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서 강성한 것들

- 라스베이거스솔트레이크시티옐로우스톤코디솔트레이크시티라스베이거스(619~26)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세 번째 여행은 아이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다녀온 옐로우스톤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무척 인상 깊었고 그만큼 아쉬웠던 가족들은 옐로우스톤을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귀국을 얼마 앞두지 않는 솔이네가 옐로우스톤을 꼭 다녀와야 한다고 잔뜩 부추겼다. 솔이네는 한 달 전에 예약을 해둔 비행기를 타고 솔트레이크시티로 가서 차를 렌트해서 옐로우스톤을 돌아볼 것이라고 했다. 구글 지도로 측정해보니 자동차로 가능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솔트레이크시티옐로우스톤코디솔트레이크시티라스베이거스의 78일 간의 일정을 계획했다. 솔트레이크시티까지 하루에 달리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으나 운전이 상당히 부담이 되는 거리임에는 분명했고[각주:1]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어서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하기로 했다.

라스베이거스 가는 프리웨이에서 쉼터()와 황량하기만한 도로(). 한국식 휴게소가 아닌 화장실만 갖추고 있는 미국 프리웨이의 쉼터는 설렁하기 이를 데 없다.

라스베이거스는 첫 여행에서 다녀온 터라 새로울 것도 없었고, 다른 곳으로 가는 길에 하루 묶어가는 곳으로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묶을 곳으로 라스베이거스를 택한 것은 가격 대비 숙소의 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잠만 자고 떠날 곳이라는 생각에 저렴한 곳으로 고르고 골라서 엑스칼리버 호텔을 정했는데, 가격이 왜 저렴한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호텔 입구에서 방까지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객실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금연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냄새까지 났으니 다른 기대는 갖기 어려운 곳이었다.

구글 지도 위에서 세워둔 계획과는 다르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7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밤 운전을 피하고 싶어서 조금 일찍 출발을 한 덕분에 7시 조금 넘어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해가 남아 있어서 급한 마음에 시내를 먼저 둘러보았다. 마침 모르몬교 사원과 유타(Utah)주 주의사당 주변으로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의사당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우리도 노을에 젖었다.

유타주 주의사당 주변 주택들은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화려하거나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은근한 매혹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 서쪽으로 둘러선 오키르 산맥에는 6월 중하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눈이 남아 있었고, 붉은빛으로 선명하게 타오르는 노을과 어우러져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동계 올림픽이 열릴만한 곳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 시내와 노을이 내리고 있는 유타주 의사당, 유타주 의사당 앞에 있는 재미있는 표지판과 솔트레이크시티를 감싸고 있는 오키르 산맥. 6월말임에도 눈이 남아 있는 오키르 산맥 위로 아름답게 번져가는 노을.

솔트레이크시티에는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아이오와 시티로부터 1,350마일(2,160km)을 이동해왔다는 모르몬교[각주:2]의 경건한 의지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모르몬교도의 성도(聖都)답게 템플스퀘어(Temple Square)에서 뿜어내는 아우라(Aura)가 낯선 여행자를 압도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숙소였던 햄프턴 인과 크리스털 인[각주:3]은 가격 대비 만족도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나름의 격조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숙소에서 챙겨주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우리는 아침 일찍 옐로우스톤으로 떠났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입구에 있는 숙박업소들의 폭리를 모두 불식시킬 만큼 경이로웠다. 1872년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수많은 관광객과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곧 문을 닫고, 자연에 복원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옐로우스톤과 함께 미국의 3대 국립공원이라는 요세미티국립공원이나 그랜드캐니언의 경우에는 이곳처럼 화산활동이 활발하지 않아서 그나마 훼손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했다.

길을 가로 막고 걸어가는 바이슨을 뒤따르는 자동차들과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전경올드 페이스풀의 용출 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간헐천(geyser)이 곳곳에서 각기 다른 크기와 높이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 용출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간헐천이 살아있는 것들이어서 주변 지반이 약할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이어지 나무다리를 통해서 접근하고 그 위에서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간헐천 주변에는 땅에 내려서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간헐천이 용출되는 덕분에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고사(枯死)하고, 주변은 온통 잿빛이지만 정작 간헐천은 사파이어 빛으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주변의 생명을 거두어 제 빛으로 풀어내는 잔혹한 매혹이었다.

지도를 받기 위해 찾아간 안내센터에서 알려준 것처럼, 우리는 중심부를 8자로 도는 그랜드 루프 로드(Grand Loop Road)를 따라서 이틀 동안 부지런히 돌아보았다. 남한 면적의 1/11정도 크기인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자동차로 아무리 빨리 돌아보아도 온전히 이틀은 소요되는 규모였다. 옐로우스톤은 6월에 찾았음에도 고지대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넓이의 압도도 압도였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동시에 보여주는 높이의 경이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려는 듯 넉넉한 넓이와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죽어서 삶을 증거 하는 동물들의 시신, 산불로 서서 죽은 나무들, 간헐천의 고사목들까지 죽음은 고스란히 그대로였다.

길이 이끄는 곳은 모두 낯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그것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며 즐기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돋보였다. 주변의 간헐천이 모두 모여드는 옐로우스톤 호수(Yellowstone Lake)의 규모와 빛깔과 바람, 65분마다 규칙적으로 용출하는 올드 패이스플(Old Faithful)에서 용출의 순간을 보기 위해 그 주변에 삥 둘러앉아서 기다리던 300-400명의 사람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산불로 인해 불타버린 나무들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인내 등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옐로우스톤 곳곳을 누비는 바이슨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바이슨 때문에 곳곳에서 도로가 막히는 바이슨 트래픽(Bison traffic)이 발생하여도 사람들은 모두 숨죽여 그들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 즐기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자연을 중심에 놓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자연을 즐기려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이었다. 1872년 국립공원 지정 당시에 수백만 마리였던 바이슨이 30년도 되지 않아서 스물세 마리로 줄어들었다가 지금은 사천 마리 정도의 개체수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에서 가죽을 얻기 위해 바이슨을 대량으로 학살한 백인들의 잔혹함에 치를 떠는 인디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3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수백만 마리를 스물세 마리로 줄여놓은 백인들의 탐욕은 경악을 넘어선 죄악이었다.

