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장과 토우슈즈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80년대에는 디스코텍을 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놓고 즐기기 힘들었던 1980년대의 대학가에서 나이트클럽에 간다는 사실이 떳떳할 수는 없는 일이다보니, 그러한 겸연쩍음을 닭장이라는 비어로서 상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닭장이라는 말에는 다소의 경멸내지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비극은 이렇게 스스로 닭장이라고 비하하며 그 곳에 가고 싶어 했고, 더 큰 비극은 춤추는 그곳에서 춤추는 일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입니다. 닭장이 아주 친숙한 친구들, 속칭 죽돌이들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화려한 조명과 음악소리에 압도되어 춤을 제대로 출 수 없었고, 사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춤을 제대로 출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닭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십여 명이 원을 만들고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표면적으로야 그 집단의 소속감과 우의를 다지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속내를 들춰보면 잘 추지 못하는 춤을 집단의 힘으로 커버하려는 시도했습니다. 옆에서 밀어 넣으면 못이기는 척하고 원의 중앙에 나가서 춤을 추면, 평소 마음에 있던 남학생이 파트너를 자청하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자신들의 춤이랄 것도 없는 몸짓을 보여주면, 원을 이룬 친구들은 세상에 그보다 나은 춤은 없다는 듯이 환호성을 질러줌으로 해서 서로 어설픔과 무안함을 넘어서곤 했죠.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압제로 인하여 하고 싶던 것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시절, 애마부인이 이유 없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달리던 그 시절, 기본만 내고 들어가면 물 쇼, 불 쇼, 어우동 쇼까지 감상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원을 이루고 군무(群舞)를 추던 20대의 모습들은 매우 아이러니하고 중의적인 슬픈 풍경이었습니다.

요즘 춤이 열풍이랍니다. 학교에서도 축제 전후가 되면 등장하는 댄스 동아리의 역동적인 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태권도와 권투를 에어로빅과 결합시킨 태보(Tae-Bo)에서부터 매력적인 자극인 살사댄스 그리고 사교댄스에 이르기까지 댄스의 열풍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열풍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계층이나 특정 연령을 뛰어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고 예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춤은 음지의 문화였죠. 가무악(歌舞樂)이 하나였던 원시종합예술형태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본시 춤은 광장의 문화였습니다. 그것은 좁은 공간에서 혼자서 추는 춤이 없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더불어 함께했던 이것인 음지로 들어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먼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기에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의 춤문화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양공주 문화와 기지촌 문화와 결합하면서 밀실의 문화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60-70년대에 효율성만을 중심으로 한 성과주의로 인해 일과 여가의 기형적인 불균형 구조를 낳았고, 그 결과 술집여자와 나누는 춤, 바람난 여자의 징후 등으로 집중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신문에 심심하면 등장하던 카바레에서 잡혀온 아줌마들 사진과 접대문화 운운하며 등장하던 술집여자와 춤추는 중년들의 하반신 사진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저는 문예극장 대극장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억압된 현실 속에서 춤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변형(deformation)을 꾀하는 젊은이들의 숨소리에서서 해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Shall we dance>가 아니더라도 중년부부가 음악에 맞추어 완급을 조절하며 스텝을 맞추는 모습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그것은 단지 일이 곧 삶이 아니라 일은 삶을 더불어 누리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여유로운 사고, 부부가 함께 하고픈 것을 만들고 실천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 제게 몹시 절실하기 때문만은 아니겠죠. 그런 눈으로 보면 몇 년째 브라운관을 압도하는 댄스그룹의 격렬한 춤사위도 생명의 몸짓으로 넉넉하게 볼 수 있습니다. 때론 몸은 따르지 않아도 따라하는(유승준의 가위춤까지는 각이 나왔는데) 제 모습을 보며 웃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도 춤이 주는 또 다른 혜택이라면 지나칠까요?

둘째가 식탁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종아리를 모아 세웠다 풀었다 합니다. 이웃집 아이가 입었다는 발레복이 탐이 나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넉넉하게 보아주어도 통통한 녀석의 허벅지며 종아리를 보며 녀석의 과욕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춤이 자발적인 생명의 파동이었듯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생명의 움직임이라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여 녀석이 발레복이 입고 싶다면 사주겠지만(제 언니 것이 있죠) 토유슈즈를 신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할 때 격렬하고 때론 우아한 자신만의 춤을 보일 수 있는 40대를 저는 꿈꿉니다.

