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형님>, 칭찬해? 칭찬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나이가 들수록 소란스러운 것이 싫다. 채널을 바꾸다 만나게 되는 <아는 형님>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교복을 입는 설정도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고, 연예인 신변 퀴즈를 풀며 정답을 맞히는 과정도 무례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진득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다가 지난 주말 마침내 <아는 형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우연히 접한 프로모션 클립이 하도 유쾌해서 찾아본 것이었다. 게스트였던 걸스데이의 털털함과 리액션도 그 유쾌함에 한 몫을 차지했지만 무엇보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 포맷의 차별성에 있었다.


교실을 배경으로 전학생이 오면서 서로 알아간다는 콘셉트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메인 MC와 보조 진행으로 구분하지 않고 일곱 명의 집단 진행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 그러다보니 게스트가 진행을 주도하는 역할 역전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점, 각자의 캐릭터 설정에 따라 게스트가 빛날 수 있게 조력자로서 충실한 뒷받침을 수행한다는 점, 포맷 속 캐릭터와 실재 캐릭터 간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출연진을 탈신비화하고 있다는 점, 교실이라는 공간을 토크, 퍼포먼스, 기타 활동의 무대로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 차별화 전략으로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아는 형님>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진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게스트의 관점이 부각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게스트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설정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전학생과 재학생이 함께 어우러져 놀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시청자는 그 모습을 즐긴다는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더구나 전체를 반말로 진행함으로써 출연진의 연령 차이와 그에 따른 서명 등이 자연스럽게 소거됨으로써 거침없고 솔직한 발언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아는 형님>의 가장 큰 경쟁력은 특정 포맷을 고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포맷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기저에는 퀴즈와 노래방 문화를 결합시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한 경우처럼, 다양한 장르나 포맷을 즐거움을 중심으로 결합시키는 과감한 도전이 있다. <아는 형님>의 대부분 코너는 어디서 봄직한 익숙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전혀 다른 맥락(context)에서 구현됨으로써 새로운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도록 과감한 도전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화의 도전은 지금까지 즐거웠던 만큼 앞으로 더욱 더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아는 형님>이 미덕으로만 가득 찬 프로그램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즐거움에 프로그램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는 형님>이 공허한 말장난, 고착화된 성역할을 확대 재생산, 연예인의 신변잡기중심 진행 등의 비난에서 자유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들이 시도한 새로움의 도전에 주목해보자는 말이다.

어디 <아는 형님> 뿐이겠는가? 단지 밥 세끼 먹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즐거움을 주었던 <삼시 세끼>, 뚱뚱한 먹보들 네 명이 그저 먹는 과정만 보여주어도 재미있는 <맛있는 녀석들>, 성장과 오디션을 결합시켰던 <프로듀스 101>, 모창 능력자를 찾아 추억 속의 스타를 현재로 소환했던 <히든 싱어> 등 최근 차별성으로 승부했던 포맷들을 상기해보자.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이 프로그램들이 현저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함 속에서 시청자의 향유 코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거기에 파격적인 차별화의 콘셉트를 과감하게 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을 흉내 내면 표절이고 스스로를 베끼면 매너리즘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다양한 이유로 황량해진 공중파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종편이 엄청난 자금으로 스타PD와 작가들을 스카우트해갔기 때문이라 핑계대지 마라. 스타PD와 작가들이 공중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하고 경직된 제작환경을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직성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지향하는 뼈저린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뿐이다. 가장 빠르게 변하는 것이 콘텐츠 시장임을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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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과 인터넷서점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식탁에 앉아서 가계부를 정리하던 아내가 궁시렁거립니다. 아내는 곧 제 서재로 들어와 지난달 제가 산 책의 내역을 들이밀고 그 금액을 확인 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책을 조금만 사라고 부탁을 하거나 가계부를 가져가라고 협박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사고 싶은 책을 사지 말라는 것은 전투병에게 실탄을 아끼라는 것과 같다고 우기거나 아내의 분위기를 봐서 이내 꼬리를 내리고 다음달에는 책을 사지 않겠다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모르겠습니까, 결혼 후 월말마다 반복되어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싸움의 결말을. 사실, 주말마다 각 신문에서 알려주는 책 정보나 이메일로 날아드는 인터넷 서점의 신간 안내는 유난히 책 욕심이 많은 저에게는 참기 힘든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메모해두었다가 가능하면 제가 강의 없는 날에 집에 도착하도록 아내 몰래 주문을 합니다. 따라서 배달되온 책의 포장박스만 아내 눈에 띄지 않게 하면 완전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발각되고 저는 아내에게 비굴한 미소를 지어야합니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는 제게 누이들과 당신의 구두를 닦게 하고 용돈 500원을 주셨습니다. 그 돈은 토요일 오후 축구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분식집에서 300원짜리 라면을 사 먹거나, 모아두었다가 시장 입구에 있었던 헌책방에서 삼중당 문고나 500원 내외하던 헌 책들을 구입하는 데 쓰곤 했습니다. 시장 입구 노점상들이 즐비한 가운데 환한 형광등 불빛으로 빛나던 그 헌책방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점 앞에 쌓아두었던 헌책들과 그 사이사이에 싸한 냄새와 함께 따듯하게 타오르던 카바이드 불빛, 천장까지 닿아있던 책꽂이와 빼곡히 들어차있던 책들, 그리고 거기서 풍겨나온던 얕은 곰팡이 냄새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고 싶은 책들은 늘 주머니의 돈보다 많았습니다. 책을 읽어보고, 주인아저씨에게 그것의 가격을 몇 번씩 되물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주머니의 돈을 가늠하곤 했던 까까머리 소년은 사진 속의 그것처럼 나이를 먹지 않았나 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장바구니에 책을 담아두고 주문 여부를 놓고 몇 번씩 고민하다가 덜컥 일을 저질러버리니 말입니다.

