 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만화는 언어의 조형과 문법의 갱신을 반복하면서 그 정체의 의미지평은 물론 표현지평까지 지속적으로 개방하고 확장하는 동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만화가 지닌 언어예술로서의 무한 창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풍요롭지 못한 것은 만화생태계의 역동성을 만화 안으로 온전히 수렴하지 못한 탓이다. 만화를 구성하는 창작자, 텍스트, 향유자, 유통업자, 플랫폼 등등의 최근 역동적인 행보를 고려할 때, 만화는 자기 정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것이 지향하는 개방성과 확장가능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내부로 수렴함으로써 새로운 정체를 조형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만화 스스로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와 노력은 창작자, 텍스트, 향유자, 유통업자, 플랫폼 등등 모두가 만화생태계의 거시 구조 안에서 총체적 상관망을 형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결과를 확보할 수 있다.

만화의 가장 큰 힘은 자유다. ‘질펀하고, 넘쳐흐르고, 흩어지고, 어지러럽다는 만()의 축자적 의미(literal meaning)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화는 소재나 주제에서부터 구현 언어나 소통 방식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지향한다. 이러한 자유의 가장 근본적인 동인은 누가(소통의 주체), 언제(맥락의 시의성), 어디서(상황성), (소통의 원인), 무엇에 관하여(소통의 주제), 어떤 효과를 노려서(기대 반응), 누구(향유자)에게 말하는가라는 소통과 향유의 기본 모델 안에서 최적화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자유로의 지향은 스스로의 구속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경쾌한 변화를 주도한다. 때문에 스스로 구속하지 않는 만화는 경직된 고정태라기보다는 부단히 변화하는 살아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여기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은 만화의 구현 언어, 술화(述話) 방식, 주변 장르와의 관계, 향유자와의 상호작용 방식과 결과, 사회문화적 맥락성 등의 변수가 끊임없이 개입하는 지금 이곳의 상황에서 스스로 최적화 방식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다양한 변수들의 개입과 상호 충돌은 만화의 다의성(多義性), 다층성(多層性), 다성성(多聲性)을 확보해주는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

 

만화비평, 의미지평 확장과 가치 평가 사이

 

모든 비평의 시작은 리터러시(literacy). 리터러시는 텍스트와 향유자 간의 가장 적극적인 대화다. 리터러시는 텍스트에 대한 변별적 인식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읽고, 그것의 내재적 문법 및 세계와의 상관성을 규명하기 위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대화과정이다. 때문에 리터러시는 비평가가 고유의 관점으로 텍스트를 읽고 평가하는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 텍스트의 구성 요소 간, 텍스트와 향유자 간, 텍스트와 세계 간,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각기 다른 차원과 층위의 대화를 창조적으로 수렴-조합-확장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이다. 비평은 이와 같은 리터러시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대화에 출발한다. 축자적인 의미에서 비평은 말 그대로 준거를 마련하여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만화비평도 리터러시를 토대로 비평의 대상과 관점을 제시하고 텍스트의 가치를 발굴하여 평가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만화비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만화미학이나 텍스트의 완성도를 귀납적으로 지향하는 것보다 새로운 창작자, 미디어 환경, 독서체험의 변화에 따른 텍스트의 변화를 종합적인 관점에서 각 요소의 층위와 상관망을 개방적인 자세로서 주목해야만 한다. 그러한 개방적인 자세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지평 확대하고 거시적으로는 만화미학 개발과 평가의 토대를 마련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다소 거친 일반화가 허용된다면) 만화비평의 대상은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창작자/텍스트/향유자/미디어 등의 문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창작자 중심으로 살펴보면, 작가의 정체성, 작가의 전기적 탐구, 만화미학과 만화수사학 등의 생산중심 미학 탐구, 창작 방법론, 작가와 세계와의 상관성, 작가의 창작 환경 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텍스트 중심으로 살펴보면 구현 언어의 문제, 서술 미학, 장르의 문제, 다양한 텍스트 이론, 텍스트와 구현 미디어의 관계, 상호텍스트성,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 향유 활성화 전략의 텍스트 내 수렴 여부 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향유자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향유 양상, 해석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y)의 정체, 수용미학, 해석론, 상호작용의 구조, 팬덤(fandom)의 양상과 생산성 등을 탐구해야 한다. 미디어의 관점에서 보면 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구현 언어, 구현 방식, 유통 방식 및 과금(課金) 체계, 최적화 구현 양상 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같은 창작자/텍스트/향유자/미디어 구분은 논의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실제 만화비평에서는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양상으로 논의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텍스트 해석 문제에 규명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구조, 작가심리학, 해석의 체계와 구조, 향유양상, 상호작용의 전개 양상 및 텍스트 수렴 양상, 구현 미디어와 최적화 구현 양상, 기존 만화미학의 수용과 극복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채로운 상관망을 전제로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글에서 언급한 만화비평의 대상들은 그들 간의 다양한 조합을 통하여 구현도리 뿐만 아니라 하위에 수다한 개별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복잡하고 쉽지 않은 양상을 드러낸다. 거기에 만화비평의 목적과 개별 관점이 개입한다면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만화비평에서 전체를 온전히 다 말하겠다는 의욕은 일종의 실현 불가능한 과잉이다. 오히려 비평 목적과 대상을 초점화하고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하여 그 안에서의 충실성,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결과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비평의 목적은 미시적으로는 텍스트의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하는 일이며, 거시적으로는 즐겁고 의미 있는 향유 체험을 강화하고, 창작 및 리터러시 능력 향상을 통하여 풍요롭고 건강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따라서 만화비평은 항상 텍스트와의 건강한 견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건강한 견제와 독립성은 텍스트의 의미지평을 발견-확장하고 만화미학을 지속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지적인 긴장을 유발함으로써 만화의 새로운 지평과 양식을 도전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

