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연대를 건너려는 당찬 시도

1970년대 문학연구(소명출판사,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금 이곳의 좌표에 따라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그것은 현재의 관점에 따라 과거사의 실체가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사에 주목하는 이유와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학사도 역사의 이러한 진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문학사 연구는 시작은 있으되 끝이 없는 연구이며, 과거에 눈을 돌려 오늘을 보고자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문학연구, 특히 문학사 연구의 행보는 매우 더디고 조심스럽기만 하다. 연구의 대부분이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 결과 연구 주제나 연구 방법에 있어서 현실적인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위의 관점에서 이것을 판단해본다면, 결국 오늘의 문학이 과거 문학사를 다시 평가할만한 나름의 안목이나 전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민족문학사연구소 현대문학분과의 1970년대 문학연구는 매우 소중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각기 다른 학교의 연구자들이 모여서 일정 기간 학습과 세미나를 거쳐 20여 편의 견실한 연구 논문을 수확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뜻 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을 보다 생산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이 책이 1) ‘1970년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문학사라는 점, 2) 공동연구의 성과물이라는 점, 3) 비교적 소장 연구자들의 연구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2000년 오늘, 우리에게 1970년대는 아직 살아 숨쉬는 연대이다. 역사의 시간은 그저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에 의해 변화할 때, 비로소 흐른다고 했던가? 역사는 단지 시간이 흘러갔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마디마디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1970년대는 아직 살아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유신의 주체였던 세력들이 아직 정치권에 지도적인 위치에 남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수라는 이름으로 휘두르고 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은 1970년대적 모순이 극복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오히려 심화은폐됨으로써 저항과 견제의 어떠한 시도도 꿈꿀 수 없는 보다 열악하고 야만적인 정세를 맞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1970년대는 어떠한 연대였나? 정치적으로는 유신 독재의 전횡과 그에 대한 민중들의 주체적 자각과 저항,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의 하나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졌던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성장위주의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적 수탈과 억압체계의 확대와 자본주의의 정착과 그 역기능이 동시에 등장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부의 양극화 현상과 계급 모순의 심화, 농촌 붕괴로 인한 급속한 공동체적 전통의 붕괴, 개발 우선 정책으로 인한 환경 파괴라는 자본주의의 역기능이 유신체제라는 상부구조와 유기적으로 결탁하고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이와 같은 노골적인 억압과 수탈 그리고 기만의 시기에 문학은 다소 방법의 차이는 있었지만 적극적인 현실 대응에 임했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딱히 제기할 반론이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만큼 상투적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이것이 문학사로서 1970년대 문학연구에 대해 제기하고 싶은 문제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연구자들은 “70년대 한국문학은 정체성을 잃은 혼돈의 한국문학이 자기 갱신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교과서(p.4)”이기 때문에 민족 문학적 관점에서 70년대 한국문학의 전체 상을 재구성하려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 1970년대의 문학을 민족 문학적 관점에서 재구함으로써 정체성을 잃은 한국문학의 자기갱신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다. 여기저기 발표했던 논문들이 일정 부피가 되면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출간하는 것에 익숙한 이 땅의 연구자들에게, 분명 이와 같은 시도는 신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사로서 좀더 생산적인 작업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민족 문학적 관점이 2000년 오늘의 한국문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둘째, 민족 문학적 관점에서 70년대 문학을 재구하여 오늘의 문학을 갱신하겠다는 의지가 자칫 본질주의적인 접근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셋째, 1970년대 문학에 대한 연구가 오늘의 문학에 과연 생산적으로 반영되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위에서 첫째로 제기한 문제는 민족문학이 과연 2000년 오늘 한국문학에 의미가 있을까없을까 하는 연구 관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 연구가 보다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민족 문학적 관점과 2000년 한국문학과의 상관성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양자의 상관관계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이 연구들은 개별 연구 그 이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연구자들이 말하는 생산적인 문학사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같은 작업이 문학을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본질주의적 접근이란 복잡한 전체의 여러 속성 가운데 가상의 내적 진리나 본질에 준거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방법을 말한다. , 다양성과 가변성을 생명력으로 하는 문학을 단일하고 통일적인 가상의 내적 진리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이며, 그것을 작품성의 척도로 제시함으로써 결정론적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책의 연구자들이 주장한 ‘70년대 문학이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오늘의 문학에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70년대 문학이 근대의 밝음과 어두움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문학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1) 2000년 오늘의 문학이 정말 정체성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인지, 2) 70년대 문학이 근대의 밝음과 어두움에 과연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문학인지, 3) 그러한 주장의 근거인 민족문학론이 문학이라는 측면과 현재성의 측면에서 과연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먼저 주어야한다. 1)2)의 문제는 3)으로 수렴할 수 있다. 따라서 1)2)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3)이 문제가 선결되어야한다. , 민족문학론이 과연 한국 문학의 정오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회의적이다.