가방에 교과서 외의 책을 넣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으쓱했던 그 시절, 이어령의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은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완과 급을 조절하는 문자의 호흡과 유려한 레토릭,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학, 어디서도 읽어보지 못했던 독특한 관점을 새록새록 발견할 수 있었던 책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시기어린 질투는 저자가 강의하던 이화여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어이없는 열망을 낳기도 했으니, 지금으로서는 참 웃지 못 할 일입니다.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들은 오남매를 모두 일일이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여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책을 보며 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 이미 한국문학전집을 다 읽고, 중학교 시절에는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적 호기심이 강했던 그 시절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육체의 악령같은 책들은 얼마나 가슴 뛰는 체험이었는지. 이처럼 척박했고 때론 천박했던 제 독서 이력은 대학에 들어와 이청준의 소설을 만나면서부터 달라졌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내내 제 화두였습니다. 이청준의 작품들을 찾아 읽으면서 느끼던 즐거움과 막막함. 그 즐거움은 김현의 평론을 통해 몇 배 더해졌고, 막막함은 결국 제게 이론 공부를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그나마 평단의 말석에라도 머물게 되었나봅니다.

이사할 때마다 책 때문에 이삿짐 센터에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하지만, 지금도 사야할 책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는 분주하다는 핑계로 서점에 가는 수고 대신 인터넷을 통해 책을 삽니다. 책장들 사이에서 꼼꼼하게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 몇 번씩 망설이다 구입하기 보다는 인터넷에서 책에 관한 정보, 적립 포인트, 할인율 등을 확인하고 책을 구입합니다. 목돈이 생기면 사고 싶던 책들을 잔뜩 사서 두 손 가득 들고 힘들게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느끼던 정신적 포만감보다는 얼마나 빠르게 배달될 수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인터넷 서점의 경제성과 편의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카바이트 불빛과 형광등이 어우러진 얕은 곰팡이 냄새나는 헌책방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무엇을 하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라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책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겠지요.

여덟 살배기 첫째가 책 몇 권을 들고 제 서재로 들어옵니다. 뒤이어 책을 거꾸로 들고 네 살배기 둘째가 들어옵니다. 둘째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하지만 제 나름대로 책을 봅니다. 아마 녀석들에게 책은 아직 읽는 것만으로 즐거운것들이겠지요. 둘째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며, 저는 아마 제게 필요한 책들을 언제 주문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 같습니다. <애경 사보> 2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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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사내의 커다란 빈 자리


 박기수(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 사내가 죽었다. 아주 작은 키에 작게 웃을 줄 알았던 그가 폐암으로 죽었다. 그의 미소처럼 늘 향기롭게 타오르던 그의 담배연기가 그를 삼켜버렸다. 담배를 재대로 배워보지 못한 나도 그의 출판사에 들르는 날이면 늘 내 몫보다 많은 담배를 축내고 나왔다. 북한산이 환하게 보이던 그의 사무실은 아주 작았지만 창만은 덩치에 비해 큰 편이었다. 마치 연극 전문 출판만을 고집하던 그 출판사의 매출이 보잘 것 없었고, 때문에 그의 생활은 참 궁핍한 것이었지만, 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이나 의지가 더할 수 없는 풍요였던 것처럼.

