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는 몸과 볼 수 있는 몸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몸은 안이며 밖입니다.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부분이며 동시에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는 것을 안으로 감쌀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몸은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갑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몸을 중심으로 세계와 얼마나 개방적으로 소통할 수 있느냐의 문제지, 몸을 얼마나 드러내고 얼마나 감추었느냐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노출은 물론, 그러한 노출이 스스로의 적극적인 표현이라는 말도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 스스로 욕망을 다스려가며 가꾼 몸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몸을 가꾸거나 몸을 드러내 것이 속이 텅 비었다거나 음란한 생각을 하는 탓이라는 것도 억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과 몸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억압과 편견은 언어를 내세워 견고해지고, 견고해진 만큼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얼굴 값한다'는 말만 보아도 얼굴이 예쁘면 반드시 그 얼굴로 인해 분란이 생긴다는 의미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정신 등으로 구분하고, 후자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숨은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최근 남자의 몸에 대한 관심이 뜨겁기만 합니다. 섹시한 모드의 남자들이 대중매체의 전면에 나서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몸에 대한 남성들의 관심과 그것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시선이 너무도 진지합니다. 그것은 단지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고 덜 푸는 문제가 아니라 남자의 몸이 '보여지는 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 통신사 광고에 등장하는 에릭의 몸은 주목할 만합니다. 수려한 용모와 자유로운 복장, 어디에도 구애됨 없이 종화 횡으로 누비며 춤과 동작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그의 탄력적인 춤은 매혹적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에릭의 몸은 '지금 이곳'의 거침없는 욕망과 자유로워진 남자의 몸을 보여줍니다. <불새>에서 보여주었던 흔들리는 눈을 지닌 '낭만적인 마초'의 모습까지 덧 씌워져서 에릭이라는 코드는 풍성해질 뿐입니다.

누군들 성적 매력을 꿈꾸던 때가 없었겠습니까? 물론 저도 있었지요. 파르스름하게 깎은 턱수염이 매력적이라고 해서 수염도 별로 나지 않는 제가 혹시라도 자주 깎으면 많이 자랄까 해서 하루에 서너 번씩 면도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슬픈 일은 그 무렵(중학교 시절로 기억되는데) 같은 원리로 눈썹도 밀면 숯검댕이 눈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죠. 보다 남성적으로 보이겠다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꺾는 바람에 손에 비해 마디가 굵은 손을 갖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섹시함이 내 코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의 성적 매력에 대한 꿈이 제 안에서 깨끗이 비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적 매력을 꿈꾸는 동안은 자신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 때문이겠지요.

며칠 전 놀이공원 야외무대에서 전자바이올리니스트를 보았습니다. 50대쯤으로 돼 보이는 그는 몸에 딱 들어맞는 아래 위 검은 색 옷을 입고 매우 열정적인 무대를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본 것은 그의 흥도 연주곡도 아닌 그의 볼록한 배였습니다. 이것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랫배를 좋아한다던 60년대 김승옥식의 소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볼록한 배의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작은 무대를 탕탕 튀어 오르며 연주하던 그 남자의 당당한 몸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날 제가 본 것을 그가 스스로 장악한 자신의 몸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요? 스스로 자기 몸의 주인이 되고 그것이 자기표현으로 구현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닐까요?

보여주고 볼 수 있을 때 몸은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늘 그렇듯 문제는 보여주는 몸이든 볼 수 있는 몸이든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잇살'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살아온 시간만큼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몸의 흔적들, 그게 '나잇살'일 겝니다. 처녀 같은 60대 할머니의 몸매, 막 제대한 군인 같은 70대 할아버지의 피부는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자신이 데려온 나이만큼의 시간의 흔적들이 온몸에 친숙하게 남아있고, 그만큼의 연륜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삶의 체취가 아름답습니다. 저는 희망합니다. 죽은 날까지 성적매력을 발산할 수 있기를. 그리고 저는 꿈꿉니다. 성적 매력을 통해 제 자신은 물론 세계와도 끊임없이 진솔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2004년 《오픈아이》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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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눈동자를 그리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축제는 잔치가 아닙니다. 축제는 잔치와 달라서 주인과 손님의 구분이 없고, 배우와 관객의 가름이 없이 함께 어우러져 노는 것입니다. 귀신의 한을 풀게 해주고 지켜보던 사람들과 음식과 술을 나누던 난장(亂場)이 우리 축제의 원형이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하여 축제의 성공 여부는 다양한 양질의 프로그램만큼이나 참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축제, 사람이 있어도 구경만 하는 축제는 축제가 아니라 주인들만의 잔치일 뿐입니다.

최근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일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허리우드적인 어법이나 유럽영화의 문법을 거부하고 강렬한 자신만의 미장센을 구축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고, 오만한 그들만의 축제에서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중앙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여기에 정규교육은 중학교 중퇴,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음, 5억 원 내외(빈집은 12억 원)의 저예산으로 8년 동안 11편의 영화제작, 유럽에서 가장 환영받는 한국 감독 등의 이야기가 덧붙여지면 김기덕의 신화는 한층 더 견고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감독상을 수상했던 베를린과 베니스의 영화제는 우리에게 온전한 축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연이은 그의 수상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의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호응이며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밖에서도 그렇다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밖에서는 그저 그렇더라는 평가는 문화적 차이 운운하며 쉽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도 그렇게 의연하게 반응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에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읽기와 평가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참여해서 즐기지 못하면서 축제의 일원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때문에 김기덕의 영광은 즐겁고 자랑스럽지만 우울한 단절입니다.

