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웃음의 서사, <개그 콘서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하 그렇구나 웃거나 말거-!”

네 살 먹은 둘째가 식탁에 앉아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아내와 함께 웃어라도 주면 제 깜냥에는 잘한다는 것인 줄 알고 몇 번씩 되풀이하곤 합니다. 아내의 이야기로는 첫째와 둘이 앉아서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대사나 몸짓 혹은 말투와 노래를 거의 모두 흉내를 낸답니다. 나가 있어!, 옥동자에요, 원투쓰리포, 띠리띠리 등등. 급기야 오늘은 첫째와 둘째가 앉아서 김지선이 핸드폰을 받으면서 어머 어머라고 외치며 몸을 흔들고 나오는 것을 마주보고 했답니다. 아내는 두 녀석에게 흉내를 내면 <개그콘서트> 안 보여준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개그맨 흉내를 내는 아이들의 버릇을 개그프로를 통해 제어해야하는 이 웃지 못 할 상황에 자꾸 웃음이 났습니다.

저는 최근 논문에서 1) 비서사적 요소의 전면화, 2) 자기 완결성의 포기, 3) 계열체적 서사로의 개방으로 드러나는 <개그콘서트>의 서사 파괴현상을 지적했습니다. 즉 전통적인 의미의 서사는 사라지고 개인기를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서사만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비삼남매의 정체성은 서사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 인물의 개인기를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다고 개인기를 통해 살아있는 캐릭터를 구현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캐릭터 역시 그들의 개인기를 보여주기 위한 전제일 뿐입니다. 옥동자와 노통장의 성대모사, 무림남녀의 무술, 박준형의 무갈기, 댄서킴의 쭉쭉춤, 김지선의 섹시댄스, 김다래의 성대모사 등이 대표적인 개인기입니다. 심지어 미션임파서블에서는 어설픈 개인기를 웃음의 중심 코드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개인기는 반복을 통해 관객 혹은 시청자를 학습시키며, 그 학습의 결과가 각 코너별 넘나들기를 가능하게 하고, 웃음의 전제가 되는 심리적 공유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봉숭아 학당세바스찬이 웃기는 것은 그렇습니다에서 보여주었던 땅그지캐릭터 때문인데, 코너의 독립성과는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세바스찬땅그지캐릭터가 뒤섞이기도 합니다.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서사가 필요한데, 오히려 여기서는 그 독립성을 파괴하고 각 코너별로 넘나들게 함으로써 캐릭터의 허구성과 작위성을 노골화시키는 특성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세바스찬땅그지그리고 유치원생의 캐릭터는 임혁필을 중심으로 필요에 따라 수렴/발산을 반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그콘서트>의 모든 코너들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그 코너의 순서나 흐름을 학습하고, 학습한 정도만큼 그 코너의 흐름에 몰입하는 것이죠. 관객들이 반복되는 대사나 개인기를 익히고,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해당 코너에 대한 충성도는 높아집니다. 이러한 관객들의 개입은 <개그콘서트>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되며, 이것은 다시 <개그콘서트>로 피드백 되어 관객들의 향유 내용이 실제 코너에 개입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향유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회로를 확보하려는 것이지요.

<개그콘서트>의 웃음은 무겁지 않습니다. 어설픈 계몽이나 현실에 대한 싸늘한 조소 그리고 날카로운 풍자 따위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사적인 의미에서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느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명사적 의미의 내용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개그콘서트>의 전략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가에 대하여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프로의 파괴된 서사를 분석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징후와 예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가 드러났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 발현되는 문화 공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인식 방법과 향유 형태를 가지고서는 지금 이곳의 문화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텅 빈 웃음, 반복과 학습, 향유와 유대의 메커니즘, 상호텍스트성의 극대화, 아우라의 공유 등 <개그콘서트>의 변별적 자질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인의 추억><지구를 지켜라>가 흥행의 극단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임을 <개그콘서트>의 읽으며 생각합니다.

나가 이-!”

혀 짧은 소리로 봐서 둘째입니다. 아내의 분위기로 보아 아마 둘째는 제 방으로 나가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경박하지도 경쾌하지도 않는 그저 가벼운 지금 이곳입니다.

