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고 대견한 탈퇴

 

박기수(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원더걸스의 선미가 탈퇴를 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공식발표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텔미노바디로 국내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고 미국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데뷔를 이끌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원더걸스에서 굳이 탈퇴를 선언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보아의 아이돌 한류 이후 전방위적인 아이돌 육성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가 최근의 가요계이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물론 브라운아이드걸스, 포미닛, 2NE1, 애프터스쿨, 카라, 티아라,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SS501, 샤이니, 2AM, 2PM, FT 아일랜드 등 새로운 콘셉트와 아이템으로 매혹하는 아이돌의 등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물론 조기에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하여 스타로 육성하겠다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향유 주체와 비슷한 연령의 아이돌을 통하여 스타와의 동일시를 강화하고 몰입과 소통을 극대화하겠다는 매우 유효한 전략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최근 아이돌은 단지 젊은 층의 지지뿐만 아니라 아저씨 부대와 아줌마 부대의 열광을 이끌고 있다. 로리타 신드롬과 상관하여 음란한 판타지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엔터테인먼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만큼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획의 성과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어리다는 데 있다. 사회적, 문화적 체험이 부족하고 정신적으로 미성숙 상태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며 무차별적인 대중의 열광과 비난을 감내해야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얼마 전 2AM의 조권은 자신처럼 긴 연습생 시절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단지 연습 기간이 길었다는 하소연이 아니라 연습기간 내내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 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청소년기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말이다. 또래들과 함께 즐기며 체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끝이 보이지 않는 연습 기간으로 보내야 하고, 데뷔 이후에는 그동안의 투자를 보상받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 내야하기 때문에 다시 또래들의 체험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악순환 속을 거듭해야만 한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이나 활동이 아니라 기획사의 콘셉트에 따라 만들어진 캐릭터와 아이템으로 활동해야하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와 환호가 높을수록 그들의 우울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돌은 이 시대의 극단화된 욕망이다. 향유자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을 아이돌에게 투사함으로써 일체감을 느끼고 소통하려 하기 때문이다. 조기교육, 노예계약, 또래로부터 유리된 생활, 몸짱 등 아이돌과 관련된 코드들은 모두 우리시대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미의 탈퇴는 반갑고 대견하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스스로 판단함으로써 주체적인 삶을 회복하려는 노력! 지금 이곳의 우리가 갖지 못한 고민과 결단의 모습을 선미에게서 보아서 일까? 난 선미의 탈퇴가 반갑고 대견하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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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이 부르는 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동계올림픽이 뜨겁다. 금메달도 금메달이지만 이번 동계올림픽을 보며 우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턱없이 부족한 동계스포츠 인프라나 열세인 체력 등으로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는 금메달을 딴 모태범과 이상화의 당당함과 즐거움을 보라. 쇼트트랙에서 탈락했던 이승훈이 올림픽 출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출전하여 따낸 은메달은 얼마나 극적인가? 동료의 실수로 날아간 아들의 메달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흔연히 달려가 실수한 선수를 위로해주던 성시백 어머니의 포옹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20여년의 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비록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는 못했으나 메달을 딴 모든 후배들에서 나오던 이규혁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계올림픽이 기대되는 것은 그곳에서 희망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2-3위로 달리다가 결승선을 앞두고 충돌하여 실격 처리된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신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고, 또 다른 실격을 기대했다는 안톤 오노의 몰염치와 경망스러움을 더 이상 비난하고 싶지 않다. 스포츠 정신을 모르고 결과로서의 승패만을 얻으려는 그런 선수에게서는 희망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는 재주보다 밀치는 손재주가 더 낫다는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에게 픽사 애니메이션 <>를 보여주고 싶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154Cm 45Kg의 작은 몸으로 덩치 큰 서구 선수들 앞을 달리던 이은별 선수의 당찬 열정이나 비록 선수복을 경기 전날 수선해 입을 정도로 열악한 지원 속에서도 결선까지 진출했던 스키 점프 선수들의 당당한 도전 그 자체가 희망이 아니던가? 메달도 메달이지만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자신들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줄 아는 그 젊음의 당찬 미소와 유쾌함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결선에 오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땀을 흘리고 최선을 다해 준비해온 이름도 낯선 종목의 선수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매스컴의 각광을 받거나 노력의 결과로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시상대에 오를 가능성을 그리 높지 않지만 하루하루 부끄럽지 않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희망일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발견하듯 그들도 우리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는 까닭이다. 서로가 서로의 위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동계올림픽의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최상이 아닌 최선을 보여주는 그들과 최선을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이 이 엄혹한 계절을 위로하며 우리의 봄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아니 우린 서로 그렇게 위로하고 응원하며 우리의 봄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봄이 오고 있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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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봄이 더디더니 가을도 굼뜨긴 매한가지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의 영문 제목처럼 <April Snow>가 내리던 봄이더니 추석이 코앞인데 아직 여름일뿐이다. .

지난주부터 학생들의 연구실 방문이 잦다. 스스럼없이 연구실을 찾아오는 제자들이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요즘 방문은 조금 무겁고 진지하다. 찾아오는 4학년들 의 손에 자기소개서가 창백하게 들려 있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질문의 성격과 요구가 다르다보니 자기들이 써놓은 내용은 선생들에게 점검 받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어 공인점수는 이제 별다른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하는지 어학연수는 필수이고, 국내는 물론 해외봉사 실적까지 은연중에 요구하는 실정이다 보니 학생들은 늘 갖춘 조건보다 갖추어야 할 조건에 늘 쫓기게 된다. 학생이 들고 온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뒤에 잔뜩 붙어 있는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보다가 그의 쫓기듯 달려왔을 대학시절이 문득 안타까워졌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학교에서 과제와 팀 프로젝트로 밤샘을 하면서 집안 사정으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했던 그 학생들의 일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안다고 했는데, 외국어 점수와 각종 자격증은 물론 국내외 봉사활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그의 자기소개서에는 정작 보여야할 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고생들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학원에서 쏟아지고 부보들은 그들을 허겁지겁 차에 태우기 바쁘다. 학원 끝날 시간이면 부모들은 길가에 차를 대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자정이 다되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내려오는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좀처럼 내일을 보기 어렵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에게 부모의 생각대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그 경쟁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무모한 일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내일을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끝없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는 대학생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쟁 안에서 갈수록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없는 자기 소개서와 내적 성장 없는 학습으로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들에게 그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이야기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과 부모의 조언보다는 아이폰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어플리케이션이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 지금 이곳에서 우린 과연 진정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교육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행복에 다가설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편일률적인 언론사의 대학 평가 기준에 우리가 얼마나 부합하며 몇 위가 되는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우리만 지향과 좌표를 설정해야만 한다. 입학생 대비 재학생 비율이 평가 기준이 될 것이 아니라 그 학교 졸업생의 윤리의식이나 봉사정신 등이 평가의 기준이 되면 안되는 것일까? 우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언론사의 비교육적이며 폭력적인 평가기준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인재상에 부합하는 평가기준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더 나아가 세계 대학을 평가하면 안 되는 것일까? 자기소개서 한 장에서 그 학생만의 차별성이 보이고 밤늦은 시간 학원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 만들기에 좀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교육에서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은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의미고,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변화가 생명의 중심인 것은 지금 이곳의 무엇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다. 그저 지금보다는 내일이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좀더 알 찬 삶을 살아내려는 옹골찬 의지가 변화다. 진정한 교육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한대신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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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을 넘어선 스토리텔링의 매혹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시대다.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story)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고(tell) 즐기게 할 것이냐(ing)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를 훼손시켜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내용만큼이나 어떻게 이야기 하고 어떻게 즐기게 할 것이냐도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북극의 눈물>, <한반도의 공룡>, <누들로드>, <차마고도>, <아마존의 눈물> 등등 특별 기획 다큐멘터리는 물론 <다큐멘터리 3>, <인간극장>과 같은 정기적인 다큐멘터리까지 가히 다큐멘터리의 폭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지상파뿐만 아니라 케이블에 위성까지 다수 채널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채널별로 차별화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저렴한 비용을 투자해서 보다 광범위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로 경사되고 있는 실정에서 솔직담백한 다큐멘터리의 진지한 행보에 매혹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세계적인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체험함으로써 리터러시 능력은 물론 기대수준까지 한껏 높아져 있고,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무엇보다 지배적인 채널에서 고만고만한 컨셉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출연자 그리고 공허하기만한 말장난과 불쾌할 정도의 막말이 난무하는 오락 프로그램과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막장 드라마 그리고 10대들의 전유물이 된 가요 프로그램 등으로의 편향이 최근 다큐멘터리 붐으로 이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다큐멘터리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알고 싶으나 알려주지 않던 진실이나 차가운 이성 중심의 지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금 이곳의 진실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다루고 있는 <지식e><다큐프라임>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들은 책으로 다시 출간되어 방송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콘텐츠 업계에서 소위 말하는 One Source Multi Use의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구현 가능한 만화나 소설 등의 도서류가 원천콘텐츠로 먼저 출시되어 시장성 검증을 받으면, 그 결과를 보고 매스 미디어와 결합한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같은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 One Source Multi Use 중 장르전환의 예인데, 이들의 경우는 프로그램이 계속 방송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노출이 가능하고, 이미 방송을 통해 관심을 끈 아이템에 대하여 문자를 통한 말하기로 보완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개가 가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전문가들은 스토리가 내러티브를 낳고, 내러티브가 스토리텔링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스토리는 구술 언어를 중심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컨텍스트를 확보한 상황에서 전달되는 내용중심의 이야기를 말한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밑도 끝도 없이 옛날 옛날에라는 관용구로 시작할 수 있고, 이야기를 듣던 여러분이 잠들면 언제든 끝낼 수 있었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인 스토리의 유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스토리가 문자언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익명의 다수 대중들을 향하는 도서의 형태로 바뀌면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컨텍스트를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고 효율적인 이야기 방식이 필요했고,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내러티브다. 정해진 분량 안에서 익명의 다수 대중을 향해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의 고안과 활용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문자라는 매우 제한된 표현방식으로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는 더욱 정교하고 전략화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디지털 문화환경과 결합함으로써 보다 창조적인 형태의 이야기로 전개된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쌍방향성, 네트워크성, 통합성이라는 디지털의 특성을 창조적으로 수납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이야기를 구현할 수 있게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단선적인 발전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기대하는 효과에 따라서 이 세 형태는 전략적으로 선택되어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식e>가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도서로서도 전폭적인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현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은 정해진 시간에 다양한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멀티미디어적 구현이 가장 효과적인 말하기 방식이라고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말하려는 내용과 목적 그리고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송 시간의 제한은 정보 제공 시간의 제한을 가져온다는 치명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한다면 그 한계는 더욱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e>의 경우에는 멀티미디어적 요소를 지극히 제한적으로 활용하면서 지배소의 선택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짧은 시간에 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정보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이를 완과 급을 조절함으로써 향유자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이 과정에서 상술되어야했거나 더 생각해볼 거리를 보완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생각해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어 취사선택하고, 방송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와 책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방송만 보았거나 책만 보았다는 것이 온전한 체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독립적인 스토리텔링을 즐긴 것이 된다. 물론 둘 다 보았다면 그 가슴울림은 두 배가 되었겠지만.