김기덕의 단절은 제도권 언론과의 불화도 한 몫을 했고, 그의 강렬한 영상과 문제의식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 관객의 읽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품을 찾아서 평가해주는 것이 고마운 일만이 아닌 것은 우리 가족 식탁을 보며 옆집 아저씨가 이것이 맛있으니 먹어보라고 권하는 것이 고마운 일이 아닌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영국이나 호주 등에서 활성화 되었다는 미디어 읽기(literacy)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의미에서 주체적인 읽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과 대화하고, 그 대화를 바탕으로 작품의 의미와 문제를 고민하는 일련의 창조적인 행위 말입니다.

제대로 읽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재하고, 독법을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어디 김기덕의 영화뿐이겠습니까?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수많은 논란들을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요? 더구나 가장 신뢰할만한 정보제공자인 언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이곳에서, 우리에게 과연 우리의 세계를 읽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기나 한 것인지 우울하게 되묻고 싶습니다. 이 지독한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 얻은 정보를 비판적인 자세로 정치하게 읽어내려는 노력,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세계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김기덕 감독이 수상식에서 보여주었다던 퍼포먼스를 생각합니다. 그가 보여준 손바닥의 눈동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빈집>을 본 사람은 알 것이라고 했지만, 불행히도 저와 여러분은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근거 없는 유추에 기댈 수밖에요. 아니 우리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보면 어떨까요? 관객 모두가 스스로의 눈으로 읽어주길 바라는 메시지였다고, 특히 그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들을 우리에게 간절하게 하고 싶은 말로서 말입니다.

저는 삶이 축제가 되길 희망합니다. 저는 앞에서 축제는 구분 없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서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면 사는 일에서 너와 나의 경계는 무의미합니다.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보다 온전한 자신의 눈을 갖는 것입니다. 김기덕이 손바닥에 그려서라도 소통하고 싶어 했던 그 온전히 자신을 세울 수 있는 눈 말입니다.

2004년 《오픈아이》 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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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과 이수영, 그리고 성매매 특별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수 이수영이 돌아왔습니다. 관심을 노래를 압도할만한 화려한 댄스나 미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그녀가 6<THE COLORS OF MY LIFE >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6집이지만 이미 9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있는 그녀의 노래나 음반의 질에 대해서는 평가할만한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저를 포함한 제 또래의 많은 이들 뿐만 아니라 제 아래로 위로, , 음반시장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이들이 그녀의 노래에 매료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호흡보다 과하게 빠른 댄스 음악, 성찰이 아닌 분출로 일관하는 랩음악, 자폐적인 사랑을 넘어서지 못하는 발라드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이수영의 음악은 즐거운 충격이었습니다. 가냘프고 애절하면서도 강한 호소력은 소녀 가장, 부분적인 청각 상실, 효리의 친구 등의 소문과 어우러져 이수영만의 아우라를 만들어 낸 것이겠죠.

가수 이수영이 돌아왔습니다. <편지>, 어니언스, 원조 꽃미남, <하얀 면사포>, <숙녀> 등으로 이어지는 이수영에 대한 자유연상은 접어두고서라도, 새로운 앨범을 조심스럽게 내보이며 그가 보여준 미소는 지난시절을 훌쩍 뛰어 넘고 있었습니다. 소박한 통기타 반주와 멋쩍은 듯 보여주는 작은 웃음 그리고 진솔한 노랫말 등은 지난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놓을 수 없는 스타의 아우라였습니다. 어니언스하면 양파링을 떠올리고, 미사리에 모여 있는 라이브 카페는 그저 바람난 중년들의 모임 장소쯤으로 치부하는 젊은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겠지만요.

2004923일은 기억할만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 매매 특별법이 실행된 날이니까요. 쉽게 23일이 기억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는 없는 것은 그만큼 성매매 산업의 규모와 뿌리가 만만한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턱없이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하여 제발 그날이 기억할만한 날이 될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말보다 왜 우리는 성매매에 대해서 너그러운가 하는 것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젊은 사람들이야 철이 없어서, 젊은 몸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런다고 치부해도, 그만한 딸을 둔 사람들까지 왜 그렇게 성매매에 대해서는 너그러운가 하는 것이지요. 성급한 일반화의 혐의를 무릅쓰고, 그것은 중년의 문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부모와 자식 간에 함께 나눌 수 있는 문화, 나이 들어서도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손아래 사람들이 보아도 유쾌할 수 있는 문화, 무엇보다 세대나 친소관계를 넘어설 수 있고 쉽게 하나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 그것의 부재는 우리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입니다. 하여 문화의 부재는 삶의 파행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 그 가운데 지금 이곳이 있습니다.