2004년 《오픈아이》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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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떠한 이유도 죽음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최근 낯선 죽음 경험해야 해야 했습니다. 먼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삶과 죽음의 가파른 경계에 서 있던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던 그의 조국에서는 외교부의 공과를 따지며 준열한 희생양 만들기에 몰두해 있습니다. 저는 자꾸 비관적인 전망을 갖게 됩니다. 나약하고 원칙 없는 정부의 무지하고 무모한 외교 정책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젊은이들은 명분 없는 그 전쟁의 잔혹사에 피를 뿌리게 될 것이고, 만두파동이 고인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되었듯 또 다른 사건 속에서 고인의 이름은 잊혀지게 될 것이라는 이 근거 없는 확신은 저만의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이 참혹한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회의하지 않는 사회, 성찰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그의 죽음은 단지 그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 지켜낼 힘이 사라지면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지독한 현실, 그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따지고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월드컵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백성의 목숨 하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명분 없는 이 추악한 전쟁에 젊은이를 보내려하는, 다른 나라의 초토 위에서 떡고물을 기대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은 개가 물어 가버린 이 처참한 대한민국에서 우린 무엇입니까? 살려달라는 그의 절규를 보고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조치가 도움을 원치 않는 나라에 도움을 주겠다는 그 기만적인 신념을 단호하게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없었는지, 그 발표로 인하여 만에 하나 그가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할 수 없었는지 우린 이제 엄정하게 되물어야할 때입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씨랜드 화재 참사로 숱한 어린 생명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도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지키며 살아가라고! 그렇다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면 백성은 죽으라는 말인지. 스스로 지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아닙니다.

요즘은 학교 급식의 식재료도 믿지 못해서 학부모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영양사가 있고, 선생님들이 관리하고, 식재료 업체의 관리도 있고, 교육부나 식약청 등의 관리도 있는데 왜 부모가 나서야 하는 걸까요? 이러다가는 아이들의 캠프장이나 학교 강의실에까지 부모가 따라다녀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뢰 없이 공동체를 꾸려갈 수 없고, 공동체 의식 없는 국가는 모래 위의 집일 뿐입니다. 공동체 의식의 저 밑바닥에는 서로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그의 생명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 어떤 명분도, 그 어떤 현실적 이익도 생명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이 단지 스크린 위의 스펙터클이나 브라운관 안의 뉴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뼈저리게 배웁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스크린이나 브라운 관 안에 설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브라운 관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칙이 필요하고, 그 원칙은 생명을 가장 우선 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랜섬>에서 멜 깁슨은 아들의 몸값으로 지불할 돈을 유괴범들의 현상금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압박했고, 결국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도 그 짜릿한 결단에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해서는 어떠한 용기나 결단도 도박 그 이상일 수 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생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칙이며 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신뢰를 말하고,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삶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이 바로 생명의 정신입니다. 이라크의 재건과 이라크 국민의 생명을 위해서 파병한다는 정부의 단호한 명분이 기만적으로 들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기만적인 명분으로 우리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라크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기만과 허위가 또 다른 죽음을 부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이 이라크가 부른 마지막 죽음이기를, 하지만 생명을 부른 의미 있는 죽음으로 기록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4년 《오픈아이》>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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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와 천년여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늘 그렇듯 의욕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의욕의 의도가 의심받기 시작하면 이미 의욕은 야욕이나 욕심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서울시내버스 개편의 의욕과 의도 사이에 끼어서 막막한 울분을 삭이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의도처럼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과도한 의욕에 우리가 흥분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익숙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아직까지도 복마전 같은 버스 노선도 앞에서 황망하기만한 것은 오만한 관료의 말처럼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청계천 주변 상권의 붕괴와 노점상들의 막막한 생계 앞에서도 우리에겐 아직 기대가 있었습니다. 21세기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서울시가 변하고 있구나 하는 낙관적인 기대는 기공식 현장의 연막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시장에게 시민인 우리가 최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비관적인 생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버스는 시민의 발입니다. 그것도 넉넉하지 못한 시민들의 발입니다. 7억원이 넘는다는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는 어떤 이의 발이라면 그것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지독한 여지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을, 아니 꼭 알고 있어야만할 시장에게 말해야 합니다. 청계천은 복개했다 복원할 수 있지만 이번 버스 개편으로 입은 시민들의 가슴에 상처는 좀처럼 치유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슴에 상처를 않고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것이 생태도시(문화를 드러낸 청계천이 서울을 얼마나 생태도시로 만들지는 의문이지만)가 가져올 안락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얼마 전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작품을 보는 내내 저는 묘한 흥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끼는 부러움이나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 하나를 남기고 떠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남자의 흔적을 평생 쫓아가는 여자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차라리 상투적이었습니다. 현실과 허구, 실제와 영화가 구분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독특한 연출도 신선하긴 했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격동의 세월과 함께 진행되는 주인공의 삶은 <포레스트 검프><효자동 이발사>에서 보았던 것이니 그것도 저를 압도할만한 것은 아니었겠죠. 제가 압도된 것은 엉뚱하게도 주인공 치요코의 단호한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것은 그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그 유명한 이 작품의 대사가 회한이나 자조의 울림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방식,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체에 대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배워가는 치요코의 모습에서 엉뚱하게도 그렇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면 억지일까요?