<지식e>의 스토리텔링은 매혹적이다. 그 압도적 매혹의 가장 중심에는 그것이<지식e>의 컨셉처럼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지식에 대한 목마름, 박제가 되어버린 다른 세계의 지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아픔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 <지식e>에는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지혜라고 해도 좋을 내용을 <지식e>가 굳이 지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죽어버린 지식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며 무거운 진혼에 다름 아니다. 지금 이곳의 우리가 그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고 있지만 나서서 드러내기 어려운 우리의 부끄러움을 그것이 가슴으로 되묻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들의 천국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던 이청준 선생의 선지적 서문이 기억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일게다.

2009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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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집필기준과 소문의 벽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거짓말은 세 사람을 죽인다. 거짓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그 거짓말을 듣는 사람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거짓말은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 대부분의 오해를 풀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거짓말이 죽인 세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거짓말보다 무서운 것인 소문이다. 소문은 진실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 위에 서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정보로 말하고 듣는 사람 모두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문의 대상이 되는 정보나 사람은 해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며, 설사 주어진다고 해도 일단 소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진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는데, 소문은 대부분 사람들이 믿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까닭이다.

2011년 한국 사회는 유난히 소문이 많다. 182억을 들여서 투표함도 개봉하지 못했던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의 부조리와 부끄러움으로 기억될 흑색선전의 서울시장 선거, 실체를 알 수 없는 한미 FTA 문제 등과 같은 최근 문제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소문의 벽을 생각한다. 그동안 소문이 이토록 힘 센 적은 없었다. 이것은 그만큼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거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진실을 전달해야할 언론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진실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요구하는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 그리고 진실을 향한 사회 전체의 깨어있는 의식만이 진실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지난 8일 발표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의 논란이 뜨겁다. 친일파 청산, 5·16 군사쿠데타,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제주 4·3 사건 등의 역사가 대강화(大綱化) 원칙으로 집필기준에는 빠졌지만 교과서 기술에는 들어갈 것이란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여야 하며, ‘독재정권이 아니라 독재화여야 한단다. 아픈 역사일수록 그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가려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논란은 단지 용어 몇 개를 수정하고, 몇몇 사건을 누락시킨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용어의 수정이나 사건의 누락을 가능하게 했던 역사의식의 문제이며, 역사에 대한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소문으로부터 소환해야할 시점에 역사를 또 다른 소문의 미망 속으로 퇴보시켜버리는 이번 집필기준은 어떤 사건을 빼고 넣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나는 꼼수다>가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지만,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기존의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문의 전달이 아니라 소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찾아낸 진실을 알리려는 두려움 없는 자세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는 우리들의 냉철한 지지가 간절한 시점이다. 역사교과서는 그 출발이기에 더 엄정하고 객관적이며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역사로부터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면, 현실은 결코 소문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한대신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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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과 등록금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디션의 본질은 정당한 경쟁을 통한 선발에 있다. 지난해부터 불어 닥친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은 정당한 경쟁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망을 반영한 결과이다. 정당한 경쟁이란 다양성과 공정성을 바탕에 두고 있어야 하며, 경쟁을 통한 긍정적인 결과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성별, 연령, 교육 및 경제적 수준, 문화적 역량 등이 종합된 개인의 취향과 무관하게 무차별적인 공습을 퍼붓고 있는 아이돌 음악의 압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강요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미국과 서유럽을 강타한 K-POP을 예로 들며 산업적 가치의 규모나 한류의 영향력 등을 이야기 하지만, 문제는 자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한류가 무슨 소용이며, 문화가 전제되지 않는 문화콘텐츠의 가치가 과연 지속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K-POP의 문제는 그 수준이나 완성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상실에 있으며, 한국 음악 시장을 획일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댄스음악이나 아이돌을 비롯하여 K-POP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강요한 획일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더구나 외모 등의 음악 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도 아예 경쟁의 장에 나서보지도 못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하여 침묵하는 대중이 반응한 것이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수퍼스타K >가 보여준 신선한 충격을 상기해보자. 새로운 미션을 수행할 때마다 참가자들이 보여준 다양성과 공정성에 기반한 뜨거운 열정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김지수, 장재인, 존박, 허각 등이 보여준 자기만의 세계와 음악을 향한 뜨거운 열정은 누가 우승을 했느냐와 무관하게 모두들 즐거운 경쟁의 장으로 끌어당기며, 그것을 즐기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정당한 경쟁의 긍정 바이러스를 만나지 않았던가? 오디션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나는 가수다>가 보여주었던 재도전 논란은 다양성의 확보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룰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경쟁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할 것이다. , 그것이 다양성을 인정해줄 수 있는 열린 시각과 경쟁의 결과를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룰, 그리고 그 결과가 참가자는 물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을 때에만 경쟁은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반값 등록금을 둘러싼 여당 내의 논란이 화제다. 그것이 그저 국면전환을 위한 구호가 아니길 바란다. 대통령의 공약이었다면 지켜야 할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등록금의 문제는 그저 돈을 더 내고 덜 내고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기회에 대한 문제이며, 동시에 교육을 바탕으로 한 공정한 경쟁의 문제이다. 현재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의해서 경쟁의 참여나 순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 대상의 능력과 잠재력에 주목하는 경쟁일 때, 다양성의 확보는 물론 공정성 그리고 그 결과의 긍정성에 우리 모두 수긍하지 않을까? 등록금의 문제는 학생이나 학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논의해야할 문제이며, 그것은 지켜지지 않는 공약이나 국면전환용 구호로서가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준엄한 요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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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의지인 까닭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봄은 개강과 함께 오지 않는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개강과 함께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겨울이 끝난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캠퍼스 곳곳에 따듯한 햇살이 투명하게 부서지고 벚꽃이 쌀 튀밥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도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계획하고 실천한다는 의미다. 당신 스스로 변화의 기운을 가슴에 담을 때, 기운이 의지가 될 때, 의지가 실천에 이를 때, 그 실천이 당신을 좀 더 따듯하게 할 수 있을 때, 문득 봄이 오는 것이다.

