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떠나는 여행

728일 얼바인세도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 7시에 렌터카를 인수하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가 집에서 10마일(16)쯤 떨어져 있으니 우리차로 가서, 렌터카는 내가 몰고, 우리 차는 아내가 몰고 와야 했다. 미국에서 처음 차를 렌트하려다 보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나보다 영어가 원활한 첫째를 태우고 가야했고, 그러다보니 둘째만 집에 둘 수가 없어서 결국 온 가족이 가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여행 전날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일찍 자라는 말에도 흥분이 되는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이 길어지면 아침이 분주하다. 결국 분주한 만큼 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05도로를 타고 10여분쯤 달리다가 빠져나와서 우회전을 하려는데, 뒤에 있던 BMW가 슬그머니 와서 우리 차를 받았다. 추돌 사고였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망해하며 내렸다. 뒤에 BMW로 가보니 운전자는 창문도 내리지도 않고 안에서 혼자서 떠들 뿐이었다. 일단 갓길로 대라고 손짓을 하니 그제야 뒤따라왔다.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이곳에 오자마자 들었는데, BMW 운전자는 느릿느릿 내리더니 역시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화가 났지만 내차에 큰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라고 했더니 그제야 미안하단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횡단여행을 떠나는 첫 날이 아니던가? 아침, 첫날, 새봄 등등 처음 시작하는 것에 유난히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알기에, 여행을 시작하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그를 잡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아이들 보기에 볼썽사나울뿐더러 이미 놀라 있는 아이들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과를 받아내기에는 불행히도 나의 영어실력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저 횡단여행의 액땜을 했다고 믿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정보다 30분쯤 늦었다. 예약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났더니 하루 15달러를 추가부담하면 보험이 가능하단다. 렌터카 보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225달러의 예상하지 못한 경비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고 횡단을 시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는가?

모든 서류 처리를 끝내고 차를 인수하고 보니 전에 설명했던 차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아내와 풀 사이즈 카’(full-size car)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그보다 한 사이즈 작은 스탠더드 카’(standard car)급과의 연비 차이는 얼마가 되는지, 그리고 MP3는 사용 가능한지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렌터카 회사를 미리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담당자 말이 어느 차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타 캠리나 닛산의 알티마2.5[각주:1] 정도가 될 것인데, 캠리는 예약 상 없을 듯하고 알티마2.5가 될 것이라고 했다. MP3는 사용 가능할 것이고, ‘스탠더드 카급과의 연비 차이는 크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알티마2.5겠지 했는데 느닷없이 브라운색 마즈다6. 알티마2.5가 마즈다6보다 좋은 차인지 아닌지는 몰아본 적이 없는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마즈다6의 기어인데 D로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M에 놓고 출발을 해서 엄청난 소음과 저속을 경험하였다. 운전한지 20년이 넘었는데 낯선 것은 낯선 것이다.

차량 외부와 6,000마일(9,650) 정도 주행한 것으로 보아 새 차인 것은 분명한데, 차량 내부를 보니 마치 5-6년은 운행한 차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차가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숙소 예약이 끝나있는 상황이고, 오늘 달려야 할 거리와 시간은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둘째를 우리차로 보내고, 나는 첫째와 그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조금 달리다보니 차량소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몇 번을 달리고 서고를 반복해보았는데, 이 차로는 횡단은 둘째 치고 집까지 가는 것도 어려웠다. 차를 돌려 다시 렌터카 회사로 가서 차량 소음이 너무 심하니 다른 차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직원이 나와서 시동을 걸더니 무슨 소음이 나냐고 묻는다. 혹시 D가 아니라 M에다 놓고 운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속기어에 두고 운전을 했으니 그 소음이 오죽했으랴, 추돌 사고와 마음에 들지 않는 차, 떠나려는 바쁜 마음이 겹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차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강력하게 차를 바꾸어달라고 하자 직원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편도(one-way)로 뉴욕까지 가는 우리에게 좋은 차를 주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만약 다른 차가 없다면 하나 아래의 스탠더드 카급의 차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다며 코발트색 마즈다6을 보여주었다. 5,000마일(8,046) 정도를 달린 새 차인데 내부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고, 운전을 해보니 앞에 차보다 편했다. 이 차로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서류를 모두 다시 꾸며야 한단다. 그제야 직원이 왜 그렇게 싫은 기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차종인데 그냥 타지, 왜 서류를 다시 꾸미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뉴욕까지 15일을 같이 해야 할 차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차로 찝찝한 기분에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차에는 MP3 연결잭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놓고 들었더니 소리가 제법 들을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여행에서 운전의 피로를 풀어주던(때론 피로를 가중시키던) 유진이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약하면서 몇 번을 확인했는데, 그 때에는 MP3 연결 잭이 있다고 해놓고서 막상 차를 받고 보니 없었던 것이다. 횡단하면서 듣겠다고 유진이가 며칠 전부터 음악파일을 다운 받고, 정리해 놓은 터였다. 운전하는 나도 나였지만 차 안에서 장시간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유진이의 실망이 걱정 되었다. 유진이에게 미안해서 이거 어떻게 하지?”라고 했더니, 아이는 추돌 사고에 차 교환 등으로 이미 놀라고 지쳐있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팟 자체 스피커로 들으면 된단다. 아이가 아빠보다 현명했다. 고민 끝에 아이팟을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 놓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위에서 소리가 나니 훨씬 음량이 좋았다. 다소 옹색하긴 했지만 어쩔 것인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면 통()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실었다. 떠나 있는 기간에 비례해서 짐은 늘고, 여정이 진행될수록 짐으로 인한 수고도 는다.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 12개들이 햇반 두 상자, 카레를 비롯한 즉석 요리 24, 6개들이 컵라면 세 박스,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작은 가방, 1리터 생수 24개 한 상자, 약과 간식이 들어 있는 아내의 가방, 여행 중 아이스박스 역할을 해 줄 방수 가방 등이 전부였다. 21일 간의 여행이지만 캐리어와 카메라 가방, 노트북 등을 제외하고는 가는 도중 모두 먹어 없어질 것들이었다. 비행기로 돌아올 때 짐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옷은 가급적 적게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나는 마치 난파선에서 짐을 꺼내어 물품을 확인하는 15소년 표류기[각주:2]의 소년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먼 길 떠난다고 옆집에 사시는 이 교수님 사모님은 짐을 싣는 내내 곁에서 도와주시며 배웅을 해주셨다.[각주:3] 얼바인을 벗어난 차는 평균 시속 70마일(112)로 달리면서 점차 내게 익숙해졌다. 차가 익숙해지자 마음이 놓이면서 차 안의 장치들이 궁금해졌다. 특히 내 차에도 있지만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크루즈(Cruise)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On 버튼을 누르고 가속 스위치를 올리니 크루즈 기능이 작동되었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라스베이거스 근처에서 과속으로 벌금을 문 이후로 정속운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프리웨이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어느새 과속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크루즈 기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허용되는 최대속도에 크루즈 기능을 설정해두면, 과속 염려도 없을뿐더러 엑셀을 밟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였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영락없는 나비족으로 만들어주는 팔토시다. 그렇다면 팔토시가 아바타인가? 빼는 것을 잊고 차에서 내리면 여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하는 패션 아이템이다.

동부에서는 화씨 117(섭씨 47)까지 올라가는 기록적인 찜통더위로 3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지만, 우리가 있는 서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여름을 생각하면 쾌적한 편이었다. 기온은 높이 올라가도 건조한 날씨 때문에 그늘에 있으면 오히려 서늘했다. 낮에 무방비로 햇빛에 노출되는 것만 피하면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어서 여름 내내 냉방기를 한 번도 틀지 않고 지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여행이 서부에서 동부로 간다는 것이고, 더구나 낮 시간 동안 사막지대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의 열기는 살인적인 것이었는데, 네바다 사막지대를 달리다보면 차가 과열 될 수 있으니 에어컨을 끄라는 경고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온뿐만 아니라 차창으로 내리쬐는 자외선도 큰 문제였다. 피부가 까맣게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8시간쯤 달려야 한다면 자외선 차단제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미리 한인마트에서 특수소재로 만들었다는 쿨토시(팔토시)를 준비했다. 토시를 끼면 손가락 두 마디만 남기고 손부터 시작해서 팔뚝까지 온전히 덮을 수 있었다. 게다가 특수소재라 가볍고 얇을뿐더러 시원하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것은 팔토시의 색깔이 파란색이어서 그것을 끼고 나면 영락없는 <아바타>(Avatar, 2009)의 나비족이었다. 팔토시는 보기보다 시원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했다I-15를 타고 가다가 주로 I-40을 달렸다. 우리가 달리는 길옆으로 Route66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Route66은 도로의 형태나 기능을 잃은 곳이 많았고, 새로 만든 표지판만 어색하게 선명했다.

존 스타인벡이 ‘The Mother Road’로 명명한 Route66은 시카고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까지 2,200마일(3,500)에 이르는 동부와 서부를 잇는 동맥으로서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한 도로였다. Route661925국가 고속도로 시스템 구축 계획이 발표된 이후, 각 주정부에 의해 건설되었고, 1940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노이 주-미주리 주-캔자스 주-오클라호마 주-텍사스 주-뉴멕시코 주-애리조나 주-캘리포니아 주를 이어준 Route66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나던 절박한 길이었고, 2차 세계 대전에는 전장으로 가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의무와 명분의 길이었으며, 전후에는 자동차와 함께 개인의 자유를 구가하던 낭만의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의 역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건너던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낡은 도로가 되어 갔고, 마침내 1985년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Route66은 도로건설 기술이 현재와 같이 발전하기 이전에 건설된 도로였고, 주정부가 건설하다보니 도로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주요 도시의 중심도로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횡단도로로서의 효율성 면에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건널 수 없었고,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의 고속도로들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워버린 Route66을 살려낸 것이 존 라세터(John Lasseter)의 애니메이션 <>(Cars, 2006)였다. <>Route66의 어느 한 마을인 듯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단지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 말고도 삶에는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성취, 효율, 속도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삶에 대비하여 과정, 즐거움, 여유로 상징되던 Route66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기 위하여 존 라세터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가 <Cars>의 제작 동기에 대한 언급이 눈에 뜨였다. 2001년 존 라세터의 아내는 가족 여행을 제안하며 가족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자라 우리를 떠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족의 소중한 부분을 영영 잃고 말 것이라고 했단다. 그 말은 마치 내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내와 존 라세터의 아내가 서로 통화하는 사이도 아닐 터이고 보면,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나보다. 아내의 그 말을 들은 존 라세터는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는가?”라며, 가족들과 두 달 동안의 트레일러 여행을 떠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Cars>를 제작했단다.

아마 그때였으리라, 연구년을 미국으로 간다면 반드시 가족들과 Route66을 함께 여행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횡단여행이 시작되었다. 21일 동안 오롯이 가족들과 함께 달려가야 할 즐거운 여정이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서로의 모습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는 느슨한 기대를 품어본다.

Route66은 이제 다른 도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끊어져 있다. I-40표지판 옆에 Route66이 함께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표지를 따라 내려서면 쇠락한 마을이거나 끊어진 길의 어디쯤이다. 시대적 효용을 잃는 것들의 쓸쓸한 모습과 같다.

Route66은 달리던 그 시간에 멈추어 있었다. 멈춘 시간을 멈춘 그대로 두었다면 그 시간은 차라리 나름대로 흐를 수 있지 않았을까? 멈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색칠하려다 보니 그것은 추억 없는 기억이 되거나 아주 천박하게 화려해진 슬픔이 되고 말았다. 길은 사라지고 도로표지만 살아서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싸구려 기념품으로는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의 Route66이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 길과 같은 시대를 달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가뭇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쟁, 효율, 성취라는 목표지향적인 삶의 속도는 협력, 여유, 과정의 미덕을 야유할 뿐이었다. 그 야유 속에서 소중한 것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거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존 라세터가 <>에서 그리워하며 복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낡은 도로의 추억이 아니라 그곳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아니었을까? 낡은 Route66은 그렇게 길 아래로 나란히 달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Route66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곳곳에서 내려서 달려보았지만, 길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정쩡한 시제로 바람에 날릴 뿐이었다. Route66 옆으로 달리는 I-40은 지평선이 이끌고 있었다. 길은 높낮이와 곱고 굽음의 차이가 있을 뿐 집요하게 지평선을 향해 있었고, 지평선은 끝 모를 하늘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서부쪽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지평선을 보고 달려간다. 지평선을 이끄는 것은 늘 하늘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멀어질수록 사막과 스텝의 중간지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따금 마을들이 달려왔지만 빠르게 뒤로 달아날 뿐이었다. 몇 시간을 줄곧 앞으로만 달리는 길이니 사만다는 긴 침묵에 빠져 들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아이들은 차가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 각자의 취향대로 잠이 들었다. 자기는 음악을 틀어야 한다며 아내 대신 굳이 조수석에 앉은 유진이는 의자를 잔뜩 눕힌 채 다리를 대쉬보드에 올리고 목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고, 효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물론 강한 햇빛은 햇빛 가리개로 모두 가리고,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온 간식을 배불리 먹은 뒤의 일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이 아까워 밖을 보라고 깨우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살아가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엄마 무릎 베고 따듯하게 잠들 날이 또 앞으로 몇 날이나 될 것인가? 그래 많은 것을 보는 것만 여행의 풍미겠는가? 자기 취향대로 느끼고 가져가 두고두고 따듯해할 수 있는 기억을 일구는 일이 여행의 기쁨 아니겠는가? 여행준비로 피곤했던 아내도 졸릴 것이 분명한데 운전하는 내가 졸까봐 룸미러로 나를 훔쳐보며 계속 이야기를 걸고 있었다. 서너 시간쯤 달린 후, 유진이가 깨서 음악을 틀자 안심이 되었는지 아내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부 쪽 고속도로[각주:4]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길에 올라서고 내려서는 일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굳이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 진출입로 주변에 음식점, 주유소, 숙박시설을 표시해둘 뿐이다. 물론 고속도로 위에 아주 드물게 쉼터(Rest Area)를 두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간격이 너무 멀고, 화장실과 피크닉이 가능한 식탁 정도가 놓여 있을 뿐이니 한국식 휴게소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유료도로(Pike, Turnpike)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식 휴게소와 비교적 유사한 휴게소들이 고속도로 위에 있다.