 

70년대의 민족문학은 이 저항, 특히 민중의 저항에 주목했다. 그럼으로써 70년대 민족문학은 분단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의 전위가 되었다. (……) 그것은 70년대 민족문학이 반체제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흐름을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70년대 민족문학의 이러한 급진성은 80년대의 민족문학과 비교하더라도 그렇다. 필자는 90년대에 들어와 민족문학이 침체에 빠진 내적 요인 가운데 결정적인 것이 지나친 급진성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민족문학은 노동해방문학이나 민족해방문학으로 가면서 스탈린주의에 침윤되었고, 스탈린주의는 민족문학에서 유토피아적 충동을 거세시켰다.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가장 자기 완결적인, 그래서 자기 갱신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 담론이다. (……) 그처럼 자기 완결적인 폐쇄적 틀 속에서 유토피아적 충동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p.18)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그것은 민족문학의 전개과정에서 80년대 민족문학의 스탈린주의로의 경사, 90년대 이후 현재적 적합성의 상실 등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문학이 꿈꾸는 영원한 유토피아적 충동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80년대 이후 상실된 급진성의 회복이 절실하다며, 그것의 좋은 예를 70년대 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하정일의 주장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민족문학론의 활로 모색이라는 측면에서는 의의를 지닐지 모르겠으나, 본질주의적이라는 한계를 극복한 것은 아니다.

셋째는 이 책의 연구들에서 과연 오늘의 문학에 생산적으로 반영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1부 총론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논문을 발견하기 어렵다. 명시적인 항목으로 설정되지는 못하더라도 오늘의 문학에 어떻게 생산적인 반영을 이룰 수 있는지 문제 제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이 책의 머리말에서 밝힌 생산적인 반영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앞에서 밝힌 바처럼 문학사는 과거에 눈을 돌려 오늘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행형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것이 영원한 진행형으로서 생명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재적 가치와 적합성에 의한 좌표 설정과 의견 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형적인 형태였지만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유신 체제의 폭압적인 상화 속에서 민중들의 주체로서의 자각을 이루었던 70년대 문학의 의의를 다양한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고, 그것이 2000년 오늘이 문학에 생산적 방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획은 이 책의 미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그것이 본질주의적 접근이었다는 점, 그것이 작품 연구 등을 통해서 규명되는 데에는 미흡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은 공동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전에도 공동 연구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일정 기간에 동안의 학습과 세미나를 걸쳐 그것을 일정한 기획 의도 아래 출간한 연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연구자들의 개인적인 작업 성향, 각기 다른 학풍 속에서 공부해왔다는 점, 그리고 공통된 테마를 선정하기 어렵다는 점들이 원인이었다. 따라서 이 연구서는 값진 성과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책을 좀더 애정을 갖고 읽다보면, 좀더 짜임새 있는 기획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가 3부로 구성되었는데, 적어도 각 부의 서두에는 각론의 기준이 제시되어야 했다. , 총론의 5개의 논문은 어떤 기준에 의해 배분되었는지, 주제론의 10개의 논문은 총체적인 조망을 위해 어떤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지, 작가론에서 언급된 8명의 작가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 채택된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 필요했다. 또 연구 성과를 하나의 연구서로 묶는 것을 전제로 했다면, 각각 논문에서 중첩되고 있는 시대 상황에 대한 대동 소이한 언급과 중첩되는 작품 설명 따위는 배제했어야 했다. 좀더 욕심을 내보자면, 각 논문간의 유기적인 연관이 매우 미흡했다는 점이다.

이제 디지털이라는 말이 접두사처럼 쓰이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 시대의 중심 화두인 디지털의 키워드 중의 하나가 NET가 아닌가? 이 말은 남과 다르게그러나 남과 함께라는 공동 작업(co-work)을 강조하는 말이다. 공동 작업의 당위성을 인정한다면 남는 것은 이제 그것을 어떻게 짜임새 있게 엮어내는 것이 아닐까?

공동작업에 대한 아쉬움은 그만큼의 기대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연구자이 이 정도의 성과를 내었으니 다음 연구서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기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소장연구자들의 성과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소장 연구자들의 도전적이고 새로운 방법론의 접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기대는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장 연구자들의 연구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목할만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연구가 1970년대에 대한 초기연구에 속한다는 점에서 자칫 기존의 논의를 고착시켜버릴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

가령, 1970년대 모더니즘 시의 겨우, 그 텍스트를 기존의 문학과 지성사의 텍스트로 한정지음으로써, 문학과 지성이나 창작과 비평의 문화 자장 밖에 머물렀던 유수의 시인들의 작품이 배제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과연 70년대 한국 시단의 모더니즘 시는 문학과 지성사의 텍스트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김현의 평론이 많은 시인들을 발굴해낸 것도 사실이고, 문학과 지성70년대 한국문학의 한 축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에 시선에서 배제됨으로써 마치 한국문학사의 미아처럼 취급되는 숱한 시인과 작가 군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작가론의 경우, 황석영, 조세희, 이청준, 최인호, 김지하,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만을 다룸으로써 스스로 참신한 시각을 봉쇄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 작가들에 대한 기존의 숱한 평론과 연구들과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연구를 여기서 굳이 되풀이 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훌륜한 작품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아직 조명 받지 못한 작가나 시인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이 참신하지 않는가? 물론 예의 작가나 시인들이 7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장 연구자들이 기존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안일한 연구 태도는 분명한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만 한다. 현금의 문화권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왜 그 모태가 되고 잇는 70년대의 문화권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한지 아쉽기만 하다.