며칠 전 제자가 아주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게 샤갈 전시회 초대권을 내밀었습니다.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시간이 없는데하다가 그냥 고맙게 받았습니다. 언젠들 우리 삶에서 시간이 남을 때가 있을까,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일부러 남겨서라도 찾아보고 즐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감히 주장하자면, 댄스 음악과 비주얼한 가수들만 판친다고 탓하지 말고, 젊은이들의 음악도 들어도 보고, 아니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르,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도 적극적으로 구입함으로 해서 자신들만의 문화시장을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집창촌이나 룸싸롱에서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스스로 당당함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아들 생일날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나 랩을 보여주는 아버지, 아버지 생신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아버지 젊은 시절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대는 아들의 모습. 이것이 쑥스럽고 작위적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들과 어버지 세대의 문화가 모두 풍성하고 자유롭게 소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게 이수영은 <하얀 면사포><휠릴리> 사이에 있습니다.

이번 가을, 소리바다에서 다운받지 말고, 벅스뮤직에서 내려 듣지 말고, 이수영의 앨범을 구입해서 차에 걸어야겠습니다. 작은 레코드점에 찾아가서 아주 천천히 앨범을 뒤적이며, 주인이 녹여놓은 커피향의 호사도 누리며 이수영의 앨범을 사야겠습니다. 혹여 더 먼 감성이 살아나서 어니언스 이수영의 앨범을 사게 되더라도, 그만으로 넉넉해질 것 같습니다. 유난히도 강의가 많은 이번 학기, 여기저기로 차를 몰면서 그녀의 노래 안에서라고 가슴 뛰던 시절의 기억들을 만나보아야겠습니다.

2004년 《오픈아이》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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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등급제와 블랑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얼마 전 고교 등급제에 관한 시사프로그램을 보다가 아내와 다툴 뻔했습니다. 아내의 주장은 현실적인 실력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그것이 비록 부모의 경제력에 기반 한 것이라고 해도, 투자한 만큼 얻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고교등급제가 자유경쟁의 원리라고 하는데,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선배들의 소위 일류대학 진학률로 평가되는 것이 어떻게 자유경쟁이냐고 저는 되물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거주지가 결정되는 현실에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서 이미 상급학교 선택의 폭이 결정된다면, 부모의 계급이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되는 고착된 계급사회로 가자는 것이냐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아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문득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아홉 살 첫째와 다섯 살 둘째가 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째는 공부 욕심이 있어서, 영어, 피아노, 수학, 미술, 작문 등 모든 것을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둘째도 제 언니를 보아서인지 자기도 영어 공부하겠다고 우겨서 영어와 한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다고 모두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는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제 수입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월말이 되면 아내는 늘 고민에 빠집니다. 어떤 것을 끊어야 하나, 이 과목은 어디가 잘 가르치나 등등 아내의 가계부에는 아이들의 사교육이 늘 격렬한 논쟁과 갈등입니다. 뭐 그런 것으로 고민하느냐, 그냥 놀게 해라, 혼자서 잘하지 않느냐고 제가 이야기라도 꺼낼라치면 아내는 제가 세상 물정 모른다고 아예 말문을 닫습니다. 늘 부족한 수입으로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가 원하는 공부를 어떻게 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 아내에게, 고교등급제는 아쉬움과 자부심 사이에 있습니다.

