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최선, 낙관의 유쾌한 고군분투

-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다릴 것이 생겼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한참을 기다리던 요시다 아키미의바닷마을 다이어리7권을 그렇게 후딱 읽어버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기다린 시간만큼 아주 천천히 차를 우리듯 읽었어야할 작품을 급한 마음에 후루룩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그 허전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였다. 물론 그 못된 습벽으로 이 작품마저도 정주행하고 말았지만,바닷마을 다이어리8권을 기다리듯중쇄를 찍자4권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설렘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긍정적인 주인공의 성장의 고군분투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그리 새롭지는 않다. 중성적인 여성 혹은 작고 다부져서 아기 곰처럼 생겼다고 묘사된 유도선수 출신 출판사 신입직원 쿠로사와 코코로, 진심과 최선이라면 언제든 기대할 수 있는 선의와 낙관 그리고 여지없는 긍정의 결말은 대중서사의 익숙한 컨벤션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랬듯이 알고 보면 모두가 선한 사람이라는 이 작품의 설정은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구조 밖에 있다. 점점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 즉 서로 다른 존재와 세계, 정서나 목표 간의 충돌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갈등에 대한 피로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지향을 통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것일까? 갈등을 통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가 유용하듯이 갈등을 이완시킴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즐거움도 지금 이곳서사의 주목할 지점이다.

중쇄를 찍자에 마음을 뺏긴 것은 출판 현장의 살아있는 모습을 중심소재로 활용하는 있다는 점, 쿠로사와 코코로에게서 장그래가 읽혔다는 점(물론 장그래 보다는 밝고 조금 가벼운), 중심 서사의 캐릭터와 에피소드별 중심 캐릭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물론 우리는 이러한 예로슬램덩크라는 탁월한 예를 알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진심과 선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만화출판이라는 소재의 현장성을 제대로 살리면서도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는 작가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출판현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만화출판 정보가 가볍게 제공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만화를 팔고자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 안에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기 곰의 분투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 역시 현실의 모습과는 무관한 우리가 보고 싶은우리의 모습을 투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진심, 최선, 낙관의 긍정적 기대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가슴을 뛰게 한다. 그것은 아직은 나와 무관하지만 그러한 문맥 위에 스스로를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인한다. 전체적으로 씩씩한 모습으로 유쾌함을 유지하는 쿄토칸사람들의 열정을 통해서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다고 근거 없는 기대와 자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엄혹한 현실 안에서 무기력하게 무릎 꺾인 우리의 처음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 사는 일이 그렇다고 자조하는 우리에게 올곧은 체축으로 다시 한 번 서보라고 따듯하게 이야기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즐겁다. ‘팔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판 것이다라는 쿄토칸식구들의 자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重版出來는 초판을 소진하고 중쇄를 찍어 돈을 벌겠다는 천박한 갈망이 아니라 사람들의 꿈을 짓고 있는 만화가에게 지속적인 창작의 기회를 마련해주려는 편집자의 따듯한 소망이다.

취향에 따라서 이 작품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서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림의 완성도는 독특한 연출이나 완벽한 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분위기와 속도 그리고 이야기와 어우러진 정도가 아니겠는가?

 