캐나다 마트의 전경이다. 주유소와 마트가 결합된 미국의 전형적인 주유소이다. 건물을 압도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주던 곳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에서 깬 것은 다섯 시간 넘게 달리고 주유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 킹맨(Kingman)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섰을 때였다. ‘캐나다 마트라는 생뚱맞은 이름의 작고 낡은 마트는 주유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은 휘발유 가격이 1갤런에 3.38달러로 얼바인에서 가장 싸다는 코스트코 주유소의 3.67달러에 비해 29센트나 저렴했다. 그깟 29센트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횡단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금액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12갤런을 주유했으니 3.48달러를 아낀 것이다. 빠듯한 여행 경비도 절약해야 했지만, 동부의 대도시로 가면 이곳에서 아낀 기름 값만큼 혹은 그 이상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주유소와 편의점을 함께 운영하며, 화장실은 편의점 안에 있기 때문에 주유를 하고서는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속도로 위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으니 주유할 때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 ‘캐나다 마트라는 곳은 일반 관광객보다는 트럭기사들이 주 이용객들인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에는 독립적인 샤워부스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장실 시설은 오히려 아주 소박했다. 마트 안팎으로 Route66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관련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소박한 수준의 Route66 기념품뿐이었다.

킹맨에서 세도나(Sedona)까지는 세 시간쯤의 거리였다. 잠에서 깬 아내와 아이는 이번 여행의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미리 조사해둔 몇몇 곳을 꼭 들러줄 것을 요구했고, 효진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보스턴과 워싱턴의 몇몇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대면서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뉴욕을 가장 많이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구체적인 어떤 곳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동안 만나게 될 풍경들과 차 안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말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여행 출발 전에 약속했던 여행의 기록을 각자 어떤 식으로든 남기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신혼여행부터 꼼꼼하게 기록해왔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아내는 첫 여행부터 냉장고 자석을 모으고 있었고, 유진이는 엽서와 각종 팸플릿들을 모아왔는데 이번에는 효진이도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방신기의 노래를 몇 번쯤 듣는 사이 표지판은 세도나 인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를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눈이 먼저 현혹되고 만다. 사만다의 안내가 없었음에도 플래그스태프 표지판을 보자마자 차는 벌써 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사만다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미웠는지 잠시 먹통이 되었다가 플래그스태프를 한 바퀴 돌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자 정신을 차렸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길을 몇 번 놓친 끝에 Arizona 89A를 만나서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Midgley Bridge의 전경이다. 아래로 트레킹 코스가 위험스런 유혹을 하지만 위로는 평온한 다리일 뿐이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에 들어서자 이미 붉은색의 강한 기운이 산과 절벽들로 이어진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날씨 탓인지 먹구름이 몰려들어 석양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사나운 표정이었다. 달려드는 풍경에 이끌려 몇 번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세웠다. 갓길이라기에는 너무 협소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풍경이 잡히질 않았다. 광각렌즈로 바꾸어 보았지만 렌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이 될 만한 뷰 포인트는 모두 유료화 되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온전히 풍경을 담을 수 없었다. 트레킹을 하며 풍경 안으로 좀 더 들어가야 얻고 싶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날은 흐리고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오크 크릭 캐니언에서 세도나로 들어서는 길에 미즐리 브리지(Midgley Bridge)를 만났다. 평소에는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두세 대만 주차해 있었고 그마저도 금방 떠났다. 미즐리 브리지 옆으로 몇 개의 트레일(trail)이 지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즐리 브리지는 윌슨 캐니언(Wilson Canyon)과 오크 크릭 캐니언을 이어주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막상 두 캐니언을 바라보니 이름과 구분은 그저 인간의 몫일뿐이었다.

미즐리 브리지를 넘어서 얼마가지 않으니 업타운 세도나(Uptown Sedona)였다. 먼저 안내 센터에 들러야 했지만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가까웠고, 이미 490마일(784km)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숙소 직원이 붉은 펜으로 설명해준 세도나 지도

숙소로 잡은 스카이 렌치 랏지(Sky Ranch Lodge)는 업타운 세도나를 지나서 산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세도나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숙소 앞에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는 세도나의 대표적인 볼텍스 (Vortex) 지점 중의 하나라는데 내게는 그보다 노을이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노을을 기대하고 부지런히 달려갔지만 간간이 비가 내리고 이미 너무 어두워졌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밤이 내리는 세도나의 풍경만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세도나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기부를 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일본어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환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황급하게 차로 돌아와야 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세도나 안내지도를 부탁하니 약간 여성스러운 남자 직원이 친절하게 붉은 펜으로 표시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멕시코 풍의 숙소는 정성들여 가꾼 정원과 신경 쓴 소품들로 낡은 느낌이 오히려 멋스러웠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저녁 준비를 했다. 딱히 근처에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온 햇반과 즉석 카레 그리고 컵라면을 준비했다. 햇반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즉석 카레는 물 끓이는 기구로 데우고, 물을 따로 끓여 컵라면에 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와 물 끓이는 기구의 코드를 꽂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면서 물을 끓이려하니 과부하가 걸려서 퓨즈가 나간 것이다.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즉시 사람을 보내주어 바로 고쳤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리니 전기가 또 나갔다. 이번에는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니 사람을 또 보내주어 불은 들어왔지만 전자레인지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방안에 불도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끄고 전자레인지만 돌리니 돌아갔다. 햇반과 카레를 데우고, 컵라면 물을 끓여서 간신히 저녁을 먹었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달려온 거리에 비해서는 모두 활력이 넘쳤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씻게 하고, 찍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내려서 정리를 했다. 페이스북에 간단한 경과를 올리고, 내일 일정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볼 것을 선택해야했고, 보아야할 곳의 동선을 잘 짜야했다. 아이들은 첫날의 흥분 때문인지 낮에 차에서 잤던 탓인지 여행 일기를 적고나서도 한참을 떠들다 자정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오늘은 I-40Route66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달리고 또 달려왔다. 출발할 때는 낯설었던 차가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일 년 동안의 연구년은 조금 긴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분명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은 여행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횡단 여행은 미국에서의 일 년 여행 중에 떠난 또 다른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아침에 인수한 차처럼 이제 조금 익숙해졌을 뿐인데, 무엇을 찾아 무모하게 횡단을 감행하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 년 간 미국으로의 여행이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잃어버린 것,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듯, 횡단여행을 통해 낯선 공간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볼 뿐이다. 내일은 세도나를 보고 앨버커키(Albuquerque)로 달릴 것이다. 늘 밤은 낮보다 시간이 더디 흐른다.

 

  1.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소나타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Hertz에는 소나타가 없었다. 렌터카를 예약하는 사이트에서는 풀 사이즈 카 급의 차로 Chevrolet Impala급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어떤 차가 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문으로]
  2.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신나게 읽었던 소설이다. 아이들끼리 무인도에서 2년 간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내가 열여섯 번째 소년이 되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3. 21일 간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우편물 등을 옆집의 이 교수님 댁에 부탁을 하고 떠나야했다. 이 교수님은 나처럼 UCI에 교환교수로 나와 계셨고, 우리처럼 딸 둘이 있어서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했다. 이 교수님 댁과는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편물도 우편물이었지만 집을 떠나면서 돌아올 곳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푸근함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한 면적의 100쯤에 달하는 미국의 동맥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프리웨이(free way)라고 부르는 자동차 도로들이다. 처음에는 서부 고속도로가 무료이기 때문에 프리웨이인 줄 알았는데, 미국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로라는 의미에서 프리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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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나라

730일 앨버커키산타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앨버커키(Albuquerque)에 자정을 한참 지나 도착해서 씻고 정리하다 늦게 잠든 탓에 다들 아침이 힘든 모양이었다. 앞으로 묶게 될 숙소들에 비해 무척 럭셔리한 앨버커키 숙소에서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정작 숙소에 머물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조금 늦게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치니 9시였다.

한참 외모에 신경 쓸 나이인 딸이 둘이다보니 아침에 나갈 준비하는 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게다가 미국에 와서는 머리를 자르지 못한 탓에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평소 효진이는 밤에 머리를 감고 아침에는 빗고만 나가는 고육지책을 쓰는데,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머리를 감지 못하고 잠이 들었고, 덕분에 아침이 더욱 분주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우리 집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누나 둘,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나까지 매일 아침 북새통을 떨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초등학교 시절, 샴푸가 막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누나들은 머리를 감기 위해 물을 끓여야 했고 그만큼 더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드라이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누나들의 아침은 얼마나 더 분주했으랴? 누구보다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하시며 오남매의 등교준비를 도와주시던 할머니의 고생은 또 오죽했으랴?

빨리 출발해야 한다는 아빠의 분주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앨버커키 쉐라톤 호텔 로비에 놓인 매력적인 체스판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

혼자서 옛날 생각을 하는 동안 얼추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서 호텔 로비로 나서는데 커다란 체스판이 보였다. 장식용인지 실제 경기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아이들은 체스판 앞에 앉아 있었다. 출발이 급했던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몇 번의 성화 끝에 결국 체스판에서 일어났다.

이곳 호텔에서는 아침을 무료로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어제 호텔로 들어오면서 식당을 찾아보았는데, 마침 근처에 I-HOP[각주:1]가 있었다. I-HOP에는 아침인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원래 가격도 비싼 편은 아니지만 아침 메뉴는 더 저렴한 편이고, 근처에 패스트푸드점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식당도 없었기 때문이다. I-HOP도 대부분의 미국식당이 그렇듯 음식 주문 전에 음료수 주문을 먼저 받았다. 커피를 주문했더니 I-HOP 특유의 스테인리스 보온병에 가득 커피를 담아다 줬다. 5-6잔을 따라 마시고 리필을 부탁하면 다시 가득 채워다 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흔히 만나는 무한리필 음료수대다. 이 근처에 앉아있으면 풍요가 왜 병이 될 수밖에 없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무한 리필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음료수는 무한리필이다. 아예 음료수 기계를 객장 쪽으로 설치해두고 계산대에서는 컵만 나누어준다. 재미있는 것은 컵 사이즈별로 가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어차피 무한리필인데 컵 사이즈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그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라지 사이즈 컵에 가득 콜라를 따라 마시며 몇 번이나 리필해서 마신다.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하면서 끊임없이 탄산음료를 마셔대는 그들의 몸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뚱뚱하다. “미국인의 61% 정도가 과체중이고, 그 가운데 27% 정도가 비만환자로서 미국에서 비만은 이미 흡연보다 중대한 질병[각주:2]으로 취급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풍요가 병이 되고 있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저렴하고 넉넉하다. 곳간이 그득해서 넉넉하게 먹고 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이야기할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이 모든 것이 그들의 노력으로 쌓아둔 그들의 곳간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그들만의 풍요는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과 제3세계의 보이지 않는 희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만의 풍요를 위해 타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건강까지 해치고 있는 아이러니의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이제는 그들도 어쩌지 못하는 거대 자본의 무한 증식 논리가 있는 것이다.

 

앨버커키 도심의 현대적 건물과 그 사이사이 멕시코 전통문양이 삽입된 장식. 시내 곳곳에 자신들의 고유 문양을 다양한 방식으로 꾸며 놓고 있다. 인디언의 땅에 스페인이 도시를 건설하고, 멕시코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은 미국인 땅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하는 도심이었다.

아침을 먹고 바로 산타페(Santa Fe)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워 앨버커키 시내라도 보자고 가다보니 뉴멕시코 대학교(University of New Mexico, UNM) 앞까지 가게 되었다. Route66이 앨버커키 도심을 관통하기 때문인지 현대식 건물과 다소 쇠락한 분위기의 시가가 학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1706년 스페인인 사람들에 의해 이 도시는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인들 왜 원주민이 없었을까마는 그들 역시 인디언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앨버커키는 1880년 철도가 건설되고, 1930년대 Route66이 이곳을 관통하면서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인텔(Intel)이 인근에 들어오면서 급성장을 했다고 한다.

뉴멕시코 대학교에 대해서는 인류학과 사진학으로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내서 둘러보면 좋으련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뉴멕시코 대학교는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로 자신들의 정체와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학교 앞은 여느 대학의 거리처럼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앨버커키가 자랑하는 올드타운 플라자(Old Town Plaza)와 앨버커키 국제 열기구 축제(Albuquerque International Balloon Fiesta)는 시간이 부족하고 시기가 맞지 않아서 명성만 듣고 떠나야 했다.

뉴멕시코 대학교 앞의 풍경.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벽화, 어머니의 음식 다음으로 맛있는 식당이라는 대학가다운 레스토랑 간판, 오래된 모자점,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개성만점의 벽화가 돋보이는 상점. 뉴멕시코 대학교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과 상반되는 화려하고 대담한 색상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앨버커키에서 산타페까지는 85마일(136)로 이번 여행의 평균 이동거리를 생각해보면 이동이랄 것도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한산해서 예상보다 빨리 산타페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서자마자 패션 아울렛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타페 초입에 패션아울렛이 있으니 도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쇼핑도 관광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어색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비해서 미국의 옷값은 무척 저렴한 편인데, 아울렛의 가격은 그것보다 더 저렴하니 경제적인 쇼핑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울렛 입구에서 두 개의 할인쿠폰과 아울렛 라디오 홍보 티셔츠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할인쿠폰 한 장은 100달러 이상 구입하면 20%를 깎아준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쿠폰북이었다. 마침 세일 기간이어서 매장마다 할인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추가로 더해주는 할인쿠폰이니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렛 정상 가격의 30%를 할인해주는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100달러가 넘어서 20% 쿠폰을 내고 계산을 하려는 순간, 아내가 25% 할인쿠폰을 내밀었다. 250달러가 넘으면 25%를 할인해주는 쿠폰이 쿠폰북 안에 있었던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추가 할인쿠폰은 두 개를 동시에 적용할 수 없으니, 좀 더 할인 폭이 큰 25%쿠폰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더니 계산하던 직원이 당황을 했다. 잠시 후 그 직원보다 상급 직원이 와서 계산을 하더니 25% 할인을 했단다.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정말 25%를 할인한 것 맞느냐고 몇 차례 물었고, 그들이 카운터의 계산기로 계산하는 것을 보았으니 믿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와서 다시 계산해보니 역시 맞지 않았다. 몇 번을 계산해보아도 20% 할인을 했을 뿐, 25% 할인을 한 것이 아니다. 400달러 정도 쇼핑을 했으니 5%20달러 정도의 차이가 났다. 돈도 돈이지만 바보 취급을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우선 나빴다. 다시 매장으로 갔다. 가서 그들 앞에서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했더니, 계산했던 그 직원은 정작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보는 앞에서 20%25%를 계산해주었더니 그제야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시인하고, 매장 책임자를 불렀다. 한국에서라면 간단하게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책임자까지 부른 것이다. 매장의 책임자가 와서 전후사정을 듣더니 한 번 기계가 읽고 입력한 것은 쿠폰교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들에게 화가 나서, 그렇다면 모두 환불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25% 쿠폰으로 교체하여 주었다.