그가 죽었다. 잡지 일로 그와 내가 낯선 고장을 다니러 가던 열차 안, 점심 대신 세 병의 맥주를 나누어 마시며 나누던 삶의 이야기들. 생활고로 아내와 3년쯤 헤어져야했던 이야기, 그 헤어졌던 시간의 아쉬움 때문에 밤마다 아내와 담배 한 대를 나누어 피우고, 침대에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다며 행복해했던 그가 금요일 오전 10시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의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하던 작년 연말, 그의 아내가 만들어온 김치 만두의 포만감, 그 시린 새벽의 든든한 사랑을 두고 그가 갔다. 기름 값을 아낀다며 LPG차로 바꾼다며 좋아하던 그가, 올 여름 세검정 보신탕 집에서 참이슬을 나누어 마시자던 그가, 따뜻한 커피를 타주고 담배를 권하고 교정을 보는 옆에 슬며시 캔맥주 하나쯤 놓아주던 그를 태운 것은 담배 연기만이 아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그는 혼자였다. 초여름의 햇빛을 사무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끌어다놓고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그의 출판사에는 사장이자 유일한 사원인 그만 남아 있었다. 그는 작게 웃으며 이 일 저 일을 상의했고, 그의 아내와 밤새 울고 웃으며 읽었다던 나의 살아가는 이야기원고를 그가 출판하고 싶어했지만 그에게는 작은 책 하나 만들만큼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야구모자를 즐겨 쓰던 그가 만들어낸 책이 모두 몇 권이었는지, 그 책들의 수준은 어떠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판매되었는지 연극에 문외한인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어했는지, 그 책을 향한 그의 의지가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 겨우 조금 가늠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모든 것이 위기라는 시대에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일을 오로지 순수한 열정만 가지고 견뎌내는 일이란 결국엔 자신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일이라고 우울하게 깨닫는다. 그와 처음 만나 비워낸 참이슬과 흑맥주의 아리한 맛이 아직 입에서 쓰다. 그를 보내고, 나의 우울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다. 이제 그가 마지막까지 가슴에 안고 갔던 견고한 의지처럼 나도 다시 한번 마음을 갈무리해야겠다. 오늘은 문득, 창 넓은 그의 사무실에서 그가 녹여준 커피를 마시며 그의 향기로운 담배를 피우고 싶다.<행화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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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외로운, 그리고 적요한 신열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강의 소설은 읽히지 않고 스민다. 아주 낮은 음성으로 스미는 그녀의 언어는 가벼운 신열이다. 거센 통증은 아니어도 신열은 무엇보다 내가 나를 놓을 때까지 반복되는 집요함이 있다. 서서히 몸으로 스미지만 마침내 온몸을 달구어놓고 마는 그것의 저력을 그녀는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화려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소설들이 온갖 찬사의 중심에 있는 요즘, 그녀의 속울음 같은 이야기들은 담백한 속맛을 우려내기에 더욱 소중하다.

한강의 주인공들은 고단한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들의 고단함은 죽음과 관련된 거부할 수 없었던 정신적인 상처(trauma)에서 비롯된다. 이청준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정신적인 외상들이 현실의 가공할 폭력에 대한 방어기제였음을 상기할 때, 한강의 그것은 보다 존재론적이라는 측면에서 변별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타인의 죽음을 체험했거나, 자신만 살아 있다는 죄의식으로 시달리거나, 거기에서 비롯되는 고아의식으로 단절되어 있거나, 이곳의 삶을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고있거나,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 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집요한 응시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첫 작품이었던 여수의 사랑을 만나보면 이와 같은 특징들을 손쉽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마주할 수 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반복되는 까닭이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외로움과 고단함이 대항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삶의 근원적인 형질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죽음과 나의 의사 죽음 체험(여수의 사랑), 남동생의 죽음(질주), 배다른 형의 광기와 몰락하고 해체되는 가족(저녁빛), 병신 여동생의 실종과 황씨 딸아이의 죽음(진달래 능선) 등 얼핏 여느 고향동네에서 들었음직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지극히 통속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한강의 이야기 속에서는 깊은 울림으로 살아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수의 사랑>에서 화자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 의해 동생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만이 그 죽임으로부터 벗어난다.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나는 심한 결벽증에 빠진다. 혼자라는 심리적 고립감을 세상의 모든 것이 더럽다는 인식으로 바꾸어 자신의 혼자있음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더럽고 나만 혼자 깨끗하기에 나의 홀로 있음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씻는 행위는 나의 깨끗함을 지키려는 노력이며 동시에 다른 이와 내가 다르다는 징표가 된다. 하지만 결벽이 심해질수록 상처는 덧날 뿐이다. 결벽은 세계와의 단절이며 회피이기에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상처를 지닌 자흔을 통해 한강은 그 상처가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고단함과 막막한 외로움,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운명.

문제는 그러한 고단함과 외로움을 속병처럼 지닌 채 분주히 헛것을 쫓으며 사는 우리에게 있다. 하여 한강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헛것을 떨치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튕겨나가 있다. 평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한강 소설의 고아의식이 그것이다. 가족은 나의 나됨을 형성시켜주는 곳이며 동시에 나의 나됨을 방해하는 곳이기도 하다. 앞의 것이 세계와 관계되는 나의 나됨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자기인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한강이 천착하고 있는 삶의 근원성은 다분히 존재론적 비극과 맞닿아 있다.