이제 마무리하자. 2000년 오늘, 이 책의 문제제기는 매우 시의 적절한 것이며 유효한 것이다. 또한 앞으로 이와 같은 작업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도 가져볼만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제기가 구체적인 연구성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하나의 소문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공동연구의 장점을 보다 짜임새 있는 기획으로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장연구자들의 보다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의 연구가 절실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한국문학평론200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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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懷疑)가 만나는 자유 셋

 

박 기 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문학은 늘 위태롭다. 위기 운운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더욱 가파라지고 있다. 이 겨울, 문학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경제한파 등의 외적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내부에 있다고 한다. 대중적인 시류에 영합하기 위해 끝없이 시도되는 일탈의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선정주의의 질주는 그 끝을 우울하게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조건상, 황충상, 박청호의 다양한 목소리가 반가운 것이다.

 

1. 깊고 따뜻한 시선 --- 조건상, 이웃사람 엄달호

 

조건상의 시선은 깊고 따뜻하다. 10여년 시간의 간극을 두고 서 있는 8편의 작품 모두 사람에 대한 이해와 신뢰로 그 온기를 발한다. 아랫목 담요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한 주발의 밥처럼 그 적당한 따스함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넉넉히 덥히고 있다.


한 주발의 밥이 그렇듯 그의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꼼꼼한 일상의 재구(再構)와 인과성(因果性)에 대한 애착은 그의 소설문법이 전통적인 방법에 기대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은근한 사랑과 관심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떠도는 혼><중공에서 온 손님>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내가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공간, ‘돌아가야 할당위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돌아갈만 하지는 못하게변해버린 공간인 고향. 이처럼 작가가 고향의 공간에 집착하는 것은 그곳이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고향을 찾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지만, 작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그 고향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아직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지 못한 채 대중소설의 선정적인 소재로 전락해 있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교수립 이전에 이미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선구성(先驅性)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소재적인 선구성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가 곧 오늘 우리의 문제라는 성찰의 선구성 때문이다. <떠도는 혼>에서는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그들이 겪는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이나 또는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고향에 대한,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에 주목하고 있다. 보상금이니 일왕(日王)의 사과니 하는 문제로 모든 시선이 쏠려있는 현실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고향 사람들이 따뜻한 손이라고 작가는 강변하고 있다. <중공에서 온 손님>에서는 이제는 손님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동포가 찾아간 고향, 즉 오늘 우리의 각박한 세태에 대한 성찰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작품이 쓰여진지 10년이 안돼서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신선한 예감 하나>는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계에 대한 소심한 나의 힘겨운 응전이다. <인사 이동>은 우울한 대학의 풍경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다. 체험에서 비롯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작품의 구조적인 긴장을 이완시키는 아쉬움이 있다.

<민통선 하늘에 걸린 새벽달>요령에 의하여 얻어진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대대장의 허위 만들기는 죽은 자를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허위일 따름이다. 진실과 허위의 상투적인 갈등보다는 고발적 성격이 강한 탓도 있겠지만, 화자인 가 좀더 치열하게 허위와 대결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허위에 대한 묵인이나 방조 역시 허위일 뿐이다. 화자의 진실에 대한 의지와 내적 갈등이 너무도 쉽게 무너짐으로써 자신과는 무관한 고발이 되어 버린다. 고발은 수정을 전제로 해야한다. 나와 무관한 고발이란 무책임한 질책일 뿐이기 때문이다.

<솔바람 소리>는 아들의 장애를 인정하지 못하는 부모가 아들의 죽음으로 비로소 장애를 받아들이고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장애아의 문제를 그리면서 장애아가 아닌 부모의 일그러진 마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장애아를 돌보는 부모의 가파른 심리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부모인 동시에 모순된 인간일 뿐임을 이해함으로써 그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 모순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껴안음으로써 그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며 동시에 인간의 모순을 없애야할 것으로 몰아대는 모든 억압적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옥탑위의 까치집>은 평자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외로운 여인의 상처를 감싸 안는 과정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깨닫는 화자, 사랑은 탈색되고 관계만 남은 아내와의 관계, 새집으로 표상 되는 온전한 일상에 찾아든 까치집 같은 사랑을 통하여 작가는 가족적인 관계의 망이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돌아보고 있다. 부모이거나 남편이기 이전에 존재로서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성찰과 사랑을 통해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남편도 없이 십여년 동안 홀로 키워 온 딸을 외국으로 떠나 보낸 그날 밤, 묵은 인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고 있는 여인의 삭정이처럼 바싹 마른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나는 조심스레 몸을 놀렸고, 여인은 여인대로 떨떠름한 내 마음을 헤아리고나 있는 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의 벗어버린 알몸처럼 아무런 꾸밈새도 없이 나를 편안하게 받아줌으로써 어떤 굴레 속에 갇혀서 자꾸만 작아지려는 나에게 적당한 용기와 뻔뻔스러움을 부추겨주고 있었다.(192)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중년 남녀의 사랑은 오히려 자기 찾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허전한 빈둥지만 상처처럼안고 있을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하여 화자는 오히려 자신이 상처를 다스려준 여인이 자기에게 아늑한 숲이며 외로움을 씻어주는 강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따뜻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상처 감싸기의 연장선상에 <이웃사람 엄달호>가 놓인다. 벼락 상승한 P동의 오늘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원주민 엄달호 일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월남전에서 미군들을 구하려다가 성불구가 된 엄달호나 성추행을 당해 다른 이의 아이를 갖게된 부인이 가해자일 뿐인 냉혹한 현실을 건널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추행을 당해서 갖게된 아이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감동적이다. 어긋난 인연에 대한 희망은 또다른 사랑 만들기이며 아울러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결과이다.

