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야 하는데 놀 줄은 모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놀고 싶다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놀 시간과 놀 수 있는 경제적 여건 그리고 마음의 여유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어도 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위해 논다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대부분 놀기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시기를 이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일과 놀이는 아무래도 하나가 되기는 무척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놀고 싶어 합니다.

오월이 아름다운 것은 대학의 축제가 있기 때문이라던가요. 하지만 정작 축제가 끝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재미없었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한 학생이 정치적 이슈가 있었던 1980년대 축제는 멋지지 않았냐고 제게 묻습니다. 축제를 마친 다음 날이면 소방호스로 캠퍼스 곳곳에 하얀 버짐처럼 떨어져 있는 최루탄 가루를 치우던 관리 아저씨의 모습이 문득 떠올리며,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그 시절에 그 경직된 축제문화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축제를 폐지하고 대동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 무렵), 1970년대 축제에는 낭만이 있었느니, 퇴폐적이었느니 운운했을 것입니다. 설사 지나간 시절의 축제가 재미있었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내가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난 요즘 오빠의 노트북이 되고 싶어!”

아내의 이 한마디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휴일도 없이 몇 개월째 계속되는 제 강행군은 아이들은 물론 아내에게서도 멀리 나와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주년 되는 결혼기념일에도 춘천에서 학회 발표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급한 일들만 마무리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평창에 다녀왔습니다. 새로 지어진 팬션은 세련되고 깔끔했습니다. 허브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아버님과 소주를 마시고 아내와는 맥주를 마시는 동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 다녔습니다. 다음날에는 봉평장 구경을 하고 속초 대포 항까지 다녀왔습니다. 23일 동안 분주하게 차를 몰아댄 것은 사실 갑자기 주어진 그 시간 동안 함께할 프로그램이 딱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70이 넘으신 부모님과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두 딸 아이, 그리고 아내와 제가 함께 공유할만한 놀이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냥 푹 쉬면 될 거 아니냐고 물으시겠지만, 문제는 무엇을 하며 쉬느냐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고민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이웃 팬션의 사람들도 무척 분주해보였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차릴 수 없이 분주하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을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대로 노는 일의 중심에는 물론 우리 자신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노는 것도 평소에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은 좀처럼 가볍게 즐길 수 없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취향과 시간적경제적 여유에 적합한 놀이를 찾아보고,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굳이 전문가들에게서 배우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죠. 자전거를 배우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탈 수가 없습니다. 자전거 타는 즐거움은 자전거를 배우는 즐거움과 배운 이후에 그것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다 포함하는 말이겠죠.