만화비평은 만화와의 상보적 긴장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만화 창작-제작-유통-향유의 생태계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만화가 고유의 언어로 허구적인 것을 형상화한 것이고, 허구의 라틴어적 기원이 창안, 발상, 새로운 고안 등을 의미한다고 할 때, 만화비평의 몫은 분명해진다. 허구적인 것을 생산하는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동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실한 언어를 찾았는가? 적실한 언어를 통해 형상화의 차별적인 미학을 창출하고 있는가? 그 차별적 미학은 만화의 새로운 지평에 일조하고 있는가? 이와 같이 비교적 분명해 보이는 만화비평의 몫은 다시 만화 창작-제작-유통-향유의 상관 망으로 환원되어만 한다. 최근 웹툰의 압도적인 전개를 보면, 제작-유통의 지배적인 힘이 창작과 향유의 양상 자체를 강하게 변화시키고 있고, 변화된 창작과 향유의 양상이 다시 제작과 유통을 상호 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요소들의 하위 요소들에 대한 변별적 접근도 요구된다는 점엣 논의의 어려움과 복잡함이 있다. 가령 창작을 규명하기 위해서 텍스트에 구현된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그 성취의 정도와 상관없이 그것이 지닌 특수한 사회문화적 기능양태 안에서 분석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맥락을 토대로 할 때, 만화비평은 이론비평(theorytical criticism), 실천비평(practical criticism), 메타비평(meta criticism)으로 나누어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현재 만화비평이 이렇게 나뉘어 구현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만화비평이 의미 있는 실천으로서 생산적인 결과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비평의 세 양상이 상보적으로 순환하는 구조로 구현되어야만 한다.

이론비평은 창작자와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한 규범을 마련하기 위한 탐구인 동시에 텍스트 분석과 해석의 중심 개념을 합의하고 분석 방식과 해석의 방법론을 마련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다. 만화의 정체와 역할을 중심으로 한 고유의 미학을 찾아가면서 동시에 텍스트의 리터러시 방법과 체계, 사회문화적 맥락의 해석체계, 구현 미디어와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다.

실천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이해, 심층구조의 의미에 대한 해석, 텍스트의 가치 발굴 및 의미지평 확장, 텍스트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 등으로 구현된다. 실천비평은 객관성을 지향하지만 비평가의 교양, 관점, 세계관, 미학관 등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어서 양자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그 성패의 첫 요소라 할 수 있다. 또한 실천비평은 이론비평에 의존함으로써 합리성과 체계성을 갖출 수 있고, 이론비평은 실천비평의 결과들이 축적됨으로써 넓이와 깊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보적인 순환관계를 구성한다.

메타비평은 비평의 자의식을 마련하고, 비평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비평에 대한 비평을 말한다. 기존의 실천비평이론비평을 대상으로 그것의 관점, 방법론, 해석체계 등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평가를 수행함으로써 비평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이와 같은 비평의 세 양상이 지금 이곳의 만화비평에서 얼마나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소박한 해설이나 사적 전개의 정리, 신작 소개 수준으로 전개되는 지금 이곳의 만화비평을 고려할 때, 그나마 대부분이 실천비평에 편중되어 있고 본격적인 의미의 이론비평이나 메타비평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건강한 비평담론의 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학술논문을 중심으로 이론비평과 메타비평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역시 해외 이론을 토대로 한 매우 고답적(高踏的)인 양상이기 때문에 웹툰과 같은 최근 만화의 역동적인 전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만화비평의 방법론, ‘따로 또 같이의 다양성

 

만화비평의 본격적인 탐구에 앞서 그것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은 전략적으로 매우 유효하다. 이론비평이든, 실천비평이든, 메타비평이든 간에, 그것을 의식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방법론의 전략적 선택은 만화비평에서 가장 필수적인 전제이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창작자/텍스트/향유자/미디어의 복잡한 조합과 그 하위 요소들의 무한에 가까운 상관망을 모두 다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며, 또한 전체를 이야기하는 넓이보다 일반적으로 비평은 특정 관점을 렌즈로 하는 선택적 깊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된 방법론들은 텍스트의 총체성을 지향하며, 개개의 방법론이 거시 구조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은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방법론에 관한 이론은 객관적 인식과 합의 가능한 논증 그리고 납득 가능한 가치 평가를 탐구하고 체계화하려는 논리적 결과물이다. 비평 대상을 독립시켜 변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논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고유의 내적체계와 논리 준거를 구성해냄으로써 분석과 해석 그리고 평가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객관적으로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은 비평이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듯, 부단히 조형적으로 파악해야할 성질의 것이다.

본격적으로 만화비평의 방법론을 고민하기 위해서 목적과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화비평은 만화의 언어적, 구조적 특성을 변별적으로 파악하고, 만화의 의미지평을 확대하고, 그것이 성취한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만화비평의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둘 때, 만화비평의 방법론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화비평이 고려해야할 요소들과 전통적인 비평의 방법들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수렴할 것인가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만화비평의 목적을 고려할 때, 텍스트를 중심으로 사회문화적 맥락과 그것의 향유방식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다른 장르에서 이미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는 비평이론들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비평 이론 위에 역사 비형, 사회학적 비평, 정신분석 비평, 원형 비평, 독자-반은 비평, 형식주의 비평, 구조주의 비평, 포스트모더니즘 비평 등이 될 것이다. 또는 그것을 크게 범주화하여 실증주의 비평, 구조주의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해석학적 비평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가 지닌 복합성, 다층성(음향, 단어의 의미, 반영된 현실 요소들, 문체, 장르법칙들, 사회적 맥락과 의미 관련성 등) 등을 염두에 둘 때, 기존의 어떤 이론도 부분적인 분석과 해석에 적합할 뿐, 총체적 양상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종래의 만화관이나 이론도 정태적 시각에서 역동적인 방향으로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의미에서 전통적인 만화의 내포나 외연이 확충되고 있다는 의미이며, 적극적인 의미로 만화 자체의 뚜렷한 형질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격랑 위에서 만화비평의 자의식에 대한 고민과 그 방법론에 대한 실천적 탐구는 어쩌면 제일 먼저 풀어야할 과제라 할 수 있다.