<매디프렌> 2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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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 달아지는 이유

 

박 기 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74년 봄 우린 서울로 이사왔다. 청주에서의 살림을 정리하여 210만원을 갖고 시작한 서울 살림이었지만 1년도 못되는 시간에 살림은 반으로 줄었다. 생전 해보지도 않은 식료품점을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할머니는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시작하셔야 했다. 그 무렵의 서울살이 풍경이 대개 그러했겠지만 부모님은 가게에서 늦게까지 계셔야 했고, 집안 살림과 아이들 건사는 모두 할머니 몫이셨다. 아이들 다섯의 끼니는 물론 다섯 개의 도시락과 가게에 계신 부모님의 끼니까지. 청주에서만 사시던 분이 서울에 올라오셨으니 지리도 모르고 지리를 안다고 해도 딱히 갈 곳도 갈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작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공식적인 외출은 내 결혼식이 유일한 것이었다. 20여년의 참 길고도 지루했던 수감생활(?)이었다.

그 지루했던 할머니의 서울살이를 나름대로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진로 소주였다. 할머니가 언제부터 소주를 드셨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할머니의 소주 심부름은 아마도 서울 살이를 시작한 그 무렵부터인 것 같다.

다행히 옆집 할머니와 쉽게 친해지셨던 할머니는 이따금 길음시장의 녹두빈대떡 심부름을 내게 시키시곤 하셨다. 신문지에 그 뜨뜻한 것을 싸서 집으로 달려오면 할머니는 어디서 나셨는지 소주를 준비해 두셨었다. 그때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정정하시고 힘이 있으셨던 시절이다. 한 번 실패했던 아버지의 일들이 같은 과정을 몇 번 되풀이하면서 할머니는 녹두 빈대떡을 더 이상 시키실 수 없었다.

철이 들면서 할머니께 왜 그 쓴 소주를 드시냐고 여쭈어보면 속이 상해서 마신다고 하셨다. 소주 심부름이 귀찮아서 소주 좀 그만 드시라고 하면 니 놈이 소주 한 번 사주어 봤어?”하고 서운해하시기도 하셨다. 할머니의 소주를 이해하게 될 때쯤 할머니의 잔에는 소주보다는 더 많은 물이 섞이게 되었다.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기 때문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머리가 커진 손자들이 소주 심부름을 꺼려해서 소주 한 병을 두고 오래 드셔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소주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된 것은 내가 술을 마시면서부터였다. 집에 들어가다가 할머니 생각이 나면 소주를 사다드리곤 했다. 그 무렵부터 할머니는 쉽게 취하셨다. 소주잔에 반쯤 소주를 따르고 반쯤은 물을 타서 드시면서도 너무도 쉽게 취하셨다.

부모님이 가게에서 주무시고 아이들을 혼자 키우셔야 했던 할머니는 이것저것 가슴앓이가 많으셨다. 청주에 살 때만 해도 주변에 친구분들도 많았고 당신이 돈을 버실 때니까 기활 좋게 털 것은 털어 내실 수 있었다. 집에는 늘 할머니의 친구분들로 북적대었으니까. 하지만 서울살이는 그렇지 못했다.

제 몫의 일들에 쫓기던 손자들 누구도 할머니와 마주 앉아 곰살맞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아이들을 학교로 일터로 보내고 나면 아버지가 아침을 드시러 들어오시고 서둘러 가게로 나가시면 덩그러니 빈집엔 할머니만 남으셨다. 어린것들의 입맛을 맞추지 못한다시며 TV요리 프로를 즐겨 보셨던 할머니. 하지만 그 끝 말씀은 늘 저렇게 양념 넣고 누가 못해?”라고 하시며 한 번도 그 음식을 만들지는 못하셨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아는 몇 안되는 것들을 TV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반가우셨던 것이다. 당신은 늘 TV를 보셨지만 여쭈어보면 내용은 알지 못하셨다. 그저 바깥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TV였다. 저녁상머리에서 할머니는 그날 뉴스를 할머니 나름대로 조각조각 잇곤 하셨다. 당신의 기억 속에 정지했던 드라마는 70년대 초의 <꽃피는 팔도강산>이 전부였다.

아이들 뒤치다꺼리는 물론 성장기의 우리 오남매에게 부모님 역할까지 하셔야 했기에 늘 마음을 졸이고 염려가 많으셨다. 밥은 먹었느냐? 밥 더 먹어라. 굶지 말고 다녀라. 늘 먹는 것에 관한 염려가 많으셨다. 밥은 할머니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집에 밥이 떨어지는 것을 몹시 불안해 하셨다. 찬밥이 남아서 아침에 당신이 드시더라도 꼭 나간 형제가 있으면 그를 위해 밥을 담아 두셨다. 그래서인지 나도 밥을 먹다가 밥이 떨어지는 것은 못 참는다. 그럴 때면 아내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밥은 떨구지 말라고 화를 내곤한다.

