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가 달아지는 이유
박 기 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74년 봄 우린 서울로 이사왔다. 청주에서의 살림을 정리하여 210만원을 갖고 시작한 서울 살림이었지만 1년도 못되는 시간에 살림은 반으로 줄었다. 생전 해보지도 않은 식료품점을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할머니는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시작하셔야 했다. 그 무렵의 서울살이 풍경이 대개 그러했겠지만 부모님은 가게에서 늦게까지 계셔야 했고, 집안 살림과 아이들 건사는 모두 할머니 몫이셨다. 아이들 다섯의 끼니는 물론 다섯 개의 도시락과 가게에 계신 부모님의 끼니까지…. 청주에서만 사시던 분이 서울에 올라오셨으니 지리도 모르고 지리를 안다고 해도 딱히 갈 곳도 갈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작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공식적인 외출은 내 결혼식이 유일한 것이었다. 20여년의 참 길고도 지루했던 수감생활(?)이었다.
그 지루했던 할머니의 서울살이를 나름대로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진로 소주였다. 할머니가 언제부터 소주를 드셨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할머니의 소주 심부름은 아마도 서울 살이를 시작한 그 무렵부터인 것 같다.
다행히 옆집 할머니와 쉽게 친해지셨던 할머니는 이따금 길음시장의 녹두빈대떡 심부름을 내게 시키시곤 하셨다. 신문지에 그 뜨뜻한 것을 싸서 집으로 달려오면 할머니는 어디서 나셨는지 소주를 준비해 두셨었다. 그때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정정하시고 힘이 있으셨던 시절이다. 한 번 실패했던 아버지의 일들이 같은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면서 할머니는 녹두 빈대떡을 더 이상 시키실 수 없었다.
철이 들면서 할머니께 왜 그 쓴 소주를 드시냐고 여쭈어보면 속이 상해서 마신다고 하셨다. 소주 심부름이 귀찮아서 소주 좀 그만 드시라고 하면 “니 놈이 소주 한 번 사주어 봤어?”하고 서운해하시기도 하셨다. 할머니의 소주를 이해하게 될 때쯤 할머니의 잔에는 소주보다는 더 많은 물이 섞이게 되었다.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기 때문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머리가 커진 손자들이 소주 심부름을 꺼려해서 소주 한 병을 두고 오래 드셔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소주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된 것은 내가 술을 마시면서부터였다. 집에 들어가다가 할머니 생각이 나면 소주를 사다드리곤 했다. 그 무렵부터 할머니는 쉽게 취하셨다. 소주잔에 반쯤 소주를 따르고 반쯤은 물을 타서 드시면서도 너무도 쉽게 취하셨다.
부모님이 가게에서 주무시고 아이들을 혼자 키우셔야 했던 할머니는 이것저것 가슴앓이가 많으셨다. 청주에 살 때만 해도 주변에 친구분들도 많았고 당신이 돈을 버실 때니까 기활 좋게 털 것은 털어 내실 수 있었다. 집에는 늘 할머니의 친구분들로 북적대었으니까. 하지만 서울살이는 그렇지 못했다.
제 몫의 일들에 쫓기던 손자들 누구도 할머니와 마주 앉아 곰살맞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아이들을 학교로 일터로 보내고 나면 아버지가 아침을 드시러 들어오시고 서둘러 가게로 나가시면 덩그러니 빈집엔 할머니만 남으셨다. 어린것들의 입맛을 맞추지 못한다시며 TV요리 프로를 즐겨 보셨던 할머니. 하지만 그 끝 말씀은 늘 “저렇게 양념 넣고 누가 못해?”라고 하시며 한 번도 그 음식을 만들지는 못하셨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아는 몇 안되는 것들을 TV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반가우셨던 것이다. 당신은 늘 TV를 보셨지만 여쭈어보면 내용은 알지 못하셨다. 그저 바깥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TV였다. 저녁상머리에서 할머니는 그날 뉴스를 할머니 나름대로 조각조각 잇곤 하셨다. 당신의 기억 속에 정지했던 드라마는 70년대 초의 <꽃피는 팔도강산>이 전부였다.