동물들을 촬영하기 위해 삼각대를 세우고 기다리는 사람들.

옐로우스톤의 이러한 관리와 관람객들의 태도가 늘 긍정적인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어서, 야생동물에 의한 인명사고가 종종 일어나고는 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보도를 보니 캠핑하던 부부 중 남편이 곰에게 생명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곰보다는 바이슨에 의한 사고가 더 빈발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야생은 야생인가보다. 그래서 옐로우스톤 레인저들은 초식동물은 25야드(23m), 곰이나 늑대는 100야드(91m) 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미국 사람들 이런 규칙은 참 잘 지키는데도 불구하고 곰에게 목숨을 잃는 것은 나름 사연이 있다고 한다. 옐로우스톤에서 곰의 개체수가 늘면서 먹이가 부족해진 곰들이 생겼고, 초기에 인위적으로 먹이를 공급하자 곰들은 야생성을 잃어 버렸고, 그 결과 많이 죽어갔단다. 그 이후 옐로우스톤에서는 곰들에게 음식을 주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지시키고 있고, 곰이 열 수 없도록 튼튼하게 제작된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캠핑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보관하게 하는 철제 보관함도 설치해 두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곰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이 곰들과 마주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트래킹 참가자들은 대부분 곰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닌다. 곰에 희생된 부부의 경우에는 스프레이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옐로우스톤에서 차를 달리다 문득 속도가 줄어드는 곳에는 여지없이 야생동물을 보기 위해 차들이 정차해 있었다. 누구도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차를 멈추고 내려서 카메라 셔터마저 조심스레 누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대부분 삼각대를 세워두고 몇 시간씩 동물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인내와 끈기는 사진에 담길 동물만큼이나 신선했다. 바이슨, 여우, , 무스, 엘크까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동물들은 우리에게 반가운 정차를 요구하곤 했다.

옐로우스톤 호수 전경, 코디로 가는 길에 만난 산불로 타버린 삼림을 그대로 둔 모습

옐로우스톤에서 가장 이색적이었던 것은 물론 표현을 무색하게 하는 압도적인 자연이었지만 슬그머니 눈길을 끄는 것은 캠핑카였다. 서부 쪽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캠핑카를 쉽게 만나게 된다. 승용차를 뒤에 매달고 달리는 버스형 캠핑카, 캠핑트레일러를 짐칸에 얹고 달리는 트럭, 뒤에 배를 매달고 달리는 SUV, 두 개의 작은 가트를 달고 달리는 캠핑카 등등 캠핑카의 다양한 모습은 그 자체가 볼거리였다. 미국사람들은 놀고 즐기는데 참 결사적이라고 가족들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부러운 풍경이었다. 적은 비용을 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최대한 가깝게 가서 자연 속에서 즐기다 오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캠핑을 가기 위해 시간을 내고,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캠핑을 가기 위해 단지 짐을 꾸리고, 돌아와 다시 푸는 일만으로도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지런히 꾸리고 부지런히 달리고 있은 것이다. 이따금 캠핑카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참 별 것을 다 챙겨서 싣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퍼백의 나라답게 음식들을 거의 대부분 싸가지고 다니고, 아이들 베개에 애완동물까지 빠짐없이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경이로워 보일 정도였다. 정말 놀고 즐기는 것에는 더할 수 없이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옐로우 스톤 강에서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을 연상시키는 송어낚시꾼들을 보았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한 사랑을 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대사가 들려오는 듯, 어두워지는 강 위를 걸으며 낚싯줄을 던지는 그들의 모습이 강한 실루엣으로 남았다. 영화 속 노먼의 내레이션처럼 모든 존재와 자신의 영혼 그리고 기억이 어우러져 강을 이루고 흐르는 듯, 물줄기의 강성함에 비해 그 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역광으로 잡힌 그들의 평화로운 실루엣이 너무 강하게 다가와 소리를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옐로우스톤에서는 가는 곳마다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각을 놓아버려 늘 예상보다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풍경도 풍경이었지만 그것이 자극하는 감각적 체험들도 쉽게 잊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들짐승과 날짐승이 살아서 내는 모든 소리들과 간헐천의 수증기와 함께 다가오는 유황냄새 그리고 곳곳에서 시간의 흔적이 빚어내는 압도적인 이미지들은 좀처럼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떠나는 날에도 옐로우스톤 호수의 규모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가 곳곳에 잠겨있는 듯한 물빛에 넋을 놓고 있다가 느지막이 코디(Cody)로 출발했다.

카우보이의 도시로 유명한 코디는 옐로우스톤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옐로우스톤 동쪽 입구를 벗어나 코디로 향하는 길은 아주 한적했다. 서부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계곡과 강물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속력을 높일 수 없는 길이었다. 천천히 보면서 달리지 않는다면 아주 오랫동안 후회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코디에서 벌어지는 로데오 경기

이 마을은 와일드 웨스트 쇼’(Wild West Show)로 유명한 버펄로 빌 코디(Buffalo Bill Cody)의 공으로 와이오밍에 댐을 세우고 철도를 놓았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코디라고 명명했단다. 도착해서 안내센터를 찾아가 관련 정보를 받고, 이곳에서 1919년부터 해왔다는 로데오 경기를 보았다. 코디에서는 6월부터는 8월까지 3개월 동안 매일 열리는데 이것을 ‘Cody Nite Rodeo’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주로 7월에 며칠 간 열리는 ‘Cody Stampede Rodeo’가 있으며, 미국전역에서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코디를 기억하게 해주는 스테이크

로데오 관람 문의를 하자 숙소에서는 자신들에게서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알려주었지만, 의심 많은 여행자는 결국 안내센터에서 입장권을 구입했다. 로데오를 보러가기 전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스테이크와 바이슨 햄버거를 시켰는데 둘 다 감동적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넉넉한 스테이크의 맛은 내가 먹어본 것 중에서 최고였다. 온 가족이 그 맛에 이끌려 하나를 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저렴했고, 텍스는 캘리포니아의 1/3정도 수준이서 더욱 좋았다. 옐로우스톤에서 보았던 바이슨을 패티로 쓴 바이슨 햄버거도 무척 담백했지만, 최고는 스테이크였다.