세도나와 알버커키에서 볼 것을 적은 아내의 메모

황당한 일이었다. 계산하는 직원이 전자계산기로 20%25% 계산도 하지 못한다는 것, 돌발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 책임자 역시 앞의 주문을 취소하고 다시 계산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점에 아내와 나는 놀랐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겪어본 그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국어와 문화적 토양 위에서 영어를 사용하다보니 일정수준 이상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업무처리가 매뉴얼화 되지 않으면 효과적인 운영과 관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이 매뉴얼화 되어 있고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고집스러울 만큼 잘 따른다. 도로공사[각주:3]나 신호등 없는 교차로의 진행 순서[각주:4]와 같은 일에서부터 심지어 남자 화장실 예절[각주:5]에 이르기까지 매뉴얼을 숙지시키고 철저하게 지켜간다. 그러다보니 매뉴얼에 대한 숙지가 떨어지거나, 매뉴얼의 예외 사항에 대해서는 잘못 처리했을 경우,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각주:6]이 된다. 아울렛에서의 소동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산타페 관광의 중심이라는 플라자(The Plaza)에 도착하고 보니 7월 내내 열리는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매우 혼잡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플라자를 중심으로 몇 바퀴를 돌다가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길가에 주차를 하고 성 프랜시스 대성당(St. Francis Cathedral)으로 갔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이 거의 문 닫을 시간이어서 급하게 둘러보아야 했다. 성당으로 들어서자 햇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제 빛을 버리고 경건하게 아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성당 안 중앙부의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는 예수상은 양쪽의 아치형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과 고유의 붉은 빛이 어우러져 고통의 순간을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중앙의 예수상, 성당의 외관, 어도비 양식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전경. 각도와 시간에 따라 빛을 달리는 성당의 모습도 무척 이채롭다. 

현재의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라미 대주교(Archbishop Jean Baptiste Lamy)1869년에 시작해서 15년만인 1884년에 완성했단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주변과 차별화되고 있지만 주변의 빛깔을 수납하며 위압하지 않는 권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성당 앞에는 최초의 인디언 출신 성자인 카레리 데카크위타(Kateri Takakwitha)의 모습은 정복자의 성자가 아닌 피지배자의 성자로서 위안을 주고 있었다.

성당 앞 광장에서는 7월 동안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성당 쪽으로 차량 진입을 막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전통 수공예품과 예술작품을 비롯해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은데다가 폐장 시간이 가까이 오니 좌판을 정리하는 분위기여서 더욱 어수선 했지만, 아이들 손을 잡고 천천히 둘러보니 정겨웠다. 소박한 수준의 것에서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좌판에서는 수공예로 제작된 가톨릭 성물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스페인 마켓 좌판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톨릭 성물과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토착신앙이 결합된 성물 수공예품. 이 땅이 산타페(거룩한 믿음)이길 원했던 정복자들과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 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혼합된 결과다. 

산타페는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 1846-1848)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푸에블로 인디언 문화와 히스패닉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이곳을 햇살이 춤추는 곳이라고 불렀었는데, 정복자였던 스페인사람들은 산타페’, 거룩한 믿음(Holy Faith)’으로 불렀다고 한다. 각기 부르는 이름의 차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푸에블로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의 이 땅에 대한 인식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에게 이 땅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의 땅이었음에 비해, 정복자인 스페인 사람들의 눈에는 개종시켜야할 야만의 땅으로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 전경과 로레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비교적 조화를 이루며 잘 지내던 이들이 갈등을 빚게 된 것도 푸에블로 인디언의 종교 의식을 악마의 의식으로 인식한 가톨릭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16세기에 이러한 종교적 갈등[각주:7]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엄청난 대량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고 생활의 곳곳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복자들의 핍박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주민의 비참한 삶과 그 결과 원주민들이 정복자의 종교로 들어가 그 안에서 평안을 갈구하는 아이러니한 순환의 고리가 씁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17세기 이후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만나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문화와 종교적 색채가 그 안으로 스며들었고, 이것이 바로 산타페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레토 교회 앞의 소박한 예수상과 기적의 계단을 안내하는 표지판

성 프랜시스 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로레토 교회(Loretto Chapel)[각주:8]가 있었다. 교회 옆에 어른 서너 명이 맞잡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는 은행나무와 아주 소박하게 조각한 예수상이 좌우에서 정겨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교회가 고딕양식(Gothic style)으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풍경과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는 기적의 계단(Miraculous Staircase)과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건물로 유명하다. ‘기적의 계단은 성가대 자리와 연결된 나선형 모양의 계단으로 별도의 통로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주차가 늦어지면서 문을 닫아 볼 수 없었다. 이 교회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나무로만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해질 무렵 내려앉은 석양과 어우러진 교회의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교회 옆으로 청동으로 만든 기발한 형상의 바람개비들이 부지런히 돌고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천막의 노점에서는 사람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유쾌한 관광객들은 은행나무의 둘레에 서서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고, 바람은 은행잎을 소리 내어 흔들고 있었다. 때마침 교회에서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덕분에 교회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신부의 아름다운 미소와 그 뒤로 축복하듯 두 팔을 벌리고 선 소박한 예수상이 성스러웠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의 멋스러운 간판들 

로레토 교회 근처의 다운타운 상가는 아주 독특한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운타운의 멋스러운 상점이나 갤러리 등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으면 예외 없이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허락해주었다. 상점마다 개성 만점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고, 표지판마다 재치가 넘쳤다. 다운타운의 상가나 노점에서 만나는 상인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특히 노점의 원주민들은 영어로 말을 건네도 스페인어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건은 예상보다 비쌌지만 거침없고 유쾌한 수공예품들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고추를 매달아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부른다는 리스트라()와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인 코코펠리()

고추를 길게 묶어 걸어놓은 리스트라(ristra)나 호피족의 수호신이라는 코코펠리(Kokopelli)는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리스트라는 매운 것을 좋아하는 이곳 원주민들의 식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멕시코 음식점에 가면 붉은 고추를 길게 묶어놓은 리스트라를 보면서 그 의미를 물으면 대부분 그냥 고추 말리는 것이라고 맥 빠진 대답을 듣고는 했었는데, 산타페에 와서야 제대로 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코코펠리는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이란다. 코코펠리는 곱사등인데, 곱사등 안에 씨앗과 노래가 들었다는 호피족의 수호신이다. 리스트라와 코코펠리의 상상력은 즐겁고 간절한 희원이었다. 그 상상력은 절실한 만큼 소박하고, 신실한 만큼 재미있었다. 코코펠리는 캐릭터상품의 관점에서 보아도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이 아주 뛰어난 캐릭터였다.

예술가의 도시답게 산타페 다운타운 곳곳에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어도비 건물이 늘어선 다운타운 거리에는 노점들이 내어놓은 수공예품과 함께, 예술작품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는 어처구니없는 경고 문구 대신 자유롭게 보고, 만지고 즐기라는 듯이 거의 모든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만난 예술작품들

산타페 다운타운은 어도비(Adobe) 양식의 보고(寶庫)였다. 어도비는 원래 햇빛에 잘 말린 벽돌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막처럼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해서 효과적인 단열이 필요한 지역에서 주로 활용을 했단다. 어도비는 모래, 진흙, , 나뭇가지, 거름 등을 넣어 만드는데 거름은 방충 작용을 한다고 한다. 어도비 양식은 저렴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도 뛰어나 콘크리트보다 5-10배 정도 강하고, 기온과 습도를 유지하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전통적인 푸에블로 인디언의 양식을 유럽에서 가져간 것이란다. 1950년대부터 뉴멕시코 주 정부는 산타페에서는 어도비 양식으로만 건물을 짓게 하고, 3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을 따라 걷다보면 유쾌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수공예품들이 밝고 화려한 색깔로 치장하고 있으며, 표정과 몸짓이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의 가혹한 면을 가사에 담고, 그 지독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의지는 후렴구에 담아 부름으로써 현실의 고뇌를 넘어서려했던 <청산별곡>처럼, 그들도 현실의 고단한 삶을 작품 속의 웃음을 통해 건너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상점의 주인들도 대체로 밝고 친절한 모습이었지만, 노점에 나와 있는 원주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는 수공예품을 팔고 있는 모습은 무척 어색한 조화였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에서 만난 춤추는 인디언()와 춤추는 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시가지는 다운타운의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낡고 쇠락한 것들이었다. 낡고 오래된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쓰러질 듯 서 있었고, 간판들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매달려 있었다. 붉은 색칠을 한 낡은 기차에는 흑백의 그림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현대 원주민 예술 박물관(Museum if Contemporary Native Arts)에서 보았던 절제된 분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절제된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로 한 복판으로 기차가 지나고 있었다.

다운타운을 벗어난 산타페의 외곽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기차에 흑백으로 그려진 원주민()과 부츠를 닦아준다고 써 붙인 원주민의 낡은 벤은 다운타운 노점에서 만났던 원주민의 무거운 표정처럼 느껴졌다. 

정지를 명령하는 붉은 신호등 옆으로 “DO NOT STOP IN BOX”라는 글귀가 쓸쓸한 위협처럼 쓰여 있었다. 문득 산타페에서 본 것과 보고도 보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산타페는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지만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숙소 옆 공터에서 부츠를 닦아준다는 원주민의 밴을 보면서 노점에서 만난 원주민의 무거운 얼굴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산타페의 밤은 아주 천천히 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산타페의 오후에 깊게 매료된 표정으로 내일 만나게 될 산타페의 맨 얼굴을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가 만났던 산타페의 오후를 기록하고 정리하느라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1. 우리 가족은 I-HOP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효진이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상으로 30달러짜리 I-HOP상품권을 받아왔다.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가끔씩 상품을 걸고 재미있는 경연을 벌이는데, 그림을 그려서 받았단다. 그것을 가지고 토요일 점심에 온가족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가격도 적당하고 음식도 좋았던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아침은 I-HOP에서 먹기로 했다. [본문으로]
  2. 강인규, 앞의 책, p.77. [본문으로]
  3. 미국에서 도로공사를 할 경우, 경고 표지판 개수와 설치 위치 및 유도등에 대한 매뉴얼에 따라서 설비를 안전하게 설치한 이후에 작업을 한다. 이러한 매뉴얼은 작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본문으로]
  4. 미국에서는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는 먼저 온 순서대로 진행을 한다. 처음에는 서툴고 불편하기만 했는데, 익숙해지니 무척 합리적인 방법이다. [본문으로]
  5. 미국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기를 사용하는 순서에 대한 화장실 예절이 블로그나 웹사이트 등에서 종종 화제가 된다. 가령 다섯 개의 소변기가 있다면 첫 번째 사람은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소변기를 사용해야 하며, 두 번째 사람은 그와 가장 먼 소변기를 선택해야하고, 세 번째 사람은 가운데 변기를 고르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강인규, 앞의 책, pp.59-61참고) [본문으로]
  6. 일 년 동안 있으려면 미국 운전면허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해서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 아내와 갔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는 면허시험 신청이 안 된단다. 같이 같던 솔이 엄마가 다른 창구에서 하면 될 것이라고 해서 다시 번호를 받아서 다른 창구로 갔더니 문제없이 면허신청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도 창구 담당자별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매뉴얼에 비추어 책임질 수 있는 한도까지만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각자의 책임 범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된 예이다. [본문으로]
  7.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제사에서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서 신께 바치는 행위를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의식으로 판단하고 강력하게 금지시키고, 개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8. 주교가 상주하는 대성당을 ‘Cathedral’이라고 부르고, 성채가 없는 예배당을 성당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정도의 의미로 ‘Chapel’로 부른다고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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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라호마에서 울다.

82일 오클라호마시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아내를 제외한 셋이 모두 감기약을 먹고 누워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잠든 탓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9시까지 아침을 준다고 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에 붙어있는 간이 테이블 3개가 놓인 식당에 갔더니 머핀과 식빵 그리고 우유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나마도 담고 보니 방으로 가지고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붙어있다. 한참을 고민하다고 다 두고 왔다. 예약 사이트에서 본 숙소의 아침은 콘티넨탈 블랙퍼스트(Continental Breakfast)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숙소근처에는 아침을 해결할만한 음식점이 없었고, 심지어 패스트푸드점도 없었다.

출발 전 머리를 묶는 유진

숙소를 나서려는데, 좀처럼 머리를 묶지 않는 아이 둘이 모두 머리를 묶었다. 한참 멋을 부릴 나이에다가 이곳 아이들이 대부분 생머리를 묶지 않고 다니니, 아이들은 내 잔소리에도 머리를 늘 풀고 다녔다. 더구나 이곳은 머리하는 비용이 비싸서 한국에서 온 머리 그대로다보니 점점 아이들 머리는 주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클라호마의 더위를 체험한 아이들이 스스로 머리를 묶은 것이다. 그렇다, 아빠의 잔소리보다는 자기들이 겪으면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고, 진짜 알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움직인다. 왜 부모인 내 뜻을 따르지 않느냐를 고민[각주:1]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소통 능력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묶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머리 묶는 유진이 옆에는 어제 아내가 손으로 빤 빨래가 말라가고 있었다. 여행은 여지없는 생활이다.

일단 식당은 국립추모박물관(National Memorial & Museum)으로 가서 그 주변에서 찾기로 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아침인데도 어제보다 더 더웠다. 더운 것이 아니라 뜨거웠다. 차창을 모두 열고 열기를 뺀 후에 에어컨을 한참 켠 후에야 차에 겨우 탈 수 있을 정도였다. 국립추모박물관에 가서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기대했던 음식점은 없었고, 조금 더 밖으로 나오니 몇몇 패스트 푸드점만 보였다.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시키는 사이 화장실을 갔는데 잠겨 있었다. 문 앞에 스티커를 읽어보니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서 열어야 한단다. 미국은 대체로 화장실 인심이 고약하다. 심지어 물건을 살 사람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문구를 내건 편의점도 있었다. 프런트로 가려는데 앞 사람이 나오며 문을 잡아준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변을 보려면 일일이 프런트에 가서 열쇠를 달라고 해야 하는 곳에 미국사람들은 참 속도 없이 잘도 다닌다. 하긴 우리도 그런 곳에서 아침을 먹었으니 속없기는 둘 다 똑같다.