엄동의 혹한을 뚫고 찾아온 이 계절에 당신은 어떤 변화를 계획하고 있는가?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공모전을 준비하고 어학점수를 올리는 것도 좋은 계획임에 틀림이 없지만, 남들이 모두 채워가는 이력서의 스펙 한 줄 한 줄이 정말 최선의 변화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준비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전혀 남다를 것도 없고 후킹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스펙은 당신의 취업은 물론 당신의 삶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갖추고 있고 모두가 생각한 것이라면, 굳이 당신까지 그것을 갖추고 그렇게 생각해야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 계절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은 무엇이냐고, 당신은 그것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영어회화에 능통하고 토익 고득점을 얻은 사람은 많다. 하지만 어학연수 간 낯선 땅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외국인은 안 된다는 현지인 스텝과 부족한 영어로 토론을 벌여 마침내 참여한 도전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에리카캠퍼스 사회체험 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문화콘텐츠학과 박예은 학생의 사례) 이 도전이 매력적인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점,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그 어떤 난관도 뚫어내겠다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는 점, 부족한 것은 의지와 열정으로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도전이 매력적이고,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먼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끄고, 조용히 눈을 감고 기억의 맨 끝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 때 당신은 어떤 삶을 어떻게 꾸려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는가? 기억의 맨 끝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새내기로 입학하던 첫날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당신이 정말 하고 싶고’,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일은 무엇이었나? ‘하고 싶고’, ‘해야만 할 일을 위해서 당신은 할 수 있는능력을 키우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해왔고,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조금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물음의 답을 혼자서만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다음에 주변에서 답을 구하자. 당신 주위에는 부모님, 선배, 친구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과 같은 학생들을 매년 만나는 교수님들이 계시지 않는가? 연구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제 곧 교정 가득 백합과 벚꽃이 흐드러질 것이다. 그 사이사이 새내기들은 풋풋한 패기로 뛰어다니고, 복학생들은 다소 어색한 미소로 강의실에 들어설 것이다. 그래서 봄이다. 봄은 생명이고, 생명은 변화다. 변화는 의지와 실천을 수반해야만 한다. 다만, 지금은 의지와 실천에 앞서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시간이다. 이 봄 당신이 꿈꾸고 있는 봄은 무엇인가?

<한대신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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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먹은 말의 멍에 혹은 꽃과 열매의 시적 의지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운화(雲華), 꽃과 열매의 시적 의지

 

운화(雲華)의 메타포(metaphor)는 절묘한 떨림이다. 옛사람들이 차나무꽃을 운화라고 불렀다는데, 차나무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데에는 1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열매는 다음해에 피는 꽃과 같이 매달리는 시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고 한다. 꽃과 열매 사이의 1년이라는 오롯한 시간 차이가 동시에 매달려 시작과 다됨을 무한 반복하게 되는 둘 사이의 부단한 긴장, 그것을 생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일이다.

김용범의 시에서 차나무꽃의 부단한 긴장, 꽃과 열매가 함께 이루어내는 시간의 섞임과 부단한 변화의 의지를 보는 일은 경이로운 기쁨이다. 변화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원초적 특성이며 살아있음의 다른 이름임을 1974년 등단 이후 지속적인 실험과 성찰을 통해 구현해온 김용범의 시에서 운화는 변화이며 동시에 변화의 과정이고 무엇보다 정체(停滯)를 거부하는 강한 의지의 세련된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미 열 세권의 시집을 내고 780여 편의 시를 발표한 시력(詩歷) 40년의 시인에게서 또 다른 실험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나 자아와 타자에 대한 심층의 성찰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층위의 구현된 언어적 충돌과 긴장을 만나는 일은 차라리 경이로움이다.

등단 이후 40년 동안 김용범의 언어는 언제나 젊고 싱싱했다. 특유의 명징한 언어와 빈틈없는 레토릭(rhetoric)으로 세계를 향한 물러서지 않는 의지를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가까이는 일상과 예술을, 멀리는 고구려의 거침없고 건강한 남성적 기상까지 그의 관심은 거침이 없었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자유와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들이었다. 더구나 시에서 출발한 김용범의 글쓰기는 극시, 창극, 오페라 리브레토,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거침없이 이루어져왔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인 전문 장르가 아닌 것이 없건만 거침없이 그 모든 장르에서 자유롭게 그만의 예술세계를 확장해왔다. 이와 같은 김용범의 시력을 섬세하게 읽어온 사람으로서 그가 열네 번째 시집 열개의 멍에를 짊어진 비루먹은 말에 대한 시-노마십가(駑馬十駕)(이하 노마십가)에서 보여준 실험과 성찰 역시 자못 기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용범의 이번 시집은 시인이 평소 탐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즐기고 있는 3()3(), 즉 차()와 책()과 예()를 세 줄기로 해서 1부 다향(茶香), 2부 서권향(書卷香), 3부 예향(藝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시집은 차로 우려내는 내적 성찰을 따라낸 1부 다향, 책을 매개로 접속한 세계와의 대화를 들려준 2부 서권향, 예술의 전 장르와 나눈 인연과 사연을 통화 세계와의 소통과 성찰을 모둠은 3부 예향에 이르기까지 김용범의 세계를 오롯하게 모두고 있다. 이번 시집에 담겨 있는 3취와 3향를 천박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은 호사가의 취미나 자랑 정도로 여길 수 있겠지만, 이번 시집을 읽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시집을 읽은 사람들은 3취와 3향이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것을 우리고, 읽고, 향유하는 과정의 풍요로운 기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김용범의 시가 넓혀온 경계를 읽어온 독자라면 노마십가에서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3취와 3향과 관련된 그의 고급한 취향이나 너른 지식의 깊이가 아니라 레토릭과 융합이 빚어내는 다층성(多層性)과 다성성(多聲性)이다. 초기 시를 압도했던 레토릭의 팽팽한 긴장을 표면적으로는 이완시키면서 심층적으로는 낯선 것들 사이에 이물감(異物感)을 형성시킴으로써 빚어내는 레토릭의 이완과 긴장의 이율배반은 이번 시집 전체를 주도하는 중심 전략 중 하나다.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장르 간 융합이 빚어내는 다성성(polyphony)이다. 그 다성성은 시 안에 사진과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발생하는데, 텍스트는 그림, 조각, 도예, 사진, , 오페라, 창극, 연극, 노래 등의 다양한 장르를 소재로 하여 신문기사, , 도록 등의 다양한 전거(典據)를 본문, 각주, 미주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각자의 소리로 소란스럽게 드러난다. 노마십가의 이와 같은 전략은 표면적으로는 평이하지만 심층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 새로운 실험의 양상은 낯선 만큼 절박하고 절박한 만큼 전투적인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운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꽃과 열매를 함께 달고 있기 때문이다. 열매를 기약하는 꽃과 꽃을 증거하는 열매가 보여주는 함축은 부단한 변화와 일신(日新)의 노력이다. 고착되거나 굳어져버리는 일체의 것들은 이전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교조적인 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시인이 위대한 것은 순간순간 삶의 정수를 포착하는 혜안과 포착된 그것을 구현하는 언어적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언제나 새로운 영역과 시각을 확보하려는 정신적 유목을 멈추지 않는 까닭이다. 노마십가에서 우린 유목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레토릭의 이완과 긴장, 이율배반의 근력

 

노마십가의 레토릭은 이완과 긴장의 이율배반성을 지향한다. 김용범의 시를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레토릭에 대한 초식(招式)과 내공(內功)의 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번 시집에서 다소 특이한 레토릭의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힘을 빼고 늦추어 한껏 이완시키면서도, 심층적으로는 텍스트 구성요소들의 충돌과 구현 어법의 어긋내기 등을 통하여 낯선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표면구조와 심층구조의 서열화된 체계인 익숙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우등/열등이나 중심/주변의 서열체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독립적이고 다층적인 양상으로 병존한다는 점이다. , 이러한 특성은 향유자의 리터러시(literacy) 수준이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다름()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시인의 강한 의지로 읽힌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노곤해져, 아득하게 졸려. 망연히 석양을 바라보거나 석양을 받고 있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와 눈이 마주 칠 때 나는 케냐 더블 에이(AA)원두를 갈아 커피 한 잔을 내리지. 찬찬히커피를 마시며 나는 조금씩 명료해져. 점점 더 명명백백(明明白白) 해져. 하루에 마시는 다섯 잔의 커피. 뒤 끝이 깨끗하게 살기위해 나는 커피를 마셔. 그 뿐이야.