TV에서 몇 번 보면서 남성적이고 낭만적인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로데오 경기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로데오 경기장에 도착해보니 화면으로는 절대 맡을 수 없었던 소똥과 말똥 냄새가 진동했다. 낮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만 경기에 참가하는 카우보이들은 물론 중고생쯤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입장권과 식음료를 팔고, 어린 소년들은 팸플릿을 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우보이의 어린 아이들은 로데오 중간 쇼에 관객인 야 등장하거나 어린이 로데오에 참여하였다.

어린이 로데오 경기는 보면서 위험하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어린이 카우보이는 경기 중에 떨어져 울었다. 그 옆에서 별 것 아니라는 듯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단호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저 시간이 남아서 하는 공연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로데오였다. 그러니 어른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참여하여 로데오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그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그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 앞으로 로데오 경기를 끌어가야하니 경기 중에 떨어졌다하여 보듬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떨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태우는 모습이 단호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단호함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홀로 밥을 마련해야할 때, 사라지지 않을 밥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데오 경기는 밧줄로 송아지를 잡아서 묶기(Tie Down Roping), 달리는 송아지 넘어트리기(Steer Wrestling), 거친 말 위에서 오래 버티기(Saddle bronc), 말안장 없이 오래 버티기 (Bareback), 세 개의 원통을 빠르게 도는 배럴 경주(Barrel Racing), 황소 위에서 오래 버티기(Bull Riding)등이 있는데, 이것이 차례로 진행된다. 카우보이들은 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목보호대를 하고, 황소의 급소를 줄로 단단히 동여맴으로써 황소를 난폭하게 만든다. 소와 말을 이용한 로데오 경기는 아주 역동적이었다.

로데오 경기는 카우보이의 신화를 강화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에서 영웅을 만들어낸 것이 서부 개척기의 카우보이였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인니언의 공격을 막아내고 남성다움을 성취하는 소몰이꾼, 악당들로부터 가족과 이웃을 지켜주는 정의의 사도라는 영웅상이 수렵된 것이 카우보이였다. 이러한 신화화는 서부를 동경하는 동부에서 확대재생산 되고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향수됨으로써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현실의 그들은 텍사스에서 철도 운송이 가능한 미주리 주의 세딜리아, 와이오밍 주의 샤이안, 캔자스 주의 닷지시티와 아빌레네까지 소떼를 몰아다주는 고단한 임금 노동자들일뿐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일거리도 1890년대 북부초원에서도 황소가 사육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소들을 가둘 수 있는 철조망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로데오 경기는 카우보이의 여기에서 출발해서 그들의 신화를 강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고, 이제는 상실된 남성성, 서부개척시대의 향수 등으로 즐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데오 경기 중간에 카우보이의 아이들을 관객인양 꾸며서 진행하는 퍼포먼스와 경기 후에 간객에게 팬서비스 차원에서 사인과 사진 촬영을 제공한다.

로데오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데 카우보이 광대와 잘생긴 카우보이 청년 둘이 경기장 밖에서 사인해주고, 사진을 찍자고 하면 아주 예의 바르게 일어나 포즈를 취해주는 모습이 코디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했다. 아직 서부 개척기의 전통과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다는 이 도시는 하나같이 입고 있는 풀 먹인 셔츠처럼 단아해보였다.

이날 로데오 경기장에서 우연히 우리 앞자리에 있던 아미시(Amish) 공동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위트니스>(Witness, 1985)에서 처음 보았던 아미시 공동체 사람들을 바로 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일종이라는 아미시는 새로운 문명을 거부하고 19세기 유럽 농촌의 생활을 준거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위트니스>는 탐욕과 폭력으로 무질서한 도시의 삶을 대표하는 존 부크 형사와 관용과 절제 그리고 비폭력을 상징하는 아미시 공동체의 질서를 대비하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미시의 미망인 레이첼을 통하여 지금 이곳의 문제에 대안을 모색했던 스릴러였다. 더구나 이 작품은 시나리오를 강의할 때 플롯과 캐릭터 구조화의 예로 자주 드는 작품이기도 했다.

모두 세 쌍의 젊은 부부였는데, 두 부부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있었다. 공동체에서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옷의 디자인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옷 색깔은 화사했지만 천은 거칠어 보였고, 연결부위 여기저기에 옷핀을 꽂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안고 있는 아이가 울 때면 조용히 엄마가 안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아빠는 그의 수북한 턱수염만큼이나 완고해보였다. 그들은 로데오 경기를 보는 내내 그 흔한 탄성 한 번 지르지 않고 아주 조용히 관람만 할뿐이었다.

버펄로 빌 역사박물관 내에 전시된 총잡이들과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포스터 그리고 총기들