아이들 뒤치다꺼리는 물론 성장기의 우리 오남매에게 부모님 역할까지 하셔야 했기에 늘 마음을 졸이고 염려가 많으셨다. 밥은 먹었느냐? 밥 더 먹어라. 굶지 말고 다녀라. 늘 먹는 것에 관한 염려가 많으셨다. 밥은 할머니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집에 밥이 떨어지는 것을 몹시 불안해 하셨다. 찬밥이 남아서 아침에 당신이 드시더라도 꼭 나간 형제가 있으면 그를 위해 밥을 담아 두셨다. 그래서인지 나도 밥을 먹다가 밥이 떨어지는 것은 못 참는다. 그럴 때면 아내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밥은 떨구지 말라고 화를 내곤한다.
중학교 때인가, 친구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아직 저녁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라면을 먼저 먹고 기다리라고 라면을 끓여 주셨다. 라면이 밥보다 더 좋을 나이였던 우리는 그러마고 했다. 잠시후 할머니가 끓여주신 라면은 웬일인지 하얀 색이었다. 알고 보니 빨리 대접해야한다는 마음에 스프를 넣지 않고 끓여주신 것이었다. 다 끓은 라면에 스프를 넣어 먹던 그 비릿한 라면.
제사 다음날이나 명일 때에는 관리 아저씨나 청소 아저씨를 불러서 당신이 아끼는 진로소주 한 병과 음식들을 내어가곤 하셨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 박하면 안된다고 하시며.
부모님은 떨어져 계시니까 늘 우리들의 귀가 시간을 전화로 점검하셨는데, 대학 다니던 누나나 내가 잘 지켜질 리 만무했다. 아이들 들어왔냐는 엄마 전화를 중간에서 막아주시는 것은 늘 할머니였다. 그렇다고 당신이 마음 편안히 우리를 기다리셨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늦는다고 전화를 드려도 손자들이 들어올 때까지 뜬눈으로 기다리셨다. 그러다 지루하면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하면 한 잔씩 하셨다.
하루에 두세 잔인 소주였지만 팔십 노인에게는 늘 과한 주량이었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면 할머니는 젊은 시절 고생하시던 말씀을 하셨다. 열여섯에 시집와서 만주까지 갔다가 서울로 왔다가 청주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 그래서 할머니의 서울에는 6․25가 끝나지 않아 있었고, 간혹 로스케 병사들이 등장하고, 때로는 만주에서 피난 나오면서 두고 온 소, 말, 닭 등이 살아오기도 했다.
한 번은 서울에 공습경보가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우리 오남매를 단속하시고 제일 먼저 집안에 있던 계란을 모두 삶으셨다. 혹시 피난을 가야될 지도 모르는데 그 아까운 것을 두고 가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40여년 전에 만주농장에 두고 오셨던 그 가축들 때문이라고 하셨다. 딱히 가지고 갈 것도 없는 우리 살림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어디 한 줄의 계란이었으랴?
이제는 제법 밥벌이를 할 나이가 되어 할머니 소주를 넉넉히 받아 드릴 수 있게 되자 당신은 소주를 드실 수 없게 되었다. 얼마나 상투적인 시간의 전개인가? 하지만 삶은 얼마나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넘어지시는 일이 잦아지고, 그 횟수가 반복될수록 할머니는 자주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운신도 제대로 못하시는 분이 새벽 4시만 되면 아이들 방문을 두드리며 빨리 일어나 학교에 가라고, 아내와 본가에서 자는 날이면 어여 일어나 밥을 하라고 깨우셨다. 참 그로테스크하고 눈물나는 풍경이었다. 오남매의 새벽밥을 20여년 지으시며 그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짐이었는지, 난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당신이 건강하실 때, 내가 새벽까지 책을 보거나 무엇을 쓴다고 깨어 있으면 슬며시 문을 열어보시고, 그 어려운 골파먹는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고 걱정이셨다. 그러고는 배고프지 않냐고 묻는 것도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 당신 손에 밥을 얻어먹을 때는 비루먹는 말처럼 비비 돌아가더니 마누라가 해주는 밥을 먹으니 살이 찐다고 기쁨 반 서운 반 웃으시던 할머니.
할머니가 누워 계시는 시간이 늘면서 치매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당신의 아들에게 오빠라고 부르시기도 했고, 당신의 며느리에게는 누구시냐고 물으시기도 했다. 그러다 모두 출가하고 오남매중 유일하게 집에 남아 있던 아우가 필리핀에 가이드로 떠나기 며칠 전, 할머니는 풍을 맞으셨다. 막내가 떠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으셨던 거라고 식구들은 말했다.
