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권하는 사회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육아의 질이 높아지고 교육에 대한 부담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핑크족과 딩크족의 등장은 놀랄 일만도 아니다. '핑크족(PINK·Poor Income, No Kids)'은 돈이 없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이며,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s)'은 자기 성취나 삶을 즐기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를 의미한다. 이 말들을 곱씹어보면 아이의 문제가 핑크족은 돈으로, 딩크족은 부모의 노력으로 귀착됨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을 낳아 기르고 제 몫의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는 돈과 부모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일 것이다.

핑크족이라는 말에는 아이를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하는 부부의 경제적 상황과 우리네 경제적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조적인 동조와 동시에 아이 양육에 엄청난 개인 차원의 비용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함께 담겨져 있다. 반면 딩크족이라는 말에는 부정적 의미와 비난의 어조가 실려 있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능력을 오로지 자기 삶을 즐기는 데 사용하고 있는 책임지기 싫어하는 철이 덜 든 신세대 부부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딩크족이 자기 성취자기 삶 즐기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들은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성취보다는 우리의 성취나 행복에, 즐기는 삶보다는 책임지는 삶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 때문이다. 우리와 자기를, 책임과 즐거움을 분리하는 사고방식으로는 딩크족의 등장은 그저 책임지지 않으려는 철이 덜 든 부부의 등장이라는 말 이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우리나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는 책임이란 지극히 공허한 말이 아닌가? 자기 성취나 자기 삶의 즐거움으로 자식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자신만의 성취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린 좀 더 다양한 삶을 확보하고,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며,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핑크족과 딩크족의 등장을 나는 자기 자신의 발견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으로 해석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문제는 아이와 돈이 아니라 나 자신의 발견에게 있는 것이다. 전혜성의 소설 마요네즈에서는 자신을 가꾸기 위해 마요네즈로 머리를 감는 철없는 엄마 때문에 의무에 눌려 사는 딸이 엄마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며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진정한 이해와 화해에 이른다. 이러한 맥락을 확장해보면 딩크족은 부모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 좀 더 의미를 주어야하지 않을까?

아이는 내 삶의 일부이지 삶 그 자체이거나 전부는 아니다. 이와 같은 나 자신의 발견에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야한다는 당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이유는 아이는 선택이 아닌 그 자체로 충만한 기쁨이며 사랑이라는 사실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발견이나 성취와 아이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부조를 통하여 출생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일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주체적인 삶 속에서 아이와 더불어함께 갈 것이냐와 즐거움과 책임이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고민하느냐에 있다.

두 딸을 두고 있는 나는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다. 다만 부모로서 내가 주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아이들도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는 있다고는 말할 수는 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광고의 문구나 내가 없어도 세상은 계속된다는 이승훈의 시가 말해주는 엄혹한 질서를 오늘 다시 생각해본다. 핑크족과 딩크족, 이들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다양이며 발견이다.

한화한화인》20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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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스와 웰빙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삶은 몇 가지 단서를 데리고 다닌다. 그 중에서 가장 절박한 것은 더불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아주 소박하게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는 쉽게 살아가기 위해 수행해야하는 번거로운 숱한 일들과 함께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심리적정서적 공황상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함께해야 할 대상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이나 세계로 확대되거나 또는 과거의 조상들로부터 미래의 후손들까지로 확대된다면 그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아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로하스의 사전적인 의미는 건강과 지속 성장성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이다.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로하스는 건강과 환경이 결합된 생활을 지향함으로써 자신의 건강은 물론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를 뜻한다.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로하스족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정보에 밝고 독자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로하스족은 친환경적이고 합리적인 소비패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개인적 차원의 참살이를 지향했던 웰빙과는 달리 사회적 차원의 참살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손쉬움과 안락함을 추구하기 자연을 거스르고 이웃을 배려하지 않은 결과, 지금 이곳에는 자연과 이웃으로부터의 숱한 위협이 상존하게 하였다. 이러한 위협들은 대체로 총체적인 것이어서 그 원인을 어느 것 하나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유를 들자면, 살면서 우리를 쉽고 안락하게 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것이며, 내가 배려하지 않았던 이웃들이 그들이다. 하여 해답은 자명하다. 그것이 자연이든 이웃이든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어야지만, 진정한 참살이는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하스는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로하스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같은 이유로 자명하다. 로하스의 전제는 더불어 함께여야만 하며, 그 결과가 개인의 참살이는 물론 사회적 참살이여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몰려오는 로하스 열풍은 이전의 웰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웰빙이 있는 자들의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개인적 차원의 참살이였다는 점에서 비판 받았다면, 웰빙에 환경적인 관심만을 더한 것이 지금 이곳의 보하스 열풍이라고 거칠게 단순화시켜도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생활용품을 사용하고 유기농 먹거리만 먹으며 생태관광을 즐기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은 이기적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일회용품 줄이기, 장바구니 들고 다니기, 천기저귀 쓰기, 대안생리대 쓰기 등과 같은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라면 소박하다.