중학교 때인가, 친구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아직 저녁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라면을 먼저 먹고 기다리라고 라면을 끓여 주셨다. 라면이 밥보다 더 좋을 나이였던 우리는 그러마고 했다. 잠시후 할머니가 끓여주신 라면은 웬일인지 하얀 색이었다. 알고 보니 빨리 대접해야한다는 마음에 스프를 넣지 않고 끓여주신 것이었다. 다 끓은 라면에 스프를 넣어 먹던 그 비릿한 라면.

제사 다음날이나 명일 때에는 관리 아저씨나 청소 아저씨를 불러서 당신이 아끼는 진로소주 한 병과 음식들을 내어가곤 하셨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 박하면 안된다고 하시며.

부모님은 떨어져 계시니까 늘 우리들의 귀가 시간을 전화로 점검하셨는데, 대학 다니던 누나나 내가 잘 지켜질 리 만무했다. 아이들 들어왔냐는 엄마 전화를 중간에서 막아주시는 것은 늘 할머니였다. 그렇다고 당신이 마음 편안히 우리를 기다리셨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늦는다고 전화를 드려도 손자들이 들어올 때까지 뜬눈으로 기다리셨다. 그러다 지루하면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하면 한 잔씩 하셨다.

하루에 두세 잔인 소주였지만 팔십 노인에게는 늘 과한 주량이었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면 할머니는 젊은 시절 고생하시던 말씀을 하셨다. 열여섯에 시집와서 만주까지 갔다가 서울로 왔다가 청주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 그래서 할머니의 서울에는 625가 끝나지 않아 있었고, 간혹 로스케 병사들이 등장하고, 때로는 만주에서 피난 나오면서 두고 온 소, , 닭 등이 살아오기도 했다.

한 번은 서울에 공습경보가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우리 오남매를 단속하시고 제일 먼저 집안에 있던 계란을 모두 삶으셨다. 혹시 피난을 가야될 지도 모르는데 그 아까운 것을 두고 가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40여년 전에 만주농장에 두고 오셨던 그 가축들 때문이라고 하셨다. 딱히 가지고 갈 것도 없는 우리 살림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어디 한 줄의 계란이었으랴?

이제는 제법 밥벌이를 할 나이가 되어 할머니 소주를 넉넉히 받아 드릴 수 있게 되자 당신은 소주를 드실 수 없게 되었다. 얼마나 상투적인 시간의 전개인가? 하지만 삶은 얼마나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넘어지시는 일이 잦아지고, 그 횟수가 반복될수록 할머니는 자주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운신도 제대로 못하시는 분이 새벽 4시만 되면 아이들 방문을 두드리며 빨리 일어나 학교에 가라고, 아내와 본가에서 자는 날이면 어여 일어나 밥을 하라고 깨우셨다. 참 그로테스크하고 눈물나는 풍경이었다. 오남매의 새벽밥을 20여년 지으시며 그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짐이었는지, 난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당신이 건강하실 때, 내가 새벽까지 책을 보거나 무엇을 쓴다고 깨어 있으면 슬며시 문을 열어보시고, 그 어려운 골파먹는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고 걱정이셨다. 그러고는 배고프지 않냐고 묻는 것도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 당신 손에 밥을 얻어먹을 때는 비루먹는 말처럼 비비 돌아가더니 마누라가 해주는 밥을 먹으니 살이 찐다고 기쁨 반 서운 반 웃으시던 할머니.

할머니가 누워 계시는 시간이 늘면서 치매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당신의 아들에게 오빠라고 부르시기도 했고, 당신의 며느리에게는 누구시냐고 물으시기도 했다. 그러다 모두 출가하고 오남매중 유일하게 집에 남아 있던 아우가 필리핀에 가이드로 떠나기 며칠 전, 할머니는 풍을 맞으셨다. 막내가 떠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으셨던 거라고 식구들은 말했다.

결국 환갑이 넘으신 아버지가 할머니 간호를 위해 가게에 나가지 않으시고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셨다. 대소변을 받아 내야하고, 진지를 챙겨드려야 하고, 시간 맞춰 당신을 돌아 눕혀드리고 등창난 부분에는 약을 발라 드려야 했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당신의 며느리나 손자며느리가 아니면 기저귀에 손도 못 대게 하셨다. 가시는 그날까지도 당신의 아들에게 어머니의 품위를 지키고 싶으셨던 것일까?