모순된 존재로서 인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노력이 조건상의 시선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화려하진 않지만 따뜻하다. 모질게 추운 것이 날씨 탓만이 아닌 이번 겨울, 조건상의 이웃사람 엄달호와 함께 건너는 것도 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방법이 될 것이다.

 

2. 없음으로 깨닫는 있음 --- 황충상, 나는 없다

 

향을 태운다. 꼿꼿한 자세로 시선을 붙잡고 있지만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불을 붙이고 그것이 텅빈 공간으로 사라질 때 비로소 향이 되는 것이다. 없음으로 깨닫는 있음의 세계. 그래서 황충상의 소설에서는 향이 난다. 작품에서 유난히 없다는 것의 영원한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것도 그러한 깨달음이 데려다놓은 곳에서 사물의 배후에 있는 아픔을 감싸 안으려는 그의 구도적(求道的)인 글쓰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없음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번 작품집의 제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없다>, <殺作家>,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의 사리> 등이 그것이다. ‘없다’, ‘등의 없음의 직접적인 진술에서부터 사리라는 없음의 증명에 이르기까지 그는 집요하게 천착한다. 게다가 <악어춤>까지도 그것이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표현이고 보면 없다는 것의 의미는 그에게 남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그의 없음을 만나보자.

<나는 없다>는 중년 작가의 자기 찾기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것을 모두 떨치고 앞으로 남은 시간과 정직하게 대결하기 위해 그는 집을 떠나 자신만의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상희와의 대화를 통해 세 개의 삽화가 등장한다. 첫째 삽화는 천상의 영감을 주기 위해 그를 찾아온 베로니카를 통해 베로니카의 보살행을 깨닫는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薩 下化衆生)의 정신으로 육신은 껍데기이며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것을 베로니카는 깨우쳐준 것이다. 둘째 삽화는 믿음을 잃고 헤어진 상희부부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도는 남편과 그를 감싸주지 못하는 상희, 모든 것의 배후는 슬픔이기에 서로의 상처를 감싸지 못하는 아픔이다. 그리고 집을 나온 5년간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천녀와의 문답으로 답하며 눈멀고 귀 멀고 마음으로만 가는 길을 통해 구도적인 글쓰기에 이를 것임을 암시한다. 셋째 삽화는 정오가 남기고 간 나는 없다라는 화두이다. 그 화두를 통해 껍데기 속의 나를 깨닫는다. 그 빈곳을 통해 없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비로소 나는 내 지도를 찢어버려야 하리. 욕심부리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만 찾았던 길, 믿음소망사랑으로만 찾아내려던 길, 철학종교도덕의 길이 어떻고 저떻고, 이제 그것들 그 길에 다 두고, 홀로 간다는 마음도 벗어두고, 나는 가리. 그러면 자연의 마음에 가 닿으리. 사슴이 하늘을 달리고, 꿩이 땅속을 날고, 북한산이 파도소리를 낸다. 이 장엄한 소식 전하기 위해 내 마음속에서 무어라 이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뛰쳐나간다.(78)

그곳에서 차이와 분별이 없는 자유를 만나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놓아야하는 마음자리에 현실의 고통을 건너는 <殺作家>가 있다. 빵을 해결하기 위해 헤매는 자신을 죽이고 온전한 작가가 되리라는 것이다. <殺作家>가 깨달음으로 끝났다면 <아버지는 없다>에서는 그 실천행이 드러난다. 생활을 위한 빵이 빵을 위한 생활로 전도된 상황에서 문득 돌아본 자신의 모습, 그곳에 아버지는 없다. 이 부정의 상황에서 평상심을 회복하고 적멸(寂滅)의 체험을 통해 긍정의 세계를 만난다. 모든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활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부정을 긍정으로 전화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참선수행을 들었지만, 그것은 세계의 아픔을 나누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아픔을 나눈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괜찮다, 지금 너는 아비의 아픔을 쪼아내고 있어. 조만간 아픔 없는 아비의 상을 완성시키겠지. 그걸 보고 싶다. 그 기대에 잠겨 있으면 배길만해. 어서 네 일이나 하렴.“(146)

실체의 아버지를 쪼아 부재의 아버지를 완성하는 <아버지의 사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아픔에 주목해야 한다. 앞의 작품들에서 다소 관념적이고 공소하게 들렸을지도 모를 없음의 지혜를 구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앞의 주인공들의 다짐이 이 작품을 통해 완성되고 있다. 현실의 아픔인 아버지의 병마를 쪼아내는 아들의 예술 세계가 분별이 사라지고 하나가 됨으로써 온전한 예술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없다는 것의 영원한 아름다움”. 이제 이 작품집의 화두를 풀어야한다. 삶과 예술, 있음과 없음, 육체와 정신, ()과 속() 등의 분별이 사라짐으로써 떠오르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곳에 이 작품집의 근력(根力)이 있다. 다만 임영봉의 지적처럼, 그의 글쓰기가 탈속의 경지로 나아가면서 현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남는다. ‘세속으로만 존재하는 현실은 뛰어 넘어야할 것이지 살아내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박함과 극단적인 일탈을 그리는 것이 소설인 것처럼 대접받는 시기에 황충상의 없음의 미학은 분명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그의 불교로의 몰두는 우리 소설계에선 매우 이채로우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요한 작가를 만날 때 우리의 일상은 그 속내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