<만화규장각> 2016.05.30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일상성의 소환과 즐거움의 호명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도깨비감투에는 1970년대 풍경(landscape)이 있다. 그곳에는 서울 어느 골목에 사는 혁이네 가족만의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몰장소적 풍경으로서의 다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 김홍중에 따르면 풍경은 향수자가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구성하는 일종의 제도적 세계상이며, 동시에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변동을 통하여 지각되고 감지되는 역사의 구성물이다. 그는 풍경을 주체의 경험을 초월하는 선험적인 인식틀이고, 체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제도로서 현실의 물질적 토대를 포함하며, 언어적논리적 질서를 넘어서는 영상적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깨비감투에서 만날 수 있는 1970년대 풍경은 특정 시공간을 잘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적인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곳’(現在)이 소환하는 풍경이다. 그것은 실체적 공간으로서의 1970년대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으로부터 재구하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대표성을 갖게 되는 시공간이며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는 사라진 소중한 무엇인가가 찾아가는 대타적인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도깨비감투의 풍경 속에서는 문 밖을 나서면 친구들이 있고, 서로의 이야기가 있고, 좁았지만 자유로웠던 골목이 있고,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을 밥상이 있고, 꾸중하는 어른이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옳은 일에 모두 수긍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명랑만화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일종의 컨벤션이다. 박인하와 김낙호는 1970년대를 명랑만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은 웃기는 만화라기보다는 일상을 그린 만화로 규정하며, 그 핵심은 친근함과 일상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명랑만화 안에서 친근함과 일상을 구성하는 컨벤션에는 당대가 지향했던 양친부모가 모두 있는 중산층 가정,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단독주택), 이웃과 함께하는 골목길이라는 물적 토대는 물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도덕 기준과 합의 가능한 가치관이 내재화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당시의 보편적인 풍경이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풍경을 당위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명랑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교화적, 도덕적, 당위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명랑보다는 바른만화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은 도깨비감투가 명랑만화보다는 바른만화에 가까웠다는 말이 아니라 바른만화의 성격을 내재화한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작품 발표 당시 지향했던 보편적 일상의 반영이거나 검열과 심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적 타협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핵가족화, 이웃 간의 관계 단절, 가치관의 아노미화 현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동시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바라본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던 개발독재정권의 검열과 탄압이 심의라는 이름으로 혹독하게 자행되는 시기라는 점을 상기할 때, 도깨비감투를 비롯한 당대의 명랑만화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일상은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요구받는 일상이거나 과장된 낙관 속에 은폐된 일상에 가깝다.

도깨비감투만약 내게 〇〇〇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판타지를 한국적인 소재인 감투로 바꾸어 하이콘셉트(high concept)로 전면화한 작품이다. 도깨비감투는 투명인간의 변형으로 해리포터의 투명망토와도 다르지 않고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꿔봤을 소박했지만 보편적이었던 판타지의 구현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도깨비감투라는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도구를 획득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상담과 모험담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마법의 도구를 얻게 되기까지의 모험담과 마법의 도구를 얻음으로써 새롭게 생긴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의 모험 및 성장담 그리고 그 능력을 슬기롭게 처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귀환담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도깨비감투는 이러한 상례에서 벗어나 도깨비감투를 얻고 난 이후에 일상 속의 소소한 소동 혹은 다소 낙관적이거나 맥락 없는 모험을 그려냈다. 제사, 방학, 도둑, 위문공연, 눈싸움, 목욕탕, 성적표, 불우이웃돕기, 설날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납치범 검거, 밀수범 검거, 탈옥수 자수, 북한, 땅굴 등이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월간이라는 특성과 초등학생이 중심 독자였다는 점에서 전자와 같이 1년 단위로 가정과 학교의 루틴을 중심 소재로 활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소 이물(異物)스럽거나 맥락 없는 소재임에 분명하다. 특히 우연하게 북한에 도착하고 그곳의 실상을 바라보고 땅굴을 발견하는 등의 에피소드(별책부록14/ 복간본 페이지가 픽스되면 복간본 기준으로 권수 표기 하겠습니다.)는 애니메이션 <똘이장군>(1978) 식의 반공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명랑만화에서까지 왜 굳이 북한을, 그것도 아주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려야했는지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부의 압력에 의한 작가의 창작권 침해나 작품의 완성도 저하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깨비감투의 중심 서사는 중심캐릭터인 혁이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단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들을 도깨비감투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다만, 일반적인 서사물은 대부분의 뚜렷한 적대자 캐릭터를 상정하고 그들과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향 가치를 부각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도깨비감투에서는 뚜렷한 적대자나 본격적인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명랑만화의 성격상 본격적인 갈등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 중심의 재미에 그 중심을 두고 매월 단위의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요소와의 해소과정을 통한 성찰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결론(미덕)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의 일방적 서사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모험담의 동력이 되어야할 성장이나 성찰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서사적 결함이 아니라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월간 잡지라는 압도적인 매체를 통해, 월간이라는 분명한 주기를 가지고, 초등학생이라는 뚜렷한 타깃에 맞추어, 연재물이지만 단편적인 성격이 강했던, 일상 속의 재미를 지향했던 명랑만화의 장르적 특성에서 본다면, 도깨비감투의 이와 같은 서사적 특성은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지 명랑만화가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꺼벙이, 탱구, 두심이, 요철이, 고집세 등)를 중심으로 일상 속에서의 웃음을 전면화하였지만, 이 작품은 개성적인 캐릭터(혁이)보다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도구(도깨비감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할 수 있다.