그 무렵 딸아이가 태어났다. 몸의 반쪽을 운신하지 못하시면서도 당신의 증손녀를 보면 미소를 지으시고 늘 같은 말을 물으셨다. 그것도 손자며느리 몰래 당신의 손자에게만 낮은 소리로 아들이지?”. 발음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늘 당신의 증손녀를 보시면 울음 반 웃음 반의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당신의 아들조차 가끔씩 오빠라고 부르셨지만, 당신의 손자들만은 정확히 알아보셨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치매와 풍이 심해져서 아무도 할머니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당신들의 손자들만은 알아들었다. 할머니와 나눈 외로움의 교감이 그렇게 깊은 것이었을까? 가금 정신 돌아오시면 내 손을 잡고 힘들지 않냐고 너무 골 쓰며 살지 말라고 걱정이셨다. 가시는 그날까지 끝내 손자들이 마음이 걸리셨던 것일까?

할머니는 풍을 맞으신 지 딱 일년만에 가셨다. 가게를 그만두고 집에 계시던 당신의 며느리가 위층에 간 사이, 당신의 맏손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시간, 당신의 막내 손자가 여행객을 데리고 보라카이로 날아가던 그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신의 아들만을 곁에 두고 가셨다고 했다.

생전에 당신의 푸짐한 밥인심에 이건 순전히 밥고문이라고 엄살을 떨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당신이 대접하시는 음식들이 모두 맛있다고들 했다. 그래도 막내손자까지 출가하는 것보고 돌아가시어 복 받은 분이라고들 했다. 편안히 가시어 좋은 데로 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 걱정 많던 분이 어떻게 안심이 되어 가셨는지 모른다고들 했다. 결코 쓰러질 것 같지 않던 분이 쓰러지셨고, 결코 돌아가실 것 같지 않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렇게 가셨다 할머니는.

당신이 가시고 부모님은 우리가 사는 수지로 이사를 오셨다. 집에서 불과 50여미터쯤 되는 거리다. 아내가 일을 할 때에는 아이를 맡아주시고, 저녁을 준비해 주신다. 부모님은 하루종일 딸아이를 기다리신다. 더구나 나가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성격에 서울 한 번 나가는 것이 일이고 보니 두분은 산책하시는 것 외에는 하루종일 집에 계신다. 어머니는 그나마 시장 보셔야 한다고 백화점 셔틀 버스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시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제발 나가셔서 친구분들과 약주도 하시고 스포츠 센터도 다니시라고 말씀드리지만 소용이 없다. 아버지의 유일한 낙은 딸아이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그러셨듯 달력을 오려 딸아이의 낱말 카드를 만드시고, 녀석의 말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것을 즐거워하시고,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하루라도 딸애를 본가에 보내지 않으면 무척 서운해하신다. 혹 외출을 했다가 약주라도 한 잔 하시는 날에 우리가 먼저 본가에서 오면 전화를 하셔서 애를 데려 오란다. 보고싶으시다고.

저녁 식탁에서 고봉밥을 떠주시고도 더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서 할머니의 모습을 본다. 반주로 드시는 소주의 잔 수를 조절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할머니가 보인다. 그것은 누가 내게 아버지와 꼭 닮았다고 하는 것만큼 싫은 일이다. 하지만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다가, 소주잔을 들다가,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하다가, 밥을 먹다가, 양복주머니에 왼손을 찌르며 걷다가 나도 아버지를 내게서 느끼는 것처럼, 당신들도 어쩔 수없이 할머니의 연세를 맞고 계신 것일까?

요즘은 문득문득 할머니를 느낀다. 그만큼 내 삶이 가파라지고 있다는 뜻일 게다. 전에는 힘들 때면 할머니에게 털어놓곤 했었다. 알아듣는 말보다는 그렇지 못한 말이 더 많아도 당신은 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셨다. 그러고 다듣고 나서는 별말씀 없이 당신의 소주를 나누어주시곤 했다. 이제는 물 탄 소주를 나누어주시던, 아무 것도 모르지만 너는 내가 안다는 표정으로 손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는 그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일까?

점점 소주가 달다. 오늘은 집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막걸리라도 받아 가야겠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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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베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밤늦게 퇴근하여 들어와 보면, 둘째의 책상에는 오늘 본 책들이 잔뜩 쌓여 있고, 제 어미와 함께 공부했을 식탁에는 서너 개쯤 까먹은 귤껍질과 틀린 문제만큼 만들어졌을 지우개 찌꺼기가 수북하다. 녀석은 들어서는 내게 느닷없이 안기지만 이제 자야한다는 아내의 말에 투덜대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내의 베개를 들고 구시렁대며 제 방 침대로 간다.