여수의 사랑이 상처의 속울음이었다면, 검은 사슴은 그것에 대한 치유의 모색이다. 치유는 상처를 앓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극적인 응시에서 시작된다대낮 8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옷과 함께 기억을 놓고 알몸이 되어버린 의선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현재의 옷을 벗어버리는 이와 같은 행위는 다분히 제의적이다. 경찰서를 탈출해서 인영의 방을 찾아오고 그녀를 보살펴주는 행위는 의선의 모습에서 인영이나 명윤 모두 그동안 숨기듯 지녀온 자신들의 상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지점에서 이청준의 <황홀한 실종>을 읽어보면, 2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두 작가가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있는지 비교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보살펴주던 의선이 돌연 행방을 감추고 그녀를 찾아 황곡에 이르고, 그 검고 고요한 어둠뿐이 그 낯선도시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의선을 찾는 행위는 결국 애써 잊어왔던 자신들의 어둠을 대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운명의 상처들로 가위눌린 채 지독스런 자기 유폐로 삶을 견뎌온 자들의 자기 조응. 의선의 행방을 찾고 있지만 결국 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자기 어둠의 고통스런 직면.

이청준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자주 사요하던 중층구조가 분절이 비교적 분명한 공간적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한강의 이와 같은 기법은 다분히 공시적인 중층구조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 결을 감춘 한강만의 직조술은 핍진성에 대한 혐의를 떨치기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두드러지는 재능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검은 사슴깊은 땅 속막장 동굴의 암반 사이에서 기어다니며 살고 있다는 이 가상의 동물은 한 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톨이로 여기며 산다지하를 벗어나 하늘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마는 비극적인 운명의 짐승. 어둠 속에서 죽고마는 검은 사슴의 운명처럼 제 각각의 상처는 결국 앓고 있는 저마다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 그럼에도불구하고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의선, 인영, 명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고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명윤의 열병처럼, 인영의 기차사고로 인한 부상처럼 스스로 앓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 삶의 상처들이 존재의 근원의 그것이라면 그것의 치유 역시 자신말고는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깨달음의 중심에 검은 사슴의 치유가 놓인다.


최근 발간된 내 여자의 열매도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상처 속에서 앓고 있는 영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속울음을 울거나 옷을 벗고 대로를 횡단하는 광기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거칠게 단순화시킨다면, 검은 사슴에서 발견했던 치유의 시작이 그 상처와 맞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처의 치유에 성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오히려 이제 한강의 치유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것은 그동안의 상처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제는 각자의 존재론적인 상처가 차이로 드러나고 그것이 어긋남으로써 다시 상처가 된다는 영역까지 그의 상처와 치유가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평생을 외롭게 산 사내는 번잡스럽고 화려한 지역의 아파트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어하고, ‘평생을 정착하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아내의 단절을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려낸 <내 여자의 열매>. 몸의 멍으로 시작하여 끝내 푸른 식물로 변해버린 아내. 멍으로 수렴되는 아내의 외로움, 외롭기에 안정된 가정을 원하는 남편이 정작 자신의 집을 구리고 나서는 아내가 푸른 식물로 변해가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섬득한 단절, 다시는 자신의 힘으로 떠날 수 없는 식물이 되고나서야 아내를 돌아보는 남편의 어리석은 외로움.

이와 같은 어긋남은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어긋날 대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폐적인 자기 유폐에서 벗어난 인물상이라는 점과 그 어긋남을 통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다시 자기 내부를 비움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이 작품의 성과 중에 하나다.

한강은 집요하게 흐르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녀의 생물학적 연령이나 데뷔년도가 작품을 판단하는데 소용이 닿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집요함은 존재론적인 상처들을 계속 천착하고 있다는 의미 외에도 새로운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또다른 방식으로 그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부박하고 혼돈만 가중시키는 몇몇 소설과 대비되어 매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강은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동반되지 않는 즐거움은 결코 낙()에 이르지 못할 쾌()일 뿐이라고 소리없이 강변하고 있다.

󰡔BOOKPARK󰡕 200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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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주체로부터 벗어나기

서동욱,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볼 때 관객들은 그 이야기 끝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교적 느긋한 기분이 되어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은 흥미로운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명쾌하게 구분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물은 관객들이 원하는 세계로 성공적으로 편입되며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인어공주는 인간의 세계로, 야수는 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인간의 세계로, 타잔은 인간적인 정의의 세계로 등등. 이 분명한 지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동일성에 대한 맹목이다. 맹목의 자세에는 반성이 없다. 인어공주에게 바다는 지상의 삶을 지속적으로 견제해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분명하게 버려야될 공간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다에서의 삶이 지극히 행복하게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버려야만 하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왕자가 사는 지상의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인어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과감히 포기할 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견고한 동일성의 신화 속에서 심리적인 안정과 평안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근대적 사유의 양수이기 때문이다. ‘차이다름이 아니며, ‘타자또 다른 주체가 아니라 배제할 것인지 혹은 동화시킬 것인지 결정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이와 같은 결정의 한 가운데 근대적 주체가 있다. 차이와 타자; 현대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은 그러한 근대적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사유들의 공통된 정신을 살피고 있다. 그것을 저자는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근대적 주체성은 표상(表象) 활동을 그 본성으로 한다고 했다. 표상은 세계를 주체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서로 차이를 지니는 다양한 것들을 틀어쥐고 동일성의 지평으로 편입시키는 활동이며, 동시에 타자를 늘 지금으로 현재 하는 의식의 현전에 종속시키는 활동이다. 따라서 타자들은 오로지 표상활동의 매개를 거쳐 주체의 지평 위에 종속될 때에만 존립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비표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프로이트, 라캉 등의 이론뿐만 아니라 프루스트, 카프카, 미셸 투르니에, 쿤데라의 작품 등을 통해 비표상적 사유의 다양한 과점을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우선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교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와 범위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발을 무겁게 하는 각주의 나열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 레비나스, 칸트, 샤르트르, 프르스트 독법의 내공과 탄탄한 소화력에 기초한 것이다. 생경한 용어로 윽박지르듯 압도하지 않는 저자의 어법은 전문적인 글을 쓰는 다른 이들도 눈 여겨 보아야할 부분이다.