블랑카가 파키스탄 외국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오늘 아침 신문 기사를 읽고 나서입니다. 기사에 의하면, 고용주가 파키스탄 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폭소클럽>의 블랑카 코너의 폐지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 사회의 치부를 블랑카는 서툴고 어눌하지만 날카롭게 지적하던 코너가 파키스탄 노동자들의 국내 취업을 막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저는 이 코너를 보면서 최근 우리 코미디가 개인기의 무의미한 반복이나 텅 빈 언어유희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 코너는 사장님 나빠요!”를 외치며 우리에게 아픈 성찰을 요구하는 비수를 날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도 매우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희화화되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린데, 이 땅의 소수자이며 약자인 파키스탄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것에 대한 피해를 오롯이 받고 있었다는 엄혹한 현실의 폭력 앞에 다시 한 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키겠다는 부모나, 좀 더 많은 학생들을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려는 고등학교나, 좀 더 실력 있는 학생을 뽑으려는 대학의 모습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평가가 학생들의 실력에 따른 것이어야 하며, 평가방법도 좀 더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선배나 부모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실력에 따른 평가, 계량화하기 위한 필기시험을 넘어서는 다양한 질적 성취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쟁에서 이긴 자나 진 자 모두가 결과에 납득할 수 있는 체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의미에서 교육은 현재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투자입니다. 현실 변화의 가능성을 교육이 담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른 형태의 신분제일 뿐입니다. 또한 경쟁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폐된 그러나 치명적인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현실이라면 우리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자라는 <황산벌>의 논리,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결과중심적인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우울한 전망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고교 등급제에 반대합니다. 그것 말고도 이미 불평등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며, 교육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우리네 꿈을 누구도 뺏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주장합니다. 블랑카 코너를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블랑카를 위시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되먹지 못한 우월감에 빠져있는, 노동자를 도구로만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의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아내는 두 아이를 식탁으로 불러 모을 것입니다. 아이 둘은 제 키에 맞지 앉는 식탁 의자에 하나씩 앉아서 어미가 가르쳐주는 공부를 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는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지만, 아내에게 공부는 변화 가능성이며 꿈이기 때문입니다. 주방 형광등과 식탁의 백열등을 모두 켜고 아내와 아이들은 또 그렇게 식탁에서 꿈을 꿀 것입니다. 아직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의 꿈은 무죄여야 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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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즐거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을 축제가 한창입니다. 여름지은 것들을 거두어들이는 가을, 들과 산은 물론 하늘과 바람조차 풍요로운 이 계절에 사람들은 축제를 꿈꿉니다. 넉넉한 먹거리와 온후한 계절의 축복 앞에서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 억눌렀던 본성들을 해방시켜 즐기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축제는 일상의 전복이라고 합니다. 일상은 쾌락원칙을 따르고 싶은 우리의 본성을 철저하게 억압하며 현실원칙에 충실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한 현실원칙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쾌락원칙의 분출을 허용함으로써 일상의 나를 일시적으로 죽이면서 축제는 시작합니다. 축제는 인간적 본성을 극대화하고 유희적 기능을 강화 기능’()종교적 의미를 바탕으로 하는 제의적 기능’()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참여와 참여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공동체 의식이 생성되고 고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희는 다른 사람들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고, 제의적 기능의 핵심은 성스런 존재와의 의사소통이라는 점에서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점 종교적 색채가 탈락되면서 제의적 기능이 축소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축제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며 자유롭게 상호 소통하는 일체의 행위와 과정을 의미하게 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이 축제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가장 격렬했던 민주화 시기였던 1980년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축제를 연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말하실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축제가 본시 해방적 기능을 지녔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그 때의 축제는 좀 더 열정적이고 격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최와 참가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크게 하나가 되는(大同)의 장만은 최소한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축제가 끝나면 학생들에게 축제가 즐거웠냐고 묻습니다.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또 묻습니다. 자네들은 이번 축제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구경꾼을 평가할 뿐 참여하지 못합니다. 참여 없이는 어떤 축제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즐거워지기 위해 너와 내가 무엇인가 준비해야하는 것,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큰 하나를 이루어 가는 것,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재주를 발굴하고 칭송하기 위한 겨룸의 장, 그것이 축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800여개 이상의 축제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축제를 관광 상품화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맥주축제(Oktoberfest)를 통해 뮌헨 시정부는 매해 인구의 5배에 달하는 관광객을 유치함으로써 매해 7000억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고. 군악대페스티벌로 유명한 애딘버리시는 영화, 어린이, , 과학 등 20여종의 축제를 일 년 내내 개최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점 등을 상기할 때, 우리 지자체의 시도가 결코 허황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다, ‘해야만 한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고장의 변별적 특성을 분명하게 파악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축제화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고민은 물론 필수적입니다. 이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어떻게 관객들을 어떻게 축제의 장에 참여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해서 더불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양한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보는 것은 그렇게 희소한 체험이 되지 못합니다. 몸으로 직접 체험하여 스스로 축제의 주체요 주인이 될 때만이 진정한 축제의 체험이 가능하고, 이러한 체험만이 지속적으로 축제의 참여자를 확보하고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뷰놀의 토마토 축제처럼 한 시간 동안 35천명의 참가자가 15만개의 토마토를 터트리며 즐기는 퍼포먼스이거나 859m를 성난 소에 쫓겨 달려야 하는 산 페르민 축제처럼 본능을 극대화시키며 참여를 유도해도 무관합니다. 다만 우리 고유의 정체성과 축제 개최지의 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일수록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축제의 모델로 평가받는 함평 나비축제, 안동 국제 탈춤 페스티벌, 금산 인삼축제 등의 성공 요인의 핵심은 개최지의 지역적 특성을 특화시켰고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람객들의 참가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축제는 잔치가 아닙니다. 잔치가 보여주는 자의 일방적 기획에 따라서 차려진 범위 내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잔치는 보여주는 자와 그것을 보는 자로 나뉘어 보여주는 자가 마련한 잔칫상을 받고 돌아갈 뿐입니다. 여흥이 있다 해도 그것은 베푸는 자가 마련한 범위 내에서의 일이지요. “남의 잔치에 와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한다는 말만 보아도 잔치가 얼마나 보여주는 자의 일방적인 기획인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차려진 술과 음식 그리고 여흥이 푸지고 흥겨울수록 그것은 더욱더 일방적이고 정태적이며 소비적인 수준을 넘어서기 어려운 것입니다. 잔치에는 주인의 목소리 말고 다른 어떤 소리도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축제는 보여주는 자보는 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여 제 각각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소란스럽게 살아있는 공간이 됩니다. 다양한 소리들의 소란과 유쾌한 상대성의 탄력은 창조적인 무질서를 낳습니다. 창조적인 무질서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언어들을 모두 괄호 속에 묶고, 위계나 질서에 대한 일시 정지를 요구하며, 동시에 역동적인 변화와 생성을 유도합니다. 제 각각의 소리로 떠들고 부딪치면서 깨지는 과정에서 변화의 징후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축제의 창조적인 힘을 만날 수 있는 지점입니다.