이튿날 찾아간 버펄로 빌 역사박물관(Buffalo Bill Historical Center)에는 서부의 옛 모습, 버펄로 빌에 대한 기록과 와일드 웨스트 쇼관련 유물, 인디언들의 생활상과 서부 개척기에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만행, 전설적인 총잡이들의 기록 등이 사실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일상과 분리된 박물관이 아니라 마을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유지시켜줌으로써 양자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박물관의 사례로서 주목할 만 곳이었다. 특히 인디언들에 대한 만행을 아주 상세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구성해 놓은 부분이 돋보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옆에서는 그들을 침략하고 박해하는 과정에서 활용되었음직한 총 전시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 두 모순된 구성이 인디언에 대한 오늘 미국의 인식이 아닐까? 과거 인디언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지만 그들에게 총을 앞세운 서부의 시대는 건강하고 남성적인 쟁취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유명한 빙험 캐니언 구리광산(Bingham Canyon Cooper Mine)을 어렵게 찾아갔다. 광산 인근에서 사만다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다. 그곳은 제임슨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Avatar, 2009)에 나오는 판도라 행성의 광산 기지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1회에 320톤을 실을 수 있다는 초대형 트럭과 포토 스팟에 제공된 그 바퀴를 보면서 <아바타>가 떠오른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산은 1863년부터 채굴이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세계 최대의 노천 구리광산이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 중에 만리장성과 함께 인공위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이 광산이라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이 광산이 지름 4,000m, 깊이 1,200m라고 하니 수긍하지 못할 주장도 아니다. 미국에 와서 느끼는 규모의 압도는 여기서도 여지없었다. 홍보영상을 상영하며 간단한 전시물을 갖추고 있는 홍보관과 소박하게 꾸려진 기념품점 그리고 그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리 광산이 전부였다. 미국의 자부심과 맹목에 가까운 애국심에 대한 강요 등이 홍보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빙험 캐니언 구리 광산의 모습320톤을 싣는다는 초대형 트럭. 1863년부터 채굴이 시작된 이 광산은 광석을 파내기 위해 계단식으로 길을 내놓은 모습이 그 규모만큼이나 이채롭다.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이 보아야 한다는 욕심이 과했는지 중간에 다시 먹통이 된 사만다 탓인지, 돌아오는 길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햇반과 맥도날드 햄버거 등으로 식사를 해결해온 터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돌아오는 길에 라스베이거스 최고급 호텔인 윈(Wynn) 호텔에서 뷔페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문제는 출발이 늦어지면서 뷔페 마감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뷔페시간에 맞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차는 슬슬 과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75마일(120km)이 제한 속도인 I-1590마일(144km) 이상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만다가 보여주는 도착시간이 점점 단축되는 것을 즐기면서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경광등을 울리면서 뒤에 붙었다. 우리는 아니겠지 하고 속도를 줄여서 계속 달리고 있는데, 순찰차가 계속 따라와서 길가에 차를 붙였다. 과속에 정지 명령까지 어겼단다. 관광객이라고 우기고 국제운전면허증을 보여주면 훈방이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고, 교통 범칙금 금액의 살인적인 액수를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사정을 설명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일은 다른 방향으로 급하게 결론이 났다. 이곳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경관의 말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첫째가 6개월쯤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임시 운전면허증을 내주어야만 했다. 과속도 과속이지만 정지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첫째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교통경찰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자신의 동료가 우리처럼 정지 명령에도 서지 않는 차에서 쏜 총탄에 일주일 전에 이곳에서 총상을 입었다며 우리가 만약 더 달렸다면 자신이 발포했을 거라고 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교통경찰은 우리가 미국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참작해 준 것인지, 아니면 예쁜 첫째의 상냥함에 반한 것인지 몰라도 벌금을 깎아주겠다며, 가장 싼 270달러짜리 스티커를 끊어주었다. 모처럼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과속한 덕분에 여행 내내 아끼며 지내왔던 것들이 일시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심조심 달려서 간신히 뷔페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했으나, 이미 맛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그나마 교통경관이 훈남에다 친절하기까지 했으니 그것만도 다행이고, 빨리 잊고 맛있게 먹자고 모두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쓰린 속은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가 머물게 된 뉴욕뉴욕 호텔로 돌아왔다. 솔트레이크시티부터 옐로우스톤과 코디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시간이 아쉬웠다. 가슴 뛰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특히 옐로우스톤에서 느꼈던 살아있는 것들의 그 강성함은 감동 그 이상의 것이었다. 삶과 죽음이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순환하고, 동식물은 물론 간헐천의 역동적인 용출까지 서로 맞물려 현재를 살아내는 치열한 삶의 순간순간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생명을 놓은 것들뿐, 모든 것이 꿈틀대며 변화해가는 그곳의 기운이 온몸에 가득 차올라왔다. 귀국 전에 그럴 기회는 없겠지만, 겨울에 꼭 다시 찾아가고 싶어지는 것도 그 지독한 계절을 건너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몇 안 되는 여행이었다.

 

  1. 얼바인에서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구글 지도와는 다르게 달려보니 절대로 하루에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본문으로]
  2. 모르몬교는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라고도 하는데 1823년 조지프 스미스가 뉴욕에서 창설했다. 교세를 확장하면서 스미스는 1834년 일부다처제를 주장했고 이에 분개한 사람들의 박해가 이어졌다. 1844년 폭도들에 의해 스미스가 살해당하자 브리검 영(Brigham young)의 영도 아래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그레이트 솔트레이크유역으로 이동해온다. 모르몬교도들의 이러한 이동으로 개척된 통로는 이후 서부로 통하는 주요 통로로 활용되었고, 모르몬교도들은 황금을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3. 갈 때는 햄프턴 인에 머물렀고 올 때는 크리스털 인에 숙박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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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813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을 준비하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바보처럼 뒤늦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집이 우리가 예약한 집과 내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벌써 두 달 전 일이니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해서 예약했던 사이트로 들어가서 주소와 사진을 확인해보았다. 예약한 집과 주소가 달랐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숙소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왔으니 당연히 예약한 집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예약을 하면서 숙박료의 반을 선금으로 보냈고, 도착해서 나머지 반의 잔금을 치렀고, 벌써 이틀 밤을 잤으니 항의해야 무슨 소용일까 마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아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예약했던 집과 다르다고 항의를 했더니, 주소는 다르지만 스펙은 같단다. 화가 났다. 하지만 곁에서 아내와 아이가 보고 있으니 화를 냈다가는 그들이 불안해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정이 있어서 예약과 다른 숙소를 배정했으면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미안하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의 항의란 얼마나 공허한가? 전화기 너머의 직원도 내가 뭐라고 화를 크게 내고 빨리 전화만 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내 잘못이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민박이라서 무조건 믿었고, 인터넷의 이용후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낯선 뉴욕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또 얼마나 실망하고, 불신과 자괴감을 갖게 될 것인가?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속은 것만큼 속상하는 일이 또 있을까? 화도 제대로 낼 수 없고, 화를 내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처럼 불쾌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 일정을 망칠 수는 없었다.