맥도날드에서 시킨 음식

맥도날드의 인색한 화장실

맥도날드보다 더 야박했던 4월에 요세미티국립공원 가는 길에 만났던 주유소 내 편의점 화장실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효진이는 스머프를 끼워주는 해피밀(happy meal)[각주:2]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피밀은 말도 안 되는 음식이라고 시켜주지 않았을 텐데, 어제 울면서 엄마가 아닌 아빠와 잔 효진이가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그냥 시켜준 모양이다. 효진이는 5학년인데도 아내에게 아기처럼 군다. 늘 엄마와 같이 자고 싶어 하는 효진이는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내와 한 침대를 써왔다. 늘 아내에게 찰싹 붙어서 스킨십을 하는 효진이 때문에 아내가 다소 힘들어했다. 어제는 유진이가 감기기운이 있다니까 아내가 유진이랑 한 침대를 쓰고 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잤는데, 그게 못내 서운했는지 결국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그러는 모습이 또 좀 안 돼 보여서 꼭 안아주고, 작은 소리로 효진이를 위로해주고 서로 킥킥대다가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진이는 엄마가 첫째다. 생각해보면 우린 누구나 엄마가 최고가 아닌가?

아이들과 한 침대를 쓰면서 자기 전에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즐거움 중에 하나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배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해주다보면, 어느새 내 배 위에서 잠들곤 했었다. 그러면 아이의 숨 쉬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봐 나도 조심스럽게 숨을 쉬곤 했던 기억이 났다. 아이들은 크고, 나도 너무 바빠서, 아이를 재워주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 즐거움을 찾은 것이다. 누워서 이야기하다보면 낮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을 먹고 다시 차를 타는데 숨이 탁탁 막혔다. 대구에서 자란 아내는 덥다는 소리를 잘하지 않는데, 뜨겁단다. 더위 때문인지 여정이 힘든 탓인지 모두들 다소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국립추모박물관에서 주차할 곳을 찾는데 근처 성당 주차장이 텅텅 비어서 살펴보니 허락 없이 주차하면 견인이라는 표지가 무서웠다. 그 바로 옆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그곳에 주차를 했다. 주차를 하고보니 후불도 아닌데 주차비 낼 곳이 없다. 주변을 살펴보니 주차비 징수 박스가 있었는데, 자기번호에 주차비 3달러를 밀어 넣으면 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를 밀어 넣어도 영수증이나 주차증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보고 있으니 알아서 주차비를 내고 가라는 것이다. 판옵티콘(Panopticon)[각주:3]이 따로 없다. 이것은 판옵티콘처럼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당하는 사람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 징수 박스는 원시적인데 그것을 운영하는 시스템은 무서운 감시 시스템이라며 웃었지만, 마냥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차를 대고 싶었으나 날이 너무 더웠다. 더위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오전이었다.

유료 주차장 주차비 징수박스. 지폐를 자기 번호에 넣고, 납작한 쇠로 빠지지 않도록 밀어 넣게 되어 있다.

국립추모박물관은 1995419일 오전 92분에 발생했던 오클라호마 폭탄테러(Oklahoma City bombing)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는 1993년 텍사스에서 집단 자살한 사교집단 다윗파에 대한 연방정부의 불만족스러운 처리에 불만을 품은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가 알프레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Alfred P. Murrah Federal Building) 앞에서 폭발물 트럭을 폭발시킴으로써 168명의 사상자와 6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And Jesus Wept 과 조형물에 대한 설명

주차장에서 국립추모박물관으로 가는 신호등 앞에 조형물 ‘And Jesus Wept’이 서 있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1135절의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더라를 인용한 것으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의 168명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원한 안식을 찾게 하려는 추모 조형물이었다. 168명의 희생자를 상징하는 화강암 벽의 틈을 마주선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조형물의 안내에는 자신의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다고만 적혀있지만, 성서에 의하면 죽은 나사로를 걸어 나오게 하셨다고 적혀 있다. 희생자들의 부활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연민과 사랑으로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조형물이었다. 이 조형물을 설명한 판을 읽다보면, 희생자들에 대한 안식의 기원과 함께 희생자의 가족들을 향한 위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1:25)라고 적음으로써 희생자들이 영혼의 안식을 찾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And Jesus Wept’ 앞에서 나는 이미 비애와 절망으로 참혹해졌다. 물론 이 조형물은 오히려 그러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종교적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테러의 참혹함과 조형물의 깊은 슬픔이 먼저 전해졌다. 그 참혹함은 언어 이전의 것이었고 가슴을 베고 지나는 상처 같아서 실체가 잡히지는 않았지만, 관람 내내 아리고 아팠다.

9:03 게이트와 그 앞의 Reflecting Pool과 9:01 게이트

길을 건너서 국립추모박물관의 ‘9:03 게이트로 들어갔다. 게이트를 들어서자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 건너로 보이는 ‘9:01 게이트가 보였다. 이것은 폭탄테러가 일어난 1995419일 오전 92분을 기억하기 위하여 91분과 93분 사이를 비워둔 것이다. 그 사이에 리플렉팅 풀을 두고 그것을 통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테러에 대한 경각심 등을 일깨우고 있었다. 두 문과 풀을 망연스레 보다가 문득, 이들은 어쩌면 92분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킴으로써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번다한 조형물을 세우는 대신 두 개의 벽 같은 문을 만들어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 사이 누락된 시간에 일어난 일을 관람자 스스로 물에 비추어보게 함으로써 더욱 깊은 슬픔과 기억을 만들고 있었다.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 19개의 작은 의자는 어린 희생자들을 상징하는데, 그 텅 빈 자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9:03 게이트를 걸어 들어가다 보니 각기 다른 크기의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가 기다리고 있었다. 빈 의자는 이곳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상징하고, 그 중에 작은 의자들은 19명의 어린이 희생자들을 표상한다. 이 의자는 9열로 정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희생되었던 건물의 9개 층을 의미한단다. 이 의자는 반투명 유리 위에 청동과 돌을 얹었기 때문에 낮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밤에는 불이 들어와 희망의 신호를 밝힐 수 있게 하였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청동이 입은 세월의 흔적과 그것이 흘러내려 유리 받침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희생자들의 애틋한 사연과 그들을 준비 없이 보냈던 가족들의 슬픔도 그렇게 세월과 함께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빈 의자들은 9:03게이트와 9:01게이트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그 희생의 시간 동안 그들의 생명이 하나하나 속절없이 스러져 간 것을 의미하는 듯 했다.

9:03게이트에서 빈 의자들을 따라 9:01게이트 쪽으로 걸어가니 ‘Survival Wall’이 서 있다. 폭탄이 터졌던 건물의 마지막 남은 벽이다. 이 벽은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부상자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벽에는 그곳에서 생존한 600명 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urvival Wall’를 보고, 9:01 게이트를 지나니 ‘The Survival Tree’가 서 있었다. 수령이 90년 이상 된 이 느릅나무는 테러 현장을 목격한 나무로서, 지금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놀라운 치유능력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온갖 애도와 상처들을 지켜보았을 느릅나무를 바라보다가 국립추모박물관으로 향했다.

구조5팀에서 적어놓은 글귀

국립추모박물관 현관의 문구

국립추모박물관 벽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당시 구조에 참여했던 구조5팀이 적어 놓은 것이다. 거기에는 “We search for the truth. We seek Justice. The Courts require it. The Victims Cry for it. And God demands it!”라고 적혀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폭탄테러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짧고 단호한 글귀에서 배어 나왔다. 익명의 대중을 향한 무차별의 테러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절대로 용납될 수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구조5팀이 적어놓은 글귀를 보면서 진실과 정의라는 지독히 추상적인 말의 구체화된 현실을 떠올리며 씁쓸해졌다. 진실과 정의가 소중한 것은 누구의 관점이 아니라 모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추모박물관 입구에 공간의 의미를 적은 글귀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앞의 문장들보다 마지막 문장에 눈이 갔다. 여기서 위로, , 평화, 희망, 평온을 얻어가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슬픔은 집요하고 마음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겠지만, 그것이 비롯된 곳에서 치유와 극복의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참으로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개선하고, 극복해 나갈 것이냐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테러 현장의 생존자들이 갖고 있을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씻어 주기위한 전 사회적 배려와 노력은 우리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폭파사건의 시간대별 구성

카메라에 잡힌 범행 전 트럭

미국 정부 휘장

구조 단체의 모자

국립추모박물관 관람은 3층부터 시작했다. 3층은 테러리즘의 배경, 이곳의 역사,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 폭탄테러 순간의 혼란 체험, 테러 이후의 무질서 체험, 구조 체험, 세계의 반응, 구조와 복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사건 발생 한 시간의 수사 상황과 첫 날의 수사 상황을 삽입함으로써 전시의 긴장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폐허 속의 성경

열어야 할 방도 열 사람도 사라진 열쇠

그날 이후 멈추어버린 시계

당시 건물에서 나온 손목시계, , 신발, 안경, 열쇠 등의 물품들을 전시하고, 그 날 이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벽시계의 단호한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 공간 곳곳에서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결국 복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 미국의 상징물들이 전략적으로 노출되고 있고 있었다. 사건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하여 마치 사건의 진행 과정에 관람자가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점도 매우 돋보이는 구성이었다. 또 하나, 테러범을 구속하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극적인 흥미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고, 구조 현장에 참여했었던 기자, 구조대원, 자원봉사자들을 모자, 구조장비, 취재수첩 등의 소품으로 현장의 긴박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온 위로와 격려

마지막 희생자의 발견

생존자 및 목격자의 이야기

구조 활동 도중 숨진 간호사

희생자 가족들 이야기

건물철거 이후 활용에 대한 설문 조사

듣는 것은 보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지만, 보는 것은 느끼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 3층의 전시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동선의 유도를 통하여 전략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희생자들에 대한 감상적인 추모나 테러리즘에 대한 계몽의 일방성에서 탈피하여, 구조과정의 감동적인 스토리(사건이 보도되고 피가 모자란다는 보도에 달려오는 헌혈자들, 미국 전역으로부터의 희망 메시지 등등)와 희생자 각자의 스토리 그리고 범행 과정 및 검거 과정까지 흥미롭게 구성해 놓음으로써 관람자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특히 관람이 진행되면서 뒤쪽으로 갈수록 이러한 참혹한 재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용기와 구조대원들의 헌신적인 희생 등을 부각시켜감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의 상기를 넘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가 아닌 우리 이웃을 영웅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지점이었다. 거기에 어린이들의 따듯한 편지, 미국 전역에서 보내오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생중계로 진행되는 구조과정, 그 중간 중간 테러리즘에 대한 경고와 사회적 공분(公憤) 만들기, 정의 구현의 필요성과 그 주체가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의지 천명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인종, 다문화, 다언어 사회인 미국의 다양성은 미국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그것은 다시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은 신속하고 명확하게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정의를 선취함으로써 정당성과 자부심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효과적인 단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속하고 견고한 일치는 스스로 절대선(絶對善)의 맹목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높고,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을 제거할 가능성이 높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2층에 내려오니, 이 박물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라는 ‘Gallery of Honor’로 이어졌다. 방 안 가득 168명의 희생자 사진과 그들의 유품 하나씩을 놓아 꾸민 방이었다.

아기 희생자와 젖꼭지(), 희생자와 아이의 편지(),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을 위한 티슈박스(하)

방 가운데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작은 티슈박스가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유품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특히 건물 안에 어린이 집(Day Care Center)이 있었기 때문에 유아들의 희생이 컸고, 그래서 희생자 중에는 유난히 아기들이 많았다. 아기들의 젖꼭지, 인형 등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뒤돌아보니 아내도 울고 있었다. 아내가 우는 모습에 아이들이 티슈박스에서 휴지를 뽑아다 주었다. 그 때 효진이가 손을 잡아끌어 그곳에 가보니 희생당한 엄마에게 아이가 쓴 짧은 편지가 있었다.

이 작은 편지에 또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느닷없이 떠나는 일은 모진 일이지만, 떠나는 사람이 선택한 길이 아니지 않는가. 준비 없이 남게 된 어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했을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Life is sad without you.”라는 말에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슬픔도 공명이 되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제야 왜 이 방 안에 티슈박스가 놓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2층은 폭탄 테러 이후의 대처와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방의 테마는 희망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 엽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통로에는 어린이들이 보내준 27,000개의 페니로 만들었다는 ‘The penny path’와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해주기 위해 홀로 기다리는 노인 자원봉사자의 모습에서 미국의 근력이 보였다. 희망의 방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천장에 가득 매달린 수많은 황금학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내온 엽서와 그림

The penny path

희망의 방에 매달린 황금학

벽에 붙은 안내문에는 일본 아이 사다코의 사연과 종이학의 전설 그리고 일본에서는 종이학이 치유의 상징이라고 밝히면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후 며칠 후부터 미국 전역에서 아이들이 10,000개 이상의 종이학을 용기 내라는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내준 종이학을 모티브로 희망의 방 천장에는 수많은 황금학을 매달아 놓았단다. 슬픔과 절망을 건너는 법을 아이들은 마음을 모으는 데서 찾은 것이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지독한 슬픔을 건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위로와 용기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Symbol of Comfort

미국 정부는 1995423일 추도식장에서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Symbol of Comfort’라는 곰인형을 하나씩 주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의도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추도식 사진 속에서 유가족들이 하나씩 안고 있는 곰인형은 위안과 위로를 주는 듯 보였다. 희생자들이 곰인형처럼 함께 할 것이라는 의미인지, 종이학을 접어서 보냈던 아이들처럼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용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분명한 의도와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 지독한 슬픔 속에서 작은 곰인형이 주었을 위안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곰인형을 나눠줄 생각을 한 사람의 감성이 아름다웠다.

박물관 앞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희생자의 유품이거나 좋아했을 물건으로 보이는 곰인형, , 신발 등을 매달아둔 벽이 있었다. 어떤 것은 낡고 어떤 것은 새것으로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희생자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 거친 철망에는 따듯한 기억들이 매달려 있었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테러에 대한 분노나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는 별도로 문화콘텐츠 연구자로서 이 박물관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을 전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느냐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전개한 스토리텔링이 아주 돋보였다. 폭탄테러를 추모하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해봐야 그거겠지 라고 별 기대 없이 온 것인데, 기대 이상이었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라는 콘셉트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함으로써 여러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승전결의 거시 구조로 전개하면서도 각 단계별도 2-3개의 테마가 동시에 진행되게 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이 돋보였다. 특히 관람객의 의문에 대한 답을 미리미리 제시하면서도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재적소에 마련해 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었다.

희생자의 유품이나 좋아하는 것을 매단 추모의 벽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

특히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컴퓨터에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테러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과 희생자 역시 당신과 같은 일상 안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의 시간과 관람객 개개인의 시간의 연결시킴으로써 이 사건과 은연중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 탁월했다. 결국 그곳을 떠나면서 우리는 방명록에 ‘We will never forget!’이라는 결의를 남기고 왔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역시 문제는 참여였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거의 한증막이었다. 차를 찾아 문을 열려는데 손이 델 것만 같았다. 실내의 더운 기운을 빼려고 차창을 내리려는데, 스위치가 손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에어컨을 한참 튼 후에 차에 탔다. 카메라는 들고 다녔지만, 렌즈를 담아둔 카메라 가방은 차안에 두고 다녀서 온도에 예민한 렌즈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큰 고장은 없었다.