가을입니다. 곳곳에서 축제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문제는 없는 시간을 내서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즐기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 우리가 참가한 축제가 잔치가 될 수도 있고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 더불어 함께 즐기는 대동의 장이 될 수도 있을 겝니다. 가을이 풍성한 것은 그 중심에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조달> 2004.가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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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삶의 기쁨이야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제는 둘째 생일이었습니다. 형제들이 많았고 넉넉하지 못했던 탓에 그저 아침 따뜻한 미역국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했던 어린시절의 생일을 생각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생일파티를 하는 친구들을 보며 참 쑥 쑥스러운 짓을 하네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연애를 하던 시절에 때마다 선물하는 것이 몹시 어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아침부터 맞춘 떡을 찾아다가 첫째 친구 엄마들과 나누는 모양이었습니다. 둘째 생일이라고 첫째가 친구들에게 알려서 뭐 그래그래 되었답니다. 백설기 한 조각 뜯어 먹고 나왔다가 점심 무렵에 들어가서 떡을 들고 본가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절에 가시고 아버지 혼자 계신데 떡을 드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삼성플라자 플레이 타임에 갔습니다. 아이들을 놀라고 들여놓고 아내와 몇 년 만에 팔짱도 기고, 커피도 마시고, 아이 쇼핑도 했습니다. 두 시간쯤 후에 아이들을 찾아서 피자헛에 가서 피자를 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보아둔 둘째 강아지 인형을 산다고 2001아울렛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고맙답니다. 글쎄, 아이들과 그저 하루 함께 했다는 것이 고맙다는 뜻 같은데, 그 말에 오히려 제가 미안했습니다. 얼마나 가족들과 하는 시간이 없었으면 아내는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요. 집에 있어도 서재에서 대부분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늘 일 때문에 분주하니 저도 모르게 그랬나봅니다.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하고 씻겨주었더니 이내 잠이든 모양입니다.

며칠 전, 오전 강의를 나서는데 아내가 밖에 비가오니 첫째 우산을 가져다주고 나가라고 해서 아이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도 가깝고 강의하러 가는 길이라서 우산을 들고 아이 교실 옆에서 공부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밖에 아이의 신주머니를 찾아서 우산을 넣어두고 왔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무척 좋아했습니다. 녀석의 기쁨이 저를 가르칩니다. 제게 부족한 사랑과 사랑하는 법을.

사는 일이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나이를 세는 일만큼이나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은 양가적 감정인데, 배워야할 것만큼 아직 제가 어설프다는 뜻이고, 또 모르는 그 만큼 새롭게 저를 채워줄 것이 많으니 기쁜 것이겠죠.

둘째는 이제 네 살이 되었습니다. 36개월을 꽉 채우고 녀석은 참 신기하게 조금 어른스러워졌습니다. 목요일에 아내와 아니는 유치원 등록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용변을 혼자서 가리려고 하고 반찬도 이것저것 먹으려 하고, 제 어미가 무엇을 시키면 , 엄마-”라고 제 언니도 쑥스러워서 잘 하지 않는 말을 자주합니다.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제가 쓰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가 전혀 다른 순간에 한방씩 날리기도 합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노트북에 담아두고 자주 꺼내 봅니다. 사진을 보아야 커가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참 부쩍부쩍 큽니다. <조블랙의 사랑>에서 아버지의 말처럼, 저도 녀석들에게 너희는 내 삶의 기쁨이었다고 말하길 소망합니다. 물론 녀석들은 지금도 제게는 삶의 기쁨입니다.(200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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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와 한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둘째의 이가 엉망입니다. 아내나 제가 닦이느라 닦였는데, 아이가 자다가 우유를 먹는 습관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며칠 전 아이 이를 닦이던 아내가 놀라서 가보니 아이 어금니부터 성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치과를 데려가야 한다고 아내와 저 모두 생각을 했지만, 특히 생각하면 즉시 해야 하는 아내의 성격에 미적대는 것을 보면, 아내는 제 논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문제는 제 논문이 몇 개가 연속되는 바람에 아내는 혼자서 아이를 치과에 데려가는 벅찬 일을 감당하기로 했던 모양입니다.

몇 해 전에 첫째의 이 때문에 친구 치과에 데려갔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치료를 잘 참던 첫째가 어금니를 덮어씌울 이를 고르라고 하자 핑크색은 없냐고 해서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는 첫째와 전혀 다릅니다. 첫째의 참을성이 둘째에게 있을 턱이 없으니 아내는 어제 치과 예약을 하고 와서부터 걱정을 했습니다. 아이가 참지 못하면 수면상태에서 치료 받는 것이 있는데, 인근 치과에서 그거 하다가 아이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둥, 아내는 밤새 걱정을 했습니다. 아침에 강의가 있어서 학교에 가서도 저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전화를 했더니 예상했던 대로 울었답니다. 세 명이 달려들어 아이를 잡았으니 잡은 사람이나 잡힌 아이나 모두가 고역이었을 일입니다. 어쨌든 아이는 오늘 두 개의 이를 치료했습니다.