문제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 차원에서 더불어 함께할 것이냐이다. 그것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와 어떻게 함께 나눌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노력은 공시적으로는 너와 나의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통시적으로는 우리 후손들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굳이 그 중에서 우선할 것을 고르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우리 주변의 이웃에 대한 배려를 선택해야만 한다. 오늘의 우리가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면서 내일의 후손들에 대한 책임 운운하는 것은 저급한 기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하지 못하는 보하스는 꿈일 뿐이다. 네가 행복하지 않고서는 나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단순한 이치에서 우리의 고민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이 선행되지 못한 지금 이곳의 로하스는 웰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웰빙은 절대 웰빙이 될 수 없으며, 보하스는 보하스가 될 수 없기에 꿈이다. 꿈에는 늘 내가 없다.

 한화한화인》200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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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과 당연하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X맨을 찾아라>가 인기다. 사실 X맨을 찾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재미는 있는 모양이다. X맨은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게임에 고의로 져주면 된다. 출연자나 시청자의 심리 게임을 유도함으로써 재미를 유도한다는 의도지만, 사실 그 즐거움의 실체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이 공인된 속임이다. 속인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감추고 찾아내는 사이의 긴장을 즐기는 것이다.

<X맨을 찾아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는 당연하지 게임이다. 이 게임의 원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물을 수 없는 치부들을 스스로 시인하게 하거나, 또는 개연성 있는 사실이나 터무니없는 사실에 대한 시인을 유도함으로써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허구와 진실의 모호한 경계를 이용하는 이 게임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까발림, 용인된 무례함, 터무니없음 등으로 표현되는 이 저급한 욕망의 밑바닥에는 연예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이 있다. 그것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X파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X 파일이 존재하는 사회는 투명하지 못한 사회다. X파일이 존재한다는 말은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 드러내기 어려운 혹은 감추어야 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드러낼 것과 감추어야 할 것을 가름하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감추면서도 완전히 폐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감추면서도 폐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은 X파일의 사실과 무관하다는 도덕적 우월성이나 알리바이를 위한 것이라는데 있다. X파일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욕망도 이와 같이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의식을 기반으로 한 음험한 변별 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르네 지라르가 말했던 희생양의 현재 모습이 아닌가? 문제는 도덕적 구분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자기 정당화의 논리는 상대적인 우월의식을 통하여 희생양에 대한 가혹한 윤리적 비난과 처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좀 더 이성이고 자기 성찰적인 시각으로 X파일을 보면 어떨까?

연예인 X파일은 연예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며 동시에 우리가 지닌 음험한 욕망에 다름 아니다. X파일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좋아하는 꿈의 실체이며,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러리라는 우리의 기대와 상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박한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둘 다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은 이제 겨우 드러나기 시작한 근현대사 X파일들의 존재다.