-. 서권향 중 <18 커피견문록> 중에서

 

이 시는 찻집에서 커피를 나누며 소소한 일상을 진술하듯 시적 화자는 작고 차분한 어조의 평이한 진술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제시된 정보만을 연결해도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건조한 사바나를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는 시적인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좀더 섬세하게 읽다보면 이 시에는 절묘한 감각의 전이와 개개의 오브제가 지닌 아우라가 개별적으로 빛나면서 동시에 결합되어 커피로 수렴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분명 2악장이었을)을 들으면서 시드니 폴락 감독의 영화 <Out Of Africa>를 메마른 사바나의 석양을 떠올리고, 그 석양을 받고 있는 외로운 나무의 심상에 침잠하면서, 킬리만자로의 동쪽에서 재배되는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최상급 커피 케냐AA를 떠올린다. AA라는 알파벳 대문자의 시각적 압도는 얼마나 또 단호한가? 흥미로운 것은 케냐AA 원두를 간다는 진술에서 거친 원두 가는 소리와 그 진한 커피향이 동시에 느껴지고, 내린다는 표현에서 시청각적 이미지가 증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굳이 천천히가 아닌 찬찬히라는 시어를 선택하고, 찬찬히의 정조(情調)는 명료해진다는 표현을 통해 사유로 이어진다. 시의 진행은 사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내 명명백백(明明白白) 해진다는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바나의 석양에서 출발해서 커피의 짙은 색이 압도하고 있던 시의 색감은 명명백백(明明白白)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주 장난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흰색으로 대비된다. 그것을 다섯 잔의 커피로 환원시키면서 다시 뒤 끝이 깨끗하게 살기위해라는 설명적 진술을 덧붙이지만 감각적으로는 커피의 뒷맛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의 시들에 비해서 훨씬 레토릭의 긴장을 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층위별로 읽어가다 보면 레토릭이 심층구조 안으로 절묘하게 스며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섬득할 정도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 신선들이 살았음이 분명한 仙府4년간 칩거하며 대령숙수 안순환의 이야기를 뼈대로 다섯 권 분량의 소설을 불철주야 긁었습니다. 筆耕. 식솔들의를 끼니를 위한 나의 농사방법 이었습니다.

-. 서권향 중 <20 美食素食> 중에서

 

이 시에서는 학습-인지-일탈의 언어유희(fun)적 전개 과정이 구현되어 있다. 안산에 있는 선부동(仙府洞)에 거주했다는 정보에다 신선이 살았음이 분명하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인지시키기 위해 한자 그대로 제시한 후에 다시 소설을 불철주야 긁었습니다라며 필경(筆耕)의 의미를 축자적(literal meaning) 으로 풀어 식솔들의 끼니를 위한 나의 농사법이라고 연결한다. 짧은 두 문장 안에서 언어유희를 통해 신선계/인간계, 예술(소설)/현실(필경), 대령숙수의 고급 음식/끼니 등의 대비적인 세계가 넘나들면서 삶의 절박한 진실과 직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시의 제목처럼, 노마십가에서 과식이나 폭식의 레토릭이 아니라 소식의 레토릭을 통해 미식의 경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준식의 초록은 늘 모호해. 가늘게 눈을 뜨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져

오다가다 길에서 만난 그의 풍경한 점을 거실에 걸고

흐려진 시력에 맞춰 살기로 했어.

안경알을 닦으며 바흐를 듣던 성춘이형의 나무들처럼

겨울 쪽으로 기우러지기로 했어.

이순(耳順).

앞날은 늘 안개속이야.

-. 예향 중 <4 이준식의 사진작품을 거실에 걸고> 중에서(밑줄, 원문자 인용자)

 

이 시에서는 의도된/의도되지 않은혼란이 시의 전개와 맞물려 또 다른 레토릭으로 구현된다. 사진가 이준식의 핀을 놓친듯한 사진을 텍스트 안에 삽입하고 시적 화자는 이준식의 초록은 모호해라고 진술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진다는 패러독스를 보여주며, ‘흐려진 시력에 맞주처 살기로했다는 다짐과 이순(耳順)에도 앞날은 늘 안개속이야라는 진술로 맺고 있다. ‘초록이순의 전후 대비가 모호해안개속이라는 유사한 의미망 안으로 수렴하면서, ‘흐려진 시력에 맞춰 살기로 한 것이 단지 나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위에 진술된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지기 때문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주목되는 가장 큰 이유는 김용범의 시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오타(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의 레토릭이다. 는 상식적으로는 풍경 한 점이 옳지만, 이 시에서처럼 풍경한 점으로 보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풍경 한 작품으로 읽히는 것이 상식이지만 풍경한 점모호해’, ‘흐려져등의 시와 어울려 풍경스러운 점으로 읽혀도 무방할뿐더러 오히려 맛깔스럽다. 안경알을 닦으며 바흐를 듣던 성춘이형의 나무들처럼이라는 구절도 안경알을 닦는 것이 성춘이형인지 성춘이형의 나무들인지 모호한 것이 더욱 맛이 난다. 상식적으로야 전자가 옳지만 시적으로는 후자가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 이러한 재미는 겨울 쪽으로 기우러지기로 했어.’라는 단아한 레토릭을 통해서 정돈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이상에서 읽어본 것처럼, 은빛으로 늘 빛나던 김용범의 레토릭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레토릭의 긴장을 풀어놓음으로써 처음 만나는 독작들에게는 좀 더 쉽게 그의 시에 다가오게 하고, 섬세하고 눈 밝은 애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층위에 도사린 레토릭을 발견하는 재미까지 배려한 그의 이번 실험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가 노마십가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장르간 융합과 그것들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다양한 소리에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실험과 맥이 닿아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융합의 다성성, 다성성의 푸른 활기

 

노마십가의 핵심 열쇠말은 융합이다. 융합은 다름()을 전제로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하며, 다른 것들을 만나게 하여 새롭거나 나아질 수 있다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융합의 양상은 매우 다양해서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하고, 분류하고 정돈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이러한 융합은 시 텍스트 안에서 사진과 문자 텍스트를 결합시키고 있고, 텍스트와 각주와 미주를 상이한 양상으로 엮고 있으며, 텍스트 안에서는 신문기사, , 인터넷 정보 등을 전거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장르를 시 안으로 수렴하고 있으며, 일상과 예술의 영역을 교직(交織)시키고 있고,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활성화시켜 텍스트의 의미지평을 열어놓고 있으며, 감각에 있어서도 활발한 전이를 보여주고 있다.