이 이상한 습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내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둘째에게 아내의 베개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는 알고 있다. 아내의 베개를 두 팔로 꼭 껴안고 그것도 부족해서 다리로 다시 힘껏 조이듯이 끼고는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녀석의 모습만 보아도 그것은 쉽게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둘째의 행동은 Charles M. Schulz의 만화 <피너츠>에서 엄지손가락을 물고 담요를 끌고 다니는 라이너스처럼 부모의 맞벌이로 인한 애정 결핍이 원인은 아니다. 전업주부인 아내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넘치면 넘쳤지 부족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둘째의 또 다른 이상한 잠버릇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녀석은 제 방문을 항상 2/3쯤 열어 놓고 잔다. 푹 자라고 문이라도 닫아줄려고 하면, 언니가 놀려주려고 아내의 베개를 감추었을 때처럼 아주 야단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대답이 그럴 듯하다. 늘 자기 곁에 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둘째에게 엄마는 지독한 중심이다. 흔들리지도 변하지도 않는 중심, 언제나 자기 뒤에서 어떤 경우에도 지켜줄 든든한 중심, 누구도 뭐라 그럴 수 없는 합법적인 부조리, 그 중심이 둘째에게는 엄마인 것이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첫째는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 침대와 자기 침대를 묶어놓고 아내의 손가락을 만지며 잠이 들곤 했었다. 돌아보면 나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할머니의 말라버린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잠이 들지 않았던가? 할머니가 싸주시던 도시락으로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와 힘들어할 때, 아무 것도 모르지만 너는 내가 안다는 표정으로 손자를 끝까지 지켜봐주시던 그 든든한 후견(後見). 둘째에게 아내의 베개는 엄마요 중심인 것이다, 내게 할머니의 젖가슴이 든든한 후견이었던 것처럼.

일본 준아이(じゅんあい)물의 대표작인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서로가 서로의 중심이 되는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는 까닭에 죽은 엄마가 비의 계절에 돌아온다는 황당한 설정을 너무도 가볍게 넘어선 작품이다. 비의 계절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미오가 남아야 할 아픈 남편을 위해 요리법이나 세탁법을 어린 아들에게 가르치고, 어린 아들을 위해서는 성년이 될 때까지의 생일 케익을 미리 주문하는 모습은 자신이 그들의 중심임을 절절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중심이 되고 있는 한 타쿠미의 가족은 아프지만 아프지 않고, 삶과 죽음으로 갈렸으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이번 겨울이 유난히 길 것이라고 한다. 이 겨울을 어떻게 건너가야할지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졸업을 앞 둔 4학년 제자들은 사회에 나가 취업을 해야 한다. 또 그들의 후배들은 해외 인턴과 어학연수를 나가고 있다. 터무니없고 느닷없이 찾아온 위기 앞에서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만을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은 위기를 인정하고 그것에 당당하게 맞서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 지독한 혹한의 계절에 사회로 나가야하는 제자들과 해외로 인턴과 연수를 나가야하는 제자들에게 비록 변변한 경제적 후원이 되어주지는 못하더라고, ‘아내의 베개할머니의 젖가슴처럼 그들의 변하지 않는 든든한 중심이 되어 주고 싶다. 제자들이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고 후견이 될 수 있는 그 자리, 난 그곳에서 아내의 베개이거나 할머니의 젖가슴이 되고 싶다

2009년<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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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위로가 찬란한 이유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월은 온통 연두다. 연두는 햇빛을 온몸으로 통과시키며 제 빛깔을 만든다. 막힘없고 거침없는 것들은 강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받아서 제빛과 어울리게 하는 연두와 같은 것들이다. 오월은 그런 계절이다.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더할 수 없는 찬란함에 이르는 계절, 그것이 오월이다.