속속 드러나는 과거사 X파일을 보며 X파일이 존재하지 않는 세대가 행복한 세대라는 당위적인 요구는 하지 말자. 이해관계가 결부된 사실에 대한 당위적 요구는 얼마나 공허한가? 문제는 또 다른 X파일이 존재하지 않도록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있다. X파일의 존치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결정권자의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좀 더 준열하고 엄정할 수 있도록 비판과 견제를 상시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사회적 파장으로 인해 당대에는 드러낼 수 없는 사실이기에 X파일이 불가피하다면 반드시 일정 시간 이후의 공개를 원칙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감출 수 있다는 미련한 의지를 거세시킬 수 있으며, 감출 수 없기에 사회와 역사에 대한 겸허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더 록>에서 X파일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을 보며 환호하는 니콘라스 케이지의 환호보다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감옥행을 택한 손 코넬리의 의지를 좋아한다.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스파이더맨의 공통점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X맨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를 돕는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들이지만 허구이기에 감동이 없다. 하지만 구산동 결핵촌에 매년 익명으로 쌀을 보낸다는 우리 시대의 X맨들은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현실의 이웃이기에 감동적이다. 올해에는 추잡하고 폭력적인, 그러기에 언젠가는 까발려져서 엄혹한 심판대에 서야하는 X파일 말고, 드러내지 않음으로 더욱 즐거워지는 그런 X파일을 우리 모두 실천해보면 좋지 않을까? 당연하지!

 한화한화인》200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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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남자, 상수항과 변수항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최근 ‘B형 남자라는 노래와 영화 때문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라기에는 그것의 범위가 깊이가 그리 간단치 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최근 100대 기업 CEO38.7%B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B형은 개성이 뚜렷하고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에 BCEO가 많은 것은 우리경제가 기존의 경영형태에서 변화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증거라는 식의 근거 없는 확대 해석으로 우리의 인식 압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협중앙회 한밭사업단이 공제보험 담당 직원을 모집하면서 지원자의 혈액형을 O형과 B형으로 제한했다는 기사는 혈액형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재미를 넘어 맹신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맹신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폭력은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데 기민하고, 그 가름은 언제나 근거나 논리를 넘어선 것들로서 견고하기까지 하다. A형은 성실하고 책임감은 강한데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고, B형은 개성적이고 진취적이지만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바람둥이가 많고, O형은 활달한 성격에 사교적이지만 즉흥적이고, AB형은 괴팍하다는 식의 가름은 재미로 본다고 쳐도, 그것으로 업무 능력이나 궁합 등의 근거로 활용하는 것은 다분히 폭력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혈액형은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자기 것이 된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혈액형은 성격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질병과 밀접한 상관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혈액형에 의존하는 것일까?