 

3. 회의(懷疑)가 만나는 자유 --- 박청호, 소년 소녀를 만나다

 

만나다라는 말에는 미래의 의미가 없다. ‘만났다만났었다는 무난히 수용하면서 유독 만날 것이다라는 말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만나다라는 말에는 소통 혹은 이해의 의미가 있다. 만날 것이다, 만나서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개선 가능성이 제거된 말, 만나다. 박청호의 소설집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그래서 우울한 빛이다. 하지만 그 우울의 밑그림은 소통을 희망하는 몸짓, 그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미래다. 이 글이 이매진에 발표된 199712월도 훨씬 지나서. 내가 라푼젤을 만난 것은 바로 거기서였다.(12)

이처럼 <라푼젤의 두 번째 물고기>에서는 서사가 완성된 후에 사건을 발생시킴으로써 현실의 시간과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 또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소설 밖으로 걸어 나오게 함으로써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파괴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숱한 이야기들과 그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잇는 구조가 세상이고 리바이던이며, 세상은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인식. 그래서 더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고 살아야한다는 인식의 결과물이 이 작품 자체가 되고 있다. 하여 서사의 인과적 고리나 현실과 소설의 경계 따위는 철저히 파괴한다. 이 낯선 세계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나와 라푼젤의 24시간의 동화 같은 사랑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 현실에서 이륙한 그들의 행동은 자유롭고 아름답다. ‘이륙하고 싶은 현실을 괄호 치고 이륙한 현실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륙하고 싶어하는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빚을 갚기 위하여>에서 구체화된다. 시인의 삶이 아닌 죽음에 관심 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진실이고 모든 것이 가짜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카메라를 통해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가장 확실한 듯 보이지만 카메라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기록하고 편집하는 자들의 정치성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 더욱 섬찍한 것은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나의 삶이 관찰되고, 그 진실이 편집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빚을 갚기 위하여>사랑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고찰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어머니의 집요한 비난은 모두 자신들의 질서로 타인의 삶을 재편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가족들이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뿐이다.

80년대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 안정을 위해 싹쓸이도 가능하다는 식의 전도된 가치관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의 통일된 평안을 위해 개인적인 사생활은 완전히 무시되는 게 우리의 가족이다. 그런 탓에 그 어느 구성원들도 가족 앞에서 정직하거나 진실 되지는 않았다. 거기서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전혀 없었다.(206)


이러한 싹쓸이식 논리가 사회에도 확대 적용된 것이 한스의 이야기이다. 가족과 다른 것은 사랑대신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된다는 점뿐이다. 하여 현실은 갑자기라는 의외성과 돌발성으로 다가오며, 그전까지 지루하게 반복관리될 뿐이다. 사랑과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 어린 시절: 여자이야기>는 이런 소통 불가능한 세계의 상처를 그렸다.


쩌면 나는 아버지와 남동생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나 진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머니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72)

어머니가 섬에 다니러 왔다가 돌아갈 때의 느낌도 그랬다. 내가 섬에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딜 것처럼 싫었지만 방문객인 어머니가 떠날 때면 나는 평온해지기까지 했다. 또 어머니를 기다리리라. 그리고 여기서 계속 혼자 살게 되겠지.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했었다.(78)

기다림혼자라는 의식의 이율배반성이라는 유년의 상처는 현재까지 계속된다. 사랑이라기엔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익숙해진 불행으로 반복되며, 그녀 자신도 타인이 들어와 쉴 수 있는 그늘을 마련하지 못한다. 특히 그녀의 연인들이 그저 남자로 묶일 뿐 개별적인 연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녀의 사랑이 아직도 기다림혼자되고 싶다는 의식사이에서 진동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존재로서의 연인이기에 그저 남자라는 그 이상일 수 없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라는 의식의 공간을 통해 과거로 가득찬 미래가 반복되고, 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되풀이한다. 치료로써의 연애는 그녀를 점점 더 병들게 하고 타인과의 소통 불가능만 확인할 뿐이다. 섬은 그러한 상태로 찾아드는 퇴행의 공간이다.

<한 착한 남자의 불행>은 가족성원들 모두 서로에게서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하게 외로운. 이 같은 소통 불가능한 관계는 그가 병든 어머니에게 독백처럼 쏟아내는 말들과 전화 자동응답기 그리고 경아의 독백이 그것이다. 마치 희곡을 연상시키듯 어머니에 대한 독백이 중심을 이루는 점도 소통 불가능한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어머니 시신 앞에서의 정사는 다소 위악적인 제스처로 이해될 수 있는 어머니 넘어서기의 한 형태이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의 밥을 먹고 곁에 눕고 싶어서인 동시에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외적인 소통 가능성이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을 때, 그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모태 회귀거나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또다른 자궁을 꿈꾸는 것이다. 그곳에 마지막 정사가 위치한다.