이와 같이 놀 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낯부끄러운 향락적인 밤 문화는 많이 사라지겠죠. 그것이 꼭 고급한 놀이 문화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부부가 함께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 전시회에 다니는 일도 좋지만 취향에 따라서 같이 바둑을 둔다거나 요즘 인기 있는 영화를 노부부가 두 손 꼭 쥐고 함께 본다면 어떨까요? 자식들 이야기 하며 친구 부부들과 포커 한판은 어떨까요? 물론 보다 우아하고 의미 있는 놀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저는 이정도로도 만족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 분주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만큼 놀이의 강도와 만족도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겠죠. 그렇다면 쉰다거나 노는 일 자체에 감사해하는 지금과는 달리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만할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만나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놀만한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2003오픈아이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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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와 소주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요일 아침 아내는 좀처럼 잠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녀석을 깨워서 씻기고 입히고 먹여서 내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인지, 아침에 나갔다가 늦은 밤을 데리고 들어오는 제가 모처럼 집에 있는 날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아내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내가 일어나지 않아도 허기는 아이들을 깨우고, 깬 아이들은 저를 깨웁니다. 제가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이라고 우기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만화채널을 넘나들며 애니메이션을 봅니다. 벌써 소파에는 녀석들이 먹었음직한 과자 봉지와 첫째가 제 목숨처럼 아끼는 스티커 북이 멋모르고 제 언니를 따라하는 둘째의 스티커 북과 함께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을 치우는 동안 짜파게티 끓일 물이 끓을 때쯤 햇살은 벌써 소파에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이 먹는 짜파게티 만큼이나 저는 녀석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 불만입니다.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이 거침없이 반복되는 그것들을 그만 보게 하고 싶은데, 늘 잠의 유혹은 아버지의 의무보다 달콤합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섰던 제가 아이들의 애니메이션에 불만을 갖는 것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편향성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일본 코믹물이 대부분인데, 그것들의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을 아이들은 이내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TV에 나오는 내용을 아이들을 보고 따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아이들의 모방을 보면서 그런 걱정은 지나쳐도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녀석들에게 이런 애니메이션 말고 다른 채널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줄라치면 녀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둘째의 울음에 저는 대책이 없습니다. 둘째를 달래기 위해 TV에 피코를 연결해주고, 첫째의 컴퓨터 오락을 묵인해줍니다. SEGA에서 개발한 것을 삼성이 수입 판매한 피코는 원래 첫째의 것인데, 늘 그렇듯 첫째의 것은 둘째의 것입니다. 싱가폴 사는 제 이모가 가져다 준 일제 컴퓨터 게임CD는 첫째의 보물입니다. 두 녀석은 각자의 보물과 꽤 오래 같이 놉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지루해지면 녀석들은 제게 달고나를 해 달라고 조릅니다. 할인매장에서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구입해온 달고나 세트는 아이들의 일요일 군입거리입니다. 어설프게 눌러준 뽑기를 손에 들고 이제부터 자신들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 것이냐고 다그치듯이 쳐다보면 저는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이들과 PS2 게임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열에 두세 번은 PS2를 설치합니다. PS2게임은 아이들이 어리고, 저도 할줄 아는 게임이 많지 않아서 간단한 철권을 함께합니다. 한글화 되어있지만 음성은 일본어로 나오는 철권을 하다보면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저 사람들은 왜 싸워?” 게임의 스토리를 설명하려다가 그만둡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이들의 자전거를 가지고 집근처 공원에 갑니다. 둘째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고 어리광이 심해서 세발자전거 앞에 끈을 묶어 끌고 가는 경우 많습니다. 물론 더 심하면 아이를 업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시간 쯤 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은 저를 문방구로 데리고 갑니다. 스티커 몇 장을 사달라는 거지요. 국적불명의 캐릭터들의 스티커를 사주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주면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어줍니다. 배가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두툼해진 아이들의 스티커 북에는 일요일마다 새로운 스티커 캐릭터들이 붙습니다.

올해 전면 개방된 일본문화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몇몇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일본문화가 아니라 일본문화콘텐츠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오신 은사님께서 일본인들이 소주를 술집에 keeping해 두고 마시며, 심지어 소주에 얼음을 타서 마신다며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함께 웃으며 소주를 마시다가 보아를 떠올렸습니다. 소주는 어떻게 마시든 한국식이라는 이름이 붙겠지만 보아가 부르는 노래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한류는 있지만 한국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일본문화의 유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문화의 일본 진출은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어떻게 수출할 것이냐가 아닐까요? 또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정체성에 대한 실체적 탐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아이들은 스티커 북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아내는 어느새 피코와 PS2를 치운 모양입니다. 제 서재에는 이번 논문의 테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몬스터 주식회사>, <치킨 런> 등의 CD가 놓여 있습니다. 분석한 메모들도 아내가 정리한 모양입니다. 니콘 디지털 카메라나 도시바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듯, 보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일본에서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문화코드에 열광하느냐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해봅니다. 아이들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봄의 나른한 햇살은 이제 거실 끝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아내는 이제 저녁을 지을 모양입니다. 저는 다시 애니메이션 CD를 노트북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2003오픈아이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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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넌 대장금이 되지 말거라.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난 설에 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인 처남네 아이들이 세배를 와서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나라 오나라……아내와 저는 신기해서 웃고, 장모님은 대견해서 웃고, 큰딸은 부러워서 웃고, 작은딸은 우리가 모두 웃으니까 웃었습니다. 인터넷에 가사를 다운 받아서 고모네 가서 들려준다고 며칠 연습을 했답니다. 물론 처남네 아이들이 이틀 간 머무는 사이에 두 딸들도 그 노래를 배웠고, 할아버지 생신날 멋지게 불렀지요.