시집 전체에 고르게 등장하는 것은 사진과 문자 텍스트의 결합이다. 사진과 문자 텍스트 역시 단순하지 않은데, 사진은 시인이 현장에서 직접 찍은 것과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된 보도사진, 인터넷에 있는 사진 등등 다양한 층위의 것들이 등장하고, 사진의 개수 역시 한 장에서부터 여러 장까지 자유롭다. 문자 텍스트 역시 신문기사, , 인터넷 정보 등 다양한 요소들이 문자 텍스트 안에 도사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사진과 문자 텍스트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버전으로 낯설게 결합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익숙하고 평이한 듯한 요소를 낯설게 조합함으로써 매우 다양한 층위를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전략인 것이다. 한 눈에 정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사진이지만 낯선 컨텍스트(context) 위에서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전혀 다른 울림과 체험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정지시켜버림으로써 정보를 객관화하여 확정했다고도 볼 수 있는 사진을 애매성(ambiguity)의 시 텍스트 안으로 위치시켜서 정지된 순간의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가능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문자 텍스트로 구현된 내용을 강화하거나 일정 정도 거리두기를 요구하는 양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3 허파 말리기>처럼 시인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은 그 현장성을 소환함으로써 문자의 이면에 컨텍스트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들과의 결합은 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양상으로 드러난다. <1 마른 빵 한 조각 보다 차 한 잔이 더욱 더 절실한 사람>에서는 로이터통신의 사진을 게재한 아시아뉴스통신이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사진을 시 모두에 배치한다. 저작권과 복제불허를 분명하게 밝힌 사진을 불법복제하여 사용했다고 당당하게 밝히면서 자신은 엄청난 법적 처벌을 받게 될 것이지만 자신이 받아야할 처벌은 불복복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페트병을 잘라서 만든 용기로 차를 마시는 파키스탄의 노인의 모습에 주목하고, 그동안 허영의 그릇에 차를 마셨다고 성찰한다. 이 작품을 텍스트만 읽게 되면 아주 소박하고 구조적인 결함 운운할 수 있겠지만, 사진과 결합시켜 제공함으로서 전혀 다른 울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구나 사진은 아시아뉴스통신이라는 문구가 사진에 노골적으로 박혀 있는, 즉 보도 기사의 일부로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제한을 둔 사진을 굳이 가져오고, 굳이 캡션에서 그 원출처까지 밝히고, 다시 본문에서 자신의 처벌 운운한 것은 시의 후반에 언급한 페트병 찻잔과 허영의 그릇이 대비시킨 것과 결합하어 그 심층의 맥락에 닿는다. 진위의 시비나 분별의 노력 그리고 작은 이해를 따르는 부자유의 맥락을 사진과 텍스트의 이종결합을 통하여 행간의 의미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8 게의 눈, 새우의 눈, 물고기의 눈과 길거리 화가의 물방울 세알>에서는 두 개의 사진이 대비되고, 물방울은 찻물로 전환되고, 찻물과 상관된 각주가 활용되고 있다. 거리 화가가 팔고 있는 물방울과 김창렬의 물방울이 일화의 형식으로 대비되고, 찻물의 세 단계 형상과 그것에 대한 각주와 작은 충돌을 보이는데, 이것은 비로소 표낭(豹囊)의 행복이라는 구절로 단아하게 수렴된다. 물론 <12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 ‘기차는 8시에 떠나네’>에 각주를 통해 그리스어 원문으로 제시된 가사가 주는 이물감(異物感)은 얼마나 불편한 경각인가?

김용범은 노마십가에서 각주와 미주를 전략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각주와 미주의 혼용을 통해 각 기능을 분별하고 있는데, 특히 미주에 기술된 인연의 기술은 단지 사연의 첨언이 아니라 시와 하나가 되거나 이격되는 이중의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19 흰 뫼여 한가람이여>에서는 두 개의 미주와 한 개의 각주를 매우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제목 위에 붙은 미주는 이 작품과 연관된 오래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뒤에 각주와 미주는 잡보장경의 인용구절의 원문(각주)과 그것의 해석(미주)으로 서로 다른 거리에서 같은 내용을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각주와 미주가 위치하는 시간적 차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러한 시간적 간격을 통한 향유의 폭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려는 전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는 <4 이준식의 사진작품을 거실에 걸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미주의 내용을 살펴보면 시 텍스트와는 무관한 듯 그저 이준식이 왜 그런 사진을 찍는가에 대한 진술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시 텍스트와 결합될 때에는 전혀 다른 형질을 만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주가 아닌 미주처리를 함으로써 텍스트 향유와 미주 읽기 사이에 의식적으로 시간 차이를 두게 함으로써 시 텍스트와 미주를 각기 독립된 형태로 즐기게 하고 다시 엮어서 향유하게 하는 두 층위의 향유가 가능하게 하는 것도 흥미롭다.

시에서는 담백하고 간결하게 구사된 시어를 제시하고, 그것과 얽힌 사연들이 미주에서 아주 상세하게 더해지면서 두 형질은 묘한 조화이거나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두 텍스트 사이의 거리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간격이지만 동질과 이질의 두 층위가 낯설게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김용범은 독자 스스로 향유하며 그 간격을 메우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산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현실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시의 그것은 그러한 것들을 안으로 삭여내는 과정의 결과물일 터인데, 그는 지금 이 두 이질적인 요소들은 소재나 인물과의 인연을 진술하는 미주를 통해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밝은 독자라면 연관된 시와 진술이 전혀 다른 체험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겠지만 눈이 어두운 독자라면 후일담 정도로 들을 수 있는 두 층위의 향유도 가능해진다. 바로 여기게 그의 노림수가 있다. 이전 시들의 단단한 구조나 수사를 슬쩍 풀고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낯선 실험으로 또 다른 시적 긴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마십가의 융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상호텍스성의 활용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독립된 텍스트 사이의 상호 연관을 통하여 새로운 형질의 의미망을 구축하는데 유용하다. 그것은 특히 텍스 간의 대화를 활성화시켜 규범화된 예술형식의 한계를 탈피하여 새로운 미적 혁명을 시도하는 전환과 전복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요소를 갖는다. 이러한 인식은 텍스트가 완성되고 고정된 작품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들 지닌 유기적인 생명체와 같고, 창작과 향유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상호 넘나들기가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노마십가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은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가 형식적인 제약을 넘어서는 풍성한 대화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드러난다.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대화뿐만 아니라 작품 속 허구와 일상의 실재가 넘나들고, 시공간을 오고가는 연관성을 마련함으로써 전혀 다른 형질의 새로운 텍스트망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chto)>는 조수미의 노래로 들어서는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게다가 소설가 신경숙의 번안은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어 첫줄의 번안이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아, 남녀 간의 값싼 사랑과 이별만 있을 뿐, 가슴에 칼을 품고 음습한 안개 속에서 비장하게 기차를 기다리는 레지스탕스의 깊은 고뇌가 없어. 그 노래는 원래 그대로 가사의 내용만을 머리에 넣은 채 그리스어로 들어 그래야 그 속에 스며있는 레지스탕스 출신 작곡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고뇌와 삶이, 목로에 혼자 앉아 마시던 보드카보다 독한 술 우오조(ouzo)의 독기가 품어져 나와. 그 노래는 만돌린보다 청아한 부주키(bouzouki)의 반주로 듣는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거나 차라리 가사를 걷어내고 빗소리를 배경으로 듣는 김지연의 바이올린 독주가 옳아.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조수미의 노래로 들어서는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 예향 중 . <12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중에서(각주 생략)

 

이 작품은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중심으로 연관된 텍스트 사이의 상관망이 향유의 핵심이다. 해리스 알렉슈의 원곡과 조수미의 노래 그리고 신경숙의 소설에 드러난 가사, 김지연의 바이올린 독주 등이 상호텍스트성을 형성하게 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적 현재성을 토대로 해리스 알렉슈와 조수미가 부른 두 개의 텍스트가 되고, 소설이나 바이올린 독주라는 다른 언어로 구현한 또 다른 두 개의 텍스트가 된다. 거기에 그러한 상이한 네 개의 텍스트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이 시까지 또 다른 상호텍스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은 각기 다른 네 개의 텍스트를 얼마나 향유했는가에 따라서 그 넓이와 깊이가 달라지고, 향유자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서 또 달라지는 매우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향유로 확대될 수 있다.

<7 데자뷰. 라 보엠-이중섭거리에서>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을 보다 구체적이고 역동적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은 이중섭이 등장하는 밀다원 시대로 환치되고, 이것은 다시 김용범 자신의 오페라 <나는 이중섭이다>와 연결됨으로써 보다 구체화된 대화를 형성한다. 예술과 가난한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성장과 좌절을 매개로 세 텍스트가 상관됨으로써 좀더 풍성한 텍스트성을 확보하게 된다.