이 책의 중심에 있는 들뢰즈는 최근 소장 연구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들뢰즈의 사상이 지니는 주변 장르에 대한 유연함이 매력적인 유인요소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국내 수용에 있어서 일반 대중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 그 용어의 문제였다. 그의 중심어인 아이주체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등의 용어들은 서양철학 전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명쾌한 정리는 여타의 들뢰즈 관련 독서에 있어서 견실한 주춧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다소의 지적 교양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느긋한 자세의 독법이 필요한 책이다. 다른 들뢰즈 관련 책들을 볼 때 옆에 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마음으로 읽을 대 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글쓰기에 최종판이 없듯이, 책읽기에도 끝이 없음을 되새기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대구대신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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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순결과 산문의 휘황함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훈은 깡마른 샤먼이다. 시리도록 파랗게 벼린 언어의 작두 위에서 그는 뛰어 오르고 올라간 거리만큼 내려서며 굿을 벌인다. 은유의 아름다움과 현상학적 환원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레토릭은 완과 급을 조절하며 읽는 이를 몰아쳐간다. 그의 단호한 어조는 문장의 단단한 뼈가되고 힘 있는 근육이 되어 신화 속의 사내들을 불러내곤 한다. 그러면 그의 글은 지금 이곳의 사내들이 잃고 있는 억센 완력과 뜨거운 생명력으로 난장이 되고 만다. 그 난장의 생명은 산문의 휘황함으로 빛나는데, 그 빛의 중심에 깡마른 샤먼 김훈이 있다.


산문이 살아 있는 시대는 아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다. 산문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과 팽팽한 긴장으로 자신의 몫을 지켜가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가장 뼈아픈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산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성의 사유나 세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정신을 글에서 잃었다. 그러한 산문이 김훈의 글쓰기를 통하여 복원되고 있다.

김훈의 글쓰기는 특정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종과 횡으로 달린다.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미학적인 혜안이 빛나던 문학평론은 물론 두 개의 은륜 사이를 달리며 몸으로 써내려간 여행 산문과 현실에 대한 물러서지 않는 정신을 촌철살인의 언설로 일구어낸 세설(世說) 그리고 남성서사의 예를 보여주는 소설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지난 겨울부터 필자의 책상에 두고 보는 것이 자전거 여행칼의 노래그리고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이다. 세 권 모두 김훈 산문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특히 칼의 노래는 신열을 앓듯이 읽히는 작품이다.

김훈의칼의 노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즐길 수 있다. 하나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내면을 엿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훈의 산문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칼의 노래는 이광수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나 박정희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탐색하고 있다. 이순신을 이용한 민족주의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 재생산은 지금도 정치권력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중대 결심을 앞두고 현충사를 방문하거나, 서울의 핵심부인 세종로를 압도하고 있는 이순신의 동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신화화가 인간 이순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그 결과 그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할지는 몰라도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 만날 수는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칼의 노래는 탁월하다. 백의종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왕과 권력층의 견제에 의한 억울한 옥살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장으로 향해야하는 아들의 슬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거대한 적의 수군과 맞서야하는 절망감, 부하들을 먹이지 못하는 지휘관의 무력감, 온 천지에 널린 주검과 굶주림과 적의 칼날 사이에서 대면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이순신을 작가는 복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와 시적이면서도 단호한 작가의 호흡을 통해 읽는 이를 굶주림과 피비린내가 주검으로 넘실대는 남해의 전장을 끌고 들어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의 노래의 또 다른 미덕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그토록 끔직하고 섬뜩한 현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미학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산문 곳곳에서 보이던 향기롭고 찬란한 통찰들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을 얻고, 이순신의 사적(史籍)으로 뼈대를 세워 살아난 것이 바로 칼의 노래인 것이다.