어제 저녁 친구의 조문을 다녀왔다. 친구임에는 분명하지만 친구라기에는 25년쯤의 시간을 건너야 하는 대학동기의 빈소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선명한 인상의 그 친구는 작은 소리로 말하지만 크게 움직일 줄 아는 친구였다. 늘 최루탄 가루가 마른버짐처럼 피어나고, 민주화의 구호들이 절실한 만큼 격했던 그 시절, 같이 분노하고 아파하며 그 긴 겨울공화국을 건너왔던 친구들이 전날 벌써 한걸음에 달려왔었다는 말을 이제는 터무니없이 나이든 선배가 전해줬다. 처연하게 타오르는 향 위로 탐스럽게 핀 흰 국화가 쌓이고 있었고, 그 위에서 대학시절의 선한 눈 그대로 친구는 그렇게 시간을 멈춘 채 영정 안에서 웃고 있었다. 작년 여름 동기들이 학교 앞에서 모이던 날, 일이 늦게 끝나서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에게 보자고 약속했는데, 어제 우리 동기들은 다음을 잃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스스로 목숨을 놓기 전, 친구는 동기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각자 사는 일에 분주한 친구들은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고, 결국 빈소에서 영정으로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약속은 부질없을 뿐이다.

대학마다 축제가 한창이다. 혹자는 대학축제가 낭만이 사라졌고, 술만 퍼 마시며, 연예인들의 축하공연 중심이라고 비판한다. 옳은 말이다. 학생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는 해마다 줄고, 그것이 주는 만큼 주점과 어설픈 유흥이 넘치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학생들의 참여가 해마다 줄고 있다는 점이다. 즐길 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없고 즐기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축제가 흥성거릴 수 있겠는가? 가야 볼 게 없다거나 즐길 것이 없다는 볼멘소리는 사실이지만 옳지는 않다. 그것은 잔칫상을 차려야할 주체가 누군가 자기 잔칫상을 차려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찬란한 계절,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찬란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축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있느냐는 사실만으로도 축제는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위로가 필요하다. 그것이 하림의 노래 <위로>이거나 즐거운 축제가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 위로하거나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아볼만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놓을 만큼 위로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그걸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나?”라고 묻는 존 라세터의 말이 시간이 흐를수록 뼈저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찬란한 계절에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있는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할 때다. 연두가 찬란한 오월이다.

2009년 <한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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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리들이 두렵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재범이 출국했다. 잘 나가던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던 그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쫓기듯이 출국했다. 이유가 무섭다. 미국 내 네트워킹 사이트인 마이스페이스2005, 2007년에 올린 글에서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네티즌이 캡처해서 자기 스타일로 번역하여 올린 글이 삽시간에 나라 전체를 압도했다. 번역 방식이나 어감 차이 혹은 현지의 관용적인 표현 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글이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토록 일사분란하게 평가하고 단죄하는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기민함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출국 이후, 소속사와 나머지 멤버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또 얼마나 단정적이고 기민했던가?

야구를 참 즐겁게 했던 정수근이 돌연 은퇴를 했다. 소속팀의 열혈팬이 거짓 신고를 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방출을 통보했고, KBO는 그에게 자신의 무죄를 법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증명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그는 결국 젊은 나이에 그라운드를 떠나야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켰었다는 전력과 소속팀에 대한 열혈팬의 과도한 충정 그리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팀과 KBO의 안일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실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그것의 검증에 필요한 토론 과정보다는 선정적 결과물에 맹목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재를 볼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소리’(多聲)다른 소리’(異聲)로 충만하고, 그 안에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조화와 합의의 과정이 시스템화된 사회다. ‘하나의 소리다양한 소리를 압도하고, ‘똑같은 소리다른 소리를 윽박지르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단결결속을 뜻하는 파쇼(fascio)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파시즘(fascism)은 현재적 불안의 결과다. 지금의 안온한 일상이 깨질 수도 있다는 불안, 그 불안은 서로를 결속시키고 단결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과도하게 강화함으로써 일사분란함을 얻지만 이성적 판단을 잃는다.

파시즘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항상 희생의 제물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인종, 국가, 지역, 종교, 사회적 공익, 도덕적 명분 등을 앞세워 희생의 제의를 치르고 그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 결속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를 상기해보자. 절박한 고비에서 자신들을 위해 프로이센 장교에게 몸을 팔 것을 요구하고, 이후에는 그 매춘부를 경멸하는 역마차 안의 사람들. 자신들의 비겁한 타협을 잊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그 매춘부를 비난하고 경멸하던 그 사람들의 지독한 파시즘. 그 매춘부에 비해 자신들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합의해버리는 이기의 폭력.

난 우리들이 두렵다. 어린 여가수의 허벅지를 꿀벅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면서도 누군가의 말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과거의 실수로 현재를 집요하게 단죄하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윽박지르는 우리들의 함성이 두렵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토론도 용납되지 않는 우리들의 맹목과 누군가의 입을 모두의 입으로 닫아버리는 우리들의 반성하지 않는 정의(正義)가 두렵다. 오늘 난 우리들이 두렵다.

 2009년 <한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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