만화가 문화콘텐츠로서 문화산업의 체제 유지적, 현실 추수적 경향을 내포하고 후기산업사회의 논리에 맹목으로 따라간다는 식의 논리는 당위적이고 이데올로기 중심적 사고다. 중요한 것은 개별 텍스트의 의미생산 구조 및 그것의 향유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이 소통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상관하여 어떠한 리터러시가 가능한지 살펴보는 것이다. 책읽기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텍스트 향유 체험은 체계화될 수 없다. 언어예술로서 만화는 다양한 비언어적 구현 전술들을 수렴하여 자기화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만화미학을 토대로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규범을 정하는 일은 다소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뢰할만한 전문적인 향유자의 경우에도 주관적 관점을 통해 차별적인 가치를 확보한다는 태생적 이율배반성과 그가 구현하는 비평 양상 역시 그것의 목적, 타깃, 텍스트의 특성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평가는 1차적으로 향유자로서 주어진 텍스트와 관계하며, 그 텍스트의 의미론적 구조와 잠재적 기능은 향유과정에서 구체화될 뿐이며, 그 결과는 해석적 언술을 통해서 구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화비평은 다양한 방식의 제한 없는 다차원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다만, 만화비평의 실천을 통해서 총체적 언어를 제공하고 텍스트를 새로운 소통의 탐험적 결과물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만화가 지닌 근원적인 의미론적 중의성과 구현 전략의 자유로움, 예측불가능성은 향유하는 향유자들을 매료시키는 가장 강력한 기제 중에 하나다.

만화비평에서 텍스트와 향유자 간의 대화성, 과정성, 개방성은 상호주관성의 차원을 지속적으로 주목해야만 한다. 상호대등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입장과 자격에서의 대화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간주간성은 대화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윤리적 측면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리터러시의 구성요소인 인지-해석-평가의 상관적 체계를 구현하는 맥락 위에서 텍스트 고유의 특수성을 확보하여 미학적, 현실 반영적, 향유론적 경험의 체계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만화비평은 만화의 리터러시 맥락 위에서 파악한 분석과 해석은 심미적 이해를 거쳐 역사적, 사회문화적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탄력과 개방 그리고 확장 가능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언어예술로서 만화의 소통이 일반소통과 다른 것은 그것이 정보와 미학의 잉여성과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체험이나 역사적 경험 그리고 사회문화적 반영의 컨텍스는 기존 질서에 대한 종속과 동시에 저항을 변증법적으로 전개해온 결과다. 더구나 새로운 만화적 소통에서 개방성이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는 시점에서 그것의 끊임없는 갱신성과 과정성은 창작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만화비평은 텍스트 해석의 마지막 지평은 의미가 아니고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담론 구조이며, 평가의 준거는 규범적 완성도가 아니라 개별 텍스트의 변별적 특성과 그것의 구현 정도에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화생태계의 개별 구성요소와 그 전체의 구조 그리고 그들 간의 콘텍스트를 종합적으로 관찰 할 수 있을 때, 만화비평의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상의 전체 콘텍스트 위에서 분석된 개별 정보는 계기화된 의미잠재력을 지닐 수 있고, 그 잠재력의 구현태가 텍스트의 의미지평을 확장하게 될 것이고, 다양한 구현 전략은 고유의 문법을 형성하는 특유의 향유구조를 창출할 것이다. 이러한 향유구조 위에 앞으로의 만화, 그리고 만화비평은 서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화비평의 방법론 역시 이러한 맥락성을 고려한 자의식이 필수다.

이 글은 앞으로 만화비평의 다양한 양상을 점검하고, 그것이 새로운 만화문법과 만화형질에 최적화될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할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만화비평의 변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만화비평가의 자의식이 차별적 미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할 것이다. 문학, 영화, 연극, 미술, 음악 등 주변 장르에 축적되어온 비평이론과 방법론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필요한 요소를 어떻게 벤치마킹할지에 대하여실천적인 고민도 병행해야하는 고단한 작업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만화의 장르적 차별성과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한 지속적인 모색과 만화비평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한 개방적인 시도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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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비평,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 글은 지금 이곳 만화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선도할 수 있는 만화비평론을 구성하기 위한 시론(試論)의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해설중심의 의전비평,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무모할 정도의 다채로운 시도를 통하여 독립적인 텍스트로서 즐길 수 있는 만화비평을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형태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만화담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소란스럽고 다채로운 그래서 살아있는 만화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만화비평의 시론을 도모한다.

 

 

1. 만화비평의 구조적 부재

 

다소 도발적인 문제 제기일지는 몰라도 만화비평은 부재중이다. 열정적으로 비평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은 구조화된 침묵이거나 부재다. 만화비평의 정체, 방법론, 역할 등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없느냐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만화비평이 신뢰할만한 매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만화와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웹툰을 포함한 만화산업 전체의 폭발적인 성장내지 변화에 비추어 본다면 만화비평의 오늘은 차라리 부재에 가깝다.