타임스퀘어로 걸어가서 그곳에서 업타운 루프(Uptown Loop)[각주:1]를 도는 버스를 탔다. 어제 돌았던 다운타운 루프의 반대쪽을 도는 코스였다. 다운타운 루프처럼 업타운 루프도 보아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가일 같은 헤어스타일의 흑인 가이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설명을 했는데, 마치 라임(rhyme)이 잘 맞는 랩을 듣는 느낌이었다.

센트럴 파크 주변으로 고급 아파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장식의 외벽과 규모만으로도 압도되는 것들이었다. 레너드 번스타인, 존 레논이 살았다는 다코타 아파트(Dacota Apt)도 겉보기에는 그것들에 비해 오히려 소박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존 레논이 저격당했던 다코타 아파트 정문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마루에 놓여 있던 라디오 뉴스에서 존 레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던 기억이 난다. 팝음악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가 누군지조차 몰랐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 그가 대단한 뮤지션이었다는 것을 알았었다. 지금은 불교방송 기자를 하는 대학후배는 대학시절 비틀즈 팬클럽 회장을 맡았었는데, 거의 일 년 내내 비틀즈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비틀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야만인 취급하고는 했었다.

다코타 아파트에는 아직도 오노 요코가 살고 있다고 하니,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 간 곳을 매일 지나쳐 다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대단한 결기를 지닌 여인인가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며 미국 음악 시장을 장악했던 비틀즈는 뮤지션을 넘어서 1960년대 새로운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 그가 발표했던 <John Lennon / Plastic Ono Band>는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회자된다. 그러고 보면 오노 요코로부터 존 레논이 영감을 얻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술가에게 배우자는 화수분 같은 영감이 되거나 잔혹한 현실의 규율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존 레논은 행운아였던 것이다. 존 레논의 명성이나 부에 비해 전위예술가였던 오노 요코가 보잘 것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음악적인 재능에 화수분 같은 영감의 원천과 사랑을 나누었으니 좋은 음악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뉴욕의 고급 아파트

존 레논이 저격당한 다코타 아파트 정문

그 음반의 곡들은 아니지만 ‘I Want To Hold Your Hand’, ‘Let it be me’, ‘Hey Jude’, ‘Norwegian wood’, ‘Imagine’과 같은 곡들은 지금 들어도 좋은 곡들이다. ‘Norwegian wood’는 노래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로 먼저 읽으면서 가사를 보고 노래를 나중에 들었던 곳이다. 그것이 노르웨이의 숲이냐 노르웨이산 가구냐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듣고, 그것을 토대로 소설을 구상한 것이고 보면,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이 옳을 듯싶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문학사상사판에서는 아예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꾸고 있다. 원곡을 만든 비틀즈나 그것을 소설로 바꾼 무라카미 하루키의 감성도 대단할뿐더러 그 사이의 간극을 본 번역자가 그것을 다시 다른 제목으로 번역해낸 것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코타 아파트를 지나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재미있었는데, 다음이 우리가 내릴 미국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었다. 세계 최대 과학박물관이라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은 우리를 반기지 않는지 입구가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자유롭게 기부(Donation)하고 입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어른 19달러, 아이 10.5달러를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3,500만점의 전시물이 있다는데 얼마를 기부해야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하느니 그냥 입장권을 사는 것이 속이 편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당혹스러웠던 것이 기부 문화였다. 아이들 학교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기부를 권장했는데, 이걸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목은 기부인데 반강제인 경우도 많았고, 기부가 안 되면 학생들 행사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재정이 어려워 교육예산을 삭감했고, 그 덕분에 기부 권유가 더 늘었다고 한다. 처음 와서 효진이네 학교에서 학용품을 기부하라고 목록을 보내왔기에 아내와 고민 끝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을 구입해서 가지고 갔더니 진짜 가져왔어!’하는 눈빛으로 행정 직원이 받았다. 유진이네 학교에서는 학생 행사 관련해서 기부를 받아서 버스를 운행할 계획이었는데, 기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혼선을 빚다가 결국 운행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부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반강제적인 모금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자발적인 기부인지, 어느 정도 규모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매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모를 때, 오늘처럼 다른 방식이 있으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속 편했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공룡 뼈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꼭 들러야 한다고 우긴 것은 유진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족끼리 함께 보았던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 2006)의 배경이 이곳인지 아닌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로비에 있는 공룡 뼈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박물관을 다 보고나서도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워싱턴에 있는 자연사박물관과 이곳에서 나누어 찍었단다.

1층에서 밀스타인 기념 해양 생물관과 보석 전시장이 이채로웠다. 이름으로만 듣던 것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크기 그대로 눈앞에 등장했을 때 느끼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해양 생물관에서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결국 대부분 언어적 인식이거나 영상화된 이미지 이상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비릿한 냄새는 아니더라도 그것들의 크기와 구체적인 생김새만으로도 낯설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사실 이런 전시물 앞에서 더 놀라면서 흥미를 갖는 것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산산이 깨지면서 더 놀라고 놀란 만큼 즐거워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와 나는 그랬다.

보석 전시실에는 예상대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저 보석의 이름과 모양을 일치시켜보는 수준이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관심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내는 보석 같은 것에는 욕심이 없는 줄 알았었는데, 무척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니 새로웠다. 결혼하고 공부하면서 보석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 관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란다. ‘인도의 별처럼 보석을 가공해서 새롭게 붙여놓은 이름들이 보석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그 이름의 유래나 내력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려고 찾으니 벌써 아내와 다른 보석 앞에 가 있었다.

2층과 3층에 있는 애캘리 기념 아프리카 포유류관에는 아주 정밀하게 제작된 동물 박제들이 있었다. 조명과 배경 덕도 있었겠지만 박제 자체가 아주 사실적이었다. 탐험가, 동물학자, 사냥꾼이었던 칼 애캘리(Carl Akeley)는 박제술을 발명한 사람으로 이것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들이다. 그는 단순히 박제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경 등을 설치하여 하나의 디오라마(diorama)를 구성하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 아프리카 포유류를 전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칼 애캘리였고, 그가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을 잡아 박제를 만들었다고 하니 이 홀에 그의 이름이 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고릴라의 표정을 보고 사냥을 그만두고 동물 보호론자가 되었다고 하니 아주 극적이다.