칼의 노래로 이순신은 자유로워졌다. 독재자의 지배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역사속의 인물로 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김훈의 산문정신을 통해서였다. 오늘 우린 칼의 노래에서 단순하고 순결했던 한 무장의 칼과 단호하고 꼿꼿한 한 산문가의 고뇌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창원대신문> 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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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輪의 길, 산문의

김훈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람이 앞서지 못하는 바퀴와 사람을 앞설 수 없는 바퀴 사이에서 마른 바람을 맞으며 사내가 달린다. 사내는 자신의 자전거를 풍륜(風輪)이라고 부른다. 사내의 풍륜은 세상의 길을 온몸으로 감으며 오르고 감은 길만큼 풀어주며 내려온다. 산이 불러 산까지 데리고 간 길을 내려놓고 어둠을 싣고 데려오고, 어둠을 싣고 가는 날에는 전조등 밝혀 길을 데리고 내려오는 그의 풍륜은 때때로 바다까지 흘러가서 넓고 붉게 물든 노을과 길고 검게 느린 그림자 사이에 서 있곤 한다. 그곳에서 사내는 깊이 밀고 멀리 당기는서해의 관능이나 날카롭고 명징하고 눈부시게일출을 향해 달리는 동해에 이르는 강들의 고단함을 본다. ‘소금이 오는 옥구 염전에서 사내는 짜고 향기로운 소금을 보고, 제 몸을 태워 날아가는 만경강 하구의 도요새에게서 필멸(必滅)의 장엄함을 본다.


사내의 풍륜은 본다’. 흐르면서 본다. 산을 보고 들을 보고 바다와 강을 보며 하늘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척박한 풍요를 수납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생의 시간들을 본다. 사내가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들으면 말하게 되고 말하면 논()하게 되는 까닭이다. 논하면 시비에 매이고 시비에 매이면 떠난 길이 단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길,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밖을 봄으로써 안을 비추고, 안을 비춤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며 깊어지는 이치를 사내의 풍륜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사내의 풍륜은 뒤차를 인도하기 위해 후미 등을 켜고 달리는 것이 아니며 앞차와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전조등을 켜는 것도 아니다. 사내의 코앞을 동그랗게 비추어 선도(先導)해주는 전조등이 사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라면, 빨갛게 불든 후미 등은 지나온 길의 증거다. 그래서 어둠이 내린 길에서 사내의 풍륜은 의지증거사이를 달린다. 하여 사내의 풍륜이 보는 것은 의지와 증거 사이에 머문다.

달리던 바람이 멎고 풍륜이 자는 밤이면 사내는 원고지에 꾹꾹 눌러 손으로 글을 빚는다. 사내는 풍륜 아래서 풍륜 위의 일들을 기록하고 증언한다. 그래서 사내의 글에서 풍륜이 본 것과 사내가 본 것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 거북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나아가는 여수 돌산 향일암에서 서울의 여의도까지 서른 곳이다. 풍륜이 보고 달려온 것들은 사내의 레토릭을 넘지 못하고 사내의 레토릭은 풍륜을 앞서 달리지 않는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 들이나 바다, 그 어느 곳 생의 시간들이 다녀간 자리에는 사연이 길을 만들고 길은 내력을 들려주는데, 그곳은 듣는 이가 없어 적막하다. 적막이 만드는 깊이 마다 시간이 고이고 고인 시간에는 사내가 데려간 속기(俗氣)가 부끄럽게 낯을 씻는다. 씻은 낯을 바람에 말리며 사내의 풍륜은 먼지 낀 세상으로 내려오고, 내려온 거리만큼 다시 안개 낀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사내의 병은 불치(不治).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은 경이롭다. 우선 상업자본에 의해 공공연하게 압도되어 있는 중요 일간지에서 이와 같은 미학적이고 그래서 별로 쓸모가 없는(?) 글을 서른 회나 연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욱 필자를 경악케 하는 것은 8개월 만에 이 책이 10쇄를 찍어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해리포터처럼 환타지의 몰입 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교양으로 위협하지 않는다.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김훈은 조앤 K 롤링이거나 유홍준이 아니다. 물론 그는 김진명이거나 신경숙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대중적인 흡입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 있는 시퍼렇게 살아서 뛰어오를 것 같은 문장과 삶의 한복판을 꿰뚫는 것 같은 섬뜩한 레토릭에서 그 까닭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나 수사의 힘만으로 이 낯선 책의 흡입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간지에 연재되면서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었고, 최근 큼직큼직한 양서와 베스트셀러를 외줄을 타 듯 잘 내고 있는 출판사 마케팅의 힘이라기에도 무엇인가 모자란다. 어쩌면 자전거 여행의 성공은 산문의 힘, 그 근력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의 부활이었으면 좋겠다.