김용범은 이와 같은 다양한 융합을 통하여 다성성을 지향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제 각각의 목소리로 소란스럽고, 그 소란스러운 만큼의 다양성으로 우리 삶의 지평이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는 그런 다성성의 세계는 그가 최근 다다른 또 다른 언덕이다. 그것은 선형적인 전개를 보이며 어딘가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존재, 존재의 각자 몫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지지하는 매우 다원적(多元的)이고 리좀(rhizome)적인 전개에 가깝다. 어디가 중심이 아니라 모두가 중심일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지평! 그런 까닭에 김용범의 융합의 다성성에는 푸른 활기가 있다. 하지만 그 활기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견한 푸른 활기라는 점에서 미숙한 젊음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여 그가 노마십가에서 보여주는 시들은 자유롭고 넉넉하지만 그 안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개개의 작품 모두 각기 독립적인 세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지고 가는 멍에의 의지

 

노마십가는 정리나 마무리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의 알림이며 날마다 새로워지겠다는 시인의 의지다. 그는 서문에서 노마십가’(駑馬十駕)의 의미를 비록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 비루먹은 말일지라도 한 걸음 한걸음 쉬지 않고 간다면, 빠른 말이 하루에 간 그 거리만큼 끝내 따라 갈 수 있으리라는 金言이라고 했다. 혹자는 여기서 겸손을 읽을지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그의 시를 읽어온 필자에게는 단호한 의지로만 보였다. 그것은 끝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번 시집에서 그가 보여준 준열한 시적 긴장과 치열한 실험 그리고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경을 찾아가려는 유목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다. 항상 열매와 꽃을 함께 달고 있는 운화(雲華의 메타포는 그동안 십여 권의 시집마다 보여주었던 변화와 갱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우리는 김용범이 지난 온 시의 영토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지나온 40년의 시력도 시력이지만 앞으로 스스로 멍에를 지고 찾아갈 새로운 영토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 기대는 지난 40년간 그의 시가 보여주었던 단단한 열매와 지금도 피우고 있는 꽃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그의 표현에 의지해서 표현해본다면, 김용범의 시를 읽는 일은 수 억 만 개 별들로 / 우려낸 차 한 잔을 만나는 것이기에 지독하고 아름다운 현기(眩氣)’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비루먹은 말이라 칭하며 자신의 멍에를 지고 쉬지 않고 가겠다는 그의 선언은 그의 스승인 목월선생의 향나무 연필처럼 밤마다 유목의 변경을 끊임없이 떠돌며 시어를 벼리겠다는 아름다운 멍에의 의지.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멍에의 역설, 그 아름다운 멍에를 향한 지독한 의지에서 노마십가의 이정(里程)을 가늠해 볼 것이다. 하여 나는 낮은 소리로 지워지고 있는 바람의 후면을 읽거나 겨울 쪽으로 기우러져안개 속을 차갑게 걸어갈 그가 낯선 영토에서 순해진 귀(耳順)로 듣고 이야기해줄 그의 시가 아직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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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굴절로서의 여성 이미지

- 아오마메와 은교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

문학은 세계를 언어화하여 재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재현은 세계의 상상적 재구조화를 통하여 현실의 재맥락화를 기도하는 가치 지향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다. 문학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세계를 회의견제하고, 세계는 다시 문학을 견인해내는 상호침투적 양상을 고려할 때, 재현을 통한 세계의 이해는 현실의 가치와 권력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문학은 물론 여타 장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재현이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볼 때, 그 발현은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양상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언어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언어에 내재해 있는 가치체계를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존의 가치체계와 사유방식을 자연스럽게 언어를 통해 수용하고,[각주:1] 이를 기반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그 결과를 구현해낸 것이 텍스트라고 할 때,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가 이미 기존 가치체계의 확대 재생산의 한 축으로서 기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가치체계와 세계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재현의 순환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확보하고 있는 비판적 거리나 회의적 각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 글은 우리사회가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음란한 판타지에 주목하고, 그러한 공모를 적극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여성 이미지의 왜곡과 굴절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2.

한류[각주:2]라는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하여 소녀들을 어린 여성으로 환치하고, 섹스 어필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전면화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만드는 지금 이곳의 질서는 주체적인 여성, 주도적인 여성, 완벽한 여성 따위로 포장된 타자성의 극단에 다름 아니다. 한류1999<북경청년보>에서 중국 내 급부상한 한국 대중문화의 주도적인 흐름을 지칭했던 말인데, 이것이 문화콘텐츠 산업의 사회문화 경제적 가치와 한국 문화의 세계화라는 다소 실체가 불분명한 국가주의적 발상이 교묘하게 어우러지면서 한국 문화콘텐츠 시장 정체를 호명한 결과이다.

이러한 호명의 결과는 우리 문화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중심 타깃이 밖으로 향해 있거나 자본 및 시장에 의한 텍스트 지배와 같은 기형적인 결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특히 심각한 것은 문화콘텐츠의 왜곡과 편중화 현상이다. 초기 한류는 <사랑이 뭐길래>, <별은 내가슴에>, <겨울연가>, <대장금> 등이 가부장권을 내면화한 가족주의, 순애(純愛)의 향수, 주도적 여성 이미지의 전면화 등으로 시장에 접근하고 주도했었다.[각주:3] 이러한 흐름은 소위 아이돌 그룹, 걸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롤리타의 분위기는 확보하면서도 윤리적 부담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도록 15-17세 전후의 어린 여성을 20대 초반의 멤버들 사이에 포진시키는 전략과 섹스 어필의 단일 코드로 퍼포먼스를 구성해내는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걸그룹 멤버들의 이러한 선정적인 코드는 꿀벅지”, “하의 실종등과 같은 신조어로 보편화되고 자연스러운 수용을 요구한다. 꿀벅지는 핥으면 꿀맛 날 것 같은 허벅지, 꿀처럼 달콤한 허벅지, 꿀을 바른 듯한 매끄러운 허벅지 등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뜻은 가늘고 마른 허벅지가 아닌 탄탄하고 건강미가 있는 허벅지(밑줄과 원문자는 인용자)[각주:4]를 의미한다고 한다. 위키디피아의 정의도 섬세하게 읽어보면 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패티시즘(fetishism)으로로 읽을 수 있는 의 의미를 내포적으로 함유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의 의미를 전면화할 수 있는 의미의 이중 구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이중구조는 2007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원더걸스의 <Tell me> 안무인 가슴털기 춤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7년 당시 중학생 멤버부터 십대 후반의 멤버들과 20대 초반으로 구성되었던 원더걸스는 선정성을 전면화한 그룹이가기보다는 풋풋한 소녀그룹으로 포지셔닝 되었다. 이러한 포지셔닝은 그들이 추는 가슴털기 춤이라는 다소 선정적일 수 있는 안무를 이중의 구조로 즐기게 하였다. 가슴털기 춤의 성적 코드는 내면화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소녀그룹의 귀여운 안무로 치환시킴으로써 윤리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원더걸스의 성공 이후 소녀시대의 <Gee>를 비롯한 일련의 노래와 안무, 카라가 <미스터>에서 보여준 맥락 없이 노골적인 엉덩이춤 등 수다한 걸그룹들의 선정적이며 섹스 어필하는 안무는 꿀벅지, 하의실종 등의 신조어로 중화됨으로써 보편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각주:5]

 원더걸스의 가슴털기 춤()과 카라의 엉덩이춤()

문제는 그것이 선정적인 코드를 전면화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단일 코드의 전면화 과정에서 여성 이미지는 철저히 타자의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고, 그것은 여성 주체의 왜곡을 결과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러한 왜곡이 걸그룹, 한류, 문화콘텐츠 등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경제적 부가가치의 놀라운 성과 등에 의해서 포장되는 지금 이곳의 주도적 흐름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중문화의 영역 안에서 이러한 타자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주도적인 흐름을 이루고, 그것이 예외 없는 단일코드로 전면화될 때 그것의 영향이 현실로 침투해 들어올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자발성에 기반한 향유가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속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대중문화의 영역 안으로 공급되는 여성 이미지의 획일화와 타자화 현상은 왜곡된 모습으로 현실에 전면적인 공세를 가할 것이 분명하다.

 

3.

은교[각주:6]에는 은교가 없다. ‘위대한 시인이적요의 가슴을 흔들어놓은 은교는 불멸의 처녀성을 상징한다지만, 정작 은교에는 은교가 없다. 이 작품에서는 은교 대신 이적요의 은교를 향한 뜨거운 갈망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긍정 그리고 현재적 시간의 자기 부정이 들끓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적요의 이율배반적 갈망의 시선 사이사이를 은교를 매개로 한 서지우의 오이디푸스적 도발이 가로 지른다. 거기에 3자적 시선으로 은교를 바라보는 Q변호사의 시선이 더해질 뿐이다. 따라서 은교에서 은교는 남성 욕망의 등가물이거나 남성적 시선의 구성물일 뿐, 은교 그 자신은 아니다.