세그웨이를 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Science Museum Oklahoma)은 서울에 있는 국립과학관 같은 규모와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과학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와서 과학적 현상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1층에 대부분의 체험 프로그램이었고, 2층에는 우주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기다리지 않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가급적 더 많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을 찾은 나만의 은밀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그웨이(Segway)였다. 정보를 검색하다가 이곳에서 세그웨이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걸작으로 평가받는 세그웨이는 처음 소개될 때부터 타고 싶어 했는데, 이곳에서 탈 수 있다니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것이다. 두발로 가는 새로운 탈 것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이것이 왜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보니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다. 다소 머쓱해서 직원에게 어른도 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는다. 유진이와 효진이가 먼저 타고 나는 나중에 탔다. 안전 때문인지 아이들은 옆에서 직원이 따라다니며 운전을 도와줬다. 작은 실내였기 때문에 속도를 최대치까지 높인다거나 고속에서 방향전환을 한다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무척 간단하고 기동성 좋은 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서서 운전을 해야 하고, 방향 전환이나 속도조절 등이 운전자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왜 세그웨이를 미국에 와서도 자주 보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각주:4]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은 우리 아이들보다는 조금 어린 아이들 취향이었다. 그래도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신나서 여러 체험을 즐겼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Route66과 관련된 박물관은 물론 도시마다 다양한 아이템의 박물관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미국인들이 기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보존 의식이 남다르기 때문인지, 역사가 짧은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보상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문화가 서양인들의 보편적 의식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박물관이 많다보니 전시 방법이나 관람형태에 대한 상당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박물관의 콘셉트가 설정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구성해내고 있었다. 또한 운영에 있어서도 다양한 후원시스템과 자원봉사자들을 적극 활용하고, 관련 상품 개발 등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박물관이나 기념관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는 프랑스의 경우도 그 자체만으로 수익을 내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활성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지역문화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밤에는 지역의 다양한 문화공연을 진행할 수 있도록 꾸미는 것이다. 문화 역시 경제적인 가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다양한 보상을 가지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둘 사이의 적적한 조화를 이룰 것이냐 인데, 이곳의 박물관들을 좀 더 연구해보면 하나의 답쯤은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 2층을 보지 못했다. 다행히 2층은 우주탐사 중심의 소박한 전시여서 금방 돌고 시간에 맞추어 나올 수 있었다. 밖은 여전히 한증막이었다. 숙소에서 가지고 나온 물도 떨어지고 모두들 지쳐 있었다. 브릭타운 쪽에 가서 맛있는 현지식을 사주겠다고 브릭타운으로 갔지만, 마치 재개발 직전의 아파트 단지처럼 그곳은 썰렁하기만 했다. 브릭타운을 몇 바퀴 돌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다. 그래서 어제 숙소에서 본 팸플릿의 중국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제 본 바로는 가격도 적당했고, 집 떠난 지 엿새째라 모두들 제대로 된 음식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영어로는 Lotus Mandarine, 한자로는 루외루(樓外樓)[각주:5]라는 중국음식점이었다. 어제 그 팸플릿을 방으로 가져오면서 이름이 특이해서 찾아보았더니, 루외루(樓外樓)는 청나라 때 지은 항주 서호주변의 대형 음식점이란다. 1,500개 좌석이라니 역사도 역사지만 규모가 대단한 음식점이다. 특히 서호초어(西湖醋魚)와 규화동계(叫花童鷄) 그리고 동파육(東坡肉)으로 유명하고, 지금은 식품회사와 생수공장까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오클라호마시티의 루외루(樓外樓)에 들어가 보니 실내는 제법 규모가 있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카운터를 보고, 안주인은 서빙을 하고, 바깥주인은 주방을 맡고 있었다. 아내에게 주인이 아마 항주사람인가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물을 가지고 오던 안주인이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물었다. 한국인인데 얼바인에서 왔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동양인을 보기가 어려웠다. 미국 웬만한 곳에서도 동양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오클라호마시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내도 반가웠는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주문을 했다.

실내에는 미국인 두 가족과 우리뿐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카운터를 보던 아이의 튜터가 왔고, 그곳의 구석 테이블에서 둘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혼자서 서빙을 다하느라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안주인을 보니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을 바깥주인도 금방 그려졌다. 안주인의 영어가 서툰 것으로 보아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부부가 뛰면서도 아들의 공부를 위해 튜터를 붙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비록 항주 서호의 유명한 식당이름을 붙인 이유를 묻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미국에서 그렇게 큰 식당을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자식 세대를 위한 것임을 튜터와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쳐다보는 안주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외루의 음식들.

루외루는 음식도 훌륭했고 가격은 더 훌륭했다. 처음 시킨 것이 조금 부족해서 한 번 더 시키니 안주인이 웃는다. 모두 요리 일곱 개를 시켰는데도 가격은 38.49달러였다. 안주인이 웃으면서 얼바인은 모두 비싸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는 이야기다. 얼바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얼바인에서는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들이 많아서 서로 묘한 긴장관계를 보이는데, 이곳처럼 동양인을 보기 어려운 곳에서는 반갑고 서로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게 되나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아내도 공감했다. 문화가 비슷해서 서양인보다는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낯선 나라에서 고생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들 이야기로는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모두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이란다. 하교 후 근처 공공도서관에 가보면 인도인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와서 숙제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유진이 이야기로는 수업시간에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모두 아시아 학생들을 쳐다본단다. 이곳 아이들이 보기에도 아시아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그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의 뒤에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가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괄호 속에 묶는 부모의 모습은 어디서나 눈물겹다. 이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만난 중국인 안주인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우리 모두의 부모 모습을 보아서였을까, 문득 푸근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내에게 꼭 다시 오라고 몇 번씩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가족들도 정말 맛있게 먹은 모양이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싸오면서 내일 또 오면 안 되냐고 내게 묻는다. 그럴 수 있으면 그러자고 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지만, 무엇보다 아주머니의 정이 따듯했다. 모처럼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탓에 모두들 힘이 나는지 즐거워했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방 청소를 해놓지 않은 것이다. 카운터(이곳은 로비가 없다)에 가서 이야기 하니 자기들은 원래 이틀에 한번 청소를 한단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를 하니까 필요한 수건과 샴푸, , 청소봉투만 준다. 더 따지고 싶었지만 논리로 이겨낼 만큼 내 영어는 편안하질 않았고, 유진이는 누군가에게 따지는 것을 겁내하니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잡았더니 결국 이런 일을 겪는다.

숙소 방에 들어와서야 모두들 과식한 줄 안다. 아이들도 침대 위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잠들었다. 오늘은 행복한 과식이었다. 내일은 세인트루이스까지 8시간 이상의 운전을 해야 한다. 부디 오늘 같은 더위는 이곳에 두고 가고 싶다.

 

  1. 이러한 안타까움은 “자식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냐?”라든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같은 논리가 전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어느 자식이 부모 속상하라고 일부러 그러겠어요.”라는 전제만큼이나 부모자식 소통에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전제는 “내 뜻대로 너를 만들고 싶어”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본문으로]
  2. 해피밀은 디즈니의 토털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었다. 디즈니는 패스트푸드와 자신들의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계하여 프로모션할 계획을 가지고 맥도널드에 제안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버거킹과 제휴를 하여 그해 디즈니와 버거킹은 둘 다 대박을 낸다. 버거킹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낀 맥도널드가 이번에는 디즈니에 제안을 한다. 버거킹보다 훨씬 조직적인 유통망을 지닌 맥도널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디즈니는 이후 맥도널드와 제휴한다. 그렇게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둘은 스티브잡스가 디즈니의 최대 주주가 되면서 깨져버린다.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기업이 정크푸드와 제휴하여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해피밀 프로모션을 중단시킨 것이다. 역시 스티브 잡스다. [본문으로]
  3. 판옵티콘은 18세기 제레미 밴담이 제안한 원형감옥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형공간의 중앙에 높고 어두운 감시탑을 세우고, 그 둘레에 낮고 밝은 죄수의 방을 만들어,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죄수들은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죄수들은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감시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함으로써 보편화된 개념이다. [본문으로]
  4. 그러나 동부도시들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다. 특히 시카고와 워싱턴에서는 세그웨이를 이용한 투어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본문으로]
  5. 루외루(樓外樓)라는 식당 이름은 남송시대에 시인 임승(林昇)의 “山外靑山樓外樓,西湖歌舞几時休, 暖風熏得游人醉,直把杭州作汴州”라는 시에서 가져 온 것이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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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일 세인트루이스-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카고는 이번 여행의 중간지점이다. 동부와 서부의 경계는 세인트루이스였지만, Route66의 시작인 시카고까지를 Route66 여행, 시카고 이후부터 워싱턴까지를 동부여행이라고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동안 2,566마일(4,106)[각주:1]을 달려서 시카고에 도착을 했다. 여행의 전반부를 마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내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감기몸살까지 시카고에 데려왔다.

세인트루이스에서 334마일(534)을 달려오면서 나랑 유진이는 콧물을 훌쩍이며 추워하고,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뒤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 때문에 더위를 호소했다. 같은 차를 타고 있으니 에어컨을 끌 수도 켤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시카고 초입부터 교통체증으로 막혀서 우회하는 바람에 7시간 30분 정도를 꼼짝없이 차를 타고 있어야했다. 급한 대로 후드로 반바지 입은 다리를 감싸고, 유진이는 후드를 입기도 했지만 시카고에 도착할 때쯤은 근육통과 함께 몸살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정에 맞추어 숙소를 모두 미리 예약해둔 형편이었고, 하루 일정이 어그러지면 다음 일정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물러설 곳이 없으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동하는 날은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워서 조금 일찍 세인트루이스를 떠났다. 볼 것이 많은 시카고이니 일찍 도착해서 조금이라도 봐두면 내일 일정이 한결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밤에 검색을 하다가 링컨 기념관이 도중에 있다는 정보를 얼핏 보았다. 링컨기념관은 워싱턴에서 돌아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메모도 해두지 않고 들를 예정도 없었다. 세인트루이스를 떠나자마자 어제 일정이 조금 힘들었는지 몸살기운 때문인지 모두들 차 안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그때 표지판이 보였다. 어제 인터넷에서 본 것이 저것인가 망설이다가 조금 쉴 요량으로 길을 내려섰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있을 줄 알고 찾아갔는데, 건물은 보이지 않고 고즈넉한 숲길만 계속되었다. 한참 만에 발견한 입구를 발견하고 보니 조용한 숲이었다.

Lincoln Memorial Garden 트레킹 코스(), ‘The better part of one's life consists of his friendship'()

‘Abraham Lincoln Memorial Garden and Nature Center’라는 표지가 입구에 서 있는 숲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링컨이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이 숲은 링컨이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란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국인들이 얼마나 링컨을 존경하고 흠모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연관에도 링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고, 그것을 크게 허물하지 않는 분위기만 보아도 그들의 링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퇴임 후에 존경 받는 대통령이 별로 없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근처를 둘러보고 잠시 쉬는 사이 나는 시카고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는 고등학교 동창 형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간다고 전화를 해야 했지만, 가족 전체가 움직이고 있고, 친구가 부담을 가질까봐 연락을 하지 않고 출발을 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카고를 들르는데 연락하지 않는 것도 서운한 일일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숙소도 따로 잡아두었으니 얼굴 정도 보면 될 일이었다. 형식은 몇 년 전에 뉴욕지사에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몇 년을 근무하고 나서 다시 시카고 지사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던 집이 이 친구 집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였고, 부모님은 가게에 계셔서 집에는 착한 동생들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방과 후에 이 친구 집으로 가서 라면도 끓여먹고 수다도 떨면서 놀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새롭다. 형식은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가장 팝음악에 정통해서 이따금 귀한 팝음반을 구해서 들려주며 설명을 해주기도 했었다. 가족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카고로 달렸다.

사만다가 알려주는 바로는 시카고가 불과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기 때문인지 대도시 입구라서 그런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차가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사만다는 차가 막히면 우회로를 권한다. 얼바인에서 LA를 오갈 때에는 사만다의 우회가 현명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길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돌면서 구경이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사만다가 권하는 길로 내려섰다.

우회도로를 내려서고 보니 시카고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큰 정원수와 멋스러운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럭셔리한 주택단지에서부터 조악한 그라피티(graffiti)로 흉물스러워진 초라한 건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게 사는 모습이 가는 곳곳마다 이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의 상태와 사는 모습이 일치했던 것인데, 럭셔리한 주택가의 도로와 그렇지 못한 곳의 도로 상태가 사는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도로는 대가를 치루지 않더라도 그 혜택에서 배제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공공재(public goods)가 아니던가? 극과 극을 아주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시카고에 우리는 그렇게 들어가고 있었다.

시카고 금요일 오후 정체(), 전철과 도로가 함께 달리고 멀리 시어스 타워가 보이는 시카고()

시카고는 미국 3대 도시이고 가장 미국적인 도시로 불리지만, 내게는 <ER>[각주:2]의 춥고 외로운 도시일 뿐이었다. <ER>은 어둡고 안개가 낀 병원 밖의 풍경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병원 안의 긴박함이 늘 대비되는 드라마였다. 근무를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전철에 오르던 마크 그린의 모습이 유독 춥고 외로워 보였었다. 그래서인지 시카고 시내에 접어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마크 그린이 서 있을 것 같은 도로와 나란히 서 있는 전철역이었다. 아내에게 <ER>이야기를 하자 아내도 <ER>을 함께 보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무척 분주했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한 것이 없었던 그 막막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과로와 박봉에 시달리면서 자기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결혼마저 희생하고 있던 마크 그린을 보면서 근거 없는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배우인 조지 클루니가 맡았던 더글라스 로스보다 머리도 벗어지고 유약해 보이는 마크 그린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언터처블>의 계단 장면으로 유명한 유니언역(), 시카고 시내()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에 진입하자 독특한 건물들이 압도해왔다. 1871년에 시카고 화재(Great Chicago Fire)가 일어나서 도심의 반 이상이 소실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롭고 실험적인 건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오히려 그 건축물들이 시카고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행운이든 불행이든 그것을 맞이하는 변방 늙은이(塞翁)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쉽지는 않으리라. 1871년 화재를 당했던 사람들에게 2011년 시카고의 모습이 뽕나무밭(桑田)이든 바다(碧海)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은 그곳에서 불행이 아닌 행운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읽으려는 인간의 의지와 결의가 아닐까?