혈액형은 상수항이다. 상수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기 싶다. 내 혈액형이 이래서 내 성격이 이런 걸 어떻게 하겠냐는 생각, 그의 혈액형이 이렇기 때문에 나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생각 등에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전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을 때마다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서 기능하게 된다. 또 다른 원인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기 성찰의 부재에 있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간에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파악하고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는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에도 서툴고 서툰 만큼 자신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타인에 대한 성찰과 파악을 대신해줄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정체성은 타자(他者)로부터 온다고 했다. 주체를 부정한 이 말은 주체가 타자에 종속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혈액형을 통해서 성격을 가늠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상수항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그러므로 준비해야할 변수항을 찾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삶이 명사적 의미보다는 살아가겠다는 의지적이고 동사적인 의미가 더 강해야 한다. 그러한 의지를 통한 개선의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서는 通變之謂事(달라져 감을 온전히 알아냄을 일이라고 한다)”고 했다. 낼숨()과 들숨()의 쉼 없는 반복을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 변화가 삶의 기본 원리이기에 주역에서 성현들은 그 변화의 도를 파악하고 깨닫는 것이 일이라고 칭하여 중히 여긴 것이다. 변할 수 없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파악하는 일은 기만일 뿐이다. 그래서 상수항인 혈액형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야할 성격을 파악하려는 지금 이곳의 시도들은 성찰 없는 시대의 우울한 초상일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그래도 굳이 혈액형으로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러므로 준비해야할 변수항이거나 변화하기 위해 준비해야할 의지여야만 한다고. 혈액이 내 안에 있듯, 성격도 내가 만들어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화한화인2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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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스트롱, 두려움과 분노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신문은 연초에 새해의 트렌드를 예측하며 미스 스트롱이라는 낯선 조어를 빼놓지 않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신문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트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이다. 물론 권투, 프로레슬링, 이종격투기, 익스트림 스포츠 등과 같이 그동안 여성들의 기피하던 영역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미스 스트롱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따위의 순진한 견해에서부터 남녀의 경계허물기로 인식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장들이 차고 넘쳤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이냐에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남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부재를 의미하며, 궁핍하고 척박했던 전후에 어머니가 이끌던 나목(裸木)의 시대를 상징한다는 해석을 상기하면서, 이와 같은 논리를 미스 스트롱의 트렌드에 적용하고자 할 수도 있다. 혹은 미스 스트롱의 트렌드화는 남성이 스트롱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라는 식의 위험한 단순논리도 등장할 수 있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구원투수처럼 등장하는 여성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읽으려는 거칠고 소박한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또는 미스 스트롱의 등장을 미스터 뷰티의 등장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을 하며 양성 간의 경계허물기의 일환으로 일반화시키려는 근거없는 주장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미스 스트롱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트렌드화하려는 그 의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미스 스트롱의 예로 자주 등장하는 <다모><대장금>을 기억해보자. <다모>의 채옥은 이전의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강인한 정신력과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대자금>의 장금이도 불굴의 의지와 빼어난 재능으로 남성들을 제압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미스 스트롱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옥과 장금이의 걸출한 능력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나 가부장적 권력구조로 다시 수렴되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도 결국 장군과 결혼하는 것을 행복한 결말로 설정하고 있지 않은가?

미스 스트롱(Ms. Strong)은 미스터 뷰티(Mr. Beauty)의 짝패다. ‘미스스트롱의 결합은 미스터뷰티의 결합만큼이나 낯선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둘은 늘 붙어서 쓰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합성한 미스 스트롱2005년 대표적인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흥미롭지만 매우 불순해 보인다. ‘미스 스트롱이 낯선 것은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며 동시에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완강하고 고집스런 기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스 스트롱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독립여성을 의미하는데 그 말 속에는 그럴 수 없는혹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전자는 분노를 낳고 후자는 두려움을 낳았다. 그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19세기 대중의 등장을 아무 생각 없는 무례한 무리들(mass)’이라고 칭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존의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았던 기득권층의 분노와 두려움이 대중이라는 비하적인 의미로 수렵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스 스트롱이라는 말은 표면적으로야 긍정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형적인 여성들이라는 의미의 가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닭살스런 공주에서 주체적인 미스 스트롱으로 거듭난 <슈렉>의 피오나 공주를 보며 우리가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행동을 엽기스럽다고 느꼈기 때문 아니었나? 엽기는 이미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긍정적인 것처럼 읽혀지는 것은 이 트렌드와 함께 그 증거로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한 광고회사의 공이 컸다. 그만큼 미스 스트롱은 상업적 목적을 전제로 한 신조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세대적 정체성이 모호했던 ‘X세대나 실체가 불분명했던 미시족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트렌드는 지금 이곳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전망함으로써 미래의 시장수요와 사회적 흐름을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유념하자. 그렇다면 미스 스트롱을 좀더 긍정적이고 생산적 실체로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이 지닌 장점 위에 이성이 지닌 강점을 융합시키는 양성(兩性) 추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적 영역/사적영역, /, 강함/약함, 주체적/의존적, 이성적/감성적, 우등/열등 따위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나 구분을 던져 버려야 하는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처럼 지구 위의 반은 여성이고 그 나머지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반이 구속되고 의존적이며 약하고 열등해서는 결코 나머지 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 ‘미스 스트롱이 더 이상 낯선 단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한화 한화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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