결국 환갑이 넘으신 아버지가 할머니 간호를 위해 가게에 나가지 않으시고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셨다. 대소변을 받아 내야하고, 진지를 챙겨드려야 하고, 시간 맞춰 당신을 돌아 눕혀드리고 등창난 부분에는 약을 발라 드려야 했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당신의 며느리나 손자며느리가 아니면 기저귀에 손도 못 대게 하셨다. 가시는 그날까지도 당신의 아들에게 어머니의 품위를 지키고 싶으셨던 것일까?
그 무렵 딸아이가 태어났다. 몸의 반쪽을 운신하지 못하시면서도 당신의 증손녀를 보면 미소를 지으시고 늘 같은 말을 물으셨다. 그것도 손자며느리 몰래 당신의 손자에게만 낮은 소리로 “아들이지?”. 발음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늘 당신의 증손녀를 보시면 울음 반 웃음 반의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당신의 아들조차 가끔씩 오빠라고 부르셨지만, 당신의 손자들만은 정확히 알아보셨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치매와 풍이 심해져서 아무도 할머니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당신들의 손자들만은 알아들었다. 할머니와 나눈 외로움의 교감이 그렇게 깊은 것이었을까? 가금 정신 돌아오시면 내 손을 잡고 힘들지 않냐고 너무 골 쓰며 살지 말라고 걱정이셨다. 가시는 그날까지 끝내 손자들이 마음이 걸리셨던 것일까?
할머니는 풍을 맞으신 지 딱 일년만에 가셨다. 가게를 그만두고 집에 계시던 당신의 며느리가 위층에 간 사이, 당신의 맏손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시간, 당신의 막내 손자가 여행객을 데리고 보라카이로 날아가던 그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신의 아들만을 곁에 두고 가셨다고 했다.
생전에 당신의 푸짐한 밥인심에 이건 순전히 밥고문이라고 엄살을 떨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당신이 대접하시는 음식들이 모두 맛있다고들 했다. 그래도 막내손자까지 출가하는 것보고 돌아가시어 복 받은 분이라고들 했다. 편안히 가시어 좋은 데로 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 걱정 많던 분이 어떻게 안심이 되어 가셨는지 모른다고들 했다. 결코 쓰러질 것 같지 않던 분이 쓰러지셨고, 결코 돌아가실 것 같지 않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렇게 가셨다 할머니는.
당신이 가시고 부모님은 우리가 사는 수지로 이사를 오셨다. 집에서 불과 50여미터쯤 되는 거리다. 아내가 일을 할 때에는 아이를 맡아주시고, 저녁을 준비해 주신다. 부모님은 하루종일 딸아이를 기다리신다. 더구나 나가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성격에 서울 한 번 나가는 것이 일이고 보니 두분은 산책하시는 것 외에는 하루종일 집에 계신다. 어머니는 그나마 시장 보셔야 한다고 백화점 셔틀 버스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시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제발 나가셔서 친구분들과 약주도 하시고 스포츠 센터도 다니시라고 말씀드리지만 소용이 없다. 아버지의 유일한 낙은 딸아이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그러셨듯 달력을 오려 딸아이의 낱말 카드를 만드시고, 녀석의 말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것을 즐거워하시고,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하루라도 딸애를 본가에 보내지 않으면 무척 서운해하신다. 혹 외출을 했다가 약주라도 한 잔 하시는 날에 우리가 먼저 본가에서 오면 전화를 하셔서 애를 데려 오란다. 보고싶으시다고.
저녁 식탁에서 고봉밥을 떠주시고도 더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서 할머니의 모습을 본다. 반주로 드시는 소주의 잔 수를 조절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할머니가 보인다. 그것은 누가 내게 아버지와 꼭 닮았다고 하는 것만큼 싫은 일이다. 하지만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다가, 소주잔을 들다가,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하다가, 밥을 먹다가, 양복주머니에 왼손을 찌르며 걷다가 나도 아버지를 내게서 느끼는 것처럼, 당신들도 어쩔 수없이 할머니의 연세를 맞고 계신 것일까?
요즘은 문득문득 할머니를 느낀다. 그만큼 내 삶이 가파라지고 있다는 뜻일 게다. 전에는 힘들 때면 할머니에게 털어놓곤 했었다. 알아듣는 말보다는 그렇지 못한 말이 더 많아도 당신은 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셨다. 그러고 다듣고 나서는 별말씀 없이 당신의 소주를 나누어주시곤 했다. 이제는 물 탄 소주를 나누어주시던, 아무 것도 모르지만 너는 내가 안다는 표정으로 손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는 그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일까?
점점 소주가 달다. 오늘은 집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막걸리라도 받아 가야겠다.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