비평은 콘텐츠와 유기적인 상관속에서 긴장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확보하며 상호 성장하는 것인데, 콘텐츠의 성장만 독주할 뿐 비평이 자기 정체나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관점에서도 결코 긍정하기 어려운 기형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최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비평의 형질 변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진지한 분석 및 해석 중심의 비평에서 가볍고 쉬운 정보 중심의 비평으로의 전환이거나, 문자 텍스트 중심에서 비평가와 향유자의 직접 만남을 통한 비평방식의 변화이거나 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비평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긍/부정 가치 평가를 떠나서) 비평의 부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에는) 비평으로서의 자기 정체와 역할에 대한 변별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만화비평이 선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현실임을 고려할 때, ‘지금 이곳에서 만화비평의 침묵은 오히려 부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내재적 측면과 외재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내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에 대한 변별적 자의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과 만화비평의 토대가 되어야할 만화미학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만화와의 건강한 긴장관계 형성에 실패했다는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외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의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전문 발표 매체와 다양한 관점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전문가 집단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만화와의 비판적 거리 및 권위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곳만화산업 생태계에서 만화비평의 산업적 필요성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다. 판매부수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만화산업이나 클릭수나 댓글수로 대중성을 평가받고 있는 웹툰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만화비평 그 자체의 산업적 수요는 미시적 차원에서 결코 높지 않다. 더구나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로 만화의 향유가 가능해짐으로써 향유가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팬덤(fandom)이 형성됨으로써 향유자는 준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향유자들은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하여 적극적인 형태로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품평을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형태의 향유를 통하여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비평의 정체가 모호해지고 그 수준이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가뜩이나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만화비평의 정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동시에 전문 비평가 집단의 비평에 대한 산업적 차원의 수요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화비평의 산업적 수요는 현격하게 감소하였고, 그나마도 본격 비평을 전개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원고 분량을 요구하다보니 정치한 분석과 풍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심도 있는 비판이나 평가보다는 단순 정보 제공 수준의 비평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곳 만화 생태계는 이글에서 당위적으로 요구할 분명한 자의식을 지닌 비평을 굳이 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초의 만화비평이라고 일컬어지는 1927년 권구현의 <신문 삽화 만평>에서부터 대중문화론과 함께 주목받게 되는 1970년대 김현과 오규원의 비평을 건너 1990년대 만화비평의 대중적 확산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해보면, 비평의 부재를 비판하는 현재 상황이 왜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전문 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양질의 텍스트가 쏟아지던 1990년대 초반을 상기해보자. 대중적인 호응과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지닌 비평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거시적 차원에서 평가해보면 문화연구라는 맥락이었지만) 각자의 관점으로 만화비평을 풍요롭게 생산했고, <스포츠 서울> 신춘문예를 통해 젊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으로 데뷔함으로써 비평의 황금기를 구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많던 비평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토록 풍성했던 관점과 해석의 지평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만화비평에 대한 접근이 단행본 한 권이나 비평 하나 정도 수준의 지속성이라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외재적인 이유는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전문적인 비평발표 매체가 부족하거나 없었다는 점, 보상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만화비평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만화비평의 내재적 측면을 생각해보자. 1990년대 비평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정말 비평의 황금기였다면, 만화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적인 특성에 대한 고민이 전개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만화비평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전제되지 않고 생산된 비평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만화비평은 다시 원론 수준으로 소박하게 돌아간 것은 아닐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들은 만화비평이 아니라 문화연구의 일환으로 대중문화, 하위문화의 첨병이라고 회자되는 만화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비평에서 만화 장르 자체에 대한 도발적인 자의식보다는 만화를 통한 문화비평의 흔적이 더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만화비평의 부재는 단지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한 자의식이나 역량이 부족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히려 만화생태계라는 거시적 차원과 만화비평생태계라는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 공시적 접근과 만화비평 역량의 축적 과정이라는 통시적 차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만화비평의 부재는 현재적인 문제, 만화비평만의 문제, 비평가만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다.

 

 

2. 만화 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비평은 차가운 글 읽기따뜻한 의혹의 산물이다. ‘차가운 글 읽기란 섬세하게 작품을 읽는 데서 출발하며, 예리한 푸른 날의 칼로 마지막까지 결을 내는 분석 과정이다. 아울러 따뜻한 의혹이란 푸른 날로 조각 낸 섬세한 결들 속에서 삶의 편린들을 엮고 그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삶을 견제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과정이다. 이 두 행위 모두 텍스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차갑고 따뜻한 긴장 속에서 작품의 의미 지평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삶과의 연관은 자기 증식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텍스트와의 지속적인 대화 과정이다. 그 대화는 텍스트 안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성찰하고 밖으로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규명하여 그 가치를 가늠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섬세한 독법으로 꼼꼼하게 텍스트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텍스트의 깊이를 탐구하고 넓이를 확장하는 지속적인 과정인 이유다.

만화비평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만화의 변별적 특성을 바탕으로 만화비평의 역할과 상관하여 조형적(plastic)인 관점에서 그 변별성을 파악해야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라는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의 형질 변화와 비평에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서 조형적으로 구성해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만화비평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비평가의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만화비평가의 자의식은 해당 텍스트를 비평을 해야 할 이유에서 출발하여 만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 그리고 향유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텍스트가 놓인 컨텍스트와의 비판적 거리의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화비평에 대한 비평가의 자의식은 지금 이곳 만화에 대한 애정 어린 의혹에서 시작하여 텍스트의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려는 부단한 긴장이다.