<펄프 픽션>을 연상시키는 구조의 <담뱃가게 이야기>는 각각의 인물을 일정한 거리에서 훑고 지나간 뒤, 그것을 마지막으로 종합하기 전까지 독자들의 자의적인 종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경우 장순호와 장미래의 사랑이 죽음을 통한 부재 증명으로써 불멸하려는 시도였다면 그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에 사랑을 통해 그것을 건너려는 작가의 시도는 그것이 비록 죽음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못할지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소통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최종적인 형태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일상과 환각이 교직 되는 탓에 전통적인 독법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 소설집이 낯설 것이다. 낯선 만큼 그것이 흔들고 가는 정서적 파장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늘 아무일 없이 평화롭게 반복되는 일상의 배후에 전혀 소통되지 못하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단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신세대 소설가들의 일반적 폐단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현실이 휘발된 세계의 공소함이라든가, 인과성이나 재현성을 포기하고 헤매는 모험의 유효성 여부라든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과연 현실을 충실히 견제하고 있는가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청호의 작업은 소중하다. 끊임없이 시도되는 그의 소설적인 실험은 분명 서사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회의한다. 이것은 자신이 보고 말하는 것의 확실성을 지속적으로 회의함으로써 자신의 그것이 또다른 견고한 폭력이 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기장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가 열어 가는 극적 서사의 도입이나 시간의 해체 그리고 소설과 현실의 경계 허물기 등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1999) 

1999년은 등단하고 난 다음 해다. 맹목적인 의욕에 넘쳐 마구 읽고 거칩없이 지르던 시기다. 3권의 신작 소설의 서평을 외뢰받아 쓴 것인데, 지금보니 무모한 의욕만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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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을 넘어서는 차이의 황홀한 相關

이상호, 웅덩이를 파다, (모아드림, 2001)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강사)

 

사람들은 제 각각의 속도’(速度)를 가졌다. 그것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속력’(速力)과는 다르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속도의 주체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의 시간에 일방적으로 휩쓸려 달려야하는 근대적 시간관은 직선적이며 따라서 속도보다는 속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직선적인 운동 안에서는 세계의 현기증 나는 속력이 주체의 속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일체의 사물들을 지우며 끝 모를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이와 같은 롤러코스터로부터 내려설 수 있는 방법은 서정적(抒情的) 세계인식이 아닐까?


서정적 세계인식은 주체와 타자간의 역동적인 대화를 전제로 한다. 대화는 발화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체와 타자가 활발하게 자리를 바꾸며, 그러한 자리바꿈의 결과가 동화(同化). 그것은 주체가 타자를 일방적으로 동화시킨다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일방적인 동화의 경우, 결국 주체로 수렴되는 탓에 동화 과정이 지니는 역동적인 힘을 거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동적 대화과정을 동화라고 할 때, 그것은 주체가 타자로 스미는 과정이며 동시에 타자를 빨아올리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동화는 양자를 동일성의 도그마로 묶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자의 차이성을 드러냄으로써 복수성(複數性)과 타자성(他者性)을 긍정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상호의 다섯 번째 시집 웅덩이를 파다는 매우 소중하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金環蝕, 그림자도 버리고, 시간의 자궁 속, 그리운 아버지로 이어지는 그의 시력(詩歷)에서 삶의 상처와 고통을 긍정과 조화의 눈으로 담아내는 따듯한 구도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작업의 연장선에서 볼 때도 이번 시집은 소중하다.

하지만 보다 소중한 것은 이번 시집이 1) 양가성(Ambivalenz)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고, 2) ‘구별을 넘어서는 차이의 상관망을 구성하고 있으며, 3) 이것을 일상의 곳곳에서 찾아냄으로써 성찰적 인식을 일구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페터 지마의 양가성에 대한 해석을 빌지 않더라도, 양가성은 결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가치들이 동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질과 양, 강한 것과 약한 것,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 선과 악이 결합될 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이와 같은 대립쌍들은 사실 대립적인 측면보다는 상관(相關)’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에, 양자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도 있는 양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이분법적인 구별을 무화(無化)시키고 상호 주체적 상관망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오르는 길 내내 

아래로만 내닫는 물소리가 들린다 


 내려가는 것이 오르는 길이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내려가는 물 


물길 끊어진 곳에 솟아오른 

한 채의 소슬한 

적막

<古刹> 전문(원문자 인용자)

 

연에서 주체의 오르는 길아래로 내닫는 물의 대립과 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르는 서정적 자아내려가는 물이 상동적(相同的)으로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발화의 중심이 서정적 자아()에서 내려가는 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연과 연에서 발화 주체가 전이됨으로써 상호 주체적 상관망이 형성되고 그 속에서 화자의 복수성타자성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다성성(多聲性)의 공간에서 연의 소슬한 적막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소슬한 적막연과 연의 상이한 발화 주체들의 구별이 에서 사라져 버림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이 말은 소슬한 적막속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구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주체적 관계의 네트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에서 의 관계나, 하루살이에서 하루살이웅덩이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루살이들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날개로

잘게 허공을 끊으며

올라간다 

검은 웅덩이가 멀거니 

그들의 기나긴 일생의 

하루를 

들여다보고 있다.