사실 어제 예약을 하러 가서 아이가 입을 잘 벌렸다고 치과에서 장난감 반지를 준 모양입니다. 아니는 그것을 받아 제 언니를 가져다주겠다고 모처럼 가상한 생각을 했다가 오늘 큰 고생을 한 것입니다. 전화에 대고 자기가 얼마나 장한 일을 했는지 아기 소리로 울먹대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어제는 둘째의 첫 선생님이 집에 다녀가셨습니다. 둘째는 35개월인데 나이는 다섯 살입니다. 11월생이라서 억울하게 나이를 먹은 것이죠. 제 언니가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엄마와 매일 저녁 공부를 하는 모습이 부러웠는지 읽지도 못하는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달라고 조르다가 요즘은 제가 지어서 읽고는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도 글을 가르쳐야겠다고 아내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첫째의 일학년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분주하고, 둘째가 첫째만큼 차분하지 못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내가 첫째의 학습지 하나와 미술학원을 정리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명목상으로야 첫째의 영어 학원을 옮기면서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둘째가 내심 걸렸던 모양입니다. 드디어 어제 싱크빅 선생님이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저는 서재에 있었지만 무척 좋은 선생님 같았습니다. 둘째는 매일 첫째의 선생님을 제 선생님이라고 우기더니 정작 제 선생님이 오시니까 부끄러워서 인사도 제대로 못합니다.

이제 둘째도 글을 배우려나 봅니다. 열 칸짜리 노트에 할아버님께 제가 글을 배우던 나이가 둘째보다 어렸을 때였을 텐데,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나는 일은 아마도 글 배우는 일이 우리 성장에 잊기 어려운 기억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저를 그토록 이뻐해주시고 늘 함께 생활했던 할아버님의 음성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글을 배우던 때의 기억은 새로우니 말입니다.

아직 둘째는 치료해야할 이가 남아 있습니다. 한글을 한 자 한 자 익힐 때마다 치료가 진행되고, 혹은 젖니가 빠지고 새 이가 나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녀석이 새벽 3-4시쯤에 일어나 안방으로 건너와 문을 열고 엄마 나가서 자자하고 아내를 거실로 데리고 나가는 일은 없겠지요. 혹은 아침에 일어나 안방 문을 열고 안녕히 주무셨습니다.”라고 어설픈 아침인사를 하는 일도 없어지겠지요. 그렇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고 가르쳐 주어도 녀석의 고집은 아비의 교양을 늘 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어설픈 순간이 저는 늘 아쉽습니다. 그래서 아이만 보면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고 온갖 포즈를 요구하나 봅니다. (20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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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몇 주 전 휴일이었다. 이번 달 안에 마무리할 책 원고 때문에 몇 주째 잠이 부족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전날 모임에서 술을 마신 터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원고는 마무리해야 하는데 숙취로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서재와 거실 소파를 오가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한 소리 했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 젊은 시절 친구들이 즐기던 당구도 배우지 않았고, 골프도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클래식음악 애호가도 아니고 요리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굳이 하나 들라면 작은 화분을 가꾸는 것일 텐데, 그것도 혼자 볼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실 남는다고 의식되는 시간도 거의 없다. 그나마 남는 시간도 대부분 연구와 상관되는 콘텐츠를 분석하거나 책을 본다. 남들이 말하는 재미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고, 대부분 혼자서 하는 일이다. 시간을 내는 일도, 하는 일도 없으니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다.

의사인 고등학교 친구 A는 몇 해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 문화센터에 찾아가서 그림을 배워 취미로 꾸준히 그리고 있단다. 그림뿐만 아니라 쿠키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아이스하키를 배우는 아들을 태워주다가 자기도 아이스하키를 즐기게 되었단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곳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아빠들과 아예 팀을 꾸려서 정작 아이는 아이스하키를 그만두었는데 아빠들은 계속하고 있단다. 어디 A뿐이랴? 아침마다 산을 찾고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리는 B, 주말마다 자전거 여행을 보여주는 C, 사진 개인전을 열기도 한 D,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와 책을 낸 E, 일요일 아침마다 모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기는 동문들까지 참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지낸다. 사실 그동안 그런 재미를 꿈꾸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일을 줄이고 조금 여유를 찾겠다고 다짐하지만, 일을 줄이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더욱 분주해질 뿐이다. 서재에는 글씨를 쓰겠다고 모아둔 붓과 등록하고 가지 못한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과 출사를 꿈꾸는 카메라 가방은 먼지만 뽀얗게 덮여 있다. 강박처럼 구입하는 신간들은 연구실과 서재에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쌓여있다.

생각해보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말은 오늘까지의 자부일 뿐이다. 지금껏 부지런히 살아왔다는 자부만으로는 현재의 삶도 재미있게 만들지 못하는데 미래의 시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가족을 위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왔으니 노년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면 그 또한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들, 재미있는 일들 중에 시간을 들여 배우지 않고 가능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도 그 시작은 스스로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내주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시간을 선별하여 줄이면서 자신이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내가 지난해부터 운동을 시작한 이유리라. 몸에서 땀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아내가 벌써 1년 넘게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운동을 다녀오면 온몸이 아프다고 즐거운 엄살이다. 바른 체형의 아내가 원하는 것이 군살 없는 몸매겠는가? 주어진 시간 동안 건강하고 즐겁고 그래서 당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젊어서는 내가하는 일이 제일 흥미롭고, 성취할 때마다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어서, 굳이 다른 재미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도 책상이나 강단 위에서가 제일 편하다. 편한 일이 즐거운 일은 아닐 텐데, 그쯤에서 만족한다. 일상의 분주함과 피로는 관성이 되고, 게으름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인 무엇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잃어버렸다. 맹목적인 성실과 지향 없는 부지런함은 그저 매일매일 고단하게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이 아니던가? 스스로 물어본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매일경제>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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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