멕시코 중남미관에서 뽀로로를 닮은 조형물

멕시코와 중남미관에서 발견한 조형물들은 섬세한 표현과 다양한 표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조형물 하나가 뽀로로를 닮았다고 보여주니 아이들이 웃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도 이런 디자인과 표정을 좋아했었다니, 뽀로로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곳곳에 소박하지만 정교하고 진솔한 표정의 목각들이 많았는데, 민속예술의 성격 때문인가 보다.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것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보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 없이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재미있는 표정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어쨌든 그들만의 소통이니 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라스트 모히칸>을 연상시켰던 토마호크

3층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관이 있었는데 이미 여러 곳에서 인디언 관련 전시를 보아온 터라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무기 중에서 토마호크(tomahawk)였다. 토마호크는 단지 돌이나 금속 도끼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던지거나 때릴 수 있는 무기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란다. 돌이나 뼈뿐만 아니라 금속을 날카롭게 벼려 나무에 붙여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가장 멋진 토마호크 씬은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 1992)의 끝부분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가 적을 향해 무참하게 그러나 아주 정교하게 휘두르던 장면이다. 그것은 마치 장예모의 영화 <영웅>(Hero, 2002) 에서 의식적으로 구현했던 칼과 활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같이 민첩하고 단호했었다. 앞뒤로 모두 살상이 가능하고, 원심력을 이용하는 토마호크의 특성을 잘 살려서 분노를 표현했지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타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비에 공룡 뼈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은 4층 전시실이었는데 그곳에 공룡과 멸종된 포유류 뼈가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이었음이 분명한 사라져 버린 것들의 견고한 뼈가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직 그 뼈에는 살을 갖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거칠게 포효했을 때의 기력이 남아 있는 듯 역동적인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림들만 오히려 그 단호한 정지 앞에서 지극히 초라한 비교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손을 피하기 위해 유리관에 갇혀 있거나 작은 철선으로 골격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녀석들조차 살아서 가장 강했던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죽어서 살아있는 이것들의 현재는 슬픈 매혹이었다. 주어진 시간에서 조금도 비껴 설 수 없는 살아서 유한한 것들의 운명과 그 안에서 스스로의 격을 유지하려는 몸짓이 잔혹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이 들려 돌아보니 한국인 모자가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제 더 볼 공룡이 없다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들 때문인지 엄마도 그 낯설고 긴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엄마가 저 정도라면 아들은 학위 없는 박사일 게다. 아들도 대단하고 엄마도 대단했다. 도통 공룡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나나 우리 아이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 같았다. 아들이 좋아한다고 같이 관심을 갖고, 분명 외워지지 않았을 그 이름을 외웠을 엄마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박물관은 토요일이라서 매우 혼잡했다. 더구나 워낙 박물관이 넓다보니 관람 동선 안내가 필요했는데, 이게 친절하게 되어 있지를 않았고, 직원들도 다소 고압적이고 불친절해서 아쉬웠다. 관람객이 이러한 불편을 느끼게 된다면 아무리 훌륭한 전시물이 있어도 최고라는 말은 듣기 어려우리라.

길거리에서 구입한 Lamb of rice.

박물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 가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그 냄새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작은 트럭에서 캐밥(kebop)을 팔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8달러를 주고 양 고기밥(Lamb of rice)을 샀다. 어제 현대미술관 앞에서 이것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맛만 볼 요량으로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밥과 양고기 그리고 야채의 조화에 무척 절묘했다. 주문하는 과정에서 주인에게 한 소리 들었다. 내 순서인 줄 알고 주문을 했더니 네가 올라와서 10명의 사람을 한 번 상대해볼래?”라고 이야기한다. 내 순서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주인은 주문받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 앞에서 조금 창피했다. 그래도 그거 하나 먹어보겠다고 꿋꿋하게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주인도 미안했는지 음식은 제일 빨리 준다. 나는 속도 없이 그게 맛있었다. 유진이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며 재미있어 한다. 그래 너희가 재미있으면 됐다.

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은 압도적이었다. 1892년에 짓기 시작해서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 중인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거라는 이 성당은 2050년에 완공이 된단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풋볼 경기장 2개 크기에 17층 높이로 8,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볼 수 있는 규모라니 크긴 큰 모양이다. 특히 장미창(Rose Window)1만개 이상의 유리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공력이 대단하다. 100년 전부터 짓기 시작했으니 완공도 되기 전에 이미 건물에는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건축이 중단되기도 했고, 2001년에는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단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느껴졌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이 건물 곳곳에서 빛났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100년을 넘기는 대역사를 꿋꿋하게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자기 자신이 시작과 끝을 모두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위대한 예술 작품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겸허함과 뒤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의 다양한 모습. 100년 전에 지어진 것부터 현재 짓고 있는 것까지 시간이 공존한다.