만화비평의 자의식 부재가 초래한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늘 게재할 수 있는 작품이나 비평해야할 작품보다 게재하고 싶어 하고 비평의 대상이 되고 싶은 작품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권위 있는 신뢰할만한 매체에 작품이 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며, 더구나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효과를 증폭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형 포털이나 출판사의 의뢰에 의한 의전비평이나 주례사 비평은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거둘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비평 자체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얄팍한 전술이다. 이와 같이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의 현재적 양상을 수렴해보면, 대부분 비평가의 관점은 은폐된 채 해설 중심으로 전개되며, 텍스트에 대한 평가가 맹목에 가까운 긍정과 칭찬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으로 인하여 건강한 비평담론 생산이 차단되고, 텍스트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는 스스로 권위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정작 비평이 기능해야 할 상황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1997년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선정성 논란을 상기해보자. 작가가 필생의 역작으로 야심차게 기획했던 <천국의 신화>가 어처구니없는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비평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더구나 만화와 연관하여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텍스트 중심의 탐구를 통한 선제적 대응은 고사하고 그 어떤 비평도 옹호의 반대논리를 펴지 못하지 않았던가. 과연 비평이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읽기와 심도 있는 해석을 진행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렸었다면, 선정성에 대한 비평의 선제적 탐구가 있었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선정성이라는 소박한 기호에 치명적인 폄훼를 당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만화의 비전문가인 20대의 새파란 검사로부터 일본만화를 베낀다는 모욕을 당하고 있었을까? 2012년 귀귀의 <열혈초등학교>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폭력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만큼의 만화 리터러시를 고민했던 비평이 있었는가? 비평이 제몫을 다했다면 <열혈초등학교>의 표면에 드러난 폭력성이 그 자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그 심층의 메타포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언론의 공격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귀귀의 B급 정서와 표현이 그만의 표현 전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 텍스트에 드러난 폭력의 컨텍스트였음을 읽어주었어야 했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와 디바이스의 발전을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다가 모바일 만화 시장을 무료화했던 2009년의 네이버 웹툰 논란을 상기해보자. 웹툰시장의 지배적인 사업자인 네이버의 일장적인 앱툰 무료화의 부당성에 대하여 비평은 무슨 의견을 제시했는가? 웹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무료라는 기형적인 시장구조를 만든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심지어 앱툰시장 마저 다시 무료화하는 상황은 만화가 비평을 키우지 않으면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당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2011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2015년 레진코믹스 사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의도로 관심을 환기시키거나 어린이를 볼모로 부모를 위협할 때, 그것의 첫 타겟이 만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비평은 생태계적 차원에서 고민해야만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는 비평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인정할 때 파악 가능하다. 만화 텍스트를 원천으로 출발했고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지만 만화비평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비평이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화 자체의 문법과 대타적(對他的) 상관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한 차별화 요소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만화는 큰 변화의 격랑 속에 놓여 있다. 유통 플랫폼, 과금체계, 디바이스의 변화에 다른 텍스트 구현 및 향유 방식의 변화가 그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 텍스트의 형질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창작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 변용함으로써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반면 비평의 부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이곳 만화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그 메커니즘 자체가 변하지 못함으로써 비평의 지체 현상을 초래한다. 그로 인하여 대형 포털 중심의 웹툰 생태계를 추수할 뿐 웹툰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웹툰이 원천콘텐츠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모든 평가 기준이 대중적 지지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지표에 종속되거나 특정 타겟의 취향을 반복 재생산하는 지극히 소모적인 대중 인정투쟁 양상을 드러낸다. 웹툰 시장에 있어서 대형 포털의 권력화는 단지 원고료를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요구하는 취향의 인정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견실한 비평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지금 이곳의 비평은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웹툰 생태계의 기형화, 황폐화를 낳고 있다. 지속적인 위기의 수사가 식상할 정도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하게 위기의 양상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는 비평의 부재라는 비판은 이제는 충격적일 것도 없는 패배주의를 낳고 그만큼 그 종속도는 더욱 가중될 뿐이다. 만화담론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창작을 촉진하며 그것을 견제해야할 만화비평이 스스로의 몫을 방기함으로써 비평 자체는 물론 만화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만화비평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만화처럼 변해야 한다. 만화가 변하듯 비평의 정체성도 그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와 구성의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의 저류에는 만화비평의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흘러야 한다.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만화와 비평의 기계적이 교합이 아니라 만화와 비평이 대타적 긴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발견해 나가야할 무엇이다. 왜곡의 미학, 시간과 공간의 상호교차적 대치, 칸사이의 호흡,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 분절의 연속화에 기반한 서사 구성 등과 같은 만화미학의 기본 요소들은 지속적인 변화의 도정(道程) 위에 있다.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만화가 살아있듯 만화비평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의식을 기반으로 만화와의 생산적인 긴장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3. 만화 비평, 담론의 장을 키우자

 

건강한 만화비평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화비평 담론(discourse)의 장을 구현해야만 한다.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미학과 비평윤리의 결합이 빚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창의성에서 출발한다. 푸코식으로 표현하자면 담론은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는 자기지시적인 집합체이다. 언표와 규칙의 집합체인 담론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며 물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며, 그것은 개인들 간의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의 층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만화담론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구성에 가까우며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담론에 기반한 비평담론을 창의적 결합으로 구성해내야 한다. 건강한 담론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역동적인 충돌과 갈등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때, 만화비평 담론은 신/, 지배/종속, 올드미디어/뉴미디어, 보수/진보, 존재/당위, /그림, 과장/축소 등과 같은 만화담론의 역동적인 대립쌍들이 비평담론과 화학적 결합과정에서 벌어지는 논란과 논쟁, 승인과 거부, 출현과 사라짐 등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기자본주의적 시장질서와 뉴미디어의 상보적 결합이라는 시대의 특성을 적극 반영하려는 전략이 담론의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될 수 있는지 진지한 관찰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배소로 등장하게 될 향유의 활성화를 전략역시 만화비평의 영역에 망설임 없이 넣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은 비평이 그렇듯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만나서 비평의 장()을 이룬다. 구현 매체, 유통 플랫폼, 장르분법, 지배적 언어, 사회문화적 공인과지지, 사회적/경제적 보상 등이 다양한 조합으로 결합하며, 비평의 성격에 따라서 구성 요소나 층위를 결정한다. 특히 전제 한 바와 같이 만화의 특성을 전략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만화비평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한다.