유디트 바니스텐달,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소멸은 사라지는 자의 몫이고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죽음을 둘러싼 소멸과 상실의 기록이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과 생명으로부터 기원하는 개별성의 이율배반적 긴장 안에 있다. 언제든 함께할 수 있지만 딱 한 번의 체험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막함이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의 몫일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는 한다. 하여 죽음은 늘 함께하지만 한두 걸음 비껴 서있는 듯하고, 현재일 때 유효하지만 과거이거나 미래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죽음의 어김없는 실체와 구체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때론 절절하게, 때론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죽음의 충만한 의미값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미덕의 기반에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미리암, 타마르, 파울라, 다비드의 시점이 있다. 각자의 시선으로 다비드의 죽음을 사유하고 수납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놓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리암과 타마르의 시점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차 대신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롤 제시하고 있다. 다비드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에 그보다 확실한 소멸과 상실의 계보도가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소멸과 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의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진실의 조각들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은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한다기보다는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그것은 죽음을 대면한 삶의 모습이 그러한 까닭이며 삶을 둘러싼 죽음의 진면목이 그러한 까닭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유일한 사실과 삶의 맞은편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려드는 모순된, 그 온통의 확실성으로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자명함. 그 막막하고 두려운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실존의 충만한 진실을 만나게다.


후두암에 걸린 아버지(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과장된 감정으로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어둡게만 그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속 깊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상처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치유나 사랑에 가까워보인다. 후두암 발병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는 미리암과 우연하게 듣게 되는 타마르, 그것을 유머러스하게(아빠한테는 손녀만 중요해. 우리도 소중한 딸이라고요) 표현하는 딸이나 어린 타마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모습(그림1)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죽음을 담담하게 배워가며 수납하는 아홉 살 타마르의 이야기는 동화 같은 발랄함과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친구 맥스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어 살리겠다거나, 풍선에 매달아 편지를 보낸다고 믿거나 인어에게 아빠와 죽음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해주거나, 맥스와 함께 썰매를 끌고 병원에 오는 장면은 이 작품이 죽음으로만 경사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면해야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과도하게 감상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따듯하고 진솔하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죽음에 대한 따듯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시각이 아니라 모두의 시각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그것을 수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슬픔은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죽음이 실체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탓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슬픔은 풍화되지 않고 점점 더 그것이 오롯한 자신만의 몫이며,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할뿐이다. 수납할 수밖에 없음을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절절한 현실, 절박한 현재, 적막한 고독이 된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처연한 시간의 연민과 연민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안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서는 루이즈-타마르-미리암-파울라-다비드를 통해 생애 전주기의 연령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후두암 발병소식과 루이즈의 탄생을 연결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순환으로 영원을, 영원으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누구나의 상수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 맞은편에 있는 삶의 매순간의 소중함, 그 순간을 채워내야할 위로와 사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에 있다.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고, 내면적 깊이와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과감한 생략과 선택, 캐릭터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선과 색의 조화는 자칫 무겁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와 속도를 조절하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분위기나 캐릭터별로 변별되는 색이나 선이라기보다는 개개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에 부합하는 선과 색의 구사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개개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의 조합이 다양한 만큼 선과 색의 구사는 자유롭다. 분명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한 상황과 흐릿하거나 여러 번 덧칠한 듯한 선으로 묘사한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텍스트 전체의 서사적 맥락을 따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장처럼 애니메이션은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는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화의 고유한 문법에 최적화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서다. 일상을 낯선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자동화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만화의 기저에 깔린 예술적 요구라면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 기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림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표현의 다양한 영역이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미학적이다. <그림 3>을 보면 파울라가 다비드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파울라에 두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다비드에게 할애하고, 파울라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다비드의 내레이션은 담백하지만 절절하게 울리게 하는 이러한 묘사는 정서적 울림의 깊이는 물론 공감을 부른다. 아울러 텍스트의 전체를 함께해온 독자들의 슬픔과 우울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토릭인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이 얼마나 경직되고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수납하고 준비할 것이냐가 아닐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단지 슬프거나 두렵지만은 않게 매순간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포개어 위로하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잃고 더 이상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메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다비드의 절절함은 늘 무의미한 말을 숱하게 쏟아내면서도 정작 전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위로의 말들에 닿아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만화 규장각>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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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실의 닻 혹은 덫

제프 르미어, 수중 용접공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지고 있는 것은 잃은 것의 맞짝이고, 기억하는 것은 잊은 것의 맞짝이다. 잃은 것은 찾으려 하고 잊은 것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잃은 것을 찾으려하고 잊은 것을 기억해내려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행위다. 잃은 것과 잊은 것을 찾고 상기한다한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제프 르미어의 수중 용접공은 정체모를 환상이 소환하는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 소환한 것은 단지 아버지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외면하려 했던 지금 이곳의 삶이다. 시추선에서 수중 용접공으로 일하는 잭 조지프는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는 해저에서 정체모를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해저에 있는 잭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생생했던 순간 지상에서는 사고로 인지된다. 정체모를 소리가 소환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의 죽음과 사라진 회중시계에 관한 것이었다.