100년이 넘게 짓고 있고, 화재까지 나다보니 대성당은 각 부분이 자기 몫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만 봐서는 하나의 건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차이가 드러났지만,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정도 시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앞으로 그 차이를 지울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견디고 지탱하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미국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330만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독특한 건물 디자인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서보고 싶어 한다는 카네기 홀 그리고 뉴욕의 상징적인 공간인 센트럴 파크도 그냥 버스로 돌아보아야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보자는 생각에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서 볼 것을 결정하다보니 나와 아내가 보고 싶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센트럴파크 산책 등이 빠지게 된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제대로 보려면 지금 일정의 두 배 이상이 시간이 필요하고, 더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이기에 이미 예정된 한계였다. 어느새 버스는 다시 타임스퀘어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의뢰를 받아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규명하는 보고서[각주:2]를 제출한 적이 있다. 소설과 영화를 분석해서 <해리포터 시리즈>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덕분에 나도 다시 꼼꼼하게 분석할 기회를 갖게 되었었다. 우리 아이들도 모두 <해리포터 시리즈>의 광팬이었다. 효진이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열광했고, 유진이는 책도 책이지만 영화를 더 탐닉했다. 그러다보니 해리포터 전시회가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는 길에 해리포터 전시회(Harry Poter Exhibition)’가 열리는 곳을 보아둔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꼭 보고 싶다고 했는지 아내는 나이트 루프 전에 그것을 보자고 한다. 전시 공간이나 성격으로 보아서 별 것 없을 것 같다고 나는 몇 번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4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서 들어간 전시회장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람료(어른 27달러, 아이 20.5달러)에 비해 전시 내용이나 전개가 턱없이 부실했고, 무엇보다 즐길 것이 없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의상과 소품을 전시해 둔 수준이었고, CG로 처리해서 실재하지 않는 소품들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좋았지만, 그 수준이 조악했다. 그나마 전시실도 몇 개 되지 않아서 기다린 시간보다 관람시간이 턱 없이 모자랐고, 그 시간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많아서 앞으로 움직이지를 못해서였다. 아이들도 적지 않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브랜드 가디언(brand guardian)으로서 엄격한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이나 워너브라더스가 어떻게 이렇게 부실한 전시회를 허가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전시회는 9월까지 뉴욕에서 전시를 한단다. 빈약한 콘텐츠로 인해서 아이들은 실망하겠지만 업자들은 아마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들었다. 전시회장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볼 것도 없는 것이 사진도 못 찍게 한다고 투덜댔지만, 경험재(experience good)인 이와 같은 전시회는 못 찍게 하는 것이 옳다. 직접 봄으로써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그 구분에 대가를 지불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의 끝은 예상대로 관련 상품 매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해리포터라는 브랜드만 활용하는 팬시상품에서부터,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기숙사별 넥타이, 망토, 목도리와 모자 같은 실용적인 물품은 물론, 다이애건 앨리에서 팔렸던 귀지 맛 캔디, 마법지팡이, 님부스2000같은 빗자루 등과 같은 물품들까지 해리포터로 팔 수 있는 것들은 다 모여 있었다. 전시회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볼 게 많았다. 스토리노믹스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열풍을 일으켰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끝났지만 그것의 브랜드는 살아서 당분간 더 충성도 높은 팬덤을 형성할 것이 분명하다. 매장을 나오면서 아이들은 엽서를, 나는 ‘Hogwarts Express 9¾’이라고 새겨진 자석을 구입했다. 내년 봄부터 내 연구실 앞에는 아마 이 자석이 붙어있게 될 것이다.

나이트 루프를 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캘리포니아에 인앤아웃(In-N-Out) 햄버거[각주:3]가 있다면 뉴욕에는 셰이크 섀크 버거(Shake Shack Burger)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침 근처였다. 이틀 동안 타임스퀘어를 오가면서 꼭 먹어보리라 벼르다가 드디어 먹었다. 20분쯤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았다. 20분밖에 기다리지 않았으니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우리도 이제 기다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지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 넓은 매장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매우 소란스러워서 정신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자리를 잡으라고 하고, 나는 주문한 버거가 나오길 기다렸다. 셰이크 섀크 버거는 4.5달러로 버거의 양과 질에 비해서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다시 20분쯤 기다려서 주문한 버거를 받았다. 햄버거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아삭거리면서도 씹으면 촉촉했던 패티, 그리고 촉촉한 빵과 아삭한 프렌치프라이와 치즈의 맛이 탁월했다. 조금만 덜 소란스럽고 혼잡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가격에 이렇게 맛이 있으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고 사람이 몰리는 만큼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고보면, 감수해야할 부분이었다.

셰이크 섀크 버거

음식점 등급 표시

뉴욕에서는 음식점 앞에 ABC등급이 매겨져서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음식점의 등급표시라는데, 물론 A가 가장 좋고, B, C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식당이 A를 걸고 있었다. 만약 C가 걸려 있으면 식당 문 앞에서 얼른 도망가야 할 수준이란다.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형태라는 게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이렇게 등급을 매겨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이전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나보다. 어쨌든 처음 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친절한 구분이지만, 평가받는 식당 입장에서는 참 모진 구분이 아닐 수 없다. 음식 맛, 청결도, 요리사 등급, 가격, 서비스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라는데, 한국의 유명 음식점들은 어떤 등급을 받게 될까 궁금했다. 허름한데 음식 맛은 최고인 집들은 이 평가 기준으로 하면 A를 받을 수 있을까?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같은 데는 욕도 서비스로 평가해야 할 텐데, 다른 곳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것 같고…….

이것은 미국식 객관화다. 객관화하기 어려운 것을 객관화하기 위해 엄정하고 납득 가능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에 따라 평가하고 공시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부조리한 것들이 이와 같은 예측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대학입시나 입사시험과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각 대학이나 기업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객관적이고 납득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순인 줄 알면서 한계가 분명한 수능으로 평가하거나 외부 평가 기관의 평가나 스펙에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대학별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인재상에 맞추어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해야만 차별화된 교육이 가능할 텐데, 이것을 국가가 틀어쥐고 있으니 기형적인 입시 속에서 너나없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기업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재를 뽑아서 쓰는데, 자신들만의 평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획일적인 영어성적과 스펙만을 강요하는 것도 사회적 묵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객관화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렇게 자율적인 평가 시스템에 맡기었을 때, 모두가 수긍 가능한 공정한 평가를 수행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러다보니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평가에 기대야 하고, 그로 인하여 교육과 평가가 어긋나고, 배움과 능력이 괴리되는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주문한 것을 기다리면서 보니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폐기처분되는 음식들을 볼 수 있었다. 주문한 버거가 나오고 손님을 호출했는데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음식이 식자 여지없이 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주스 전문점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주문이 잘못되어 딴 음료가 나오면 예외 없이 폐기 처분한다. 어디 그뿐이랴. 대형할인매장에서 식료품을 샀다가 반품을 하게 되면 개봉 여부와 상관없이 폐기한단다. 식품에 대한 엄정한 관리라는 점에서는 환영할만하지만 개봉하지 않은 것까지 폐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가 아닐까? 미국에 처음 와서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소시지가 너무 짜서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 반품을 했다. 담당자가 반품한 모든 음식들은 폐기하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몹시 불쾌했는데, 몇 개월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보니 그가 의식 있고 양심적인 직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미국의 모습을 보면, 풍요가 늘 축복은 아닌가보다.