만화비평의 담론은 만화에 대한 비판과 담론 생산은 물론 특정 사안의 첨병이거나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맥락과 이론을 수렴해야 한다. 만화담론을 선도하거나 자극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필요한 요소들을 창발적으로 수렴함으로써 현재적 문제는 물론 예견된 갈등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의 현재적 고민은 다양하다. 새롭게 급부상하여 시장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웹툰과 관련되어서는 그것의 정체와 지향 그리고 기존의 만화와의 차별성 확보, 앱툰과의 변별,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의 중심 매개로서의 역할 등은 물론 건강한 생태계 구성을 위한 모색 등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래픽 노블역시 웹툰과 같은 모색과 탐구의 짐을 지고 있다. 이와 같이 만화를 둘러싼 고민들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내재적/외재적 양상으로 드러나고, 텍스트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콘텐츠로서의 시장 가치 및 확대 방안 등이 모두 포함되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드러낸다. 따라서 만화비평 역시 이러한 다양성에 부응하거나 선도할 수 있는 담론을 포괄해야 한다. 적어도 만화비평이 활성화되고 보다 생산적인 양상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배제의 시학이 아니라 포괄의 시학에 기반한 수렴적인 담론체계를 지행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만화비평은 만화에 최적화된 비평 방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비평이 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개개의 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콘텐츠의 특성에 최적화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은 문학의 것을 빌려온 것 뿐이다. 영화는 최근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보다 구술언어 중심 현장전달 중심의 비평이 각광받고 있는데, 이것은 매스미디어의 학습효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팟캐스트와 같은 뉴미디어의 부상에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다. 가장 산업화된 영화의 발빠른 행보 역시 그들의 생존을 위한 최적화 전략에 다른 아니다. 그러므로 만화와 같은 흥미로운 텍스트를 딱딱하고 무거운 문자중심의 비평으로 한정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 공감의 보편성, 이해의 용이성 등이 어느 무엇보다 높은 만화의 특성에 걸 맞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탐구해야함은 물론이다. 만화의 즐거움을 분쇄시키는 비평은 어떤 이유로도 온당하지 못하다. 만화가 즐겁듯 비평도 즐거울 수 있는 독립적인 즐거움 창출이라는 전제로 지속적인 모색이 필요한 이유다.

만화비평의 방법론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젊은 장르지만 가장 강력한 장르가 된 영화가 강한 이유는 수렴중심의 개방체계에 있다. 경쟁력 있고 소구력 있는 방법은 모두 창조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자기화하는 영화의 전략에 주목해보면, 만화비평도 활용가능한 방법론들을 개방적으로 수렴하여 그 적실성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문화 일반의 보편적 방법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기존의 역사주의, 형식주의,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탈구조주의, 실리주의, 독자중심, 페미니즘 등등 텍스트를 풍성하게 하고 심도를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화미학 안에서 통합시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제부터 집요하게 탐구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정체와 역할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은 다분히 당위적 요구에 가깝다. 실천의 구체적인 방안과 전략은 이제부터 실천을 통해 고민할 바다. 이제 시작이다.


2015년 <크리틱M>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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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도라에몽, 멈추지 않는 진격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서부소년 차돌이>, <마린보이>, <달려라 승리호>, <마징가 Z>, <플란다스의 개> …….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세대가 추억하는 애니메이션들이다. 이것들이 일본 작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또 얼마나 컸었던가? 그 이후 세대 역시 작품만 바뀌었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 등장하고 한국 애니메이션 매출도 4억 달러 세계 4위 규모로 성장했지만, 아직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자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은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11%(22억 달러)를 점유하며 미국(66억 달러)과 함께 세계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계시장을 압도하면서 우리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첫 번째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은 고유의 안정적인 생태계 구조에서 발원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적은 비용으로 대중성 검증이 가능한 만화, 소설 같은 원천콘텐츠를 바탕으로 제작된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조차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을 만들 때, 원작이 없다고 투자를 거부당하자 만화 원작을 <아니메주>에 스스로 연재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을 정도다.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애니메이션은 대중성이 검증된 원천콘텐츠를 확보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실패의 위험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일본의 경우 그것을 관례화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출판사, 완구회사, 방송국, 광고회사 등 애니메이션과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는 주체들이 공동으로 투자하고 참여하는 제작위원회 방식을 고집한다. 제작위원회가 구성되면 애니메이션이 방송될 시간의 광고를 구입하여 원작 만화, 완구 등 관련 상품을 광고하여 수익을 거두고, 방송 이후에는 창구화를 통하여 부가 수익을 창출한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전개되면 TV용 애니메이션을 시리즈로 계속 만들고,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제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작된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이미 충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성공거두고, 이를 기반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시즌별로 제작함으로써 프랜차이즈화 하여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창구화(windowing), 장르 전환(adaptation), 상품화(merchandising), 브랜드화(branding) 등을 통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One Source Multi Use 전략과 유기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를 통하여 일본 애니메이션은 실패의 위험을 줄이고 참여 주체들 간의 협업 비즈니스 시스템 구축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고유의 생태계를 최적화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 전략이다. <명탐정 코난>, <도라에몽>, <신세기 에반게리온>, <진격의 거인> 등 대부분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앞에서 언급한 안정적인 생태계의 결과물이다. 그 중심에는 스토리텔링 전략이다. One Source Multi Use를 성공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원천콘텐츠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향유요소를 확보해야만 하고, 미시콘텐츠를 활성화하여 상품화가 가능해야 하며, 핵심 스토리(core story)나 공통의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를 기반으로 하는 서사 확장이 가능해야하는데 그것의 기반이자 중추가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독자층이나 소재적인 측면에서 미국 애니메이션의 틈새를 공략해서 성공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다분히 미국중심적인 시각의 평가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미국 애니메이션과 대타성(對他性)을 견지하며 출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틈새시장 전략이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시장 환경, 자본, 제작 수준, 문화 등을 고려한 최적화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최적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스토리텔링 전략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활용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뱅크시스템, 집단주인공 시스템, 변신 모티브 등은 보더리스(borderless) 전략에 의해 작가군으로 영입된 추리작가들이 다양한 소재의 다층적인 스토리와 결합하여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축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선행콘텐츠를 꼼꼼하게 분석하여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대중적인 충성도 높은 스토리를 애니메이션 안으로 수렴함으로써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 최근 쿨재팬(Cool Japan)의 첨병으로서 각광받고 있는 <요괴워치>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요괴워치>1) 요괴라는 전통문화를 토대로 선행콘텐츠의 철저한 분석하여 2) 마네키네코와 헬로 키티를 결합시킨 지바냥 캐릭터를 만들고, 3) <포켓몬스터>의 캐릭터 구도와 <도라에몽>의 세계관을 텍스트 안으로 수렴하면서도 4) 요괴와의 대결이나 제압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차별화 전략을 동시에 보여준다.