바다 속 보물을 찾으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며 현실은 크게 개의치 않고 수중 탐사에만 몰두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만삭인 아내를 홀로 두고 맹목적으로 일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보물과 일에 대한 몰두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곳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부담감, 그것은 단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책임감에 관한 것이다. 가장이든 아버지든 간에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했던 욕망을 괄호 속에 묶고 한층 성숙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성숙도나 책임감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나 곧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잭의 현실에서 조금 비껴난 행동들은 일종의 방어기제와 같다.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삶을 지탱해주고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 스스로 합리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보물탐사와 수중용접에서 찾은 것이다. 잭이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해저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한 까닭이다.

잭은 수중의 절대 고독 속에서 일종의 환청과 환각으로 어린 시절의 자신과 그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잭은 아버지의 죽음과 회중시계의 연관 고리를 찾고, 아버지 죽음의 또 다른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울러 그것은 잭이 몰두하던 해저, 잠수, , 과거 등으로부터 지금 이곳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바로 그 순간이 텍스트 전체에 걸쳐 아버지와 변주된 데칼코마니처럼 유사성을 보이던 잭이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아버지와 함께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분리를 통해 성장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분리는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직시이며, 보다 성숙한 자아로서 현실 수납을 의미한다.

수중 용접공에서는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분리가 선명하다. 전자가 현실의 질서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질서로 대변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잭 자신만의 세계이다. 아버지는 보물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었지만 잭은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잭의 그런 모습은 현실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잭이 찾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외면하려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잭의 경우는 그러한 외면의 동기 저변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이 죄책감이 있었다는 것은 작품 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끝까지 보물찾기를 이야기하지만 그가 우선 찾아야 했던 것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보물인 아들 잭이 좋아하는 회중시계였다는 사실이 절묘한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아버지의 보물찾기가 침몰한 스페인함선의 금화들이 아니라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단순화한다면 지극히 소박한 서사에 머물 뿐이겠지만, 그것을 아들 잭의 출산 즈음에 환상으로 연결함으로써 서사의 울림을 다양화한다. 자칫 잘못 읽으면 이 작품은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이분적인 구도에서 전자만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잭의 데칼코마니 구도와 잭이 체험하는 환상의 내용을 연결해보면 양자가 비로소 잭의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닻(anchor)이 배가 떠내려가지 않고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덫(snare)이 되기도 한다는 삶의 이율배반(antinomy)을 이해할 때, 그 이해 위에서 스스로 성인으로서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수중 용접공을 읽으며 강도하의 큐브릭과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떠올랐다. 강도하의 큐브릭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미우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자기방어기제를 잭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에서 떠올렸다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과잉일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처럼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과정은 마치 미스터리를 풀 듯 텍스트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극적재미를 배가시킨다.

이 작품은 작화 면에서 상당히 과감한 시도를 한다. 텍스트 전체를 하나의 작화스타일로 유지하기보다는 장면과 상황에 적합한 자유로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장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서사 전체의 흐름을 작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며 시도다. 거기에 대사의 많고/적음이나 완급에 맞추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는 점도 무척 매력적이다. 이러한 작화스타일은 텍스트 전체를 잭과 동반자적 시점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장의 유지뿐만 아니라 서사에 대한 몰입에 크게 기여한다.


아버지나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나 그것을 찾아가는 잭의 모습이 수직 구도로 구현되고 있다면 현실이나 일상은 수평구도를 선호하고 있는 것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현재의 삶, 자신을 기다리는 일상을 스스로 발견하는 장면(196-197)의 연출은 백미다. 시추선을 향해 나아가는 잭을 중앙에 배치하고 Z축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게 될 장면을 X축으로 설정함으로써 잭의 깨달음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잭 자신을 Y축으로 중심에 두고 과거의 아버지와 자신을 X축으로 연결하여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장면(112-113)에서 시도하여 학습하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207)를 그를 수면위로 끌고 올라오는 장면(212)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 연출인가? 회중시계와 아버지 죽음을 연결시켜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지금 잭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만들고, 회중시계를 매개로 분리되었던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화해하게 함으로써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를 열려주는 효과적인 연출이기 때문이다.

발문에서 데이먼 린들로프가 환상특급 운운한 것은 오히려 텍스트 리터러시에 장애가 된다. 환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환상특급이 주는 분위기나 효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잭의 내면심리에 집중하여 읽어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시기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아버지의 기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다소 안정적인 서사구조와 보수적인 주제의식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수중 용접공을 읽는 내내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등장하는 기저귀의 메타포가 떠올랐다. 사랑은 빨래하는 어머니가 아가의 허리춤에 매어둔 기저귀처럼 보호하는 것인지 구속하는 것인지, 그것이 닻인지 덫인지?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었던 거야.”(188)라고 깨닫는 장면의 배경이 러스티 앵커인 것을 근거로 수중 용접공이 닻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 해석의 과잉일까? 사랑은 역시 어렵다.

<만화규장각> 2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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