<대장금>의 인기를 설명하는 것은 구구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장금>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효한 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대장금>은 드라마의 작품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콘텐츠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실현한 대표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대장금>의 인기는 캐릭터와 공간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캐릭터를 구현하는 곳이 공간적 배경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지요. 수라간과 내의원이라는 공간 설정은 음식건강이라는 코드로 요약이 되며, 이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관심이 가장 많이 모이는 것들입니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시식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요리 프로에서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이야기 속에서 구현된 것은 흔치 않은 일로 무척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의술은 <허준> 등을 통해 이미 대중성을 인정받았던 분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음식은 경쟁의 형태로, 의술은 생사의 절박함으로 등장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두 소재는 콘텐츠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면, <대장금>은 그것의 인기보다는 성공한 캐릭터나 독창적인 캐릭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히 읽어봅시다.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하는 여성입니다. 섬세한 시청자라면 장금이를 보면서 <허준>의 예진아씨와 <인어공주>의 아리영, 그리고 <다모>의 채옥을 쉽게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진 아씨의 탁월한 의술과 지고한 정신적 사랑, 아리영의 다재다능함과 복수를 위한 당찬 의지, 채옥의 빼어난 무술실력과 주체적인 삶의 의지 등을 모두 조합하면 장금이가 탄생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이루어내면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어머니와 스승의 한까지 풀어내는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하는 여성형 아니 인간형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옳은 탓에 그릅니다. 옳은 이유는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한다는 것이고, 그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인물이 아니며 이 시대의 고민을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장금이는 자기 시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 평생 궁녀로 살아야하는지, 어머니와 스승을 죽음으로 내모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 부조리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따위는 그녀의 관심이 아닙니다. 극의 후반부에서 장금이가 내의원의 안락함이나 권위를 버리고 백성들 사이의 의원으로 남고자 하는 것 등을 통해서 이러한 한계를 해소하려하지만, 그것이 갈등의 현장인 대궐을 벗어남으로써 이루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여기서 좀더 나가면 그녀를 욕망하는 이 시대의 문제가 남게 됩니다. ‘에 대한 선망,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기 처지에 대한 두려움, 평범함을 넘어서고 싶은 보상심리 등이 장금이를 그려내고 있지만, 우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은 짱 신드롬이 철저한 배제의 원리로 운용이 되며, 우린 대부분 포함이 아닌 배제되는 쪽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장금이를 통해서 두려움을 넘어서고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우리의 심리적 이행은 현실이 누락된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장금이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은 모두 장금이의 성공담을 위한 배경적 캐릭터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한상궁은 인기는 얻었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는 얻지 못했고, 같은 이유로 금영은 최상궁의 캐릭터와 다르지 않으며, 민정호는 중종과 변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장금이의 캐릭터도 예진아씨와 아리영 그리고 채옥을 더한 후에 채옥의 무술만 제외하면 만들어지는 캐릭터로서 아니던가요. 문제는 장금이가 이들 캐릭터의 섞어찌개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한계를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체적인 여성 같지만 여성스러움이나 남성종속적인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고, 주체적인 자기 삶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 기획되었던 부분까지는 어머니와 스승의 복수담을 넘어서지 못했고, 이후에 주체적이 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은 극적 긴장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 등이 그 증거지요.