<하루살이>부분

 

에서는 허공을 잘게 끊는 하루살이와 그렇게 그의 전 생애인 하루를 수없이 사는서정적 자아, 그리고 에서 하루살이를 바라보는 검은 웅덩이와 그것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의 상관이 흥미롭다. 이와 같은 상관 속에서 주체와 타자의 자리바꿈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그러한 자리바꿈을 통해 인위적인 분별이나 구분이 아니라 제 각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배제와 차별이라는 동일성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며, <다람쥐>에서처럼 자기 반어적, 자기 반성적 인식에 이르기 위한 시도다.

그렇다면 왜 지금 여기서 차이가 문제인가? 그것은 과잉 소모되는 욕망의 <뚱뚱한 몸>이거나 욕망의 질주로 인해 제 속도를 상실한 <칠월의 코스모스>이거나, 빌딩만 발기하는 <테헤란로>이거나, 가망 없는 희망들로 즐비한 <희망백화점>이 바로 지금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차이의 상관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1. 내가 일어나 새벽 신문을 보기 시작하는 시각에

비로소 

아들은 인터넷을 

닫고 잠자리에 들기 시작한다


2. 흰색물감으로 머리에 한껏 멋을 부린 아들의 

부드러운 손이 

반백의 내 머리에 흑갈색 물을 들여주고 있다.

<세대차이> 전문

 

1에서 자칫 불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깨어나고 / 잠들고’, ‘신문 / 인터넷등의 아버지와 아들의 어긋남이 단지 차이이거나 다름에 불과하다고 2에서 장면 하나로 처리하고 있다. 반백의 아버지를 흑갈색으로 염색하여 아버지의 세월을 지워주는, 검은머리를 흰색으로 물들인 아들의 부드러운 손.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살아온 시간과 아들이 살아온 시간만큼의 차이를, 부자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만큼의 이해로 서로 다름을 인정해주는 화해의 모습인 것이다. 세대차이는 감옥의 안과 밖처럼, 단절이거나 소외일 수 없고 오히려 서로의 욕망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인정해줌으로써 차이나는 시간만큼 서로를 긍정하려는 노력이며, 이것이 차이가 지니는 역동적인 긍정과 조화의 힘인 것이다.

 

가둬도  

가둬도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 


울어도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강물처럼 


싱싱한 

금빛 사랑 

한 접시 


그대와 나의 

경계를 

지우는 


닳지 않는 

고무 지우개 

하나

<가락지> 전문

 

차이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긍정과 조화의 힘은 결국 그대와 나의 / 경계를 지우는데 모아질 것이며, 그것은 가둘 수 없는 자유로움과 강물 같은 부단한 역동의 싱싱한 금빛 사랑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 그대와 나의 경계를 / 지우는일이 그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만약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가락지는 무슨 소용이겠는가? 오히려 경계를 지우는 행위는 주체와 타자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상관으로 읽어야할 것이다. 바로 그 황홀한 상관 속에서 서정의 역동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동화(同化)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집은 이상호의 속도를 읽게 해 준다. 섣부른 속력으로 현혹하려들지 않고, 어설픈 가속으로 소음을 만들지 않는 그의 행보. 그의 걸음마다 지워지는 경계와 차이가 빚어내는 황홀한 상관. 다시 한번 기대는 늘 새롭다.(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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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은 황우석이 아니다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황우석은 이제 황우석이 아니다. 줄기세포 선도연구자로서의 황우석은 이미 개인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배아 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거친 레토릭이 가능하다면, 이미 황우석은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담론으로 등장한 것이다.

우린 먼저 황우석 교수의 업적을 세계 최고나 생명공학의 선도 기술이라는 식의 발표에 눈이 멀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파악이나 성격에 대한 고민 없이 막연한 기대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고 진지하게 성찰해야한다. 사실 우리는 성체줄기세포와 배아줄기세포의 차이를 구분하거나 그 연구의 내용을 조금 더 알려는 노력보다 그 연구의 경제적 효과는 얼마나 되는지, 당장 모든 난치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인지, 심지어 황우석 교수가 노벨상을 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따위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를 통한 줄기세포 연구는 그 가시적 성과나 향후 그것을 활용한 기대만큼이나 생명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깊이를 확보해야하는 시점에 다다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루에 41백 명, 1년에 150만 명의 낙태가 행해지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배아줄기 세포를 가지고 생명이냐 아니냐고 논쟁하는 것은 서글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의 낙태문제에 대하여 그동안 종교계가 보여 왔던 원칙적이지만 소극적인 대응에 비하여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단호한 태도에 당혹스런 의아함을 감추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생명윤리에 대한 논의가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서글픈 아이러니나 당혹스런 의아함 따위야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적으로 배양된 줄기세포가 자궁에 착상돼 인간이 될 확률은 없어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인간복제는 구분돼야 한다는 황우석 교수의 주장이나 사람의 생명은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순간부터이기 때문에 인간 생명체인 배아를 복제하여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단언하는 종교계의 주장은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이 없다. 환자의 골수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하기 때문에 생명윤리와 상관없는 성체줄기세포 방식을 선택해야한다는 주장이나, 성체줄기세포 방식은 수명도 짧고 분화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치료에 한계가 있으므로 배아줄기세포 방식을 택해야한다는 주장도 모두 납득할만한 것들이다.