산문이 살아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소설이 산문 영역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불행한 일이다. 소설은 산문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그것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또 얼마나 자명한가? 소설의 가공할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또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 산문 영역에서 소설의 압도는 다른 형태의 산문들, 즉 곡진한 생활 글이라든가, 날 선 감각의 기행문이라든가, 읽는 이에게 온 마음을 전하는 편지글이라든가, 미더운 주장의 논설이라든가 그 종류는 굳이 한문학의 수다한 종류의 그것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다양한 산문들이 살아야 글이 제 몫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탐구와 모색, 삶의 비의(秘意)를 캐려는 부단한 시도,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 즉 소위 산문정신의 구현을 소설로 국한하는 것은 아무래도 편협하다. 이러한 편협함은 글을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러한 글을 읽는 행위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지적 허영이나 호사스런 기호(嗜好) 정도로 전락시켜 버렸다. 산문이 읽히지 않는데 그보다 행간이 넓은 시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글의 호위를 받지 못하고 걷는 삶의 길들은 얼마나 무모하고 불운한 것이냐?

다시 자전거 기행으로 돌아오자. 이 책이 지닌 몇 가지 중요한 의의는 남성적 글쓰기의 복원, 산문의 현대적 형태 모색, 레토릭을 통한 미적체험의 가능성을 증거하고, 무엇보다 그러한 다양한 시도가 대중성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2001년 동인문학상 작품인 칼의 노래에서도 잘 나타난 바와 같이 김훈 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어법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덕은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는 프롤로그의 시작에서부터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며,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라는 프롤로그의 마지막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숨 막히는 긴장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곳곳에서 왜 길이 도()가 될 수밖에 없는지 시나브로 드러내고 있다. 길은 인간의 것이기에 마을을 떠나 마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그의 인식은 결국 그가 그 길을 끝없이 달려야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는 실존적 차원의 인식과 의지이며,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는 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길에 대한 신뢰는 유한한 삶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대가 적막한 산야와 처연한 풍광사이로 그의 풍륜을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풍륜이 간다. 이 천박하고 척박한 시대에 붉은 먼지를 일으키며 아직은 안개 낀 들과 강과 바다를 달린다. 은빛 바퀴에서는 그의 수사(修辭)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빛나고, 그 빛은 차가운 금속의 그것이 아니라 풍륜이 보고 달리고 있는 산야와 바다의 것이다. 그래서 풍륜의 바퀴는 반사하지 않고 삼투한다. 금속의 삼투, 삼투의 절묘한 균형, 그 중심에 이 책이 놓인다. 원고지 칸칸이 그가 덖고 있는 글에서 피어나는 향은 물 없이도 그 쌉쌀한 맛을 우려낼 것만 같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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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의 지독한 스토리텔링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골프 황제가 섹스머신이 되었다. 골프 황제의 신화를 만들던 대중매체들은 그의 숨겨놓은 여자가 몇 명인지, 라스베가스 VIP룸에서 받았다던 서비스가 무엇인지, 그의 아내가 받게 될 위자료는 얼마인지로 차갑고 단호하게 관심을 돌렸다. 타이거 우즈는 사라지고 그에 관한 스토리텔링만 남았다. 나는 우즈의 일을 통해 일상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이며 환경이란 얼마나 처절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인지혹은 ‘1인자의 고독또는 혼외정사의 비윤리성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이거 우즈의 스캔들이 지독한 스토리텔링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story)+말하기(tell)+향유하기(ing)의 합성어인 스토리텔링은 문화는 물론 사회 전반의 화두다. 스토리텔링의 전면화는 하늘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고갈의식과 뉴미디어의 눈부신 발전에 따른 말하기 방식의 다양화통합화 그리고 감성적 소통과 체험을 전제로 한 재미의 추구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스토리텔링은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우즈의 스캔들은 스토리텔링의 최적화 요소를 지녔다. ‘모범적인 스포츠 스타의 불륜 행각은 스토리로서 뿐만 아니라 기획의 하이컨셉으로서 매우 매력적인 소재다. 골프 황제, 선정적이고 은밀한 직업의 미녀들, 스타의 은밀한 사생활,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 등은 그것을 더욱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고, 수준과 상관없이 전방위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와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내는 매스 미디어의 활약은 가공할만한 즐거움을 생산한다. 그런데 이 지독한 스토리텔링 앞에서 왜 우리는 즐겁지 않은가?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얼마나 향유를 활성화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향유란 향유자가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향유의 대상이 즐길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즈의 이야기는 차라리 두려움이다. 신화가 되길 원했던 신뢰할만한 스포츠 스타의 몰락과 자본 앞에서 이어지는 폭로와 매스컴의 확대재생산 구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는 불신의 흔적들. 그것들은 모두 무엇 하나 즐거울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밥이 되지는 않지만 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스토리텔링은 즐거움이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의 즐거움 향유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하는 체험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더욱 간절한 계절이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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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봄이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올 봄은 참 더디게 온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의 영문 제목처럼 <April Snow>가 내릴 정도니 달력도 무색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성급한 꽃잎은 벌써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학생들의 연구실 방문이 잦다. 스스럼없이 연구실을 찾아오는 제자들이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이번 방문은 조금 무겁고 진지하다. 찾아오는 4학년들 의 손에 자기소개서가 창백하게 들려 있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질문의 성격과 요구가 다르다보니 자기들이 써놓은 내용은 선생들에게 점검 받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어 공인점수는 이제 별다른 차별화 요소가 되지 못하는지 어학연수는 필수이고, 국내는 물론 해외봉사 실적까지 은연중에 요구하는 실정이다 보니 학생들은 늘 갖춘 조건보다 갖추어야 할 조건에 늘 쫓기게 된다. 학생이 들고 온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뒤에 잔뜩 붙어 있는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보다가 그의 쫓기듯 달려왔을 대학시절이 문득 안타까워졌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학교에서 과제와 팀 프로젝트로 밤샘을 하면서 집안 사정으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했던 그 학생의 일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안다고 했는데, 외국어 점수와 각종 자격증은 물론 국내외 봉사활동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그의 자기소개서에는 정작 보여야할 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도 둘째도 중간고사란다. 첫째는 학원 보강으로 늦은 시간 학원이란다. 연구실에서 들어가면서 데리러 갔더니 아직 수업중이라고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 백화점이 있고 주변에 상가와 의심스러운 술집들이 밀집된 지역에 아이의 학원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부모들이 차 안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11시가 다 되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내려왔다. 아직 중학교 2학년인 아이의 핼쑥한 볼이 안쓰러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에게 부모의 생각대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그 경쟁을 내려놓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면서 내내 복잡했던 것은 늦은 시간 학원 앞 도로만이 아니었다.