<대장금>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장금이처럼 되고 싶냐고.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다섯 살 둘째야 물정 모르는 녀석이고, 첫째는 장금이 처럼은 싫고 의사선생님은 되고 싶다며 아비의 염려를 피해갑니다. 그래 그러렴. 염려 많은 아비는 바랍니다. 아이가 장금이 처럼 살지 않기를. 그것은 장금이의 삶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녀의 삶을 살지 못했고 자기 시대를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릴 수 있다면 삶이 고단한들 뭐 그리 대수이겠느냐고. 하지만 끝내 마지막 말은 하지 못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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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살면 다냐?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비 오는 날에는 자장면이 먹고 싶다던 시인이 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며 야간학교 국어교사를 했던 그분이 끼니를 놓치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허겁지겁 비워내던 한 그릇의 자장면에는 고단한 일상이 자장이 되고 면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한 주 용돈이 5000원이던 대학시절,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했죠. 토요일에 강의가 없는 것은 순전히 제 용돈이 그 하루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기던 시절이었지요. 학교 앞 시장에서 500원짜리 국수를 사 먹고 나머지 돈으로 사서 읽던 시집들. 그것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읽다보면 어느새 암송할 수 있게 되면 술자리에서 약간의 취기를 가장해서 암송하던 치기어린 시절이었지요. 자취하던 녀석에게 집에 김치 한 포기 가져다주고 그것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던 그 시절을 전 가끔 풍요의 시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을 요즘 웰빙(well-being)이라고 부르지요. 그것이 꼭 유기농 채소를 먹거나 휘트니스 클럽에서 달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한 삶이 품목들을 채워가며 자신의 사람값을 높이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사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사람값을 제대로 못 받고 살고 있다는 뜻이겠죠. 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사람값의 맨 마지막 항목이라는 것이죠.

하루는 선배 교수님이 아침에 욕실에 들어 간 초등학교 3학년 딸이 나오지를 않아 욕실을 열어보니 딸아이가 울고 있더랍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아이를 달래고 보니 아이가 세면대를 잡고 그러더랍니다. “아빠 사는 게 힘들어!”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웃다가 모두들 말없이 쓴 소주만 거칠게 비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겝니다. 강의를 마치고 출판사에 들려서 회의하고 자정이 다돼서 집으로 들어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창고의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결국 차를 갓길에 세웠던 것이……. 만만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만만하면 삶은 또 뭐 그리 살만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잘 사는 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자고 우린 필사적입니다. 요리 프로그램도 전에는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전부 맛집이나 맛난 요리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입니다. 입고 먹고 사는 곳에 힘을 모으다보니 정작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지 따위에는 좀처럼 생각을 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한없이 비대해지고, 비대해진 욕망만큼 결핍을 낳게 되고, 결핍은 다시 욕망을 낳는 악순환에 치여서 생각하고 의미를 만들어갈 우리 삶의 몫들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영양실조고, 17%는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협박조의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 먹고 잘 사는 일은 항상 주변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유기농 농산물을 먹고 비만해진 몸을 팻다운을 먹고 운동을 하며 줄여가는 것은 마치 로마인들이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먹고 토했다던 그 야만을 지금 이곳에서 되풀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인들이 그런 도락을 즐기는 동안에 뙤약볕에서 땀흘려야했던 노예들이 있었고 굶어죽어 가던 식민지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함께하지 않고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던 로마인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일 수밖에 없었고, 서로가 서로의 천국을 파괴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은 제가 여기서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되겠죠.