어설프게 황희 정승의 흉내를 내자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주장들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제부터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단호한 주장만 있고 상대 논리가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닫아버린 논쟁이 아니라 상대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를 기반으로 엄정한 논리와 논거를 통한 설득의 노력이 지금은 필요한 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우석 교수와 종교계 인사가 만났듯이 과학과 종교, 과학과 윤리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서 만나고 토론해야한다. 과학이든 종교든 윤리든 간에 모두 인간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만나야할 이유임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르지 않다면 만나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만나서 격론을 벌여야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소망한다, 이번 논쟁이 보다 격렬하게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그것의 격렬할수록 생명 윤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깊이 있는 천착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이 오래 지속될수록 논쟁의 내용은 인간다움에 무게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명 윤리가 그 존엄성과 상관된 것이라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는 신의 몫이자 우리 인류 공동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생존을 넘어서 인간다운 품위와 자존을 만들어가는 노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소망한다, 배아줄기세포의 연구와 같이 우리의 존귀함을 깨닫고 지켜갈 수 있는 의식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시작될 수 있기를. 아울러 황우석이 황우석만이 아닌 것처럼, 생명은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다움은 실체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찾고 가꾸고 지켜가려는 노력이라는 것은 이번 논쟁이 결과하기를.

한화한화인2005.6

이 글이 쓰여지고 불과 몇달 뒤에 황우석 사태가 벌어진다. 생명윤리 이전에 연구윤리에 대한 검증이 우선이었다. 급한 신화화를 검증하고 되묻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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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근성, 관심과 열정의 다른 이름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우리 사회의 문제로 냄비근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각종 정관계 비리나 사회 부조리 심지어 축구의 승패 등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어떠한 이견도 용납하지 않고 몰아대며 들끓어대는 여론이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현상을 냄비의 쉽게 끓고 쉽게 식어버리는 속성에 비유해 꼬집는 말이다. 들어보면 틀리지 않은 말 같다. 분명 우리 사회는 냄비처럼 쉽게 끓고 쉽게 식어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특성으로 은근과 끈기냄비근성이라는 상반된 속성의 말을 함께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패러독스로서 전자나 후자 어느 것도 주도적인 속성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일반적으로 전자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를 경계의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할 때, 우리 사회가 은근과 끈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냄비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효율성의 이름으로 도입된 조리 기구일 뿐이다. 근성이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굳이 그러한 근성이 있다면 냄비 근성보다는 오히려 가마솥 근성이라고 해야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백보 양보해서 냄비근성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과연 버려야할 부끄러운 우리의 근성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또는 다양한 것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과 관심의 발로로 볼 수는 없는가? 쉽게 끓기 위해서는 끓기 위한 준비가 되어야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의 다른 이름이다. 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는데 끓어오를 수 없는 까닭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학생운동이라고 한다.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대한 관심을 접어버린 일본의 대학사회와 비교해 볼 때, 사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뜨거운 한국의 대학가는 살아 있고, 대학의 청년정신이 살아있는 한 한국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과 열정이 어디 대학가뿐이겠는가? 아울러 쉽게 식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관심과 참여가 일회적이고 산발적이어서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될 때인데, 과연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끝임 없이 등장하는 사회적 이슈에 우리가 빠짐없이 관심과 집중을 보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그것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것과 선택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것일 때에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관심은 냄비근성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참여와 열정의 에너지를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어떻게 긍정적 에너지로 바꿀 것인가로 수렴되어야만 한다. 아무 이유 없이 냄비만 달구었다 식혔다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냄비를 달구기 전에 무엇을 위해 냄비를 달구어야 하는지, 냄비는 어떻게 달구는 것이 가장 생산적인 것인지, 냄비를 식히는 시기와 방법을 조절할 수는 없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냄비에 끓일 때 맛있는 음식과 솥에 끓일 때 맛있는 음식 정도는 구별하는 지혜도 더불어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는 냄비가 아니라 컵라면 용기처럼 즉시 끓일 수 있는 것들이 선호되기도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끓이고 식는 속도에 의한 가치의 우열 판단이 아니라 그 각각의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는 점이며,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냄비근성이라는 말에 움츠리지 말자. 그렇게 빨리 끓을 수 있는 것은 얇게 만들 수 있는 준비가 있었고 스스로 뜨겁게 달굴 수 있는 관심과 열정이 있어서가 아닌가? 모든 음식이 은근하게 끓고 천천히 식어야지만 맛있는 것은 아니다. 냄비는 냄비로서 족하다. 땜장이 아저씨가 솜씨 좋게 때워 놓은 낡은 양은냄비에 푸짐하게 끓여 먹는 라면을 나는 좋아한다. 인스턴트 라면은 가장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달굴 수 있고 식힐 수 있는 냄비가 제격이다. 그것은 곰탕을 끓이기 위해서는 가마솥이 제격인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은 집에 가서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잔뜩 끓여 냄비 채 놓고 식구들과 나누어 먹어야겠다.

한화한화인, 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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