끝없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는 대학생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쟁 안에서 갈수록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아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없는 자기 소개서와 내적 성장 없는 학습으로 우린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제자와 아이에게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과 부모의 조언보다는 아이폰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어플리케이션이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된 지금 이곳에서 우린 과연 삶의 봄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봄은 생명이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의미고,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변화가 생명의 중심인 것은 지금 이곳의 무엇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다. 그저 지금보다는 내일이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좀더 알 찬 삶을 살아내려는 옹골찬 의지가 변화다. 진정한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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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배려의 아름다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무상급식 문제로 정치권이 뜨겁다. 전면적 무상급식이냐 선별적 무상급식이냐를 놓고 지방선거와 연계하여 정치권은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이해할만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설득과정이 아니라 쌍방 모두 다분히 포퓰리즘적인 선동이라는 의구를 떨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필자는 무엇이 옳다고 판단하거나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솔직하지 못한 논란 속에서 말은 못하지만 심하게 상처받고 있을 아이들에 대한 염려는 떨치기 어렵다.

1970년대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때에는 학기초면 선배들의 교과서를 물려받을 학생들 신청을 받곤 하였다. 교과서 대금이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는데 선뜻 손을 드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 그 수요를 조사하면서 모두들 눈을 감으라고 하시던 장면이다. 손을 드는 아이가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봐 조심하시던 선생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은 아마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서였을 것이다.

언젠가 선배에게 어떻게 아이를 낳아 기르며 박사과정 공부를 할 수 있었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별다른 직업 없이 공부를 하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던 시절, 그 길을 몇 년 먼저 간 선배에게 물은 것이다. 그 선배는 날마다가 기적이었다고 씁쓸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었다. 박사를 마칠 무렵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하루하루가 참 벅찼던 시절, 어느 날인가 은사님께서 차를 가지고 댁으로 오라고 하셨다. 은사님은 당신을 어느 곳까지 태워다달라고 하셨다. 평소 제자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 의아한 일이었다. 그런데 은사님은 가시다말고 대형마트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가트를 두 개 끌고 오라고 하시고는 분유와 기저귀를 두 가트에 가득 담아주셨다. 넉넉하지는 않았도 아이의 분유와 기저귀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물이 핑 돌정도로 감사로 벅차오르던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불안하고 힘겨운 시간을 위로해주시기 위해 일부러 부르시고서는, 제자가 부담을 느낄까봐 당신을 어딘가로 태워다달라고 말씀하시던 은사님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은퇴하시고 나서도 그 해에 가장 연구업적이 뛰어나 제자에게 적지 않은 돈과 족자를 내리시고는 송구스러워할 제자에게 글을 주었으니 글값으로 과일을 사오라고 하시던 선생님. 당신이 200만원을 상금으로 내리시고 그깟 과일값이 없어서 그리 하셨겠는가?

일본에서는 유치원비를 담당 관청으로 내게 한다고 한다. 저소득층의 유치원비를 나라에서 지급하는데, 유치원에서 유치원비를 직접 거두면 누가 저소득층인지 알게 될 터이고, 그것이 혹시라도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금융 위기 이후로 좀처럼 경제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무상급식이 문제 인 것은 무상급식의 대상이 될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배려를 누가 뭐라겠는가? 다만, 그 배려의 과정이 좀 더 은근하고 조심스럽기를 바랄 뿐이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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