사실 엄혹했던 시대적 배경과 열악했던 산업적 환경 그리고 제한적이었던 소비 및 향유의 토대를 고려할 때, 1970년대 한국 만화산업에서 명랑만화는 최적화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명랑만화는 당국의 심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분명한 독자층과의 원활한 소통에 중심을 맞추기 위하여 단순하지만 분명한 컨벤션의 설정, 단편서사 중심의 스피디한 전개, 심각한 고민보다는 가벼운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략한 선중심의 약화체(略畫體)와 재미있는 희화체(戲畫體)를 활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일상을 중심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운 지점이 될 수밖에 없고, 상이한 가치 간의 긴장과 대립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갈등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명랑만화의 수다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긴장, 갈등, 변화가 내재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 회귀할 뿐인 체제 순응적이며 기존 질서를 강화할 뿐인 장르라는 혐의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와 본격적인 갈등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구나 도깨비감투에서 사회악(社會惡)이나 체제악(體制惡)을 도깨비감투로 제거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은 지극히 표면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명랑만화로서의 장르적 특성과 주 독자층이 초등학생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러한 비판이 유효할 것인가는 좀 더 숙고해볼 문제다.

도깨비감투의 가장 지배적인 설정은 현실에서는 무력하거나 잉여로 취급받았던 어린이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타개해나간다는 판타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십대의 어린 주인공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어른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무력한 현실을 타개하고 싶은 어린이들의 욕구 등을 창조적으로 수렴한 결과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깨비감투의 이러한 설정은 독자와의 공감을 높이고 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는 중요한 서사 장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좋은 일에만 효과가 있는 능력이라는 단서와 언제든지 분실할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모두가 알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설정은 일종의 데드라인(Dead Line) 설정과 같은 서사 장치로서 극적 긴장을 조성할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도깨비감투라는 중심 소재 외에는 매화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되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는 다소 어렵다. 서사적 완성도를 논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피소드별로 분석하여 그 안에서 서사적 완성도를 평가해야할 것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서사적 완성도보다는 시트콤처럼 일상 속의 재미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명랑만화의 계보학적 접근을 통하여 이 작품만의 변별성을 추론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깨비감투만의 평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만화에서 분명한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다소 모호해진 명랑만화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한 토대 작업이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지면과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하여 이 글에서는 문제 제기에 그칠 뿐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어깨동무가 주는 신뢰와 재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에 연재되는 작품의 대중적인 지지와 영향력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도깨비감투를 제대로 읽기위해서는 어깨동무의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다. 현재적 시점에서어깨동무를 발행했던 육영재단의 성격과 실체, 발행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 시절 우리가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작품들을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로운 시점에 단행본 형식으로 읽어보는 것도 도깨비감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 역시 도깨비감투를 무척 즐겁게 읽으며 자란 세대(심지어 그 시절 도깨비감투를 소재로 동화-지금으로는 팬픽까지 써봤음을 실토한다)로서 오십이 넘은 나이에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오히려 단순하고 담백했다. 비쩍 마르고 키만 훌쩍 커버린 초등학생 하나의 소환, 잘 사는 사람보다는 잘 살고 싶어 애쓰던 서울 변두리 풍경의 소환, 친구들에게 빌려 읽던 도깨비감투갱지 냄새의 소환……이 작품을 매개로 타임 슬립(Time Slip)하는 순간 모든 현재가 미끄러지고 오롯이 그 시절의 나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의 기억 어딘가에 도깨비감투와 함께 나를 묻어 두고 있었나보다.