시카고의 무서운 주차비(), 미리 정산을 하고 나가야 하는 주차시스템()

시카고 시내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는 듯 제각기 개성을 뽐내며 대형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여행안내 책자에서 보았던 건물들을 찾았고, 찾을 때마다 환호했다. 이미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고, 야간 투어를 한다는 네이비 피어(Navy Pier)로 갔다.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주차비가 1시간까지는 12달러, 1시간에서 2시간까지는 16달러, 2시간에서 3시간까지는 20달러다. 시카고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알 카포네(Al Capone)가 아니라 주차비였다.[각주:3] 그나마 공사 중인 도로가 많고,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몇 바퀴 돈 끝에 네이비 피어 안에서 주차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근에 주차 가능한 건물에 주차를 한 것이다. 입구 쪽에서 112달러로 보고 들어갔는데, 주차하고 내려와서 표지를 보니 1시간까지가 12달러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비싸도 하루에 5달러였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보다가 착각한 것이다.

주차장을 나와서 고가도로 밑을 지나서 네이비 피어까지 걸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몸은 물 먹은 솜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붉은 벽돌로 교각을 만들어놓은 고가도로가 시카고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그 아래에 거리의 악사라도 있으면 더 멋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색소폰을 연주하는 흑인악사가 보였다. 사진을 찍었는데 밤이고 빛이 부족한 공간이라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분위기처럼 느껴졌다. 시카고는 단단해 보이는 붉은 벽돌, 마크 그린의 겨울 전철, 미시건호의 안개와 바람의 이미지였는데, 고가도로 덕분에 거기에 흑인 거리 악사와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이미지를 더하게 생겼다.

네이비 피어 입구 쪽의 양쪽 흉상 NICE(), SHOE()과 안쪽의 브론즈()

네이비 피어의 게이트웨이 파크(Gateway Park) 입구 쪽에 구두를 입에 물고 있는 ‘SHOE’와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NICE’가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쪽으로 3-4인용 청동 소파와 일인용 소파가 거실처럼 놓여 있었다. 구두 한 짝을 입에 물고 있는 신사의 모습이 재미가 있었는지 아이들은 ‘SHOE’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입구에 나란히 양쪽으로 설치된 점과 타이를 맨 신사라는 점 등으로 보아 두 작품은 독립된 작품이지만 동시에 한 세트처럼 보였다. 구두를 입에 문다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두의 관습적인 의미가 결코 좋을 리 없을 것이고 입은 말과 상관된다고 할 때, ‘SHOE’는 말의 신뢰도나 수준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NICE’에서는 두 개의 어긋남이 보였다. 활짝 웃고 있지만 가면처럼 느껴지는 얼굴의 어긋남과 그 상태를 ‘NICE’라고 표현하는 또 다른 어긋남이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NICE’가 무척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오래 기억되었다. ‘SHOE’가 구두 한 짝에 포인트를 두는 제목이라면, ‘NICE’는 웃음/가면의 어긋남이라는 상황에 대한 비틀기라는 점에서 대비가 되고, 그래서 한 세트로서 즐길 수 있는 작품들처럼 느껴졌다. 그 안쪽의 청동으로 거실처럼 꾸며 놓은 작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유쾌한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앉는 것이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안내문을 보니 앉으란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그곳을 즐기는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이렇게 향유자들이 자연스럽게 앉아서 작품을 즐기는 것은 보면 이 작품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구부러진 호’(Tilted Arc)[각주:4]와는 달리 대중성을 제대로 파악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었다. 설치미술과 대중적 요구의 상관관계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네이비 피어로 들어갔다.

시카고는 거대한 호수인 미시건호를 끼고 있다. 처음 본 사람들이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넓다는 미시건호를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 네이비 피어다. 네이비 피어에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와 수상택시(Water taxi) 등을 운행하는 선착장과 놀이기구 그리고 식당과 각종 상점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미시건호에서 출발해서 시카고 강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오며 강변의 건축물들을 즐기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를 타기로 했다. 저녁을 먼저 먹고 야경을 볼 것인지 615분 것을 바로 탈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해가 있을 때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615분 티켓을 끊었다. 여러 종류의 크루즈가 있었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아 보이는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를 선택했는데, 어른은 31.61달러, 어린이는 16.35달러였다.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는 대표적인 아키텍처 크루즈로서 60분 동안 시카고 강 주변에 유명 건축물들을 둘러보는 투어였는데, 동승한 가이드가 건물의 내력과 현재 어떻게 활용되는지 등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해주었다.

출항 전 주의사항을 들려주는 선장과 수화로 통역하는 가이드(), 열정적인 설명으로 압도하는 가이드()

선착장에서 승객이 모두 탑승하자 선장이 운행 중 주의 사항을 뱃머리에 나와서 직접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옆에 가이드가 서서 그 내용을 일일이 수화로 전달해주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유난히 돋보이는 곳이 미국이다 보니 이제는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보인다. 디즈니랜드에서 뮤지컬 <알라딘>을 볼 때, 두 가지에 놀란 적이 있었다. 하나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수화로 공연 내용을 전달해주는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휠체어를 타고 공연을 하는 뮤지컬 배우의 모습이었다. 역동적인 춤을 춰야하는 뮤지컬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연기하는 배우도 배우였지만, 그러한 배우를 차별 없이 기용하는 디즈니에 더욱 놀랐던 기억이 났다. 이러한 예외 없는 배려는 1990년 통과된 미국 장애인 보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의 결과라고 한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화장실에 장애인용이 없는 것은 모든 화장실이 장애인의 편의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미국 장애인 보호법은 일상생활에서 불편과 차별을 겪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특히 교육, 취업, 교통 등과 관련해서 구체적이고 엄격한 적용이 시행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생활공간은 물론 관광지나 놀이공원 등에서 활동적인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이 부러운 몇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Architecture Cruises에서 만난 건물들

배가 출발하자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한 가이드는 시카고 화재와 그 극복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강을 따라 배가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건물 내력담이 소개되었고,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었다.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이 60분 동안 끊임없이 등장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대적인 건축물들과 유서 깊은 건축물들 사이의 조화였다. 시카고 건축물의 놀라움은 그것이 높거나 현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것의 차별적 우위는 모두가 다르다는 것, 다르기 때문에 어우러질 수 있다는 조화의 역설에 있었다. 우리배의 가이드는 히딩크의 압박축구처럼 60분 내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압박해왔다. 겨드랑이에 땀이 밸 정도로 쉬지 않고 무엇 하나라도 더 설명하려던 가이드의 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아내도 그것을 느꼈는지 사진을 찍느라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는다고 내게 몇 차례 핀잔을 주었다.

배는 여러 개의 다리 밑을 통과했는데, 그때마다 다리 위의 사람들과 다리 위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다리 구조물들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벗겨진 만큼 부식되고 있었고, 석조교각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인지 갈 때와 올 때의 빛의 각도가 다르고 건물에 반사되는 모습이 달라서 같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사진을 부지런히 찍었지만 배가 가볍게 흔들리며 계속 움직였고, 더구나 빛까지 수시로 바뀌다보니 사진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가이드는 더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배를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 인도인들 때문에 모두들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들 자기들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당사자들만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크루즈를 마치고 나니 몸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그래도 네이비 피어에 내일 다시 오기 어려우니 볼 것은 보고 가야만했다. 피어는 미시건호를 따라서 길게 늘어선 식당들과 각종 상점들과 그 앞으로 넉넉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넓은 보도로 이루어 져 있었다. 즉흥 연주와 춤을 추기도 한다는데, 볼 수는 없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다보니 대부분 패스트푸드였다. 마땅한 것을 찾으려고 상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Build-A-Bear Workshop’이라는 재미있는 인형 DIY샵을 발견했다. 인형을 직접 만들고, 이름을 붙여주고,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고, 각종 옷과 액세서리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인형 DIY샵이었는데 아이도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더 많았다. ‘One for you and your bear’라는 콘셉트로 인형의 출생과 소유를 연관 지을 수 있는 각종 이야기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Build-A-Bear Workshop에서 곰인형이 완성되는 과정

지난 봄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때 Pier39 Bear Factory에서 효진이가 곰인형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그냥 데리고 나왔는데,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아내가 효진이에게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인형을 많이 사주고, 관련 업체에서 받은 것들을 가져다주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도 짐이 되는지 아내가 정리를 시작했고, 어느새 인형은 구입금지 품목이 되었다. 유진이의 춘옥이가 낡고 오래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쨌든 아내는 아이들에 관해서만은 늘 선명한 기억을 가졌다. 언니가 안고 자는 춘옥이를 늘 부러워하더니 효진이가 드디어 새로운 곰인형을 얻게 된 것이다.

새 식구 골디를 침대에 앉혀놓은 효진이. 막내는 나이를 먹지 않나보다.

30여 종의 곰돌이 모양 앞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안에 솜을 넣어주는 청년에게 가면, 청년은 아이에게 곰인형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묻고, 그것을 적어서 곰인형 가슴에 넣고,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라고 이야기하면서 곰인형의 속을 채워주고, 열린 부분을 간단하게 꿰매어준다. 효진이, 유진이 그리고 아내가 서서 청년의 설명을 듣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보였다. 완성된 곰인형을 받고 돌아서면 옷가지와 다양한 액세서리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옷과 액세서리까지 구입하고 나면 주변에 놓인 컴퓨터로 가서 출생신고를 하고 증명서를 발부받는 것이다. 매장을 둘러보고 곰인형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곰인형 자체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살아나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매력적인 것이었다. 역시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다. 그렇게 우리는 새 식구 골디를 맞았다.곰인형을 안고 상점을 나와서 둘러보아도 저녁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와 유진이는 계속 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띵하고 근육통이 심해졌다. 뜨듯한 국물 있는 것으로 원기를 보충하자고 결정한 후, 출발 전에 시카고에서 한식을 한번 먹자며 미리 찾아온 우래옥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미 830분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만약 찾아갔다가 문을 닫았으면 낭패였다. 전화를 해보니 10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9시까지는 와야 한단다. 다행히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부지런히 달려가 보니 우래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기 굽는 소리와 우리말이 소란스럽게 어우러져 향기로웠다.

메뉴를 받아든 우리는 약간 흥분상태였다. 먹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집 떠난 지 아흐레 동안 한식은 구경도 못했으니 메뉴만 보아도 좋았다. 몸살 기운이 있는 아이들과 나는 뜨듯한 국물로 갈비탕, 아내는 냉면을 시키고, 망설이다 찜닭까지 시켰다. 워낙 먹성 좋은 우리 가족이지만 조금 많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모두들 신나서 먹고 있는데, 몸이 많이 안 좋은지 유진이가 거의 먹지 못하고 있어서 국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며 깍두기를 얹어주니 먹기 시작했다. 우리가 늘 전생에 늑대였을 것이라고 놀릴 정도로 닭은 좋아하는 녀석이 찜닭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뼈까지 발라 주었는데도 많이 먹지 못했다. 나도 입맛은 없었지만 빨리 원기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먹었다. 감기몸살은 잘 먹고 쉬면된다고 하니까 잘 먹고 푹 쉬면 낳을 것이라고 가족들을 위로하며 먹다보니 과식을 했다. 그래도 한식을 먹어서인지 조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역시 밥은 힘이 세다.

모처럼 한식으로 포식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11시가 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예약을 하면서 보니 시카고 시내는 숙소의 질에 비해서 가격이 비쌌다.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숙소를 예약할 때는 도심에서 가까울수록 숙박비가 비싸고, 가격대비 시설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숙소를 정한 것이다. 어차피 차로 이동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 몇 마일 떨어진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를 시카고 시내에서 떨어진 오헤어 국제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근처의 하얏트 호텔로 잡은 것이다. 하얏트 호텔은 모든 시설이 좋았는데 인터넷이 유료로 사용하는 기기 하나당 9.9달러를 받겠단다. 여행 중 모든 숙소가 인터넷이 무료였는데 이곳만 유료였다. 본인들의 방침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기기 하나당 요금을 받겠다는 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메일을 체크하고 내일 동선을 다시 점검해야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유진이가 쓰는 아이팟 와이파이는 이곳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과 나는 감기몸살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형식이네 식구와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는 기운을 차려야 했다. 모두들 침대에 누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내의 이야기에 모두 빵 터졌다. 그것은 오늘 우래옥에서 먹은 저녁에 대한 아내의 평가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앞으로는 먹는 것에 집중하자!”

앞뒤가 맞지 않는 문구였는데, 우리는 모두 공감하며 내일부터의 식사를 기대하니 흐뭇했다. 경비는 내가 집행하지만 매일매일 사용내역을 정리하면서, 당초 계획과 대비하고 있는 아내였다. 여행예산이라는 것이 늘 계획과 어긋나게 마련인데,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막아야지만 그 어긋남의 폭을 줄일 수 있었다. 그동안 먹는 것으로 어긋난 부분을 메워왔기 때문에 아내의 이 말은 내일부터 조금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숙소의 창밖으로 화려한 불빛들이 밤새도록 깜박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주차장에 차가 가득했다. 길 건너 대형 카지노 주차장이었다. 여행 내내 가는 곳마다 카지노가 성황이었다. 이곳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그토록 조용한 미국의 밤 문화에 카지노만 성황이었다. 미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1. 이동한 거리는 매일 자동차의 적산거리계(Odometer)를 확인하고 기록해둔 결과다. [본문으로]
  2. 1994년 NBC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던 의학드라마로 한국에서는 1998년에 SBS에서 방영된 바 있다. [본문으로]
  3. 동부에 비해서 서부에서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차비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동부 쪽 대도시의 경우에는 주차문제 때문인지 주차비가 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우노 피자 먹으러 가서 27달러짜리 피자를 먹기 위해 주차비 25달러를 지불하거나, 그 다음날은 밀레니엄파크에서 30달러의 주차비를 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차비는 아까웠다. 하지만 어쩌랴 내게 차를 이고 다니거나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본문으로]
  4. ‘구부러진 호’는 1981년 미국 연방시설청(GSA)의 ‘건축 속의 미술기금’으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다. 세라의 ‘구부러진 호’는 높이 3.6m 길이 36m의 작품으로 뉴욕 연방광장에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해 통행에 불편을 겪는다는 사람들의 청원에 따라 몇 년간의 소송과정을 거쳐 1989년 철거되었다. 시간과 장소의 특수성과 철의 소재적 특성에 주목했던 이 작품은 연방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연방광장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시간에 따라서 작품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 연방광장이라는 ‘장소 특정성’, 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무겁고 거친 느낌의 철이라는 소재적 특성이 어우러져서 완성되는 설치미술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향유자들의 거부로 폐기된 작품이다. 공공 설치미술 작품의 미학적 논쟁, 예술에 있어서 향유자의 몫, 대중성의 정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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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87일 시카고클리블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남겨온 피자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설 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비가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몸살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보니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비는 밀레니엄 파크로 이동하는 중에 그쳤다.