 

영숙이나 영자가 아닌, 여자로 생각하지 않게 하는 중성적인 느낌이어서 은교라고 이름 지었다. 은교는 롤리타와 다르다. 은교는 열일곱이 아니라 스물다섯이어도 되고, 서른이어도 된다.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중요치 않다. 열망하는 절대적인 존재다.[각주:7]

 

남주인공은 70세고 여주인공은 17세 소녀죠. 평생 자기 절제를 해온 노시인에게 나타난 은교는 단순히 젊은 아이가 아니에요. 불멸의 처녀성을 뜻하지요. 처녀가 늙어 애 낳고 시집가고 그러는 것은 노인의 머릿속에 없는 거예요.[각주:8]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은교는 보부아르가 2의 성에서 이야기 했던 타자성의 영역에서 파악할 수 있다. 타자성의 논리에 따르면 자아에 대한 의식은 타자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으며, 타자는 자아가 긍정적인 정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타자는 스스로 뚜렷한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와의 대립적 분별에 의해 구성된다.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를 중심 매개로 구현되는 은교는 그것을 기록하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타자이며, 그 궁극에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자아에 대한 구성 인식이 깔려 있다.

가 남성 욕망의 판타지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은교 이미지라면 는 텍스트의 맥락 위에서 이적요의 갈망을 설득하기 위한 은교의 이미지다. 문제는 든 간에 은교 스스로 발현하는 은교의 이미지가 아니라 은교를 통해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의 대상으로서의 은교 이미지라는 점이다. 특히 의 구현 과정에서 서지우의 서사가 개입됨으로써 은교는 질투와 욕망의 대상으로 드러남으로써 은교의 실체는 점점 더 모호해진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서 은교의 입으로 발화시키고 있는 유행어들은 이적요와의 시간을 드러내기 위한 기제로 사용된 것이지만, 그것이 은교의 캐릭터를 구성하지는 못한다.

일반적인 남성적 시선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유혹하는 여성, 더 연약한 그릇, 완벽한 여성, 악녀[각주:9]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한다. 유혹하는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고 도덕적인 책망이나 징벌을 받아야 하는 인물이며, 더 연약한 그릇은 자손 생산의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말하며, 완벽한 여성은 육체적 순결과 복종이라는 남성적 강요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여성을 의미하고, 악녀는 매력적이지도 순종적이지도 않지만 남자를 원하는 여성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은교는 어느 한 이미지로 고착되지 않고 네 요소를 조금씩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에서 은교는 스스로 드러내기보다 이적요나 서지우 심지어 Q변호사의 시선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 이적요를 몰매로부터 지켜 준 D나 얼을 낳은 친구의 동생이나 오십대의 그를 만나던 M 그리고 안마시술소의 여자 등 모두 여성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남성 판타지 안에 전형들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시선과 인식은 은교가 은교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은교를 매개로 한 늙고 병들어가는 남성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늙어감에 대한 성찰을 은교를 한 축으로 육체와 욕망의 문제에 대하여 전개하고 있다면, 오이디푸스적 애증을 드러내는 서지우와의 갈등을 통해서 사회적 자아의 페르소나를 성찰하고 있다. 서지우와의 갈등의 마디마디 마다 은교를 매개함으로써 은교의 중심이 늙고 노쇠해가는 육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싶지 않은 부단한 욕망의 발기에 대한 문제를 다양한 층위로 드러내고 있다. 은교가 이적요의 불멸의 처녀성이 되는 이유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화된 여성(Woman)'은 남성들의 꿈과 이상, 공포들이 발생하는 상상의 장소이다. 여러 문화들에서 여성성은 자연이나 아름다움, 순수, 선을 나타낼 뿐 아니라 악이나 마력, 타락, 죽음을 묘사한다. 보브아르에 따르면 남성들이 끊임없이 여성들을 그들의 타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남성들에 의해 재현되는 여성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녀는 선한 것으로부터 악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덕들뿐만 아니라 그 미덕들에 반대되는 것들도 구현하고 있다.남성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또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동시에 여성에게 투사한다.[각주:10]

 

은교의 중심은 이적요 자신이다. 은교는 그 욕망의 고갱이로서 노쇠함에 대한 분노와 공포, 젊음에 대한 갈망, 무능력한 젊음에 대한 질투와 분노, 문학적 권위에 대한 비아냥과 부정 등을 드러내는 중심 매개일 뿐 살아있는 은교 자신은 아니다. 이적요가 꿈꾸는 젊음과 사랑의 갈망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망이라는 절망적 인식과 한계를 가장 밑바닥에 두고 서지우와의 오이디푸스적 긴장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지은 것은 그 모든 것이 은교를 매개로 전개되어 간다는 점이다.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은교의 이미지가 관절 인형처럼 진공의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결정적인 아쉬움을 갖지만 그것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작품의 매듭과 결만은 결코 만만한 내공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다만, 이 둘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양자 사이의 불균형은 작가의 실존적 고뇌가 이적요에게 지나치게 투사된 결과라고 하더라도 중심 매개인 은교를 진공의 상태로 두고서는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끝부분에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를 태워버리는 장면에서 비로소 은교가 실존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실존의 한계를 거부하는 갈망의 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남성 판타지 안의 관절인형과 같은 은교가 무슨 답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은교를 만나는 내내 영화 <은교>의 구성과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소설이 지니고 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오이디푸스적 긴장을 소거시키고 은교를 매개로 한 일차원적 갈등만을 전면화하고, 은교에 대한 이적요의 갈망을 설득하기 위해 다소 지루할 정도의 서사 전개를 보여준 영화 <은교>는 선택적이고 분명하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다소 작위적이었지만 70살 노인의 남루한 육체를 극단화하기 위해 무기력한 성기를 노출한다거나 17살 여자아이의 생기발랄한 육체와 젊음을 보여주기 위해 수줍은 듯 드러나는 체모 역시 지극히 전략적인 배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교의 다층적이고 내면화된 갈망의 정체나 갈등이 전혀 드러나지 못함으로써 은교의 몸만 앞으로 전면화 되고, 소설에서 가져온 에피소드임에도 불구하고 설득의 맥락을 놓쳐버림으로써 소설이 지닌 다층적인 의미 맥락을 모두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원천콘텐츠의 매력적인 요소들 중에서 은교의 투명한 젊음을 전면화하려는 선택이 전략적 유효성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은교를 읽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천명관의 고래가 떠오른 것도 참 맥락 없는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는 대필이라는 소재적 유사성과 신비함의 베일에 가려진 후카에리와 강건한 육체와 정신으로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지만 자폐적 공간을 고집하는 아오마메의 이미지에 압도되었고, 천명관의 고래는 금복과 춘희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교의 은교가 텅 빈 타자의 기표라면 1Q84고래의 그녀들은 삶의 주인으로서 자신들의 문제에 대면함으로써 자아의 정체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기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아의 정체는 사건과 대면하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구축된다는 의미에 보다 더 가깝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만나야 할 남성들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그들과의 성관계 역시 주체적으로 전개하며, 옳고 그름의 판단에 있어서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과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 공동체로부터 탈출하고, 리틀피플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소설을 구술하고, 덴고에게 대필을 허락하는 후카에리의 모습이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킬러가 되고, 자기 취향의 남자를 취하여 성관계를 나누고, 심지어 처녀수태의 상황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출산을 결정하는 아오마메의 이미지는 주체적이다. 남성적 시선 안에 갇혀 기술되는 타자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미지를 만들고 구축해나가는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고래의 금복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나가면서 견고한 남성들의 질서 안에서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아남는다. 금복에게서 어머니로서의 기표를 소거시키고, 그 트라우마로 자기 안의 세계에 갇혔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춘희 역시 지금껏 보아온 여성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다. 성욕, 사냥, 성취, 주체적 결정, 이성적 사고 등등 남성적 기표를 드러내고 있는 금복과 춘희는 전통적인 여성 이미지에 전략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녀들은 순결한 처녀나 창녀, 불감증 아니면 색광, 순결하거나 음탕하다는 여성에 대한 극단의 성적 규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면서 주도적으로 성욕을 해소하고 성 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차라리 당당하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이채롭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천명관이 보여주는 낯설지만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에 의한 여성적 재현이 남성 권력의 확대재생산이나 성취될 수 없는 갈망의 판타지의 매개로 설정되는 여성 이미지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이다. 다만, 이러한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이미지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공공한 남성 권력과 언어의 재현으로 학습된 편견의 결과이거나 그들이 처한 맥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아오마메가 스스로 규정했듯이 1984년이 아닌 1Q84의 공간, 금복이나 춘희가 살고 있는 다소 우화적인 공간 설정도 역시 비현실적 시공간 설정을 통하여 타자가 아닌 자아의 정체에 다가가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저항과 전복 그리고 갱신의 시도는 시에서 성()을 매개로 래디컬하게 전개된 바 있다.