우비를 입고 탄 나이트 루프

저녁을 먹고 나이트 루프(Night loop)를 타러 정류소까지 갔더니 이것은 한번 타면 도착할 때까지 정차하지 않는단다. 1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니 화장실을 들렀다가 타야 할 것 같아서 화장실을 찾는데, 없다. 대부분 업소의 안에 있어서 업소에 들어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처럼 화장실 인심이 고약한 곳이 또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뉴욕처럼 야박한 곳도 없었다. 결국 길 건너에 있는 맥도날드로 갔더니 벌써 십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내 앞에 앞에 차례가 되었는데 한 남자가 아이를 데려와 먼저 이용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앞에 사람은 나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아이는 들어가서 10초도 되지 않고 나온다. 화장실을 보고 부지런히 정류장으로 갔더니 아내와 아이들이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다. 이 지독한 도시에는 화장실도 없고, 있어도 잘 빌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화려하고 압도적인 건물을 세우면 뭐한단 말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를 편안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배려가 없는 도시라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도시가 아니겠는가?

나이트루프는 말 그대로 야경 투어였다. 맨해튼 다리를 건너서 브룩클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기회가 닿으면 브룩클린에 있는 그리말디 피자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줄이 너무 길었고, 투어 중에 내릴 수도 없었다. 버스에 오를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다. 2층 버스에 지붕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했는데 버스 회사에서 모두에게 하얀색 우비를 나누어 준다. 우비를 입고 2층 버스에 앉아서 맨해튼과 브룩클린의 야경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보는 브룩클린과 맨해튼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맨해튼은 불빛으로 도시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불빛 바깥쪽의 어둠은 낮보다 더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대학시절에 본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1989)가 생각나서 꼭 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너무 어두웠다. 창녀 트랄라가 한국전에 참전하는 군인과 며칠을 함께 보내고 떠나보내며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깨닫는 장면은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L'Amant, 1992) 의 마지막 장면처럼 회환과 자기부정의 정서가 표현된 빼어난 장면 중에 하나다. 브룩클린은 그동안 내게 트랄라의 절망과 그 앞에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지켜볼 뿐인 소년 스쿠프 그리고 자신이 성정체성을 깨닫고 방황하는 핸리의 모습이 마구 엉킨 이미지였었는데, 이제 조금 구체적인 도시의 윤곽을 갖게 되었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으로 돌아오며 유쾌해졌다. 내린 비로 밤공기는 맑고 시원해져 있었다. 이제 조금 익숙한 눈으로 복습하듯 거리와 건물들을 확인했고, 그 사이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타임스퀘어에서 밤늦게 만난 중국민주화 시위대

타임스퀘어의 청년

미국스러운 대형 리무진

버스는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그레이라인 버스 투어를 즐기다보니 시작과 끝이 매일 같은 곳이다. 타임스퀘어에는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광고판들은 밤이 깊을수록 더 화려하고 강렬해지는 느낌이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오십 여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중국 민주화와 민주투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외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국에서 할 수 없으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에서 외치는 것이리라.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음직한(아직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동양인들 몇몇이 쳐다볼 뿐, 사람들은 대부분 무관심했다. 근처에서는 한 청년이 “Jesus forgives sin”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길고 호화로운 리무진 두 개가 정차해서 묘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의 다양성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모두들 내일이 뉴욕에서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욕을 부지런히 돌았다. 처음에 올 때 그 정체모를 도시를 조금 아주 조금 보았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머무는 기간에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지 않는 도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아직 뉴욕이 싫다. 숙소는 별도의 문제였다. 그건 속인 사람과 속은 우리의 문제였으니까. 무엇보다 뉴욕이 보여주는 지독한 부조화가 거북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도시 공간에서 세계 제일의 강박에 사로잡힌 화려함은 천박하거나 안쓰러운 과시였다.

나는 왜 뉴욕을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지 아직 의문을 풀지 못했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최고의 도시라면, 뉴욕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문화라는 것에서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사람이 소거된 문화는 더 이상 문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뉴욕을 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두고두고 고민해볼 문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최고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다시 차를 렌트해서 필라델피아로 떠날 것이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창밖으로 빗줄기가 거세다. 아마 운전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동부로 넘어와서는 유난히 비가 많다. 어쨌든 그것도 여행의 일부일 테니 수납해야 하리라. 예측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만큼 긴장되고, 긴장된 만큼 짜릿한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면서.

  1. 업타운 루프는 AOL타임워너 센터→링컨센터→다코타 아파트→미국 자연사 박물관→어퍼 웨스트 사이드→유스호스텔→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리버사이드 교회→아폴로 극장→스미소니언 국립 디자인 박물관→구겐하임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미술관→휘트니 미술관→센트럴파크 등을 도는 코스였다. [본문으로]
  2. 박기수, KOCCA포커스 2010-3 <해리포터, 스토리텔링 성공 전략 분석>, 한국콘텐츠진흥원. [본문으로]
  3. 인앤아웃(In-N-Out)의 햄버거는 패스트푸드이기는 하지만 냉동재료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신선한 재료를 냉장트럭으로 배송해야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되다가 인접한 네바다 주, 애리조나 주, 텍사스 주까지만 지점을 냈단다. 재료의 신선함을 냉장으로 지킬 수 있는 거리까지만 지점을 낸다는 그들의 마인드 때문인지 미국 내 고객만족도 1위 햄버거란다. 매장 내에서 통감자를 기계에 넣고 한 번에 잘라내어서 프렌치프라이를 만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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