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권하는 사회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육아의 질이 높아지고 교육에 대한 부담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핑크족과 딩크족의 등장은 놀랄 일만도 아니다. '핑크족(PINK·Poor Income, No Kids)'은 돈이 없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이며,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s)'은 자기 성취나 삶을 즐기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를 의미한다. 이 말들을 곱씹어보면 아이의 문제가 핑크족은 돈으로, 딩크족은 부모의 노력으로 귀착됨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을 낳아 기르고 제 몫의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는 돈과 부모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일 것이다.
‘핑크족’이라는 말에는 아이를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하는 부부의 경제적 상황과 우리네 경제적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조적인 동조와 동시에 아이 양육에 엄청난 개인 차원의 비용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함께 담겨져 있다. 반면 딩크족이라는 말에는 부정적 의미와 비난의 어조가 실려 있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자기 삶을 즐기는 데 사용하고 있는 책임지기 싫어하는 철이 덜 든 신세대 부부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딩크족이 ‘자기 성취’나 ‘자기 삶 즐기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들은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성취보다는 우리의 성취나 행복에, 즐기는 삶보다는 책임지는 삶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 때문이다. 우리와 자기를, 책임과 즐거움을 분리하는 사고방식으로는 딩크족의 등장은 그저 책임지지 않으려는 철이 덜 든 부부의 등장이라는 말 이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우리나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는 책임이란 지극히 공허한 말이 아닌가? 자기 성취나 자기 삶의 즐거움으로 자식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자신만의 성취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린 좀 더 다양한 삶을 확보하고,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며,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핑크족과 딩크족의 등장을 나는 자기 자신의 발견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으로 해석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문제는 아이와 돈이 아니라 ‘나 자신의 발견’에게 있는 것이다. 전혜성의 소설 《마요네즈》에서는 자신을 가꾸기 위해 마요네즈로 머리를 감는 철없는 엄마 때문에 의무에 눌려 사는 딸이 엄마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며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진정한 이해와 화해에 이른다. 이러한 맥락을 확장해보면 딩크족은 부모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 좀 더 의미를 주어야하지 않을까?
아이는 내 삶의 일부이지 삶 그 자체이거나 전부는 아니다. 이와 같은 나 자신의 발견에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야한다는 당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이유는 아이는 선택이 아닌 그 자체로 충만한 기쁨이며 사랑이라는 사실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발견이나 성취’와 아이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부조를 통하여 출생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일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주체적인 삶 속에서 아이와 더불어함께 갈 것이냐와 즐거움과 책임이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고민하느냐에 있다.
두 딸을 두고 있는 나는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다. 다만 부모로서 내가 주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아이들도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는 있다고는 말할 수는 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광고의 문구나 “내가 없어도 세상은 계속된다”는 이승훈의 시가 말해주는 엄혹한 질서를 오늘 다시 생각해본다. 핑크족과 딩크족, 이들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다양이며 발견이다.
《한화․한화인》20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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