지금껏 우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선정성과 폭력성 그리고 왜색에 대한 경계라는 편향된 시각에서 리터러시 해왔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왜색 짙은 작품들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다만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극히 일부분이거나 리터러시 결과의 단편이 아닐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 좀 더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향유하고 평가할 수 있다면 그들이 지닌 미덕을 벤치마킹하고 서사의 넓이와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애니메이션을 자국의 산업환경에 최적화함으로써 단점을 특색으로 바꾼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분분투도 반드시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문화는 자유로운 사고와 다양성을 토대로 한 대화의 장이다. 문화할인율(cultural discount rate)이 낮은 애니메이션은 이문화(異文化) 간의 접근이 용이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전제로 다양한 담론을 생산할 수 있고, 텍스트 간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역시 표면적/이면적으로 활성화된 장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라는 평가는 편향된 시각이거나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의 원제는 <빅 히어로 6>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텍스트 곳곳에 드러나는 일본풍 배경과 소품들, 와사비 같은 별명뿐만 아니라 거대로봇 등의 메카닉 등을 근거로 일본 애니메이션과의 연관을 주장하기도 한다. 샌프란쇼코(샌프란시스코+도쿄)라는 공간 설정, 일본풍의 배경과 소품들이 서사적 필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마블의 원작이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와사비도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 거대로봇의 메카닉은 오히려 창의적인 요소의 비중이 더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이 창의적인 상호 수렴과정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창의적인 상호 수렴과정에서 그것을 어떻게 텍스트 안에서 창의적으로 재미있게 활용했느냐, 얼마나 완성도 있게 재창조하고 있느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빅 히어로>의 성취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더 강한 재질, 차별적인 무기, 파괴중심의 제압 등과 같은 기존의 거대로봇 문법과 는 달리 폭신한 재질의 로봇, 고전적인 스타일의 물리적인 로켓주먹, 치유와 위로, 자기희생을 통한 문제 해결 등한 창의적인 재해석은 로봇메카닉물의 새로운 지평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빅 히어로>는 마블+디즈니+픽사의 어법이 창의적으로 결합하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디즈니가 40억 달러에 마블을 인수한 것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뿐만 아니라 그 외의 5000개 캐릭터이며, 그것을 얼마나 탄력적,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맥스의 공감각적 자극과 개그씬은 물론 서사의 주요 마디마다 던지는 성찰적 질문들은 탁월했다. 베이맥스는 서사의 주요 마디마다 왜 싸움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게 진정 테디가 원하는 것일까?’와 같은 자기성찰적인 대사를 던진다. 이 성찰적 대사는 기존의 로봇 메카닉물에서는 볼 수 없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반복을 통해 히로의 성장이 견인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근력은 보수적인 생태계 구조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에 있다. 그동안 견지해온 열광과 부정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로는 그들의 힘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자신들의 산업 환경에 최적화하기 위하여 그들이 선택하고 집중했던 전략들은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준거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징가 Z><진격의 거인>으로 바뀌는 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고, 비판하고, 벤치마킹했는지 냉철하게 돌아볼 시기임에 분명하다.

2015.2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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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Source Multi Use, 향유가 먼저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One Source Multi Use는 원천소스(One Source)의 창구화, 장르 전환, 관련 상품화, 브랜드 창출(branding) 등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마케팅 활동을 말한다.