신문수 만화는 도깨비감투가 그러하듯 추억 속의 만화가 아니다. 도깨비감투가 지금 이곳에서 다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깨비감투에는 신문수 특유의 따듯하고 여유 있는 감성이 오롯이 살아있는 까닭이다. 하여 우리는 갈수록 강퍅해지는 세계 안에서 도깨비감투를 읽던 시절처럼 위로받고 의지하고 꿈꾸고 싶다. 처음 만났던 도깨비감투에서처럼.

2016년 도깨비감투》복간본 수록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콘텐츠 융합의 즐거운 무한증식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방탄소년단,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웹드라마 <두 여자>, <상사3>, <미생>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공통점 구현 미디어, 플랫폼, 장르, 언어, 팬덤 형성 방식, 수익구조 등 그동안 독립적인 콘텐츠의 고유성을 결정 짓던 주요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융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콘텐츠 융합은 콘텐츠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지속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다. 따라서 융합의 시도는 매우 유연하고 개방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모색될 수 있다. 장르, 미디어, 플랫폼, 구현 기술 등 지금까지 콘텐츠의 고유한 정체와 위상을 규정 짓던 요소들의 경계를 허물고, 콘텐츠가 보다 많은 가치를 보다 오랫동안 창출할 수 있도록 개방적 증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콘텐츠 융합은 네트워크성, 상호작용성, 정보의 통합성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디지털 문화환경이 콘텐츠 생산과 향유에 있어서 완전히 내재화되었다는 점, 이로 인한 다양한 플랫폼이 급부상하면서 차별적인 콘텐츠 구현을 위한 전략적 탐색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 새로운 플랫폼과 유통 채널에 최적화된 수익 모델 탐색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과 같이 다양한 관점과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원인의 다양성만큼이나 융합의 양상도 매우 다양하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융합이 시도되고 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처럼 기존에 제작사가 확보하고 있는 캐릭터를 활용하여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이라는 대전제로 수렴하거나, 방탄소년단처럼 ‘Everything is connected!’라 주장하며 소셜 파워(social power)를 기반으로 다른 장르와 영역에서 시도되었던 콘텐츠 노출 및 전개 방식, 스타덤 및 팬덤 전략 등의 유연한 조형을 드러내거나, 웹드라마 기반의 콘텐티브 브랜드를 구현을 시도하거나, <미생>처럼 비동기식 전개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현하는 등의 사례만 보아도 융합의 다양한 양상은 한 마디로 확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와 같이 콘텐츠 융합의 배경이나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다분히 조형적이지만, 융합의 동기는 분명하다. 콘텐츠 융합은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축함으로써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 및 충성도를 높이고, 여타 콘텐츠에 비해 차별적 우위를 확보하여 수익을 지속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다. 따라서 콘텐츠 융합에서는 기존의 각 장르나 영역이 고수해왔던 고유성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를 논리적 배경으로 디지털 문화환경 그리고 콘텐츠 생태계의 역동적 경쟁체제가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창작자, 원작, 독립성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향유자, 스토리월드, 연결성 중심의 융합의 시도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콘텐츠 융합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디즈니에 의해 42억 달러에 인수된 마블은 단지 만화회사가 아니다. 마블은 확실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5,000여개의 캐릭터를 보유했고, 그들을 창조적으로 수렴하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arvel Cinematic Universe, MCU)라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에 성공하였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축하여 향유자가 스스로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콘텐츠 수명의 지속적 연장이 가능해졌고, 새로운 콘텐츠의 등장, 이에 따른 수익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방탄소년단은 더욱 놀라운 융합의 사례다. 방탄소년단은 직접 음악을 창작함으로써 그들은 음악을 통해 본인들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며, 동시에 그들은 SNS나 다양한 플랫폼으로 통하여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전략을 취했다. 더구나 그들의 음악의 주제는 동시대, 동세대의 고민을 나누는 내용이 중심으로 이룸으로써 팬들은 방탄소년단과 자신들의 고민을 나누고 있다는 강한 심리적 연대를 형성하게 됨으로서 더욱 강력한 팬덤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은 트위터 최다 활동 남성그룹 부문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를 정도로 그들은 SNS를 적극 활용하며, 데뷔 전부터 자신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믹스테잎, 영상, 사진 등을 올리며 팬들과 소통을 시도했다. 가상의 방송국을 개설하여 멤버들이 직접 다양한 포맷의 TV 프로그램에 도전하거나 Mnet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방탄소년단의 아메리칸 허슬 라이프>을 통해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 것도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SNS 그리고 다양한 플랫폼을 가로지르는 전방위적 융합을 시도함으로써 방탄소년단 고유의 스토리월드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최근에 주목해야할 콘텐츠 융합은 웹드라마와 같은 새로운 장르에서의 시도다. 구현 미디어와 플랫폼의 변화에 따라 형질 변환에 성공한 웹드라마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수익구조가 항상 한계로 지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이러한 한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콘텐티드 브랜드전략을 시도하는데, 72TV의 인기 웹드라마 <두 여자>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dxyz 브랜드로의 확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웹드라마의 브랜드 파워를 전면화한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하고, 그와 관련된 콘텐츠는 물론 다양한 파생 상품들로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이다. 