오늘은 클리블랜드까지 371마일(594)을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딱히 볼 것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와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보고 시카고에서 느지막이 떠나기로 했다.

여행계획을 짤 때도 클리블랜드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외에는 클리블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보니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까지 10시간 정도 거리니까 무리하면 못 달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약 지체되면 클리블랜드를 생략하고 나이아가라로 가서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설정해 둔 것이 클리블랜드였다. 다행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시카고에서 늦게 출발하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나이아가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우리는 시카고 미술관을 꼭 들러보기로 했다. 또 시간이 된다면 밀레니엄파크도 보려고 했는데, 마침 두 곳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두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사실 시카고에 도착하면서부터 사만다가 거의 패닉상태였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유난히 많은 고가도로 밑에서는 수신이 원활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고는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카고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사만다는 다급해지거나 침묵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만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들이었다.

길을 잃고 다시 만난 길(), 그 와중에 만난 시카고 극장()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시카고에서 사만다는 자주 길을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만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길을 잃으면 새 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문득 시카고 극장 앞이었다. 1921년에 개관한 시카고 극장은 미국 최초의 대형 극장이라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을 축소한 모양인데 특히 건물 앞에 걸린 초대형 붉은 간판이 선명했다. 그 앞에서 롭 마샬 감독의 영화 <시카고>(Chicago, 2002)[각주:1]가 떠오른 것도 그 붉은 간판의 선명함 때문이리라. 영화 <시카고>에서 보여준 뜨거운 욕망을 지금 이곳시카고에서 보기에는 머물 시간이 너무 짧았다. 주중에 그토록 분주하고 혼잡스러웠던 시카고의 일요일 오전은 서울의 그것처럼 한가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처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처연한 기분은 밀레니엄 파크에 도착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밀레니엄 파크 건너편 시카고 미술관 옆에서 음악공연이 있어서 공연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성스러운 분위기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지도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은 2004년에 했다고 한다. 음악공연 관계로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밀려드는 차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밀레니엄 파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야외 음악당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루리가든(Lurie garden),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왼쪽으로 루리가든(Lurie garden)이었다. 피에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했다는 루리가든은 부단히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일 년 내내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는 주차장에서 바로 북쪽으로 걸어가서 찾았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는 일상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시카고 미술관에 빼앗기고 있어서 입구를 찾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루리가든 앞쪽으로 걸어가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이 등장했다. 웅장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객석과 대규모 잔디밭(Great Lawn)을 두고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잔디밭 위까지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전경과 지붕

잔디밭을 덮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에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근처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와 있었다. 공연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은 지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봉과 봉이 만들어내는 프레임 사이로 주변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오고, 그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밀레니엄 파크가 시카고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련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공연장 지붕을 덮고 있는 조형물만큼이나 이 봉 구조물의 다채로운 프레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는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공연장만큼 스산한 풍경은 없다. 일요일 오전, 비가 내린 후의 야외 공연장은 그저 푸른 잔디밭일 뿐이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은 공연장으로 설계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새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공연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연장의 조형물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공연장과 잔디밭을 오간다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설치미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을 보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애니쉬 카푸(Anish Kapoor)가 만든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나타났다. 크라우드 게이트를 보는 순간 일단 그 크기(높이 10m, 너비 13m, 길이 20m)에 압도된다. 밀레니엄 파크의 방문 인증샷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10톤이 넘는다는 무게와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다 스테인리스를 이음매 없이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람과 안개 그리고 추위로 유명한 시카고의 일기를 생각할 때, 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되는 표면에 두 번 놀라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 세 번 놀라게 된다.

크라우드 게이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신을 비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면 구름을 형상화한 것인데, 영감은 액체수은에서 얻었다고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콩(Bean)이라고 부르니 재미있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혹은 다양성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밖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굴절되어 반사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크라우드 게이트는 되비춤을 통해서 세계를 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밀레니엄 파크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의 모습과 다양한 상호작용의 사례

크라우드 게이트는 중앙에 3.7m의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거울 앞에 서 보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낯선 모습의 나와 너라면 그것은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가족들 사진도 찍고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강하게 밀었다. 어디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이었다. 무례하고 세련되지 못한 중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횡단 여행 중 곳곳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례를 넘어 난폭하기까지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바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야 뭐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을 휩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만났던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LA 인근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에서는 중국인 전담 종업원을 두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소공녀소공자라고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의 무례함[각주:2]은 그 끝을 모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원을 만들어 웃고 떠들며 주변은 무시한 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더 불쾌해질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폭력이 폭력을 부르듯 무례는 무례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들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크라우드 게이트 옆으로 조금 이동하니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가 있었다.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설계를 했다는 이 작품은 제작을 위해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레스터 크라운(Laster Crown)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24m 높이의 두 개 기둥에는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13분마다 얼굴이 비디오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카고 시민들이라고 하니 공공미술(public art)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과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완성과 해체를 거듭하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과 크라우드 게이트 그리고 크라운 분수까지, 밀레니엄 파크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곳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 새 천년을 기념으로 공원을 조성하며 시카고가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블어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것이 새천년의 시카고에서 이루어지길 기원한 내용이었으리라.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는 개개의 독립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 간의 소통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상호소통을 통해서 밀레니엄 파크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직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미술관 안에 벌써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들의 이름이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점이었다. 이름까지 좀 더 멋스러운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름을 내주고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름까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시카고 미술관 전경과 입구 그리고 실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이라는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밀레니엄 파크와 니콜라스 다리(The Nicholas Bridgeway)로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규모 면에서도 미국 내 2위에 해당한다는 시카고 미술관은 26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간 18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1866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 아트 아카데미를 거쳐 1882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과 미술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3콜럼버스 세계 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 이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축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가 증축한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다리를 통하여 2009년에 증축했다는 현대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무료고 어른은 18달러의 입장료를 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무료였고, 시카고미술관은 어린이들은 무료인데, 둘 다 신선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화공간의 무료관람을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1층은 18-19세기 미국 미술, 2층은 미국 모더니즘을 테마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호, 세잔, 르노아르,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등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들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 밖에서 만난 강렬한 느낌의 그림들은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미국작가들의 작품임을 알았다. 특히 시카고 미술관에서 꼭 봐야한다고 소개된 그림들은 그 소개가 아니더라도 미국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인해 그림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

스로우 호머의 <The Herring Net>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Nightlife>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각주:3]<Nighthawks>는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도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보여지는 아이러니의 공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모두 어긋나고 있는 관계의 메타포, 텅 빈 듯한 공간의 구도 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Arcibald J. Motley Jr.)<Nightlife><Nighthawks>와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도 소란스러운 공허가 읽히는 작품이었다. 윈스로우 호머(Winslow Homer)<The Herring Net>는 프레임 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꽉 찬 두 어부와 청어 그물이 거센 파도와 함께 고된 노동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면서 같이 보고 그 느낌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따라갔다.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내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손을 잡고 때론 어깨를 걸고, 옆에 세우기도 하고 앞에 안기도 하면서 좋은 그림을 가족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감상에 젖어서 내가 미술관을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가본 것은 대학교 입학한 이후였을 것이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미술책이 전부였던 내에게 미술관은 차라리 강박에 가까웠다. 꼭 가서보아야 한다고 늘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가서는 낯설고 불편했던 공간이 미술관이었다. 대학원 시절 화집을 사서 모으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그림을 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한 이 체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 품에 안겨서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따듯한 체험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품들을 코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신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갤러리를 돌고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의자가 있으면 자꾸 앉으려 하고 몹시 지쳐있었다. 아내와 나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일러주고 좀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들을 도통 몰랐다. 어린 효진이는 그렇다고 쳐도 유진이는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요즘 미술시간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는단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외울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시회에 가면 작품 옆에 다 적혀있지 않은가? 작품을 보고 좋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엄마랑 아빠가 보는 동안 쉬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법 많은 방을 같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버릴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손잡고 작품을 설명해주던 엄마의 손길, 안고 이야기해주던 엄마의 체취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따듯한 기억이 될 것인가? 세계적인 명화도 명화였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시카고 미술관에는 동양 예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많았고 우리 것은 거의 없어서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들이 모두 합당한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던졌다. 전시된 개인 소장품들은 대부분 고서화나 오래된 도자기들이었는데, 그것이 약탈이나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더라도 유실 가능했던 것들이 잘 보존되었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약탈이나 밀반출의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소유로 볼 수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채우고 그것을 세계 최고 박물관 운운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등.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창작된 그 나라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방적인 약탈이나 불법적인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당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소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대여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나라 미술관에서 자기 나라 유물들이 많고 적음을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문화적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인정투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거나 합법적인 경로로 마련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몇 개의 전시물로 과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작고 소박한 한국관을 보면서 갑자기 맥락 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내와 나는 더 돌아보고 싶은데 유진이가 감기의 여파로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효진이가 피곤하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2시쯤에는 관람을 마칠 계획이었다. 시카고에서 끝나는 것이 Route66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보겠다는 욕심에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다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만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제대로 보려면 2-3일쯤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쩌면 미술관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책 한 권 읽듯이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에 가까운 것이리라. 문화에 모두, 전부, 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개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체험하는 향유 자체가 문화가 아니던가?

태평천하를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태평천정이 된 조악한 기념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서면서 입구의 기념품점에 들렀다. 기억이 될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만한 것이 없었다.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써져 있어야 할 곳에 태평천정(太平天丁)이라고 적힌 기념품을 보면서 저것도 혹시 중국제품이라면 웃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조악한 모조품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특히 엉터리로 한자를 써놓은 기념품들을 보면서 씁쓸했다. 시카고를 떠나면서 시카고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되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그곳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오늘의 감동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욕심나고 더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의 1단계인 Route66 코스는 마쳤다. 이제 클리블랜드부터는 여행의 2단계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동부여행이다. 풍광이나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까지 I-90I-80타고 갔다. 이 도로들은 이전까지의 도로들과는 다르게 유료도로기 때문에 서비스플라자(Service Plaza)가 설치되어 도로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비스플라자는 주유소,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피자집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보아온 주유소나 패스트푸드점과는 브랜드가 바뀌어 있었다. 달리면서 몇 군데 서비스 플라자에 들러보니 대부분 bp주유소,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이곳의 서비스플라자도 제품 대비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시카고 스카이웨이 톨게이트(),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에 만난 철교()

아직 유료도로가 시작되기 전인 시카고를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내려섰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감기약만 구입해서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사만다의 혼란은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어서, 일러준 그대로 달려가다 보면 공사 중이거나 막힌 길이었고, 목적지라고 해서 보면 낯선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사만다를 무시하고 표지판만 보고 음식점을 찾기에는 찾아야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배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료도로를 만나 서비스플라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계획보다 많이 남은 햇반

8시가 지나서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기대보다 괜찮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제공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저녁이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컵라면 2개와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이제 슬슬 김치가 그립기 시작했다. 그나마 느끼한 현지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컵라면이 떨어졌으니 큰일이다. 한인마트를 찾아야 구입할 수 있을 텐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한인마트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보다 컵라면은 많이 먹었고, 햇반과 3분 카레 등은 기대만큼 먹지 않아 많이 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햇반의 어정쩡한 온도와 흐물거리는 3분 카레의 식감에 물리나보다. 나도 그러니 어린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군말 없이 잘 참아주니 고맙고 대견하다.

내일은 일찍 나이아가라로 출발해야 한다. 일찍 출발할수록 좀 더 많이 보거나 천천히 깊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실수로 캐나다 쪽 숙소를 잡은 덕분에 내일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보다 캐나다 쪽이 더 멋있다고 위로하며 출발 전에 학교 인터내셔널 오피스에서 입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왔다.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입출국사무소 관리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던데, 기대가 된다. 실수는 대부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1. 192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연극작품을 1975년 뮤지컬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자 2002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가 출현한 뮤지컬 영화다. 재즈, 갱, 관능, 쇼 비즈니스 등과 같은 시카고의 이미지와 황색언론, 살인 등의 대중적인 요소들을 통합해서 구현한 뮤지컬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All That Jazz'와 'Roxie' 같은 넘버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정 당 한 명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자녀를 공주와 왕자로 키우는 중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 이렇게 여섯 명의 어른이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와 공주로 성장하게 되고, 이들의 모습을 비꼬아 소공자, 소공녀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3.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알랭드 보통은 그의 그림에서 고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공허에 마음이 울렸다. 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국내 최고의 웹툰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페이스 북에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체험을 구현하는 작가의 매혹은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 눈을 빼앗기고 가슴에 새기게 되나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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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817일 워싱턴얼바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여행은 늘 돌아가기 위한 떠남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없다. 떠나지 못해 조바심치고 안타까워하다가 막상 떠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돌아올 날을 꼽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어쩌면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의 설렘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익숙한 곳에 놓아두고 자신의 일상을 문득 정지시켜 놓고 떠나서 낯선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서성이다가 그 안에서 자신을 꺼내어 돌아오는 여행은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여행에서 돌아가는 길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정지시켜 놓았던 일상은 정확히 정지된 만큼 더 분주해질 것이고, 사용된 여행비용만큼 궁핍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빽빽하게 채우고 싶어 했다.

아침식사를 포기하고 모두들 1시간쯤 더 자기로 했다. 1시간 더 잔다고 피곤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편안했다. 오늘은 미국 역사박물관을 3시까지 보고,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를 탈 계획이다. 어제 저녁을 먹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에서 남겨온 머핀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여행을 마치기 전날이라고 어제 저녁은 제대로 먹기로 했는데, 마침 필라델피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페이머스 데이브스가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어서 그곳에 간 것이다. 지난번에 아쉬워했던 콤보를 시켜서 넉넉히 먹으면서 이번 여행을 정리하고, 서로를 축하했다. 배불리 먹고 났는데도 닭 한 마리 반 정도와 머핀이 많이 남았다. 아내가 너무 많을 것이라고 시키지 말라는 것을 남으면 내가 먹는다고 우겨서 시켰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돌아오는 내내 아내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아침은 머핀으로 해결하지 않았는가?

워싱턴은 매일매일 더 혼잡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주차할 곳이 없었다. 동전주차기가 설치된 곳은 모두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내셔널 몰 주변의 관공서가 몰려 있는 대부분의 지역은 아침 10시까지는 교통 혼잡과 청소 때문에 주차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1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빈 곳이 없었다. 주차할 곳을 찾아서 몇 바퀴를 돌고나서야 차를 빼는 한 곳을 발견하고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앞으로 들어와 주차를 했다. 화가 나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차에서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내렸다. 어쩌겠는가, 힘드셔서 그랬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 역사박물관에서 10분쯤 걸어야 하는 곳에 가까스로 주차를 했다.