 

() 온몸에 남은 푸른 이빨자국들을 / 사랑할께요 시퍼렇게 / 사랑할께요 가지말아요 / 버리지 말아요 나의 / 기둥서방 당신 / 붙잡을 바짓가랭이도 없는 당신 / 입에서 항문으로 / 당신의 음경에 / 꼬치 꿰인 채 / 뜨거운 전기오븐 속을 / 빙글빙글빙글 / 영겁회귀 / 돌고 돌께요 간도 / 쓸개도 없이

김언희, <늙은 창녀의 노래2> 부분

 

() 입을 맞춰 줘됐어이젠×핥아기분이 좋아이리와너의 성기를 빨고 싶어냄새가 좋아이젠 너의 것을 내 항문으로집어넣어그렇게이번엔가죽혁띠를 가져와나의 등을 때려세게세게세게…ⓔ어머니의젖을 빨고 자랐을 테지…ⓕ오늘은내 젖무덤에오줌을 갈겨따뜻해됐어…ⓖ네가 더럽혔으니깨끗하게네 입술로 닦아 줘그래그래젖처럼달지어린시절로돌아가는 것같지?

장정일, <늙은 창녀> 부분

 

()에서 시적화자인 늙은 창녀는 이미 대상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꼬치로 꿰이거나 전기오븐에 들어간다는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전기오븐의 회전판이 도는 속도와 방향에 따라 돌아가는 대상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녀의 기둥서방인 당신은 붙잡을 가랭이도 없지만 󰠏󰠏󰠏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그녀를 자신의 음경으로 입에서 항문까지 꼬치 꿰어 돌릴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이다. 실체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녀를 매달고 대상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남성 권력의 자기 증식적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는 자신의 의지가 괄호 속에 묶인 것도 모른 채 헛된 욕망의 회로 노릇을 해온 자신에 대한 모멸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모멸적 자기 인식을 통하여 타자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조응하고, 언어적 도구의 폭력적 구사를 통하여 그 체계의 허구성에 틈을 내려는 시도다.

()는 포르노적 상상력을 전략적으로 수용하여 자기모멸을 그 극단까지 보낸 경우이다. 이와 같은 포르노적 상상력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거부하고 일탈적인 행위를 요구함으로써 욕망이 은폐하고 있는 낱낱의 실체를 까발리기 위한 것이다. 순수한 욕망의 표현인 에서 자신의 젖무덤에 오줌을 갈기게 함으로써 모욕하고, 와 다시 대비시키는 위악적(僞惡的)인 포즈를 통해서, 의 순순한 욕망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 의 순수하고 본능적인 행위를 의 불결하고 타락한 행위를 의도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의 행위를 훼손시키려는 전략이다. 의 배설은 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다.[각주:11]

()()는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성중심의 계몽적 사고와 남성중심의 세계 인식에 연결된 권력과 억압 그리고 재현 체계에 대하여 극단적인 저항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들이 저항의 단초로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교가 남성적 갈망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듯 아오마메나 금복은 1Q84거나 우화적 세계를 전제로 스스로를 갱신하고 있으며, 김언희나 장정일의 창녀들 역시 포르노그라피의 가장 거친 형태의 상상력 안에서만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 논의는 다시 천천히 역순으로 돌아와야 한다. 저항적 관점에서의 리터러시를 통하여 견고한 서사 전략 안에 왜곡된 여성적 이미지를 읽어내고, 그 왜곡의 시도가 언어적 재현을 통하여 타자의 영역에서 강요된 정체를 갖게 하려는 지금 이곳의 지배적 질서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유혹하는 여성이 아니라 욕망하는 여성, 연약한 그릇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개별성으로 충일한 여성, 완벽한 여성이 아니라 나와 같은 갈망을 지닌 여성, 악녀가 아니라 그녀로서의 여성상이 좀 더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맥락과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은교에서 은교를 보고 싶은 이유다.

 

  1. 인간은 언어를 벗어나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는 사고를 결정한다. 따라서 ‘지금 이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지금 이곳’의 지배적 사고를 넘어설 수 없고, 오히려 그것들을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로서 확대재생산한다. 그 결과가 언어 안에서 생산되고 확장되는 일상의 파시즘이다. [본문으로]
  2. 한류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기수, 한류의 지속 방안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 《인문콘텐츠》6호, (2005. 인문콘텐츠학회)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3. 한류를 주도했던 드라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기수, <겨울연가> 문제는 서사다, 《겨울연가, 콘텐츠와 콘텍스트 사이》 (2005, 다미디어)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4. http://ko.wikipedia.org/wiki/%EA%BF%80%EB%B2%85%EC%A7%80 [본문으로]
  5. 물론 그것의 반작용으로 오디션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로만 승부하는 뮤지션들이 등장하게 되고, <나는 가수다>와 같은 실력파 뮤지션들에 대한 갈망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본문으로]
  6. 박범신, 《은교》 문학동네, 2012. 이 글에서는 소설은 《은교》, 영화는 <은교>로 표기할 것이다. [본문으로]
  7. 고재열, <은교>가 왜? 욕망은 나이가 없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24 [본문으로]
  8. 이지은, 젊은 여자들이 지나갈 때 삶이 아득… “꽃이 그냥 저만치에 있는 거지”, 동아일보, 2012.5.23, http://news.donga.com/3/all/20120523/46446697/1 [본문으로]
  9. 팸 모리스 /강희원 역, 《문학과 페미니즘》 문예출판사, 1997, pp.66-67. [본문으로]
  10. 팸 모리스, 앞의 책, p.34 [본문으로]
  11. 박기수, 배설없는 시대의 숙변, 《오늘의 문예비평》 1999년 겨울호 p1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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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것은 갈등이 아니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123, 지금 이곳은 곳곳이 갈등이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에서부터 MBCKBS 파업 그리고 캠퍼스 안의 등록금 투쟁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격한 갈등 중이다. 옳고 그름과 그와는 상관없는 이해관계의 실타래가 헝클어진 모습을 보니 이러한 갈등이 좀처럼 풀릴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 더욱 안타까운 오늘이다.

갈등은 그 사회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가치중립적인 징후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부단히 움직이며 변화하고, 좀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갈등을 겪고 그 갈등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다한 관점이 모이면서 현재 상태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 사회가 노쇠할수록 갈등은 찾아볼 수 없으며, 변화하지 않는 견고한 현재만이 지속될 뿐이고, 그 지속의 시간만큼 그 사회는 쇠잔해져갈 뿐이다.

우리사회는 지독히 역동적이다. 그만큼 우리들의 변화의 열망이 강하고 좀 더 나은 상태를 향한 개선의 의지가 뚜렷하다는 말이다. 그 역동의 동력은 갈등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관점 그리고 지향이 부딪히면서 현재의 개선과 진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우리사회가 역동적인만큼 건강하고 발전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러한 낙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문제는 갈등의 과정에 있다. 우리의 갈등 과정에서는 대립하는 주체들이 충분한 논의 시간을 가지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합의점을 찾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내 의견만을 관철시키겠다는 일방적인 의미만으로는 갈등을 해소할 수 없다. 상호 양보와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는 갈등은 사생결단의 전쟁일 뿐이며, 어떠한 명분으로도 변화와 개선의 선의가 될 수는 없다.

강정마을의 발파음을 들으며 생각한다. 5년 이상을 끌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논리는 궁색하다. 해군기지 건설이 국민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합의하고 지지할 수 있을 때까지 더 진지하게 논의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옳다. 한 번 건설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더욱 그렇다. 그동안 성과주의의 맹목과 일방적인 조급증로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수다한 사업들을 기억하지 않는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갈등이 아니다. 효과와 효용의 이름을 앞세워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소통함으로써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권력의 일방주의와 그 주변에서 기생하는 폭력적인 논리들이다. 갈등을 해소해나가기 위한 우직한 기다림과 상호 이해의 세련된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힘만으로는 결코 갈등을 해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대신문> 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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