웰빙은 단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무엇을 위해사는 것인지 돌아보고 살피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허겁지겁 때늦은 자장면을 먹던 시인이 먹었던 것이 어디 면과 자장만이 아니었듯이, 점심과 바꾼 것이 시집만은 아니듯이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것이 유기농 채소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염된 채소라도 웃으며 함께 나눌 사람들, 그들과 함께 채워 가야할 우리 삶의 시간들, 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갈 의지와 소양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따듯한 사랑이 우리가 우리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웰빙의 조건들이 아닐까요?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아이에게 손톱이 퍼렇게 알로에 껍질을 까서 강판에 갈아서 밤새 문질러줬다는 선배나 가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밤새 자신의 침을 발라주었다는 친척형님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배워가는 요즘입니다. 봄이 익어갈수록 꽃이 흐드러집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색깔이나 향 때문이 아니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 봄 안에 있어 행복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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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와 염색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저는 향수를 좋아합니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보니 늘 아침이 분주한 제게 스킨을 바르고 타이 뒤나 손목에 가볍게 향수를 뿌리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차 안에서 아침에 뿌린 향을 느끼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가끔씩 향이 좋다고 아는 척이라도 해주는 동료들이 있으면 내심 반가워합니다.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전에는 거리에서 좋은 향을 맡으면 누구든 따라가서 그 향과 향수의 이름을 묻곤 했으니 약간 병적이라고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 버버리 여름용 여자향수의 달큰함과 샤넬 넘버5의 강렬한 유혹 그리고 아라미스의 상큼한 아침도 그 무렵 제가 좋아하던 녀석들이죠. 아내는 간혹 제가 욕실에서 뿌린 향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요즘 강의실에서 이채로운 것은 남학생의 염색과 귀걸이입니다. 남학생의 1/3정도가 귀걸이를 했고, 3/4정도는 염색을 했으니 이제 사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요.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핑콜퍼머 정도가 가장 멋을 부린다고 부리던 것이고 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나마 그거라도 하고 온 녀석들은 교수님께 한 소리 듣거나 동료들의 놀림을 감내해야했습니다. 사실 귀걸이를 멋스럽게 하고 고은 색의 염색은 제가 봐도 멋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도 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언젠가는 하얀색 브릿지와 귀걸이를 해보겠노라고 농담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긴 이제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브릿지에 돈 들릴 일을 없을 것 같고, 사회적 지탄이 없다하더라도 겁이 많은 제가 귀를 어떻게 뚫겠습니까.

1학년 교양 강의에서 강조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자기를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염색이면 염색을 해봐라. 귀걸이라면 귀걸이를 해라. 담배가 된다면 피워봐라. ,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멋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새내기들의 염색은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습니다. 단체할인을 받으며 한꺼번에 했는지 모두 비슷비슷한 색깔에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흡사한 헤어스타일을 멋스럽게 보기는 좀 어렵죠. 3-4년 전에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스트레이트 퍼머를 해서 앞가르마를 타던 HOT머리를 했고, 1-2년 전에는 배용준의 바람머리가 또 강의실에 넘쳐나곤 했습니다. 자기 얼굴과 상관없이 로봇처럼 똑같은 헤어스타일의 학생들을 강의시간마다 보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불을 질렀던 말콤엑스가 아니더라도, 우린 모두 지금의 자신보다 멋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염색일 수도 있고, 귀걸이를 비롯한 피어싱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저처럼 향수가 될 수도 있겠죠. 문제는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이 19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이어져 오고 있지만 우린 아직도 누드 훔쳐보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몸을 매개로 자신을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보다 멋지게 되기 위한 전제가 지금의 나, 자연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 볼거리입니다.

멋지다는 것을 멋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 멋진 것입니다.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멋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는 제 코가 낮다고 시간 날 때마다 코를 세우듯이 들어오리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또 제 끊어진 눈썹은 어머니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시곤 했습니다. 요즘에는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보면 눈두덩이가 부은 모습이 꼭 12라운드 권투 경기를 마친 것 같아 보여 스스로 ‘12라운드라고 부르며 자조하곤 합니다. 그나마 어디 한군데 번듯한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상 나쁘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코가 저만 낮지 않고, 눈썹이 저만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침에 눈이 붓는 것도 저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두 아이의 약간 부어오른 모습을 보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 어쩔 수 없음으로 수납하는 그 일이 여유를 낳고, 여유는 자기긍정을 낳고, 자기긍정은 즐거움을 낳는다는 사실을 오늘도 배웁니다.

멋스러운 사람은 끊임없이 멋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것이 남들이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몸과 마음에 모두 익어서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멋이 몸에 익은 사람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향수를 가지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그 은은함과 염색약으로서는 낼 수 없는 멋스러운 그 색깔을 치과에서 보철을 하면서도 핑크색으로 해달라던 첫째와 요즘 부쩍 치마를 입겠다고 유치원갈 때마다 우기는 둘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겝니다. “멋은 노력이라고.

2004년 《오픈아이》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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