창구화(windowing)는 콘텐츠를 시간적으로 계열화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동일한 콘텐츠를 창구별(매체별)로 노출시키는 시점을 달리하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장르 전환에 비해 변환 비용이 적게 들어 리스크를 줄일 수 있지만, 신규시장 창출 효과가 없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크지 않은 수익 창출 방법이다. 이와 같은 창구화의 결과를 창구효과(Window Effects)라고 하며, 이것은 시간적/공간적 노출의 차별화를 통하여 배급효과를 높이고, 홀드백(Holdback)을 설정하여 개별 창구 간의 충돌을 전략적으로 피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함으로써 콘텐츠의 수익 창출 기간을 연장하는 효과가 있다. 영화를 극장, 유료TV, VOD, DVD, 공중파TV, 케이블TV 등과 같이 다양한 창구를 통해 향유하게 함으로써 수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장르 전환(adaptation)은 콘텐츠를 장르 별로 계열화시켜 신규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이미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한 소설, 만화, 웹툰 등을 매스미디어와 결합하여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장르 전환은 향유자들이 전환 전후의 콘텐츠로부터 동일한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장르 전환은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독립적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므로 전환비용이 많이 들고, 선행콘텐츠의 성공이 전환하는 콘텐츠의 성공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창구화에 비해 위험도가 높지만, 그만큼 신규시장 창출 효과가 크기 때문에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상품화(merchandising)는 콘텐츠 내용이나 소재를 상품으로 개발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상품화는 캐릭터, 중심 소재, 배경, 이미지, 소품 등과 같이 콘텐츠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관련 상품(merchandised goods)과 직접적 연관은 없으나 물리적으로 덧붙여진 PPL(Product Placement)과 같은 부가 상품(tie-in)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품화는 콘텐츠의 성공을 전제로 하지만, 기획 단계부터 상품화 전략을 수립하여 콘텐츠와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유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브랜드화는 콘텐츠의 인지도와 지속적인 향유를 통해 확보된 충성도를 활용하여 브랜드 가치를 유지, 확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해리포터시리즈는 소설, 영화, 게임, 테마파크 등으로 장르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압도적인 브랜드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이미 시리즈가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콘텐츠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One Source Multi Use의 동력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 여부, 원천콘텐츠의 전환 적합성, 거점콘텐츠의 최적화 여부, 연동 콘텐츠 간의 상호 프로모션, 다양한 창구로의 확산, 브랜드 가디언의 효과적인 통제에 의한 상품화, 지속적인 브랜드 아이덴티티 확보 등에 있다. 그동안 콘텐츠 업계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강력한 원천콘텐츠의 확보 방안, 전환의 최적화 장르 파악 및 전략 탐색, 상호 프로모션 방안, 상품화 전략 등에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나는 2012년 이래 가공할만한 신드롬을 낳고 있는 미생이다. 웹툰은 11억 뷰 이상, 책은 250만부 이상, 6-7%대의 드라마 시청률, 콘텐츠파워지수 1위라는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미생의 사회적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미생 법안이라는 웃지 못 할 명명을 낳기도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미생신드롬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웹툰 <미생>이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연재되는 동안(2012-2013) 단행본 미생이 순차적으로 출간되고, 캔커피, 맥주컵, 종이컵, 노트, 이력서 등의 부가상품이 개발/출시되고(2012-현재), 드라마 <미생 프리퀄>(2013), 웹툰 <미생-사석>(2014), 드라마 <미생>(2014), 패러디 버전인 드라마 <미생물>(2015) 그리고 웹툰 <미생>가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생One Source Multi Use는 웹툰 연재 당시부터 비정규직 문제, 직장생활 애환과 불안정성 등을 핍진한 에피소드, 촌철살인의 경구, 이완의 절묘한 서사 전개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이를 통해 사회적 담론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지금 이곳의 문제를 향유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체적인 퍼포먼스를 통하여 단행본, 부가상품, 드라마, 광고, 패러디 드라마의 연속적인 성공을 이끌었고 연재될 <미생>를 통해 프랜차이즈 콘텐츠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은 반드시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2009년 디즈니가 40억 달러에 인수한 것은 마블이지만, 실제 그들이 원한 것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arvel Cinematic Universe)였다. 마블은 이미 영화 판권을 팔아버린 원천콘텐츠를 제외하고도 5000여개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구축할 수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무한한 까닭이다. 이것은 헨리 젠킨스가 주장했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의 가장 소박한 형태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할 수 있는 양상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은 멀티플랫포밍을 통해 개별적인 스토리들이 모여 하나의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를 구성하는 일종의 상업주의적 팬덤 현상이다. 이와 같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유사한 예가 소박하지만 미생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미생신드롬 혹은 미생프랜차이즈화 과정은 One Source Multi Use의 선순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미생을 통해서 적은 비용으로 대중성 검증이 가능한 스토리성을 풍부한 원천콘텐츠의 확보, 일정 기간 주기적인 노출을 통한 지속적인 향유의 장 마련, 브랜드 가디언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의 탄력적 운영, 미디어별, 장르별 특성에 최적화된 전환 전략 탐구 등의 성공적인 사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출판계의 불황이 더욱 심각해졌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전 만화도 그랬다. 새로운 플랫폼과 창조적으로 결합하여 웹툰으로 형질변환에 성공함으로써 시장은 3000억 규모로 커졌다. 그런면에서 출판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웹툰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 드라마, 게임 등과 같은 거점콘텐츠와 상호연동하려는 One Source Multi Use의 전략은 물론 마블의 예에서 보듯이 보다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서사세계 구축의 시도 역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않아 가능성의 영역에 남아있는 전자책이 본격화될 때, 마치 만화가 웹툰으로 위기를 타개한 것과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은 웹툰이 급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충성도 높은 향유자층의 지속적인 참여 유도와 소통의 공간 마련, 원천콘텐츠로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성 확보, 거점콘텐츠화 과정에서 보다 유기적인 서사세계 구축의 유연한 자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최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출판사 팟캐스트를 통해서 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책이 언제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듯이 One Source Multi Use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유연하고 적극적인 출판계의 시도를 꿈꿔본다.


<책&>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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