이곳도 어제처럼 2시간 한정 주차라서 중간에 한번 다시 나와서 차를 옮기거나 주차를 연장해야 했다. 거리에 서 있는 동전주차기는 오래된 것은 동전만 받지만, 신형은 동전과 카드를 모두 받는다. 25센트 동전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카드가 편하다. 2시간 한정 주차의 경우에는 2시간 이상 입력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2시간 후에 나와서 다시 카드를 넣고 시간을 연장하는데 동일 카드는 연장이 되지를 않는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니 결제가 된다. 동일인의 동일카드를 인식할 줄 아는 주차기가 동일인의 카드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결제가 되는 것을 보면 조삼모사였다. 내셔널 몰에 그 많은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주차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설사 주차를 했다고 해도 2시간 안에 박물관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두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말일 텐데, 우리 같이 숙소가 시외에 있는 여행객들은 어쩌란 말인지 궁금했다.

내셔널 몰 주변의 스미스소니언 국립박물관들 지도

미국 역사박물관은 워싱턴 기념탑 쪽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국립미술관의 동관과 서관을 지나서 가야했다. 새로운 길로 가보자고 국립미술관 앞쪽이 아닌 뒤쪽으로 가다보니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날도 많이 더웠다. 걸어가다가 지칠 판이었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 국립미술관 조각정원(National Gallery of Art Sculpture Garden)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록시 페인의 ‘Graft’

알렉산더 칼더의 ‘Red Horse’

루이스 브루주아의 ‘spider’

호안 미로의 ‘Gothic personage, Bird-Flash’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House1’

클래스 올랜버그와 쿠제 반 브루겐의 ‘Typewriter Eraser,

그저 거리를 줄이려고 들어선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은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1991년에 개관했다는 이곳은 세계적인 작가들의 17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문과 문 사이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저녁에는 음악공연이 펼쳐지고, 겨울에는 이곳을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분수 주변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로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분수대 옆의 카페테리아에서는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팔고 있었다. 카페테리아 앞쪽으로 록시 페인(Roxy Paine)‘Graft’이 서 있었다. ‘Graft’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나무였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느낌과 앙상한 가지에서 견고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 주변으로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House1’,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Red Horse’, 호안 미로(Joan Miro)‘Gothic personage, Bird-Flash’, 클래스 올랜버그(Claes Oldenburg)와 쿠제 반 브루겐(Coosje van Bruggen)‘Typewriter Eraser, Scale X’, 루이스 브루주아(Louise Bourgeois)‘spider’등이 있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spider’는 롯본기 힐스에서 보았던 ‘maman’과 비슷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이 거미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maman'은 말 그대로 어머니의 이미지와 연관된 것이다. ‘maman'은 유년기의 두려움과 상관된 어머니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었고, 이 작품은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물적인 존재로서의 거미와 상관된 것이었다.

작품의 규모나 대담함에 압도되어 이러저런 시점에서 살펴보며 사진을 찍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진은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부족한 촬영기술 때문이겠지만, 정지된 시간 외에는 현재의 다른 무엇도 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분수에 발을 담그거나 그 주변의 그늘에 담요를 깔고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작품 속으로 일상이 들어간 것인지, 일상 속으로 작품이 들어온 것인지도 몰라도, 부러운 여유와 풍요였다.

미국역사박물관 입구에서 만난 어린 아이들() 이름표를 등 쪽으로 달았다

사진을 찍다보니 조각정원 뒤쪽으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멋스러운 건물이 들어왔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는 독립선언서 같은 국가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National Treasure, 2004)에 등장했다고 하니 아이들도 그제야 관심을 갖는다.

국립미술관 조각정원을 나와서 미국 역사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앞쪽에 견학을 온 것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귀여웠다. 손에는 흙장난할 때 쓰는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하나같이 이름표는 등 뒤에다 달았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솔하는 선생님이 뒤에서 아이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이름표를 등 쪽에 달고 친구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을 보니 천사가 따로 없었다.

미국의 다락방(the nation attic)이라고도 불린다는 미국 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은 미국 생활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가까운 과거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일상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들이 중심이라서 훨씬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대통령, 전쟁, 오락, 인종문제, 교통수단 등등의 테마별로 설명보다는 즉물적인 제시가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 층의 규모가 대단히 컸지만 테마를 따라 돌다보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었다.

세사미 스트리트 초기 인형들

마이클 잭슨 모자

도로시의 구두, 세사미 스트리트, 피너츠의 초기 버전, 마이클 잭슨 모자, 알리의 권투 장갑, 루게릭의 야구공 등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전시는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미국 역사박물관 안에 전시된 대중문화 전시가 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유독 미국에만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흑인대학생들이 백인전용 좌석에 앉음으로써 분리주의에 항의했던 그린스보로의 가게 의자

흑인노예 등에 채찍 상처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에 설치된 네 개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흑인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의 식당 의자를 전시한 것이다. 1960년 그린스보로의 한 식당에서 백인들만 앉게 되어 있는 의자에 흑인 대학생 네 명이 앉자 주인은 나갈 것을 요구하며 음식주문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은 27, 그 다음날은 300, 그 다음날은 백인을 포함한 1,000명이 함께 찾아와 백인전용 의자의 부당함에 항의함으로써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연좌운동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미 1955몽고메리 승차거부 운동으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각주:1]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저항이 시작된 상태에서, 그린스보로의 이 사건을 통하여 흑백분리의 부당성과 심각성을 전국적으로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1960년도까지 미국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미국이 아니던가? 이러한 뿌리 깊은 흑백차별 문제는 단지 미국 사회의 12%를 차지하는 흑인들에 대한 차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득권층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미국 내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이며, 더 나아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굴복해야하는 약소국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이기도 하다.

야만은 과거의 수사가 아니다. 다만 노골적인 것들이 은밀하고 합법적인 형태로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합법과 합리로 정당화되는 미국의 질서 이면에는 기득권층의 일방주의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미국의 기득권층이 백인 기독교도 부르주아 남성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가 가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캠프에서 쓰던 식기 키트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던 추첨통

이곳에서는 자유를 위한 대가로 불리는 미국의 전쟁을 통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상당한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독립전쟁부터 최근 이라크전까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미국중심의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당시에 화려한 군복과 투박하지만 잘 벼려진 무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독립전쟁을 수행하며 워싱턴 캠프에서 사용했었다는 식사용 키트는 캠핑세트처럼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부상당한 병사의 팔을 절단하는 모습은 처절했다. 남북전쟁 당시 입대자를 고르는 추첨에 사용했다는 추첨통이나 매일 지급되었던 반 컵의 럼주[각주:2] 등은 참전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부터는 자유와 평화라는 명분의 정당화와 전시동원 체제 내에서 여성의 참여 독려[각주:3] 그리고 평화수호자로서 미국의 위치와 전력의 우위 등이 강조되어 있었다.

Route66과 관련하여 이동수단, 이주 과정 및 고난, 도로망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아이들은 자기들이 달려본 길이라고 무척 재미있어했다. Route66은 서부로의 확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자연재해로 농토를 잃고 농장노동자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고난의 여정이었고, 세계 대전과 한국전 등에 참전하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길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Route66은 미국의 근현대사의 영욕을 증거하는 길이다.

미국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초기 캘리포니아 농장의 값싼 노동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어려웠던 시기를 막연하게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서부유럽인들의 이민으로 탄생한 미국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등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제한을 합법화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1929년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1880년대 인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출신국별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였다. 기득권을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이민법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중국인 이민자들이었다.

값싼 중국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의 청원이라는 명분 아래 서부유럽계 백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미국 전체 국민총생산의 30%를 담당하고, 전 세계 제조업의 20%를 담당한다는 캘리포니아의 저력은 그러한 이민자들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문화라는 말에 자유와 평등이 함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거나 낭만적인 믿음임에 틀림없다.

미국 역사박물관은 넓고 크긴 했지만 미술관이나 다른 박물관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짐을 부치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에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금 빨리 공항으로 출발했다.

유료 가트

기내에 가지고 탔던 누추한 여행의 흔적

로널드 레이건 워싱턴 국제공항(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에 기름을 넣을까 하다가 아침에 주유를 한 터라 괜찮을 듯싶어서 그대로 가져다주었다. 뉴욕에서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48달러나 더 내야했었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이 정도면 됐단다. 그동안 차에 싣고 있던 짐들을 꺼내 놓으니 의외로 많았다. 어제 저녁에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많았다. 우리가 예약한 저가항공의 경우에는 트렁크 하나당 20달러의 요금을 받아서 40달러의 추가요금을 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내 캐리어는 그냥 가지고 타도 될 뻔 했는데 저가항공은 처음이라서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예상했던 금액보다는 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작은 짐들은 가족들이 나누어 들기로 했지만 그래도 적은 양은 아니었다. 그래서 탑승 전까지는 가트에 모두 싣기로 했는데 가트가 3달러를 내야 이용을 할 수 있었다. 3달러를 지불하면 가트를 뺄 수 있었는데, 나중에 반납하면 25센트만 돌려주는 아주 야박한 인심이었다. 왜 인천공항이 세계 1위 공항으로 매년 선정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는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저녁을 주지 않는단다. 그래서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것을 시켰는데, 착한 가격에 제법 그럴 듯한 음식이 나왔다. 오늘 제대로 된 식사는 처음이었다. 모두들 돌아간다는 설렘에 배고픈 줄도 몰랐나보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워싱턴에서 비행기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사실 고민을 했었다. 저가항공이 가격은 저렴한데 한 번도 타보지 않아서 어떨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 국내선 저가항공의 수준이나 서비스는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기내식이나 기타 없어도 될 서비스만 빠진 것이라기에 예약을 했다. 이왕 저가항공을 탔으니 조금 더 불편을 감수하고 예산을 줄이자는 생각에 덴버에서 한 번 갈아타는 조건으로 가장 싼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여행 관련 예매는 수시로 제공되는 핫딜(hot deal)을 제외하고는 미리 할수록 저렴하다. 운 좋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핫딜이 제공되면 가장 좋지만 원하는 날에 좌석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일찍 예약을 한 것이다. 더구나 숙소일 경우에는 핫딜이 뜨면 환불하고 그것을 예약하면 되는데, 항공권의 경우에는 환불 수수료가 붙기 때문에 그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상당히 저렴하게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덴버에서 갈아타는 것을 포함해서 4시간 30분 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동부와 서부가 3시간의 시차가 있으니까 7시간 30분만에 도착한 것이다. 산타 아나 공항에 10시쯤 도착해서 짐 찾으면서도 택시가 없을까봐서 아내는 계속 걱정을 했다. 아내가 들은 정보로는 이곳에서는 밤늦게는 공항택시가 없단다. 그래서 노심초사했는데 마침 우리가 탄 것이 마지막 비행기 전이라 택시가 있었다. 사실 택시가 끊기면 아는 분들께 픽업을 부탁해야 하는데 서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알려주고, 우리끼리 우리말로 택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도 한국 사람이란다. 우리는 기사분이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우리말이 그리웠는지 기사분은 이것저것 물었다. 3주간의 횡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비용이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걱정해준다. 이번 횡단 여행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우려가 있었지만 비용을 걱정해준 사람은 기사분이 처음이었다. 사실 여행은 아주 철저한 현실이 아니던가? 먹고 자고 보는 모든 것들이 아주 규칙적으로 비용을 요구하고, 일단 시작하면 돌아올 때까지 그 요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여행이 아니던가? 아마도 기사분의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묻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이민사를 들려준다. 이민 와서 부지런히 생활하고 돈을 모았던 이야기며,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까지그래도 지금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집이었다.

한국 기사 아저씨 덕분에 편안하게 집에 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집이 너무 낯설지만 편안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족들 모두 약간은 흥분상태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 아내와 나는 큰 짐을 정리했다. 엄청난 빨래와 여행 중 구입한 기념품 등을 정리했다. 여행을 떠나면서 걱정하실까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떠났었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를 드리고 씻었다. 씻고 나니 그제야 집이라고 피로가 몰려왔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이곳을 한 번도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편안하고 푸근한 것을 보면, 이곳이 이제 내게 집이 되어가고 있나보다. 떠나보아야지만 자기가 있는 곳을 안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3주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달려온 4,359마일(7,015)[각주:4]의 거리나 7,758달러의 비용이 만만한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경유하는 도시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남루해지고 피곤해졌지만 그것을 이유로 내려서거나 돌아올 수는 없었다. 오로지 앞으로 가야만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다. 3주 동안 1만장 넘는 사진을 찍고, 대형 바인더 두 개 분량의 자료를 모으고, A4 50장 분량의 빽빽한 메모를 적었지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련하다.

3주간 신고 다닌 크록스

크록스 구멍 부위가 탄 발등

미국 횡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부터 일상 속에서 반추하며 지속적으로 구성해나갈 부분인지도 모른다. 이제 휘발성 강한 기억을 노트 위에 기록해야 할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그 낯선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겸허하게 되비추어야 할 것이다. 여행 내내 길을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서 보니 길이 날 데려왔음을 깨닫는다. 결국 여행에서 만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같이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늘 집으로 돌아오나 보다.

2011년 여름은 뜨거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는데,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길이 데려다 놓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모든 것을 놓고 떠날 길을 생각한다. 다가올 날들에는 떠나고 돌아오는 길이 더 멀고 길어져서 나를 좀 더 깊고 온전하게 만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풀어놓은 남루한 짐들을 빨고 기워서 언제든 다시 꾸리고 떠날 수 있도록 내 안에 설렘이 더욱 강성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움은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그리움을 만든다.

 

  1. 짐 크로 법(1876-1965)은 학교, 버스, 공원, 병원, 식당, 감옥, 식수대 등의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이다. 이 법은 모든 공공기관에서 흑백의 분리를 의무화했으며, 1896년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즉 ‘분리되어 있으되 평등하다’는 기만적인 흑백분리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 법으로 인하여 흑인들은 공공기관에서 모멸스러운 불평등을 감내해야했다. 짐 크로(Jim Crow)라는 말은 “니그로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으며 가난과 어리석음의 대명사”(케네스 데이비스, 앞의 책, p.325)였다. [본문으로]
  2.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적인 술이었던 럼주는 17세기 근대화된 군대가 등장하면서부터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하루에 지급되는 양은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취기를 느낄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전시에 공장 등으로 불려나왔던 여성들은 종전과 함께 귀환한 남성들과 일자리 경쟁이 불가피했다. 남성들의 일자리 보장을 위해서 종전 후에는 여성들을 일터라는 공적공간에서 불러내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다양한 여성상과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다. [본문으로]
  4. 인천공항에서 LA공항까지가 9,637㎞니 횡단여행 동안 달린 거리가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음을 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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