그 외에도 마블처럼 고유의 원천 IP 콘텐츠를 활용한 콘텐츠 프렌차이즈화를 시도한다거나, KBS가 시도했던 <간서치열전>처럼 웹드라마와 TV드라마의 상생적 결합 방식도 시도된 바 있다. 무엇보다 웹드라마의 케주얼한 특성을 극대화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구현 시도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향유를 지속, 강화, 확산하기 위하여 복수의 매체와 장르를 가로질러 스토리월드를 확장적으로 구축해나가는 스토리텔링 전략 혹은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전개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축/증식하는 스토리세계를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라고 부른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는 다수의 매체와 장르 전개 과정을 통하여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는 현재진행형의 증식성과 개방성을 지향한다. 개별 미디어와 장르를 통해서 자족적인 형태의 콘텐츠로 창작되지만 그것은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세계로서 스토리월드의 구성요소로서 기능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융합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적 선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양질의 콘텐츠인데, 그 중심에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의 지속적 창출, 즉 향유가 있다. 융합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향유의 놀이터를 마련하는 현재적 대압이 융합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콘텐츠 경북> 2018 여름호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다름에 대한 어설픈 편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학생들과 쓰촨을 다녀왔다. 방학마다 중국 곳곳을 방문하지만 늘 놀랍고 새로울 뿐이다. 평생을 보아도 제대로 다 보기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과 넓은 지역, 그리고 빠른 속도의 변화가 놀라움이라면, 그 안에서 문득 발견하는 그들의 문화는 새로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화란 삶의 반영이니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삶이라는 것이 당대의 것만도 아니어서 오랜 전통을 온몸으로 체감하지 않고서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은 그들이 자랑하듯 오랜 역사와 수많은 소수민족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개개의 군집적 성격이 더 강하지 않던가? 그러니 현재 중국이 어떻다 이야기하는 것도 섣부른 일이겠지만 코끼리 다리 더듬는 심정으로 그 새로움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이번 탐방에서 무엇보다 새롭게 발견한 것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을 전략적으로 세련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르다는 의미가 단지 동시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과 공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차이까지 현재적 시공간 안으로 수렴하여 구현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55개 다양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나라다보니 특이한 것도 많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지 않고 각각 공존하게 하고 있으니 그 다양성의 경쟁력은 이미 아는 바와 같았다. 거기에 전통 문화를 과감하게 현재적 맥락에서 소환하여 지속적으로 콘텐츠 가치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규모와 실천에서 세련된 참신함이 돋보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인상공연뿐만 아니라 멋스러운 전통 건축물 안에 들어선 스타벅스와 파리바케트 같은 현재적 향유 공간, 전통문화와 연계한 다양한 참여형 콘텐츠, 관광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민의 삶과 연계된 유적지는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포괄이 아닌 배제, 이해가 아닌 강요가 앞서는 닫힌 사회다. 배제와 강요에 익숙해진 닫힌 사회의 구성원들은 누구도 쉽게 수용하지 않듯이 우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문화든 사람이든 혹은 다른 시대이든 물 흐르듯 섞이지 않으면 함께하기 어려운 시대다. 물론 중국이 답이라는 말이 아니다. 광장과 공원마다 국가주의적 색채가 도드라지고, 낯설고 강압적인 구호가 가는 곳마다 붙어있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혼란도 분명한 그들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민족, 시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에 자꾸 눈이 갔던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또 하나 이번 탐방에서는 어설픈 편견이 여지없이 깨졌다. 그동안 중국에서 물건을 살 때, 그들이 달라는 대로 주면 손해라는 인식이 있었다. 사실 반 이상 깎아서 사기도 했으니 꼭 편견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청두에서는 정찰제라서 깎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물건 값에 더욱 신뢰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인민공원에서 우리에게 같이 배드민턴을 치자고 하거나, 전철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던 노부부나, 도강언에서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던 양꼬치 팔던 회족 청년이나, 아미산 부근 숙소에 두고 온 시계를 전화를 걸어 찾아준 주인이나, 거의 모든 결제를 모바일로 하는 모습이나 이번 탐방에서 만난 현재 중국의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대상을 폄훼하는 것은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의 발로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와 같은 IT기업의 급부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중국을 짝퉁상품과 싸구려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편견은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소통하지 못한 결과다. 편견의 원인이야 무엇이든 책임은 편견을 갖는 사람과 그 대상 모두를 해친다. 방학을 맞아 해외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해 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인 이유다.