중국 장가계에 가면 토가족이란 소수 종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무척이나 즐기고 친절한 이 작은 체구의 소수 종족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결혼 풍습 때문입니다. 토가족의 여인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발등을 은근하게 밟아 자신의 의사를 표시한다고 합니다. 발등을 밟힌 남자는 여자의 집에 찾아가 하루를 자야하는데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새 노래를 불러 예를 차리고 아침에 나와야 한다는 그들의 풍습을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도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여자의 선택과 남자의 선택을 모두 존중해주는 그들의 지혜는 그들이 즐기는 노래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선택은 주임됨을 전제로 합니다. 시간은 참 단호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라서 선택의 여부와 상관없이 잘도 흘러갑니다. 물론 그 시간의 격랑 속에는 늘 어처구니없이 떠밀려가는 우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예산과 불편함을 강요당하면서도 서울시내버스 개편을 개선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했기 때문이겠죠. 시행 전에 다양한 방식과 여러 시행 시기 중에서 최상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겐 없었던 탓입니다. 그래서인지 <천년여우>의 치요코에게서 볼 수 있었던 자기 삶에 대한 단호한 선택과 토가족이 보여주었던 배려를 전제로 한 선택이 우리에게 더욱 아쉬운 것이겠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보셨습니까?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불행히도 이 작품의 경고는 아직 유효하기만 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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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을 참 잘한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신 있고 또렷하게 제 생각을 말하고 다른 이의 동의를 얻어내는 그 과정이 뛰어난 다른 무엇을 갖지 못한 제게는 내세울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죠.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말이 어려워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잘 모르는 이들을 앞에서 말하는 것보다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알기 때문에 말 같은 말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봅니다.

요즘 어록(語錄)이 차고 넘칩니다. 말의 기록인 어록이 넘쳐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말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되고 있다는 말이겠죠. 김제동, 노회찬, 차명석, 한기주, 이신영, 이주일 등등 인터넷에는 날마다 어록의 신화가 이어집니다. 화려한 레토릭, 과도한 진솔함, 저돌과 우회를 두 손에 들고 치는 강렬함, 삼류 철학자의 금언과 같은 단호함,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실됨까지 모든 어록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말의 가치요 무게입니다.

말의 가치는 그것이 지금 이곳의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렸습니다. 노회찬의 말들처럼 현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든, 한기주의 그것처럼 현실과 거리를 두고 낭만적 환상을 만들어내든, 혹은 이주일의 말들처럼 자신이 삶아온 세월을 거르고 걸러 쏟아놓는 말이든 간에 그것은 지금 이곳의 우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수현의 경쾌한 은빛 언어의 화려한 수사와 속도보다는 홍상수의 쓴 소주 같은 비굴한 일상의 말들을 더 좋아합니다. 같은 이유로 <야심만만>에서 기획 상품처럼 쏟아내는 김제동의 개그보다는 <이소라의 음악도시>에 나와 고민 상담을 해주는 그의 거친 일상어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럴듯함으로 가장하고,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교조적인 모습이 아니라 과장과 진솔 사이를 오고가며 빠른 속도로 스스로 균형을 만들어가는 그의 대구사투리를 좋아하는 것이죠.