 

2018.02.02 매일경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전문가와 장관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문가는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가지고 그 분야에서 비해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이 하루아침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전문가는 대부분 오랫동안 그 분야의 일을 한 사람이다. 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거나 혹은 밥벌이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문가라는 말에는 자기 분야에 대한 자부와 자존의 품격을 가진 사람들의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Aura)가 있다.

서울신문 중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끈 총감독 송승환 씨의 며칠 전 인터뷰가 화제다. 그는 자신이 잘한 일 중 하나가 MB정부 때 문화부 장관을 거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MB정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 문화부 장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는 직접 물어봐야 알 일이지만, 나는 그 의미가 후자일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그러한 선택이 그가 문화기획전문가로서, 연극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전문가다운 자부와 자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 말은 문화부장관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일생을 바쳐 일궈온 자기 분야 전문가로서의 열정과 자부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멋지지 않은가? 누구는 하지 못해 안달인 자리를 거부하고 자기 분야에서 자기가 즐기는 일을 꼿꼿한 자부와 자존으로 성공적으로 일궈내는 전문가. 평창 동계 올림픽의 개폐회식에서 가슴 뛰는 감동을 얻은 이들이라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드론쇼와 마지막 성화 주자였던 김연아의 공중 스케이팅 그리고 선수단 입장 내내 춤을 함께 춤을 추던 자원봉사자들의 열정에 압도된 이들이라면, 그러한 성취가 어디에서 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송승환 씨는 젊은 시절 텔레비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도 늘 자신을 연극배우라고 불렀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젊은 시절 그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지향점에 대한 반복적인 선언이 아니었을까? 지향해야할 정체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연극으로 시작해서 방송과 공연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는 그가 보여준 전문가로서의 성취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기 분야에서 브랜드를 갖게 된 전문가에게 마치 시혜나 베풀듯 장관직을 권하는 풍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장관이야 해당부서에서 그 분야 일을 평생 해 온 전문 관료들이 맡으면 될 일이다. 20년 전쯤 김영하 작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대다수 작가들이 대학교수로 가는 세태를 꼬집었었다.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마치 교수인양 대학으로 가서는 창작을 이어가지 못하는 세태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작가의 유명세에 편승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모셔가는 대학교를 비판한 것이다.

장관이든 교수든 그것도 전문가의 영역이어야 할 것이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전문가의 영역에 불쑥 다른 영역의 전문가가 들어오는 것은 둘 다의 전문성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분들이 장관 자리를 제안 받고 입각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대부분 기대만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그동안 쌓아왔던 명성에 상처만 내고 초라하게 물러났다. 전문가의 전문성을 유명세 정도로 이해하거나 지나치게 신화화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면 지위나 권력을 앞세워 시혜를 베풀 듯 제안하기 전에 그가 갖고 있는 전문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중을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살아가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송승환 씨의 장관직 거부와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자꾸 연결되며 멋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감상은 아니리라.

 

2018.03.30. 매일경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