말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이 말하는 이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고 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는 어처구니없는 대중스타들도 있지만, 우리와 함께 시간을 나누며 늙어갈 스타들은 말을 함으로써 더욱 빛나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그것은 물론 화려한 수사나 훈련된 화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생활의 넓이와 세월의 깊이를 온전히 담아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말의 주인은 내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지금 이곳의 어록에는 내가 없습니다. 다양한 채널과 많은 발언 기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어록을 원하며, 그것은 대부분 다른 이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심과 지향을 상실한 혼돈스런 시대를 내가 아닌 누군가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말을 길잡이로 삼아 건너고 싶은 욕구들의 표현이 어록의 홍수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요?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가 했던 말처럼, 문제는 다른 이의 말이 도움을 될지언정 구원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스스로의 구원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록을 만들어야 합니다. 머리 위에 전등을 붙이고 걷는 광부와 같이 스스로 삶을 데리고 걷는다는 심정으로 멀리 자신을 인도할 자신의 어록들 말입니다.

자신의 어록이 온라인에 있느냐 오프라인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블로그가 되었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되었든 아니면 아날로그 스타일의 노트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 어록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중심이 되고 자기 삶을 견인할 수 있는 지향으로서의 어록을 만들고, 자기 자신이 방문자가 되어 리플을 달아보면 어떨까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소 환자스럽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낯선 우리와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낯선 나와의 조우만큼 스스로를 갱신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저는 말의 주술성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청준의 단편 <예언자>의 주인공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말에는 주술적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어록을 만들어가며 말을 통해 자신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가파르게 몰아보고 때론 곡진하게 위로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린 오늘부터 자기 자신만을 위한 샤먼입니다. 전 저의 말을 믿기로 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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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관절인형은 피노키오가 아닙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와 소통하지만 관절인형은 자신을 입양한 주인과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사랑할 대상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지만 피노키오는 소통을 통해 성장하여 사람이 되지만, 관절인형은 섬뜩한 변하지 않음으로 결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관절인형에 열광하는 마니아의 숫자가 늘고, 구입을 입양이라 부르고, 의상은 물론 머리와 메이크업까지 바꿀 수 있다지만 관절인형은 그저 인형일 뿐입니다. 혹자는 이것은 핵가족 시대 외동들의 형제에 대한 욕망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관절인형에 대한 열광은 소통하고 싶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은 욕망의 드러냄이며, 동시에 현실원칙에 억눌린 자기표현 욕구의 극단화라고 할 때, 그것은 외동들의 자기 사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면 외롭지 않겠지만 그 부대낌이 주는 번잡스러움이 싫다는 것이지요.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할 때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한 존재를 익명의 웹 공간에서 자랑함으로써 외로움을 보상 받으려는 자폐적 자위가 관절인형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죠.

어디 관절 인형뿐이겠습니까? 그것은 <겨울연가>를 위시한 최근 드라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코드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지독한 집착을 사랑이라고 하는 드라마가 차고 넘칩니다. 준상, 유진, 상혁, 채린이 보여주는 일방적인 사랑은 자기집착에 가깝습니다. 사랑이 타자와의 대화적 소통이라고 할 때,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일방적일 뿐 소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년여우>의 치오코가 우아하게 표현했던 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이 자기집착의 다른 표현이라면 억지가 되나요? 그것은 왕가위의 <동사사독>이 소통되었지만 지속될 수 없었던 운명적 사랑의 어긋남과는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자기표현입니다. 요즘 가장 손쉬운 자기표현으로 선택하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 열품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보기만 해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젊은 시간들을 기록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야겠죠. 더구나 보이는 모든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좋겠죠. 턱을 약간 당기고 얼굴을 약간 틀어서 찍으면 자신의 얼굴이 더욱 예쁘게 나온다던 얼짱의 인터뷰가 당당하게만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그 솔직함과 당당함이 별로 믿지 않습니다.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해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테고, 남기고 싶은 것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그만큼 멋진 자신의 모습을 많이 발견한 것일 테니 허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그것을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싸이 미니 홈피에 올려서 보여주고 있으니 그 무모한 자신감의 기저에는 자기에 대한 거침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으로 주로 드러나는 자기에 대한 사랑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그러한 의지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 하고,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가꾸게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기사랑의 온전한 모습이냐에 달린 것이겠죠. 나는 너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타자에 대한 인식 없이 나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너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은 곧 타자에 대한 사랑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누락된 자기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욕심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안타가운 것은 요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욕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로 인해 자기에 대한 사랑이 데려올 수 있는 자기 삶에 대한 멋진 연출이나 진지한 성찰 따위의 열매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금 이곳에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더욱 멋지게 자신을 사랑하자고. 하지만 타자와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는 자기에 대한 사랑은 자기집착일 뿐이라고. 그것을 넘어서야만 관절인형에 대한 나의 사랑이 자폐적 자위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저는 요즘 운동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2004년 《오픈아이》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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